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구분하십니다” 分けられ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마태복음 25장을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도 조금 길긴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오셔서는 모든 민족을 앞에 모으시고 난 다음에 이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를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상징이냐 하면, 34절과 41절에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を受け継ぎなさい。
반면에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1.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그리고 마지막 구절,
마태복음 25장 46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6.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고,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영벌 즉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 보면 마귀들을 그릴 때에 염소뿔이 달린 것처럼 그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이와 같은 성경 구절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정말로 양은 구원을 상징하는 동물인 반면에 염소는 마귀나 지옥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당연히 거룩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엄격하게 구체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구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레위기 22장 18절~19절
“18.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アロンとその子ら、またすべてのイスラエルの子らに告げよ。だれでも、イスラエルの家の者、またはイスラエルにいる寄留者がささげ物を献げ、誓願のささげ物あるいは進んで献げるものとして、全焼のささげ物を主に献げる場合、
あなたがたが受け入れられるには、それは牛、羊、あるいはやぎのうちの、傷のない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
그 외에도 성경에 보시면 양과 염소를 항상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양은 거룩하고 염소는 부정하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구분하시는 과정에서 양과 염소로 표현하셨을까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예를 들어서 양을 한자로 쓰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 양 양자가 있지요. 이 글자 하나를 쓰면 이것이 곧
양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혹시 염소를 한자로 나타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예, 이는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습니다만 염소를 한자로 쓴다고
한다면 산양(山羊)이라고 씁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양과 염소는 분명 다른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 양과 염소를 동일하게 취급해오기도 해왔었다고도 하니 역시 이 점을
반증해주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 큰 양이나 염소는 저 같은 비전문가라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아직 어렸을 때에는 이게 양인이 염소인지는 대단히 구분하기가
어렵잖아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으로 사진을 구분해봤는데 어렸을 때에는 정말 어느 쪽이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주님이 굳이 양과 염소로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사람의 눈으로 볼 경우 겉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간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차이를 알아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우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양으로 구분된 구원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40절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37.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9.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그랬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시지요. 여기서 작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몸집이 작다거나 아니면 나이가 어리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정말로 내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구들, 또는 권력자들이나 부자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에요.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내가 잘해주었다면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6장 33절~34절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たちに良いことを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人に貸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だけ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罪人たちに貸しています。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그야말로 나한테 아무리 큰
돈이 거저 생기더라도 밥 한 끼 안 사주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내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으며, 이를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에 왼쪽에 있는 사람들, 염소로 구분된 저주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2.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44.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작은 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지극히 작은 자,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곧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에 대해 꾸짖고 계신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우선 오해를 없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을 좀 덜어 드리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이 사람들은 왜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한 둘은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운 사람, 정말 나한테 해를 끼쳤던 사람, 내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얄밉고 이기적인 사람,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선뜻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우리는 억지로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서 밥 한 끼라도
사주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뭐 그래도 괜찮겠습니다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여기 보시면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어려움을 겪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도와주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부담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에게 거금을 빌려 달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대단한
도움도 줘야 하느냐 하면, 아니요.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다 퍼주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늘 말씀에 보시면 언제 도움을 주었다고 하십니까.
그렇죠. 상대방이 주릴 때나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잖아요.
(空腹であったとき、渇いていたとき、旅人であったとき、裸のとき、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
주릴 때라고 하다면 아주 배가 고플 때입니다. 그 때 무슨 고급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를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밥 한끼나 빵 한
개라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목마를 때라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비싼 무슨 음료수가 필요하겠습니까. 아니에요. 깨끗한 물 한 잔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잠을 잘 때가 없거나 헐벗었을 때라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집을 대신 얻어주거나 비싼 새 옷을 사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게 한다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나누어 줄 수 있는 옷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병들었을 때라고 해도 무슨 비싼 치료비를 대라는 것도 아니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큰 돈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돌보고 그리고 옥에 갇혔다면 외롭지 않게 찾아가 주거나 편지라도 써주라는 것이지요.
이를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대단한 돈이나 많은 시간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면 충분하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인데, 항상 말씀 드리듯이 이는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하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또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요.
아이고 주님, 제가 주님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합니다만, 제가 그 인간은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요한1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눈에 보이는 그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天にいる、彼らの御使いたちは、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御顔をいつも見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못 나고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나한테 아무리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가면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세요.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0장 15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마찬가지입니다. 아휴, 주님, 그 인간 아시잖아요. 그 인간이 지금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건 다 벌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한테 도움을 줄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라고 한 사람을 네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지 말라.”
「神が助けてあげなさいと言った人を、あなたが助ける必要が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주님은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또 하나의 오해를 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 누가 얘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오늘 성경에 보면 의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언제 착한 일을 했는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갖고
착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것이고 교만이 생기게 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어려운 것을 생각하기 전에, 쉽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가 도움을 줬어요. 아니,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버스나 전철에 탔을 때 나이 드시 분에게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그것도 역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이잖아요.
그러면 그와 같이 일을 하면서도 “나는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교만이에요?
이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무리 우리가 무심코 한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행기의 경우를 본다면 큰 비행기든 작은 비행기든 간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기록장치가 탑재되어 있다고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비행음성기록장치와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합니다.
우선 비행음성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 측과 관제탑, 그리고 비행기 조종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음성들이 자동적으로 녹음이
되고,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의 속도, 고도, 가속도, 기체방향, 엔진 동작, 날개 상태, 조종관 방향 등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 기록장치들은 1100도 고온에서도 30분 동안이나 견딜 수 있고 바다 깊이 6000미터 수압에도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비행기에 이어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사고와 달리 비행기
사고의 경우에는 한 번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큰 참사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장치가 우리 안에도 모두 장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기록되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되는 장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행위라고 할 수 있잖아요.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마지막 날에 우리는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행기 기장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씀 드린 그와 같은 비행기록장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듯이 우리 안에 있는 기록장치도
우리 마음대로 바꾸거나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도움을 줄 때 우리도 모르게 해야 한다? 아니요. 오히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로지 이를 위해서 이를 악 물고 힘껏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취미로 선교를 했습니까. 심심풀이로 여유 부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갔습니다. 이를 악물고 순종을 하며, 이를 악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악물지 않아요?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기를 쓰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순종이잖아요.
여러분, 순종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이 무슨 순종이에요. 그것이 아니라 나는 하기 싫은데도 내 주인이 시키니까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 순종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날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가 임했을 때 서둘러 이것저것 준비하려고 해도 그럴 여유가 없어요.
마태복음 24장 40절~42절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そのとき、男が二人畑に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女が二人臼をひいて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에 순식간에 홀연히(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 구분되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날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날이 언제 임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예, 하필이면 그 날 그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そうです。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分けられると書か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私たちは、それがいつなのか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それはいつだと申し上げましたか?
そうです。よりによってその日、私たちが全く予想だにしなかった、まさにその日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ですから、ど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そうです。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常に備え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우리의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 그 나팔이 불어오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바로 그 날,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手遅れになる前に、主が私たちにおっしゃってくださったとおりに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に残された時間のその時まで、私たちの考えより主のみ言葉に従いながら生きていく人生を通じて、
最後の日、そのラッパの音が響き渡り、主が雲に乗って来られるまさにその日に、一人も漏れることなく、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天の御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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