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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07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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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잘못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억울한 일을 당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성경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자신은 악의가 전혀 없으나 몇 번이고 억울함을 당하는 등장인물 중 야곱의 아들 요셉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레아보다는 라헬을 더욱 사랑한 야곱은 라헬의 아들인 그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으나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결국 요셉을 노예로 팔게 됩니다(창 37:28). 애굽으로 끌려간 요셉은 다시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고, 거기서는 또다시 억울하게 보디발 부인으로부터 있지도 않은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창 39:20). 옥에서는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에게 그가 꾼 꿈에 대해 해몽을 해주어, 해몽대로 풀려나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지만, 석방된 그는 요셉에 대해서 잊고 맙니다(창 40:23).
이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소리쳐 이르되 나는 억울하오니 이 구덩이에서 건지소서”
“요셉이 보디발에게 이르되 나는 무죄하오니 정죄하지 마소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 보기를 청하니 이는 자신을 기억하기를 원함이었더라”
그러나 창세기는 물론 그 어디에도 이와 같은 구절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대신 성경에서는 애굽으로 끌려온 후의 요셉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1)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있었던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갇혔던 옥에서도 간수장으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나이 서른에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어, 극심한 가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요셉이 아무리 형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내지 않았을 것이고, 보디발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더라도 요셉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며,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을 내보내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한 축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애굽으로 팔려간 것도 억울함이요, 남의 집에서 종살이 하게 된 것도 억울함이요,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함이요, 옥에 갇힌 것도 억울함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애굽으로 팔려간 덕분에, 남의 집 종살이를 하게 된 덕분에, 옥에 갇힌 덕분에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누구 하나 내 억울함과 무죄함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게 되면 억울함도 형통함의 축복으로 변한다는 말씀을 믿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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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싱크홀

글들서재 2021. 8. 1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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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31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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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스에 의하면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싱크홀 즉 아스팔트 도로에 갑자기 구멍이 뚫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서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싱크홀은 본래 단단한 또는 단단하게 보이던 땅 위에 아스팔트를 깔았으나,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내부 흙이 떠내려가서 결국 아스팔트 밑은 빈 공간만 남아서 붕괴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원인이 인근 지역에 건설중인 초고층건물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안전하고 탄탄할 줄 알았던 길에 갑자기 구멍이 뚫린다면 이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싱크홀은 우리 마음 속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을 살펴봅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 14:29) 라고 했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분명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이 허락하신다면 자신도 분명 물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기록합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오라!”라고 하십니다. 그야말로 “그래,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바다로 뛰어들자 실제로 베드로도 바다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믿음의 싱크홀이 생기고 맙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와 같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가 되고 맙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라보는 대상’ 즉 ‘바라보는 대상이 예수님인가 바람인가’가 이후의 결과를 바꾸어놓게 된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들게 된 원인은, 그 때까지 없었던 무슨 새로운 요인이나 방해물이 생겨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을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요 6:18) 고 기록하며, 이는 바람 그것도 보통 바람이 아니라 이미 폭풍이 처음부터 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이 몰아 치고 눈앞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할 때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계시는 예수님만이 눈에 들어올 뿐, 폭풍이 세차게 몰아치고 파도가 아무리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도 이와 같은 ‘현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를 몇 발자국 걷자, 멀리 있는 예수님이 아닌, 속눈썹을 스치고 지나가는 폭풍과 발바닥 밑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파도를 보게 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결국 물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베드로는 분명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바다 위를 걷게 해달라며 외쳤으며, 그 결말이 그렇게 비참한 모습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베드로는 ‘현실’ 앞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즉, 그 순간 베드로가 보았던 것은 단순히 바람이 아닌 ‘현실’이었으며, 베드로가 빠져든 곳도 단순히 바다 속이 아닌 ‘믿음의 싱크홀’ 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그랬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행 3:6~8).
분명 시작은 강한 ‘믿음’으로 시작했더라도, 우리는 눈앞에 닥친 난관을 종종 ‘바람’ 즉 ‘현실’만을 바라보고는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너머에 예수님이 서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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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17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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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성경 구절 중에서도 사람들로부터 많이 읽힌 구절을 꼽으라면, 단연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통독하고야 말겠다는 큰 뜻을 품고 1장 1절부터 읽기 시작하지만 도중에 포기하거나 하여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성경구절을 읽고 이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도입부가 이처럼 드라마틱한 책은 보기 드물 것입니다. 성경 첫 구절에서 하나님에 의한 ‘천지 창조’를 선포하셨으며 이로 인한 하나님의 권위 또한 규정하셨습니다. 이 구철은 총 66권으로 이루어지는 성경에 대한 믿음의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성경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성경을 계속 읽어나간다 하더라도 의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다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사람을 위한 준비라고 여겨지며, 마지막으로 하나님 본인과 닮은 매우 특별한 피조물인 아담을 창조하시게 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에게 ‘명명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명명권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 이름을 붙이는 경우와 같이 절대적 지배권을 상징합니다. 이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창 1:29) 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뒷받침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놓고 방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셨으며, 이 세상 만물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예비하시고 다스리는 권세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라고 하는 사람의 유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고, 그들을 위해 예비되었던 모든 축복과 권세까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예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 아담과 하와가 범했던 것과 같이 자신의 욕심에 휩쓸려 하나님을 등한시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하고 맙니다. 만일 지금의 우리가 아담이나 하와였더라면 수 십 번, 수 백 번도 더 에덴을 추방당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천지창조보다도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 많고 흠 뿐인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하시고 창조하셨으며, 우리 모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힘들고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로, 곤고한 날에는 회개와 기도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모두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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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10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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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로마 교황이 내한한다는 소식에 일부 기독교계에서 가톨릭을 이단이라며 반발을 하고, 나아가 내한 반대시위까지 벌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주 이단에 관한 전단지를 받았으나, 과연 이단이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이단(異端)’이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이론이나 행동. 또는 그런 종교’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는 ‘이단’이라는 뜻이 되지만, 교회 내에서의 이른바 ‘이단’이라는 표현은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사이비(似而非)’ 즉 ‘비슷하지만 다른’ 종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단’인지 여부에 대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교리가 성경에 부합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가톨릭에 있어서는 몇몇 문제점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과연 이단에 대한 낙인이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신천지’와 같은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신자들을 동원하여 우리 교회를 비롯한 기존 기독교계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공격해오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이단’ 낙인을 난발하는 일은, 복음전파가 아닌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바람직하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창기 시절 이단시비에 휘말렸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한다는 견해에서 본다면 “생물은 DNA 복제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error)에 의한 돌연변이로 인하여 수많은 생물체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하는 진화론이야말로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이단이자 배척대상이 되어야 하겠으나, 현재 교육 과정에서는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학생들은 시험에서 이에 해당하는 답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단에 동조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디에 이단 낙인을 찍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단이 아닌 우리 교회에서는,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하는 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성경에 더욱 부합한다고 판단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내 부의 갈등이나 윤리적 • 도덕적 문제로 인하여,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때로는 심한 비난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수많은 종교단체 중에서 이단인지 여부를 가리는 일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교회를 지키는 일이 될 수는 있으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전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내에서 서로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이단들을 낙인으로 공격할 필요도 없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을 향해 나누어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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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29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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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증명을 하기 위해 구역에서 구역장님 서명을 받기 위해 모처럼 대교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터라 현재 교구가 어디로 되어 있는지도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아낸 끝에 구역을 맡고 계신 목사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는 지금 현재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있으므로 구역활동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자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 중 “드리는 찬양 중에 자신이 나타나지 않게 하시옵고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성도가 하는 전도나 모든 봉사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꾸짖은 자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 믿음이 많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당시 바리새인들은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으나 부득이한 일로 바깥에 있을 때에는 길거리에서라도 시간이 되면 기도를 드렸는데, 점차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해 기도 시간이 되면 의도적으로 회당이나 시장 등 거리로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닌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것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떠올립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 12:41~44)
그 시대에는 당연히 지폐가 없었으므로 화폐는 모두 동전이었기에 헌금함에 넣을 때에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 부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해 때로는 화폐를 잔돈으로 바꾸어서 부어 넣을 때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기도 했다는 어느 전도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부가 헌금했을 때에는 더 이상 잔돈으로 바꿀 수도 없는 동전 두 닢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자의 우렁찬 소리보다도 과부의 동전을 더욱 값지게 여기셨던 이유는 바로 그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1)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드러내길 원한다면 어떠한 열성적인 전도나 봉사, 그리고 거액의 헌금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우리가 드리는 찬양 또한 사람이 아닌,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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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들서재 2021. 8. 1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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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20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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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37절에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는 ‘이웃’에 대한 율법교사의 질문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는 봉변을 당한 사람을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이나 하는 말씀이 없이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차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 그리고 셋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모두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자요, 하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을 보고 하나같이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들이 피한 이유를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어쩌면 그 ‘어떤 사람’을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민 19:11)라는 말씀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나름대로 지키려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어찌하여 그와 같은 환난을 겪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고 과분할 정도로 보살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네 이웃은 여기서의 사마리아 사람이다”가 아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합니다. 머리로는 수많은 생각을 할 수는 있으나, 가슴으로 받아 안고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그렇게도 어렵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가장 짧은 거리는 어디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각건대 이는 ‘머리에서 입까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깊은 사려 없이 머리에서 떠오르는 말들을 되풀이해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머릿속 율법에 얽매이는 것도 정죄하는 것도 아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참된 선한 이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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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13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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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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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해 복음 전파를 위해 힘을 쏟는 많은 사도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시기 전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셨을 정도로 복음 전파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회에서도 교세확장이라는 점과 맞물려 이 점을 강조하고 선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사도행전 2장에서 보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 사도들은 단 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지 못했으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에 의지하여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으나, 성령님이 강림하시자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의 입에서 성경과 복음이 봇물처럼 터지더니 마침내 무려 3천 명을 단번에 전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행 2:41)
하지만 또 다른 점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0~32)
복음전파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모인다는 것을 이상과 같은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저해하는 일은 즉 이를 실족하도록 하는 일이며 이는 곧 성령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자 성령님을 모욕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여기서의 이웃은 불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미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도 포함되겠으나, 후자에 대해서는 간혹 경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새신자 영입만을 강조한 결과,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성도들 서로간에 상처를 받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오히려 복음 전파를 게을리한 행위보다도 믿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 주는 상처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히 성경에서 경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1~13)
복음 전파도 우리의 의무라고 한다면 주님의 이름 안에 거하는 성도 서로의 화목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목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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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2월 20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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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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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전투기 조종사 이야기를 듣고 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경험이 많은 조종사도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며, 여기에서 비롯된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전투기 속도는 마하 2, 시속 2400킬로 정도입니다. 이 정도라면 단순계산으로 서울 부산 간을 10분 만에 갈 수 있는 속도입니다. 시속 100킬로도 되지 않는 승용차를 운전할 때에도 일시적인 실수로 사고를 야기할 수 있는 만큼, 전투기는 순간순간마다 치밀하고도 신속한 판단력을 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전투기는 이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구름 속에서도 정확히 방향을 제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기판의 오작동 등 고장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는, 조종사가 계기판을 믿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과정에서는 지상에서 느끼는 중력과 별도로 가속과 감속으로 인해 여러 방면에서 중력과도 같은 압박이 느껴집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분명히 계기판은 ‘위’와 ‘아래’를 나타내지만 이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 전투기는 추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보거나 느끼는 감정이 때로는 매우 큰 위험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위 두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하와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믿었기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 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하였으며, 롯 역시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었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이 소금기둥으로 변하고 마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자신이 눈으로 본 것만을 믿고, 그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40년이나 광야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그들 자신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우리에게 있어서 가치판단의 기준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기준으로 보이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우리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으로 볼 때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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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16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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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본문 만이 아니라 그 행간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강조합니다. 예컨대 간혹 ‘믿음’을 강조할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는 말씀이 애용되며, 이 외에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6)는 기록도 있으나,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 교회 앞 고수부지로 나가서 많은 벚나무에게 명하여 한강에 심기라 해서 그 말에 나무들이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믿음이 작아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믿음’과 ‘확신’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대학 1학년 당시 한국사 과목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분 말씀에 의하면 과거 위정자들은 ‘하면 된다’는 말을 애용해왔으나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하면 안 된다’는 말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안 된다’는 것은 ‘불가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를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해야겠습니다.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무조건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강행한 정책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부조리와 무고한 피해가 발생했는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가나안 땅 정탐꾼들이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는 말에 의지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무시하고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른 정탐꾼들의 말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시 성인 중에서 위 둘을 제외하고 결단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일부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겠다고 한 땅으로 올라가겠다며 모세의 만류를 물리치고 갑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는지도 모르나 결국 그들은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민수기 14장). 뿐만 아니라 수가 작은 ‘아이’ 성을 정탐한 이들이, ‘아이’는 작은 성이므로 모든 백성을 보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삼천 명으로 공략하나 역시 패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수 7:1~5).
다윗이 그일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뒤쫓던 사울이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고 하며 확신에 찼으나 블레셋 침공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물러갔으며, 결국 그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삼상 23:7~28, 31:1~5).
위 기록들은 우리의 자의적인 확신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가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외친다 해도 이 확신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망상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1~12). 주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믿음과 확신으로 올 한 해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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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들서재 2021. 8. 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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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5일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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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한 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 공략을 시작으로 가나안 땅 점령을 명하십니다.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고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이른바 애굽 탈출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대부분이 광야에서 태어나 그저 만나를 먹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방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1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여리고 성 공략 장면을 보면 자신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진정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여호수아를 위시하여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들을 섬기는 민족들을 하나하나 섬멸해가는 과정을 보면 이전 세대의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 두 손을 놓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우가 있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정탐꾼을 보내며 전쟁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수 2:1, 7:2 등). 출애굽 1세대 때에는 믿음도 부족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고 불이 솟아났으며, 불의를 저질러도 높이 들린 놋뱀만 보면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스스로 앞서 나갈 수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 1:30:~32)
출애굽 1세대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으며, 이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그들은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바뀌어야 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결과 2세대는 하나님의 용사로 거듭났으며 우리보다도 앞서 가셔서 싸우는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힘들고 절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과연 나 자신의 믿음이 출애굽 1세대의 믿음인지 2세대의 믿음인지를 점검하고, 만약 1세대의 믿음이라면 어린 아이와도 같은 믿음을 장성한 사람의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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