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포기함으로 얻는 사랑” 捨てることで得られる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들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가 종종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이 그랬지요. 그는 간절히 아들 얻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일흔이 넘어도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보면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イサクは自分の妻のために主に祈願した。彼女が不妊の女であったからである。主は彼の祈りに答えられた。それで彼の妻リベカはみごもった。
간구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에서과 야곱을 얻게 됩니다.
야곱은 그의 외숙부인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레아는 아들을 많이 낳는데, 야곱이 제일 사랑한 라헬은 아들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요셉과 베냐민을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ハンナの心は痛んでいた。彼女は主に祈って、激しく泣いた。
요즘 세상에서야 아이가 없다는 것이 대단한 일 아니고, 오히려 일부러 안 낳는 사람들도 많아서 이른바 저출산 현상이라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이 아들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었던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 하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신앙이 아직 없는 분들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을 때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많은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おびただしい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신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 같은 민주적인 국가에서는 이른바 삼권분립이라고 해서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를 들어서 아무리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나 총리라 하더라도 재판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고, 재판에 관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이나 황제가 재판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원은 출애굽기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따라 광야 길로 나와서 생활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무슨 다툼만 있으면 사건을 모두 모세한테 가져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자 이를 본 모세의 장인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재판을 모두 다 자네가 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 중에 리더를 세워서 작은 일들은
그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정말 어려운 재판만 하도록 하게. 이렇게 조언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합니다.
출애굽기 18장 25절~26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
モーセは、イスラエル全体の中から力
のある人々を選び、千人の長、百人の長、五十人の長、十人の長として、民のかしらに任じた。いつもは彼らが民をさばき、むずかしい事件はモーセのところに持って
来たが、小さい事件は、みな彼ら自身でさばいた。
이렇게 해서 작은 재판은 백성들의 리더로 세운 그들이 재판을 하고, 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재판은 모세에게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약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5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가이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건
같은 경우에는 당시에도 황제가 직접 재판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이와 갈은 시스템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남아 있지요? 바로 삼심제도……즉, 국민은 한 사건에 대해서 적어도 3번,
그러니까 지방법원, 고등법원, 그리고 대법원……이렇게 3번은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의 핵심인 재판을 잘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 11절~13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
v 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求め、自分のために長寿を求めず、自分のために富を求め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をも求め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求めたので、今、わたしはあなたの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の心と判断する心とを与える。あなたの先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かった。また、あなたのあとに、あなたのような者も起こらない。そのうえ、あなたの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とを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の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ひとりもないであろう。
이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받으셨는지, 네가 구한 지혜만이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라운 지혜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소개되어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재판내용입니다.
오늘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두 여인이 솔로몬 앞에 섰습니다. 편의를 위해 이 여인을 A와 B라고 하겠습니다. A가 먼저 왕에게 말합니다. A와 B는 한 집에
사는데, A가 아이를 낳고 3일이 지난 후에 B도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뿐이었습니다. 여자
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두 아들이 태어났으니 가족이 넷이 된 셈입니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A가 아침에 일어나서 젖을 먹이려고 아들을 보았더니, 그 아들이 글쎄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A가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A가 생각하기를, 간밤에 B의 아들이 죽었는데, 죽은
자기 아들을 내 옆에 갖다 놓고, 멀쩡한 내 아들을 자기가 데려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B의 주장은 다릅니다. 아니다. 살아 있는 아들이 내 아들이고, 죽은 아들이 A의 아들이다……이렇게 서로 주장하면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입니다.
아무리 동갑내기 아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컸다면 남들이 봐서도 어느 쪽이 누구 아들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뭐, 갓난아기 얼굴이야 다 비슷비슷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는 알아봐요? 예, 자기 어머니는
알아봅니다.
사실관계로 미루어보아 당시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밀실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은 A와 B,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여기서는 편의상 C와
D라고 하겠습니다. C는 살았고 D는 죽었습니다. 제3자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C와 D는 분명
그들의 아들들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였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구분하기란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A와 B는 어느 쪽이 진정으로 자기 아들인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아들인 C가 A의 아들이거나 B의 아들, 둘 중 하나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유전자검사라도 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더 이상의 물증도 없고 목격자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
엇갈리는 이 두 당사자들의 주장뿐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건이기 때문에 십부장이나 백부장, 천부장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솔로몬 왕한테까지 왔겠지요. 이제 왕이 판결을 내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생뚱 맡게도 솔로몬 왕이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살아있는 아들 C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A에게 주고 하나는 B한테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살아있는 아들 C마저도 죽여서 그 몸을 둘로
나누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이 말을 들은 A의 심정은 오늘 본문에 보니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나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A가 솔로몬 왕에게 간청합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를 차라리 B한테 주시고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한편
B는 솔로몬의 판결을 듣고 그거 참 좋은 판결이다. 내 것이 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A의 것도 되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는 아이를 A에게 주고 절대로 죽이지 말라, A가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라고 판결합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훌륭한 판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내용은 주로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사실관계로 미루어 볼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오늘 본문
중에서 바로 열왕기상 3장 16절입니다.
열왕기상 3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そのころ、ふたりの遊女が王のところに来て、その前に立った。
대단히 짧은 구절입니다만, 이 구절로 알 수 있는 내용을 우선 네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창기였다고 합니다. 즉, 불특정한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극히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집에는 A와 B만 살고 있었고, 각각 C와 D라는 아들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 어디에도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어쩌면 A와 B 그들 자신들조차 그들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을지도 모르는, 그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주변에서 도움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웃사람들로부터 받는 위로나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기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라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들을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렇겠지요. 사회적으로나 지위가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재력가이거나 한다면 너도나도 도와주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남편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친척들도 그들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친구들조차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 한 집에 살았던 A와 B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사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서로에게 있어서 그나마 있었던 단 한 명뿐인 친구조차도,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피로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나마 법적인 제도가 많이 정비되었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 재판을 한다고 하면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변호사 비용만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감당하기에는 큰 돈을 들여야지만 가능한 액수입니다. 예전에 비해
변호사 수가 많이 늘어난 지금도 변호사비용이 만만찮은데 과거에 변호사 수가 적었을 때는 법원문턱이 얼마나 높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오랫동안 <송사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어디 돈만 드나요? 웬만한 민사재판이라면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짧아야 몇 주에서 몇 개월, 자칫하면 몇 년까지도 끌게 되는 것이 바로 재판입니다. 당시
재판 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백 보 양보를 해서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이 모두 무료였다 하더라도 두 여인은 오랜 시간
동안 재판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재판이라고 하는 것을 하게 되면요, 요즘도 그렇습니다. 작성해야 하는 서류들도 많고 신경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판사나 변호사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만나는 담당자들한테 그 때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도 재판을 한 번 하려면 그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앞서 말씀 드렸던 대로 곧바로 솔로몬 앞에 선 것이 아니었겠지요.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왕에게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찾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 아이에 대한 집착, 아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가족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습니다. 이제 유일한 친구였던
A와 B 사이마저도 갈라졌습니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이른바 매춘행위를 하는 경우, 실제 자기가 생활하는 집에 있으면서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는 A와 B는 단순히 친구가 아니라, 서로 동업을 하는, 말하자면
비즈니스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둘 사이가 이미 이렇게 갈라졌습니다. 그러니 비록 부도덕한 일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일을 못하게 되니,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솔로몬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심정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습니다. 돈도 들였고 시간도 들였습니다.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와 같은 희망을 안고 그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A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자신이 비록 경건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조차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은 그들에게, 이제 그 아들마저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B는 어떨까요. 물론 그녀는 살아있는 아들 C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보니 자기 옆에
있던 아이가 죽어 있었고, 자기가 스스로 아이를 바꿔 치기 했으니 누구보다도 살아있는 아들 C가 자기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C가 자신의 친자식이라며 거짓 주장을 했던 이유는, 비록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나, 심정적으로는 A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B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낳은 아들 D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아들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절망 가운데에 있었겠습니까.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아들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솔로몬 왕이 판결을 합니다. 그런데 그 판결 내용을 들어보니 뭐래요? 느닷없이 칼을
가지고 와서 그 살아있는 아이를 죽여서 반 토막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던 친어머니 A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이제껏 오랫동안 재판을 해왔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왕 앞에 믿음을 가지고 섰는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 가지고 거기까지
왔는데, 그 판결이라는 게 자기도 아니고 그 아들을 죽이라는 거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겠습니까.
어쩌면 이와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은 B도 또한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B도 역시 그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을 죽이라는 판결이 나왔으니, 그녀 자신도 그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의 모습이 A와 B에 있어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친어머니 A는 왕에게 간청을 합니다. 왕이여, 제발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산 아이를 B한테 주세요. 차라리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그 여인은 이제 그 아들을 찾는다는
소망 하나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제 그것마저도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B는 이제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 것도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 아이를 죽여버려라. 내 것도 되지
못하는데 남 행복해하는 꼴을 어떻게 보겠냐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판결을 합니다. 그 아이를 A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A가 자신의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분은 “그야 A가 친어머니였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재판이
모두 진실만을 밝힐 수 있다면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A가 B보다 훌륭한 변호사를 고용했어요? 아니요, 외형적인 조건은 둘 다 똑같았습니다.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단순히 정황증거
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가 아들을 차지하고 B가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A와 B의 결정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그 차이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큰 차이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가 하는 점입니다.
A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친아들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일더라도 자신은 그 아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들의 생명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솔로몬이 그 아이를 죽이라고 판결을 하고 맙니다. 그러자 이 친어머니 A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친아들을 되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왔는데, 이제 친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아들을
살릴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B에게 넘겨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시점에서 A에게 있어서 B가 어떤 존재입니까. 과거에는 친구였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인간이 바로 B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그와 같은 자신의 감정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 자기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B는 어땠습니까. B가 살아있는 아이를 원했던 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아이를 바꿔치기 한 당사자인 B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재판에서 만에
하나 아들을 얻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횡재를 하게 되는 일이지만, 아이를 못 얻는다 한다면 이는 말하자면 밑져야 본전인 셈입니다.
B에게 있어서는 살아있는 그 아이가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B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아니라 B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 이상 아이가 살아있건 죽었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서로 원수 사이가 된 A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꼴보기 싫을 테니 아예 그 아이를 죽여버리는 게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A와 B는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서로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차이는, A는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으나, B는 포기할 줄을 몰랐습니다. A는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 그 유일한 길은 그토록 애타게 원했던 나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함으로 인해서 아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포기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A는 내 욕심을 부리고 내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친아들을 잃을 바에야, 내 욕심, 내
주장, 내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내 아들을 살리는 길을 택하겠다는 심정으로 차라리 B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A는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친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 사랑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의 자식 사랑에 있어서인데 자녀 교육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 전에 일본 뉴스를 보니까,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아버지가 패는 바람에 결국 중학생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에요. 어쩌면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아들 잘 되라고 하는 의미에서 팼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게 사랑이라고요? 예, 자신의 욕심과 자존심을 상대방을 위해 포기할 때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부모 자식간 만이 아니라 친구사이에 있어서나, 부부사이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욕심, 자신의 자존심을 다 세우려고 하는 것은 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 A는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B는 어땠습니까. B가 자신의 죽은 아들을 A의 아들과
바꿔치기 한 이유는 A의 아들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자기가 사랑하지 않은
A의 아들이 죽든 말든, 자기의 욕심이나 자존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A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고 B는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 세상 판결은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판결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판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무엇이 중요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35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
v 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v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しかし、いま聞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わたし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の敵を愛しなさい。あなたを憎む者に善を行いなさい。
あなたをのろう者を祝福しなさい。あなたを侮辱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あなたの片方の頬を打つ者には、ほかの頬をも向けなさい。上着を奪い取る者には、下着も拒んではいけません。
すべて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奪い取る者からは取り戻してはいけません。
自分にしてもらいたいと望むとおり、人にもそのようにしなさい。
自分を愛する者を愛し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罪人たちでさえ、自分を愛する者を愛しています。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に良いことをし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罪人たちでさえ、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人に貸してやっ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貸した分を取
り返すつもりなら、罪人たちでさえ、罪人たちに貸しています。
ただ、自分の敵を愛しなさい。彼らによくしてやり、返してもらうことを考えずに貸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受ける報いはすばらしく、あなたがたは、いと高き方の子どもになれます。なぜなら、いと高き方は、恩知らずの悪人にも、あわれみ深いからです。
좀 길지만 이 말씀이 다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내 욕심과 내 자존심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포기하라는 말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내 욕심과 내 자존심만을 세워가면서 할 수
있어요? 정말 치사한 일도 있지만 꾹 참고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게 다 무엇을 위해서예요? 다 내 회사를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이처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내 욕심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남들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인 B처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빼앗으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나 스스로의 욕심과 자존심을
포기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내 것을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누가복음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원수를 사랑해?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내 뺨을 치는
자한테 다른 쪽 뺨도 치라고 돌려대? 내 겉옷을 뺏어가는 사람한테 속옷도 거절하지 말래? 이게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라도 정상처럼
들리는 게 있습니까?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내 욕심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있어서는 그 무엇 하나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 자존심을 버리게 되면, 사람은 빼앗는 게 아니라 주고 싶어집니다.
역시 누가복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も与えられます。人々は量りをよくして、押
しつけ、揺すり入れ、あふれるまでにして、ふところに入れてくれるでしょう。あなたがたは、人を量る量りで、自分も量り返してもらうからです。」
이처럼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우리 모두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고, 무엇을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깨닫고, 우리가 우리 욕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로부터 빠앗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남들을 섬기고 남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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