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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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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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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은혜롭게 찬양해야겠지?”
지난 주 주일날 어느 집사님께서 문득 제게 던지신 말씀입니다. 직접 언급은 안 하셨더라도 ‘그래도’ 앞에는 매우 많은 말들이 붙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몇 자 적어봅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금 신상을 향해 절을 안 하면 풀무불 가운데에 넣겠다고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건져내실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신상에 절을 하지 않겠다고 담대하게 말을 합니다. (단 3:14~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가 개정개역판에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로 되어 있으며, 위에서의 ‘그래도’는 ‘그리 하실찌라도’ 즉 ‘그렇게 하실지라도’가 되겠습니다. 역접과 순접 차이는 있겠으나 이 또한 같은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 안과 밖에서 어려움이 따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자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합니다. 간혹 성전 안에서 자신의 임의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으로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섬겼던 한 작은 교회에서는, 전체 성도가 50명 가량도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위에 오르기 위해 주도권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50명 중에서 정상으로 가보아야 밑으로는 4,900명도 아니요 490명도 아닌 불과 49명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분명 성경에는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기록되어있는데도 (사 56:7)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역설적이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 중에서 칭찬을 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교회 한 곳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6)
또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2~23)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교회는 곧 그의 몸이라고 기록합니다.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욥28:24), 교회를 도외시하실 리가 없으시겠지요.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그 어려움 앞에서 ‘그래도’, ‘그리 하실찌라도’ 하나님의 지체로서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곧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역시 ‘그래도’ 은혜롭게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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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8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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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생이 쉬는 시간에 문득 제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좌우명이 뭐예요?”
평소에 이런 질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살았다면 제법 괜찮은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줄 수 있었겠지만, 막상 ‘내 좌우명’이라고 하니 그럴싸한 말들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순간적으로 구체적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아는 분들을 만났을 때 놀라운 일을 들었습니다. 지인 중 두 사람은 구속되고 한 사람은 행방불명이라더군요. 물론 저도 그 분들을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셋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와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하여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일도 많았으나 구속도 되지 않고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후미진 곳을 찾아 다닌 적도 없으니, 정말 감사함이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0~14)”
많은 설교말씀과 더불어 ‘감사’는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덕목이라 여겨왔으며, 여기서도 바리새인은 분명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여기서의 ‘감사’가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서 비롯된 감사’였기 때문이 아닌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만을 낮추게 하는 힘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의하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바로 ‘사랑’에 의한다고 기록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믿음’, ‘사랑에서 비롯된 소망’ 그리고 ‘사랑에서 비롯된 감사’야말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며, 결국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꽹과리가 되고 만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벌이시고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온갖 고초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죄 많은 우리를 대속하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랑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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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4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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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는 ‘세상에 겨룰 만한 적수가 없음’이라고 하며, 우리가 ‘천하무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매우 강력하고 유일무이한 힘을 지닌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나, 문자적으로 본다면 말 그대로 ‘천하에 적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국장급 관료로 승진한 인물에 대한 평을 들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매끄러운 업무수행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매우 새롭게 들려왔습니다. 이 내용을 듣고 있노라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의 ‘천하무적’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수훈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곳 어느 세상에도 적이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4차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옛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차원’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이라고 기억합니다. 약 2300년 전에 적힌 ‘유클리드 원론’에 보니 기하학의 시초라 불리는 이 책에서 ‘점’을 규정하기를 ‘점에는 길이도 폭도 두께도 없다’고 하고, ‘선’은 폭이 없이 길이만 있다’고 하며, 이 설명에 의하면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1차원 세계에서는 아무리 이들을 모아본다 한들 ‘폭’을 가진 2차원의 세계인 ‘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2차원에 있는 ‘면’을 규정하기를 ‘두께’가 없기에 수많은 ‘면’을 모아도 여전히 논리적으로는 ‘0+0=0’이기에 3차원에서만 존재하는 ‘두께’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3차원입니다. ‘두께’ 즉 ‘높이’가 존재하는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요. 앞서 본 바와 같이 그 차원에 있는 것을 아무리 모아도 다음 차원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쌓아 보아도 영성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으며, 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여 4차원을 향해 쌓는다고 해도 하늘을 향해 무모하게 바벨탑을 쌓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일견 절망적인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겉보기에 매우 자유로울 것만 같은 우리도 알고 보면 많은 것들에 묶여 있습니다. 죽음이나 시간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는 ‘어제’로 갈 수 없으며 의술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죽음’을 피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차원의 벽을 넘을 수도 없고 3차원의 능력으로는 주님이 만족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3~18)
3차원과 4차원, 즉 이성과 영성 간에 막힌 담은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지혜나 능력으로 영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허무시고 놓으신 십자가의 다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성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하나님께 합당한 자는 오직 율법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에 의하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하니(약 2:11 참조), 어느 누구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허무신 벽을 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하무적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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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7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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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입니다. 지인과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왜 이리 다툼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그건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상이 아니라 620미터 지하에서는 낙원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5일, 지구 반대쪽 칠레에서 발생한 광산 사고가 발생하고 17일 만에 매몰된 모두가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70일만인 10월 14일에 33명 전원이 구조되었습니다. 그 많은 인원이 사흘 정도 밖에 식량비축이 없는 곳에서, 그것도 처음 17일간은 살아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희망 보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망 속의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다툼도 있었고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나 결국 모두가 무사히 탈출하는 역사적 드라마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모든 드라마의 시작은 한 장의 작은 쪽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고 17일이 지난 8월 22일. 생존자 확인을 위해 뚫고 내려간 구조대의 드릴에 광부들이 “피신처에 있는 우리 33명 모두 무사하다”는 쪽지를 매달아 올리면서 최악의 광산 사고로 기록될 뻔한 산호세 광산 사고는 칠레는 물론 세계 전역을 움직인 감동 스토리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쪽지가 지하공간으로부터 전해졌을 때 바깥세상은 환호에 휩싸였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때로는 주님을 잊고 알다가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지고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 회개와 구원의 손길을 구할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으로 넘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절망 속에 있을 때에는 다툼도 있었으나 생환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자 질서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부족했던 식량이 채워지고 편지와 전화를 통한 왕래가 이루어지더니 마침내 69일째부터 한 사람씩 지상으로 구출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구출된 마리오 세풀베다 씨는 “놀라울 정도로 운이 좋았습니다. 하나님과 악마가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끌어 준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63세라는 최고령 때문에 생존가능성이 가장 희박했던 마리오 고메스 씨는 아홉 번째로 구출되었으며, 구조 캡슐에서 나온 후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부인과 포옹하고 나서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1~4)
우리의 도움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 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하 몇 백 미터 속 어둠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때라도 하늘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을 때 주님은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기쁨과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희망의 땅으로 끌어올려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주님께 바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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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아침 뉴스에서 어떤 전도사가 부부 동반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저는 그 분을 알지 못했기에 정말로 어떤 교회 사역자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전 상으로 ‘전도사’란 ‘기독교에서, 목사 안수 이전의 교직. 또는 그 교직을 맡은 사람. 전도의 임무를 맡는다.’ 라고만 되어 있으나, 알고 보니 이 분은 신앙과는 무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행복 전도사’라고 하기에 어떤 분이었는지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38세까지 주부였다가 대기업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하고 97년 IMF사태 때 퇴사 후 책을 내고 몇몇 방송에 출연한 다음 이른바 ‘특급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의 말을 잠시 들어봅니다.
“제 강연을 들으면 용기와 희망이 생기신대요. 생활에 녹아 들어 체화된 이야기를 하니까 흡수가 잘되고, 재미와 감동이 있고, 그러다 느끼는 바가 있고. 그래서 제 강연이 앙코르, 리콜, 강추 강연이 됐나봐요.”
“행복해지는 비결요? 행복은 셀프 전문점에 있는 거예요. 셀프 전문점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물 한 잔 갖다 주나요? 행복은 셀프 메이크, 내 손으로 만들어야지요.”
“나처럼 모자란 사람도 열심히 사니까 할 수 있더라고요. 변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호기심과 모험심 갖고 일하고, 진실로 대하니까 나중에는 내 사무실에 결혼, 가정, 육아 문제 상담하려고 사람들이 바글거리더라고요.”
하지만 그녀는 질병의 고난 속에서 ‘행복’을 ‘셀프 메이크’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보(訃報)를 접한 이들은 “남들에게 행복하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당신의 책을 모두 버렸다”,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의 자격이 없다”, “꼭 자살했어야만 했는가”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블로그를 보니 이 분의 주장을 ‘복음 없는 행복’이라는 말로 나타내더군요. 개인적으로 매우 절묘한 표현이라 여겨졌습니다. 만약 이 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라는 성경구절 하나만이라도 알고 있었더라면, 아니,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와도 같은 기도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스스로도 ‘행복 전도사’, ‘행복 디자이너’라고 하던 그분은 결국 ‘불행의 전형’과도 같은 모습으로 이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행복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6~17)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1~4)
내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없을 때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주님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그 분의 책은 이제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은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이제부터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남게 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4~6)
원로목사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능력으로는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고 손에도 잡히는 것 하나 없을지라도 주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를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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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글들서재 2021. 8. 1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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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에서 회의시간이란 어쩌면 매우 비생산적인 시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이 중 하나인데, 얼마 전 교무회의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43초 18’과 ‘37초 10’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간을 보고 무엇인가를 떠올리신 분은 매우 예리하다고 하겠으나,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 속담 중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은 어쩌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했습니다. 혼자서 하기에 도저히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효율성 면으로 비추어보아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의 숫자에 대한 의미를 듣고 나서는 이 속담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간은 모두 4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입니다. 4,000미터도 아닌 단거리에 속하는 경기인 경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혼자서 달리는 경우와 4명이 계주(이어달리기)로서 달리는 경우를 상정해보면 아무래도 바통을 주고 받을 때의 시간이나 이전 주자의 감속, 그리고 다음 주자의 가속 등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혼자서 달리는 편이 빠를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43초 18’은 단독으로, 그리고 ‘37초 10’은 4명이 계주로 똑같이 400미터를 달린 세계기록입니다. 본 기록은 남자선수의 것이지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여자선수도 단독은 ‘47초 60’, 4인 계주는 ’41초 37’으로서, 공교롭게도 두 기록 모두 약 6초의 차이가 납니다. 100미터 세계기록이 9초 58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육상경기에서 6초란 생각보다 매우 긴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모이는 것을 강조하고 또한 그 능력을 깨우쳐 주십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9~20)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레 26:8)
여기서 계주의 특성을 살펴보면, 혼자서 달리면서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그 대회에서 가장 최선의 컨디션으로 실수도 없이 완벽한 경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주처럼 릴레이로 달리는 경우에는 마지막 주자(앵커)만이 앞서서 골인을 하기만 하면 아무리 처음 3명이 실수를 했더라도 우승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능력은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우승을 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과 함께 금메달 시상대에 오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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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19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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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Life is C between B and D (인생은 B와 D 사이에 있는 C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알파벳 상으로 본다면 B와 D 사이에는 분명 C가 있는데, 여기서의 B는 birth(출생), D는 death(죽음)이며, C란 choice(선택)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택’이라는 것으로 인생이 구성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장래에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어느 대학 어느 회사에 들어갈 것인가, 또는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등 큰 선택만이 아니라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자명종 시계를 응시하고 지금 일어날 것인가, 조금 더 잘 것인가 하는 선택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무슨 일부터 처리해야 할 것인가, 어느 거래처에 연락해야 하는가, 누구를 먼저 만나야 할까 등등, 생각해보면 하루는 참으로 ‘선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성공적인 인생이란 순간순간의 선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선택이야말로 인생의 필수덕목이라는 식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무엇 하나가 빠진 것 같습니다.
성경 사사기를 보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삿 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삿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삿 3: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삿 6:1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삿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삿 13:1)
이와 같은 내용이 2장에서 13장에 걸쳐 거의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자 고난 속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고난을 내리시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사사를 세워서 건져내십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스라엘 민족들은 또다시 그 은혜를 잊고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가 되고 맙니다. 우리 의 인생도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가정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 큰 축복을 부어주셔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으나, 일이 너무 바빠서 그 동안에 섬겼던 교회생활을 등한시했더니 또다시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와 간증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들어왔습니다. 이는 비단 특정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누구나 잘못하면 걸릴 수 있는 덫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출생(B)과 죽음(D),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선택(C)은 알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A’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영어에 “above all”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모든 것에 앞서”라는 뜻을 가집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신학대학 중 하나인 바이올라 대학의 표어가 인상적입니다. “Above All Give Glory to God(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생활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선택(C)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모든 것에 앞서(A)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맡길 때 우리의 인생은 고난에서 벗어나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학점으로 옮겨보아도 자신의 선택은 C학점인데 반해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A학점이겠지요. 나 자신의 지혜를 믿는 C학점의 인생이 아닌 주님을 따르는 A학점의 인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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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12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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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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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직장에서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중에 접속되어 있던 메신저로 문자가 떴습니다. 친숙한 지인으로부터의 메시지였었는데 어투가 다소 낯설었기에 아마도 다른 사람한테 보낼 말을 잘못 보낸 줄로만 알았으나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예상은 했었으나 역시나 600만원을 시급히 입금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아이디는 신고되고 짤막한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 생활 중에도 이와 같은 명의도용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애통해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4~15)
우리가 마땅히 행할 도리를 알고 이를 행하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면 이는 또 다른 명의 도용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위에서처럼 메신저를 도용하는 자는 사기꾼이었다고는 하나, 이처럼 우리의 명의를 도용하고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하도록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2~24)
우리의 명의를 도용하고 우리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 묶여 있는 것을 푸시기 위해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감당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틈이 있으면 이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우리의 명의는 도용될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2~14)
우리가 죄로부터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성경은 강권하십니다. 다시는 죄가 우리의 명의를 도용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며 하루하루를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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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29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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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서울을 비롯한 많은 곳에 내리는 아침,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 짤막한 기자회견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옵니다. 그는 국무총리로 내정되었으나 결국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 사퇴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40대에 총리로 내정되어 자신만만한 모습이 TV 화면에 잡히기도 했었으나 결국 내정된 지 3주 만에 임명장 한 번 못 받아보고 사라져갔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도지사까지 지내며 전도유망해 보였으나 속 모습은 비리 게이트에 대한 연루 의혹에 재산증식, 부인의 인사청탁 및 뇌물수수의혹 등 그의 말대로 국민의 신뢰를 얻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기자회견 이후 위장전입, 부인의 위장 취업, 뇌물 수뢰, 부동산 투기 등의 의혹을 받아왔던 두 명의 장관도 사퇴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이 세 명을 제외한 남은 7명에 관해서 보더라도 돈에 대해 의혹이 없는 인물은 하나도 없으니,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임명권자 또한 그런 비리가 있으니 당연하다는 말까지도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소식을 들으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양진전(楊震傳)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옵니다. 후한 시절 박학다식하며 청렴 결백하여 ‘관서지방의 공자’라 불리던 양진이 태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중 예전에 양진이 관리로 발탁해 준 왕밀이 찾아와서는 소매 속에서 황금을 꺼내 들고는 아무도 모른다면서 받아달라고 하는 그의 말을 듣고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아무도 모른다니 무슨 말인가”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그 직분에 합당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거나 악용하여 교만해지고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은 비단 현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사가 아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지만,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 15:11)
그는 왕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하며 결국은 비참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삼상 31:3~5, 삼하 1:6~10)
직분은 또한 왕이나 고위관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는 우연히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으며, 이를 위해 맡은 직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크거나 작게 또는 높거나 낮게 보이는 직분이더라도 모두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입니다. 주님이 주신 직분에 자만하지 아니하며 감사와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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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들서재 2021. 8. 1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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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을 향하여 ♬
2010년 08월 22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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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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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고 채비를 한 후 집을 나선 다음에는 여러 사람들을 대하지만 해가 저물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할 때면 항상 홀로 남은 나 자신을 느낍니다. 비단 가족이 있더라도 결국 잠에서 깨어나고 또다시 잠에 드는 순간은 누구나 혼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가 가진 섬에서 따로따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더군요. 물론 어려울 때 도와주고 기쁨을 나누는 사이라 하더라도 결국 ‘나 자신만의 세계’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일반적으로 여기서 ‘땅 끝’이라는 말을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전세계를 돌아 다시 이스라엘로 복음이 전해질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구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섬기는 방법을 마치 어린 아이에게 예절을 가르치시듯 섬세하게 가르치시고 구약 전체를 통해 ‘믿음의 방법’을 완성시키신 후에, 마치 완성된 믿음을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시듯 때가 차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고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시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살전 5:2)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16:15)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마지막 날이 구체적으로 언제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물론이고 성경 어디에도 구체적 일시를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도둑 같이 오신다’는 것은 그 때와 시기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므로 시한부 종말론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처럼, 결국 “이스라엘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도 사람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아무리 많은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의 믿음은 그렇다면 과연 내 생활 안에서 얼마나 전파되고 있는지를 되새겨보면 아직도 그 땅끝은 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땅끝은 어쩌면 우리 안에도 있는지 모릅니다. 가시적인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도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 생활 안에서 나 자신의 믿음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내 마음 안의 선교로써 믿음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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