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6회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2023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4節
“4.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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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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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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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7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私たちが高められる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오늘 말씀에 보시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자기 주인한테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선 <남의 하인>( 他人のしもべ)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하인>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사람 밑에 있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밑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하는 사람,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주인이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사람에게는 이처럼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제3자는 여기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 사장과 사원을 주인과 하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고용주와 피고용주라고 하는 입장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원은 자기 스스로의 인사고과 그러니까 업무수행평가를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임금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을 승진시킬 것인지 아닌지, 월급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회사 경영진의 결정에 달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사권에 대해서 제3자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남의 회사 직원의 인사에 대해서 누구를 승진시켜라 마라, 누구 임금을 올려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가끔 보면 목사님들이 자기 자신을 놓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는 주의 종이기에 잘잘못이 있으면 주님이 판단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한국에는 이 목사에 대해서 신성시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을 목회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이 말씀이 과연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사가 신성하다면 교인들은 신성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무엇입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대단하거나 신성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나 교역자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은 모두가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인’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밑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 말씀의 구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1절~2절만 보실까요.

마태복음 7장 1절~2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 비판이나 비난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다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호평을 받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비판을 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너희가 누군가를 평가하면 너희도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재판을 하게 되면 판사가 죄인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그럼 그것을 두고 판사한테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합니까.

아니에요. 판사는 죄인에게 그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판결을 내려야 해요. 그것은 판사와 죄인이라고 하는 분명한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입장이고, 죄인은 그 판결에 승복을 하여야 하는 절대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판사한테, 당신이 판결을 내리면 당신도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나 상대방이나 똑 같은 입장, 다시 말해서 똑같이 비판을 받을 만한 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판사가 죄인을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수는 있지만, 죄인이 죄인에게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3절~4절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5절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주님께서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 트집 잡고 있는 사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들보라고 하면 대들보……말하자면 큰 나무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한테 있는 대단히 작은 흠집을 두고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너한테는 그 먼지 같은 흠집이 아니라, 나무 기둥만한 흠집이 있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일종의 착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면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되고, 내가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보다 밑에 있게 된다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들 보십시오. 정권을 누가 잡든, 여당이 야당을 칭찬하고 야당이 여당을 칭찬하는 것 보셨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 상대방에 대해서 작은 티가 있다고 트집을 잡고 있는데, 너한테는 티가 없는 줄 알아? 티 정도가 아니라 들보만한 흠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비판할 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이 있다. 내가 정의이고 상대방은 불의하다.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스스로도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끄러워서 상대방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을 비판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잘못이 없고 상대방한테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그 비판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나요? 옳기만 한가요? 주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역시 똑같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눈에는 왜 다른 사람의 티가 보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 눈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그 들보가 자기 잘못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지금 어디어디 지점 고속도로에서는 한 자동차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하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보니까 자기가 달리고 있는 지점이에요. 그런데 주변을 보니까 역주행을 하고 있는 차가 한 대가 아니에요. 자기 주변을 달리고 있는 수 십대, 수 백대 자동차가 다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중얼거립니다. 역주행을 하고 있는 자동차가 한 대라니? 나 빼고 다 역주행을 하고 있잖아?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는 자기만 멀쩡하고 다른 차들이 다 잘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어디 정치인들만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우리 이웃을 칭찬하고 높이기보다도 어떻게 하면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깎아 내리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어 보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들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십니까.


어쩌면 사실은 나 혼자만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이 내게 돌아옵니다. 비난을 하면 그 비난이 나한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하는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큰 폭력이요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잠언 18장 21절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死と生は舌に支配される。どちらかを愛して、人はその実を食べる。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몰라요.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이 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손과 발로 열심히 일을 하신 결과 천하만물을 지으셨습니까.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하는데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그리고 6절, 9절, 11절, 14절 모두 어떻게 시작하냐 하면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神は仰せられた。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시편 33편 6절입니다.


시편 33편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主のことばによって 天は造られた。 天の万象もすべて 御口の息吹によって。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능력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했던 로마서에서도 있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우리는 어려운 계약서를 쓰고 도장 찍고 공증 받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입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4편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私はあらゆるときに 主をほめたたえる。 私の口には いつも主への賛美がある。

우리가 이 세상에 천년 만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은 그 수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의 수는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말 한 마디로도 주님을 찬양하고 말 한 마디로도 이웃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높이는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칭찬하면 내가 낮아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이웃을 비판해야지 내가 저 사람보다 높아질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우리가 하인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스스로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나를 낮추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를 낮추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우리 이웃을 높일 때 내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높일 때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이 세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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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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