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회 슬기 있는 자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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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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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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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슬기 있는 자” 賢い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만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여기에 보시면, 두 부류의 여성들이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2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이 여성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여성과 슬기 없는 여성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가 3절과 4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여기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담아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슬기가 없는 자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등만 가져가고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니, 미련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등을 가져가면서 기름을 안 가져갔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문을 읽어가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일단 이 열 명의 여성이 이제 신랑이 온다고 해서 맞으러 갔어요. 여기서도 아니, 신랑은 하나인데 왜 신부가 열 명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점도 역시 좀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열 명의 여성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다고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5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예, 온다고 한 신랑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다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신랑이 이제 온다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하필이면 밤중이었다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 7절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다들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니까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여기서 보면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름을 아주 안 가져간 것이 아니에요. 그들도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뭐예요? 예,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기름이 넉넉했었나보죠?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마태복음 25장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서로 나누어 써도 충분할지 어떨지 모른다. 우리가 나누어 주면 둘 다 부족할 지도 모르니까, 그것보다는 어서 가서 기름을 파는 곳에 가서 사오는 게 낫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미련한 자들은 서둘러 사러 가지요.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5장 10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하필이면 그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어요. 그래서 신랑은 그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던 슬기로운 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예, 문이 닫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 얼마 후에 아까 그 기름을 사러 갔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사실 이 사람들도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따지고 보면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름을 사러 갔다 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그들에게 신랑의 말은 단호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자, 이렇게 끝나게 되는데, 이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우선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몇몇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는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혼인잔치는 말하자면 결혼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자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이 혼인잔치를 천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즉 성경에 있어서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신부는 우리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실 부모자식이나 형제 자매보다도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에도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은 1촌입니다만,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親等’이라고 하는데, 역시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부부라고 하는 것이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부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들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나가서 기다릴 리가 없겠지요.

더구나 미련한 자들 만이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신랑을 맞이러 나갔다고 하니, 이는 분명 곧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제가 항상 드리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에게 “믿음”이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알았어요. 신랑이 곧 온다는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들은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믿음과 말씀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슬기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등불을 켜기 위해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기름을 넣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소리가 나기를 지금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깜짝 놀라 서둘러 준비를 시작하지요.

6절에 보시면 “밤중에(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밤중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마도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는 밝았을 것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주위가 캄캄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제서야 등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제 온다고 하면 빨리 와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온다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도 좀처럼 그 모습이 안 보였나죠?

열 명이 모두 다 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등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었죠.

자, 큰 일 났습니다.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어야 할 터인데, 등불의 기름이 떨어져가요. 그래서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말합니까.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 서로가 다 모자라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이는 당연하지요. 신랑이 언제 도착할 지 모르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둘다 불이 꺼져 있어봐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모두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어서 가서 사오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미련한 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달려가서 기름을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마침 그 때 신랑이 도착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기름을 사서 돌아온 여성들은 신랑이 들어간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저희도 지금까지 기다렸었다고요. 이 날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들어가버리면 어떡해요. 어서 빨리 열어주세요.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문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엄합니다. 너희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들에게는 모두 믿음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는 분명 말씀, 그러니까 신랑이 올 것이라는 말씀을 알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함? 물론 그들은 행함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등을 들고 맞으러 갔잖아요.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기름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등불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면 유대인들의 결혼식 행사에 등불을 켜는 관례가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를 위해 그들이 등불을 준비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분량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한쪽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다른 한 쪽은 기름이 부족했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이 생각하기를 등불은 어디까지나 비상용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신랑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등불과 넉넉한 기름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분 주장에 의하면 이 때의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등잔불 같은 것이 아니라, 불이 활활 타는 횃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이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작은 등불이라도 괜찮을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캄캄한 길을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횃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횃불의 경우에는 아무리 오래 탄다 하더라도 10분에서 15분 정도라고 해요. 그러고는 꺼지기 때문에 기름을 더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길을 나서기 전의 두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슬기 있는 자 다섯 명과 미련한 자 다섯 명이 이제부터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미련한 자들은 예비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반면, 슬기 있는 자들은 예비 기름을 몇 통이고 준비했을 지 모릅니다.

만약 이 때에 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등잔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름이 필요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두 손에 무겁도록 낑낑 매고 기름을 들고 나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모습을 보고 미련한 자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신랑이 온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일텐데 무슨 그렇게 무거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있냐. 괜히 옷이나 지저분해지고 땀을 흘리면 화장도 지워질 수도 있는데 우리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가야하지 않겠냐……뭐 이러면서 똑똑한 척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슬기로운 자들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기름을 여유롭게 준비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한 여객기가 뉴욕의 공항을 이륙하자 1분만에 두 번이나 새 떼와 충돌함으로 인해서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관제소에서는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했으나 비행기 상황으로 보아서 이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설렌버거 기장은 (サレンバーガー:Sullenberger) 뉴욕 시내를 흐르는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감행합니다.

이 허드슨 강에 대한 착륙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155명의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무사히 구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셀런버거 기장은 허드슨 강에 착륙한 뒤에도 승무원과 승객들이 모두 밖으로 무사히 탈출했는지 비행기 안을 두 번이나 살피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에 자신도 탈출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201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이 허드슨 강의 주역인 설렌버거 기장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나는 평소 훈련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죠. 그는 평소에도 그런 훈련을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기장만이 아니라 다른 비행기 조종사들은 분명 그와 같은 비상착륙 훈련을 몇 번이고 해왔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휴, 세상에 항공기가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훈련을 해……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수많은 비행기 조종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동안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있는 조종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고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 (国家運輸安全委員会) (NTSB)의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0.0009%이고, 이는 438년 동안 매일 탑승해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그만큼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해서 철저하게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허드슨 강 비상착륙이라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당히 믿는 자신은 지혜롭고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있는 힘껏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저는 이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미련 자가 슬기로운 자가 되고,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가 되리라”

このように、愚かな者が賢い者になり、賢い者が愚かな者になります。

바울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그는 자신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행함이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다리 뻗고 쉬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이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보시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오시느냐 하면, 바로 “하필이면 그 때(よりによってそんな時)”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예, 그렇습니다.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 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믿음과 말씀을 통하여 넉넉한 행함으로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 앞에서 슬기 있는 자로서 인정함을 받아,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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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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