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202335 설교 - 로마서 강해 12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14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11節∼14節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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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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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5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キリストを着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11절부터 14절까지 말씀 중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본 다음에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1절~12절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12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성경은 지금 이 시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기라고 하는 것은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시기나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시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어떤 시기냐 하면,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12절에 보시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세요.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바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을 하십니다.
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

자, 우선 이 두 구절의 구성을 보시면,

첫째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둘째로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셋째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
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우선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전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어요.

이는 바로 복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인 죄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바로 잠을 잘 때입니다.

그렇다면 왜 잠을 자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밤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서 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힘이 센 짐승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할 수는 없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이 땅을 지배하도록 하는 축복을 주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육신의 구조가 모든 동물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맨몸으로는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힘으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뛰는 속도도 맹수들보다 사람이 훨씬 못 미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눈을 보십시오. 부엉이나 야행성 동물들은 캄캄한 밤에도 앞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사람은 캄캄한 곳에서 앞을 볼 수가 없어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작은 빛이 있어도 볼 수 있는 경우는 있겠지만, 빛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빛이 있어야 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서 그 빛이 사물에 비춘 다음에 반사되어서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데, 빛이 하나도 없으면 반사해서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밤에 어디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전혀 불빛이 없어요. 가로등도 없고 달이나 별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정말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여기 빠졌다가 저기 넘어졌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백날이 지나도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반짝이는 멋진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사람은 빛이 있어야 그 빛으로 하여금 사물을 알아본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으로 바라보아야 온전하게 보이는 것이지, 예수님 없이 바라본다면 이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41절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さばきのためにこの世に来ました。目の見えない者が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が盲目となるためです。」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ともにいた者たちが、このことを聞いて、イエスに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죄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안 보이는데 보인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분간할 수 없는데 분간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멋대로 행하고 있는데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이나 우리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무엇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이 가까웠다는 뜻은 그러면 무엇이냐 하면 이제 밤이 지나가고 낮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그렇습니다. 이제 어둠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밤, 그러니까 캄캄해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한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그저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낮이에요. 이제 세상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는 사람들한테 나에 대해서 감추어진 것이 없고 다 보여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이 낮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제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까지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말했던 것이 온 천하에 다 들리고, 분명히 한 사람한테만 귀에 대고 한 말인데 전세계에 다 전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2천년 전에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이, 말도 안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게 불가능합니까. 가끔 뉴스를 보십시오. 둘이서 나눈 은밀한 대화가 모두 녹음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제법 크기가 있는 녹음기가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녹음을 하려면 거기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갔어야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초등학생도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녹음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능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디 음성녹음 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퍼지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정말 주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욱 알기 쉽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미래 사회에 대한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허락하신 날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그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을 줄 알았던 모든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나중에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겨놓으라고 말씀하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14절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낮이 되면 다 드러나게 되니까 오히려 반대로 다 들킨다고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밤에 멋대로 하면서 놀면 즐겁지요. 그 밤이 언제까지나 안 끝나고 계속됐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밤은 끝나고 반드시 낮이 온다고 말씀하세요. 숨겨두었던 것이 모두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대비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특히 14절을 주목해서 본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ということは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ないこと

오늘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彼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私の作物をしまっ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私の倉を壊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私の穀物や財産はすべて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
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わが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休め。食べて、飲んで、楽しめ。」』
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自分のために蓄えても、神に対して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옛날에는 재산을 쌓아두려고 하면 손이 많이 갔습니다. 이 말씀처럼 곡식을 쌓아두려고 하면 곳간을 새로 지어야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돈을 쌓아 두기 위해서 무슨 창고를 지어야 합니까. 은행에 돈을 많이 넣어두면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와서, 아휴,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돈을 넣을 곳이 없네요. 그래요?

아니에요. 이제는 재물을 쌓아놓으려고 한다면, 거의 무한대로 쌓아놓을 수 있습니다. 넣을 곳이 없으니까 제발 그만 가져오라고 하는 곳이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평생 동안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곳간에 넣어둡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년 만년을 생각하고 돈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정말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는 쓸 때는 점잖게 인심도 베풀면서 쓴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디 사람이 그렇게 되나요.


그러면 얼마나 벌어야 벌만큼 벌었다는 것이 됩니까. 그 상한선이 없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승 같이 돈 한 번 못 써보고, 결국 평생동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멍멍이처럼 돈을 벌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건강은 돌보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돈만 벌다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엑스레이에 좀 이상한 그림자가 보인다면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번 돈을 병원비로 다 쓰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큰 돈을 남기고 떠났다고 해도, 그 돈을 가지고 유산이다 상속이다 해가면서 서로 싸우고 재판하고 그러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해 하실까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이 없느냐 하면, 두 가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 지금까지 공부해왔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의 헌법이 뭐였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면 풍요롭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셔서 넉넉해졌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부자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저 더 벌어들이고 더 쌓아 두어서 남은 인생 나 하나 편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신다고요?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오늘 네 목숨을 취하면 그 많은 재산들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너한테 그 많은 재산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도 있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다 잃어버렸어요.


성경에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성경은 그 사람이 믿은 대로 갚아 주겠다? 배운 대로 갚아 주겠다? 아니요. 그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요? 중요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믿음이 있고,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위해, 그리고 이웃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신다고요?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자여”가 되는 것입니다. 愚か者

마가복음 10장 17절~25절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イエスが道に出て行かれると、一人の人が駆け寄り、御前にひざまずいて尋ねた。「良い先生。永遠のいのちを受け継ぐためには、何を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なぜ、わたしを『良い』と言うのですか。良い方は神おひとりのほか、だれもいません。
戒めはあなたも知っているはずです。『殺してはならない。姦淫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だまし取っ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その人はイエスに言った。「先生。私は少年のころから、それらすべてを守ってきました。」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欠けている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が持っている物をすべて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持つ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多くの財産を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イエスは、周囲を見回して、弟子たちに言われた。「富を持つ者が神の国に入るの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弟子たちはイエスのことばに驚いた。しかし、イエスは重ねて彼らに言われた。「子たちよ。神の国に入ること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金持ちが神の国に入るよりは、らくだが針の穴を通るほうが易しいのです。」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어떻습니까. 믿음이 없었나요? 아니요. 믿음이 있었으니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이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 재물 많이 가지고 있지? 그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줘라. 네가 아무리 믿음이 있고 말씀을 잘 안다고 해도 이웃 사랑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잖니? 이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건요.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요? 이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합니다.

결국 그 재물이 많은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부자를 미워해서 그랬습니까. 아니에요. 이 말씀에 보시면 분명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いつくしんだ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큰 상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웃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에요.

하지만 그는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웃 사랑을 위해 꼭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디 돈 뿐인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노력으로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건강도 없어요? 그렇다면 기도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낮이 다가왔다는 사실, 다 드러나는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요,

둘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우리가 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시편 57편 8절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私のたましいよ 目を覚ませ。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시편 108편 2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한국에서는 새벽기도에 가면 꼭 이 구절을 말씀하세요.

하지만 이건 꼭 새벽기도에 나오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무도 진리를 모를 때에 내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게 한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싹이 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리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믿음과 말씀이 있어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에 입각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때 진정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큰 상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함을 말씀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되돌아가시겠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て行かれますか。


이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낮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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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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