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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3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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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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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지난 며칠 사이 학원 이전이 있었습니다. 역에서부터의 거리는 도보 15분 정도이지만, 건물 내부 전체를 옮기는 것이기에 시간도 비용도 절차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몇 년에 걸쳐 세워진 건물은 디자인도 모양새도 흡족했습니다. 문제는 교실.
제 교실에 들어가보니 칠판은 출입문과 같은 면에 있어 좁아지고, 또한 천장에 달린 스크린 때문에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 외에도 내부 구조나 디자인에 있어서 다소 불만인 점이 있어 이것저것을 지적하였으나, 변경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미 상황이 끝났기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름대로 내장이 완성되기 전에 살펴보고 요청도 하였으나 반영이 된 점보다 불편한 점이 더욱 눈에 띄었습니다. 새 건물에 새 교실이라고 하여 기대도 컸으나, 너무 과한 기대 때문인지 생각보다 만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주변을 살펴봅니다. 분명 이전 건물보다, 그리고 이전 교실보다 나아진 부분이 있었을 것이기에 오히려 좋아진 부분만을 찾기로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제법 괜찮은 부분이 눈에 띄게 됩니다.
사람은 만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잠 27:20)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 37:8)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불평이나 불만 없이 만족만 한다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일도 없으며 그저 감사만 하라고 하셨을 텐데, 성경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불의한 재판장도 끈질긴 과부의청을 들어주었다고 기록합니다(눅 18:1~8).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던 중, 바울과 예레미야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떠나가게 하기 위해 간구하였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을 듣고 도리어 기뻐하였다고 전합니다(고후 12:7~10).
얼마 전 학생과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대학 입시 때 모든 교인들이 모여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의 대학 합격을 기도했다고 해도 정원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붙는 학생도 있고 떨어지는 학생도 있다면 이상하지 않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도의 핵심은 바로 예레미야 29장 13절에 있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기도는 단지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성경을 살펴봅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죄악으로 물든 유대 땅을 멸하시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세워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하고 수많은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당연히 백성들 모두는 하루 빨리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으나 예레미야서 29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9:10~14)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간구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이를 기쁨으로 받아 들이며 감사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간구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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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글들서재 2021. 8. 1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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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9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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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성지로 꼽히는 곳, 기원전 1000년 경에 다윗성으로서 수도로 정해지며 지금 이 순간도 많은 순례객으로 넘치는 곳,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라는 말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구약시대부터도 전쟁이 일어나면 그 한 복판에는 예루살렘이 있었으며,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제1성전은 기원전 521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헐리고 (예레미야 52:12~13),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의 지휘(에스라 5:2)로 건축된 제2성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 24:1~2, 막 13:2, 눅 21:5~6)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고 현재는 서쪽 벽만 남아있으며, 또한 제2성전 자리에는 예수님의 신격을 부정하는 이슬람 성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찾는 성지순례라고 하면 터키나 이집트보다 아무래도 예루살렘이겠지요. 그 곳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감람산도 있고 십자가를 메고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사도 있습니다.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성경 기록 등을 바탕으로 발굴작업을 하는 고고학자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시작은 같았으나 목적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한 쪽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와 다른 한 쪽은 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고고학자만이 아니라 기타 역사학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분들이 느끼기에는 ‘성경’이란 수많은 역사기록 중 하나이며 실제로 인간에 의해 발견된 자료가 있었을 때만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 들이며 “성경에는 예수가 ‘나사렛 사람’으로 나오지만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나사렛’이라는 지역 자체가 없었다”는 등의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 모두가 ‘I think(내 생각에는)’로 시작하는 것을 보더라도 매우 자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많이 있어왔습니다. 성경에 대한 회의론자들은 예컨대 성경에 있는 기록 외에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들어 공격 하기도 했으나 1961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랴에 있던 고대 극장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가로 2피트, 세로 3피트 정도 되는 돌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서판에는 선명하게 ‘유대 장관 본디오 빌라도가 가이사랴 사람들에게 티베리움을 하사하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당시까지 ‘빌라도에 대한 기록의 부재’을 빌미로 성경을 공격하는 이들의 주장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38~40)
우리가 생각하는 ‘성지(聖地)’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장소이며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활동했던 무대를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3년을 포함해 약 33년 정도만 활동하다 가셨을 뿐이라면 성지는 바로 그곳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시며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지는 어디일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 나라도 우리 안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무대는 바다멀리 떨어진 외국도 아니며 몇 백 년 몇 천 년 전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 유적지와 성지를 탐방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며 저도 한 번은 가보고 싶지만, 단지 그 곳을 밟는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성지’로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는 주일입니다. 연습 속에서 예배 속에서 그리고 찬양 속에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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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리자

글들서재 2021. 8.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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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2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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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간에서 요즘 화제가 된 뉴스 중에 이른바 ‘루저’발언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저 대단하지도 않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대수롭지도 않은 ‘해프닝’ 정도로 마무리되나 싶었습니다만, 특별한 사건이나 뉴스거리가 없어서였는지 몇몇 언론매체가 여론형성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마치 무슨 주요인물이 한 망언이나 실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도하고, 여기에 유명인사들의 논평까지도 싣게 되니, 일반 시민들은 주목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고 말았습니다. 저녁 9시 뉴스 같은 지명도 있는 방송도 아니고, 또한 발언한 당사자도 저명인사나 거물 정치인도 아닌 일반 대학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화젯거리가 되는 현상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로 “그래도 세상이 지금은 평화로운가 보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심각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었다면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겠지요.
둘째로는 소위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민감한지를 나타내주는 모습이 아니었나 합니다. 우리나라의 ‘성형’은 이제 세계수준이며 외국에서도 성형수술을 위해 우리나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며, 이미 연예인들의 성형은 감출만한 일도 아닌 ‘당연함’처럼 여겨지고 취업면접을 위한 것은 물론 고등학생들 사이에도 이와 같은 수술이 늘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성형’도 엄연한 의술입니다. 단순히 모양새가 안 좋은 외모를 고치는 데에 머물지 않고,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식을 못하더라도 본인이 특정 부분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을 경우, 심한 경우에는 정신적인 질환까지도 악화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성형의학은 외모를 바꾸는 데에 머물지 않고 심리적인 치료까지도 그 범주에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우리는 진화과정에서의 유전자적인 ‘실수(error)’로 인한 돌연변이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직접 지으셨으며, 우리의 외모가 어떻든, 나아가 우리의 과거 • 현재가 어떠했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전에서 ‘루저(loser)’를 찾아보면 ‘실패자, 패배자,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 어떠한 외모나 조건도 믿음 안에서 실패자나 패배자, 하물며 쓸모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그 이유인 ‘선한 일’을 위하여 쓰임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위너(winner: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에 따라 행하며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 하나님과의 통화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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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의 통화권 ♬
2009년 11월 08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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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얼마 전의 일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밤에 집으로 거의 도착할 무렵, 주머니를 뒤져보니 핸드폰이 없더군요. 지금까지 무엇을 잃어버린 적은 가끔 있으나 다른 것도 아닌 핸드폰이 사라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원 교실에 두고 온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10시를 넘었으니 문은 닫혔을 것이고 전화를 해도 받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전화 자체를 두고 왔으니 걸어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급히 걸 곳도, 또한 급히 걸려올 전화도 없었으며, 메신저로 연동되어 있기에 전송되는 문자는 컴퓨터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출한 배를 생각하니 집에서 그 흔한 자장면 하나 배달시켜 먹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지갑은 있으니 해결할 수는 있습니다. 우선 내일 아침이 걱정입니다. 전화기를 항상 자명종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터라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 뿐만 아니라 진동모드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시간이 되면 우렁차게 벨소리가 학원 전체에 울려 퍼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왜 그리 찝찝한지요. 마치 세상과 나 사이에 있던 연결고리가 순간에 뚝 끊겨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님과의 핸드폰은 정상일까. 이 세상에 있는 핸드폰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통화는 굳이 핸드폰을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더군요. 아무리 핸드폰이 있다 하더라도 통화권을 벗어나면 이는 역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나님과의 통화권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까, 전파가 약해지지나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며 그간 소홀했던 기도생활과 믿음생활이 떠 올랐습니다.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돈과 명예나 어떤 특별한 도구가 없더라도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주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언제나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기에는 통화권도 없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통화권 안에서 기도로 교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 축복 위에 깨어 있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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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8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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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일은 쌓여 있고 주보 글도 떠오르지 않아 무심코 TV를 켭니다. 평소 TV를 볼 시간도 많지 않고, 본다고 해도 뉴스만을 골라보던 차에 이것저것 돌려보던 차에 ‘무한도전’ 재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100회 특집이라고 하니 1년도 더 된 방송이었습니다. 내용 중 하나는 출연진 중 하나인 정준하 씨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자장면을 먹는 것이 있었는데, 날라가는 자장면을 보고 모처럼 혼자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출연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항상 많은 도전을 하는 것 같았지만 성공한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는 이는 성공해서가 아니라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듯합니다.
비단 TV가 아닌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입니다. 학생들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라는 도전을 하며, 직장인들은 성과를 올려야 하고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생활에서도 역시 도전은 있습니다. 오늘은 믿음 안에서의 도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도전’이란 실현가능성을 충분히 낙관하고 있을 때 쓰지는 않고, 오히려 쉽게 이룰 수 없는 경우에 사용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경은 수많은 도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모든 이들의 멸시를 뿌리치고 방주를 만들었으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땅으로 가는 도전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도전을 했고. 다윗은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무찌르는 도전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도전에는 단순한 ‘열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함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조금 특이한 도전도 기록합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침노’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다’,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는 행위’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니 두 가지 내용이 떠오릅니다.
먼저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에게 기거하고 있을 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창 31:3) 는 하나님 의 명을 받고 그의 형 에서에게로 가는 길에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이 그와 날이 새도록 씨름하였으며 자신이 이길 수 없자 허벅지 관절(환도뼈)를 어긋나게 합니다. 그래도 야곱은 끝까지 버티며 자신에게 축복하기 전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하여 마침내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창 32:24~ 28). 호세아서에서는 여기서의 ‘어떤 사람’을 ‘천사’라고 기록합니다(호 12:4).
다음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하시면서, 그에게 과부가 그에게 자주 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며 번거롭게 하자 이 청을 들어주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도 밤낮 부르짖는 이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눅18:3~8).
이와 같은 내용도 역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학에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법언(法諺)이 있습니다. 이는 ‘권리 주장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로서 이를 일정기간 주장이나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에 의해 권리 자체가 소멸한다는 내용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 만으로도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이기에 평생토록 감사해도 부족하겠지요. 하지만 그처럼 막대한 축복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축복 위에 잠자는 자’는 역시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잠든 자는 기도하지도 못하며 기뻐하지도 회개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기에 성경은 누차에 걸쳐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엘 1:5 마 25:13, 26:41, 막 13:15, 13:33, 13:37, 14:38, 고전 15:34, 16:13, 골 4:2, 살 5:6, 엡 6:18 등)
축복 받은 자로서 항상 깨어 있어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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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밤에는 집에서 잠이 든다”
이는 우리 생활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과 사고로 범람합니다. 오늘도 신문에는 살인과 절도 • 폭행 • 강도 • 질병 등 온갖 사건과 사고로 가득 매워져 있습니다. 즉, 아침에 눈을 뜨고 그날 밤 평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다는 일은 그것 만으로 ‘행운’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逾越節:Passover)이 있습니다. 출애굽 하기 직전 사람이든 가축이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실 때에 어린 양의 피를 전날 해질 때에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하시면서(출 12:6~7), 이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 12:23)
이는 신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유월절 바로 전날이었습니다(요 18:28 참조). 예수님은 그저 당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며, 최대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하는 희생재물로 오셨습니다. 구약에서 유월절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곳이 ‘문 인방과 문설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인방’이란 문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라고 합니다. 세로로 박힌 문설주와 가로지르는 인방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유월절 전날 어린 양의 피를 출입문에 바른 것과 같이 속죄제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똑 같은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보혈을 바르셨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출입문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의미는 또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출 12:28)
이 말씀은 단순히 어린양의 피를 칠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행위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입문이라는 것은 그 집에 있어서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의 첫 입구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징표인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가 이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으로 통하는 첫 입구에 예수님의 보혈이 묻은 십자가를 세워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역시 죽음의 권세가 이를 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순종과 주님의 사랑으로 하루 하루가 유월절의 기쁨으로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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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가족

글들서재 2021. 8. 1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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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27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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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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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형제가 없이 자란 저에게는 “과연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비슷한 연배,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가 있었다면 나는 그를 볼 때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비슷한 감수성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에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형제는 없으나 가족은 있습니다. 오랫동안 부모 곁을 떠나 바다를 건너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기에 가끔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가족’이라는 단위가 존재합니다. 가족이 형성되고 얼마 지나면 그 중 한 개체가 떨어져 나와 또 다른 가족에서 분리된 개체와 결합하여 새롭게 가족이 생성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세포분열이나 핵분열로 인한 연쇄반응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이기에 그토록 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족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재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자신이 모를 수도 있으나 모두 부모가 있으며, 그 부모도 역시 모두 부모로부터 나왔고……이와 같은 역사가 태초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부모만이 아니라 형제자매도 역시 ‘가족’일 것입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한 지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봅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정의를 내려본다면 진정한 가족이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서로의 사랑으로 묶여 있는 공동체가 아닐까 합니다. 부모와 자녀, 또는 자녀 간에 있어서 혈연관계는 있으나 서로를 증오하고 시기하며 상대방의 기쁨을 보고 슬퍼하고 슬픔을 보며 기뻐한다면 이는 혈연관계가 아닌 그저 서류상의 가족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사랑’이란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이성관의 황홀함이나 도취를 야기시키는 것은 뇌 속에 있는 도파민 등 펜에틸아민 계열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독효과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대상한테는 길어보았자 3년 정도밖에 생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길어도 3년인 ‘콩깍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옥시토신과 엔도르핀 호르몬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노력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지체라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머리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오른팔이 다쳤는데 이를 기뻐할 왼팔이 있을 수 없고 오른발이 아파할 때 좋아할 왼발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상대방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될 때에 비로소 사랑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가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혈연관계가 있는 것만으로 가족이 아니듯 혈연관계가 없는 것만으로 가족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비록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를 믿고 배려하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도 역시 훌륭한 가족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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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20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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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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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 교회에 다시기 시작한지도 몇 십 년 되었다. 주일이 되면 성경과 찬송을 꼭 챙겨서 정해진 시간에 교회로 향한다. 도착해서 주보를 살펴보고 성경구절과 설교말씀 제목만 보면 서론 본론 결론이 머리 속에 떠 오른다. 대표기도 시간에 지갑을 꺼내어 헌금을 챙겨 넣는 노하우도 잘 알고 있으며, 그 와중에도 절묘한 타이밍에 “아멘”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예배가 끝난 후 축도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나와야 차를 빼기 쉽다. 나오는 길에 받게 되는 전단지들은 얼마 가면 있는 휴지통에 살며시 던져 넣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 쏟아지는 가을 햇살, 주일은 그로부터 일요일이 된다. -
교회생활이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믿음’이란 정체는 희미해지고 마치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식사 후에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처럼 느낌도 감동도 없는 교회생활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성수주일, 성경무오, 모세오경, 공관복음, 오병이어 등 나름대로 예배경력이 있기에 ‘전문용어’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세상에는 ‘초식남’과 ‘건어물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격이 초식동물처럼 순하고 혼자 있기를 즐기며 연애와 결혼엔 도통 관심이 없는 20~30대 젊은 남자들이 ‘초식남’이고, 직장에선 누구보다 매력 넘치고 유능하지만 집에만 오면 아무렇게나 옷을 입은 채 고독을 즐기며 일에 지쳐 연애는 잊고 사는 여성들을 가리켜 '건어물녀'라고 한다는군요. 어찌 보면 믿음생활에서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적 초식남과 건어물녀가 되어 주님과의 만남이나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해 무감각해지거나 관심이 사라진 상태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믿음이 없는 지식인들도 성경을 읽었으며,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명화 ‘십계’나 ‘벤허’를 보고 찰턴 헤스턴의 열연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신앙은 여기에 머무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그 믿음 위에 세우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닌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믿는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십일조와 기도, 그리고 실천이 있겠는데 오늘은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일조는 창세기 14장 17~20절에서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 10분의 1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고,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10의 1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으며(레 27:30 ~32, 신 14:22),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말 3:8).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만 내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질책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천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왜 굳이 사람들이 재물을 바치기를 원하실까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양이나 염소를 바칠 때 만약 하나님보다 짐승을 더욱 사랑했다면 이를 죽여서 바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절대 하나님과 재물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재물에 대한 애착이 마치 하나님 섬기듯 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듯이 십일조 또한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주님께 바칠 수가 있습니다. 1억을 버는 자는 1천만을 드리면 되고 1만원을 버는 자는 1천원을 바치면 됩니다. 십일조는 무엇 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가늠하는 방법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첫 단추일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십일조의 축복을 남김 없이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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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13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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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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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자신이 밝힌 본인의 신상명세에 의하면 계보로는 야곱의 자손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고(롬 11:1, 빌 3:5),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행 22:28). 또한 그는 엘리트 계층이었던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 힐렐 학파의 가말이렐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습니다. 이를 본다면 선천적 조건으로 보나 그가 쌓은 학식으로 보나 출세를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베스도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는 말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의 지식 수준은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겠지요. 마음만 먹으면 이미 보장된 탄탄대로의 출세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모든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며(빌 3:8), 오직 복음 전파 만에 힘을 쓴 것도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8)
당시 로마 일대에서 유행하던 쾌락주의를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학파나 유물론이나 이상주의를 내세웠던 스토아 학파에서 보면 비단 인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게파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은 학문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게 느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황당무계한’ 논리가 지식인 중 지식인인 바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세상과 삶, 감정이나 존재, 죽음 등을 논한 철학들은 넘쳐나지만 이를 논할 때에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도외시한다면 그 어떠한 논리도 성립될 수 없겠지요.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55:8)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람이 진리인 줄 알고 사람의 식견으로만 판단한다면 이는 언제 든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우리의 판단 기준은 진리이신 예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삶도 아브라함의 삶도,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인간적인 눈으로는 허무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 또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살펴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생각이 ‘사람들’과 다른 것처럼 우리 생각도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생각과 같아져야 하기 때문 다름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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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06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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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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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꿈 꿉니다. 오래 전 조선시대라면 남성에게 있어서 성공은 과거 급제이며 여성에게는 좋은 집으로 시집 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다양화되고 여성의 사회진출도 확대되면서 ‘성공’이라는 개념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만약 길 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있어서의 ‘성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그 답변 종류는 수십 가지게 이르겠지만 아마도 공통점이 있다면 ‘돈’과 ‘명예’와 관련된 내용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2001년에 등장한 카드회사 광고로 한때 유행어가 되었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이와 같은 세태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과거 1등이 나왔던 로토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서실에서 밤 늦도록 입시나 취업 • 자격시험을 위해 불을 밝히고 있는 이들도 역시 ‘성공’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노력은 값진 것이며 좌절이나 절망이 아닌 희망을 가져야 하겠으나 성경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 민족을 구해내는 인물로 모세를 선택 받았고 또한 바로의 아들로서 성장하고 있었다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그에게 권력을 주어서 유대민족을 애굽으로부터 나오도록 만들면 되었으나, 하나님의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당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고, 뿐만 아니라 그를 유대민족 구원은커녕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로 만드셨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미디안 민족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세우십니다. 미디안을 치기 위해 몰려든 유대민족들은 3만 2천명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삿 7:3).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병사 수와 무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사를 단 300명으로 줄이시고 사용한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닌 나팔과 빈 항아리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인생 밑바닥으로 전락한 모세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일도, 적은 인원에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기드온의 군대가 수많은 미디안과 아말렉을 무찌르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굳이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 정도는 꿈을 꾸어보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미래의 대통령 ○○○’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놓고 목표를 세웠다는 전직 대통령에게 어느 한 기자가 “행복했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힘들지. 힘들어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외롭고, 자유도 없고. 몹시 외롭고 쓸쓸했 지. 대통령 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니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적어도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으며,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많은 것과 다투고 희생했을 것이지만 막상 뒤돌아보니 허망할 따름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과 희망을 갖는 것은 소중한 일이며 반드시 그래야 하겠으나 그것이 마침내 기쁨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한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교만한 모습을 보기 원치 않으십니다. 기드온의 군사 수를 줄인 이유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라”(삿 7:2)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이란 단지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공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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