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
2017년 4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34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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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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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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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イエス様が受けた苦しみの意味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가 2017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인 주후 30년경 이스라엘 어느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으시더니, 이제부터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텐데, 거기서 과거에 선지자를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나한테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이방인들한테 넘겨져서, 그들이 나에게 침을 뱉고 모욕할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채찍질을 하고 나를 죽일 것이지만, 삼 일만에 나는 살아날 것이다…. 이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같은 누가복음 9장 22절에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そして言われた。「人の子は、必ず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そして三日目によみがえらねばならないのです。」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이제 머지않아 일어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것이 언제라고요? 예,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일입니다. 참 오래 전 사건이지요.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인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증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 무엇 때문이셨습니까.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요? 예, 주님께서는 많은 병든 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또 무엇이 있었죠? 예,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주님께서는 3년 정도에 걸쳐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에 살아있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들은 성경에서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선지자들은 질병을 고치기도 했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열왕기하 5장에서는 엘리사가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치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더라도 그 정도는 선지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오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의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들이 친히 오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끌려가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서 거기서 못 박히시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 참으로 처참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를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채찍에 맞고 능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거룩하게 아픔도 느끼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욱 처참한 모습으로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 올라가서 거기서 못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이 죽어야 해요? 그래야지 우리의 죄가 해결돼요? 그렇다면 그냥 쉽게 돌아가시면 되지, 왜 그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과 고난을 겪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얼마 전에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그우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은 たかまつなな라고 하는데, 이 분의 증조부는 동경대 명예교수이자 도쿄가스 사장을 지냈다고 하고, 자신은 전통 있는 사립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케이오대 종합정책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개그우먼 활동을 하면서 케이오대학 대학원과 동경대 대학원을 동시에 이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인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집안도 서민들의 생활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은 주위 친구 집에 비하면 절대로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방은 10개 정도밖에 없었다고 해요. 가족이 각각 쓰는 방과 피아노를 치는 방, 책을 읽는 방,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곳, 휴게실 같은 공간, 그리고 별로 많이 쓰지 않았지만 차를 마시는 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편의점은 치안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가본 적이 없고, 택시는 유괴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로 모셔가고 모셔오고 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우리와 같은 서민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살 때, 거스름 돈이 나오는 그 구멍에 동전이 남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우리의 이 서민적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겠지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모르지만, 우리 다 크고 어른이 된 다음에, 남들 보는 앞에서 여러 사람들한테 둘러 쌓여 뺨을 맞고 모욕적인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본 적이 있어요? 누가 나를 살갗이 떨어져 나가도록 갈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서, 거기서 못 박힌 적이 있어요? 지금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비참한 형벌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끔찍하고도 처참한 징벌을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그린 앞서 말씀 드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비롯해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고 참 예수님도 불쌍하시지. 아이구 저런 쯧쯧쯧……예수님을 저렇게 마구 때리고 죽이다니, 로마 군인들은 정말 참 나쁜놈들이야……아니아니……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나쁜 놈이지……아니, 그것도 아니야. 바로 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나쁜 놈들이야……어떻게 죄 없는 예수님을 저렇게 죽일 수가 있을까……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는 크나큰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로마 군인들 때문입니까? 가룟 유다 때문입니까? 아니면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때문입니까?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베드로전서 2장 22절~25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V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キリストは罪を犯したことがなく、その口に何の偽りも見いだされませんでした。ののしられても、ののしり返さず、苦しめられても、おどすことをせず、正しくさばかれる方にお任せになりました。そして自分か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です。キリストの
V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のです。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초를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바로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아픔보다도 그 수 백배의 아픔, 그 수 천 배의 아픔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원통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원통함보다도 그 수 백배의 원통함, 그 수 천 배의 원통함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원통함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억울함보다도 그 수 백배의 억울함, 그 수 천 배의 억울함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억울함을 아십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のです。

우리의 무거운 죄악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원통함, 우리의 억울함을 모두 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만 믿으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가요?
더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요? 이건 제 개인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모두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셨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가 없는 존재 아니냐? 그런데 무슨 또 회개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면 허구입니까?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실제로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허구입니다. 아니, 허구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왜곡하는 심각한 영적인 범죄 다름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나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번 병을 고쳐주셨으니 이제 병에 걸리지 않나요?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저한테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아니, 예수님이 질병을 고쳐주셨는데, 다시 병에 걸린다는 것은,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치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소리냐?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죽을 병에 걸려서 여명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병이 낫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치료를 해주셨어요.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 분의 질병이 낫고 퇴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람은 영원히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거나 하면 또다시 질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해요?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ほんとう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のならばです。まさしく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만약에 그 질병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에 의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질병에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으니,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도 죄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아니, 그렇다고 꼭 한국에 있는 교회만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입 달린 분들은 모두 하시는 말씀이 한국교회, 또는 한인 교회가 위기라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도 지금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우리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끊어야 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마다 끊어야 할 오래된 습관인 구습, 나쁜 습관인 악습이 있습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돈에 대한 유혹이요, 둘째로는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것이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유혹들이 교회 내에서까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인교회들의 실정을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큰 건물을 짓고,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목회자 자녀들은 해외유학을 시킵니다. 비싼 학비에 생활비에 고급차에……오해하지 마십시오. 한국교회 모두가 100%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이 드물지 않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다 무엇입니까? 다 어디에서 나온 돈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모두 성도들의 헌금입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하는 일이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다 좋은 일일거야…… 이렇게 넘어갔을지는 모르지만, 요즘 성도들이 보통 현명하십니까? 대부분이 다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볼 때 자신들이 낸 헌금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헌금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한다지만서도, 내가 낸 헌금이 그런 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흔쾌히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을 하고 싶어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성도가 줄어들고,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권력 또는 권위에 대한 유혹입니다. 한국이나 아니면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 같은 경우에는 <목사>라고 하면 무슨 예수님 모시듯이 합니다. 그렇게 주위에서 그저 무조건 목사님 목사님 하고 섬기다 보니 어떻게 되냐 하면 목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잠시 다닌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서 만나뵌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좀 의아스럽습니다.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성도들이랑 같이 목욕탕에 가거나, 같은 화장실을 쓰면 안 된데요. 왜냐 하면 그것만으로 성도들이 자기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니, 이건 누구한테 건네 들은 게 아니라 실제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말 그래요?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무슨 연예인 아이돌 가수들은 화장실에도 안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던데, 목사들도 그런 거예요? 화장실도 안 가고 그런 거룩한 존재예요? 목사가 거룩합니까? 거룩하긴 뭐가 거룩해요? 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 대형교회 당회장이나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한 새신자나 모두 예수님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말씀을 드리면요, 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이라고 말하면, 교회에서는 주로 술이나 담배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해요. 이런 말씀 혹시 많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누가 하느냐 하면, 교회 목사님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합니다. 하물며 아직도 술이나 담배를 못 끊었다면 구원 받지 못한 거라는 분도 계실 정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교회나 한인교회에 보면 맨날 일어나는 일이 교회 내에서의 갈등, 그리고 교회가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그럽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보면 성도들끼리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도 모두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분들이겠지요. 다 목사님들 장로님들이니까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그렇게 서로 거룩한 척하지 말고, 목사님 장로님 할 것 없이 서로 거하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면 오히려 금방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사가 의인입니까? 장로님 권사님이 의인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모두가 의인이나 성인군자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의인척을 하니까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달플 때는 기도하라고 하지요. 하지만, 저도 정말로 힘들고 고달플 때는요 기도도 안 나오더라구요. 아, 정말 다 때려부숴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집어치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때려부숴버리거나 집어치워버리거나 하면 되겠습니까?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면 안되죠. 자기가 속상하면 자기가 해결해야지 왜 교회나 회사에서 깽판을 부리고 난리를 칩니까. 차라리 그럴 때는 괜히 의인척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차라리 술이나 한 잔 하고 푸세요.

도저히 안 될 때에는 저기 가서 예전에 끊었던 담배라도 한 대 피우세요. 괜찮아요. 그리고 어떻게 해요? 그리고 잠시나마 예수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속이 뒤집어지는데 예수님은 그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그리고 뭐예요? 그래. 예수님도 그 때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속이 뒤집어지셨을 테니,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 것도 아시겠지…….
아무리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그래, 니가 이뻐서 참는 게 아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참는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복음, 참된 은혜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이고 이제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능욕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로 그 험난한 길을 여기 쓰러지고 저기 쓰러지시면서 가셔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주간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예,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 죄 많고 못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그 대가로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 감사를 어떻게 우리가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한 주를 주님이 받으신 고난과,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보혈을 묵상하시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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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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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2절~14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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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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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응답을 받는 지름길”答えを得る近道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다 철야기도다 금식기도다 하면서 여러 형식으로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맞습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말씀이지요.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され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제 하나님과 나는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와 딸의 관계처럼 매우 가까운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공로예요? 우리가 잘 나서요? 우리의 행실이 선해서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지요? 우리가 의지할 것은 우리의 선함도 아니요, 우리의 공로도 아닙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キリスト・イエスを、その血による、また信仰による、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公にお示しになりました。それは、ご自身の義を現わすためです。というのは、今までに犯されて 来た罪を神の忍耐をもって見のがして来られたからです。

요한1서 2장 2절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この方こそ、私たちの罪のための、―私たちの罪だけでなく全世界のための、―なだめの供え物なのです。


오직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자녀가 되었는데, 아무런 대화도 없이, 아무런 교제도 없어진다면, 이는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아니, 그렇잖습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은, 이는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비결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だれであれ、求める者は受け、捜す者は見つけ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だからあなたがたに言うのです。祈って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受け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맞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우표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편지를 썼다 하더라도, 우표를 붙이지 않으면 그 편지는 배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자, 좋아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모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실 것이고, 찾으면 찾아낼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아멘.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아멘으로 받아야죠.

하지만 그런데 이 아멘을 하면서도 왜 우리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할까요? 그런 것 없으세요? 좀 불편한 마음. 믿습니다~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글쎄요…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는 마음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기도를 해봤는데 응답이 안 되는 것이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았다.” 라고 하는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분명 이것도 기도해봤는데 안 됐어, 저것도 기도해봤는데 안 들어주셨어……이렇게 하나하나 열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성경 말씀을 믿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했습니다. 그가 읽었던 구절은 이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った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るのです。どんなことでも、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겨자씨에 대해서 제가 검색해보니까 겨자씨 크기는 정말 1~2미리 정도 되는 크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이 말씀을 보고, 그래, 내가 믿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겨자씨 정도 믿음은 되지 않겠나, 어디 한 번 기도의 능력을 시험해보자.

그러고는 이제 그날부터 자기 집 뒤에 있는 산을 보고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리고 그 결과가 궁금하시다면, 언제 한 번 시간 갈 때에 우리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했더니 기도를 드리는 순간 산들이 막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서 저쪽으로 옮겨졌을까요?
안타깝게도 산은 전혀 꿈쩍도 안 하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이 청년은 그래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산은 꿈쩍도 안 합니다. 그래도 있어요. 그렇다면 성경이 잘 못 된 건가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자꾸 이렇게 외치니까 이런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걸 옮겨서 뭘 어쩌려구?”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 저 산을 내가 옮겨봤자 그걸 어쩌려구?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부모가 아무리 그 자녀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부모에게 아무리 그 자녀가 원하는 것을 사줄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사달라, 저것을 사달라 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나요? 모든 것을 사주나요?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올바로 자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자기만을 알게 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 시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나이는 몇 살 정도가 될까요? 10살? 5살?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어떤 도형이 놓여져 있고, 나한테서 저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 또는 저 사람한테서 내가 안 보일 수 있는 위치를 분간하는 능력은 이미 3살에서 4살 정도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3~4살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한다면, 내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조금씩 생겨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3~4살은커녕 어른이 된지도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생각만 고집하고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똑 같은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들었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만, 이 목사님은 미국에서 기도원을 운영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원을 운영하기 위하여 부지를 찾게 되었는데, 어떻게 기회가 닿게 되어서 정말 넓은 땅을 매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만이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융자도 얻기도 했지요. 미국을 본다고 한다면, 땅은 참 넓습니다. 동부 쪽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서부 쪽을 보면 남아도는 땅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있던 캘리포니아나 네바다 쪽만 보더라도 조금 도시를 벗어나면 광활한 벌판들이 남아돕니다.
이 목사님도 도시가 아닌 외곽 쪽에 땅을 매입하게 되었는데, 땅은 벌판만이 아니라 산까지도 같이 붙어 있는 부지였다고 해요. 그러니 얼마나 넓습니까. 그런데 이게 도무지 운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은행 이자는 늘어만 가지요. 참으로 어려움에 처했었다고 해요.
참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가서 바라보면 저기 산이 보인데요. 그래서, 아…정말 저 산이라도 팔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지금 거긴 도시도 아니고 남아도는 평지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데, 누가 산을 사겠습니까. 그래서 이 목사님이 어느 날 밤에 기도를 했답니다. 뭐라고 기도를 하셨냐 하면 저 산이 어딘가로 좀 옮겨져서 평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성경말씀대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셨답니다. 아주 열심히 기도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밖에 나가서 산을 바라보았다고 해요. 그랬더니 그 산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여전히 거기 있었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예,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리로 옮겨지라!”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그 산은 꿈쩍도 안 하더랍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었더니, 하루는 어떤 양복을 입은 나이 든 미국 신사가 젊은 사람을 하나 데리고 찾아 왔더래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탄광산업을 하는 사람이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조사를 해봤는데,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저 산에서 대단히 희귀한 광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산을 자신한테 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시하는 가격이, 평지보다도 훨씬 더 비싼 값으로 사겠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어떻게 하셨겠어요. 아, 좋다. 그리고 계약을 하고 팔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지요? 그 돈으로 은행 빚을 다 갚고 기도원도 가꾸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몇 개월 후에 다시 그 탄광회사 사장이 젊은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사장님 모습이 예전보다도 몰골이 많이 초췌해 졌더래요. 그 모습을 보고는 이 목사님이 가슴이 철렁하더랍니다. 아이구, 계약을 취소하자면 어떡하나, 돈을 다시 내놓으라면 어떡하나 하고 무척이나 불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장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내가 분명히 철저하게 연구도 하고 조사도 해서 당신한테 그 산을 샀는데, 아무리 땅을 파봐도 이상하게 그 희귀한 광물이 더 이상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당신한테 이 산을 사고 난 다음부터 자신한테 너무나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해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말이 아니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여기까지 말을 들은 목사님 심정은 어떠셨겠어요. 이거 그 때 받은 돈은 이미 빚도 갚고 기도원 시설도 정비하고 하느라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어떡하나……하고 불안했었다고 하는데, 이 사장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제발 부탁이니 이 산을 다시 가져가달라. 돈을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져가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됐어요? 그 산이 저쪽으로 옮겨간 덕분에 자금도 생겼습니다만, 그뿐만이 아니라 기도원 부지 중 하나였던 그 산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산이 옮겨진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아무런 생각 없이 산더러 옮겨지라고 말만 하면 여기저기 옮겨진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얼마나 난리가 났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산더러 명하여 저리로 옮겨지라고 하면 산도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와서 한 보고를 들어보면, 그 땅은 모두 훌륭한 땅이라고 하는 데에는 모두 같은 내용이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모두가 우리는 그 땅을 취할 수 없다, 그 땅을 사는 이들은 너무나도 강한 민족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이렇게 부정적인 보고만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민수기 14장 1절을 보면, 이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민수기 14장 6절~8절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すると、その地を探って来た者のうち、ヌンの子ヨシュアとエフネの子カレブとは自分たちの着物を引き裂いて、イスラエル人の全会衆 に向かって次のように言った。「私たちが巡り歩いて探った地は、すばらしく良い地だった。もし、私たちが主の御心にかなえば、私たちをあの地に導き入れ、それを私たちに下さるだろう。あの地には、乳と蜜とが流れている。

그러나 이미 백성들은 부정적인 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좌절합니다.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좌절이나 실망이나 낙심 속에서는 절대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역사하십니까.

누가복음 5장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彼らの信仰を見て、イエスは「友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ました。」と言われた。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다고요? 예, 믿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망과 낙심과 좌절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좌절과 실망과 낙심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5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v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v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v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告げて仰せられた。「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つぶやいてい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人が、わたしにつぶやいているつぶやきを、もう聞いている。あなたは彼らに言え。これは主の御告げである。わたしは生きている。わたしは必ずあなたがたに、わたしの耳に告げたそのとおりをしよう。この荒野であなたがたは
v死体となって倒れる。わたしにつぶやいた者で、二十歳以上 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はみな倒れて死ぬ。ただエフ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あなたがた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も決してはいることはできない。さらわれてしまうと、あなたがたが言った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を、わたしは導き
v入れよう。彼らはあなたがた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しかし、あなたがたは死体となってこの荒野に倒れなければ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は、この荒野で 四十年 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あなたがたが死体となってこの荒野で倒れてしまうまで、あなたがたの背信の罪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あなたがたが、かの地を探った日数は四十日であった。その一日を一年と数えて、 四十年の間あなたがたは自分の
v咎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わたしへの反抗が何かを思い知ろう。主であるわたしが言う。一つになってわたしに逆らったこの悪い会衆のすべてに対して、わたしは必ず次のことを行なう。この荒野で彼らはひとり残らず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만들고 그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거역하는 회중들은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주셔서 살게 하리라고 한 땅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명기 1장 36절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ただエフネの子カレブだけがそれを見ることができる。彼が踏んだ地を、わたしは彼とその子孫に与えよう。彼は主に従い通したからだ。」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갈렙은 기억했습니다. 그는 그리고 45년 동안 평생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를 보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한테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4장 7절~9절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v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主のしもべモーセがこの地を偵察するために、私をカデシュ・バルネアから遣わしたとき、私は四十歳でした。そのとき、私は自分の心の中にあるとおりを彼に報告しました。私といっしょに上って行った私の身内の者たちは、民の心をくじいたのですが、私は私の神、
v主に従い通しました。そこでその日、モーセは誓って、『あなたの足が踏み行く地は、必ず永久に、あなたとあなたの子孫の相続地 となる。あなたが、私の神、主に従い通したからである。』と言いました。

갈렙이 이렇게 그 어느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결론이 오늘 말씀 중


여호수아 14장 13절~14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それでヨシュアは、エフネの子カレブを祝福し、彼にヘブロンを相続地として与えた。それで、ヘブロンは、ケナズ人エフネの子カレブの相続地 となった。今日もそうである。それは、彼がイスラエルの神、主に従い通したからである。

갈렙이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기도 응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 이것을 들어주세요. 저것을 들어주세요.

내가 기도를 드릴 때, 내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왜 너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봐.”

이 질문에 갈렙처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충성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산지를 차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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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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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70회 최고의 신앙고백
2017년 3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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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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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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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최고의 신앙고백”最高の信仰の告白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큰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더러 염려를 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が、心配したからといって、自分のいのちを少しでも延ばすことができますか。

마태복음 6장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するのはやめなさい。

이렇게 미래의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철학이다 지식이다 하면서 사람이 만들어낸 학문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운명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좋게 바꾸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단 서양의 철학자만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주팔자에 토정비결입니다. 매일 신문에는 ‘오늘의 운세’가 실려 있습니다. 새해에는 토정비결을 봅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으면 무슨 부적이다 굿이다 하면서 온갖 난리를 칩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서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운명론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또 바꿀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가 있어요? 비싼 돈을 바쳐서 부적을 사거나 굿판을 벌이면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쉽죠? 조금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 주장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그 사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그 사 람들로부터 경제적인 이익, 다시 말해서 돈을 빼앗으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사주팔자를 보고, 오늘의 운세를 보고, 점을 치고 부적을 사고 굿판을 벌입니까. 그것은 바로 <염려>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반대로 염려를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때에 거울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이 걱정하고 염려할 때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그 얼굴이 어떤가요? 방실방실 웃으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밝게 활짝 웃으면서 내일 일들을 걱정하고 그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해드려야 해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정확히 어디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분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그 분을 적절한 곳으로 모셔다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걱정하고 염려할 때에 얼굴은 어두워지고 미간……눈썹과 눈썹 사이에 주름이 깊게 파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싼 화장품을 쓰고 비싼 마사지를 받는다고 해도, 노상 얼굴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 차 있어서 주름을 짓고 있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얼굴을 누가 하고 있어요? 예, 만약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노상 아침이나 밤이나 얼굴에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맨날 얼굴에 밤이고 낮이고 우거지상을 짓고 있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뭐라고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 라는 말을 해주시기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도 내 마음이 아픈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 대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물을 컵에 따르더니, 그 물이 들어 있는 컴을 든 채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이 컵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요?”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대답합니다.
“200그램이요! 300그램이요!”
그러자 이 교수님이 대답합니다.
“저는 이 컵의 무게를 달아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몇 분 더 들고 있으면 무게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학생들이 뭐라고 해요?
“똑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10분 정도 이렇게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교수님 팔이 조금씩 아파올 겁니다.”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말합니다.
“그래요. 벌써부터 조금씩 아파옵니다. 자, 그렇다면 하루 종일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어떤 학생이 말합니다.
“이제 교수님 팔이 무감각해지고, 심각한 근육 경련과 마비가 올 거고…… 그렇게 되면 아마 교수님은 병원에 누워 계시겠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 모든 학생들이 웃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다시 질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 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내가 이 컵을 들고 있음으로 인해서 이 컵의 무게가 바뀌었나요?”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조금 당황합니다.
“아니요……”
학생들은 조용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교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나요?"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합니다.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학생들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컵을 내려 놓으세요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시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물컵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물컵을 들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내 스스로의 힘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 컵이 가벼워지겠지…… 그리고 열심히 힘들어합니다. 열심히 어려워합니다. 이 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봐도 물이 안 줄어요. 기를 쓰고 물을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참고 견디고 해봐도 물이 안 줄어요.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줄어드는 게 빠르겠습니까. 내 팔이 아파오는 게 빠르겠습니까. 아무리 힘이 강한 장사라고 하더라도 물컵을 이렇게 손을 뻗은 상태에서 들고 있으라고 해서 1시간 이상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 그렇다고 해보지는 마세요. 시간이 아깝고 힘도 아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하, 내가 이 물컵을 들고 있어봤자 소용 없구나. 이러고 있어봤자 물은 줄어들지 않고 내 팔만 아프구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컵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걱정 근심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요. 걱정도 하고 근심도 하고 고민도 해야겠지요. 예를 들어서 수학문제가 안 풀려요. 돈 계산이 안 맞아요. 그럼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계산을 해서 어디에서 틀렸는지 어기를 내가 모르는 지를 알아내야겠죠. 하지만 그건 생각이고, 연구이고 공부이지 염려나 걱정 근심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진정한 염려나 걱정 근심이란 무엇일까요?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라는 사람이 쓴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고,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맨날 밥 먹듯이 하는 걱정 근심 염려 중에서 96%는 우리가 아무리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걱정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는 이게 진짜 걱정 근심 염려인가요? 아니에요. 이건 걱정 근심 염려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 아침에 몇 시까지 교회에 가야 할까. 예배가 11시에 시작하니까 11시까지 가면 될까? 아니, 조금 더 일찍 가서 찬양이라도 함께 부르고 시작해야지. 아냐아냐, 조금 더 일찍 가서 조용히 기도도 하고 그래야겠다. 그러려면 몇 시쯤에 집을 나설까…… 어떠세요? 너무 쉬우신가요? 이런 것이 바로 4%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이, 홍목사. 어디 세상에 그런 것만 있나. 예를 들어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거나 한다면 걱정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럼 그것도 4%야?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솔직히 그렇죠. 내가 내 능력으로 한다 하더라도 내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알고 보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에요?
아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한 질문으로 잠시 돌아가보고자 합니다. 교수님이 컵을 오래 들고 있으면 팔이 아파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누가 봐도 당연한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교수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나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이 컵을 들고 있는 내 팔과 근육을 아프게 했습니까.
혹시 이 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컵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요? 알고 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컵이 아니라, 이 컵을 이렇게 들고 있으면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내 팔과 근육이 아파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컵을 버려야겠습니까. 아니면 내 생각을 버려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두 가지 이유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본다면,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둘째는 우리가 아무리 염려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컵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예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잊어버린다? 그건 어떻게 보면 책임회피죠.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을 해결해줄 수 없을 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니까, 염려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 됐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 라고 말을 해줍니다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직접 “걱정하지 말아. 염려하지 말아”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합니까. 이것보다 더욱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가 염려해봤자 우리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해결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 비밀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 하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だから、あすのための心配は無用です。あすのことはあすが心配します。労苦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

이 성경말씀이 과거의 개역한글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었는가 하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어디가 다릅니까. 몇 군데 차이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곳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쓰던 개역한글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것이 좀 신기해서 무슨 오타가 아닐까 했습니다만,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모두 <내일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과거 우리가 사용하던 개역한글성경에서 잘못 번역한 곳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처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국어로 본다면 이 문자만을 본다면 주어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어가 뭐가 되죠? 누가 저한테 말합니다.
“내일 할 일은 내일 걱정하면 되잖아.”
누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면, 누가 걱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 저더러 내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 내일 걱정해”라고 하면 그게 큰 위로가 되나요?
아……그래? 아휴……그럼 뭐, 내일도 똑같이 걱정하라는 거네……이런 뜻 아니겠어요?
그런데 개역개정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나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여기에는 주어가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그럼 주어가 저에요? 저더러 염려하래요? 아닙니다. 주어가 뭐냐 하면 <내일>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내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내일>이라는 것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내일? 내일이 누군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일>이 나에요? 아니에요, 나는 내일이 아니에요. 다른 어려운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지요? 그렇다면 내가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이것은 성경 말씀 원문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문은 그대로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이 올바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 한 번 차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1차원의 세계는 점과 선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좌표, 위치만 존재하고 넓이, 즉 면적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2차원은 어떨까요. 2차원은 1차원과는 달리 넓이가 있습니다. 좌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 얼마든지 넓은 면적은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원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높이입니다. 가로와 세로로는 아무리 넓어질 수는 있지만 높이는 1미리도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2차원은 높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차원은 어떨까요. 3차원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당연히 위치도 있고, 넓이도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점프도 할 수 있고, 입체적인 건물도 지을 수가 있지요. 2차원에 비하면 대단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2차원은 높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2차원 세계라는 곳은 높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자유로운 세계인 3차원을 가둬놓은 것은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3차원이라는 세계는 이 <시간>이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이 시간이라고 하는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부터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성경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모습을 봅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地は形がなく、何もなかった。やみが大いなる水の上にあり、神の霊は水の上を動いていた。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땅도 물도 빛도 어둠도 모두가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100만년 전인지 1000만년 전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1장 3절~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そのとき、神が「光よ。あれ。」と仰せられた。すると光ができた。神はその光をよしと見られた。そして神はこの光とやみとを区別された。神は、この光を昼と名づけ、このやみを夜と名づけられた。こうして夕があり、朝があった。第一日。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더니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이것이 바로 시간의 창조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질서로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강조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8장 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地の続くかぎり、種蒔きと刈り入れ、寒さと暑さ、夏と冬、昼と夜とは、やむことはない。」

세상이 홍수로 인하여 혼돈하게 되었으나, 내가 창조한 이 땅의 질서, 이 땅의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도 이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 속에 계신 분이신가요?

성경을 살펴봅니다.

이사야 44장 6절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イスラエルの王である主、これを贖(あがな)う方(かた)、万軍の主はこう仰せられる。「わたしは初めであり、わたしは終わりである。わたしのほかに神はない。

이사야 48장 12절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わたしに聞け。ヤコブよ。わたしが呼び出したイスラエルよ。わたしがそれだ。わたしは初めであり、また、終わりである。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きのうもきょうも、いつまでも、同じです。

유다서 1장 25절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すなわち、私たちの救い主である唯一の神に、栄光、尊厳、支配、権威が、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永遠の先にも、今も、また世々限りなく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세상에 어떤 독재자라 하더라도, 세상에 어떤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 하더라도, 내가 처음이요 내가 마지막이다, 내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주 하나님의 존재가 시간이라고 하는 질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시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 우리의 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시며,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이 뭐예요. 1분 1초 뒤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구는 아세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가 슬퍼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근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염려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슬퍼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한다는 것은 이것은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고 하는 최고의 신앙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성경 구절 중 하나였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이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 귀한 말씀이 가장 짧은 구절인지도 모릅니다만, 이걸 우리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가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서, 우리가 근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른다면서, 우리가 염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신경도 좋고, 찬양도 기도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고백,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 우리의 삶을 통해서 가장 큰 믿음의 고백,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야말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항상 기뻐하다 보면 근심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걱정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기뻐하기도 바쁜데 언제 염려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근심, 걱정, 염려를 모두 내려 놓고, 우리 주님 안에서 최고의 신앙고백인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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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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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9회 방주 속의 삶
2017년 3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7절~20절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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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방주 속의 삶”箱舟の中での生活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분들 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죄 많은 인간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수많은 동물들을 모두 그 방주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다른 인간들과 짐승들은 모두 죽고, 방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동물들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 이야기를 오늘은 함께 묵상해보면서, 이 이야기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노아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가 방주를 지었을 때의 기간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120년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를 창세기 6장 3절을 지적합니다. 이를 위해 6장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는 천사들과 사람이 결혼을 했다, 또 누구는 셋 자손이 가인의 자손과 결혼을 했다는 등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만, 여하튼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 사람들은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날들을 백이십년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 시점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9절~1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v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これはノアの歴史 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あって、その時代にあっても、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ノアは三人の息子、セム、ハム、ヤペテを生んだ。地は、神の前に堕落し、地は、 暴虐で満ちていた。神が地をご覧 になると、実に、それは、堕落してい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が、地上でその道を乱していたからである。そこで、神はノアに仰せられ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終わりが、わたしの前に 来ている。地は、彼らのゆえに、暴虐で満ちているからだ。それで今わたしは、彼らを地とともに滅 ぼそうとしている。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ゴフェルの木の箱舟を造りなさい。箱舟に部屋を作り、内と外とを木のやにで塗りなさい。

이 구절을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때에는 이미 셈과 함과 야벳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명령을 하실 때에 1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と契約を結ぼう。あなたは、あなたの息子たち、あなたの妻、それにあなたの息子たちの妻といっしょに箱舟にはいりなさ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건축할 것을 명령하실 그 시점에는 세 아들뿐만이 아니라 며느리들. 그러니까 세 아들은 이미 부인까지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가 언제였을까요?
창세기 5장 3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ノアが五百歳になったとき、ノアはセム、ハム、ヤペテを生んだ。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는 이미 세 아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던 해에 노아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요?


창세기 7장 6절에는 다음과 같기 기록합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大洪水が起こり、大水が地の上にあったとき、ノアは六百歳であった。

이 말씀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노아가 500세 때에는 이미 셈과 함과 야벳의 세 아들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건축을 명령하셨을 때에는 그 아들들한테 며느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일어난 게 노아가 600세 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길게 잡는다 하더라도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은 100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성경을 살펴보지 않고 그저 방주 건축 기간이 120년이라고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120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인간의 수명을 가리키시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즉,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무척이나 길어서, 창세기 5장을 보면 800세 900세를 살았던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창세기 9장 29절에 보면 노아도 950세까지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평균수명은 점점 줄어들어갑니다. 그런데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가끔 놀랍니다. 인간수명에 대해서 뭐라고 나오냐 하면 인간수명이 몇 살까지 늘지도 모른다? 예, 바로 120세까지 늘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즉,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 6장 3절에서 그들의 날을 120년으로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그 당시보다 몇 분의 일로 줄이겠다는 말씀인 것이지, 그것이 곧 방주를 건축하는 기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이,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고 믿으면 그게 중요한 것이지, 그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냐 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혹시 그런 생각 드시지 않으시나요?

예, 만약에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도 못 믿어진다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하나님의 독생자가 예수님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예수님이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성령님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임마누엘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つまずくなら、その人はすべてを犯した者となったのです。

라고 기록합니다만, 성경 말씀에서도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안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성경 말씀 중 하나를 믿으면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이요, 하나를 안 믿는다는 것은 모두 안 믿는다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말씀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을 것을 마치 성경처럼 믿으라고 한다면, 이건 곤란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몇 명이다? 예, 많은 분들이 3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동방박사들이 와서 3가지 예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가 3명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옛 찬송가 116장은 <동방박사 세 사람>입니다.
<1 동방박사세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그리고 123장, 우리 잘 아는 찬송이죠? 저 늘 밖에 한 밤중에…그 가사 4절이 어떻게 되어 있었냐 하면,
< 4 동방박사 세 사람이 새 아기 보고 절하고 그 보배합 다 열어서 세가지 예물 드렸네>

이렇게 되어 있으니, 성경은 안 읽는 많은 사람들이, 아아,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라고 하면 좀 거짓말이겠지요. ㅎㅎ 이번에 개정된 새찬송가에서는 그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는 찬송은 빠졌습니다.
그리고 <저들 밖에 한 밤중에>의 4절도 바뀌었습니다.

< 저 동방의 박사들이 새 아기 보고 절하고 그 보배합 다 열어서 세가지 예물 드렸네>
라고 되었더군요.

그런데 아직도 바뀌어야 할 찬양 가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찬송가를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이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도, 그 여인은 일곱 귀신이 씌었던 사람, 예수님께 귀한 향유옥합을 깨뜨린 사람, 또는 매춘부……. 이렇게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꽤 많습니다. 여기 중에서 하나는 진실이고 나무지 두 가지는 거짓……적어도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이른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명은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また、悪霊や病気を直していただいた女たち、すなわち、七つの悪霊を追い出していただいたマグダラの女と呼ばれるマリ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씌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병 고침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을 정성껏 모시고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향유를 드린 여인은 어떨까요. 그 사건에 대해서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있고, 이게 조금씩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씀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찬송가 211장, 옛 찬송가 346장을 보십시오.

그것이 뭐냐 하면 찬송가 211장, 옛 찬송가 346장입니다.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아까 말씀드렸던 동방박사 이야기처럼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찬송가에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막달라 마리아가 매춘부였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역시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간혹 <사람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 말씀을 설교 말씀에서도 들어보았고, 또한 교회에서 붙여놓은 포스터에서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신도 시절에는, 음, 뭐,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나보다…하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본 포스터에 보니까, 역시 이 문구와 함께 그 근거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이 좀 가물가물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 16장 26절이 아니면 마가복음 8장 36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똑 같은 내용이에요. 그래서 그래, 잘 됐다. 한 번 찾아봐야겠다. 하고 그 구절을 찾아보니 그 구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い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まことのいのちを損じたら、何の得がありましょう。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は、人はいったい何を差し出せばよいでしょう。

그 다음에 마가복음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人は、たとい全世界を得ても、いのちを損じたら、何の得がありましょう。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정말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처럼 들리나요? 이건 분명히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한 영혼이 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귀하지요.
얼마나 어느 정도로 귀합니까? 왜 귀합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잘 나서, 내 영혼이 값어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보잘 것 없는 내 영혼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 피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을 마음대로 다루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생명이나 우리의 영혼을 함부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귀한 보혈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을 보면 참 기도 안 찹니다.

“내가 돈을 받았으면 내 목을 걸겠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나오면 자살을 검토하겠다”
“뭐가 어떻게 되면 내 목숨을 내놓겠다”

이런 말을 한 사람 중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개신교이고 또 한 사람은 천주교입니다.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함부로 생각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해야 할 생명, 예수님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영혼을 함부로 생각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으로 비추어 본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적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온 천하와 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비교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아직까지도 “그거나 그거나.” 아니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그냥 성경 말씀이니까 좋은 뜻으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아닙니다. 바로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읽지 않고 어디서 누가 써놓은 해석서나 주석서만을 보고 성경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해놓으면,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까지 받은 분들까지도 그게 정말인 줄 알고, 그게 무슨 새로운 진리나 되는 줄 알고 곧이곧대로 믿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그 사람의 믿음도 망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도 망가지고 그 사람의 직장도 망가지고 그 사람의 생활도 망가지고 그 사람의 가정도 망가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이 우리는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마귀 사탄들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말씀 드린 부분은 분명 노아의 방주에 대한 내용 중에서 서론이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무척이나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좀 줄일까 했습니다만, 이거 언젠가는 말씀을 드려야 할 내용이었고, 그리고 이왕 말씀을 드리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굳이 이렇게 오늘 말씀을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점 양해하시고 계속해서 말씀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ㅎㅎ

이야기를 그럼 다시 노아의 방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사실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걸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한다면 머리속에 혼란은 점점 더 늘어만 갑니다.

왜냐 하면, 자,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먼저,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창세기 7장 13절에 그 승객 명단이 나와있습니다.

창세기 7장 13절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ちょうどその同じ日に、ノアは、ノアの息子たちセム、ハム、ヤペテ、またノアの妻と息子たちの三人の妻といっしょに箱舟にはいった。

그러니까 노아와 세 아들,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 1 + 3 + 1 + 3이니까? 몇이에요? 예, 여덟입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죠? 승객명단은 7장에서 13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4절과 15절로도 그 승객명단은 이어집니다.

창세기 7장 14절~15절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彼らといっしょにあらゆる種類の獣、あらゆる種類の家畜、あらゆる種類の地をはうもの、あらゆる種類の鳥、翼 のあるすべてのものがみな、はいった。こうして、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が、二匹ずつ箱舟の中のノアのところにはいった。

그러니까 모든 들짐승, 모든 가축, 모든 땅에 기는 것, 나는 것들이 그 종류대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서의 생활이 얼마였냐 하면 대략 1년보다도 조금 더 길어서 371일 정도라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여덟 명이 방주에서 1년 이상 동안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겠어요? 아마도 무척이나 바빴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짐승이 어디 한 두 마리에요?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 짐승들은 적게 잡아 한 16000마리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16,000마리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시죠?
한국에서 가장 큰 동물원이라고 하는 서울대공원에 있는 동물들이 몇 마리 정도일 것 같으세요?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2372마리에다가 이를 관리하고 있는 직원 수는 대략 21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6,000마리나 되는 동물을 고작 8명이 관리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간에 맞춰서 먹이도 먹어야 했겠지요. 여기서 움매움매 소리도 나고 저기도 왈왈 소리도 나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었겠어요? 1년 넘게 있었다고 하니, 또 어떤 동물은 새끼를 낳았을 수도 있고, 그러면 그걸 또 보살펴줘야겠죠? 그리고 16,000마리나 되는 동물이 배설물은 또 어땠겠습니까. 집에서 동물 한 마리 길러도 그 배설물들 때문에 골치를 앓기도 하는데, 한 두 마리가 아니라, 몇 마리요? 16,000마리입니다. 그러니 냄새는 또 오죽했겠습니까.
여기서 일이 터지면 얘 누구야~ 어머니~ 여보~ 당신~ 뭐 난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게 하루요? 이틀이요? 아니요. 1년 이상 그랬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뭐야. 하나님이 명령해서 우리더러 방주를 만들라고 했고, 그 명령에 순종해서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다면 좀 거룩하고 깨끗하고 향기롭고 평탄하고 좀 그런 우아한 미래가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우아하기는커녕 이게 무슨 짐승 냄새에다가 배설물 냄새에……맨 처음에는 밥도 제대로 안 넘어갔을 거예요. 그러면 짜증도 내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심술도 부리고, 이거 뭐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난리도 치고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지요?

저는 참 이 구절에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창세기 7장 18절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水はみなぎり、地の上に大いに増し、箱舟は水面を漂った。

그렇습니다. 안에서 티걱티걱 싸우든 알콩달콩 살아가든 믿음의 방주는 물 위에 떠 다녔으며,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그 믿음의 방주는 마침내 아라랏산 꼭대기에 머무르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8장 1절 전반부를 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神は、ノアと、箱舟の中に彼といっしょにいたすべての獣や、すべての家畜とを心に留めておられた。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신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다고요? 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면서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확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떠다니는 노아의 방주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너무나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인도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방주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의 전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6절에서의 다윗의 고백처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우리가 하나님을 잊을 때에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해도,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끝까지 믿음의 방주 안에, 여호와의 집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마침내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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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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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8회 그가 돌아간 이유
2017년 3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22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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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가 돌아간 이유”彼が立ち去った理由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성경구절은 마가복음입니다만, 성경에는 마가복음 이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언급이 되어 있을 정도이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이들에게 있어서 이번 일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오늘 살펴본 마가복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2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イエスが道に出て行かれると、ひとりの人が走り寄って、御前にひざまずいて、尋ねた。「尊い先生。永遠のいのちを自分のものとして受けるためには、私は何を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なぜ、わたしを『尊い』と言うのですか。尊い方は、神おひとりのほかには、だれもありません。戒めはあなたもよく知っているはずです。『殺してはならない。姦淫(かんいん)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偽証(ぎしょう)を 立(た)ててはならない。欺(あざむ)き取(と)ってはならない。父と母を敬え。』」
すると、その人はイエスに言った。「先生。私はそのようなことをみな、小さい時から守っております。」イエスは彼を見つめ、その人を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は、欠けた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の持ち物をみな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積む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ついて 来なさい。」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なぜなら、この人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이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럼 이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 맞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그래. 참 잘했다. 그런데 너한테 하나 부족한 게 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들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 그래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당장 팔아서 나눠주고 올 테니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그랬나요?
아니요. 오히려 이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말씀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이 말씀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여기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의 특징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의 경제적 여건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은 대단히 재물이 많았습니다. 공관복음…그러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한결같이 그를 재물이 많은 큰 부자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한 특징은 그것만이 아니죠.
둘째로, 이 사람의 사회적 위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 마가복음에는 그저 “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마태복음 19장 20절에 의하면 그를 “청년”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18절에는 이 사람을 “어떤 관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관리직에 오른 사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고시 패스를 한 사무관?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열심히 해서 지식도 상당히 있고, 앞길이 창창한 젊은 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람의 자라온 가정환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착한 아이라 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갓난 아기가 자기 혼자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란 환경은 경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적인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이 사람의 인품을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냥 예수님께 와서 말을 했다고 기록하는데, 오늘 살펴본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시는데 이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과연 청년 엘리트답죠?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구하는 자세가 대단히 겸손합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드릴 때 그냥 꼿꼿이 서서 말하는 게 아니라 꿇어 앉았다고 하니 그의 인품이 얼마나 겸손하고 성실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이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선한 의도가 아닌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요. 누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누구는 예수님을 덫에 걸리게 하려고, 예수님을 고발할 빌미를 잡으려고 일부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성경은 반드시 그 부분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한 이유가, 자신을 남들 앞에서 잘난 척 하기 위해서이거나 예수님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즉, 이 청년은 구원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구원에 대한, 영생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이를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사람의 모습을 한 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는 부유하고 경건한 가정, 모범적인 가정에서 자란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부와 명예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앞길도 창창했습니다. 그는 겸손함도 갖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게 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말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인물 아니겠습니까? 돈도 많고, 집안 좋고, 나이도 젊은 데다가 출세까지 보장되어 있어요. 이 청년이 독신이라면 그야말로 신랑감으로서는 아마도 1등급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곧바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죠?

마가복음 10장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その人を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は、欠けた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の持ち物をみな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積む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ついて 来なさい。」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이기에 이 성실한 엘리트 청년을 순식간에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근심하게 만들어서, 결국 이 겸손한 청년이 인사도 없이 예수님 곁을 떠나게 만들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냥 “부자가 돈이 아까워서 그랬다”라고 간단하게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뭐예요?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괜찮아. 나는 가진 게 별로 없어서 다행이야.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청년더러 믿음이 없다고 비웃고는, 그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로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죠? 돈이요? 물론 재물이 많았다고 하니 돈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소유하고 있었나요?

지금 그가 갖고 있는 부유함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돈 외에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겠습니까. 예, 먼저 그는 청년 관리였습니다. 앞날 보장된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위까지 오르기 위한 지식도 많았을 것입니다. 노력도 어마어마하게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한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까지 물려받은 재산, 네가 노력해서 얻은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보통 말씀처럼 들리나요?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낸 고시 합격증을 당장 찢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을 어렵게 졸업하고 대기업에 합격했는데, 그 입사를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이 청년관리한테는 아마도 그런 식으로 들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게 그리 쉬운 말이겠어요? 내가 그걸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거길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나더러 그걸 버리래.
그래요. 백 보 양보해서 그래야겠다…하고 결심을 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어! 그거 참 잘했다!” 그러겠어요?
내가 니 뒷바라지를 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 헛소리냐……니가 지금 제정신이냐……이걸 감당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이런 생각들이 한번에 머리 속을 강타하니까 아마도 이 청년은 정신이 없었겠지요. 그리고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집니다. 침통해집니다. 그리고 뭐예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

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청년한테 그런 힘든 요구를 하셨을까요. 그 청년이 미워서요? 아니에요.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살펴본 마가복음 10장 21절 앞부분에 보면 분명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その人を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 관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그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가난해지기를 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말대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면 하늘에서 보화를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이 있어요. 다 팔고, 그 다음에 어쩌래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미워했다면 나를 떠나라…라고 하시지 나를 따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말없이 떠나갔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네게 있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정말 지금 당장 나가서 집 팔고 땅 팔고, 고시 합격증도 찢어버리고, 일류 회사에도 들어가지 말고 그러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다 신학교 가서 목사 안수 받으라는 것인가요? 그게 지정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요?
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참 편리합니다. 누구한테 편리해요? 사이비 교주한테 편리합니다.

자,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 돈,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치세요.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거? 아~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교회가 다 알아서 나눠줄 거예요. 그러니까 집 팔고, 땅 팔아서 다~ 교회로 가져오세요. 그래야 복 받아요.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겁니다!

뭐 이래가면서 협박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이 말씀의 핵심을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세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왜 팔라고 말씀하세요? 누구를 위해서요? 예,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팔라는 것입니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그 돈을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입니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 문제로 어려워하고 있는 분도 많습니다. 법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한테 무조건 돈만 준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 때문에 어려워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약이 필요합니다. 법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면 법조인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의료비나 변호사비가 보통 비쌉니까. 그리고 막상 어디 있는 어떤 의사나 변호사들 찾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다가 결국 기회를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분들 중에는 의료봉사나 법적 봉사를 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 말씀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드시나요? 에이, 의사나 변호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게 뭐가 어려요….이런 생각 안 드세요?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까. 예과 2년, 본과 4년, 거기에 인턴, 레지던트 하면 적게 잡아 10년은 해야 전문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나요? 국공립 의대는 그래도 저렴한 편이겠습니다만, 사립 의대의 경우에는 최소한 몇 천 만원을 들여야 공부를 마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만 되면 먹고 살아요? 대학에 남아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경쟁에서 이겨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종합병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야 하고, 개업을 한다고 하면 돈도 보통 필요한 게 아닙니다.
법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사법시험이고 요즘은 변호사시험입니다만, 합격만 한다고 해서 출세길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판검사로 임용되어서 부장판사나 부장검사를 달고 난 다음 변호사로 나오면 가장 좋습니다. 그래야 경험도 있고 인맥도 있으니 대형 로펌에 들어가서 대우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낮은 곳으로 가서 의료봉사나 법률서비스를 하는 법조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돈 벌줄 몰라서, 돈 좋은 줄 몰라서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그 분들도 다 알지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포기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저기 제일 안쪽 어금니를 하나 뽑았습니다. 이 이빨을 뽑는다는 게 어렸을 때 유치를 뽑는 것 빼고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 이빨을 뽑으라는 말을 병원에서 들은 게 2013년이었으니까 단순계산으로 4년을 버틴 샘이지요. 이 이빨을 충치로 예전에 치료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이빨 문제가 아니라 잇몸에 생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 건들건들 거리긴 했습니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병원에서도 뽑으라고 했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버텼지요. 당시에는 뭐, 흔들리기는 해도 아프거나 하는 건 아니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흔들리는 것 때문에 옆에 틈새가 생기니까, 뭘 먹고 난 다음에 양치질을 해도 그 사이로 들어가고 하니까 가끔 잇몸이 붓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일본에 다시 와서 살게 된 게 2년 전인 2015년부터였는데, 그런 문제 때문에 여기서도 종종 치과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뭐 그 때마다 역시 이 이빨을 뽑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버텼지요.
그래서 저는 믿었습니다.

느헤미야 9장 21절,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四十年の間、あなたは彼らを荒野で養われたので、彼らは何も不足することなく、彼らの着物もすり切れず、足もはれませんでした。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해주셨다는데, 이 일본땅에서의 광야생활 동안 내 이빨도 지켜주시겠지……

그런 믿음으로 나름 버텼습니다만, 발이 부르트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양치질을 열심히 자주 해도 제 잇몸은 심심하면 부르트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판이 되니까, 손으로 만져봐도 알겠더라구요. 완전히 이빨 자체는 빠져서 흔들흔들 거리고 있습니다. 다만 옆에 잇몸에 붙어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오히려 더욱 아파요.
치과 의사는 자꾸 뽑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이빨을 뽑으면 비싸서 큰 돈이라도 남나 해서, 뽑는 비용이 얼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보험처리를 하면 1500엔 정도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빨을 뽑아서 큰 돈이 남는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좀 더 생각해봤죠. 제가 좀 의심이 많습니다. ㅎㅎ 그래서 저는 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하. 이거 이빨을 뽑게 하고 거기 인플란트를 넣게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거구나…생각하고는, 의사선생님한테

“이걸 뽑으면 인플란트 같은 것을 해야 하나요”

라고 물어보았더니, 제일 안쪽 어금니는 뽑고 난 다음에 보통 아무것도 안 한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윗쪽 어금니를 뽑으면 아랫쪽 이빨과 서로 맞닿지 않게 되니까 대단히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게 불편하지 않냐고 했더니만, 그 선생님 말씀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할지 모르지만 좀 지나면 괜찮을 거라는 거예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저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윗쪽 어금니를 하나 뽑는데 그게 어떻게 안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말하기를 전혀 안 불편하다고 하고, 그리고 그 이빨을 뽑는다고 해서 의사 선생님이 무슨 큰 돈을 버는 것 같지도 않고……해서 제가 마지막으로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이걸 뽑으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하시는 말이 이 이빨이 있어봤자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일본에 다시 와서 살면서 교회도 아직 어렵고 한데 이빨까지 뽑게 되니까, 이게 참 솔직히 하나님한테 좀 섭섭하고 씁쓸하고 서운하고 좀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도 이게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게, 이걸로 씹으면 아프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해도 오히려 다른 쪽 이빨이나 잇몸한테 안 좋으면 안 좋았지, 좋을 게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요? 오랫동안 망설임 끝에 결국 지난 2월 27일에 뽑아 버렸습니다. 뽑을 때는 정말 참 잇몸도 마음도 아프더라구요.

자, 그런데 뽑고 난 다음에 어땠을까요. 이제 지혈도 되고, 뽑은 통증도 사라지니까 어떻게 됐을까요.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이빨이 아픈 것이 당연하다시피 했는데, 이빨이 전혀 아프지 않은, 정말 평범한 일상이 돌아온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어색함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만, 조금 지나니까 이제 뭘 씹을 때에도 안쪽에 어금니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제 생각은 분명 불편하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전혀 안 불편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미련하게 참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드리려는 것이 그렇다고 조금 아프다고 이빨을 다 뽑아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빨 하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인데 잘 관리하면서 쓸 수 있을 때까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써야죠.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이미 사용할 수 없게 된, 그 수명이 다 한 이빨까지도 막상 뽑으려고 하면 아깝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포기하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불편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그 이빨도 이빨이만, 예전에 그 이빨 충치를 치료할 때 금으로 씌웠거든요. 그때도 제가 기억을 해요. 한국에서 그걸 씌우는데, 보험이 되는 걸로 하면 싸고, 보험이 안 되는 금으로 하면 비싼데 당연히 비싼 게 좋죠.

그래서 고민 끝에 보험이 안 되는 금으로……에이, 그래봤자 몇 만원이에요. 그런데 그 기껏 비싼 걸로 씌운 이빨인데…하면서 그것까지도 아깝게 느껴지더라니까요. 그래서 그런 것들까지도 뽑을 때 끝까지 망설이게 만들었습니다만, 하지만 결과는 어땠어요? 치과 선생님 말씀대로 뽑았더니 이처럼 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8절~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もし、あなたの手か足の一つ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切って捨てなさい。片手片足でいのちにはいるほうが、両手両足 そろっていて永遠の火に投げ入れられる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
また、もし、あなたの一方の目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えぐり出して捨てなさい。片目でいのちにはいるほうが、両目 そろっていて燃えるゲヘナに投げ入れられる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

예수님께서는 이빨 정도가 아니라 손이나 발, 눈까지도 믿음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빼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また、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더 나아가서 마지막 날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31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その日には、屋上にいる者は家に家財があっても、取り出しに降りてはいけません。同じように、畑にいる者も家に帰ってはいけません。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버려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착을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눈으로 안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달 어떤 신문에 보니까 이른바 기독교 원로 지식인이라고 하는, 어느 대학교 명예교수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회는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교회는 정체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50년 전이나 요즘이나 똑같습니다. 어느 대학교가 미국 한인 교회 목사들을 부흥회에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목사에게 질문했습니다. 무신론자인 사르트르, 카뮈의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들은 사르트르, 까뮈를 몰라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니, 이들은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여러 많은 지식들이 있는데, 목사들은 그런 철학자들의 지식이 없으니 문제다…라는 것 아니겠어요?

성경은 이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よって、世界は私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私も世界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

사도 바울도 수많은 학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으로 삼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을 방해하는 집착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하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그 청년관리에게 바라셨던 고백이요, 지금 이 시대에 바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여러분, 치과 선생님보다도 크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께 말씀하십니다. 집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그게 아깝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미 너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돼. 오히려 있어봤자 너한테는 방해가 될 따름이야. 그게 돈이든 지식이든 아니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그와 같은 집착이 믿음에 있어서 장애가 된다면 어서 버려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질문 앞에 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그를 보시고”가 아니라 ‘〇〇〇’를 보시고, 여기에 자기 이름을 한 번 넣고 한 번 소리 내어서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〇〇〇를(을)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その人を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は、欠けた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の持ち物をみな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積む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ついて 来なさい。」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なぜなら、この人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쁨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돌아가시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방해하는 집착을 버리시길 원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없으면 못살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집착을 버렸을 때 진정한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해질 줄 믿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집착을 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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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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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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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
2017년 3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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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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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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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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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備えれる神様を待つ信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あなたの子、あなたの愛しているひとり子イサクを連 れて、モリヤの地に行きなさい。そしてわたしがあなたに示す一つの山の上で、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イサクをわたしにささげなさ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번제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불로 태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그 손으로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창세기 22장에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말씀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1절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これらの出来事の後、神はアブラハムを試練に会わせられた。神は彼に、「アブラハムよ。」と呼びかけられると、彼は、「はい。ここにおります。」と答えた。

즉,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이유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당연히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을 모리아 땅에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번제로, 그러니까 그 아들을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들어도 끔찍한 사실입니다만, 끔찍한 건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삭이 어떻게 해서, 얼마나 기다려서 얻어진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이 살던 땅인 하란에서 나온 게 75세 때의 일입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말씀만 믿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나섭니다만, 큰 민족은커녕 그 나이 때까지 아들 하나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주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창세기 16장 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サライはアブラムに言った。「ご存じのように、主は私が子どもを産めないようにしておられます。どうぞ、私の女奴隷のところにおはいりください。たぶん彼女 によって、私は子どもの母になれるでしょう。」アブラムはサライ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た。

사래가 생각하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여종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도록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이로 말미암아 그 집안에 불화가 생깁니다.


창세기 16장 4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彼はハガルのところにはいった。そして彼女はみごもった。彼女は自分がみごもったのを知って、自分の女主人を見下げるようになった。

하갈의 신분은 분명히 여종이었습니다만, 이제 자신이 아이를 갖게 되니까, 그것도 주인의 자식을 갖게 되니까, 이제는 주인과 여종이 아닌, 똑 같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주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거만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제 주객전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집안이 콩가루가 됩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자신의 생각을 의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나중에는 이름을 사라로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십니다만, 이 사라가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랬다…라고 비판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렇게만 몰아세우면 사라가 불쌍합니다. 과연 사라한테 믿음이 없어서 그랬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글쎄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 사라를 만나서는, “사라 할머니, 아니, 그 때 좀 더 기다려보지, 왜 그러셨어요?”라고 묻는다면 사라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건 당연히 상상입니다만,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성경 안 읽어봤어요? 나도 할 만큼 했어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니까요.”

그렇다면 성경에 뭐라고 나와있길래 그럴까요?

창세기 16장 16절을 봅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ハガルがアブラムにイシュマエルを産んだとき、アブラムは八十六歳であった。

이렇게 보면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한테 주었을 때의 나이는 아브라함이 85세 때겠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선 게 75세 때였다고 하니,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적어도 10년은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라에게 기다리는 믿음이 없었다면 1~2년도 채 되지 않아서 벌써 하갈을 주던지 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했겠지요. 하지만 사라는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10년 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어쩌면 그 기다리는 동안 아브라함한테 잔소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안 주세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라고 했을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니 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니까.
하지만 5년을 기다려도 6년을 기다려도, 그리고 8년을 기다려도 9년을 기다려도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이제 10년째로 접어듭니다. “여보,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요. 10년이나 기다렸으면 이제 된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응답이 없으니 이제 하나님이고 뭐고 내 말대로 하세요.”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10년이나 기다렸는데…하면서,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렇게 해서 사라의 말을 듣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이렇게 본다면 사라도 믿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2년도 아닌 10년이나 기다렸습니다.
혹시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10년 동안 기도해보신 적 있으세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10년 동안 응답을 못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10년 동안 기다린다는 것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10년이 긴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아직>이었습니다. 더 기다려야 했었던 것이지요.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지요.

창세기 21장 5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サクが生まれたときは百歳であった。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 가정에는 아직도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얻어진 결과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스마엘 또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소중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한테는 어떻겠어요. 사라에게 있어서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괴롭힙니다.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そのとき、サラは、エジプトの女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子が、自分の子イサクをからかっているのを見た。

성경을 보면 ‘애굽’은 항상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애굽 여인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대로 하게 되면, 그 때는 그게 가장 좋은 생각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이렇게 불화가 끊이지 않고, 수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습니다. 즉, 이제 그 가정에서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삭 하나만 남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 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타이밍도 절묘합니다.

어쩌면 이스마엘이 있을 때 이러셨다면 아브라함이, “그래, 이삭을 바치더라도 이스마엘이 있으니까…….”

뭐, 설마 친자식인데 그럴 리도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100만분의 1이라도 그런 생각을 할까봐. 그나마 있던 이스마엘도 내쫓은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자그마치 25년 만에 얻어진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アブラハムは大声をあげて叫び、泣き明かした。

뭐, 이런 구절이 있어야 될 것도 같은데, 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창세기 22장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翌朝早く、アブラハムはろばに鞍をつけ、ふたりの若い者と息子イサクとをいっしょに連 れて行った。彼は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たきぎを割った。こうして彼は、神がお告げになった場所へ出かけて行った。

하나님의 이런 끔찍한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냐 하면 담담하게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없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이 아브라함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는 구절이 4절입니다.

창세기 22장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三日目に、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ると、その場所がはるかかなたに見えた。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잔인하게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을 바라보고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일까……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저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단을 합니다. 여기 또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5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それでアブラハムは若い者たちに、「あなたがたは、ろばといっしょに、ここに残っていなさい。私と子どもとはあそこに行き、礼拝 を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と言った。

이 구절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행더러 거기 기다리라고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만 가서 번제를 드리고 온다면, 갈 때는 둘이서 가겠습니다만, 올 때는 한 사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私と子どもとはあそこに行き、礼拝をして、私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

라고 되어야죠.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라고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이 ‘우리’라고 하는 부분이 개역한글에는 없었습니다만, 개역개정이 되면서 추가되었습니다. 아마도 문법상 이 복수형이 어디에 걸리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영어 번역을 보더라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만 오겠다”가 아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먼 산을 바라봅니다. 세상적인 방법, 사람의 생각대로 해봐야 근심, 걱정, 불화만 생겼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다면,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서고 난 다음에는 아브라함은 이제 무서울 게 없습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린 그는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7절~8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イサクは父アブラハムに話しかけて言った。「お父さん。」すると彼は、「何だ。イサク。」と答えた。イサクは尋ねた。「火とたきぎはありますが、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羊は、どこにあるのですか。」アブラハムは答えた。「イサク。神ご自身が全焼のいけにえの羊を備えてくださるのだ。」こうしてふたりはいっしょに歩き続けた。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드릴 게 없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걱정 말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직접 준비하실 거야.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한테 뭔가 보였어요? 아니요.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세상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믿는 아브라함이 된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을 거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실 거야.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고 담담하게 아들을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합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해서 나무 위에 앉혀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세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스톱! 됐어! 오케이! 그 아이한테 손을 대지 마. 그만 하면 됐어. 이제 너의 믿음을 알았다.
그제서야 둘러보니 어때요?


창세기 22장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角をやぶに引っかけている一頭の雄羊がいた。アブラハムは行って、その雄羊 を取り、それを自分の子の代わりに、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た。

그의 믿음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18절,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仰せられた。「これは主の御告げである。わたしは自分にかけて誓う。あなたが、このことをなし、あなたの子、あなたのひとり子を惜しまなかったから、わたしは確かに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数多く増し加えよう。そしてあなたの子孫は、その敵の門を勝ち 取るであろう。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あなた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준비하십니까. 오늘 본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음? 그렇다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통해서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인간이 나약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힘써 애쓰고 땀을 흘리며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답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보시면 압니다.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모든 것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99%가 아니라 100% 완벽한 세상을 준비하신 다음에 우리를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구조형태입니다. 자연은 이른바 먹이사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쉽게는 약육강식이라고 합니다만,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잡아먹게 되어 있고, 그렇다고 그럼 제일 강한 것은 먹기만 하나요? 아니요. 제일 강한 것이 죽으면 또 약한 것이 그것을 잡아 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연 생태계가 돌아가는 것입니다만, 이 먹이사슬 안에는 인간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즉, 인간이 있건 없건 자연 생태계는 돌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상 모두가 우리 인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사역에, 인간이 하나라도 거들어드린 것이 있나요? 아니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었나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지창조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할 수가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무 것도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과연 최선인가요?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그렇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아멘.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속해주시고…나를 구원해주시고……그런 거 아니에요? 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틀린 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믿음이다, 좋은 믿음이다, 뜨거운 믿음이다 한다 하더라도, <기다림>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큰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철야를 합니다…그런데 응답도 못 받고 며칠 못 가서 포기하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 믿습니다~ 하고 하면서 결국 좀 있다가 안 되니까, 금방 내 방법대로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좋은 믿음은커녕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가 범했던 잘못처럼,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한 경우같이 근심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하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다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다가 늙어 죽겠다……혹시 그런 생각 해보셨나요?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을 하셨는데 그거 기다리다가 결국 늙어 죽었더라…….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약속과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최고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얻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내가 너무나도 못났기 때문에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 아니야? 라고 걱정되십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응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아침이나 밤이나 예수님을 붙잡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안 계시면,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만 일어나나요? 만사형통이에요? 안 좋은 일은 하나도 안 일어나나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고 슬프거나 괴로운 일은 없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결국에는 우리는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축복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응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건강이 회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우리를 위해 최고를 준비해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생각대로 보면 눈에는 안 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안 잡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다림의 믿음을 갖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최고의 문제 해결과, 최고의 건강 회복과, 최고의 응답과, 그리고 최고의 축복을 받으시는,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크나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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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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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6회 먼저 된 자
2017년 2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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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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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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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먼저 된 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는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비유가 몇 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장면은 똑 같은 상황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19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30절 말씀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28절~31절 말씀,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것은 같은 장면이지요.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은 나중에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까지는 서로간에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마지막 구절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누가복음에는 이 장면의 묘사에서 18장에 기록되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나중 된 자와 먼저 될 자가 나오지 않고, 오늘 살펴본 13장에 29절~30절 말씀에 등장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되나요? 저는 그랬습니다. 막판 역전! 야구라면, 9회말 투아웃에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 쇼트 트랙 강국인 우리나라라면 예전에 심석희 선수가 보여주었던 마지막 순간에 역전승! 저는 이런 감동적인 역전승이야말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좀 더 잘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저 사람을 좀 이기는 극적인 역전, 내가 그 사람을 역전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할 것이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사람 곁을 지나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그런 꿈을 꿔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거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된다고 하는데, 잘되기는커녕 일은 안 풀리고, 문제는 더 생기는 것만 같고, 이게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 건지 어떤지 불안감이 생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을 해요? 예수님께서 그냥 한 번 해본 말씀이에요? 아니면 우리를 속이신 건가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는 것은 물론이지만 지금 현세에서도 백 배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신문 기사를 읽고 이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문제를 내 드릴 테니 끝까지 잘 듣고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기사에 실린 사건은 바로 이번 달 2017년 2월 5일 일본 오카야마 현 가사오카 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날은 이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가 열려, 각 연령대에 따라서 마련된 코스를 달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종목 중에서 초등학생 부문은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함께 3킬로를 달리는 코스도 있었는데, 이 때 참가한 초등학생이 263명이었습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함께 달리는 것이니까 아무래도 6학년한테 유리하겠죠?
자, 지금부터 문제가 나갑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지난 2017년 2월 5일, 초등학생 3학년~6학년 부문 3킬로 마라톤 대회. 참가한 초등학생은 263명이었습니다. 결과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승한 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이 아니라 3학년 남학생이었습니다. 이 사실도 놀랍습니다만,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학생은 263명 중에서 263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말하자면 제일 마지막에 골인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이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이 양보를 해요? 아니요. 다른 학생들도 우승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이 꼴찌 학생이 우승을 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습니까. 생각하셨나요? 263명 중에서 263번째, 제일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한 그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간단합니다. 그 아이 앞에 골인한 262명이 모두 실격처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육상 경기를 보면 경기가 끝나고 순위가 발표되었어도, 나중에 어떤 이유로 한 선수가 실격되는 바람에 순위가 바뀌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순위가 하나 오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두 명도 아닌 263명 중에서 262명이 실격되고 마지막에 골인한 학생이 우승을 하는 일이 발생했나 하면, 사건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3킬로 코스는 초등학생뿐만이 아니라 중학생들도 같은 코스를 달립니다. 아무래도 초등학생들 보다는 중학생이 빠르기 때문에 서로 뒤엉키고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중학생이 5분 먼저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5분 뒤에 초등학생이 출발해서, 중학생들 뒤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었는데, 초등학생은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263명이었습니다만, 그날 따라 중학생 수가 40명밖에 안 되었답니다. 그리고 더구나 그 40명 학생들의 속도가 무척 빨랐대요. 그렇게 되다 보니까 초등학생들 선두그룹이 크게 뒤쳐지게 되어서 중학생들이 안보일 정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두 아이들이 코스를 잘못 들어간 거예요. 본래 코스는 그 코스가 아닌데 앞을 달리는 아이들이 다른 코스로 가니까, 당연히 뒤따르는 아이들은 우루루 하고 모두 그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는 3킬로 코스인데 그 길로 가면 1.8킬로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이 아이들이 일찍 골인했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 담당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아이들이 다 잘못된 코스를 달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코스를 잘못 선택해서 결국 3킬로 중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1.8킬로를 달렸기 때문에 이를 공식 기록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달릴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260명 이상이나 되는 학생들이 기껏 달렸는데 전체 학생들을 실격처리 하기도 그렇고, 해서 결국 기록은 <공식기록>이 아닌 <참고기록>으로 하고 1등부터 6등까지 상을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밝혀진 사실이 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 하나가 올바른 코스를 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최측에서 재조사를 해보니까 정말로 이 아이가 3킬로 정규코스를 완주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회가 치러진 날은 2월 5일이었지만, 그로부터 9일 뒤인 2월 14일에, 주최측에서는 이 아이를 초등부 공식 우승자로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이 학생이 정규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앞을 달려가는 아이들이 잘못된 코스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만 옳은 길을 선택했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좀 씁쓸하지 않겠어요? 비록 마라톤이긴 하지만, “얘들아, 저 간판 봐. 그쪽 길이 아니야. 이쪽이야”라고 말을 했어야죠. 그런데 얌체같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자기만 옳은 길로 갔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아이의 달리는 속도가 너무나도 느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아이가 다른 262명 학생들과 어느 정도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어서, 거기에 자기도 묻어갈 수 있는 정도만 되었더라도 역시 이 아이는 그 다른 학생들처럼 잘못된 코스를 달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너무나도 느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느렸냐 하면, 자기보다 바로 앞을 달리는 학생, 이 아이는 263명 중 꼴찌인 263등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만, 262등으로 달리고 있는 학생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쳐졌던 것이지요.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 아이는 잘못된 코스로 가는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정규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담당직원 덕분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참가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탄 담당직원이 선수들 중 제일 마지막에 달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담당자는 본래 코스를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다른 길로 들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야, 그쪽 길 아니야. 이쪽이야. 라고 말해주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앞을 달리는 아이들을 보고 달린 게 아니라 계속 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담당자의 지시대로 달렸던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마도 끝까지 자기보다 바로 앞을 달리는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아이가 다리가 느려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바로 앞을 달리는 선수들도 잘못된 코스로 갔기 때문에 볼래야 볼 수 없었겠지요.
너무나도 일찍 도착한 262명의 학생들. 속도도 빠른데다 잘못된 코스인 1.8킬로밖에 안 달렸으니 얼마나 일찍 도착했겠어요.
이에 반해, 그렇잖아도 달리기가 느린데, 거기다가 정규코스인 3킬로를 달려서 골인한 남학생. 이 초등학교 3학년짜리 남학생이 정상적인 코스를 달렸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고 하니까, 그 날 이 아이가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무도 이 아이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위기도 썰렁했겠지요. 주목하기는커녕 어쩌면 관객 중에는 측은한 눈초리로 이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구 쯧쯧쯧, 아니, 아무리 느려도 그렇지 다른 애들이 들어온 게 언젠데 쟤는 이제 들어와?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다른 아이들, 26명이요? 아니요. 자그마치 262명이 실격처리가 되고 마지막 제일 꼴찌로 들어온, 그것도 이 종목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종목이니까, 나이도 제일 어린 이 남학생이 우승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썰렁한 결승점을 쓸쓸하게 통과한 이 아이가 그 종목에서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는 우연히 얻어진 행운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262명의 학생들이 실격한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골인할 때까지 주최측 담당자가 자전거로 함께 달려준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행운만으로 이 아이는 우승할 수 없었겠지요.
진정으로 이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다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달렸는데,
아이고, 나는 꼴찌고, 선두그룹은 고사하고 내 바로 앞을 달리는 아이도 안 보여.
길가에서 응원하는 사람들도 없어.
어쩌면 이제 다 집에 가버렸는지도 몰라.
지금 가봐야 창피할 뿐이야.
에이, 나도 그냥 집에 가버릴까.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만약에 거기서 포기했었더라면 나중에 얻게 될 우승도 영광도 사라졌겠지요. 하지만 이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승점까지 용기를 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전거로 따라와주는 담당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나머지 262명의 학생들이 길을 잘못 선택한 이유는 안내표지판이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아이도 잘못된 코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때 그 담당직원이,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이 쪽이야. 라고 했을 때,
“아이 참, 그렇잖아도 지금 늦어서 속상한데 왜 이래라 저래라 시끄럽게 잔소리야,”
만약에 그러면서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그 아이는 우승은커녕 잘못된 코스를 달린데다 꼴찌까지 하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담당자의 지시대로 올바른 코스를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 아이가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갔다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갔던 길은 다른 아이들이 갔던, 올바른 길처럼 보이는 그 넓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저것이 올바른 길이다, 라고 판단하는 자신을 의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올바른 길을 아는 이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33절~35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이 안 풀리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마음은 불안하고, 돈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기도해도 감동도 없고, 응답도 없고, 성경을 봐도 다 그게 그 말 같고, 교회에 가서 설교 말씀을 들어도 맨날 했던 얘기 또 하는 것 같고……이렇게 되면 찾아오는 것은 절망이요, 좌절이요, 고통이요, 고난이요, 역경처럼 느껴지는 시기, 이런 시기를 두고 비유하기를 우리 인생의 기나긴 어둡고 캄캄한 터널이라고 합니다.
그게 맞습니까? 사실 이 터널에 비유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믿음에 있어서 터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터널의 안 좋은 부분만 생각합니다. 어두운 터널, 좌우가 꽉 막힌 터널,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터널, 절망의 상징이요 역경의 상징으로 우리는 종종 터널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터널이 어디 나쁜 것뿐입니까?
우리 한 번 터널의 좋은 점을 생각해봅시다. 없어요? 아니요. 왜 없겠습니까.
먼저, 터널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어쩌면 복잡한 터널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터널은 길이 하나뿐입니다.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어요.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로, 터널은 오직 앞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시간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가 결국은 돈 잃고 시간 잃고 건강 잃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터널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기 앞에 먼저 가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터널은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터널은 터널이 아니라 그냥 굴이죠. 우리가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반드시 출구가 있고, 그 출구로 인도해주실 분은 바로 우리 발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터널은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이 터널을 왜 만들었겠습니까.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좌절이나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서요? 고난과 고통을 주기 위해서 터널을 만듭니까?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답답함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요? 아니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터널을 만듭니다. 터널이 없다면 먼 거리를 멀리 돌아서 가야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서울에서 운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남산터널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일본의 경우,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된 군마현과 니이가타현을 잇는 시미즈 터널은 길이가 고작 10킬로도 채 안 된다고 합니다만, 이 터널이 개통됨으로 인해서 단축된 시간은 무려 4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터널이 안 좋은 건가요? 아닙니다. 터널은 우리 생활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믿음의 터널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셉도 총리가 된 것이 그의 나이 서른 때이고,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것이 또한 서른 살 때입니다. 이 얼마나 빠른 출세입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배경에는 그들이 거쳤던 터널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시기는 열 일곱 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는 나이가 30살이니 그의 터널은 몇 년이에요? 단순계산으로 13년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난 다음에 사울 왕한테 쫓겨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사울이 죽고 난 다음에, 그의 나이 서른에 유다 왕, 헤브론의 왕이 됨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도피생활이 끝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그의 나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던 다윗이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그저 형들한테 줄 도시락 심부름을 하러 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적어도 20세는 안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의 도피생활도, 아무리 적게 잡는다고 해도 10년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광야에서 양을 치는 아버지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 중 열한 번째였습니다. 출세요? 재산이요? 장자면 또 모를까, 서너 번째도 아닌 열한 번째한테 무슨 기회가 돌아오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13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나이 서른에 당시로서는 최대 선진국인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을 치는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아무런 대우도 대접도 못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10여 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유다와 나아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여 년이 짧아요? 아니요, 길죠. 남들보다 1년 뒤쳐져도 아쉽고 안타깝고 분통이 터지는데 10년이 뒤쳐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보통 일입니까.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다 어떻게 해서 얻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터널을 통과하면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앞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갔습니다.
그들은 출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영화 벤허에 보면,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간 주인공 벤허가 군함 밑에서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로 힘들게 노를 졌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그 배 지휘관이 벤허에게 묻습니다. 이 배에서 군함에서 노를 저은 지 얼마나 됐느냐. 그러자 한 달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는 다른 군함에서 3년 동안 노를 저었다고 대답합니다. 지휘관은 그에게 절망적인 말을 하지요. 우리가 승리하는 한 너는 계속 배에서 노예로 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패배한다 하더라도 너는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벤허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쇠사슬에 묶여 죽으라고 3년 동안이나 살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용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믿음의 터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더할 나위 없는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축복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눈에는 나를 앞질러가는 사람밖에 안 보이나요? 아니, 내 앞을 달려가 가는 사람도 아예 안 보이나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밀어주십시다.
주님이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슨 근심 걱정이 있겠습니까.
벤허의 말처럼 우리더러 여기서 이렇게 쇠사슬에 묶여 죽으라고 지금까지 살려두셨겠습니까.
우리더러 여기서 이렇게 절망과 좌절 속에 주저앉으라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가 받을 징계는 예수님이 이미 모두 십자가 위에서 다 받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으로 가는 통로이자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절망 속을 헤맬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불안과 외로움 속에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오늘 말씀 드린 이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이를 떠올려봅시다. 그는 빨리 달리지 못했습니다. 추월을 당하면 당했지 한 사람도 추월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우승을 차지하고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인도해주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올 지라도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서, 마침내 믿음 안에서 <먼저 된 자>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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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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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5회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마음
2017년 2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 61절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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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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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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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마음”神様に捧げるまことなる心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서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 잠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작년 2016년 1월 17일 밤 10시경에 경북 김천시에 있는 어느 불교 사찰에서 발생했습니다. 나이가 60대인 기독교인이 몽둥이를 들고 침입해서 법당과 시설들을 부쉈다는 것입니다. 그는 20분 후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교회에 다녀보니까 절과 성당은 미신이고 우상이다. 다 부숴야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서 할 일 했을 뿐이다.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못 질렀다”
이것이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바로 며칠 전인 2017년 2월 17일에 있었던 일인데, 어느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교수님 한 사람을 파면조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 교수님은 바로 작년 경북 김천시에 있는 절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돕고자 해서 모금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금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한 신문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찰 불자님들에게 위로가 될까 고민하던 중 우리의 정성을 모아 법당회복을 위한 헌금을 그들에게 전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얼마나 큰 힘이 될지, 그리고 그것으로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지은 잘못을 용서받을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미안한 마음과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저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교수님은 본인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은 것이 해당 신학대학이 속한 교단이었습니다. 교단 측 협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신학대학 교수님이 앞장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불상회복건립에 대한 것을 모금을 한다는 사실은 신앙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는 그 일이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잘못한 것처럼 인정하고 앞장서서 의를 이루는 것 같은 모습을 손원영 교수님이 보였다는 사실에 대단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

결국 해당 신학대학은 이사회를 열어서 이 모금운동을 벌인 교수님에 대해 파면조치를 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건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먼저 첫 번째 사건, 60대 기독교인이 사찰에 들어가서 법당을 훼손하고 기물을 부순 것은 잘한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일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 사건, 기독교인이 저지른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 한 기독교인으로서 사죄하고 위로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에 <불당회복모금>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통장을 만들고 모금운동을 한 신학대학 교수님의 행위는 잘한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일입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법대에 다니면 이런 수업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갑이 을에게 어떻게 하고, 여기에 병과 정이 어떻게 했는데, 이 때 갑의 죄책은 무엇인가. 뭐 이런 식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우리는 판사로서가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두 번째 사건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이 신학대학 교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어느 같은 기독교인이, 그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걸고 다른 종교시설에 침입해서 기물을 파괴하는 사건을 저질렀으니,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매우 송구스럽다. 본래 기독교의 취지는 그런 게 아닌데……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자칫 기독교 사상이 왜곡될 수도 있겠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이와 같은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종교를 초월해서 모금운동을 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서로 종교 간에 생길 수도 있는 갈등도 해소될 것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신학교 교수님이 여러분 앞에 와서 이렇게 해명을 해요. “내가 모금을 한 것이 무슨 불교를 믿자고 한 것이냐. 같은 기독교인이 잘못했으니까 이를 반성하고 상대방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페이스북에 보니까 대체적으로 이 교수님이 한 일에 대해서 지지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대학에서 내린 파면이라는 조치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기독교 교인만이 아니라 여기에는 교역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의 말을 들어보면 대단히 그럴듯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기독교인이 나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같은 교회나 기독교인이 상대방에게 사과할 수도 있고, 피해가 있었다면 이를 복구하는 데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모금도 하고 그랬다면, 이는 충분히 미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볼 때 문제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열왕기상 15장 11절~15절,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アサは父ダビデのよう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なった。
彼は神殿男娼を国から追放し、先祖たちが造った偶像をことごとく取り除いた。
彼はまた、彼の母マアカがアシェラのために憎むべき像を造ったので、彼女を王母の位から退けた。アサはその憎むべき像を切り倒し、これをキデロン川で焼いた。
高き所は取り除かれなかったが、アサの心は一生涯、主と全く一つになっていた。
彼は、彼の父が聖別した物と、彼が聖別した物、すなわち、銀、金、器類を、主の宮に運び入れた。

이 아사 왕은 유다 왕 중에서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왕이었습니다. 그는 남색하는 자, 즉 동성애자를 몰아내고, 조상들이 숭배하던 악습의 근원인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 어머니가 우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없앴다고 합니다. 이 말만 들으면 이처럼 불효자도 없을 텐데도 성경은 이를 두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아사의 마음이 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열왕기하 10장 23절~27절,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명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주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エフーとレカブの子ヨナダブは、バアルの宮にはいり、バアルの信者たちに言った。「よく捜して見て、ここに、あなたがたといっしょに、主のしもべたちがひとりもいないようにし、ただ、バアルの信者たちだけがいるようにしなさい。」こうして、彼らはいけにえと、全焼のいけにえをささげる準備をした。エフーは八十人の者を宮の外に配置して言った。「私があなたがたの手に渡す者をひとりでものがす者があれば、そのいのちを、のがれた者のいのちに代える。」全焼のいけにえをささげ終わったとき、エフーは近衛兵と侍従たちに言った。「はいって行って、彼らを打ち 取 れ。ひとりも外に出すな。」そこで、近衛兵と侍従たちは剣の刃で彼らを打ち、これを外に投げ捨て、バアルの宮の奥の間にまで踏み込んだ。そしてバアルの宮の石の柱を運び出して、これを焼き、バアルの石の柱をこわし、バアルの宮もこわし、これを 公衆便所とした。それは今日まで残っている。

여호사밧의 아들인 예후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서 바알을 숭배하는 이들을 멸하고 바알의 목상을 불살랐으며, 바알의 신당을 변소로 만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사사기 6장을 봅니다. 사사기 6장 25절과 26절,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7년간을 미디안에게 지배를 당하게 만드셨더니,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세우시고 미디안의 손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게 하시는데, 이 일을 행하시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에게 우상을 제거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것도 멀리 있는 우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한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한 그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고, 끝내는 미디안을 몰아내어 40년 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절에 있는 불상은 우상입니다. 거기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리아상을 만들어놓고 절을 하는 것도 우상숭배요, 하물며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동상이나 석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이 교수님의 이력을 보니 한국에서 좋은 대학도 나왔고 미국에서도 훌륭한 대학에서 유학을 했습니다만, 그와 같은 훌륭한 지식이 있다면 그 정도는 아실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 신학교 교수님 말에 의하면 헐어버린 우상을 복구하기 위해 모금을 해서 그 우상을 건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것인데,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 분은 앞서 살펴본 성경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럼 어떤 분은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지요.

“이봐 홍 목사. 그럼 당신은 절에 들어가서 거기 기물을 부수고 그러자는 것이냐.”

여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종교시설이냐 아니나를 떠나서, 무단으로 침입하여 그 시설이나 건물 내에 있는 물건들을 훼손하거나 하면 이는 분명 무단침입과 기물손괴라고 하는 불법행위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말씀처럼 사회법 위에 제사법이 있다? 그러면서 세상법은 따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니죠. 만약에 세상 법이 기독교를 억압하고 탄압한다면 이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이 법을 준수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일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종교라고 하더라도 불법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우상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적힌 말씀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이 성경 기록입니다. 그것이 어디 한 두 군데 기록되어 있나요. 성경에는 수도 없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と並べて、銀の神々を造ってはならない。また、あなたがた自身のために金の神々も造ってはならない。

출애굽기 22장 20절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ただ主ひとりのほかに、ほかの神々にいけにえをささげる者は、聖絶し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4장 35절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あなたにこのことが示されたのは、主だけが神であって、ほかには神はないことを、あなたが知るためであった。

신명기 5장 7절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あなたには、わたしのほかに、ほかの神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신명기 6장 14절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ほかの神々、あなたがたの回りにいる国々の民の神に従ってはならない。

이사야 45장 21절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告げよ。証拠を出せ。共に相談せよ。だれが、これを昔から聞かせ、以前からこれを告げたのか。わたし、主ではなかったか。わたしのほかに神はいない。正義の神、救い主、わたしをおいてほかにはいない。

호세아 13장 4절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しかし、わたしは、エジプトの国にいたときから、あなたの神、主である。あなたはわたしのほかに神を知らない。わたしのほかに救う者はいない。


요엘 2장 27절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あなたがたは、イスラエルの真ん中にわたしがいることを知り、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り、ほかにはないことを知る。わたしの民は永遠に恥を見ることはない。

부족합니까? 얼마나 더 기록되어야 하겠습니까. 진정한 하나님, 이 세상의 신 중의 신이요 왕 중의 왕인 하나님은 우리가 믿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또 하나 어려운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다른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우상이니까 우리 손으로 다 없애버려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절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합니까? 만약에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믿는 우상을 우리가 신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종교는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열심히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래. 뭐, 어디 종교가 다 나쁜 짓 하라는 종교가 있나, 다 좋은 거 아니야? 욕심 부리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게 종교잖아? 그렇게 살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도 가고 극락에도 가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뭐 꼭 교회에만 가야 하나? 꼭 예수님만 믿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나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世界中 でこの御名のほかには、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としては、どのような名も、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어요.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서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A가 진리라고 하면 A 외에 다른 정답은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정답은 A 뿐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우리 앞에는 두 가지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냐 사망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この方にいのちがあった。このいのちは人の光であった。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바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으로 이르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으로 이르는 다른 정답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생명을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정답이요,
예수 그리스도 만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어떤 분은 이러실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다른 존중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를 존중해요? 만약에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면 그들이 섬기는 신에 대해 절을 하고 그 신 또한 하나님과 동등한 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요? 그것은 바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에게로 돌아오기를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만민>에 포함되지 않나요? 아니요, 당연히 그분들도 만민입니다. 그 분들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막무가내로 다른 종교시설에 들어가서 성경을 외우고 억지로 교회에 끌어오고……그것이 진정한 복음전파인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그런 모습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이웃’이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아닌,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모두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서,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말에 마음을 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8장 61절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あなたがたは、私たちの神、主と心を全く一つにし、主のおきてに歩み、今日のように、主の命令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래요? 예, 온전히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전하게 바쳐서 완전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놀이공원 입장료가 10,000원이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는 10,000원을 내야 되겠지요? 그래야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안 내고 들어갔어요. 그럼 어떻게 되죠? 예, 당연히 붙잡히죠. 그리고 밖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5,000원만 냈어요. 그럼 어떻게 되요? 절반만 냈으니 절반만 즐길 수 있다? 아니요, 입장료는 10,000원인데 5,000원만 냈다고 들여보내 주나요. 역시 붙잡히고 쫓겨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9,000원만 냈다면요?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9,999원만 냈다면요? 글쎄요 실제로는 뭐, 그 정도 냈다고 하면 인정상 봐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예를 들어서 기계로 입장권을 구입한다면, 10,000원을 넣어야 입장권이 나오는데 9,999원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요? 불과 1원이 부족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역시 돈을 하나도 안 넣었을 때처럼 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50%나 90%, 나아가 99.999%를 바친다 해도 부족합니다. 온전히 100% 모두를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열왕기상 15장 에서 남색하는 자, 즉 동성애자들을 쫓아냈다고 합니다만, 동성애자들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동성애를 동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자는 것이 우리도 다른 종교를 섬기자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동성애자들을 존중한다는 것이 동성애에 동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들을 존중해주고 주님의 사랑으로 보듬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진정으로 그분들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참고로 앞서 말씀 드렸던 신학교 교수님이 불상회복건립기금을 모금 했는데, 그 결과 100여명으로부터 총 267만원을 모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돈을 그 절의 주지스님한테 전달하려고 했더니, 그 기독교 성금 받기를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 주지스님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신교를 비롯해 기독교계에서 우리 절을 돕겠다고 성금 모금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우리 절이 기독교계로부터) 돈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저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이고 우상이고를 떠나서 자신이 믿고 있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확고함이 신학교 교수님과 주지스님과 어느 쪽이 강합니까.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한 이유는, 그렇다고 어느 누구를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믿음에 대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들이 아닐까, 정말 이 시점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고,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굳건히 세우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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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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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4회 더욱 사랑
2017년 2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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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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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더욱 사랑”より大きな愛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교회만으로는 생활이 좀 어렵기 때문에 평일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어제 학교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보았더니 사무실 입구에 낯선 외국인 3명이 그 학교 출입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보니 사무실 안에는 물이 꺼져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고 하니까, 학교 입학 문제 때문에 문의할 게 있어서 온 학생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담당자와 약속은 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약속은 안 했대요. 그럼, 오늘 여기 올 때에 전화를 하고 왔냐고 물었더니 전화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 줄 아느냐 했더니, 토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맞다. 토요일이다. 그런데도 왔냐고 했더니, 그 학생들이 하는 말이,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는 근무를 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저는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아니, 우리 직원이 그런 말을 했느냐, 라고 했더니, 아니, 그냥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참 여러 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은 기본적으로 토요일은 노는 날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다행히 그 친구들은 시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는커녕 1시도 아니고 2시가 다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2월 11일은 일본 공휴일이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했더니, 足利 시에서 왔다고 해요. 아시카가 시라고 하면 군마현도 아니고 이웃 토치기 현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렸냐고 하니까 1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검색을 해보니까 자동차로 오면 1시간이 좀 안 걸리는데, 전철을 타고 오면 대략 1시간 30~40분이 나오더군요.
자, 지금까지 이 3명의 외국학생들이 한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꼭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군마현에 있는 학교에 왔는데,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 가면 사람이 있겠지,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전철을 탔는지 아니면 운전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시간과 돈을 들여서 왔다는 거예요. 한 명이라면 착각할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멀쩡한 3명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전화 한 통 걸어보면 될 일을 3명 모두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직히 안타깝다기 보다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온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어디어디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 나라는 일본이나 한국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낙후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도 훌륭한 사람들은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학생들이 그 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쩌다가 한 번 그랬을까요? 오히려 그렇다기 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항상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저기 담당자가 탄 차가 오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이 타고 있는 차에 가서 이러이러한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라고 했더니만, 아니, 그 분도 당혹스럽죠. 갑자기 찾아왔으니 말이에요. 그러면서, 지금은 좀 볼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좀 기다리라고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안으로 들여보내놓았습니다만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안 옵니다. 그게 그 담당자 책임이에요? 아니에요,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찾아온 그 학생들 잘못입니다. 결국 기다린 지 5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월요일에 다시 연락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지 20분 정도가 지나서 그 담당자는 왔습니다.

사실 한국도 옛날에는 그랬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죠? 이 코리안타임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은 약속시간에 일부러 늦게 도착하는 행동이나 그 버릇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한국 전쟁 때 주한 미군이 한국인과 약속을 한 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인은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시간관이다.' 라고 하여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전쟁 때라고 하면 1950년대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시계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통할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는 말이 꽤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도 참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시간관념과 경제적 수준은 비례하는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시간을 안 지키니까 가난한 것인지, 아니면 가난하니까 시간을 못 지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이 시간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학생들은 시간관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간관념만의 문제였다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은 시간이고 뭐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멋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담당자들이 있을 줄 알았고, 자기들 생각에 1~2시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토요일에 적어도 몇 천엔의 돈과, 왕복하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을 들이게 됐고, 결국 기다리는 것도 도중에 포기해서 그 날에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하나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볼까요?

마태복음 15장 1절~3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そのころ、パリサイ人や律法学者たちが、エルサレムからイエスのところに来 て、言った。「あなたの弟子たちは、なぜ昔の先祖たちの言い伝えを犯すのですか。パンを食べるときに手を洗ってい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て言われた。「なぜ、あなたがたも、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戒めを犯すのですか。

이 구절만을 읽으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니, 식사 하시기 전에 손 씻으라고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왜 화를 내셨을까.

그런데 이 의문은 마가복음 7장 3절~4절을 보면 풀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ないでは食事をせず、また、市場から帰ったときに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事をしない。まだこの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を洗うことなど、堅く守るように伝えられた、しきたりがたくさんある。―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 구절을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느냐 아니면 씻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이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방식대로 행하라고 예수님이나 그 제자한테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5장 4절~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神は『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また『父や母をののしる者は、死刑に処せら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だれでも、父や母に向かって、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と言う者は、その物をもって父や母を尊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ています。こうして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ことばを無にしてしまいました。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부모한테 가서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 ”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히 부모를 공경한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에요. 하지만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걸 지키라는 거예요.
그것뿐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만든 논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してもよい。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休みの安息日である。安息の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런데 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는 것을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안식일에 행하면 안 되는 일들을 바리새인들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대단히 까다롭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하기 위해서요?

예를 들어서 독재자가 등장하면 대체적으로 그들은 반드시 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까다로운 법을 만들었지요. 그 이유를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유신헌법이나 무슨 헌법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긴급조치다 뭐다 해서 수많은 법을 만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만들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보십시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 살해한 수가 600백만에서 많게는 2000만명까지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그가 저지른 행위는 모두가 불법이었나요? 아니요. 모두가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모두가 불법행위였던 것입니다. 왜죠? 그것은 그와 같은 법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 독재자였기 때문입니다. 일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사들은 모두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말하자면 범법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치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나 일제에 대항해서 싸운 독립투사들이 범법자라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하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독재자나 잡은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논리와 주장으로 그럴 듯한 말들을 총동원해서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그리고 이를 따르라고, 이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전통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이것저것 붙여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고, 하물며 예수님한테까지도 이를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니,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입니까.
오늘날 교회에도 보면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면 안 된다. 물론 그와 같은 규칙이 모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에 부합된 것인지를 분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이나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면,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법은 어떨까요.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도 하나님의 권력과 권위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여느 독재자들처럼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괴롭히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법을 지켜라…라고 하면 무슨 골치 아프고 힘든 것처럼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신호를 지키라는 것은 권위나 권력을 위한 것인가요? 빨간 신호에는 건너지 말아라, 파란 신호라도 깜빡 거릴 때에는 건너지 말아라, 전철을 기다릴 때에는 좀 더 뒤로 와서 서 있어라. 운전을 할 때에는 차간 거리를 넓혀라. 이것이 권위나 권력입니까? 바로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말씀에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생각으로 노력을 해서 열심히 믿음 생활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내 성적표를 받아보니 완전히 점수가 바닥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내 생각만 중요시하고 하나님 생각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십자가 계명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반면에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그래요, 이건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건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목숨을 걸고, 지금 당장이라도 순교할 작정을 하고, 이를 악 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인가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고 계신 걸까요?
물론 과거에 보면 우리 주님을 믿는 것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북한 같은 곳에서도 한 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도,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껏 예배를 드리고 성경책은 여기저기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3절~35절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彼らはイエスに言った。「ヨハネの弟子たちは、よく断食をしており、祈りもしています。また、パリサイ人の弟子たちも同じなのに、あなたの弟子たち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ま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 花婿がいっしょにいるのに、花婿につき添う友だちに断食させることが、あなたがたにできますか。しかし、やがてその時が来て、花婿 が取り去られたら、その日には彼らは断食します。」

고린도후서 11장 2절 초중반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というのも、私は神の熱心をもって、熱心に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っているからです。私はあなたがたを、清純な処女として、ひとりの人の花嫁に定め、キリストにささげ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예수님 품에 안기는 것이 그야말로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어느 정도로 사랑하냐 하면 내가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는 분명 틀림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을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해요?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삽니까? 과연 그래도 되는, 그 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요?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교회 한 번 나가고 헌금 내고, 또 십일조 내고 뭐 그러면 되는 거 아냐? 뭘 더 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바로 그런 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천국 문 앞에서 서성입니다.

이상하네.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천국 문이 열릴 줄만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헌금도 내고 십일조도 내고 했으면 예수님이 나를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교회도 오래 다니고, 직분도 받았으면 천국 천사들이 나를 환영해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잠겨있고 아무도 안 열어주네…
바로 그때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しかし、彼は答えて、『確かなところ、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と言った。

만약에 그러신다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더 무서운 구절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大ぜい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な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 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다음에 다시 와라”라고 하셨더라면 그래도 기회는 있습니다만,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해. 떠나 가”라고 하신다면, 이는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겠지요.

이 모두가 다 내 생각만 하고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해봅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죠.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 아니겠어요?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구요? 여기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にでも死ぬ人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情け深い人のためには、進んで死ぬ人があるいはいるでしょう。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가 의인이나 선인일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 성경에 이미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팔 굽혀 펴기나 윗몸 일으키기를 할 때에, 한 두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안 하나가 하면 서른 번도 힘듭니다.

자, 스물 여덟, 스물 아홉…그리고 이를 악 물고 서른 번을 했습니다. 간신히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멈춥니다. 그런데 정말로 근육이 생기는 순간은 그 때가 아니랍니다. 그럼 언제냐. 바로 그 다음, 이를 악 물고 발발 떨면서 서른 번째를 한 바로 그 다음에 한 번 더 할 때! 그 때 진정으로 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 어떻습니까. 근육통이 옵니다. 안 하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가 쑤셔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오랜만에 운동을 했는데 다음 날에 몸이 멀쩡해요. 근육통이 안 느껴져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답은 간단합니다. 운동 헛 한 거예요. 근육통이 있어야 근육이 생긴다는 증거이지, 근육통이 없다면 이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는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잘 해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지금까지 해왔던 믿음 생활보다 조금만 더 우리 주님을 사랑해봅시다. 그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예수님을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두 번, 그리고 세 번, 네 번,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두 번, 세 번, 그리고 항상 성경말씀을 묵상하게 되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지름길인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안 하던 일을 하면요, 몸이 피곤해집니다. 안 읽던 성경 읽으려니 눈이 침침합니다. 주일 예배만 가다가 수요예배 가고 새벽예배 가려니 몸도 피곤합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 안에서의 근육통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믿음이 놀라울 만큼 성장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지금보다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보냄으로 인하여,


마지막 날에 내가 다가가자 문이 활짝 열리고 마태복음 25장 21절과 23절의 말씀처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 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하고 예수님께서 기뻐 맞이해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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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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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63회 전능하사
2017년 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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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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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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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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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사”全能なりし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특히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있지요. 이른바 주기도문은 이름 그대로 주님이 주신 기도문, 즉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사도신경>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설화도 있습니다만, 이는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이 과거에 한 번 만들어지고 그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천을 거듭해왔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얼마 전에는 흥미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보면 <복음방송>이라고 하는 한국말로 나오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있습니다. 이 방송국에서는 물론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주로 각 교회에서 협찬을 해서 설교 방송을 틀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에는 하루 종일 틀어놓으면 주로 로스앤젤레스나 그 인근지역에 있는 남부캘리포니아, 이를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남가주라고 하는데, 주로 남가주 쪽에 있는 한인 교회의 설교들을 한 번에 꽤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정해져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 여러 교회 설교들을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건 참 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지역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들었는데, 그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조금 작은 소동이 있었나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 복음방송에서 방송된 설교 내용에 어떤 교회 목사님이, 사도신경을 외우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방송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사과도 하고 그 교회 설교를 이제 더 이상 방송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도신경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한테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교회 목사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당신 교회에 다니려고 하는데 거긴 사도신경을 외우냐고 물어보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걸 물으시냐고 했더니,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자기가 들어서 그걸 확인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전화로 말씀하기를, 저희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이고……라고 하니까 그냥 끊어버리더랍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다…뭐, 이런 엉뚱한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사도신경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이라면 사도신경 정도는 안 보고도 외우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저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분명히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도신경을 외우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초대교회에서부터 중세에 걸쳐 성경이 형성되고 많은 신학과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만, 그 중에는 성경에서 벗어나거나 해서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마찰도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를 어느 정도 정비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과 토론과 고민 끝에 완성된,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 중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도신경을 보면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부분 때문에 다투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신경은 어떻게 시작하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에도 우리의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들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만, 사실은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부분 하나하나가 쟁점이 되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도 물론이지만, 이 사도신경에서도 은혜를 참 많이 받습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세상에 보면 많은 문학작품들이 있습니다만, 어느분 말에 의하면 명작은 벌써 그 시작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을 보면 벌써 노벨문학상을 두 개나 땄지요. 그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입니다. 눈의 나라…설국입니다만, 그 도입부가 어떻게 되냐 하면 이렇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 설국이었다……. 사실 원문이 아니라 번역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그 느낌이 좀 떨어집니다만, 그래도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 검은빛 터널을 벗어났더니 완전히 다른 세상, 하얀 눈덮인 세상에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이 벌써 시작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노벨상 수상작은 아닙니다만,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吾輩は猫である。名前はまだない 나는 고양이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이 소설은 고양이의 시각으로 적혀졌다는 것을 독자한테 직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지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좀 신선도는 떨어지겠습니다만, 당시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한테 있어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첫 구절이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을 따라올만한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창세기 첫 구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죠?

예,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した。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좀 어느 정도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으면서도 황홀할만한 도입부로 장식된 책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태초, 모든 것, 세계 만물이 시작하는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계셨으며, 그 분께서 천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놓기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적힌 책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일단 신약에 있어서는 인정하시겠죠?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볼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孫、ダビデの子孫、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나죠?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るように。アーメン。

분명히 신약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신약에만 등장하시니까 신약에서만 주인공이신가요? 어떤 분은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고 신약에서만 예수님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즉 모든 것의 시작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御子は、見えない神のかたちであり、造られたすべてのものより先に生まれた方です。なぜなら、万物は御子にあって造られたからです。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見えるもの、また見えないもの、王座も主権も支配も権威も、すべて御子によって造られたのです。万物は、御子によって造られ、御子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す。御子は、万物よりも先に存在し、万物は御子にあって成り 立っています。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도 먼저 나셨으며,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곳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까지도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약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에서의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죄악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いや)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그리고 이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そして、こう言われると、彼らに息を吹きかけて言われた。「聖霊を受けなさい。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를 가장한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를 천사가 지켜준다고 하거나, 아니면 성령님을 그저 무슨 신비로운 바람이나 기운처럼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사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빈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은 후에는 천사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우리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을 때에는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죄악을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과 천사가 같습니까? 이는 전혀 다릅니다. 천사는 아무리 미가엘 천사장이라고 해봤자 똑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또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가끔, 아니, 종종 잊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청년이 꼭 타고 싶었던 여객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객선은 표값이 너무나 비싸요. 그래서 이 청년은 돈을 열심히 모아서 그 여객선 표를 샀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표 중에서도 제일 싼 3등급짜리 표를 간신히 샀습니다.
이제 배가 출발합니다. 주변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들과 숙녀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화려함에 기가 죽어서 이 청년은 감히 어디를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이제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탈탈 털어서 간신히 그 3등급짜리 표를 샀기 때문에 더 이상 돈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 배도 고프고 기운도 빠져서, 혼자 저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허기를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객선 승무원이 지나가다가 이 청년을 봤어요. 그래서 이 청년한테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고, 어디 아픈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말을 하죠. 자기가 이 배에 너무나도 타고 싶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표를 끊었는데, 이제 가진 돈이 없어서 밥도 못 사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승무원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손님, 이 배의 운임에는 모든 식사값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자유롭게 드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 청년은 어떻게 했겠어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이제 더 이상 허기에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목마름을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서 차려놓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나보다 조금 더 사람이에요?
나보다 조금 더 힘이 있는, 능력이 있는 천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 곧 성령 하나님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11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v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だれであれ、求める者は受け、捜す者は見つけ出し、たたく者には開(ひら)かれます。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
でしょう。また、子が魚(うお)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하는 방법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기도하시는 분들 중에 겸손하게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겸손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좋습니다. 그런데 기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안 드리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이는 불순종이지요. 하지만 하라고 하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사람한테는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내가 또 이런 말을 저 사람한테 해서 저 사람이 상처 입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당연히 생각해야지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막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어떻습니까. 특히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다윗의 기도를 보려면 시편을 보면 됩니다. 저 너무나 속상합니다, 답답합니다. 저들을 아주 혼 내주세요…. 이런 기도가 넘쳐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물론 원수를 그의 손에 붙여서 물리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없은 은혜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구해야 할 기도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까지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하나님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물론 너무나도 지나치거나 이기적인 탐욕으로 가득찬 기도를 드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기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괜히 이뻐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무슨 멋있고 거창하고 어려운 말을 써야만 합니까.

물론 주일날 많은 분들 앞에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경우에는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은밀한 가운데에 드리는 기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魏れるような、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してくださ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私たちは御霊 によって、「アバ、父。」と呼びます。

갈라디아서 4장 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そして、あなたがたは子であるゆえに、神は「アバ、父。」と呼ぶ、御子の御霊を、私たちの心に遣わしてくださいました。

자기 혼자 기도하는데 아~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화롭고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고 왕 중의 왕이시요 신 중의 신이신 아버지 하나님……이렇게 하면요, 내가 무슨 기도를 하려고 했는지 까먹습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한다구요? 예,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누구한테 구합니까. 무슨 신비한 바람이나 기운한테요? 나를 지켜주는 천사한테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빠한테 하듯이 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에는 사도신경을 외워봅시다. 사도신경이 너무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만 외워봅시다. 외운다고 해서 무슨 주문처럼 외우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깊이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전능하사”, 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무섭겠냐…하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私たちを贖(あがな)う方、その名は万軍の主、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은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요, 그 외아들 우리 주 독생자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그리고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기도의 응답과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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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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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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