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회 역산법의 비밀
2017년 9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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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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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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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역산법의 비밀” 逆算の秘密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일본어를 가르치시는 선생님과 어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이번에 EJU 프로그램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조언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EJU라는 것은 일본유학시험으로서, 외국인학생이 일본 대학, 그 중에서도 중상위권 이상인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치르는 시험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몇 년 동안 가르쳤던 경험이 있었고, 이 선생님도 열정을 가지신 분이라서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한테 지금 누가 주도적으로 이 EJU 대비반을 구성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건 자기가 아니라 어떤 다른 선생님이래요. 그래서 그 분이 지금 대단히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냐고 하니까, 일단 11월 입시 대비반부터 준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시험이 1년에 6월과 11월, 두 번 치러지거든요. 그래서 지금이 이제 9월이고 하니까 11월 시험반부터 만들고 준비를 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 시험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들으면, 아, 그런가보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시험을 몇 년 동안 가르쳐본 적이 있잖아요. 원서 접수 마감이 시험 일자에 비해서 상당히 빠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좀 의아했습니다. EJU 시험반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렇다면 원서접수도 아직 안 됐을 텐데, 11월달 준비를 해? 그래서 제가 그 선생님한테 물어봤죠. 혹시 11월 EJU 시험 원서 접수 마감이 언제인지 아세요? 그랬더니 모른대요.

제가 그 자리에서 11월달 시험 원서 접수 마감이 언제인지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7월 28일에 이미 원서 접수가 끝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무리 열심히 그 시험공부를 해 봤자 시험을 볼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좀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그런 일은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학생은 서울대 정시모집에 지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밤이나 낮이나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3당 4락…3시간 자면 합격하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그런 생각으로 잠도 줄여가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능시험을 봤는데 모든 점수가 최상위권 1등급이었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겠구나 하고,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서울대에 가지 못했습니다. 입시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서조차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수능시험에는 선택과목이 있는데, 그 선택과목 중에서 서울대에 지원하려면 반드시 제2외국어나 한문을 선택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제2외국어나 한문이 아닌 다른 과목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 하면 원서도 내밀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물론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냥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한다고 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는 것은, 이는 오히려 가장 안 좋은 공부 방법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만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100미터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되나요? 그냥 내리 뛴다고 우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출발지점에 서서 출발신호가 울리면 결승점을 향해서 뛰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요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무조건 열심히 재료를 넣고, 무조건 썰고, 무조건 열심히 끓이고……그렇게만 한다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가 있나요? 아닙니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승하기 위해서는 우승하기 위한 방법이 있는 것이고, 합격하기 위해서도 합격하기 위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시험공부일까요. 그것은 바로 역산, 거꾸로 풀어보는 방법입니다. 우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지, 어느 자격증을 따고 싶은지, 아니면 어느 시험에 합격하고 하는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선 열심히 공부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정하면 되지……가 아니에요. 이것부터 먼저 정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대학, 합격하고자 하는 시험을 정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 시험과목을 알아봐야겠죠? 그러면 어떤 과목이 있고, 어떤 내용이 있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본다면 어떤 내용이 어떤 식으로 출제 된다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하지요. 자,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어디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인 것입니다. 대학은 꼭 서울대나 동경대가 아니더라도 좋은 대학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에 천국이 아닌 다른 곳에 가도 된다고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을 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v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ヨハネの黙示録20章12章~15章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そして、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また、別の一つの書物も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人々は、これらの書物に書きしるされているところに従って、自分の行な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死もハデス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そして人々はおのおの自分の行な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それから、死とハデスと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第二の死である。いのちの書に名のしる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この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펴져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책들>이고 또 하는 <생명책>이라는 것입니다. <책들>에는 우리가 우리 행위를 따라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우리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고 결국 불못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뭐예요? 예,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불못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책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의 합격자 명단인 셈입니다. 다른 예외가 없어요. 오직 이 한 가지 방법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예전에 이런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동안 열심히 신앙 생활하던 어떤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막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가 붙들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베드로였습니다.

아,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곳을 통과하려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복잡한 것은 아니고 당신이 일생 동안 살아온 것을 점수로 환산하여 1000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1000점이라고요? 별로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요.

자 그럼 이제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얘기를 해보세요.

저는 30년 동안이나 한 선교 기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 했으며, 지난 60년 동안 한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장년부 성경 공부를 인도했어요.

아! 그래요? 정말 대단하군요. 1점입니다.

네? 1점이라고요? 그것밖에 안됩니까? 저는 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무려 40년을 한번도 싸우지 않고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훌륭히 키웠습니다. 내 아이들은 지금 모두 목사, 교수 등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행복했답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매우 훌륭하군요. 요즘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매우 드문데, 2점 가산입니다.

네? 2점이라고요?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는 벌써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1000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점수가 올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겨우 3점이군요. 그런데 난 어떡하죠? 더 이상 점수에 보탬이 될만한 얘기가 없는데 예수님 난 어떡하나요? 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이 못되나 봅니다. 제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게 구원을 주실 이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를 도와 주소서.

이 말을 마치자 베드로가 박수를 치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야 당신은 1000점을 얻었습니다. 이젠 들어가도 좋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1000점을 얻었죠?”

베드로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우리 구주되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데 있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예화이긴 합니다만,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제가 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비결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세상 시험이나 하나님나라 시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시험 종류에 따라서 답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겠습니다만, 제가 대학 때 전공시험을 보면, 자, 이제 교실에 들어가서 앉았습니다. 조교가 나누어주는 답안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천천히 교수님이 교실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한 번 휘 돌아보고서는 칠판에 문제를 쓰고 나갑니다.

그러면 이제 학생들은 그 문제를 보고는 답안을 좌악 써나갑니다. 자, 그런데 그 때 그렇다면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물론 정답을 적어야 합니다만, 시험에 따라서는 정답이 두 세 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문과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심한데,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A라는 이론이 있고 B라는 이론이 있어요. 어떤 경우 누구는 A이론이 맞다는 교수도 있고 누구는 B이론이 맞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자, 나는 A가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 답안을 채점하는 교수님은 B가 맞다고 생각하는 분이에요. 나는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ㅎㅎ 이건 참 어려운 문제죠. 그래서 제가 학교 때 보면 그래도 자신의 신조를 지키겠다면서 그 교수님과 다른 견해를 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물론 교수님들도 학자적인 양심이 있으신 분들이니까, 자신의 견해와 다른 내용을 썼다는 이유만을 가지고 A 줄 것을 F로 한다거나 하는 분들은 안 계셨겠지만, 그래도 조금 점수가 깎일 소지는 있겠죠. 왜냐하면 자신은 수업 때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그렇게 답안을 썼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수업을 잘 안 들었다……뭐,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른바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직업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역사적인 총리죠?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훌륭한 정치인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 의미심장한 말 아니겠어요? 우리가 생각하기를 훌륭한 정치인이라 자기 생각을 주장할 줄 알고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바로 아무리 바른 말을 하고,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하는 정치인이라 한다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서 국민들이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 하고, 아무리 국회의원다운 말을, 대통령다운 말을 한다 하더라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시험도 그럴 수 있겠지요.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결국 점수를 주는 사람은 교수님이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교수님 구미에 맞는 답을 적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린다면 좀 너무 치사하게 느껴지시나요? ㅎㅎ 그럴 수도 있겠지요. 물론 때로는 아무리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신조를 지켜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갈 때의 합격 불합격을 정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내 생각만으로 열심히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되나요? 그것은 바로 막무가내로 그냥 무작정 공부만 하는 학생과 다름 없습니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결승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선수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이라고 하면 어떤 상이겠습니까. 바로 노벨상이 있겠습니다. 이 상을 받기 위해서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눈부신 성과도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노벨상을 받는 비결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참 재미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구가 제대로 평가 받기 위해서는 보통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상한다는 게 원칙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상을 수상하기 위한 비결 중 하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노벨상 수상자에게 배우는 것입니다.

노벨상이 처음 생긴 이후 70년간 미국 수상자들을 분석해보니 노벨상을 탄 스승 밑에서 연구해 노벨상을 수상한 제자가 전체 수상자 92명 중 48명으로 절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모두 11명인데 한 명을 뺀 10명이 사제관계였거나 선후배 관계로 함께 연구를 진행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상을 받아본 사람은 어떻게 해야 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비결에 비추어본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이 생을 마쳐야 하겠지요. 물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결과는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노벨상 받은 사람과 함께 연구를 하면 노벨상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천국에 간 사람과 함께 지내요? 그건 어렵죠. 하지만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시는 분,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ヤコブの手紙4章8節
神に近づ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はあなたがたに近づいてくださいます。罪ある人たち。手を洗いきよめなさい。二心の人たち。心を清くしなさい。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19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へブル人への手紙10章19節
こういうわけですから、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まことの聖所にはい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우리는 세상 사람, 세상 방법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역산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거꾸로 계산하면 답이 나옵니다. 천국에 이르는 답이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으로 이르는 어떤 답이 나옵니까.

우리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면 평안이 넘칩니다.
그러면 축복이 넘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오직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 입어서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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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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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강을 건너야 합니다
2017년 8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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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17절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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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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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강을 건너야 합니다” 川を渡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 어떻습니까. 평탄한 길을 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좀 길이 울퉁불퉁한가요? 요즘은 다행히 그런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만, 예전에 동경에 살 때 보면 주말에 어디 좀 가려고 하면 고속도로도 그렇고 일반 도로도 그렇고 길이 꽉 막힙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하네다 공항에 갈 때 일인데, 출발을 넉넉히 해서 시간이 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고속도로로 잘 가면 될 것을,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하는 수 없이 동경 시내에서 한 번 고속도로를 내려서 반대방향으로 다시 타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 와……이게 웬일입니까. 길이 보통 막히는 게 아니에요. 저기 100미터 앞에 신호등이 보이는데, 차가 안 빠집니다.

파란색으로 바뀌긴 바뀌어요.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호등이 한 두 번 바뀌면 그제서야 몇 미터 움직이는 정도입니다. 야~ 이건 정말 인내심 테스트더라구요. 물론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서울 시내는 무척이나 막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온지 얼마 안되었다면 그나마 뭐 그러려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군마현에 살다가 동경에 그 도로정체를 겪으니까 정말 참 심리적으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체가 심하다 하더라도 조금씩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에 앞에서 사고라도 나보세요. 오히려 일반 도로라면 다른 길로 돌아갈 수야 있겠습니다만, 고속도로라고 한다면 꼼짝없습니다. 잘못하면 몇 시간씩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고달픈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어떻습니까. 사업을 하는데 경기가 별로 안 좋아서 수입이 조금 줄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는데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여요. 우리 생활 속에서 가족이나 친척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불편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 자신한테 무슨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들이 풀리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업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적자는 아니고, 직장생활이 좀 힘들어도 월급은 들어오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랑 관계가 조금 불편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무슨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우리 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는 못하겠지요.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다니고 그래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 먹으면서 치료를 받으면 살아갈 만 해요.

이 정도 수준이면 길이 좀 울퉁불퉁하거나 길이 좀 좁아서 쌩쌩 달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완전히 힘든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힘든 상황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앞길이 꽉 막혔을 때입니다. 앞에 빨간 신호등이 보일 때는 그나마 다행이에요. 왜요? 그 신호등은 언젠가는 파란 신호로 바뀔 것이고, 한 번에 저 신호를 못 지나가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저 교차로를 지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문제는 신호등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요. 그런데 뭐예요? 앞으로 가는 길이 더 이상 안 보여요.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숲으로 우거져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수익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문을 닫게 생겼어요. 직장생활을 하는데 잘리게 생겼어요. 아니면 갑자기 전혀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발령이 났어요. 인간 관계에서 예상치도 못한 큰 문제가 발생했어요. 또는 건강 상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요.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영어로는 <why me> 라고 해요. 이런 문제들? 그래, 이런 문제들이 일어났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봤어. 신문이나 뉴스, 잡지 같은 데에서 여러 번 봤어. 내가 아는 사람한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래, 그 때는 참 딱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지. 아니,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이런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면 일어났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인줄 알았어.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겨서 내가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문제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한테는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나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만사형통이요, 아무런 문제들도 일어나지 않나요? 이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들이 일어나지 왜 안 일어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낙심합니다.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대로 끝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가 오늘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라는 생각을 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탓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그래. 분명히 알고 계실 거야. 아니,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혹시 하나님은 내가 괴로워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걸까?”

사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아니요.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것은 마귀 사탄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第一ヨハネの手紙4章16節
「私たちは、私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いる者は神のうちにお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おられます。」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냥 사랑이 많다는 것도 아니요 사랑 그 자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여러 문제들 가운데에 놓이게 됩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년도 아니요, 40년도 아닌, 무려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당장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만군의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지체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습니까. 이 애굽 왕이 바로가 좀처럼 내보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이적들을 보고서도 자기의 그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납득하기도 힘든 상황이지요. 성경에서는 천지를 만드시고 전 우주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아무리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 바로 고집 하나 못 꺾으세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나요?

출애굽기 10장 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出エジプト記10章1節~2節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パロのところに行け。わたしは彼とその家臣たちを強情にした。それは、わたしがわたしのこれらのしるしを彼らの中に、行なうためであり、わたしがエジプトに対して 力 を働かせたあのことを、また、わたしが彼らの中で行なったしるしを、あなたが息子や孫に語って聞かせるためであり、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あなたがたが知る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바로 고집을 못 꺾어?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을 구원할 거야. 바로가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은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야. 이유가 뭔지 알아? 그것은 너희들만이 아니라 너희들의 아들과 자손들한테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 그래, 우리한테 지금 어려움이 닥치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나만이 아니라 내 자손들한테까지도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러시는구나……그래. 그렇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해야겠구나. 할렐루야~!!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믿음이 좋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 지금 내가 목이 마르다고 하는데, 어서 빨리 물을 주시든지 하시지, 무슨 자손들한테 하나님 이름을 어쩌구 하고 계세요. 알았으니까 우선 그 물이나 주고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중 일은 그 다음에 말씀하세요……이게 바로 솔직한 심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성경에 보면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 앞에 길이 두 번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인가 하면 애굽을 탈출하고 불과 며칠 갔더니 그 눈 앞에 홍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적해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0절~12절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v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出エジプト記14章10節~12節
パロは近づいていた。それで、イスラエル人が目を上げて見ると、なんと、エジプト人が彼らのあとに迫っているではないか。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 叫んだ。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は墓がないので、あなたは私たちを連れて来て、この荒野で、死なせるのですか。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してくれたのです。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애굽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봤는데도 불구하고, 조상 대대로 400년 동안 종살이라고 시달려왔던 애굽을 탈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좇아오는 것을 보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자 무슨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냥 애굽에서 죽게 내버려두지 왜 괜히 광야로 이끌어 나와서는 여기서 죽게 하느냐,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보다 차라리 종살이를 하는 게 낫다고 난리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일부러 아주 살아가기 힘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광야로 이끌어낸 것이에요? 광야로 이끌어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 세상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을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젖어 있던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그래 이래 살다가 죽지 뭐>

그렇다면 지금은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없나요? 아니요. 있습니다. 너무나 많습니다. 요즘 세상에서의 노예근성 그것은 바로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세상적인 방법에 사로잡힌 노예근성인 것입니다. 인생 별거야? 그냥 적당히 놀면서 적당히 즐기면서, 적당히 살다가 가면 되는 거지, 무슨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야. 일요일은 집에서 잠이라도 자던가, 아니면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지 무슨 교회고 예배야?

이것이야말로 노예근성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노예로 살면 그게 편하게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편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봤자 조금 높은 노예에 불과하지 구원받은 자유인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유>도 <믿음>도 <기도>도 <구원>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셔야 해요? 그렇죠. 가르쳐야죠.

이스라엘 민족은 기도도 안 했습니다.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바로 특별서비스입니다.


특별서비스. 듣기는 좋죠? 기도도 안 했고 믿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수 십만, 수 백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믿음이 없는 그들 눈 앞에도 참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누구는 이 홍해가 갈라진 것이, 무슨 밀물 썰물 할 때 썰물처럼 물이 줄어들어서 그 한 가운데에 길인 난 것처럼 말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요즘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있거든요. 그리고 또 누구는 이것은 바다가 아니라 갈대 숲 사이를 지나온 것이 마치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무슨 번역 오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왜 한 구절만 봅니까. 왜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그 한 부분만 봅니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해 봅니다.

출애굽기 14장 22절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出エジプト記14章22節
「そこで、イスラエル人は海の真中のかわいた地を、進んで行った。水は彼らのために右と左で壁となった。」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를 걸어가고, 물이 어떻게 됐대요? 그냥 평지에 길이 났대요? 아닙니다. 그들 좌우에 물이 벽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이스라엘 민족이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풍경이었을까요.

아무리 믿음이 없고 그랬던 그들도 기뻐했겠지요. 그래서 홍해를 건넌 다음에는 그들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제 감정을 넣어서 말씀 드리자면, 찬양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때요? 얼마 지나자 물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어떻게 해요?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믿습니다. 우리에게 물이 떨어졌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마실 물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던가요?


출애굽기 15장 24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出エジプト記15章24節
「民はモーセにつぶやいて、「私たち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ですか。」と言った。」

믿기는 뭘 믿어요.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하소연입니다. 낙심입니다. 절망입니다. 좌절입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홍해를 건너고 얼마나 지났어요? 한 달 정도 지났을까요? 그래서 그 놀라운 홍해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불평을 한 것일까요?

출애굽기 15장 22절을 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出エジプト記15章22節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홍해를 건너고 얼마가 지났대요? 예, 사흘입니다. 그처럼 놀라운 기적을 자기 눈으로 보고, 그 뿐인가요? 직접 그 마른 땅과 좌우에 벽처럼 막아선 바다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까지 불과 3일 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보면요 계속해서 광야에서는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시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구원해주십니다. 사랑으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광야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 보면, 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졸업보다는 입학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특히 문과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만 일단 해두면 졸업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양 대학을 보면, 물론 좋은 대학은 입학도 어렵습니다만, 그보다도 훨씬 더 졸업이 어렵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가 어느 쪽 제도가 좋고 나쁘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시스템으로 봤을 때 최고명문대학인 광야대학은 아무래도 서양 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믿음도 없었고 기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서비스>로 애굽에서 건져내 주시고, <특별서비스>로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언제 누가 하나님더러, 우리의 죄가 무거우니 당신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해서 죽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게 하소서……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한테 <하나님, 우리 죄가 많으니 나를 구원해주세요>라고 기도하니까 누가 나를 전도해서 교회로 데리고 갔나요? 아니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저를 포함해서 재미 삼아 교회에 나가거나, 아무리 모태신자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강한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서비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가 갈라진 것은 최고명문 광야대학에 들어가긴 위한 입학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광야대학에서 믿음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 속에서 신앙을 배웁니다. 기도를 배웁니다. 구원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이 떨어지면 목이 마르다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물을 나게 하시고,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원망을 끊이질 않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졸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졸업을 안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지, 조금 어려움이 닥친다고 뻑 하면 불평하고 뻑 하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는 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졸업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불평과 불만에 휩싸인 그들은 광야에서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대학에 입학한지 40년 후, 드디어 졸업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의 광야대학 입학식이 홍해를 건너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졸업식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로부터 전권을 물려받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 11절~13절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ヨシュア記3章11節~13節
見よ。全地の主の契約の箱が、あなたがたの先頭に立 って、ヨルダン川を渡ろうとしている。今、部族ごとにひとりずつ、イスラエルの部族の中から十二人を選び出しなさい。全地の主である主の箱をかつぐ祭司たちの足の裏が、ヨルダン川の水の中にとどまると、ヨルダン川の水は、上から流れ下って 来る水がせきとめられ、せきをなして立つようになる。」

입학식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홍해가 갈라지는 특별서비스가 있었습니다만, 이제 졸업식에는 특별서비스가 없습니다. 물을 가르기 전에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매고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뭐, 강에 들어가는 게 별거야? 바다보다는 낫겠지. 뭐 별거 아니네?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성경에는 친절하게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 전반부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ヨシュア記3章15節 一部
「ヨルダン川は刈り入れの間中、岸いっぱいにあふれるのだが」

그 당시 강은 보통 강이 아니라 물이 한창 불어서, 거기를 걸어서 건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너희들이 먼저 발을 담그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전 이스라엘 자손 같았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광야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요단 강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광야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땠습니까. 단 한 마디도 불평을 안 합니다. 불만을 안 합니다. 절망도 좌절도 안 합니다. 그 누구 하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여호수아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최고 명문인 광야대학을 졸업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한 그들은 어떻습니까. 난공불락. 절대로 공략할 수 없다고 하는 여리고성을 단숨에 물리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광야대학을 졸업하고 강을 건넜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말로 <히브리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악과 사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특별서비스로 최고명문 광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련을 겪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 믿음을 키우고, 이 광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큰 축복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에서 보시는 것처럼 불평 불만이 사라지고, 낙심과 실망과 절망과 원망을 버리고, 주님께 대한 순종과 감사로 넘칠 때 비로소 졸업하여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면 사람이 무슨 죽어야지만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언제 죽어야지만 가나안 땅을 차지했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우리가 받을 상이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 불만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낙심과 실망과 절망과 원망은 우리의 앞길을 더욱 험난하게 만들고 졸업을 늦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 눈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특별 서비스로 길이 열리지 않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크나큰 축복을 받을 날이, 넘치는 축복을 받을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불평이나 불만이나 낙심이나 좌절이나 절망을 모두 광야에 버려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서 하나님이 주시는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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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1회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2017년 8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8절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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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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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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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孤独という名の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수 천 년에 이르는 구약시대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엘리야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신구약을 통틀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사람이 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과 이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크게 쓰셨습니다. 엘리야는 수많은 이적을 행했으며, 갈멜 산에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악한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 총 850명을 혼자서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이도 아닌 엘리야 정도 되는 놀라운 선지자라고 하면, 이처럼 눈부신 전과를 세웠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당시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아합 왕, 정확히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지요. 이 이세벨이 모든 우상을 이스라엘에 다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 이세벨이 엘리야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이 대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감히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항하려느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뭐 이러면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를 대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했대요? 오늘 3절에 보니까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이처럼 놀라운 선지자가, 그토록 많은 역사를 일으킨 선지자 엘리야가, 왕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자, 기도도 안 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사실이 납득되십니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요,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쓰셨는지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이 장면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성경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신학자들 중에는 <엘리야의 우울증>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저 단지 <우울증>이었다……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어쩌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엘리야만의 특별케이스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뉴스를 들으신 적이 없습니까. 어떤 훌륭한 사람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멀쩡한 사람이 황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아서는 그 사람이 도저히 그런 어이없는 실수나 황당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도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실이 버젓이 신문에 실리고 뉴스에 방송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들도 예측하지 못할 때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독 때문인 것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독. 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고독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쉽게 <고독>이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문학인들은 고독이야말로 진정한 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말은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 같이 들립니다.

영국 <하트>라고 하는 학회지에 의하면 1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를 분석해보니, 심한 고독이나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근경색을 포함한 동맥질환 위험이 29% 증가하였고 뇌졸증은 32%나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고독함을 느낄 때에는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도 보면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은 안 그렇습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면 고독을 피해갈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경험이 많고, 아무리 학벌 좋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고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죠. 안타깝게도 교회라고 해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목사님들을 비롯한 교역자나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도 소용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기적을 많이 체험했다 하더라도 엘리야 보다도 더 믿음이 좋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엘리야도 피해가지 못했던 <고독>이라는 순간을 우리라고 피해갈 수 있을까요? 물론 절대 불가능하다고까지는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분명히 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화재를 바꾸어볼까 합니다.

1927년 5월 20일 새벽 5시 52분.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루즈벨트 공항에서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이륙했습니다. 비행기 이름은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그 비행기에는 찰스 린드버그라고 하는 25세 젊은 조종사 한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그 때까지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뉴욕 파리 간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도전하기 위해 이륙한 것입니다.

그의 비행거리는 총 5810킬로미터. 시간은 33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한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닙니다. 두 명 이상의 조종사가 번갈아 가면서 조종을 해서 대서양을 건넌 것은 60번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독으로 횡단한 사람은 그 때가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30시간 이상을 자지도 않고 조종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린드버그는 현지시간으로 5월 21일 밤 10시 21분에 파리 르 • 부르제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공항에 몰려든 인파는 공항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는 75만명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100만명이었다고도 합니다. 한 마디로 어마어마한 환영인파였던 것이지요. 이 소식은 미국이나 프랑스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전세계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찰스 린드버그라고 하는 25세 청년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도착한 것이 밤 10시 넘어서라고 하니, 파리는 이미 해가 저물고 난 다음이었겠지요. 비행기에서는 파리의 야경이 보였을 것입니다. 린드버그는 하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한 말이 “날개여 저게 바로 파리의 불빛이다” 「翼よ、あれがパリの灯だ!」 Oh, my wings! That is the light of Paris 라고 했다고 합니다. 참 멋있죠?

하지만 뭐, 이건 린드버그가 쓴 자서전에 적혀 있는 말이니까 누가 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사실 파리에 도착해서 그가 처음 한 말은 무슨 드라마틱한 말이 아니라 <화장실이 어디에요?>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여기 누구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파리의 야경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영웅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던 횟수는 린드버그 이전에 60회 이상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했던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요. 도전했던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지금이라면 레이더 기술도 발달하고 했기 때문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하면, 그 흔적이나마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도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졌지만, 그 때는 그런 기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무선이나 레이더 기술이 높았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락이 끊기게 된다면 그냥 바다 어디 한 가운데에서 사라졌구나 하고 그게 끝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사진 검색을 해보니까, 린드버그가 1927년 5월 21일 밤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사진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3시간 30분 전인 1927년 5월 20일 새벽 5시 52분에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루즈벨트 공항을 출발할 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제 검색기술이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글쎄요.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 파리에 도착한 순간에 찍힌 사진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분량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 비행기를 만들어준 기술자도, 그 비행기의 이용을 허락해준 공항 측에서도, 그래, 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을 테니 그 중 한 명이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친구가 성공하겠어? 괜히 젊은 목숨만 날리는 거겠지. 사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뭐하러 찍어? 뭐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가 파리까지 비행하는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졸음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행이라고는 하지만 33시간이나 아무 것도 없는 바다 위를 비행한다는 일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는 없겠지만, 졸음을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 때 한 6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4시였습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전에 일찍 자주던가 했을 텐데, 워낙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새벽 4시에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출발하기 전부터 졸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또 급한 일이라서 도중에 눈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을 하고 보니까 온몸이 아파요.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만, 도중에 졸지 않기 위해서 제가 혼자서 온몸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린드버그가 졸린 상태로 출발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숨을 건 모험 전날, 평소처럼 편하게 잠을 잤다고 보기는 어려웠겠지요. 고작 6시간 동안 졸음을 참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는 무려 33시간이나 그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힌 것은 졸음만이 아니었습니다. 비행기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마실 물도 1리터밖에 싣지 않았고, 먹을 것이라고는 샌드위치 다섯 조각뿐이었다고 하니, 배도 많이 고팠을 것입니다.


졸음과 허기와 싸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역사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도전이 성공만 한다면 자신은 큰 평가를 받을 것이요,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뿐이었을까요? 그는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지금 자기가 날고 있는 이 대서양에서 흔적도 없이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공포와 고독을 달래줄 사람과 대화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로 파리에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일까. 지금처럼 레이더도 없었기에 그는 종이 지도와 나침반을 보고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대로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리고 무사히 파리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나를 맞아줄까. 아무도 나를 알아봐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 비행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해낼 수 있다. 틀림없이 성공적으로 파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결국 아무도 이루어내지 못한 대서양무착륙 단독비행이라는 과업을 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독하지나 않았을까 합니다. 갈멜 산 대결에서 대승을 거두고 거짓 선지자들을 상대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합이나 이세벨도 나를 인정해주겠구나. 이제서야 내 말이 사실인줄 믿어줄 것이다……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이세벨이 어떻게 했대요?

오늘 본문 2절을 봅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어쩌면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여전히 나는 평안할 수가 없구나. 이제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쪽을 보아도 내 적군이요, 저쪽을 보아도 아군이 안 보여요. 아무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라고 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19장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휴. 이제 나는 더 이상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른 훌륭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다 해봐도 안됩디다. 그러니까 어서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주세요……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독이란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요 놀라운 믿음을 가진 선지자 엘리야마저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야도 그런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이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뻑하면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모세를 괴롭힙니다. 모세는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독했습니다. 모세도 너무나도 힘들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1장 14절~15절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도 이처럼 극단적인 마음이 들 정도로 괴로워했습니다. 어디서 괴로워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땠습니까. 골리앗을 물리치고 영웅이 될 줄 알았으나, 그는 사울 왕에게 오랫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구약에서만 그런가요? 신약에서도 바울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채찍질도 당하고 매도 얼마나 많이 맞고 그랬습니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 없고 어딜 돌아보아도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밖에 안 보입니다. 이럴 때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리고 이 고독의 길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도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실 때의 모습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을 지키겠다면서 호언장담했던 제자들도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혹시 고독을 겪고 있습니까? 외로우십니까? 주변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길은 주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이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순간인 것입니다.

고독의 길은 지금 그 순간 혼자 남겨진 것 같고, 지치고 힘들게 느껴질 지라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조금만 참고 견디시길 바랍니다. 그 길은 우리가 처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대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주님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면서 세상을 이기고 마침내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로 힘차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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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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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0회 갈증
2017년 8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요한복음 4장 16절~18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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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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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물 곁에 앉아 계셨는데, 저기서 사마리아 여인이 마침 그 우물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요한복음 4장 7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왜 말을 거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상황을 본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길에 보니 우물 곁에 누가 앉아 있어요. 척 보니까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인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니까 내가 가면 저리 비켜 앉거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 지도 몰라. 그래, 이런 차별을 겪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유대인이 나한테 말을 겁니다. 그것도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 좀 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매우 의아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인간취급도 안 하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당신이 나 같은 여자한테 물을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여자가 놀란 이유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놀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서로의 말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는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음? 아니, 처음에는 나한테 물을 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 자기한테 구하면 물이 아니라 생수를 줘?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생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이 여인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한 건 자기가 목마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가 나한테 생수를 준다고 하네? 아니,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디 있어? 그런 게 있다면 자기가 마시던가 하지,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그래?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이건 자기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이 듭니다. 어? 한 번 마시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아? 그런 물이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런데 뭐라구? 자기한테 구하면 생수를 준다고? 어디 그럼 나도 한 번 달라고 해봐야겠다.
예를 들어서 어떤 좋은 약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그 약을 먹고 어떤 병이 나았대요. 아, 그렇구나. 그것 참 다행이네. 잘 됐네…….
이것으로 끝나면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자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얘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그렇게 좋은 약이 있어? 그렇다면 나도 한 번 먹어봐야겠구나.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내 것이 되는 순간이요,
바로 이 순간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나에게 임하게 되는 순간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구나. 내가 그 생수를 마셔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맨날 이렇게 고생하면서 우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할까. 그렇게 생각한 이 여인은 이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래요? 그런 축복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 물을 나한테도 좀 주세요……라고 비로소 예수님께 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 나는 갈증이 있어. 목이 말라. 그렇기 때문에 매일 이렇게 힘들게 우물 물을 길으러 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비록 자신에 대한 일이지만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갈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요?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여기가 이렇게 아파요. 저기가 저렇게 안 좋습니다……라고 의사 선생님한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의사 선생님이 그 말만 믿고 나를 치료하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환자의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뭘 해요? 예, 검사를 합니다. 청진기를 대 보기도 하고, 맥박을 재볼 지도 모릅니다. 엑스레이를 찍기도 하고요, 심전도 검사나 혈액검사 같은 것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환자의 말이 못 미더워서요?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환자가 느끼고 있는 통증이나 불편함을 일으키는 보다 더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디가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다른 부분이 안 좋아서 거기가 아플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알고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여인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이 육체적인 갈증, 단순히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서 느끼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보다도 더욱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사실은 여인 자신도 몰랐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여인이 자신에게 생수를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 말 대로 침대 위에 누운 것이나 마찬가지죠. 자, 제 몸을 맡깁니다. 청진기를 대건 혈액검사를 하건 원하는 대로 검사를 해서 저를 치료해주세요……라면서 의사 선생님한테 치료를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이제 내가 갈증이 있으니까 내 갈증 좀 해소해주세요. 이렇게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스크를 하시고 장갑을 끼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이 사마리아 여인이었다면 어떤 것을 상상했을까요.
예수님한테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주머니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물통을 꺼내시고는, 자, 이걸 마셔. 이게 바로 그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야……. 뭐 이런 모습을 상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시는 것도 아니요, 생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4장 16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씀이 바로 이 여인을 치료하기 위한 첫마디였습니다. 그야말로 동문서답 아니겠습니까? 아니, 목이 안 마르게 되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왜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건 마치 내가 팔이 부러져서 병원에 갔는데 소화제만 주고 집에 가라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다음 구절 전반부에 보면 이 여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씀을 듣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17절 후반부에서 18절까지를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남편이 없다고? 그래 맞아. 너한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지만 그게 다 네 남편이 아니고,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지금 너한테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이 맞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 옆에 누가 서서 이 말씀을 들었다면 뭐라고 했겠어요? 아니, 여보쇼. 당신이 선지자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여인은 모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갈증의 원인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엇갈리는 것처럼 이어졌던 대화가 비로소 모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다양한 방면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는 그저 결혼해서 애 낳고 집안 살림이나 하면 되는 것이지, 여자가 배워서 뭘 하느냐……라고 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인 예수님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 여인도 남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을 만한, 자신이 의지할 만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만한 남편을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 난 남편이 다섯 명이 아니니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야, 또는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야, 나는 미혼이기 때문에, 나는 직업이 있기 때문에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야……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성경을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녀가 원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을 원했던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만 하면, 돈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돈을 남편 삼아봤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그녀의 갈증이 해소 되었습니까. 아니요. 아무리 밤낮없이 돈을 모으고 재산을 늘려가 보아도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더 목이 말라갑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지고 통장의 숫자가 늘어가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어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 안되겠다. 돈이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없구나. 그래서 갈아치웁니다. 이제는 그래, 명예를 내 남편으로 삼아보자, 그러면서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가 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 칭찬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상을 받아도, 아무리 남들이 나를 칭찬하고 박수를 쳐줘도, 역시 내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 나에게 찬사를 보내주고 박수를 쳐주고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시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해서 올라갈까봐 불안함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또 안되겠다. 그러면서 이제는 권력을 좇아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많은 돈과 많은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내가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머리를 숙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VIP 귀빈 대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눈에 들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무슨 날만 되면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선물들로 가득 찹니다. 하지만, 내가 안 보는 곳에서는 나를 모해합니다. 내 욕을 합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해서든 권력의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늘 존재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채워줄 것을 찾아봐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면서, 마치 무슨 남편을 갈아 치우듯, 부인을 갈아 치우듯 세상 속에서, 세파에 떠밀리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네 남편이 아니었고, 지금 네가 의지하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만약에 이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그 여인에게 뭐라고 했겠어요?
이보쇼.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그렇게 살아서 뭘 어쩌려고 그래? 뭐 그러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영적인 갈증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전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으로 갈증을 해소해보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니. 이것으로도 채우려고 해보고, 저것으로도 채우려고 해보았지만, 결국 내 마음 속의 공허함만 늘어갈 뿐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한 우리의 심정,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또 다른 세상적인 욕망을 좇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얘야, 그것도 네 남편이 아니야……. 네가 잡으려는 세상적인 욕심이나 욕망으로는 네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오히려 더 목이 말라갈 뿐이야……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욕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다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것으로는 아무리 많이 가져봤자 우리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주는 공허한 기쁨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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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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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89회 거룩하다는 것
2017년 8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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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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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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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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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룩하다는 것” 聖なるということ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모든 것이 다 명령, 즉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만, 오늘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보면 <거룩해도 된다>가 아니라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거룩해도 되고 안 되도 뭐 어쩔 수 없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도대체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지 거룩해질 수 있겠지요.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거룩해지고 싶어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거룩하다는 의미에 대해서 3가지로 정리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함에 대해서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첫째로 우리가 먼저 거룩하다는 것에 대해서 알아볼 것은 <어디가 거룩한가>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그냥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애굽에서 핍박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막중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때 호렙산(ホレブ) 불타는 떨기나무(柴木)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3장 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神は仰せられた。「ここに近づいてはいけない。あなたの足のくつを脱げ。あなたの立っている場所は、聖なる地である。」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신 곳이 호렙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내산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만이 아니라 모세 오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내산에 나타나시고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기도 하셨던 곳이지요.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곳 신학교에서는 성지순례를 가는 커리큘럼이 있어서 신학교 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 참가하는 학생 중에는 목사님들도 계시다고 해요. 그 코스 중에는 시내산을 등산하는 코스도 있다고 하는데, 요즘도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한국 목사님들은 이 산을 오를 때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그리고 구두를 신고 오르신대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시내산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산이라고 해서 예를 갖추는 의미에서 정장을 입고 산을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산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오를 만한 산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휴,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니 그러면 그런 차림으로 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만, 조금 올라가면 땀도 나고 발도 아파지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죠. 그래서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양복을 입고 올라가냐고 했더니만, 아니래요. 한국 목사님들만 그러신다는 것입니다. 제게 이 말을 해준 분은 당시 전도사님이셨는데, 자기는 그냥 편안한 차림으로 올라갔다고 해요.

글쎄요. 뭐, 그런 경건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줄 압니다만,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만난 어떤 목사님께서는 제게 또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분께서는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니시면서 이른바 성지순례를 하고 오셨다고 하는데, 그 분이 가셨던 코스에는 이른바 <엠마오로 가는 길>エマオ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한테 나타나시고는 함께 걸으시면서 성경을 풀어주셨던 곳이지요.

그러면서 이 목사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홍 전도사, 거기 갈 때에는 정말 기도를 많이 하고 가야 해.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정말이지 그 길을 걷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걸어주시는 느낌이 든다니까> 라고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음……뭐, 그래요.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만 계신가요? 누구는 이른바 성지순례를 하는 이유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저는 이 <성지순례>라고 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이나 시내산에 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언제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는 <성지순례>가 아니라나 어디까지나 <성지관광>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꼭 예루살렘에 가야만 하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비아 돌로로사 ヴィア・ドロローサ >를 꼭 걸어야지만 예수님을 느낄 수가 있나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던 시내산에 가야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건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비쿼터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 하시다고 하잖아요. 무소부재. 안 계신 곳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도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단순히 <호렙산>, <시내산>이 거룩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바로 그 장소 거룩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순간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언제가 거룩합니까. 어디가 거룩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 드리는 교회 성전 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바로 그 시간, 주님께 찬송을 드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거룩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 거룩한 곳에서의 거룩한 시간을 1분 1초라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둘째로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에 대해서 알아볼 것은 <누가 거룩한가>가 입니다.

성경에는 모세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많은 왕과 선지자,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사도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중에서 누가 거룩한 것일까요. 이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직분 같은 것은 주님 안에서 그 가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면 하늘나라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어요?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았다면 하늘나라에서도 높은 직분을 받나요? 물론 꼭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보장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거룩한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냥 우리를 가만히 지켜만 보시는 분이신가요?

이사야 59장 1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イザヤ書59章1節
見よ。主の御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손을 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의 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금방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되 영원히 참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하다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계십니까.

히브리서 10장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へブル人への手紙10章10節
このみこころに従って、イエス。キリストのからだが、ただ一度だけささげられたことにより、私たちは聖なるものとされているのです。

히브리서 10장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へブル人への手紙10章14節
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全うされたのです。



히브리서 13장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へブル人への手紙13章12節
ですから、イエスも、ご自分の血によって民を聖なるものとするために、門の外で苦しみを受け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를 흘리신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요 사회적 지위가 높고 많이 배우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의지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에 대해서 알아볼 것은 <나는 거룩한가>가 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텔레비전을 보니까 한국최초 여성 비뇨기과 의사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그게 1999년이더라구요. 지금은 여성 비뇨기과 전문의가 30여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최초이다보니까 큰 화제가 되어서 토크쇼에도 나오고 했었습니다만, 저도 우연히 그 중 한 방송을 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분이 그 방송에서 여러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그 토크쇼 사회자가 그 의사 선생님한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시청자분들한테 좀 하고 싶은 말씀이나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라고 했더니,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그거예요.

뭐라고 하셨냐 하면, 좀 오시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오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진찰을 하다 보면 특히 남성 환자보다도 여성분이 겉은 예쁘게 차려 입고, 화장도 곱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좀 진찰을 하려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을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여기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불결하다, 뭐 이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제가 알던 어떤 남자분은요, 미용실에 가기 전에 절대로 머리를 안 감으세요. 아니, 거기 가면 감아주는데 뭐하러 감고 가느냐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가 생각 나네요. 제가 한국에서 일본 대학을 가고자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떤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아주 공부를 잘해서 일본 명문 국립대에 진학을 했어요. 그런데 이 학생의 아버님이 치과의사이신데, 대학에 다니다가 방학 때 잠시 귀국했을 때 찾아왔길래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님이 좀 일찍 은퇴를 하려고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그럴 연세도 아니실 텐데 하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만, 그 학생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환자들한테서 나는 입 냄새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아버님이 오랫동안 치과 선생님을 하셨는데 여전히 힘들다고 하시냐고 했더니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게 더 견디기가 힘들어진다고 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하면 다른 일도 아닌 치과의사를 일찍 은퇴하시려는 생각도 하시겠습니까.

정말 참 웬만하면, 병원에 가실 때에 목욕도 하고 가시고, 치과에 가기 전에는 깨끗하게 양치질도 하고 가시고, 미용실에 가시기 전에는 머리도 감고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면서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서 본다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그야말로 화려한 궁전이죠. 과거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아름답게 차려 입은 왕족들과 귀족들로 넘쳐나고 우아한 음악들과 고급 음식들로 가득찬, 그야말로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도 해요. 화장실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뭐 당시 파리에는 오물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높은 구두가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향수에 대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귀족들이라 하더라도 그리 목욕을 자주 하는 문화가 아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향수라는 것입니다. 향수를 뿌리면 오랫동안은 아니라 하더라도 잠시 동안은 자신의 불결한 몸에서부터 나는 냄새를 어느 정도 가릴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세상에서 무슨 목욕을 자주 안 하는 사람만이 향수를 쓰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눈에 보이는 화장이나 향수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화장이나 향수입니다.

이 영적인 화장이나 향수로 대표되는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3장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マタイの福音書23章27節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 、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です。墓はその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たものがいっぱいです。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고 이를 석관에 안치하면 1년에 한 번 그 겉면을 회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얗게 칠한 한 무덤은 햇빛을 받으면 어떻게 보여요? 예,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정결하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는 하얗게 칠을 해서 깨끗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 속은 어떻습니까. 뼈와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심히 부패한 곳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래요.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요. 마치 불결한 몸에 향수를 뿌린 것처럼 어느 정도는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봤자 우리 속이 깨끗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깨끗한 척을 해 봤자, 아무리 우리가 의로운 척을 해 봤자,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좋은 척을 해 봤자,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른바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해서 성도입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예배 때 찬양을 하는 분들을 성가대라고 합니다. 요즘은 <찬양대>라고 하는 곳도 많습니다만, 그렇다면 성가대에 있는 사람들이 거룩해서 성가대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도이고, 왜 성가대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럽다고 하는 <성>자가 붙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성스럽고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그만두고 교회에서만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거룩합니까? 우리가 구원 받아 마땅하기에 구원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14章6節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使徒の働き4章10節~12節
「皆さんも、またイスラエルのすべての人々も、よく知ってください。この人が直って、あなたがたの前に立 っ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が十字架につけ、神が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ナザレ人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るのです。『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この 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깨끗한 척, 거룩한 척을 해봤자 소용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나 깨나 아침이나 밤이나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고 거룩하게 되어서 온전히 주님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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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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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회 잘 되어야 합니다
2017년 7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0절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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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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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잘 되어야 합니다”恵ま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어떤 한 기독교 신문에 보니까 한국의 어떤 목사님께서 인터넷에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고 하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그 제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목사가 에쿠스를 타도 되는가”

입니다. 참고로 에쿠스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차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제차는 아닙니다만 최고급 승용차지요. 인터넷에서 가격을 보니까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고로 비싼 것이 한국 돈으로 1억 5천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에쿠스……라고 하면 우리처럼 외국에 살고 있는 분들한테는 좀 낯설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알기 쉽게 해보죠.

“목사가 벤츠를 타도 되는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씀 드린 그 기사, 어떤 목사님께서 그와 같은 글의 제목을 인터넷에 올렸다고 하는 신문기사에서, 본문을 읽기 전에 이미 그 제목 만을 보고도 그 동안 제 안에 있었던 상당히 많은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그 교회 목사님이 하신 몇 가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그게 한 20년 전인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그 때 그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요즘 기독교계에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데, 그게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하라고 했는데, 자기가 이렇게 보면, 아이들 셋이 있는 집안에서는, 제일 공부 잘하는 아이는 의대 보내고, 그 다음에는 법대를 보내고, 그리고 나중에 제일 공부 못 하는 애를 신학교 보내겠다고 기도해달라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계에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무슨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다 설교 표절이다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말 낯뜨거운 기사들도 많이 뉴스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저기에 메일을 보내기 위해서 한국 교회 홈페이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요, 여러 가지 뉴스 기사도 함께 보입니다. 그럼 정말 참 끔찍하고 민망한 사건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문제입니다. 목회자들의 금전감각에 대해서 저도 예전부터 의문을 가져왔습니다. 정말 교회 돈을 무슨 자기 주머니돈 쓰듯이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제 생각이 아니라 그런 내용이 신문에 실립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목회자라면 조금 검소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피고 그러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왜 그렇게 돈을 많이 쓰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실리는 목사님들을 보면 처음에는 다들 유명하신 분들이요, 큰 교회 목사님이라고 소문났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저런 일이 터지니까 그런 안 좋은 말들이 돌기 시작하고 일부 언론들이 그런 보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목회자들은 그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도 예전에 한국에서 섬기던 그 교회 목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신데, 전도사 시절 전쟁이 끝나고 당시 서울 외곽 쪽에 천막교회를 차려놓고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 주변에는 정말 참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전도를 하고 있는데, 전도가 잘 안 되더라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해봤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어떤 가난한 동네 아주머니를 전도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니까, 그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냐 하면 “지옥에 간다고? 웃기는 소리. 이렇게 가난에 시달리는 지금이 지옥이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전도가 안 되더래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어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대요. 그래서 아까 그 아주머니 집에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고 해요.

“아주머니, 예수를 믿고 교회에 가면 팔자가 바뀝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 아주머니가 “뭐? 팔자가 바뀐다고?” 해서 자기를 따라 오더래요. 그래서 그 아주머니랑 같이 그 천막교회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교회에 도착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까, 거기가 어때요? 천막 안에 의자는 없고, 강대상 쪽에 보니까 사과상자 하나 엎어놓은 것이 있고, 십자가는 나무 두 개를 새끼줄로 묶어놓은 것을 매달아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이 아주머니가 깔깔대고 웃더래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지 팔자나 내 팔자나”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뭐? 예수를 믿으면 팔자가 바뀌어?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예수를 안 믿는 내 팔자나,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한다는 니 팔자나 그게 그거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본 일본 코미디가 생각났습니다. 일본에는 이른바 파워스팟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런 거죠. 어디어디에 가면 무슨 신사 같은 게 있는데, 거기 가면 무슨 기를 받는다고 하는 장소를 이른바 ‘파워 스팟’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뭐 다 미신지요.

그런데 이 코미디에 보니까,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 경비원이 서 있어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돌을 만지려고 하면 만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마침 그 때 한 청년이 와요. 이 청년은 소문을 듣고 그 바위한테서 좋은 기운을 받아서 자신의 운명을 고쳐보려고 멀리서부터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경비원한테 질문을 해요. 와, 사람이 정말 많네요.라고 하면서, 자기는 오늘 처음 왔는데 여기는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경비원이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 바위는 근처에만 가더라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제가 여기서 5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근무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여기 서서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경비원을 쳐다봅니다. “5년 동안 근무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 5년 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종일 이 바위 옆에 서서 근무했습니다.”
“저……실례지만, 아르바이트로 계속이요?”
“예, 그렇습니다. 5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근무했습니다.
“계속 이 바위 옆에 서서요?”
“예, 바로 이 자리에서 쭉 근무했었지요.”
“저……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예, 마흔 한 살입니다.”
“그럼 마흔 할 살인데,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계시다는 건가요? 여기가 파워스팟인데요?
“예, 그렇습니다. 5년 동안 바로 이 자리에서 근무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바위 곁에 잠깐 와서 기를 받기만 해도 팔자가 바뀐다고, 운명이 바뀐다고 해서 몰려들고 있는데, 이 사람은 하루 종일 그 바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5년이나 계속 서 있었지만, 그 나이가 되도록 정규직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신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웃자고 만든 코미디입니다만, 제가 이 코미디를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악 중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십자가에만 달리셨나요?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고쳐달라고 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눈이 열립니다. 못 걸었던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각종 질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죽은 사람도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실지는 모릅니다만,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오셨다면 그냥 십자가에 달리시면 되지. 뭣하러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て、言われた。「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좀 이상한 말이겠습니다만,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갔는데, 거기가 천국이래요. 그런데 예수님이 안 계셔요. 그럼 그게 천국이에요? 아닙니다.

천국이라고 하는 곳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さて、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パリサイ人たちに尋ねられたとき、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神の国は、人の目で認められるようにして来 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ら、ここにある。』とか、『あそこにある。』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いいですか。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에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그 곳이 천국인 것이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 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狼は子羊とともに宿り、ひょうは子やぎとともに伏し、子牛、若獅子、肥えた家畜が共にいて、小さい子どもがこれを追っていく。雌牛 と熊とは共に草をはみ、その子らは共に伏し、獅子も牛のようにわらを食う。乳飲み子はコブラの穴の上で戯れ、乳離れした子はまむしの子に手を伸べる。

모든 질병이 사라지고, 모든 공포가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모든 다툼이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는 곳이 바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건 예수 믿은 사람들 중에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거나, 선택 받은 일부에게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받아야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임하게 된다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질병뿐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 중에 가난도 있습니다. 금전적인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중 그래도 제일 믿음이 좋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목사님을 찾아가봤는데, 그 목사님은 월세집 반지하 단칸방에서, 빚쟁이들한테 쫓기면서 살고 있고, 밥값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 밖에 못 먹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믿고 싶어 집니까?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그럼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몸이 안 좋아요. 그래서 근처에 사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의사 선생님이 알고 보니까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의사한테 치료를 맡기고 싶어지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한테 치료를 맡기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무슨 병 고치기 위해서 다니는 곳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슨 부자 되기 위해서 믿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병이 나으면 교회에 다니지 말아야죠. 부자가 되었다면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말아야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셔드린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천국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 천국이 임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목사가 돈이 많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형교회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서울로 친다면 목사님은 강남에 살면 안 되나요? 그러면 강남이 아닌 동작구나 용산 정도면 괜찮아요? 그것도 사치인가요? 그렇다면 장로님이나 집사님은 괜찮은가요? 장로님이나 집사님은 돈이 많아도 되고 목사님은 돈이 많으면 안 되나요? 그것은 자신들이 낸 헌금이기 때문에 그런가요?

예전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항상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그런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앞서 언급한 <목사는 에쿠스를 타도 되는가>라는 제목을 보니까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목사님이 돈이 많아도 돈이 많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됩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을 숨겨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자신의 생활에 여유가 있으니까 자녀들에게도 좀 교육에 투자도 하고 싶고, 차도 사주고 싶고 하지만 교인들의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아예 눈에 안 띄게 유학을 보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글에서 재미있는 단어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로 <예수 코스프레>라는 말입니다. 코스프레라고 하는 것은 코스튬플레이를 줄인 말로서, 무슨 만화 주인공이나 어떤 사람을 흉내내서 옷을 입거나 변장을 하면서 즐기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예수 코스프레……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 잘 믿는 척을 한다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사실 예수 코스프레……라는 말보다는 저는 <크리스천 코스프레>라고 하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무슨 믿음이 좋은 척, 신실한 척을 하면서 이를 과시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나 교회 성도들이 꼭 고급차를 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 보면 자신의 형편은 전혀 아닌데, 빚내고 할부로 해서 억지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급차를 타거나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도 실제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믿음이 좋은 척, 신실한 척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자신의 청빈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했던 사람들이 성경에서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금식할 때에는 불쌍한 표정, 괴로운 표정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실한 크리스천 코스프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나 목사님들이 가난해야 하나요? 그래야 믿음이 좋은 건가요?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나 목회자분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명한 강사님이 있는데, 그 분을 강사로 모시고 싶어요. 그렇다고 아무 교회에서나 모실 수가 있어요? 아니에요, 못 모십시다. 일단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강사료도 그렇습니다만, 교통비와 숙식비만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목회자에게 경제력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느 날 전화가 옵니다. 멀리서 자신을 강사로 모시고 싶어한대요. 그런데 그 교회는 경제적으로 열악해서 사례비를 못 드릴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목사님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어떻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여유는 있습니다. 사례비나 교통비 숙식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이럴 수 있지 않겠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 재정이 불안불안한데 어떻게 주님의 일을 마음껏 하면서 선교사도 파송하고 교회도 짓고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 마태복음 10장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旅行用の袋も、二枚目の下着も、くつも、杖も持たずに行きなさい。働く者が食べ物を与えられるのは当然だからです。

목회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사양한다는 것은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나 목회자만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예수님을 믿는 성도님들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잘 되고 강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잘 되어야지 남들도 우리를 보고 예수를 믿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잘 안 돼보세요.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모든 질병이 치료받고, 주님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이 넘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89회 거룩하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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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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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회 튼튼한 믿음
2017년 7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1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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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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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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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튼튼한 믿음”丈夫な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게네사렛 호수라고 하는 곳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게네사렛 호숫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말이 호수이긴 합니다만, 워낙 넓은 호수이기 때문에 웬만한 바다처럼 대단히 넓고 그리고 파도도 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갈리리 갈릴리 호숫가에 가셨더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무리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시게 되면 전달이 잘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호숫가 바닥에 강대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침 그러던 중에 보니까 두 척의 배가 있어요. 그래서 그 중 시몬의 배에 오르시고는 조금 떨어진 그 곳에서 육지에 있는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다른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예, 바로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던 어부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갈릴리 호수에서의 고기잡이는 낮에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낮에 하면 물이 너무 맑아서 고기들이 그물을 보고 다 도망간다고 해요. 그래서 어두운 밤에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시몬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고 지금 뭍으로 올라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는 것인데, 만약 어느 정도 고기잡이의 수확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거나, 아니면 시장으로 운반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었겠지요. 그리고 물고기를 많이 잡았었다고 하면 배에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시기에는 조금 부적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어땠어요? 당시 그 자리에는 베드로 외에 10절에 보니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밤새도록 타고 있던 배에는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고기를 손질하지도 않았고 운반하기 위한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는데도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배 안에는 비린내는커녕 물고기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들었지만,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고 피로에 지친 그들, 더구나 한 마리도 못 잡아서 허탈한 마음에 사로잡힌 그들한테 있어서 구원이다, 천국이다 하는 말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예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아이구, 이제 오늘 하루 공쳤으니 생활비 걱정이 되겠지요. 베드로는 부인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겠구나……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허탈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호숫가 한 쪽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피곤함과 허탈함에 가득 찬 베드로 쪽을 보고 말씀을 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深みに漕ぎ出して、網をおろして魚をとりなさい。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다시 배에 올라 고기잡이를 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베드로한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때,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고백과 함께 기적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나갔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많은 무리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많은 무리들도 모두가 베드로 쪽을 돌아보았겠지요. 메시아다 천국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많은 무리들이 존경하면서 따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온 그 무리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물론 먼 타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와 한 지역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들보다 젊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어쩌면 그들의 친인척들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지역의 유지들도 섞여있었는지 모를 일이지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지금 존경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데, 그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한테 “깊은 데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아니, 저 베드로 저 녀석은, 건방지게 지가 뭔데 우리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들어?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존경하면서 따르는 사람들까지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밤새도록 일을 했으니 얼마나 몸은 피곤했겠습니까. 거기다가 성과도 없었으니 만사가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방금 돌아온 것이 아니에요. 이미 배 정리는 다 끝냈고, 이제 그물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 자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배를 타고 나가래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보니까 전혀 뱃사람 같이 생기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고기잡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지가 뭘 안다고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지가 선생이면 다야? 천국이다 구원이다 하는 것을 알면 고기잡이를 알아?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런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을 생각해서라도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긴 가야겠는데, 그렇다고 그냥 갈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요? 한 마디라도 하고 가야지요. 그래서 한 말이 뭐였습니까.

누가복음 5장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て言っ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と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どおり、網をおろしてみましょう。」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보쇼. 당신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 같은데 말이야. 우리가 이미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어. 그런데 한 마리도 못 잡았거든. 그런데도 지금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좋아, 우리가 가 줄게.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져.

뭐 그러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도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고기가 안 잡히면 예수님이 얼마나 망신을 당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그 많은 무리들도 순식간에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겠지요.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별 것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제가 좀 성격이 못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베드로였다면 오히려 고기가 안 잡히기를 더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천국이다 구원이다 하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양반을 멀쩡한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지요.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고, 열심히 밥벌이를 해도 될까 말까 하는데 그런 허황된 말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찬스가 왔어요. 이제 본때를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자, 봐라. 당신의 말대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무슨 천국이다 뭐다 하면서 잘난 척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느냐. 당장 이 동네에서 나가라!

이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통쾌하겠어요. 그 선생이라고 하는 양반은 쩔쩔 매면서 동네를 쫓기듯이 떠나갈 것이요, 그를 따랐던 무리들은 베드로를 보고, “야 정말 베드로는 멋진 놈이야.” 이렇게 치켜세우지 않겠어요?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그물을 챙기고 갈릴리 호수로 나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니, 꼭 베드로가 그랬다기 보다는 저 같이 좀 고약한 생각을 했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5장 6절~7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たくさんの魚がはいり、網は破れそうになった。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合図をして、助けに来 てくれるように頼んだ。彼らがやって来て、そして魚を両方の舟いっぱいに上げたところ、二そう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건 몇 마리가 잡히거나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고기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물이 찢어집니다. 이대로는 고기가 다 도망갈지도 몰라요. 서둘러서 다른 친구들, 아마도 요한과 야고보였겠지요? 그들을 부릅니다. 지금 큰 일 났다. 빨리 와라. 어서 와서 도와달라.

그러니까 그들이 서둘러 가서 함께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대요? 한 배도 아니고 두 배에 모두 채웠는데 그 무게 때문에 두 배가 잠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베드로는 너무나도 놀랍니다. 그는 기적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한테 망신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고기잡이의 프로인 자신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이제 돌아와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8절에 보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これを見たシモン。ペテロは、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主よ。私のような者から離れてください。私は、罪深い人間ですから。」と言った。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죄책감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골탕먹일 생각에 사로잡혔던 자신이 너무나도 죄인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그래, 이 나쁜 놈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를 무시하려고 했지? 그러시던가요? 아니요.

10절 후반부를 봅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イエスはシモンにこう言われた。「こわがらなくてもよい。これから後、あなたは人間をとるようになるのです。」


괜찮아. 네 마음을 다 이해한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제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다……이와 같은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어떻게 했다고 해요?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何もかも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여기에 보면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들이 버려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배도 있겠고 그물도 있었겠지만, 생각해보세요. 지금 배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말대로 해서 얻게 된 물고기들, 그것도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물고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물고기는 그야말로 현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잠깐만요. 이 많은 물고기들을 어서 시장에 내다 팔고 난 다음에 사람을 취하든 뭐든 할게요”

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이제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 것에 비한다면 이런 돈이나 재산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장과정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다가 믿음이 적어서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지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는 자신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가져보려고 하다가도 실수를 하고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결과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어디냐 하면 요한복음 21장 11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シモン。ペテロは舟に上がって、網を陸地に引き上げた。それは百五十三匹の大きな魚でいっぱいであった。それほど多かったけれども、網は破れなか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고기잡이를 했더니 그물에 큰 물고기가 가득 찼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는 153마리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신 신학자들의 해석은 참 재미가 있습니다.

1. 당시의 세계 언어의 숫자이다
2. 복음의 그물이 펼쳐질 세계의 인종이나 종족의 숫자이다
3. 갈릴리 바다 또는 세계의 물고기 종류의 숫자이다
4.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신. 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
5.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견에 저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물론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믿습니다만,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
이와 같은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환상이나 예언의 말씀을 주셨을 때인데, 오늘 이 153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은 무슨 환상이나 예언이나 비유가 아닌 객관적 사실로서 적혀 있습니다.

이 기록을 적은 요한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베대의 아들, 즉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어부출신이었지요. 그러니까 요한은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는데도 그물이 안 찢어졌다는 것을 매우 놀라운 사실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쎄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당시 그물이 몇 마리의 물고기까지 견딜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당시 요한을 비롯해서 어부들에게 있어서는 보통 크기도 아닌 큰 물고기가, 그것도 100마리도 아니고 150마리다. 그것도 150마리도 아닌 153마리나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어부들이라면 마치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떡 다섯 개과 물고기 2마리로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것처럼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베드로의 믿음이 이제는 더 이상 찢어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취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믿음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튼튼한 믿음으로 성장한 베드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보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すると、ペテロは、「金銀は私にはない。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上げよう。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歩きなさい。」と言って、

그곳은 예루살렘 성전 바로 앞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드로는 그 못 걷게 된 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참 아찔한 순간입니다.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이 베드로한테 고쳐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냥 옆에서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지나친다고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괜히 일어나라고 했다가 안 일어나면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들은 사도였습니다만, 만약 여기서 망신을 당하게 된다면 그들의 사역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잘못 했다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지나치는 게 인간적으로 보면 백 번 나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베드로는 찢어지는 믿음, 약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튼튼한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오른손을 잡고 일으킵니다.

그러자 사도행전 3장 7절과 8절에 보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たちまち、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おどり上がってまっすぐに立 ち、歩きだした。そして歩いたり、は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ふたりといっしょに宮にはいって行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사도행전 4장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しかし、みことばを聞いた人々が大ぜい信じ、男の数が五千人ほどになった。

여기서도 남자의 수만 약 5천 명이었으니 여자나 미성년자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많은 숫자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찢어지는 믿음, 약한 믿음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만, 튼튼한 믿음은 놀라운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할 줄을 믿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물을 씻으면서 텅 빈 배를 바라보며 한 숨만 쉬십니까. 이제 우리는 찢어지는 믿음, 약한 믿음에서 벗어나 강한 믿음, 튼튼한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가며 직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찢어지는 믿음, 약한 믿음은 기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한 믿음, 튼튼한 믿음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기적을 기대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そのとき、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は実をみのらせず、オリーブの木も実りがなく、畑は食物を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 喜び勇み、私の救いの神にあって喜ぼう。

아멘!

이제 약한 믿음, 찢어지는 믿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역사를 의지하고 주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놀라운 믿음으로 성장해서, 아무리 큰 물고기를 잡는다 하더라도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큰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88회 잘 되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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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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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86회 그는 무엇을 팔았는가
2017년 7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창세기 25장 27절~34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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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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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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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는 무엇을 팔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에서와 야곱입니다. 둘 모두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인 이삭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듣고 자란 축복의 자녀들이었고, 그 축복의 계보를 이어갈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은 서로 성격이 좀 달랐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창세기 25장 27절~28절을 봅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당시에 아버지 이삭은 당연히 첫째 아들 에서를 후계자로 생각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차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이어갈 후손인 에서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격은 매우 활달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남자다웠습니다. 그는 산을 달리고 들을 누비면서 능숙한 솜씨로 사냥을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남성입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흡족해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버지를 위해서 에서는 자기가 사냥한 고기를 아버지에게 요리를 해서 대접할 정도로 효성도 지극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비해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형과 달라서 주로 집에 있었다고 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저런 쯧쯧쯧. 남자놈이 지 형처럼 바깥에 나가서 들을 달리고 산을 누비면서 사나이답게 살아야지, 맨날 집에서 지 엄마 심부름이나 하고 그러니 저걸 커서 어디다 쓸꼬……뭐, 이러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외모도 달랐을 것입니다. 큰아들인 에서는 햇볕에 그을리고 근육질이었겠지요. 온몸이 늠름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 야곱은요? 맨날 집에 있으니 살은 하얗고 호리호리한 체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집 대를 이을 사람은 장자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장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 29절~34절을 봅니다.
창세기 25장 29절~34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어요. 어쩌면 평소처럼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있으면서 일을 거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산을 달리고 들을 누비던 에서가 지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다가,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에서는 황급히 야곱에게 다가가서 그 붉은 팥죽을 내게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냥 어서 팥죽을 주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야곱이 에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나왔기 때문에 에서가 형이 된 것뿐이지, 실질적인 나이 차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였기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을 첫째 아들이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자의 특권에 대해서 야곱은 너무나도 탐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 집안의 대를 에서의 이름이 아닌 야곱의 이름으로 잇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에서는 어땠습니까.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에 대해서 집착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장자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거든요. 에서는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장자로 여김을 받았고, 자신이 장자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에서는 대단히 피곤하고 허기가 졌을 것입니다.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겠지요. 저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냥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허기가 찾아오면, 무슨 만화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돕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일인데, 그 동안 아무렇지도 않다가,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기가 지더라구요. 서 있기도 힘들어서 문제를 풀게 하고 부랴부랴 편의점에 가서 빵이랑 우유를 먹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서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그는 무슨 엄살을 부린 게 아니라 정말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야곱이 “팥죽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나한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에서는 야곱에게 말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 옛다 가져라, 그리고 빨리 팥죽이나 내놔……이런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도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에서가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에서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얻게 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스스로 노력하지도 않았고, 이를 위해서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에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축복의 촛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그 후손에게 주시기로 한 축복의 촛대가 에서에서 야곱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가치를 에서는 몰랐고 야곱은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맨 처음에 예수님께로 와서 속삭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절~4절을 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여러분,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3일이 아니라 하루를 금식해도 매우 허기가 집니다. 그런데 3일이나 4일도 아닌 40일씩이나 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요.
“에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금식을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을 거야.”
혹시 그렇게 생각하신 적 없으신가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만, 신성만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인성, 즉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아픔과,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우리와 똑같은 슬픔을 느끼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신성은 없고 인성만 있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분명히 인성이 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성만 있었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 대신 죽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스스로의 죄를 청산할 능력도 인간한테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으며, 인간으로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으로도 오셨고, 인간으로도 오셨다면, 그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50%는 하나님이고 50%는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인가요? 이 또한 어떻게 보면 말이 되는 것 같이 들릴 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도 큰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50% 하나님이고 50% 인간으로 오셨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도 50%요, 예수님께서 받으신 징계도 50%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50%이고,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도 50%짜리 구원이라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도 50%짜리라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50%짜리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가 받을 구원은 50%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을 구원이 기껏해야 50%짜리 구원인가요? 아닙니다. 50%도 아닌, 90%도 아닌 100%의 완벽한 구원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99.999%도 아닌 100%의 사랑을 쏟아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50% 신성과 50% 인성이 아닌, 100% 신성과 100% 인성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만약에 50%짜리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50%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50%의 하나님, 90%의 하나님이 아니라 100%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몇 프로의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100% 구원을 받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을 100%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0일 동안 주리셨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셨지요.
바로 그 때 사탄이 속삭입니다.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그런데 배고프지? 자, 이 돌멩이들을 네 능력으로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탄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탄이 주는 떡을 먹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돌멩이를 떡이 되게 해서 드시라고 한 건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를 거절하셨을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으셨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셨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폭풍이 부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던 예수님인데, 그깟 돌멩이를 떡으로 만드시는 것이 불가능하셨겠어요? 아니요, 충분히 가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거절하셨을까요.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입맛이 없었어요? 그것도 아닙니다. 40일 동안 굶주리셨습니다. 100% 신성과 함께 100% 인성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느끼는 굶주림을 똑같이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탄의 말을 거절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세상 것과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믿음을 버린 사람들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미약한 사울을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와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처음에 그가 가졌던 겸손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을 왕으로 높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데에 급급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 중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는 나중에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촛대는 누구한테로 옮겨집니까. 그렇습니다. 다윗한테로 하나님의 축복의 촛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한테 사탄이 속삭입니다. 너 훌륭한 능력 있잖아? 하나님이 너한테 준 능력이 있잖아? 그 능력을 너 자신을 위해 써야지. 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하지 않아? 지금 너 굶어 죽게 생겼잖아? 그러니까 어서 그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세상적인 것을 얻으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에서한테 속삭였는지도 모릅니다. 야, 장자의 명분이 뭐가 중요해?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줘? 그렇다면 차라리 그딴 건 저 야곱한테나 줘버리고 너는 떡과 팥죽을 달라고 해. 하나님이 너한테 준 장자의 명분이 뭐가 대수야? 지금 너 굶어 죽게 생겼잖아. 그러니까 어서 저 팥죽을 달라고 해서 먹어.
이 달콤한 유혹에 에서는 넘어가서 결국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게 되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세상 것과 맞바꿔서 없애버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 되고 맙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놀라운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명분, 은혜의 명분, 축복의 명분을 헐값에 넘기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겠지요. 아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한테 팔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구나. 혹시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설교자였던 무디 목사님은 이 야곱이 에서에게 판 팥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제외하고 이 죽보다 더 비싸게 팔린 음식물은 없었다.”
그러니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던 선악과의 대가로 인해서 전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되고 말았는데, 에서도 이 떡과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해서 본인만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음식은 정말로 비싼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비유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축복을 받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야곱이 꾀를 부려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축복 받는 사람의 약점을 공략해서 그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참 안타까운 것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실제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인지 아세요?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구절을 참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유명 대형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그 교회에서는 매년 장로를 장립하는 시기가 되면 목사님 댁에 그 장로 후보들한테서 보내오는 선물들이 집안 가득히 쌓인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어떤 사람이 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 목사님 사모님이 그러시더래요.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느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하는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을 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지, 축복 받는 사람들한테 가서 그 축복을 빼앗는다거나, 아니면 나 장로 시켜달라고 목사님 집에 선물보따리를 보내는 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으로 돌아간다면, 에서가 야곱한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나옵니다만, 그렇다면 단지 그것 때문에 축복을 못 받게 된 것일까요. 창세기 25장 34절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저도 일본에서 매일 같이 운전을 하고 그렇습니다만, 교통위반을 해서 딱지를 떼는 사람들을 보면요, 어쩌다가 딱 한 번 위반해서 잡히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음주운전이나 신호위반 같은 경우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평소에도 늘 습관처럼 하다가 언제 한 번 걸리는 것이지요.
이 에서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는 어쩌다가 재수없이 야곱한테 딱 한 번 잘못 걸렸다가 깜빡 속아서 팥죽 값 대신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평소부터도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축복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한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의 잔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의 유언을 받을 때에도 일부러 에서처럼 변장해서 아버지를 속여가면서 장자로서의 축복을 얻어냅니다. 그랬더니 야곱의 앞길이 활짝 열리던가요? 앞길이 열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의 길이 아니라 고생길이었습니다.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에서를 피해서 오랜 세월 동안 객지에서 도망자처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창세기 25장 21절~23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높이실 것을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시다. 나와 어떤 사람이 동경에서 서울까지 가는 경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서울까지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누구냐 하면, 마라톤 선수에요. 그것도 그냥 마라톤 선수가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 선수에요. 자, 문제를 내겠습니다. 누가 이길까요.
이렇게 물으면 좀 그렇겠지요? 예, 제가 아무리 기를 쓰고 달린다 하더라도 달리기로는 제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이길 수야 없겠지요. 그런데 제 주머니를 뒤져보니까 뭐가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비행기 표입니다. 보니까 동경에서 서울까지 가는 비행기 표예요.
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렇죠. 제아무리 빨리 뛴다 하더라도, 제아무리 빨리 헤엄친다 하더라도 비행기를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이제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요. 시간표를 보니까 1시간을 기다려야 한대요. 아, 속이 타기 시작합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지금 상대방 선수는 열심히 달리고 있을 텐데 난 지금 버스 정거장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있다니 이를 어떡하나……. 그러던 중에 한 가지 작전이 떠오릅니다. 그래. 아무래도 불안해. 지금 달리고 있는 선수를 방해해야겠다……하고 저기 높은 곳에 올라가서 돌멩이를 던집니다. 친구를 시켜서 함정을 파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앞을 가지 못하게 훼방을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야곱이 했던 방법입니다.
여러분, 꼭 그래야만 이길 수가 있어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기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하더라도, 내 주머니에는 비행기표가 있어요. 그 순간 이미 승부는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방해를 해요? 함정을 파요? 돌멩이를 던져요? 아닙니다. 기다렸다가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편안하게 서울까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꾀를 의지해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미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생명의 면류관도 이미 저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을 믿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패배와 우리가 받을 징계와 우리가 받을 저주와 우리가 받을 심판은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항상 감사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푯대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면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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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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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85회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2017년 7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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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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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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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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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 아는 이야기>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보면, 생소한 부분은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가다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부분이 나오면, <그거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해서 중요한 부분을 지나쳐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전을 할 때 교통사고가 날 때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길을 달릴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길,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다니던 길을 달릴 때에 오히려 방심함으로 인해서 사고가 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냥 속도를 내서 대충대충 넘어가 버린다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심한 경우에는 엉뚱하게 이해를 해서, 그야말로 성경 이해에 있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진정으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너무나도 큰 은혜를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11절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맥으로 본다면 이 <어떤 사람>이라는 분은 상당히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재산 중에서 자기한테 나누어줄 몫을 미리 달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버지는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그 재산을 갖고 먼 나라에 가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들을 모두 낭비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하더라도, 그곳 경제 상황이 좋았다면 거기서 일자리도 구해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때마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이 간 곳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먼 나라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 먼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나라, 외국이었습니다.
경기가 좋고 사람들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면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일자리가 많겠습니다만, 흉년이 들어서 경제사정이 안 좋아지고 일자리도 줄어들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일할 곳도 없어지는 마당에 외국인한테 줄 일자리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돈이 많을 때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대우해주고 그랬던 사람들도, 돈이 떨어지니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가 버리고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일자리를 찾긴 찾았는데, 그 일이 뭐냐 하면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그러기는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8절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돼지고기를 먹기는커녕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돼지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곳이 유대가 아닌 이방인이 사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분명 이스라엘 민족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돼지는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돼지를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거기에 걸맞은 교육도 받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돼지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가 그런 일을 했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너무나도 궁핍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일자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자신이 경멸했던 일, 멸시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안에 살아 있었다면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다 하더라도 믿음의 원칙, 신앙의 원칙은 지켰어야 하겠으나, 이제 돈도 잃어버리고 인심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어쩌면 건강도 잃어버렸을 그에게는 이제 그 마음 안에 있었던 신앙의 불빛도 꺼져가고,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조차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우선 여기까지를 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단순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잘못을 이 아들이 한 것일까요?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그야말로 성경적인 교통사고,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 아들이 한 잘못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만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재산을 자식이 나누어 가진다고 하는, 이른바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사망하거나 또는 사망이 임박한 가운데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둘째는 아버지가 아직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몫을 나누어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효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첫째 잘못이라고 칩시다. 제가 이를 <첫째 잘못입니다>가 아닌 <첫째 잘못이라고 칩시다>라고 굳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조금 있다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이를 아껴서 계획적으로 써야지, 돈을 물 쓰듯이 했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역시 둘째 잘못이라고 칩시다.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보면 한국에서는 대부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에 주로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라, 그리고 부모님이 주신 돈이나 재산을 낭비하지 말아라…… 그런 내용이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죠. 그런데, 그렇다면 이 둘째가 어긴 율법이 무엇입니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맞아요. 십계명에서도 제5계명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째 아들은 제5계명을 어긴 거예요?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 재산을 달라고 한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러지 말라고, 제5계명을 지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고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돈을 낭비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돈을 낭비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건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떤 피의자를 재판에 의해서 처벌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한 행위가 현행법에 처벌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명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 사람이 한 짓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법적으로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는 법조항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정죄를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겼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보면 <아버지가 건강할 때에는 재산 상속을 요구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나요? 하물며 이 둘째가 그와 같은 재산상속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가 분명히 거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재산을 빼앗아서 달아났다고 하면 아버지에게 불순종했다는 비난을 받을 만도 하고, 이것이야말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버지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본다면 이 둘째가 상속을 요구한 행위만으로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낭비를 했지요. 그렇다면 그 행위가 율법을 어겼다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 중에 <너희들은 돈 낭비를 해서는 안 될 지어다.> 라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 더구나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오셔서, 왜 굳이 3년이라고 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이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늘 나라 생활이 지루해서 잠시 바람 쐬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서 보시기에 답답해서 몇 마디 잔소리를 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직접 보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건져내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죄를 모두 씻으시고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3년여에 걸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1분 1초도 낭비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기에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볼 때, 상속방법이나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 귀한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서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부모님이 건강할 때에는 재산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거나, 돈은 아껴 써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이것이 납득이 되시나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오해가 여전히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았는데, 죽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 품에 안겼어요. 그런데 부자는 죽은 후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볼 때에 <거지 나사로>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대단히 이상해집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살았다고 나오나요?
누가복음 16장 20절~21절에 보면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나사로처럼 거지로 살아야 하고, 부자가 버리는 쓰레기를 먹고 살아야지만 하는 것인가요?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잘못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집중해야 할 곳, 핀트를 잘못 맞추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나사로>가 아니라 <부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오늘 본문을 볼 때에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상속을 받았다고 하는 점이나, 아니면 돈을 낭비했다고 하는 부분에만 집착을 하게 된다면 이 말씀도 앞서 살펴본 나사로에 대한 비유처럼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둘째 아들은 <무엇을 낭비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낭비를 했다는 것이니 그것은 재산이겠지요. 하지만 그 재산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예,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단순히 우리의 육신의 부모가 아닌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재산이 많았나요? 적었나요?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하는데, 나누어준 재산이 몇 푼 안 되는 정도라고 하면 낭비를 할래야 할 수도 없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은 정말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낭비를 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별로 안 될 것 같아요? 아이구……하나님이 나한테 뭘 주셨다고……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눈동자. 돈으로 환산해서 얼마라면 파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팔과 다리. 누군가가 사겠다고 해요.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100만원이면 파시겠어요? 아니면 200만원?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1000만원? 2000만원? 한 5000만원 정도라면 바꿔 볼만 하겠어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나, 아니면 가까운 교회 목사님과 상담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나 우리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조금 진부한 말일지는 모릅니다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쌓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흘러간 1분 1초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날짜가 7월 9일입니다만, 아무리 세상 재벌이 금은보화를 낸다 하더라도 오늘 이 하루를 또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귀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밖에 나가면 눈부신 햇빛이 있습니다. 상쾌한 공기가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대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 군마현의 맑은 공기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얼마를 냈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눈동자를 얻기 위해서, 우리 팔 다리를 얻기 위해서, 우리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얻기 위해서, 낮에는 넘쳐나는 햇빛을 얻기 위해서, 맑고 상쾌한 공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돈을 얼마나 냈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낸 돈이 과연 얼마입니까. 그렇습니다. 돈 한 푼 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공짜인가요? 아닙니다.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이, 내 영혼이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꿀만한 대단한 값어치가 있나요? 없습니다. 나 하나는 고사하고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다 모은다 하더라도 그 값어치는 예수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한 방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에 찌든,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는 영혼이 아무리 많아 봤자, 어디 예수님의 보혈 한 방울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흘려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하나 살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멸망으로 달려가는 내 영혼을 살려보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직접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세상 속에 던져 넣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돌아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좋은 차를 하나 보여줍니다. 이 차를 나한테 주겠다고 합니다. 차를 보니 유명한 회사 차예요. 최신형이에요. 속도도 300킬로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밟는 대로 속도가 나옵니다. 디자인도 번쩍번쩍합니다. 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너무나도 멋져요.
“아! 이렇게 훌륭한 차를 저한테 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한테 한 마디 말을 합니다.
“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차에는 한 가지 흠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핸들이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 차를 타시겠습니까?
이런 차는 절대로 안 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고 엔진 성능이 뛰어나고 비싼 차라 하더라도, 핸들이 없다면 사고가 나고 인생이 엉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재물이 풍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의 품을 떠난 우리들의 모습은 핸들 없는 자동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차를 타라고 합니다.
“야! 봐봐. 이 차 너무 멋있잖아? 이 차를 타기만 하면 사람들은 너를 부러워 할거야! 모든 사람들이 너를 존경할 거야! 정말로 멋진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누가 타라고 해요? 그렇습니다. 마귀가 속삭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한테도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야! 아버지한테 재산을 달라고 해.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곳, 아버지가 간섭하지 않는 곳에 가서 살아봐. 얼마나 멋지겠어? 그 돈을 갖고 산다면 정말 큰 집에 살면서, 고급 차를 몰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해서 살 수 있을 거야”
사탄이 둘째 아들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왜 그랬을까요? 이 둘째 아들을 사랑해서요? 이 둘째 아들이 정말로 멋진 인생을 살기 바랬기 때문에요? 아닙니다. 마귀 사탄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타락과 우리의 멸망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주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게 된다는 것은 그 결말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니죠. 처절한 절망이요 처절한 타락이요 처절한 좌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주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처절한 절망 속에서 후회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많은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왜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버지 도움이 없더라도 잘살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뭐 이러면서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집을 나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아니, 돌아갈 때 돌아간다 하더라도 좀 어느 정도 체면을 살릴 만한 정도로 회복하고 난 다음에 돌아가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복이 되던가요? 결국 그는 돼지 사료로 쓰이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는데도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돼지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정도까지 떨어지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존심의 회복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더 이상 버릴 자손심도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연히 아버지가 바깥에 나와 있는데 마침 그 때 둘째 아들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냥 아들보고 싶은 마음에? 아닙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육신으로 본다면 아들이 아버지 품을 떠나서 잘 되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신의 아버지 품을 떠나서 잘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품을 떠나서 잘 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도, 그 아들이 자기 품을 떠나서는 잘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세요. 아들이 자기한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죄인 다루듯이 아니라 최고의 귀빈을 맞이하듯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아버지가 준 재산을 모두 낭비하고 빈털터리로 온 아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너 내가 얼마를 줬는데 그 중에 얼마가 남았느냐, 어디에 썼느냐”하고 묻지도 않습니다. 궁금해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얼마를 잃었건, 얼마를 탕진했건, 아버지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고 얼마나 죄가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돌아올 때,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돌아올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주실 것이요,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아버지, 아버지가 아무리 나를 맞이해 주신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세계적인 설교자이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한테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면 어떤 죄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무슨 일을 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온전히 전체적으로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제가 제 후배와 식사를 했다고 쳐요. 그리고 난 다음에 “아, 오늘은 내가 대접을 하겠다”하고 제가 계산을 했습니다. 이미 돈을 내고 계산을 다 끝냈어요. 그런데 그 후배가 다시 직원을 불러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시 계산해 달라, 내가 먹은 식사에 대해서는 내가 계산하겠다……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여러분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어? 자기가 먹은 돈은 자기가 내겠데? 잘됐네. 내 돈이 굳었네. 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것은 오히려 내 마음을, 그 후배를 대접해주고자 했던 내 마음을 짓밟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버지, 내가 좀 실수를 해서 탕진했습니다만, 이런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다시 벌어서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그 때까지는 나를 종으로 생각해주세요”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더러, “예수님.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수고를 해주셨습니다만, 저는 예수님 없이, 내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한테 이런 말을 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기특하게 여길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짓밟는, 그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아침이나 밤이나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멀리서 발견하시면 거리를 마다 않고 달려와서 우리를 맞이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대접을 해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낭비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낭비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재산으로 시간으로 낭비를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맨 처음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제 일어나서……”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죄책감과 좌절과 후회와 낙심과 절망을 툭툭 털어버리고 이제 일어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 품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가 잃은 것을 모두 회복시켜 주십시다.
더 늦기 전에, 이제 어서 일어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품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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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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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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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현재진행형인 믿음
2017년 7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3장 12절~16절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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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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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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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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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현재진행형인 믿음”現在進行形の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한 기독교 신문을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 제목은 “목회자 10명 중 5명 “구원 잃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니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 이는 한국의 총신대학교 실천목회연구과정이 약 1년 동안에 걸쳐 실시한 조사결과라고 하는데, 목회자 약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고 대답한 분들은 52.5%, 그리고 <구원을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분들이 47.5%였다고 합니다.

저도 가끔 다른 목회자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거나, 아니면 그분들의 글을 읽거나 합니다만, 이를 통해서 저도 많이 배우기도 하고 은혜도 많이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안타깝게도 <과연 이 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같은 것일까> 라고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가 52.5%
<구원을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가 47.5%

제가 이 기사를 보고 한편으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만, 왜 충격적이었을까요. 우리가 한 번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면, 이제 그 구원은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인가요? 아니면 구원을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볼까 합니다.

에스겔 33장 12절~13절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v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人の子よ。あなたの民の者たちに言え。正しい人の正しさも、彼がそむきの罪を犯したら、それは彼を救うことはできない。悪者の悪も、彼がその悪から立 ち返るとき、その悪は彼を倒すことはできない。正しい人でも、罪を犯すとき、彼は自分の正しさによって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わたしが正し
vい人に、『あなたは必ず生きる。』と言っても、もし彼が自分の正しさに拠り頼 み、不正をするなら、彼の正しい行ないは何一つ覚えられず、彼は自分の行なった不正によって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성경에서 기록된 <의> 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의미와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로운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하는 사람이 바로 <의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산다> 또는 <죽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100년도 못 사는 이런 짧은 생명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생명> 또는 <산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 속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 <사망> <죽는다> 그리고 <멸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의인이었던 사람도 그 사람이 범죄하는 날에는 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못 알아들을까 봐 성경은 더욱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만을 다시 한번 봅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わたしが正しい人に、『あなたは必ず生きる。』と言っても、もし彼が自分の正しさに拠り頼 み、不正をするなら、彼の正しい行ないは何一つ覚えられず、彼は自分の行なった不正によって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의인,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너는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점으로 볼 때 이 사람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거짓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적어도 그 순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이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말씀만을 믿고 죄악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한다면, 그가 나중에 아무리 죄악을 행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구원 받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무리 구원을 받았던 의인이라 하더라도 죄악을 행하면, 뭐래요? 과거에 행했던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彼の正しい行ないは何一つ覚えられず、彼は自分の行なった不正によって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즉,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만 믿고 죄악을 행했다고 한다면 그는 죄악 가운데에서 죽으리라, 즉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사망이요, 영원한 멸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 말씀이에요? 제가 말한 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구절이 너무나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군데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간혹 <울며 이를 갈리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너무나도 강한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감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시험을 봤다고 쳐요. 결과 발표를 보니까 불합격이었어요. 만약에 그 시험을 위해서 어차피 공부도 열심히 안 했고 준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일단 시험을 치긴 했지만,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불합격이라 한다 하더라도 별로 아쉽지도 않겠지요.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그 동안 자기 생각으로는 열심히 준비도 했고, 시험을 볼 때도 나름 많이 맞춘 것 같아서 틀림없이 합격할 줄 알았습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의 계획도 다 짜놨습니다.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번 시험에 틀림없이 합격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과 발표를 보니 불합격이었어요. 그렇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깝겠습니까. 바로 그럴 때 울며 이를 가는 것이 되겠지요.

마태복음에 보면 <울며 이를 갈리라>라는 구절이 3군데 나옵니다. 시간 관계상 그 중에서 두 군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3장 47절~50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また、天の御国 は、海におろしてあらゆる種類の魚を集める地引き網のようなものです。網がいっぱいになると岸に引き上げ、すわり込んで、良いものは器に入れ、悪いものは捨てるのです。この世の終わりにもそのようになります。御使いたちが 来て、正しい者の中から悪い者をえり分け、火の燃え
vる炉に投げ込みます。彼ら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여기서 보면 “의인 같은 사람 중에서”가 아닙니다. “의인 중에서”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뭐겠습니까. 과거에 의인이었던 사람들, 자기는 구원 받을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는 구원의 날에 주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의 날, 심판의 날에 정작 자신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은커녕 풀무 불에 던져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습니까. 그래서 울며 이를 갈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도 봅니다.

마태복음 24장 47절~51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その主人は彼に自分の全財産 を任せるようになります。ところが、それが悪いしもべで、『主人はまだまだ帰るまい。』と心の中で思い、その仲間を打ちたたき、酒飲 みたちと飲んだり食べたりし始めていると、そのしもべの主人は、思いがけない日の思わぬ時間に
v帰って来ます。そして、彼をきびしく罰して、その報いを偽善者たちと同じにするに違いありません。しもべ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여기 보면 주인과 종입니다. 종은 어디에 삽니까. 예, 주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주인이 소유한 집에 종도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주인도 있는 반면에 지혜롭지 못한 주인도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지혜로운 주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주인이 바로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종도 하나님 집에 있었다는 뜻이지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 불의한 사람에게 소유를 맡기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 시점에 있어서 그 종은 의로운 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을 축복했습니다. 그 종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 종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많은 소유를 맡게 된 그 종은 악하게 변했습니다. 주인은 이제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났다. 언제 올지도 몰라 이제 내 세상이다, 그러고는 동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술친구들을 불러서 먹고 마시고 돈도 펑펑 쓰면서 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종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날, 생각지도 못한 시각에 주인이 갑자기 돌아옵니다. 돌아와보니 집 꼴이 어떻게 되어 있었겠습니까. 온 집은 엉망진창이고 음식이다 쓰레기다 하는 것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냄새는 진동을 하고, 온갖 나쁜 놈들은 들어와서 술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금고를 열어보았더니, 주인 돈을 다 써버리고 텅텅 비어있어요.

“아니, 주인님, 왜 벌써 오셨어요? 멀리 가셨다면서요? 몇 년 동안 계셨다가 오시는 것 아니었어요?” 라고 말할 시간도 없습니다. 당장 엄히 때리고 감옥에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왜 종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을까요? 자기가 잘못했잖아요? 그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잘해줬잖아. 말 잘 들었잖아. 아니, 그걸 기억 좀 해주지. 옛날 생각은 안 하고 지금 좀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렇게 해? 라면서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분하다고 억울하다고 소리쳐봤자 소용없습니다.

그가 과거에 순종했던 것만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과거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종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그 순간 죄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이 번복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계신데, 이분이 바로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의 요한계시록 강해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총 40회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그날은 요한계시록 2장을 다루는 시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이 나옵니다만, 그 날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관심 있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왜냐 하면,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 목사님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분이었는데, 이 주장을 완전히 부정하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이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거든요.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しかし、あなたには非難す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それで、あなたは、どこから落 ちたかを思い出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ないをしなさい。もしそうでなく、悔い改めることをしないならば、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置かれた所から取りはずしてしまおう。

이는 일곱 교회 중 첫번째로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인내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을 안다고 칭찬을 하시면서, 그 다음에 책망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첫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거두고 축복을 거두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한 번 구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주장할래야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또 워낙 꼼꼼하게 해설을 하시는 분이니까,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하고 귀를 기울여서 듣고 있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분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 문제의 요한계시록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それで、あなたは、どこから落 ちたかを思い出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ないをしなさい。もしそうでなく、悔い改めることをしないならば、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置かれた所から取りはずしてしまおう。

라는 부분을 건너뛰어버렸습니다.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제가 이 분 말씀을 들으면서도 참 은혜도 많이 받고 그랬습니다만, 이런 걸 보면 정말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주장과 안 맞았기 때문에 일부러 건너뛴 것일까요? 그것은 그분 본인만 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성경은 왜곡해서 자신의 구미에 맞게 끼워 맞췄다고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일까요. 여러가지 이유는 있겠습니다만, 저는 아마도 안 보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분명히 성경에 적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자기가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서 혼자서 잘못 이해하고 끝난다 하더라도 안타까운 노릇인데,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イエスはまた一つのたとえを話された。「いったい、盲人に盲人の手引きができるでしょうか。ふたりとも穴に落ち込まないでしょうか。

그러나 이제 이런 분들을 보아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앞서 살펴본 대로, 평신도도 아닌 답변한 목회자 중의 절반 이상인 52.5%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라고 생각한다잖아요?

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릴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찌 되었건 한 번 구원을 받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든 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참 속 편할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뜨는 광고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으면서 살 뺄 수 있다>, <운동을 안 해도 이것을 입기만 하면 근육질이 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해도 영어가 는다>……. 이런 광고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래요. 뭐 사실인지 아닌지 제가 알 바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서, 이것만 보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내 말만 들으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만 믿었다가 다른 것은 안 하고 그냥 죽어라고 그 책 한 권만 봤다거나, 아니면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오로지 그 선생님 말만 듣고 그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칩시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합격을 하면 다행입니다만, 만약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 시험이야 다음 기회도 있겠습니다만, 한 번만 구원 받으면 이제 구원에 대한 걱정은 필요 없다면서 속 편하게 살다가, 마지막 심판대에 섰을 때, 그 때가 되어서, 구원을 못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을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
v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 にはい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なう者がはいるのです。その日には、大ぜい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
v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な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 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과거형>,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랬었다, 옛날에는 믿음이 좋았었다……이처럼 지나간 추억의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의인이고 주님의 뜻에 순종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로 지금!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옛날에 민법을 공부하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이 아무리 권리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제대로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느 땅을 가지고 있어요. 그 땅은 분명히 내 소유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멋대로 내 땅에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아니, 여보쇼.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어서 나가요. 여긴 내 땅입니다. 당장 나가세요……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어차피 거긴 내 땅인데 뭘, 상관 없어……라고 그냥 내버려뒀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 상태로 10년이 지나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땅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서 “아니, 거긴 분명히 내 땅이에요”라고 구청이나 시청에 가서 아무리 주장해봤자 소용 없어요. 거기가 당신 땅이라면 당신 권리를 행사했어야죠. 행사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그 권리를 빼앗긴 겁니다……라고 담당직원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승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승리에 대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世に勝つ者とはだれでしょう。イエスを神の御子と信じる者ではありませんか。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이제 구원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죄악이 들어오면 그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죠. 그렇지 않고,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니까 괜찮아……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 구원을 빼앗기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믿음은 추억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 위에 편안하게 잠자기만 해도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들지 않는 믿음, 퇴색하지 않는 믿음을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간직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우리의 믿음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찬양 속에 주님 품에 안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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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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