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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회 축복의 씨앗
2018년 6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26편 5절~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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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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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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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의 씨앗” 喜びの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인물 중에는 잇큐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승려였는데,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 이 어린 잇큐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이 사람이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15세기 경에 쿄토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실존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이 잇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 집 가보로 삼고 싶으니까, 좋은 글을 하나 좀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청을 흔쾌히 수락한 잇큐. 즉석에서 붓으로 쓱쓱 써 내려갔는데, 그 글이 참 묘합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손주가 죽는다”

이걸 보고 그 부탁한 사람은 기겁을 합니다. 아니 무슨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말을 써주면 가보로 삼으려고 했건만, 이건 무슨 죽는다는 얘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잇큐를 보고 따졌답니다.

아니, 좋은 말을 써달라고 했는데,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손주가 죽어? 무슨 이런 재수없는 소리를 써놨냐고 화를 내면서 찢어버리려고 하자, 잇큐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랬다고 합니다.

“이 보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손주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그 다음에 부모가 죽으면 좋겠다는 겐가”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참 오묘한 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죽는데, 그 순서가 부모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그 다음에 손주가 죽고 그래야 정상이고 복된 것이지, 부모와 자식이 아직 살아 있는데 손주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자식이 죽고, 마지막에 부모가 죽는다고 한다면 이는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는 것이겠지요.

이 이야기를 잇큐가 했다는 설도 있고, 센가이라는 사람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순서에 따라서 의미가 대단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는 순서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혼자서 힘들어 하는 일도 적지 않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면 왠지 청소를 하고 싶어져요.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책이 읽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게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음식을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죠. 요리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지만, 라면을 만들 때에 본다면 이것도 순서와 차례가 있습니다. 일단 물을 넣은 다음에 끓기 시작했을 때 라면을 넣어야지, 물과 라면을 먼저 넣고 끓이면 나중에는 면이 퉁퉁 불어버리고 맙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도 문제를 한 가지 내겠습니다. 기쁨과 축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일까요.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기뻐하면 축복이 온다……가 맞을까요, 아니면 축복이 오면 기뻐한다……가 맞을까요.

가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목에 힘을 좀 줍니다. 자기가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 직분을 받았다 하면 그게 목에 힘을 줄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잘난 척을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잘 모를 때도 적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기뻐하면 축복이 오나요? 아니면 축복이 오면 기뻐하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축복이 오고 좋은 일도 일어나고 해야지 기뻐하는 것 아닌가요? 아직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뻐하기부터 하라는 건 이상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속담은 무엇입니까.

복이 오면 웃어요? 아니면 웃으면 복이 와요?

예, 세상에 있는 속담에 보면 복이 온 다음에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우울해지고 고개를 숙이고,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어디로 가요? 예, 기도원으로 갑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요. 그런데 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아, 정말 답답해합니다.

주여~ 주여~ 응답하소서~ 불로~ 불로~ 불로~

저도 가끔 기도원에 가서 그런 모습을 보면요, 그런 분이 옆에 있으면 정말 참 안쓰럽습니다. 제가 기도원에 그리 많이 가본 편은 아닙니다만, 기도원에 가 보면, 정말 기쁨이 없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슨 죄를 짓고 끌려온 사람들 같습니다. 금식을 해도 기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얼굴에 기쁨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축복이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아는 분이 있었습니다만, 이 분 아버님이 탤런트, 중견 배우세요. 저도 성함을 듣고는 몰랐는데 얼굴을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이 아버님은 상당히 젊었을 때부터 배우를 해오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아버님이 어느 날 자기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겁니다.

이상하게 자기가 마음이 기쁘고 좋을 때에는 배역이 좋은 게 들어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 마음 상태가 좀 안 좋아요. 집안에 우울한 일이 있거나 근심 걱정거리가 있어요. 그러면 이상하게 무슨 살인범, 전과자, 사기꾼……이런 배역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마 자기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 눈에는 자신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보여서 그런가보다……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변 사람들보다 덜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십니다. 얘가 지금 축복을 받을 만한지 아닌지를 살펴보십니다.

아니, 좀 좋은 배역도 주고, 주인공 자리도 주고 그래야 표정도 좀 펴지고 그러지, 좋은 일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어? 사람 생각으로는 이럴 수 있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뭐예요? 좋은 일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니까 좋은 일들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상대방을 위해서요? 아니요. 우리, 나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니가 애써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정말 나쁜 사람이면 내가 벌을 줄게. 너는 그냥 용서해. 그게 너를 위한 거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빌립보서 2장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喜んでください。私といっしょに喜んでください。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이 외에도 성경은 여기저기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마음이 슬프고 근심 걱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억지로 표정관리 하라는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뻐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이 무엇이길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일까요. 누구는 이러실지도 모르겠지요.

“좋은 일도 없는데 기뻐한다면 그게 정상적인 것이냐.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

여러분께서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답을 풀 힌트가 바로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26편 5절~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涙とともに種を蒔く者は、喜び叫びながら刈り取ろう。種入れをかかえ、泣きながら出て行く者は、束をかかえ、喜び叫びながら帰って来る。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70년이 지난 후에 귀환을 하게 되는데 그 때의 모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제 포로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그리고 서러운 타향살이를 마치고 내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꿈에도 그리던 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면 뭘 합니까. 나라의 땅은 온통 황무지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어서, 당장 나무에 난 열매를 따서 먹어도 모자랄 판에, 벌판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제 자기들 손으로 하나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니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그래서 여기 보면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그냥 아, 지금 힘들어도 고생을 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식의 세상적인 무슨 윤리책에 나올 법한 내용으로 이해를 한다면, 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합니다. 여러분 혹시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사람 지금 억지로 종살이를 하면서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일까요? 난 일을 하기 싫은데 주인이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냥 아무 일도 없는데도 히죽히죽 웃고 있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만약에 우리 주위에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혹시 어딘가 몸이 불편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니다. 어쩌면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인가요? 항상 기뻐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기뻐한다는 건 뭐예요? 그래. 웃는 것, 그럼 시도 때도 없이 히죽히죽 실실 웃는 것?

여러분, 믿음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러라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는 감사가 넘칩니다. 희망이 넘칩니다. 감사와 희망은 절망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좌절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신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기쁨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행동을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기뻐했더니 축복을 받았더라……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父は今に至るまで働いておられます。ですからわたしも働いているのです。」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도, 귀찮은 일은 사람들한테 시키면서, 본인들은 가만히 앉아 계신,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천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일을 해야지요.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냥 가만히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을 시간이 있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に命じたではないか。強くあれ。雄 々(おお)しくあれ。恐れてはならない。おのの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行く所どこにでも、あなたとともにあるからである。」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축복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힘써 싸웠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배고프다고 내 손 안에 있는 씨를 먹어버리면, 지금 그 순간은 배가 조금 부를지 모르지만, 이제 그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렸습니다. 무엇을 뿌렸을까요. 물론 곡식이었겠지요. 하지만 농사에 대해서 조금 지식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논이나 밭이라고 아무데나 무조건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란다는 보장이 있나요? 아니요. 계속 가꾸어 주어야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뿌린 그 땅은 무려 70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땅이었습니다. 몇 번 간다고 해서 몇 개월 후에 수확할 수 있다고 하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이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마치게 하고 다시 이스라엘 돌려보내셨다. 그렇다면 우리를 굶어 죽이기 위해서 보내셨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싹이 나고 수확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이제 씨를 뿌려야 해.


이사야 43장 19절~20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事をする。今、もうそれが起ころうとし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確かに、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わき出させ、荒地に川を流し、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광야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기쁨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기쁨이 있다고 해서 항상 웃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그것은 내 생각대로 안 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도 얼른 풀어주어야 하잖아요. 70년이 뭐예요? 70년이. 그리고 풀어주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했다면 옥토를 주어야 하잖아요? 온 땅이 황무지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참 눈물 밖에 안 나와요.

하지만 뭐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쁨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과거에 포로로 끌려갔었으면 어때요? 지금 눈앞이 황무지면 어때요? 지금 씨를 뿌려서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쁨을 바라보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自分の肉のために蒔く者は、肉から滅びを刈り取り、御霊のために蒔く者は、御霊から永遠のいのちを刈り取るのです。

우리가 우리 욕심을 따라 심기만 한다면 썩어질 것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말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축복은 권리가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먼저 기뻐합시다. 일단 기뻐합시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합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은 단순한 감정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제 기쁨이라고 하는 축복의 씨앗, 기쁨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주님 앞에 드림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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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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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회 목적이 있는 삶이란
2018년 6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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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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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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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목적이 있는 삶이란” 目的がある人生とは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있어서 보다 더 값지고, 보다 더 알차고, 보다 더 희망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목적이 없다면, 이는 줄 끊어진 연이요, 돛대 없는 배요, 핸들 없는 자동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이런 내용의 설교말씀이었다면 제목을 <목적이 있는 삶>이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제목에는 굳이 마지막에 <…이란>을 붙여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앞서 말씀 드렸던 내용에 이상한 점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보다 값지고 알차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믿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은 어제 오늘 들은 말이 아니지요? 어렸을 때부터 학교 수업, 바른생활이나 도덕, 국민윤리 같은 과목에서 익히 들어왔던 내용입니다. 또는 공부 많이 하신 강사님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강연이다, 뭐 이런 시간에 제법 할만한 내용이기도 하겠지요. 이는 절대 나쁜 말은 아닙니다.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 자녀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또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 있어서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성경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혹시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 삶은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 맞나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많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도 특별히 어렸을 때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설정해 놓고, 그대로 살아갔던 사람을 세 명만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세 명이 아니라면 두 사람? 아니, 한 사람 정도는 꼽을 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이요? 아브라함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나요? 아브라함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서 가나안 땅으로 갔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
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のろう者をわたしはのろう。地上のすべての民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시기가 언제예요? 아브라함이 아직 청년이었을 때였나요?

다음 구절, 창세기 12장 4절 후반부에 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アブラムがハランを出たときは、七十五歳であ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즉, 그의 인생은 청년은 고사하고 그의 나이 75세 때에 비로소 인생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인생의 목적? 그게 무슨 구체적이었어요? 그냥 어딘지도 모르는 땅, 하나님이 그저 가라고 하는 땅을 향해서 가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뚜렷한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대단히 불안한 인생의 목적, 그것도 이제 인생 황혼기에 갖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한 목적의식이었습니다.

모세는요? 그는 마흔 살까지는 애굽 왕실에서 자랐습니다만, 나이 마흔에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광야에서 소리소문 없이, 그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パロのもとに遣わそう。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人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せ。」

당시 모세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예,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와 그의 형인 아론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パロ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모세도 그가 언제 핍박 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내겠다고 자신의 인생목표를 정한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 때, 모세는 그의 나이 80세 때 비로소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인생이 실패작이었다. 모자란 인생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요. 모자라기는커녕 엄청나게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너무 나이 든 사람 이야기만 했나요? 그렇다면 젊은이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 이들은 모두 그의 나이 서른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요셉은 당시 최고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실질적으로 지배를 하게 되며, 다윗도 그의 나이 서른에 온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이 됩니다.

그러면 요셉이 언제 애굽 총리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적을 가진 적이 있나요? 다윗이 언제 온 이스라엘과 유다 왕이 되겠다고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그들은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인가요? 그 결과 값지지도 못하고 알차지도 못하고 성공적이지도 못한 삶을 살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누구보다도 값지고 알차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갖고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지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젊었을 때부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대로 성공적으로 살아갔던 사람이 없어요.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수수께끼, 어쩌면 앞뒤가 말이 안 맞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이 수수께끼를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문장에는 주어나 동사, 목적어 등이 있습니다만,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하면 아무래도 이 <주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예를 들어서 <의무교육>이라는 말씀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의무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의무교육>이라는 말, 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왜 <의무교육>이라고 했을까요.

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교육.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졸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하는 교육이다……혹시 제 말이 틀렸다고 하는 분 계신가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만, 이 말은 분명히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법 제8조에 보면 초등학교 6년의 의무교육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만 이 조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教育基本法
第五条 国民は、その保護する子に、別に法律で定めるところにより、普通教育を受けさせる義務を負う。

교육법 제8조,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을 받을……의무가 있다? 아니요.

대한민국 교육법 제8조에는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음? 그럼 의무가 아니잖아요? 그럼 의무는 없는 건가요? 아니요. 다음 조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육법 제8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국가와 지방공공단체는 전항의 초등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여야 하며 학령아동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은 그 보호하는 아동에게 초등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

누구에게 의무가 있어요? 예, 의무는 아동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이 아동에게 교육을 받도록 해줄 의무, 교육을 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동한테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한테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고, 아동의 보호자한테 그 아동이 교육을 받도록 해줄 의무가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의무교육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의무교육에서 <의무>의 주어는 아동이나 학생이 아닌 쉽게 말해서 그 학생의 <부모>한테 있는 것이지, 아동이나 학생은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가 바뀜으로 인해서 그 법조문의 해석, 나아가 그 나라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아브라함이나 모세, 요셉이나 다윗의 인생은 어떻게 해서 스스로 목적을 갖고 그대로 살아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목적을 갖는 주어>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누가 내 인생의 목적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나>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겠지만, 아브라함이나 모세, 요셉이나 다윗은 본인들의 인생에 있어서 그 목적을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相続財産として受け取るべき地に出て行けとの召しを受けたとき、これに従い、どこに行くのかを知らないで、出て行きました。
信仰によって、彼は約束された地に他国人のようにして住み、同じ約束をともに相続するイサクやヤコブとともに天幕生活をしました。
彼は、堅い基礎の上に建てられた都を待ち望んでいたからです。その都を設計し建設されたのは神です。

아브라함은 자기 스스로가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목적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을 바로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마당에 자기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彼の主人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主が彼のすることすべて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のを見た。

창세기 39장 23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監獄の長は、ヨセフの手に任せたことについては何も干渉しなかった。それ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彼が何をしても、主がそれ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る。

요셉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렸더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이 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노력했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다윗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모두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나이 서른에 왕위에 오르고는 40년 동안이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 목적을 갖고 계획을 세운다>라는 말에 있어서 주어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은 허망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계획은 확실하고 성공적인 계획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목적이 있는 삶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 목적을 맡겼습니다. 계획도 맡겼습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실망하지 말기, 좌절하지 말기, 절망하지 말기, 포기하지 말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이 좀 안 풀리거나 하면 쉽게 답답해하고 근심 걱정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러지요.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제 지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름도 널리 알려진, 꽤 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회사에서 1년짜리 계약직 사원을 서너 명 정도 뽑기로 했었대요. 그래서 회사에서 공고를 냈는데, 그런데 세상에, 지원자가 몇 백 명이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중에는 유명 대학의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멋도 모르고, 그렇게 스팩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니 잘 됐네요. 그럼 그런 사람들을 뽑았냐고 물어봤더니만, 그 분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뽑냐는 거예요.

그래서 왜냐고 제가 물어봤더니만, 앞서 말한 대로 계약기간은 1년뿐이고 업무 내용도 단순업무보조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월급도 높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취업준비중인 전문대졸업생 정도를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유명 대학의 대학원 석사나 박사들을 뽑아버리면, 결국 너무나도 단순한 업무 때문에 얼마 못 있고 그만둬버린다는 거죠.

그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럴 것 같았습니다. 유명 대학 그것도 석사나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을 앉혀놓고 기껏 시킨다는 것이 단순한 업무보조이고, 그것도 기껏해야 1년짜리 계약직인데, 아무리 취업난이라고 해서 지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오래 버티기는 힘들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그 유명대학 석사 박사 출신들은 떨어졌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서까지 회사에서는 설명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 정말 세상 살기 힘들구나. 내가 그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해서 힘들게 유명대학 석사나 박사가 되었지만, 그깟 1년짜리 계약직도 떨어지는구나……이렇게 실망하고 좌절했다면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아닌데, 그 정도 스펙이라면 1년짜리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나, 아니면 자기 회사보다도 더 좋은 곳에 지원해야 마땅할 것 갈아서, 너무나도 능력이 뛰어나서 떨어뜨린 것인데,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했다면, 이는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어릴 때에 생각하기를, 아, 나는 커서 군마에 가서 살 거야……이렇게 생각해서 지금 군마에서 살고 계신 분 계십니까. 그런 분은 아마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왜 군마에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다 보니 일이 꼬이고 인생이 안 풀리고 어쩌고 어쩌다 보니 이곳 군마까지 오게 되셨습니까.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지금 군마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이러면서 사람들은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 부족한 우리 사람들의 생각일 뿐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아무리 값어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도 누군가가 그것을 100만원에 샀다면 그것은 100만원의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어제 뉴스를 보니까 일본 시부야에서 피카소 그림의 경매가 있었는데, 피카소 그림 한 장이 10억엔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제게 10억엔이 있었다면, 저라면 그 그림은 안 샀을 거예요. 하지만 10억엔에 팔렸으니, 아무리 제게는 대단하지 않은 그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 그림의 가치는 이제 10억엔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우리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우리의 가치,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て言った。「あなたは、巻き物を受け取 って、その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ほふられて、その血により、あらゆる部族、国語、民族、国民の中から、神のために人々を贖(あがな)い、私たちの神のために、この人々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上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보혈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주님의 보혈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어요? 그렇다면 실망하십시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좌절하십시오. 절망하십시오. 예수님께서 포기하셨다면 우리도 포기하십시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족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생명과 동등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버리시겠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포기하시겠습니까.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その人の歩みを確かなものにするの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랍고 축복된 계획이 있으십니다. 지금 힘들더라도 실망하지 맙시다. 좌절하지 맙시다. 절망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깁시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이 우리 삶과 목적의 주어가 되셔서 우리 삶을 계획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주님 손에 맡기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삶, 승리하는 삶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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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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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회 잘 믿으려면(2)
2018년 5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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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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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 믿으려면(2)” よく信じるためには(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무엇보다 회개를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똑 같은 죄인이었으나 회개를 제대로 못한 사울과 회개를 기가 막히게 잘한 다윗을 비교해서, 그들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회개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말로 해본다면 <이웃을 사랑하자>이겠지요? 자,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립니까.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ひとりの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ため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たいせつな戒めはどれですか。」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
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
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대해서 아직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중요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조금 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에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그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셨는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첫째 계명처럼 큰 계명,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만큼 중요한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해야 하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 사랑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를 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면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〇〇가 필요하다. 자, 여기에 어떤 단어를 넣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까.

물론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하신 분들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용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そのとき、ペテロがみもとに来て言った。「主よ。兄弟が私に対して罪を犯した場合、何度まで赦すべきでしょうか。七度まででしょうか。」
イエスは言われた。「七度まで、などとはわたしは言いません。七度を七十倍するまでと言います。

마태복음 6장 14절~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し人の罪を赦すなら、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います。
しかし、人を赦さないなら、あなたがたの父もあなたがたの罪をお赦しになりません。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罪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罪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も赦されます。

이처럼 성경에는 <용서>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이걸로 만족한가요? 이렇게 적어놓으면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그럴 듯한 것, 이는 때로는 대단히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사회에 있어서도 이처럼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한 회사에서 어느 날 김대리가 부장님한테 하루 쉬겠다고 휴가원을 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부장님이 대뜸 이런 말을 하더래요.

"이봐, 김대리. 1년은 365일이지? 하루는 24시간이고. 그 중 자네 근무시간은 8시간이지?
하루의 3분의 1을 근무하니까, 결국 1년에 자네가 일하는 날은 122일 밖에 안 된다는 얘기야. 그 122일 중에서 52일의 일요일이 있고, 반만 일하는 토요일을 26일로 치면 겨우 44일이 남아.
그걸 자네가 다 일하나? 밥 먹는 시간에 화장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담배 피우는 시간까지 합치면 하루에 최소한 3시간은 빠진다구. 그걸 다 빼면 자네가 일하는 시간은 27일 이라는 소리지.
게다가 자네 여름휴가는 열흘이지? 그럼 27일에서 열흘을 빼면 17일이 남는군. 그 중에서 신정, 구정, 한글날,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석가탄신일,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추석, 크리스마스, 그리고 회사 창립기념일까지 하면 휴일이 총 16일이야.
결국 자네가 제대로 일하는 날은 1년에 딱 하루라 이거야. 그런데 그 하루마저 휴가원을 내면, 아예 놀고 먹겠다는 건가? 자네도 입이 있으면 대답 좀 해보게."

이렇게 부장님이 다그치더랍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김대리. 물러서지 않습니다. 김대리는 대단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부장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부장님, 전 너무 피곤해요. 왜 그런지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4,500만 인구 중에 2,500만은 노인이나 실업자 아니면 퇴직자들이에요. 그럼 남은 인구는 2,000만명입니다. 그 중에서 1,600만은 학생이거나 어린이들이죠. 그럼 400만이 남습니다. 현재 100만 명이 국방을 위해 군대에 있거나 공익 근무 중이고, 100만 명은 국가공무원입니다. 그럼 200만이 남는 거죠? 또 180만명이 정치를 하거나 지자체 공무원들이니 남는 건 20만명, 그 중에 18만8,000명이 병원에 누워 있으니 겨우 1만2,000명이 남죠. 그리고 그 1만 2000명 중에서 1만1,998명은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니 결국 대한민국에는 지금 두 명이 남아서 화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부장님과 저예요! 그런데 부장님은 매일 제가 올린 보고서에 결재만 하고 있으니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에서 오직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피곤한지 아시겠죠.”


여러분 어떠세요? 이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도 그럴 것 같지 않으세요? 물론 김대리가 1년에 단 하루밖에 일을 안 한다는 말이나, 대한민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김대리 하나라는 말은 모두가 다 거짓이죠. 제가 드린 이 말씀 중에는 분명히 오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내용 중에서 어디가 오류였는지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만, 이처럼 겉모습이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는 간혹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만약에 아직까지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あなたがたは、 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라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면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좋은 소리를 많이 할까요, 안 좋은 소리를 많이 할까요. 잘 모르세요? 들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좋은 소리를 많이 한다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줄어들겠어요?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인데, 그럼 나도 믿어볼까? 그렇지 않겠어요?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예,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다 깍쟁이래요. 이기적이래요.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중에는 “이웃을 용서해주면 이웃과 화목해질 수 있다”고 믿는 이 허황된 믿음이 일조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럼 용서가 아니라면 뭘 하면 되나.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제발 사과 좀 제대로 하면서 삽시다.

용서와 사과. 똑같은가요? 아니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렇죠. 용서는 나에게 잘못이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용서이고, 사과는 상대방에게 잘못이 없고 나한테 잘못이 있을 때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죠.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게 많아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한테 잘못한 게 많아요? 어떠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게 많은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다, 깍쟁이다 하는 말을 듣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59절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あなたを告訴する者といっしょに役人の前に行くときは、途中でも、熱心に彼と和解するよう努めなさい。そうでないと、その人はあなたを裁判官のもとにひっぱって行きます。裁判官は執行人に引き渡し、執行人は 牢に投げ込んでしまいます。
あなたに言います。最後の一レプタを支払うまでは、そこから決して出られないのです。」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떠신가요? 적어도 세상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친구나 아니면 사업상 거래처와 다툼이 붙었어요. 그래서 얘기를 아무리 해도 안 되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뭐 어쩌고 어째? 좋아.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우리 법정에서 보자!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뭐가 무서워? 정 그러면 법적으로 판가름을 내보자!


글쎄요. 이게 좀 더 사나이 답지 않으세요?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 니가 맞겠지. 하지만 만의 하나. 니가 지면 어떡할 거야. 그걸 생각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참 겁쟁이 같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게 없는데 뭐가 문제야? 한 번 붙자고 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다가 너 까딱 잘못하면 큰 일 난다. 그러면 너 어쩔거냐. 그걸 걱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라세요? 예,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요. 용서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상대방이 잘못했다면 용서를 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화목할 수 있겠습니다만, 내가 잘못해 놓고도 그럴 수가 있을까요? 내가 잘못해놓고 상대방한테 내가 너를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가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아니야. 니가 혹시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너 자꾸 너만 잘했고 남들만 잘못했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잘한 것 같더라도, 혹시 또 모르니까 다투지 말고 차라리 상대방과 화해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상대방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잘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99%는 내가 잘한 것 같아. 하지만 1%는 내가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 1%로 인해서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 다니시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과 사람에게 하는 사과를 종종 혼돈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어떤 영화……를 제가 보지는 못했고 그냥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요약만 봤기 때문에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그 영화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는 거예요. 어느 젊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해 당했는데, 나중에 어느 교회에 가보니까 그 죽인 범인이 교회 앞에서 간증을 하더래요.

그런데 그 간증 내용을 보니까, 자기는 교도소에서 있을 때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니까 예수님이 자기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단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저는 이제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목격한 그 부모는 통곡을 하면서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어요? 정작 피해를 당한 자신들한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는 교도소에서 주님께 회개했으니까 자신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러면 이제 된 건가요? 이건 화해도 아니고 화목도 아닙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종종 사과를 해야 하는 마당에 어떤 단어를 쓰나요? 예, <유감>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런데 이게 사과의 뜻이 있는 말인가요?

이 유감이라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広辞苑
思い通りにいかず心残りなこと。残念、気の毒

라고 되어 있어서,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사과하는 데에 쓰이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말만 들으면, 피해를 당한 쪽 사람의 말인지, 피해를 가한 쪽 사람의 말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이런 유감인지 뭔지 하는 모호한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하죠. 자존심 상한다 이거예요.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내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본래 사과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과라고 하는 것은 본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과를 하면서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겠다? 이건 물건을 사면서 돈을 안 내겠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과를 한다면서 유감인지 뭔지 애매모호한 말로, 무슨 고개를 숙이는데 연막을 쳐서 고개를 숙인 게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모르게 하는 식으로 하는, 이걸 사과라고 해요. 이렇게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어떻게 이웃과 화목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화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서 내가 만약에 지각을 했어요. 아니면 내 실수로 업무에 차질을 빚게 됐어요. 또는 내 실수로 회사나 거래처에 손해를 끼치게 됐어요. 그래서 사장님이 막 화를 냅니다. 이봐, 홍성필씨,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지금 난리가 아닙니다.

그럴 때 그 자리에서 제가 “아, 사장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해요? 그러면 뭐라 그러겠어요? “아니, 도대체 사과를 어디 그따우로 하냐고 혼이 더 나지 않겠어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과 화해하기 위해서,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물론 봉사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과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사과라고 하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사과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이것이 곧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웃과의 화해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실까요. 단순하게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랑, 이웃과 화해하는 것, 어느 쪽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だから、祭壇の上に供え物をささ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もし兄弟に恨まれていることをそこで思い出したなら、
供え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いたままにして、出て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来て、その供え物をささげなさ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이웃과 화해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실 것도 같은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일보다 먼저 이웃과 다툼이 있거든 화해하고 나서 그 후에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보다 못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과 화목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그건 참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입니다. 지금은 좋은 일은커녕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기쁘고 놀라운 일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요건입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이웃이 우리에게 잘해주었을 때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웃을 사랑해야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사랑만큼 주님이 바라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좀 소박한 질문을 해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신학적인 답, 성경적인 답도 있겠습니다만, 한 마디로 말씀 드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한 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웃 중에 좀 서먹서먹해진 분이 계신가요? 이번 기회에 한 번 다가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건네보세요.

저기…미안해……내가 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사과할게……

부끄러우신가요? 수치스러우신가요? 자존심 상하나요? 하지만 이 한 마디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깁시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모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이웃한테 제대로 된 회개와 제대로 된 사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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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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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회 잘 믿으려면(1)
2018년 5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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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 믿으려면(1)” よく信じるためには(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잘 믿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을 잘 믿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소박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믿음의 역사 속에서 오랜 갈등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지요.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볼까요?

자,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예, 기도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예물도 중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기도도 많이 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헌금도 많이 내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아요. 그러면 뭐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완벽하게 지키면서 살아올 수 있었나요? 그럴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틀렸나요? 이제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잘 해야 합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해주셨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가 있을 때에는 사람의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됩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て、言われた。「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

이 말씀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원지가 있습니다. 유원지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10시가 되니까 담당자가 앞에서 이렇게 안내를 합니다.

“입장권을 구입하세요. 오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말은, 유원지 오픈 시간이 되었으니까, 입장권을 구입하면 유원지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 뜻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를 뒤집어보면, 아무리 유원지 오픈 시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입장권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뜻이 되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입시켜 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회개를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회개를 안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유원지가 오픈 했다 하더라도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으면 유원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요, 아무리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더라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으니 이제 회개를 하지 않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공생애 기간이 대략 3년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부터 3년 동안은 회개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내가 십자가에 달린 다음에는 회개 없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는 것인가요? 그런 말씀이 도대체 어디 적혀 있습니까. 왜 성경을 자기 멋대로 편집하냐는 말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회개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어요. 우리가 양 바치고 염소 바치고 해서 제사를 드림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모두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양을 수 백마리 수 천마리 바친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가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도저히 우리의 죄가 해결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베드로전서 1장 18절~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ご承知のように、あなたがたが父祖伝来のむなしい生き方から贖(あがな)い出されたのは、銀や金のような朽ちる物にはよらず、傷もなく汚れもない小羊のような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ったのです。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귀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 사람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에 적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고로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인가요? 정말로 나쁜 사람들만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죄이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죄와 상관이 없나요? 아니요. 죄는 항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따먹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로고 하신 것을 하는 것이 죄인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가려 하더라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회개를 해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해달라고 말씀을 드려야지요.

성경에 보면 회개를 잘 못하는 사람과 회개를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사울과 다윗이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그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사무엘이 사울한테 말하기를, 이제 너희 집안을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사울이 말합니다.

イスラエルのすべてが望んでいるものは、だれのものでしょう。それはあなたのもの、あなたの父の全家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


사무엘상 9장 21절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サウルは答えて言った。「私はイスラエルの部族のうちの最も小さいベニヤミン人ではありませんか。私の家族は、ベニヤミンの部族のどの家族よりも、つま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どうしてあなたはこのようなことを私に言われるのですか。」

아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가문은 수도 적고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과분한 말씀을 하십니까……

본래 사울은 이처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왕위에 오르고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자 이제 그 겸손함은 사라지고 오직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면 하나님이 가려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출 때 비로소 하나님을 높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에 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サウルは、サムエルが定めた日によって、七日間待ったが、サムエルはギルガルに来なかった。それで民は彼から離れて散って行こうとした。

여기 보면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아직 이레가 다 차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흩어지니까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하나님 생각보다 내 생각을, 하나님 말씀보다 내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무엘이 해야 할 제사를 자기가 드립니다.

이 일을 보고 사무엘이 격분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あなたは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今は、あなたの王国は立 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あなたが、主の命じられたことを守らなかったからだ。」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사무엘이 생각하기를 어쭈? 내가 해야될 일을 니가 마음대로 해? 뭐 이러면서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울 왕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사무엘이 왕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해야지요. 기계는 고장 날 수가 있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기계는 수리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를 하면 되요.

그런데 13장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이나 사무엘한테 회개를 했다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죠. 뭐? 내 나라가 길지 않아? 에이, 무슨 소리. 지금 내가 왕으로 있고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누가 날 위협할 거야……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봅니다. 15장 1절~3절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主は私を遣わして、あなたに油をそそぎ、その民イスラエルの王とされた。今、主の言われることを聞きなさい。
万軍の主はこう仰せられ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上って来る途中、アマレクがイスラエルにしたことを罰する。
今、行って、アマレクを打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せよ。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子ども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せ。』」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 9절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しかし、サウルと彼の民は、アガグと、それに、肥えた羊や牛の最も良いもの、子羊とすべての最も良いものを惜しみ、これらを聖絶 するのを好まず、ただ、つまらない、値打ちのないものだけを聖絶した。

하나님께서는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사무엘은 자기 생각대로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을 진멸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아~ 좋은 것은 하나님 드리려고 그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모두 멸하라고 했으면 멸해야지요. 왜 제대로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회를 주어도 사무엘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보면 참 가면 갈수록 가관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翌朝早く、サムエルがサウルに会いに行こうとしていたとき、サムエルに告げて言う者があった。「サウルはカルメルに行って、もう、自分のために記念碑を立 てました。それから、引き返して、進んで、ギルガルに下りました。」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도 모르는 사람은 참 무섭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겨놓고도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아말렉을 공격했다면, 그 일이 끝난 후에는 사무엘을 만나서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사울은 완전히 천방지축입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대로 아말렉을 공격하고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고, 또한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 하나 떡 세우고는 후딱후딱 돌아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사무엘도 참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너는 이러이러한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다……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요? 아이구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제발 제 죄를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뭐라고 했는지 한 번 볼까요?

사무엘상 15장 24절~25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サウルはサムエルに言った。「私は罪を犯しました。私は主の命令と、あなたのことばにそむいたからです。私は民を恐れて、彼らの声に従ったのです。
どうか今、私の罪を赦し、私といっしょに帰ってください。私は主を礼拝いたします。」

음? 이 말씀을 보면 왠지 사울이 회개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는 건, 이것만 본다면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내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게 해주세요……라고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 말의 속내가 바로 밑에 30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サウルは言った。「私は罪を犯しました。しかし、どうか今は、私の民の長老とイスラエルとの前で私の面目を立 ててください。どうか私といっしょに帰って、あなたの神、主を礼拝させてください。」

이 딱한 사울은 자신이 죄를 지어놓고서도 지금 회개할 생각보다 자신을 높여달라고 사무엘한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딱한 인생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일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サムエルは死ぬ日まで、二度とサウルを見なかった。しかしサムエル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だ。主もサウルを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ことを悔やまれた。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 후회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든 사울이 맞이할 비극은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결국 사울은 어떻게 됩니까. 길보아 산 전투에서 그의 아들들과 함께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그러면 사울에 비해 지은 죄가 없었을까요? 아니요.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신 우리아를 고의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가 오더니 다윗을 꾸짖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 1절~2절까지만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神よ。御恵みによって、私に情けをかけ、あなたの豊かなあわれみによって、私のそむきの罪をぬぐい去ってください。
どうか私の咎を、私から全く洗い去り、私の罪から、私をきよめてください。

참으로 온전히 회개를 합니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나를 높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다윗은 참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시편 38편 4절~5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私の咎が、私の頭を越え、重荷のように、私には重すぎるからです。
私の傷は、悪臭を放ち、ただれました。それは私の愚かしさのためです。

여기에는 자존심도 뭐고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이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때문에 이스라엘을 쳤더니 다윗이 어떻게 말합니까.

역대상 21장 8절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そこで、ダビデは神に言った。「私は、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大きな罪を犯しました。今、あなたのしもべの咎を見のがしてください。私はほんとうに愚かなことをしました。」


역대상 21장 16절~17절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第一歴代誌 21章16節~17節

ダビデは、目を上げたとき、主の使いが、抜き身の剣を手に持ち、それをエルサレムの上に差し伸べて、地と天の間に立 っているのを見た。ダビデと長老たちは、荒布で身をおおい、ひれ伏した。
ダビデは神に言った。「民を数えよと命じたのは私ではありませんか。罪を犯したのは、はなはだしい悪を行ったのは、この私です。この羊の群れがいったい何をしたというのでしょう。わが神、主よ。どうか、あなたの 御手を、私と私の一家に下してください。あなたの民は、疫病に渡さないでください。」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며 자기 스스로를 낮추게 되니 하나님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마음을 다해서 무릎 꿇고 회개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후회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러면 늦습니다. 늦기 전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저주가 아닙니다. 징벌이 아닙니다. 회개는 나를 낮출 수 있는 기회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거듭나서, 우리의 남은 삶 동안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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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회 받은 은혜와 받을 은혜
2018년 5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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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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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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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받은 은혜와 받을 은혜” 受けた恵みと受ける恵み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으로 대학을 가겠다는 학생들을 몇 년 동안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어능력시험도 가르쳐봤고, 한국에는 JPT라는 일본어 시험도 있는데 그 반도 가르쳐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학이라고 하는 것이 걸려있으니까 일본 유학반 학생들의 수업에서는 집중도가 매우 높습니다. 특히 제가 담당하고 있던 반은 고급반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일본어 수준도 상당했지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론 일본어 한 과목만 보는 학교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문과는 일본어, 종합과목, 수학, 그리고 영어까지 보는 대학도 있습니다. 여기에 또 대학 본고사나 면접, 논술까지도 공부해야 하니까, 현역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에 와서 몇 시간 동안이나 공부를 하고, 재수생이라면 수업도 듣고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선생님들과 상당도 하고 그러면서 거의 하루 종일 학원에서 살기도 합니다.

선생님들도 바쁘죠. 다른 시험반을 맡고 있을 때에는 그냥 저 혼자서 수업을 하고 그러면 됩니다만, 일본유학을 위한 수업에서는 이처럼 과목이 다양하다 보니까 선생님들끼리도 수시로 정보교환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학생이 어느 정도 실력이 있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 수업에서만 보면 힘들거든요. 그리고 막판에 지원할 대학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참고되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더구나 대학에 관한 문제이다 보니 학생 본인만이 아니라 때로는 학부모님들과 상담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과목을 가르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신경을 쓰는 일도 많았습니다만, 그래도 꽤 보람도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선생님께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학생들 사이에 지금 좀 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보았더니, 학생들이 서로 진로상담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갔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먼저 대학을 간 학생이 지금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한테 도움을 준다고 한다면 그나마 좀 이해가 가겠습니다만, 지금 자기도 똑같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서로 상담을 해주면서, 야, 너는 어디면 갈 수 있어, 아니야, 넌 거긴 어려우니까 1지망을 좀 더 낮춰……뭐 이러고 있다고 하니 말이 되냐는 거죠.

다른 것도 아닌 대학이 걸려 있는 문제인데, 시험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참 예민해지거든요. 그래서 예를 들어, 너 지금 가려는 대학은 안 돼, 더 낮춰 써……뭐 이런 말을 듣기라도 하면, 그게 아무리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하더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시험도 보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지망하는 대학을 낮추거나 하게 된다면 공부에 대한 의욕도 떨어지게 되지요.

물론 누가 그랬는지는 알지는 못하고 알아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그날 수업 때 단단히 주의를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성경에서 벗어나서 자기 멋대로 해석을 붙이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일부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잘못된 해석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일부 성도님들 중에서도 대단히 위험한 해석을 함으로 인해서, 그 결과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에서부터 사람들을 멀리 하도록 만드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닌 것 같으신가요? 천만에요. 지금 한국 기독교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위기인지 모르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도수가 줄고 있어요. 교회 전문 부동산 광고를 보면 교회를 팔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짜예요? 성경이 가짜인가요? 그렇다면 당연히 망하겠지요. 가짜라면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야지요. 하지만 성경은 가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가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가짜가 아닙니다.

사무엘상 2장 2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主のように聖なる方はありません。あなたに並ぶ者はないからです。私たちの神のような岩はありません。


이사야 46장 9절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遠い大昔の事を思い出せ。わたしが神である。ほかにはいない。わたしのような神はいない。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믿음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범죄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범죄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수 천년 전부터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우상을 숭배한다고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바로 다른 종교를 떠올립니다. 그렇죠.

출애굽기 20장 4절~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どんな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ねたむ神、わたしを憎む者には、父の咎を子に報い、三代、四代にまで及ぼし、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命令を守る者には、恵みを千代にまで施すからである。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떠세요? 아, 난 괜찮아. 그런 우상숭배는 하지 않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은 바로 다름 아닌 교회와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단순하게는 십자가 목걸이나 성경책 같은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십자가 목걸이가 우리를 지켜주나요? 아니요.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부적이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 목걸이를 보면서. 아니면 벽 같은 곳에 걸어놓은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은혜를 우리가 생각하고 감사하는 기회가 될 수는 있습니다만, 무슨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귀신이 다가오면 십자가를 들이대면 물러가요?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가끔 보면 성경책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터에서 총을 맞았는데, 아니면 어떤 괴한이 쏜 총을 맞았는데, 항상 가슴에 넣고 다니는 성경책을 맞아서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할렐루야” 소리가 나올지는 모릅니다만, 이 또한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の分かれ目さえも刺し通し、心のいろいろな考えやはかりごとを判別することができます。造られたもので、神の前で隠れおおせるものは何一つなく、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神に対して弁明をするの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책에 그렇게 큰 힘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성경책 속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성경책 자체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은 이것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가슴에 넣고 다녔더니 총알이 지켜주었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의 능력, 하나님 말씀의 능력인가요?

제가 신문 기사 하나를 읽어드리겠습니다.

2014년 6월 24일자 미국판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성경이 총알 막았다" 기적은 자작극

평소 셔츠 주머니에 넣어두고 읽는 포켓용 성경책 덕분에 가슴에 총격을 받고도 살아난 것으로 알려진 오하이오주 40대 버스 운전사의 기적이 자작극인 것으로 밝혀졌다.
20일 AP통신에 따르면 오하이오주 데이튼시 경찰은 지난 2월 고장 난 버스를 길가에 세우고 살펴보다 흑인 청소년 3명에게 총을 맞았다고 신고한 리키 왜고너(49)가 허위 진술을 한 것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왜고너는 흑인 청소년들이 총 세 발을 쐈는데 그중 한 발은 다리에 스치고 한 발은 땅으로 튕기고 나머지 한 발이 가슴에 맞았으나 성경책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의 권총 탄도 실험 결과 총알은 어떤 각도에서 쏴도 성경책을 쉽게 관통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 다쳤다는 상처 주변에서는 자해 때 생기는 상흔이 발견됐다.
경찰은 왜고너가 사건 당시 회사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부동산 투자 실패로 10만달러에 달하는 미납 세금 독촉에 시달리는 등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려고 자작극을 꾸민 것 같다며 여러 정황을 참작해 허위진술에 대한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런 일들은 결국 성경책이 총알을 막아준다거나 하는 허황된 우상이 만들어낸 어이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상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 받는대요? 예, 새벽예배 열심히 나가면 축복 받는다고 합니다. 기도원 열심히 가서 주여 주여 기도하면 축복 받는다고 합니다. 방언 받으면 축복 받는다고 합니다. 믿으십니까?

좋습니다. 새벽예배 드리는 게 나쁜가요? 아니요. 나쁘긴요. 좋습니다.
기도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나쁜가요? 아니요. 나쁘긴요. 좋습니다.
방언 은사 받는 것이 나쁜가요? 아니요. 나쁘긴요. 좋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회 같은 것이나, 아니면 부흥회를 하지요? 그런 행사에 반드시 나와야지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던가요?
기도원 가서 금식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던가요?
방언 은사 받아야만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새벽기도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부흥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 가서 금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에요. 방언 은사가 나쁘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무슨 축복의 필수 조건인 것처럼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시편 57편 8절이요?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私のたましいよ。目をさませ。十弦の琴よ。立琴よ、目をさませ。私は暁を呼びさましたい。

예, 알아요.


시편 108편 2절이요?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十弦の琴よ、立琴よ。目をさませ。私は暁を呼びさましたい。

예, 알아요. 새벽기도에 가면 이 구절로 말씀을 참 많이 전하십니다.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라” 하는 찬송도 있지요. 그런데 혹시 목사님들 중에서 잠언 27장 14절 가지고 말씀 전하시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잠언 27장 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朝早くから、大声で友人を祝福すると、かえってのろいとみなされる。

예전에 저희 어머니가 서울에 가셨을 때 어느 교회 근처 숙소에 묵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기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니까, 그게 우선이니까, 그게 중요하니까, 내가 축복 받는 게 중요하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게 중요하니까?

여러분, 그게 진정으로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성경을 자기 멋대로 난도질을 해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잘라내어서 마치 그게 성경 전부인 것처럼 믿고 계십니까.

제가 목사라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목사도 사람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모든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성도님들이 알아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목사님이 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토를 단다는 것은 괘씸한 일이에요? 아니에요. 목사가 무슨 하나님인가요? 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이를 누가 바로잡아주어야겠습니까. 교회 식구들이 함께 바로 세워나가야지요. 그런데 목사님들을 섬긴다면서 무조건 목사님들이 하는 말만 믿어요.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보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집에 가서 다시 찾아본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직접 물어보거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딜 감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토를 달고……말도 안 되는……이런 풍조가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한술 더 떠서 어떤 대형 교회를 보면 담임목사 사진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서 세워놨어요. 그리고 그 옆에서 성도들이 같이 사진을 찍게 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담임목사님이랑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해놓았대요. 또 다른 교회를 보면 그 교회 서점에는 목사님 사진을 그렇게 많이 판대요. 그 이유가 또 뭐냐 하면 목사님 사진을 걸어놓았더니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나라 교회에서 태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우상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이런 게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야 여럿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성도님들이 성경을 잘 모른다는 것도 한몫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성도님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다면 그야말로 어디 감히 목회자들이 그런 일들을 벌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다른 교파나 교단을 이단이다 삼단이다 그러면서 비판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데, 여기에 얽매어있는 한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 생활이 10년 됐어요? 20년, 30년 됐어요? 집사, 권사, 장로 직분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전도사, 강도사, 목사까지 되셨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이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믿음생활이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직분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목사까지 되었다 하더라도 믿음은 제자리걸음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지 못한다면, 이 우상이라는 족쇄를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는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상대방은 복음은커녕 상처만 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도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했으면서, 자기도 우상 숭배를 벗어버리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똑 같은 수험생, 재수생 주제에 서로 진학상담을 해주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간증거리가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놀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월급이 올랐나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대학에 붙었나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취직이 되었나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그게 다 인가요?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기껏해야 월급 몇 푼 올려주고, 대학 붙게 해주는 정도, 취직 시켜주는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 우상을 버립시다. 그리고 성경을 가까이 해서 주님을 올바로 바라봅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보다, 우리가 받을 은혜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보다 우리가 받을 축복이 더 많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주님께서 주실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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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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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회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
2018년 5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2절~4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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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 主の愛がとどまる場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일본은 연호가 헤이세이입니다. 1989년이 헤이세이 1년, 일본에서는 헤이세이 원년이라고 하죠. 그래서 올해 2018년은 헤이세이 30년이고, 내년에는 지금 천황이 은퇴를 한다고 합니다. 그럼 아마도 이 연호도 또 바뀌고 할 텐데, 벌써부터 연호가 무엇으로 될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천황은 30년간 재위를 했습니다만, 지금 천황 아버지인 쇼와천황은 64년이나 했었습니다. 지금 천황은 거의 60이 되어서 즉위를 했지만 쇼와천황은 서른도 안 되어서 천황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오래 살기도 했지요. 만 87살까지 살았습니다.

쇼와 시대는 참 격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26년부터 쇼와가 시작되었습니다만, 당시는 그야말로 대일본제국, 조선을 포함해서 상당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1942년 12월에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고, 1945년 8월에 패전을 함으로 인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든 식민지 등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1964년 동경 올림픽, 1980년대에서까지 이어지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인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지요. 이른바 쇼와시대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쇼와천황은 본래부터 생물학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만, 이 천황에 관해서 전해져 오는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여름에 천황이 여름 휴가 차, 본래 살던 동경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의 일인데, 천황이 사는 궁성에 직원들이 보니까 그 넓은 마당에 잡초들이 너무 많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에 그 풀들을 좀 뽑아서 깨끗하게 해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풀들을 뽑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천황이 돌아올 때까지 넓은 곳에 무성하게 난 풀들을 다 뽑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직원들 중에서 책임자인 시종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천황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잡초가 너무 많이 나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만,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습니다. 바로 깨끗하게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真に恐れ入りますが、雑草が生い茂っておりまして随分手を尽くしたのですがこれだけ残ってしまいました。いずれきれいに致しますから」

그랬더니 평소에는 온화했던 이 쇼와천황이 그 시종장한테 엄한 말투로 이랬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 세상에 잡초라고 하는 풀은 없어요. 어느 풀에든 이름이 있습니다. 어느 식물이든지 이름이 있어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골라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를 자르면 안 됩니다.”

「何を言っているんですか。雑草という草はないんですよ。どの草にも名前はあるんです。どの植物にも名前があって、それぞれ自分の好きな場所を選んで生を営んでいるんです。人間の一方的な考えで、これを切って掃除してはいけませんよ」

이 말을 보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 모든 식물들한테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한테 유익하면 약초다 채소다 라고 하거나, 하다못해 꽃이라도 있어서 보기가 좋으면 화초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한테 별로 유익하지가 않아요. 그러면 그건 뭐예요? 예, 잡초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기준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이 사람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는 게 알고 보면 얼마나 허술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아구찜 같은 것 좋아하시나요? 수산시장 같은 곳에서 보면 아구가 얼마나 못 생겼습니까. 옛날에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그게 잡히면 버렸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때요? 그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 때문에 아구는 이제 고급생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람들 편의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기준은 어떻습니까.

이사야 5장 16절을 봅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しかし、万軍の主は、さばきによって高くなり、聖なる神は正義によって、みずから聖なることを示される。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 <공의롭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공평하고 의롭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나 다툼이 발생하면, 물론 대화로 서로 잘 풀면 좋겠습니다만, 간혹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법원의 판단을 구합니다. 하지만 법원에 있는 판사들의 판단이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니요. 공부를 많이 하고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모든 판단을 항상 올바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3번,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이렇게 세 번을 받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지요.

하지만 세 번이 아니라 30번을 받을 수 있게 해놓는다 하더라도 100%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가끔은 불행하게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판단이 바뀌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조직에 있어서 건전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벌규정이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서로 다른 사람이 동등하게 좋은 성과를 냈는데, 사장 마음대로 한 쪽은 지난 추석에 아주 좋은 선물을 보내주었으니까 승진을 시켜 주고, 다른 한쪽은 추석 때 시시한 걸 보내왔으니까 승진을 안 시켜준다거나 한다면 그 조직은 건전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이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나 조직이 건전하지 않게 되면 성장도 못하고, 성장도 못한다면 좋은 인재들은 다 빠져나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단,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기준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어떠한 변함이 없습니다. 아침에 생각해보니까 죄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있다 생각해보니까, 아, 이 놈이 나쁜 놈 같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벌을 내려야겠다……이러신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까 생각에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축복을 줘도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축복을 줘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때로는 불평등할 때가 있습니다. 상사에 따라서, 거래처에 따라서, 판단기준이 바뀌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생활 해본 분들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A가 많고 B가 적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장이 A가 적고 B가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예, 둘 중 하나죠. 사장 판단을 따르든지 아니면 회사를 나오든지 아니겠습니까. 물론 내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고, 사장 판단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항상 꼭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변함도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 판단은 선하시며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공평하다고 한다면 저울을 떠올릴 수가 있겠지요. 천칭이라고 하지요? 좌우에 물건을 올려놓고, 무게가 똑같으면 수평을 유지하지만 한쪽이 무거우면 이렇게 기울어집니다. 이른바 <법>이라고 하면 이 저울 마크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법이라고 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자주 쓰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슨 법의 여신이다……라고 하면 이 저울을 들고 있고요, 한국이나 일본의 변호사 배지를 보면 거기에도 역시 이 천칭 저울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도 경찰에 잡혀갈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군마에도 마에바시에 보면 교도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근처를 자전거로 지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거기 안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가 물론 경찰에 잡혀갈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리 선하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정말 그래요? 교도소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그래도 좀 나은가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교도소는 나쁜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니요.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십시오. 운전을 하다가 앞만 보면서 가요? 좌우도 보잖아요? 물론 자동차가 오는지, 사람이 지나는지도 봅니다만, 꼭 안전확인만을 위해서 좌우를 봐요?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가다가 보면 어? 저기 저런 가게도 있었나? 어? 저기 세일하네? 뭐 그러면서 볼 수도 있습니다. 운전하면서 그런 걸 보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는 안 해봤어요? 아니요. 다 해봤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가 운전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린 그 순간, 내 차 앞으로 애들이 뛰어나오거나 자전거가 갑자기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다가 일이 심각하게 됐어요? 이는 그럼 경찰에 잡혀갑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까딱 잘못하면 언제든지 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꼭 무슨 교도소에 끌려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좀 그렇지만, 우리가 남들을 비판하거나 할 때에 보면, 그 사람들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만 그런가요? 아니요.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비난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놓인 저울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 우리의 행실을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더 깨끗하다. 훨씬 더 믿음이 좋다. 훨씬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11절~15절을 봅니다. 여기 보면 저울이 아니라 더 기가 막힌 방법으로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바울은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15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というのは、だれも、すでに据えられている土台のほかに、ほかの物を据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その土台と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
もし、だれかがこの土台の上に、金、銀、宝石、木、草、わらなどで建てるなら、
各人の働きは明瞭になります。その日がそれを明らかにするのです。というのは、その日は火とともに現れ、この火がその力で各人の働きの真価をためすからで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残れば、その人は報いを受けま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焼ければ、その人は損害を受けますが、自分自身は、火の中をくぐるようにして助かります。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공적이 아무리 뜨거운 불로 태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면 상을 받고, 공적이 사라지면 해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이, 우리의 의로움이 어느 정도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もしあなたがたの義が、律法学者やパリサイ人の義にまさるものでないなら、あなたがたは決して天の御国に、入れません。

이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목사님, 대형교회 목사님, 존경 받는 목사님이라면 몇몇 목사님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 분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이걸 어쩌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세요? 절망적이에요? 에이, 뭐야. 그럼 천국에 가기 글렀잖아. 진작 말을 하지…….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절망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나아요. 경찰에 잡혀가지도 않았고, 저기 형무소 높은 담벼락 안에 들어가 있지도 않아요.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제가 좀 키가 큽니다. 키가 186정도 됩니다. 몸무게가 아니라 키가 186센티에요. 크죠? 예, 여러분께서는 키가 어느 정도 되십니까. 150? 160? 아니면 170 정도 되십니까?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을 보고, 에게……그게 키에요? 저는 여러분들보다 키가 크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는 좀 더 안전합니다……. 뭐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예를 들어서 3~4미터인 곳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매달려서 내려오면 160센티 정도 되는 분에 비해, 저는 186이니까 26센티 정도 더 바닥에 가까울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교적 좀 더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이러면서, 아~ 저는 여러분보다 키가 더 크니까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안 다칠 자신이 있습니다……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높을 필요도 없어요. 건물 5층 높이에서 무방비하게 떨어진다면, 여러분은 다치고, 키가 큰 저는 안 다칩니까. 아뇨. 똑같이 다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롭습니까. 우리가 교도소 담벼락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의롭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 아주 얄미운 이웃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제가 키 몇 센티 더 크다고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저만 안 다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전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세상에 속상한 일들이 많습니까. 답답한 일들이 많습니까. 열 받는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분들께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드립니다. 금식해보십시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3일이 제일 힘들대요. 그런데 3일 지나면 조금 나아지고 5일이 좀 더 힘든데 5일이 지나면 또 조금 나아진대요. 물론 그러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며칠까지 해봤다고 말씀 드리면 이것도 교만이 될 것 같아서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만, 아휴, 이건 뭐 가면 갈수록 태산이에요.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배고프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허기가 집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금식을 하면 기도의 능력이 쌓이고 믿음이 쌓인다고 해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를 잘못 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글에 의하면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그 중 하나가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그 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금식은 그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하루 굶어보세요. 그리고 이틀 굶어보세요. 그러면 적어도 시기가 사라집니다. 질투가 사라집니다. 미움이 사라집니다. 답답함이 사라집니다. 왜요? 예, 너무 배가 고프거든요.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질투가 문제예요? 시기가 문제예요? 미움이 문제예요. 그저 밥 한 숟가락만 먹었으면 좋겠어요. 빵 한 조각만 먹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모든 문제가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 대부분의 문제는요, 우리가 너무 우리 주제를 몰라서 그런 것일 수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여당이나 야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자기들이 잘났대요. 다 상대방이 못한대요. 또 그런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정치인들을 보고 욕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그 사람들보다 나아요?

어제 뉴스를 토니까 어느 정치인이 단식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국회 앞에 텐트 쳐놓고 돗자리 깔아놓고 그러던데, 제가 말씀 드리는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또는 아무도 눈치 채지 않게 금식 한 번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안 보였던 것이 보입니다.

요즘 뭐 미투다 뭐다 해서 곤욕을 치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시는 참 좋습니다. 고은 씨의 시집 <순간의 꽃>에 담긴 짧은 시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들어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기를 쓰고 내세울 때에는 안보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선거 판에서 싸우는데, 상대방이 가진 꽃, 상대방한테 피어있는 좋은 꽃이 보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깎아 내려야죠.

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물러나오면, 내가 한 발자국 내려 앉으면 그 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사야 42장 2절~4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彼は叫ばず、声をあげず、ちまたにその声を聞かせない。
彼はいたんだ葦を折ることもなく、くすぶる燈心を消すこともなく、まことをもって公義をもたらす。
彼は衰えず、くじけない。ついには、地に公義を打ち立てる。島々も、そのおしえを待ち望む。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불에 태워도 남을 공적은 고사하고,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일지 모릅니다. 나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작년 2017년 12월 기준으로 세계인구가 76억 명이라고 합니다. 참 많죠? 그렇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될까요? 1프로요? ㅎㅎ 1프로라 한다 하더라도 7천 6백만명인데, 남북한 합한 수보다도 많습니다. 0.1프로? 7백60만명? 0.01프로? 76만명? 0.001프로? 7만6천명? 좀 더 해볼까요? 0.0001프로? 7천6백명?

어떠세요? 연예인이나 무슨 유명인사가 아닌 담에야,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7천6백명이 아니라 기껏해야 몇 백병 정도 아니겠어요? 전세계 인구 중에서 0.0001프로도 모르는 풀? 그건 세상적으로 본다면 잡초입니다. 잡초 중에서도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잡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잡초 중의 잡초일 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잡초의 상한 가지도 꺾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 이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주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인도해주시는 주님,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병든 사람이 낫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나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마어마한 기적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답해요? 속상해요? 열 받아요? 자존심 상해요? 불안해요? 걱정되세요?

정말 언제 죽어도 하나님한테 있어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나에게 오늘 아침에 깨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오늘도 이 작은 심장을 뛰게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작은 우리 마음이야말로 주님의 축복이 머무는 곳이요,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를 감싸주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정도로 낮아져 주셨는데,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우리가 낮아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조금 낮아지면 그 동안 안 보였던 이웃이 보입니다. 그 동안 나라고 하는 존재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우리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 마음 속에도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상한 가지와도 같은 나도 꺾지 않으시고, 이처럼 못난 꺼져가는 작은 등불 같은 나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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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회 그 길이 정답입니다
2018년 4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길이 정답입니다” その道が正解です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인생은 어땠습니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여기서 여한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은 몇 살까지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인생을 마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마태복음 25장 21절에 있는 말씀을 들을 자신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21절이 궁금하신가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 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우리가 이 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정말 잘했다. 너는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다. 내가 너한테 맡긴 일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지 모른다. 자, 어서 와서 천국 잔치에 참여하자……라는 말씀을 들을 자신이 있느냐 하는 것이죠.

아니면 또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야, 너는 어떻게 내가 맡긴 일을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니. 내가 너를 위해서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지 않았니. 그것도 모자라서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내 목숨까지 바쳤는데, 너는 어쩌면 너만 생각하고, 너 좋은 일만 하고는, 내가 시키는 것과 반대 일만 하다가 왔니.”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쩔까 하는 불안감, 혹시 안 가져보셨습니까.

그런 불안감이 있으면 잘 해야 할 텐데, 이게 참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모세나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께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해주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게 좋은 것인지 저게 옳은 것인지, 가끔가다 보면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이 잘 안 갈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17번 국도를 달리면서 제 머리 속에는, 아, 정말 이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자동차로 달리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나비를 찍어보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나비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요.

그래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백 번 다시 생각을 해보아도, 아무리 기도를 해보아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틀린 길 같지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현실은 어때요? 나 자신이 놓여있는 여건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간다고 한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벌써 일본에 온지도 3년이 되어 가는데, 적어도 눈으로 본다면 교회도 성장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성도 수가 늘어난 것 같지도 않아요.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부흥을 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닫지 않고 이카호중앙교회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그야말로 군마현의 7대 불가사의가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일본 여기저기에는 큰 절들이 있고, 바로 옆에는, 이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대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그 곳이 있는데, 거기는 주일마다 차를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미여 터집니다. 인터넷을 보면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교회들도 보면 다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걸 보면 참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예전에는 집안 살림에 보탬이 좀 되어보려고 다른 직장도 다녀보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안 드셨는지, 그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운전을 하고 가다 보면 <이랏샤이마세!>하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학생들을 보면, 참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 친구들은 그래도 돈을 벌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길조차 막히니까 참 답답합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또 뭐겠어요? 아, 이 길이 정말 맞는 것일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일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아니, 그렇다면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자문제나 이런 건 좀 착착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님, 이 길이 맞습니까. 주님, 내가 지금 나도 모르는 무슨 잘못 때문에,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전혀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그런 기도를 드려보았더니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길,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일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노아를 한 번 봅시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몇 십 년 동안이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의 크기는 지금 단위로 본다면 길이가 135미터, 폭이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나 되는 큰 배를 완전히 수작업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요.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방주를 어디에 만들어야 했을까요. 만약에 낮은 곳에 만들었다면, 아무리 물이 차서 방주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전후좌우에 가로막힌 장애물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또 배에 대해서 조금 지식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아시겠습니다만, 배들에 있어서 무서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암초입니다. 암초라는 것은 물속에 있는 돌이나 바위 같은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배가 부딪히거나 걸리거나 한다면 배가 파손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배는 얕은 곳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물이 차 올라서 방주가 떠다녀도 주변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정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방주를 상당히 높은 곳에서 지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조선소를 짓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짓겠습니까. 그렇죠. 바닷가에 지어야죠. 산꼭대기에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바다가 없습니다. 이런 곳에 조선소를 지어요? 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바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높은 산 위에 산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오늘 밤에 잠을 잤더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 바다도 인접해 있지 않은 군마현 어느 산꼭대기에 길이 130미터가 넘는 배를 지으래요. 그러면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시작할 수 있겠지요. 아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한테 말씀하셨는데요. 그래도 내가 교회에 다닌 게 몇 년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나한테 말씀해주셨는데, 이런 영광이 어디 있어요. 아멘! 할렐루야!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시작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그게 기간이 얼마요? 무슨 1~2미터짜리 보트를 만드는 것도 아닌 130미터 이상이나 되는 배를 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수 십 년 동안 말입니다.

노아가 배를 짓는 동안 하나님이 매일같이 옆에 서서 깃발 흔들면서 응원하셨대요? 나무토막 하나라도 가져다 주셨답니까? 아니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다음에 말씀하신 것은 방주가 완성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를 성경은 어떻게 기록할까요?

참, 이럴 때보면 매정합니다. 적어도 수 십 년 동안의 세월을 성경은 단 한 구절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창세기 6장 22절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ノアは、すべて神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し、そのように行った。

이 한 구절. 속에 그 동안의 모든 노아의 믿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1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1년에 한 번 오셔서, 오, 그래, 잘하고 있구나……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노아는 이 세월 동안 어땠을까요.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길이니 방주를 짓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도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수 십 그루, 수 백 그루를 운반하는 일도 힘들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육체적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노아가 하루 이틀도 아닌, 최소한 수 십 년 동안 배를 지으면서 주변의 친척이나 이웃이 뭐라고 했겠어요. 이봐, 자네 지금 뭘 하는 거야. 배를 지으려면 바다에 짓든지 해야지, 산꼭대기에 배를 짓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러면 노아는 뭐라고 그랬을까요. 아니야. 이제 조금 있으면 비가 내려서 이 세상이 모두 잠기고 말 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어서 함께 배를 짓고, 마지막 날에 살아남읍시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한 두 번도 아닌 수 십 번, 수 백 번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노아의 심정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번 물어보려고 해요. 그 때 심정이 어땠는지 말이에요.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갑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昔、ノアの時代に、箱舟が造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ときに、従わなかった霊 たちのことです。わずか八人の人々が、この箱舟の中で、水を通って救われたのです。

수 십 년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이웃 친척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저와 함께 배를 지읍시다. 그리고 이 배가 완성되면 이 배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죽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노아가 오랜 세월 동안 전했을 복음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마지막 날에는 동물 짐승들까지도 노아의 말에 따랐으나, 그 이웃들을 보면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없었고, 방주에 탄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 뿐이었습니다.

그렇죠. 물론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히기 전에 비가 좀 부슬부슬 내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면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요즘 익히 경험하는 듯한 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地には、まだ一本の野の灌木もなく、まだ一本の野の草も芽を出していなかった。それは、神である主が地上に雨を降らせず、土地を耕す人も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ただ、水が地から湧き出て、土地の全面を潤していた。

이 상태가 아마도 노아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그 사람들은, 뭐? 비? 하늘에서 그 많은 물이 땅에 떨어진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노아는 어땠을까요. 허허어! 아닐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니까! 라고 하면서도, 어쩌면 몇 년이 지나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면서 가끔은 햇빛이 쨍쨍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물이 하늘에서 쏟아져서 온 지면을 다 덮는다고 하셨는데……그게 정말일까……산꼭대기에 이 큰 배를 짓고 있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짓일까…….”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아니요. 몇 번이고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족들이 모두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방주 문을 닫으시고, 그 전에는 가랑비조차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의 샘들이 터지더니 사십 일 동안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지만 우리 눈에는 안 보여요. 아뇨. 보이긴 하죠. 하지만 그게 잘못 보일 때도 많다는 것이 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번창하고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친히 명해서 간 땅인데, 그러면 거기서 어려움이 없이 축복이 넘치고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땅이 있었어요. 거기에 순종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발생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거기에 있어야겠습니까, 아니면 내 생각대로 더 좋은 대로 이동해야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렇죠. 좋은 곳으로 가야죠. 장사가 안 되요? 더 목이 좋은 곳으로 옮겨야죠. 교회가 안 되요?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옮겨야죠.

아브라함도 역시 그랬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봅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さて、この地にはききんがあ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のほう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この地のききんは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성경 특히 구약에서 등장하는 애굽은 <세상> 또는 <세상적인 방법>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조금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하나님의 명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랬다가 어떻게 됩니까. 자칫 자기 부인까지도 빼앗길 뻔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떠났던 조카 롯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결별을 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롯한테 말합니다.

창세기 13장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全地はあなたの前にあるではないか。私から別れてくれないか。もしあなたが左に行けば、私は右に行こう。もしあなたが右に行けば、私は左に行こう。」

우리가 이제 헤어져야 할 텐데 그 선택권을 너한테 주겠다. 네가 이쪽으로 가면 내가 저쪽으로 가고, 네가 저쪽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롯한테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롯이 눈은 들어 앞을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어땠대요?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以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のほう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그래서 결국 롯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좋아 보이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를 택합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떤 땅입니까. 예,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죄악으로 물들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게 되는 땅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브라함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지지만, 당시까지 그가 모아두었던 모든 재산들을 다 날려버리게 되고 말지요.

더 심한 경우를 볼까요? 룻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룻기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さばきつかさが治めていたころ、この地にききんがあった。それで、ユダのベツレヘムの人が妻とふたりの息子を連 れて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滞在することにした。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각 지파에 따라 분깃을 나누어가진 상황에서는 그 땅을 다른 지파 사람이나 이방인들에게 매매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적으로는 대여할 수는 있었지만 희년이 되면 또다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영원히 지켜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흉년이 들었다고 포기하고는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잘못한 사람 이름 적어놨어요.

룻기 1장 2절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その人の名はエリメレク。妻の名はナオミ。ふたりの息子の名はマフロンとキルヨン。彼らはユダのベツレヘムの出のエフラテ人であった。彼らが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とどまっているとき、

하나님께서 주신 길에서 떠나고는 어디 잘 살게 되었나요? 아니요,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마저도 죽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라, 어디로 가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彼らといっしょにいるとき、イエスは彼らにこう命じられた。「エルサレムを離れないで、わたしから聞いた父の約束を待ちなさい。

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때로는 이처럼 기다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잠시 들었던 기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면 자신의 부인을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요, 그의 조카 롯도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면 멸망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흉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라면 자신과 자신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렇다고 꼭 지리적인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세상적으로는 손해를 입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지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가고 있는 믿음의 길이 불안하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는 길인데, 외로우십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라면, 그 길이 믿음의 길이라면 그 길이 정답입니다. 그 길은 노아나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나 세상적인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준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마침내 노아가 받은 축복,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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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회 입어야 할 새 사람
2018년 4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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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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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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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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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입어야 할 새 사람” 着るべき新しい人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게도 추웠던 겨울이 갔나 했더니 조금 있으니까 화려한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참 일본에 있는 벚꽃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조금 있으니까 무슨 여름이라도 된 것처럼 따뜻해지고 그랬지요. 이럴 때일수록 건강관리를 잘 하셔야 되겠습니다.

길가에 폈던 벚꽃이 조금 지나면 이제 서서히 파란 잎새가 나옵니다. 그런 모습,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름다운가요? 벚꽃이 분홍빛으로 화려한 색상을 자랑할 때에는 대단히 아름답습니다만, 여기에 잎사귀가 나오기 시작해서 서로 섞이면,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좀 아름답지가 않아요. 오히려 지저분해 보입니다.

이게 꽤 오랫동안 사실 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제가 분홍색도 좋아하고, 초록색도 좋아합니다. 분홍색 꽃잎과 초록색 잎사귀, 얼마나 잘 어울리는 배색입니까. 그런데 이게 섞이니까 영 보기가 안 좋아요. 그래서 저는 또 제가 마음이 좀 깨끗하지 못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아마도 저보다는 마음이 깨끗하리라 짐작되는 제 집사람한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벚꽃도 좋아하고 나뭇잎도 좋아하는데, 벚꽃과 나뭇잎이 같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지저분해 보인다는 것이에요. 이 대답을 듣고 참 얼마나 제 마음에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지저분해 보이는 것일까요. 잘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갔습니다.

이에 대한 결론을 말씀 드리기 전에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옷장에는 입을 옷이 몇 벌이나 들어 있습니다. 참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이 세상에는 집이 없어서 길가나 지하도 같은 곳에서 잠을 자기도 합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마찬가지지요.


이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참 가슴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어려움이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간혹 보면 이 분들이 여름철에 동사를 당한다고 합니다. 동사, 그러니까 체온이 떨어져서 사망한다는 것이지요. 겨울에 그렇다면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만, 어떻게 여름에 동사를 당할 수가 있을까요.

저도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졌던 생각은, 아하, 여름철에 날씨가 더우니까 옷을 벗고 자다가 밤에 기온이 떨어져서 사망하게 되는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멀쩡히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여름철에 동사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알아보니 그 분들은 옷가지나 물건들을 얻으면 놓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옷도 한 번 입으면 안 벗는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비가 올 때에도 옷을 입은 채로 비를 맞게 되는데, 비가 그친 후에도 옷을 안 벗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형편이 어렵다 하더라도 옷이 젖으면 벗어서 말리고, 더러워지면 빨아서 입고, 그리고 오래된 옷가지들은 때가 되면 버리고 그래야 할 것입니다만, 온몸이 비에 젖은 채로 잠을 자거나 하게 되면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잘못하면 큰 변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던 벚나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분홍색과 초록색의 조화, 참 잘 맞을 것 같지만 지저분해 보인 이유. 그것은 아마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분홍빛 벚꽃도 예쁘고, 초록빛 잎사귀도 보기에 시원합니다만, 한 쪽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쪽을 더하게 되니까 결국 지저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옛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버려야죠.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이 버리는 것을 잘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 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한다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무엇을 사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것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쓰던 냉장고가 고장 났어요. 그래서 새것을 샀습니다. 그러면 쓰던 냉장고는 어떻게 해야 되요? 예, 버려야죠. 그것도 고장이 났는데 그걸 계속 가지고 있어봐야 뭘 하겠습니까. 꼭 버리지 않더라도, 누가 수리해서 쓰겠다고 하면 그 사람을 준다거나, 아니면 고물상한테 판다던가, 어떻든 간에 바깥으로 내보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밥솥도, 세탁기도, 텔레비전도, 자동차도 망가져서 이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새것을 샀어요. 그런데도 옛날 쓰던 것을 아깝다면서, 그러면서 고치지도 않고 계속 가지고 있다면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진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해 봤자 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극단적인 말씀을 드려볼까요? 예를 들어서 스시를 먹었어요. 아니면 장어요리를 먹었습니다. 비싸서 웬만해서는 못 먹잖아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걸 먹게 되었어요. 참 맛이 있게 잘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랜만에 모처럼 먹은 맛있는 스시나 장어가 아깝다면서 화장실에 안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먹기는 아주 잘 먹습니다. 양식 일식 중식 한식……주는 대로 다 받아 먹었어요. 그런데 화장실에 안 갑니다. 그러면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건강하게 살겠대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심해지면 생명에까지 지장이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새 것을 얻으면 옛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 において新しくされ、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옛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다고 합니까.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옛 사람이라고 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 욕심을 따라서 유혹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유혹, 사실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에이, 나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 아니에요. 유혹이요? 아니 뭐 별로 유혹 같은 걸 당하지는 않아요. 이렇게 마치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이 되십니까.

사실 한국이나 일본 뉴스를 보십시오. 안 좋은 내용에 관한 것은 모두가 다 이 욕심과 유혹에 대한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유혹, 이성에 대한 욕심과 유혹, 권력에 대한 욕심과 유혹, 여기에 휘말리고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다 썩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천재라고 하면 너무나도 유명한 아인슈타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Insanity: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정실질환, 그것은 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디 한 번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음식을 하는데 소금을 넣었어요. 그랬더니 맛이 아주 없어졌습니다. 다음에도 똑같은 요리를 하는데 소금을 넣었어요. 역시 맛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요리를 할 때 소금을 넣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있던 사람이 묻습니다.

맛이 없어지는 걸 알면서 왜 소금을 또 넣느냐고 하자, 그 사람이 말합니다.
언젠가는 맛이 있게 되지 않을까 해서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예, 문제가 심각하죠. 이건 그야말로 정신질환입니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이것이 정신질환이라고 했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이를 좀 확장해서 해석을 했더군요. 어떻게 해석을 했냐 하면,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달라진 내일을 꿈꾸지 말라”

참 멋진 해석입니다. 어제 했던 것, 그제 했던 것과 똑같이 오늘도 하면서 새로운 내일을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하루하루를 사는데 어떻게 새로운 내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정신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으나 안 입으나 상관 없다고 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대로 사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습니다. 옛날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는 자신들이 벗은 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했다고 해요?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このようにして、ふたりの目は開かれ、それで彼らは自分たちが裸であることを知った。そこで、彼らは、いちじくの葉 をつづり合わせて、自分たちの腰のおおいを作った。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자기 자신을 가리고자 노력하더라도 그것은 천상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하면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神である主は、アダムとその妻のために、皮の衣を作り、彼らに着せてくださった。

사람 같으면, 아니, 저 같으면 어쭈,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 지배할 특권까지도 주었는데, 그런 내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 이런 고얀 것, 다 없애버리고 새로 만들어야겠다……이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부족한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지금 아담이나 하와가 잘한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잘한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모든 것을 주신, 모든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죄를 지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을 어기면 반드시 죽는다고까지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겼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겠죠. 미리 말씀을 다 해 놓고, 이를 어기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잖아요. 그러면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죽이는 대신 다른 동물을 희생 삼아서 가죽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자기가 손으로 열심히 만든 무화과 나뭇잎 치마와 하나님께서 주신 가죽옷. 어떤 것이 좋습니까. 이건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아무리 훌륭한 솜씨로 만들었다고는 해도 나뭇잎은 나뭇잎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시들해지고 결국 말라 비틀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가죽옷은 어떻습니까. 이는 요즘에도 가죽옷이라고 하면 튼튼하고 비싼 옷이지요.

그토록 큰 축복을 받고서도 죄를 지은 자신들한테 하나님께서 그 좋은 옷으로 선물을 주셨어요. 그러면 가죽옷을 입어야 할 텐데, 그러면 무화과나뭇잎 치마는 어떻게 할까요?

“아휴, 내가 이걸 만드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걸 어떻게 버려.”

그러면서 나뭇잎 치마를 입은 채로 가죽옷을 입어야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최고급 가죽옷을 입어봤자 그 속은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 치마로 살갗이 찔리고 따갑고 그렇겠죠.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받은 축복이 충분합니까? 축복을 못 받은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직장에 다니다 보면 가끔 컴퓨터가 잘 안 된다고 누가 그럽니다. 그러면서 제게 고쳐달라고 해요. 그런데 보면요, 컴퓨터가 안 될 때에는,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크게 보면 원인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컴퓨터가 이상할 때의 원인 두 가지. 그것은 바로 컴퓨터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컴퓨터를 쓰는 사람한테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으세요? 예, 두 번째 원인, 컴퓨터가 안 된다고 할 때 가서 보면, 컴퓨터는 멀쩡한데, 쓰는 사람한테 문제가 있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아니, 프린터가 안 된다고 하는데, 프린터 스위치를 꺼놓고 안 된다고 하면 어쩌란 말이에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받은 축복이 충분합니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은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많은 축복을 아직 못 받았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우리한테 문제가 있어서입니까. 예, 그렇죠.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제대로 새사람을 입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사람을 입지 못했습니까. 예, 지금까지 제 말씀을 들어오셨다면 이제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해왔던 것, 그제까지 해왔던 것을 오늘도 계속해서 하게 된다면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구습을 어제도 버리지 못하고, 그제도 버리지 못했는데, 오늘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서 내일 새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밖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예,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껏 한다는 게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솜씨,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봐야 훌륭하고 뛰어난 무화과 나뭇잎 치마밖에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예요.


하지만 이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희생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우리의 죄악을 해결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무화과 나뭇잎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가죽옷을 입어야지요.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예, 지금까지 해오던 구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구습이 무엇입니까.

하나를 꼽으라면 먼저 증오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축복을 못 받은 이유가 어쩌면 그 사람, 정말 미워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는 구습, 무화과 나뭇잎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구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몸에 덕지덕지 붙은 말라 비틀어진 무화과 나뭇잎을 떼어내야 합니다. 어서 벗어버리지 않으면, 잘못하면 여름 날에 얼어 죽는 변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사람을 입어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합시다. 무엇입니까. 예, 그 사람을 용서해보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에라, 모르겠다, 내가 용서해버리자……이렇게 마음을 먹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적어도 내 마음은 편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래, 그 사람이 참 나한테 미운 짓, 나쁜 짓도 했지만, 나는 그럼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떨까. 그래, 나도 남들한테 미운 짓도 해왔고 나쁜 짓도 해왔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미운 짓도 하고 나쁜 짓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슬프게 했을까. 그래, 좋아, 용서하자.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용서를 하게 되면 적어도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안 될 것 같으면 억지로라도 해보세요. 그러면 내 마음 안에 평안이 옵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내 주변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없애는 방법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없애면 됩니다.

그러면 내게 있어서 적이 없어져요.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제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제 새사람을 입고 큰 축복을 받는, 지금까지 받지 못했던 축복까지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25회 그 길이 정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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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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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회 주라
2018년 4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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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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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라”与えな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단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른바 사이비라고 하죠? 사이비……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유사품이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얼핏 보기에는 비싼 명품 가방처럼 생겼는데, 아니면 유명 브랜드 옷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까 알파벳이 하나 빠졌다거나, 아니하면 하나가 더 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제품이 좋다면 상관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은 품질이 떨어지기 마련이지요.

이단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우리 기독교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항상 무엇이 문제냐 하면 맨 마지막 한 마디, 한 글자가 다릅니다. 올바른 믿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큰 축복을 받는 삶이 되지만, 왜곡된 믿음을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생활을 파탄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단들 중에는 그래도 알아보기 쉬운 이단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을 슬쩍 들이밀며 같이 공부하자고 한다거나, 아니면 성경 여기가 틀렸고 저기가 잘못됐고 그런 말만 한다거나, 또는 마귀가 어쩌고 귀신이 어쩌고 하는 말만 한다거나, 혹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교주 같은 사람을 내세워가면서 찬양한다거나 하면, 아하, 이거 좀 이상한 사람들이로구나……라고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단이라고 해서 꼭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책만 들고 다니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하는데,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면 조금 이상해요.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면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다른 말을 해요. 이런 내용을 들으면 호기심이 강한 분이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는 분이라면 관심이 가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면서 아,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왜 이런 말을 못 들었을까. 왜 내가 처음 들어보는 말일까. 왜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이런 것을 안 가르쳐주었을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정말 성경의 오묘하고 새로운 진리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럴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와 같은 성경 말씀을 교회에서 미처 가르쳐주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올바르지 않은,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아침 이슬을 먹고도 젖소는 우유를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은혜로서 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구원과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하면, 성경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それは、私たちの愛する兄弟パウロも、その与えられた知恵に従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中で、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そうなのですが、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手紙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も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個所の場合もそうするのですが、それらの手紙を曲解し、自分自身 に滅びを招いています。

해가 될 정도가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누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성경과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거나, 특히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한다거나, 특히 자신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된다거나 하면 요주의입니다. 아니, 한국이나 일본이 무슨 기독교를 탄압하는 나라도 아닌데, 제대로 된 성경공부라면 몰래 숨어서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위에 소문을 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의 소식, 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할 마당에 가족이나 친구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면 벌써 그것부터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이와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というのは、先ごろチゥダが立 ち上がって、自分を何か偉い者のように言い、彼に従った男の数が四百人ほどありましたが、結局、彼は殺され、従った者はみな散らされて、あとかたもなくなりました。

이런 일들은 적어도 이미 2천년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이단도 마귀 사탄도 대항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와서 몰래 성경공부를 하자거나 한다면, 아니면 어떤 사람이 와서 성경을 풀어 말을 하는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무언가 새로운 식으로 말을 풀거나 한다면 반드시 교회 목사님과 상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으면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그리고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교리적으로 이단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겉으로 봐서 티가 나는 이단들은 그나마 분간이 쉬우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골치 아픈 점은 이단도 아니고 정통 기독교 내에서 더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이처럼 부흥이 된 나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한국 여기저기에 화려한 성전, 거대한 성전이 있고, 주일이면 너도나도 화려한 차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아멘과 할렐루야가 넘쳐납니다. 감사와 은혜와 축복이라는 말도 많이 들립니다. 하지만 그 내부는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비리, 목사나 교역자들의 비리, 그리고 신학교에서의 비리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지금도 보면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교 중 하나에서 난리가 아닙니다. 지난 4월 7일자 인터넷판 어떤 신문을 보니까 이 대학을 가리켜 <비리 백화점>이라고 하는 표제를 붙여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합니다. 이에 대해 교수들은 용역들을 불러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육부에서도 이미 이 대학 총장의 총체적인 비리를 지적하면서 파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학교, 그것도 한국을 대표한다는, 정통보수를 자랑한다는 신학대학에서 일어날 만한 일입니까.

얼마 전에 제가 메일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매우 짧습니다. 하지만 이 메일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믿음의 핵심,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신앙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매주 소식지를 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분은 메일을 안 받겠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 여러분께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도 교회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신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어서 있냐고 그랬더니 있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어디 있냐고 그랬더니 내 마음속에 있다더군요
그럼 형체를 보여달랬더니 같이 기도하자고 합디다.
그 이후로 교회를 다니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분에게 답장을 보내신다면 어떻게 적어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도대체 안 보입니다. 사람들은 안 보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세상 아닙니까. 얼마나 기상천외한 사기 사건들이 기승을 부립니까.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마당에,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믿으라고 하니 이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예, 아멘.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하지만 정말 자신 있으세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우리 눈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을 믿을 확신이 있으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증명해 보이시겠습니까.

이렇게 자꾸 제가 물으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도 긴가 민가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 홍 목사, 뭘 좀 잘 못 먹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부터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 예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만, 우리 주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분일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한 번 들으시고, 이 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의상 A 집사님이라고 합시다. 이 분은 여성이고 40대 주부입니다. 집사님은 신앙이 있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모태신자입니다. 그리고 현재 남편과 아이들 모두가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이 분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예배에 갑니다. 돌아와서는 남편과 아이들 식사를 차려줍니다. 식사할 때에는 식사기도를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낮에는 성경을 보고 구역식구들과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1년에 몇 번은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 가기도 합니다. 방언 은사도 받았습니다. 교회 청소나 꽃꽂이 등의 봉사도 합니다. 주일 예배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아요. 십일조도 꼬박꼬박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서는 성가대로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현재 교회 어머니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분의 신앙생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천국 문지기예요. 천국 앞에 서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여러분이 심사한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A 집사님이 오셨어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판정을 하시겠습니까.

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합격! 이러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 우리나라의 교회를 갉아먹고 있는 매우 심각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성전에 수많은 교인들. 하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하는 대답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얼버무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데, 비리를 저지릅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데 이웃을 미워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데 사람들을 공격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데 남들한테 거짓말을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데 남의 것을 빼앗습니까


만약에 이러면서도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모욕하는 행위요, 예수님을 부정하는 행위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먹칠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단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께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빌립 사도가 그랬지요.

요한복음 14장 8절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ピリポは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満足します。」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ピリポ。こんなに長い間あなたがたといっしょにいるのに、あなたはわたしを知らなかったのですか。わたしを見た者は、父を見たのです。どうしてあなたは、『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と言うのですか。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벌받는 말인가요? 아니에요. 우리도 이런 말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무슨 그렇다고 또 무슨 자기를 가리켜서, 나를 보는데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라고 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정말 곧이곧대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좀 의심해봐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조금 더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이 말씀을 자세히 보도록 합니다. 교회 오래 다녔으면 이로써 예수님의 제자라고 안대요? 헌금 많이 내면, 높은 직분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아본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앞서 말씀 드린 A 집사님에 대해서 어땠습니까. 모태신자면 예수님 제자라고 알아본다던가요? 기도 많이 하면? 봉사 많이 하면? 방언 많이 하면 예수님 제자라고 알아 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아본대요?

예,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해야지만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는 것이지요. 누가 그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정말 예수님의 제자구나……라고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요,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사님을 봅니다, 어떤 권사님을 봐요, 그리고 떤 장로님이나 목사님을 봐요. 그러면 야……정말 내가 예수님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만 보면 정말 예수님이 계신 것 같아요. 그 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 분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이 느껴져요……혹시 여러분 마음 속에 이런 분이 계신가요?

사실 그런 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러니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남들이 물으면 아, 예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다~ 같이 기도하자~ 하고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인정하나요?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그걸 믿지, 눈에 보이지 않고, 요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요? 아하, 그래, 정말 내 주위에 보니까 그럴만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은 안 계신 거야……그러셔야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 분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7절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말씀드리자면,

“네가 가서 그와 같이 하라” 「あなたが行ってそのようにしなさい」
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남들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뭘 할까요? 서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럼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믿음에는 바로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혼자 기도하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예배 드리면 그것이 실천이요, 그것이 행함이요, 그것만 열심히 하면 천국 가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이웃 사랑이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귀찮다고 해도 자꾸 가서 예수 믿으라고, 우리 교회 나오라고 전도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요?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내가 이것도 가지려고 하고 저것도 가지려고 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안 빼앗기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 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주먹을 쥐게 됩니다. 여러분, 주먹은 공격을 뜻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데, 내가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총을 들이대면서, 칼을 휘두르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더구나 주먹을 쥐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웃이 들고 있는 짐 하나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손을 펴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줄 때 손이 펴집니다. 우리 손이 펴지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이 필요로 할 때 내가 그 손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리 꽉 쥐고 있어봤자 이제부터 100년도 못 쥐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그 많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유언은, 자신을 묻을 때 손을 관 밖에 내놓으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온 천하를 얻었던 자신도 죽을 때는 빈 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어렵지 않습니다. “주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주십시오. 돈이 있다면 돈을, 재산이 있다면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도 좋지요.


그렇다고 무슨 자기 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을 정도로 나누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자판기 주스나 커피 하나 뽑아주셔도 좋을 것입니다. 꼭 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꽃 한 송이면 어떻습니까. 과자 한 봉지라도 좋겠지요.

이웃에게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한 방물 남김 없이 모두 쏟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돈이 없어요? 재산이 없어요? 그래서 줄 것이 없어요? 아니요. 줄 것이 있습니다. 용기를 주세요. 힘을 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를 해주세요. 같이 기뻐해주시고, 같이 슬퍼해주세요. 격려를 해주세요. 위로를 해주세요.

보세요. 얼마나 줄 것이 많습니까.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공짜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주로 뒤쪽만 좋아하죠?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신다……참 좋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후히 될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무엇이래요? 예, 우리가 이웃한테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이 도로 준대요? 아니요.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주는 것과 예수님이 주시는 것, 어느 쪽이 크겠습니까. 이건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온 천하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큰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정도로 채워주신 답니까. 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재산,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입니까? 아니에요?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예, 아직 이웃한테 덜 나누어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답이 나왔지요? 예수님께서는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누어주면 줄수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채워주신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이웃에게 더 많이 주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이 나누어주고 주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채워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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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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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회 믿음의 기승전결
2018년 4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21절~23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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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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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기승전결”信仰の起承転結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영화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사실 여유롭게 영화를 즐겨 볼 시간이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래도 가끔 보곤 했습니다.

한국영화, 일본영화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세계적이 영화라고 한다면 미국영화, 말하자면 할리우드 영화를 꼽을 수 있겠지요. 한마디로 할리우드 영화라고 해도 그 장르는 무수히 많겠습니다만, 어떤 영화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 할리우드 영화는 대체적으로 구도가 단순하다고 합니다.

우선 맨 처음에 도입이 있고, 조금 있으면 그 도입으로 인해서 어떤 사건이 발전합니다. 좀 내용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점점 이야기가 발전하다가, 막판에 클라이맥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엔딩이 있지요. 이처럼 단순한 이야기 흐름이 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는 남녀노소 누가 보더라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소설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기승전결이라고 하지요. 역시 맨 처음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이를 받아서 사건이 이어지고, 이렇게 이어진 사건이 나중에 크게 전환된 다음에 마지막에 맺어진다는 진행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학교 갔다가, 수업 듣고 도시락 먹고 공부하고 집에 와서 잤다……이건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닙니다. 소재가 어떻든 간에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기승전결에 맞게 잘 구성을 하야지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구성이라는 것은 그 작품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흐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야기를 쓰는 쪽이나 보는 쪽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때는 사사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직 왕이 없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과 사사기 21장 25절을 보면 이 사사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めいめいが自分の目に正しいと見えることを行っていた。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끝내고 모세에게 이끌려서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40여 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마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를 앞세워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되지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까지 대략 340년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입니다. 당시에는 사사라고 하는 리더가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왕처럼 막강한 권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가 사망하자 곧바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대로 놔두시나요. 경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외세를 일으켜서 괴롭게 합니다. 그제서야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이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사사라고 하는 리더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죠.

그렇게 되면 평화가 임하게 되는데, 그러면 뭘 합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이처럼 우상숭배, 침략, 회개, 구원, 평화…또 우상숭배……이와 같은 반복이 계속되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13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イスラエル人はまた、主の目の前に悪を行ったので、主は四十年間、彼ら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た。

참 암울한 시절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단 지파의 마노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부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십니다.

사사기 13장 3절~5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
v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主の使いがその女に現れて、彼女に言った。「見よ。あなたは不妊の女で、子どもを産まなかったが、あなたはみごもり、男の子を産む。
今、気をつけなさい。ぶどう酒や強い酒を飲んではならない。汚れた物をいっさい食べてはならない。
見よ。あなたはみごもっていて、男の子を産もうとしている。その子の頭にかみそりを当ててはならない。その子は胎内にいるときから神へのナジル人(びと)であるからだ。彼は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から救い始める。」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가 바로 그 유명한 삼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삼손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 마노아입니다. 그 동안 별로 주목 받을 일이 없었던 이 삼손 아버지 마노아입니다만,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이와 같은 수태고지를 듣게 되지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때 그 자리에는 남편 마노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서둘러 남편을 찾아가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한테 나타나서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고,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남편 마노아가 어떻게 했냐 하면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8절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そこで、マノアは主に願って言った。「ああ、主よ。どうぞ、あなたが遣わされたあの神の人をまた、私たちのところに来させてください。私たちが、生まれて来 る子に、何をすればよいか、教えてください。」

마노아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 아내에게 보내주셨던 사자를 다시 보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제가 만약에 하나님 같았으면, 아니 내가 네 아내한테 말했잖아. 한 번 말했으면 그걸 믿어야지, 니가 뭔데 귀찮게 오라 가라야? 라고 말했을 만도 한데, 하나님은 참 친절하십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그래서 다시 나타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한테는 이미 아내한테 삼가라고 했던 포도주와 독주도 멀리 하라고 사자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 마노아, 믿음이 참 있는 분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겠다고 하지요. 그랬더니 사자는 말합니다.


사사기 13장 16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すると、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い、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ささ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대접하려면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해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여호와의 사자답습니다. 그래서 염소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불꽃이 거기서 하늘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마노아. 그제서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한 말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それで、マノアは妻に言った。「私たちは神を見たので、必ず死ぬだろう。」

이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께서는 이해가 되시나요? 여기서 잠시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 마노아는 어떻게 했다고요? 예, 자기는 못 봤으니까 하나님이 보냈던 사자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다시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이 마노아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아, 우리가 하나님을 봤으니까 이제 죽을 거라는 것입니다. 이건 완전 코미디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철저하게 기승전결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그냥 심심해서 툭 하고 축복을 주시거나, 또 심심해서 툭 하고 징벌을 내리시거나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때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고, 징벌을 하시는 것도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마노아가 한 말이 전혀 뜬금없는 소리는 아닙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また仰せら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顔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人はわたしを見て、なお生きてい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하지만 앞뒤 진행상황, 기승전결을 보아야 하지요. 하나님의 사자가 친히 나타나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를 죽이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아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중에서 13장 23절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13장 23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妻は彼に言った。「もし私たちを殺そうと思われたのなら、主は私たちの手から、全焼のいけにえと穀物のささげ物をお受けにならなかったでしょう。これらのことをみな、私たちにお示しにならなかったでしょうし、いましがた、こうしたことを私たちにお告げにならなかったでしょう。」

아니, 여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를 죽이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바친 제물을 받으셨겠어요? 우리에게 아들이 태어난다고 말씀하셨겠어요? 무엇보다 우리한테 나타나셨겠느냐는 것이죠. 아내는 믿음의 기승전결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지혜 없는 남편과, 지혜 있는 아내의 환상적인 커플 아닙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고 쯧쯧……딱한 마노아 같으니라고……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이러 내용이 성경에 적혀 있냐 하는 것이죠.

성경을 읽다 보면, 아, 이 부분은 정말 적혀 있으면 좋겠는데, 안 적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 적혀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인간적으로 보면 궁금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안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은 내용,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적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실 이 믿음의 기승전결, 정작 마노아는 알지 못했으나 이름 없는 마노아의 아내가 알고 있던 믿음의 기승전결은 축복을 얻기 위한 어마어마한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부귀와 영광을 누린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솔로몬이 아닐까 합니다.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된 내용만 보더라도 그 재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크나큰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기승전결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솔로몬. 물론 그는 다윗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생배경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본래 다윗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의 충신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서 다윗 왕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정작 다윗 왕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결과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자, 이 일이 들통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전사하도록 만들고는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고 맙니다.

사무엘하 11장 26절에 보면 남편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밧세바가 소리 내어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참 이 얼마나 잔혹한 일입니까.

솔로몬은 그와 같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불편함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던 그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솔로몬은 물론이거니와 밧세바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빼앗은 다윗 왕을 밧세바가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 때문인지, 열왕기상 1장 17절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에게 말하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밑에 30절을 보면 다윗도 이를 시인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고 여겨집니다.

결코 축복된 만남이라고 할 수 없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을 두고 솔로몬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특히나 예민한 시기에는 마음의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기승전결, 신앙의 기승전결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비록 축복받는 만남의 결과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나를 왕으로까지 삼으셨다.

아,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승전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내가 이 일을 잘 감당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열왕기상 3장 5절을 봅니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その夜、ギブオンで主は夢のうちにソロモンに現れた。神は仰せられた。「あなたに何を与えようか。願え。」

그러자 솔로몬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왕으로까지 삼아 주셨습니다만, 저는 아직 부족해서 왕으로서 제대로 다스릴 자신도 없고,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잘 다스릴 수 있게 해주세요.

이 말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열왕기상 3장 10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この願い事は主の御心にかなった。ソロモンがこのことを願ったからである。

그래, 네가 이제 내 마음을 아는구나. 맞았어. 내가 너한테 원했던 게 바로 그거야. 좋아. 그러면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 11절~13절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
v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求め、自分のために長寿を求めず、自分のために富を求め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をも求め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求めたので、
今、わたしはあなたの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の心と判断する心とを与える。あなたの先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かった。また、あなたのあとに、あなたのような者も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の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とを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の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ひとりもないであろう。

이 말씀을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막 들려오기까지 하는 것 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좋아하실 수가 있어요? 이처럼 전무후무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받고, 그 뿐만이 아니라 솔로몬이 사는 동안 솔로몬보다 큰 부귀와 영광을 가진 왕들이 없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나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3절에 보면,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ソロモン王は、富と知恵とにおいて、地上のどの王よりもまさっていた。


어떤 분은 솔로몬이 축복을 받은 이유가 지혜를 구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맨날 지혜만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토록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기승전결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이렇게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우리도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건강을 구합니다. 축복을 구합니다. 문제 해결을 구합니다. 때로는 돈을 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돈을 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체면 차릴 것이 무엇입니까. 돈도 중요합니다. 구하십시오. 좋은 집도 구하십시오. 좋은 차도 구하십시오. 그러나 구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승전결, 믿음의 기승전결을 생각하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나를 이러한 상황에 놓으셨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구해야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건강? 문제 해결? 돈? 집? 차? 좋아. 그러면 내가 너한테 그것을 주면 너는 그것을 가지고 뭘 할 텐데? 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과 딱 맞아떨어졌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맡기신 일을 위해서 이렇게 쓰겠습니다. 저렇게 활용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 마음에 드셨어요.

만약에 그렇다면요.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가 구한다면, 집이나 차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라도 여러분께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위해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光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後の雨のように、地を潤される。」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오시면서 지금 여기에 나를 있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원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실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써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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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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