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회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2017년 6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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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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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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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祝福の門を開く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삼위일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해석을 하시는 분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료가 있다면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요리…라고 해서 무슨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중요한 교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 본체는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


神には、三つの位格があります。御父と、御子と、聖霊です。この三位は、実体が同じで力と栄光において等しい、ひとりの神です。

이해가 되시나요?

자, 먼저 오늘은 이 점부터 명확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몇 분이시죠? 예,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이단들이, 그리고 마귀 사탄들이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서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성부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성자는 예수님이다. 삼위일체란 마치 태양과도 같은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태양의 본체처럼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은 볼 수가 있기 때문에, 태양으로 본다면 마치 빛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눈에는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있는, 마치 열과도 같은 것이다……그러니까 성부 하나님은 태양이고, 성자 하나님은 빛이고 성령 하나님은 열이다……참 그럴 듯한 해설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잘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하나님으로서의 완전한 형체가 태양이라고 한다면, 빛이나 열은 완전한 형체라는 뜻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죠. 빛이나 열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태양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의 일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 되느냐 하면, 이 논리로 본다면, 완전한 하나님의 형체를 태양으로 가정한다고 하면,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 만이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빛이라고 하는 예수님, 열이라고 하는 성령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빛이니까 그럼 대충 50% 하나님, 성령님은 눈에도 안 보이고 느낄 수만 있으니까 그럼 대충 한 20% 하나님이신건가요? 그럼 모두 합해서 170% 하나님이신 거겠네요? 아니면 성부 하나님 33.3%, 성자 하나님 33.3%, 성부 하나님 33.3% 해서 모두 합하면 100%가 되는 하나님이신 건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30%짜리 오렌지 주스 3통을 같이 부으면 90%짜리가 됩니까? 그러면 4통을 같이 부으면 120% 오렌지 주스가 되겠네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그것도 이단도 아닌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목사님들이 당당하게 말씀을 하고 계시니 성도님들이 혼란스러워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성령님 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이신 여호와 하나님도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성령 하나님도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보도록 하지요.

많은 분들이 매일 일기예보를 봅니다. 거기서는 내일 날씨를 알려주죠? 내일 날씨는 어떻고 기온은 어떻고 그러면서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면서 뭘 알려주냐 하면 바로 비가 내릴 확률을 알려줍니다.

이 비가 올 확률이라는 게 무척 대단한 것처럼 들릴지는 모릅니다만, 알고 보면 참 모호합니다. 확률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일 확실히 비가 온다고 하면 확률이 필요 없겠지요.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 전문가인 자기들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확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모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학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발전을 했지만 아직까지는 불완전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십니까. 자, 문제를 내겠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자, 모세가 있습니다. 뒤에서 애굽 군대들이 쫓아 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し、海を分けて、イスラエル人が海の真中のかわいた地を進み行くようにせ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그 손을 들고 바다 위로 내밀어서 갈라지게 하라……그러면 바다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다……

자,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홍해가 갈라질 확률이 몇 프로입니까. 30%요? 50%요? 90%요? 예, 100%입니다. 왜요? 왜 우리가 100%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홍해가 갈라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そのとき、モーセが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退かせ、海を陸地とされた。それで水は分かれた。

지금 제가 내드린 문제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예, 쉽죠. 성경에 다 적혀 있는 그대로를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이처럼 쉬운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약으로 넘어오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5천명이 앉아 있습니다. 주변에는 편의점도 없고 자판기도 없습니다. 다들 배가 고파 합니다. 안드레가 어떤 소년이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신반의로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옵니다. 거기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나갑니다. 거기 있던 5천 명, 사실 5천명이라는 숫자는 성인 남자만 5천명이지 여성과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최소한 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확률은 몇 프로이겠습니까? 30%요? 50%요? 90%요? 예, 100%입니다.

왜요? 왜 우리가 100%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역시 답은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9절~21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そしてイエスは、群衆に命じて草の上にすわらせ、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を取り、天を見上げて、それらを祝福し、パンを裂 いてそれを弟子たちに与えられたので、弟子たちは群衆に配った。人々はみな、食べて満腹した。そして、パン切れの余りを取 り集めると、十二のかごにいっぱいあった。食べた
v者は、女と子どもを除いて、男五千人ほどであった。


다 아는 이야기인데 이걸 문제라고 내냐 하고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간단하게 알아본 두 문제에서 모두 100%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단순히 <결과를 우리가 알 고 있었기 때문에>……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그저 이야기책 수준으로 받아들일 뿐이고, 성경에서 아무런 지혜도 가르침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시면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생각해 낸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확률이 따라다닙니다.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도 확답을 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해하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것은 우리가 100%의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30%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50%나 90%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100%입니다.

성경은 100%를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ものなら、と言うの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され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ふたりは、「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と言った。


이 세상에 100%가 어디 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놀지 않고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100%입니까? 이것을 모두 100%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에는 온통 100%로 넘칩니다. 그 이유는 99%도 아닌 100%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해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 8절~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あなたがたは、恵みのゆえに、信仰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それは、自分自身から出たことではなく、神からの賜物です。 行ない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だれも誇ることのないためです。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래요. 자고로 선물이라는 것은 대가가 없습니다. 그냥 거저 주는 것이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떻게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하지만 죄인인 우리가 이대로는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세요. 그러면 우리가 갈 곳은 한 곳뿐입니다. 그게 어디겠습니까. 예, 지옥입니다. 그리고 멸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해요. 그런데 우리 능력으로는, 우리 노력으로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그토록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완전하신, 100%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보면 주일예배 외에, 축도 대신 예배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걸 무슨 주문외우듯이 하면 안되겠지요. 주기도문을 외울 때에는 그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겨가면서 주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리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문은 어떤 신학자나 선지자 같은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낸 기도문도 아니요,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완전한 기도문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주님께서 알려주신 기도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군데 좀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私たちの負いめをお赦しください。私たちも、私たちに負いめのある人たちを赦しました。

わたしたちに負債のある者をゆるしましたように、わたしたちの負債をもおゆるしください。(口語訳)

이 말씀이 참 묘합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에서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부터 시작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까지 보면 딱 한 군데, 예수님께서 조건을 달아놓으셨습니다.

天にましますわれらの父よ   国とちからと栄えとは、限りなくなんじのものなればなり。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주시면서 그냥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조건들 다셨어요.

왜 이러한 조건을 다셨을까요. 그냥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아까워서요? 억울해서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조건을 다신 이유, 그것은 바로 이 용서야말로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주시고 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또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し人の罪を赦すなら、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います。しかし、人を赦さないなら、あなたがたの父もあなたがたの罪をお赦しになりません。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기도문을 말씀하시자마자 또 하셨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이 외에도 용서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もそれぞれ、心から兄弟を赦さないなら、天のわたしの父も、あなたがたに、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す。」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お互いに親切にし、心の優しい人となり、神がキリストにおいて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互いに赦し合いなさ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는 자들에 대해서까지도 용서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そのとき、イエスはこう言われた。「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彼らは、何をしているのか自分でわからないのです。」彼らは、くじを引いて、イエスの着物 を分けた。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神が御子を世に遣わされたのは、世をさばくためではなく、御子によって世が救われるためである。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 그 때는 분명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심판이 아닌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서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용서 받는 사람과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여기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내 목숨을 다 바쳐서 너를 용서했는데, 너는 네 이웃 하나 용서를 못하겠니?”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만도 한데, 아직 축복을 못 받은 것 같습니까? 여러분, 한 번 우리 마음 속을 되돌아보시기 원합니다. 내가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면, 내 이웃을 용서하면 내가 축복 받을 확률이 몇 프로입니까. 그렇습니다. 100%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회개는 잘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잘 못합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용서인줄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혹시 그 마음 속에 <내가 다른 사람은 용서해도 그 인간만은 용서를 못해>라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축하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당신께서 큰 축복을 받으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바로 지금, 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지금 바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뭘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용서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99%가 아닙니다. 100% 완전하신 주님께서 100% 넘치는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이웃을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축복, 100%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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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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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회 오직 말씀으로
2017년 6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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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14절~21절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이르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또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돈을 쏟아서 감독자들과 일꾼들에게 주었나이다 하고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으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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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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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직 말씀으로”ただ御言葉の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었던 시기, 남쪽 유다 아몬 왕 때에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뒤덮여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역대하 33장 21절~23절
“아몬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アモンは二十二歳 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二年間、王であっ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行なったように、主の目の前に悪を行なっ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造ったすべての刻んだ像にいけにえをささげ、これに仕えた。彼はその父マナセがへりくだったようには、主の前にへりくだらず、かえって、彼アモンは罪過を大きくした。

성경에 보면 그 나라가 문제에 뒤덮이고 혼란이 생기는 시점을 보면 항상 그 원인을 “우상숭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몬 왕 때의 남쪽 유다는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나라가 혼란 속에 빠집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구절을 봅니다.

역대하 33장 24절~25절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백성들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라”

彼の家来たちは彼に謀反を起こし、その宮殿の中で彼を殺した。しかし、民衆はアモン王に謀反を起こした者をみな打ち殺した。民衆はアモンの子ヨシヤを代わりに王とした。

라고 기록합니다. 왕의 신하가 반역해서 왕을 암살했더니, 백성들이 그 반역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인데, 이처럼 짧게 두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만 보아도 당시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아몬 왕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됩니다만, 역대하 34장 1절에 의하면, 그가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 불과 여덟 살이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여덟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되면 왕은 그저 허수아비가 되고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서 주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요시야 왕은 남달랐습니다.

역대하 34장 2절~7절을 잠시 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v제거하여 버리매 무리가 왕 앞에서 바알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왕이 또 그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으며 또
v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제단들을 허물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彼は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なって、先祖ダビデの道に歩み、右にも左にもそれなかった。彼の治世の第八年 に、彼はまだ若かったが、その先祖ダビデの神に求め始め、第十二年 に、ユダとエルサレムをきよめ始めて、高き所、アシェラ像、刻んだ像、および、鋳物(いもの)の像を除いた。人々は彼の面前で、バアルの祭壇を取 りこわした。彼は、その上にあった香(こう)の台を切り倒し、アシェラ像と刻んだ像と鋳物(いもの)の像を打ちこわし、粉々に砕いて、これら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者たちの墓の上にまき散らした。彼は、祭司たちの骨を彼らの祭壇の上で焼いて、ユダとエルサレムをきよめた。彼は、マナセ、エフライム、シメオン、さらにはナフタリの町々でも、至る所で、彼らの剣を用いて同様にした。イスラエルの全地で、祭壇を 取りこわし、アシェラ像と刻んだ像を粉々に砕き、すべての香の台を切り倒してから、彼はエルサレムに帰った。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이라고 하면, 그의 나이 불과 16살 때입니다. 그 때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왕위에 오른 지 이십 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8살 때에 모든 우상을 그것도 아주 완전히 제거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요시야 왕 18년에 여호와의 성전 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 성전에 감추어져 있던 모세의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그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낭독하는데,

오늘 본문 중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王は律法のことばを聞いたとき、自分の衣を裂いた。

당시에 옷을 찢는다는 행위는, 너무나도 놀라고, 가슴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애통해할 때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시야 왕은 모세의 율법책 내용을 듣고 자기 옷을 찢었을까요. 이에 대해 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사반이 읽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극한 슬픔과 공포를 느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율법의 내용을 듣고 요시야는 자신과 백성들의 형편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는 자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행동 양태, 즉 자신의 옷을 찢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율법서 내용을 보니까, 지금 자신들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요시야 왕은 너무나도 큰 놀라움과 슬픔과 공포를 느끼면서 가슴을 치는 심정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16세기 당시 교회의 부패상황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고, 그저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불법과 부패와 죄악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때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로 그 종교혁명 당시 주창된 다섯 가지 표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 주보 표지에도 있는 것처럼 다섯 가지 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솔라……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로 <오직>이라는 뜻인데,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입니다.

종교혁명 당신 등장한 이 표어를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은혜에서 벗어났고, 믿음에서 벗어났고, 주님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집착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문제가 많았지요.

그 중에서 여기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오직 말씀으로’입니다. 라틴어로는 Sola Scriptura……라고 해서 이를 직역하면 <오직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내 상식이나 내 교양이나 내 경험이 아닌, 오직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말씀이 바로 다름 아닌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분명히 과거 16세기 당시, 성경에서 벗어나고 말씀에서 벗어난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개신교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개신교……라고 해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을, 본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상태로 되찾아온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그와 같은 취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리나라의 믿음이 보통 믿음인가요?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은 그새 전국으로 퍼져갔고, 나아가 역사적인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불씨는 지독하고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잿더미 속에서 우리 민족은 신앙을 지켜왔고, 1973년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여의도에서 전도집회를 열 때에는 무려 51만 6천명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성가대만 하더라도 6천 여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급성장을 합니다. 신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시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개발도상국이었으나, 바야흐로 19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교회와 세계적인 목회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영적대부흥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나라 순위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하니, 이 작은 나라에서 그렇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하지만 이제 지금 한국 교회, 또는 한국인 교회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나날이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도 수는 줄어만 갑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교회 건물 매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전도는커녕, 교회 가고 싶어도 교회 다니는 사람 꼴 보기 싫어서 안 간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원인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세 가지 측면을 유의해가면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직접적인 이해, 둘째는 비유적인 이해, 그리고 셋째는 문화적인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냐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것은 비유도 아니고 문화적인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2절~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だれかが百匹の羊を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と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 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そして、もし、いたとなれば、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その人は迷わなかった九十九匹 の羊以上にこの一匹を喜ぶのです。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아니, 생각해보세요. 양 아흔 아홉 마리가 중요해요? 아니면 한 마리가 중요해요? 이건 뭐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흔 아홉 마리가 중요하죠. 하지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버려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직접적인 이해라기보다는 비유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누구에요? 예,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0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
v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するとイエスはこう言われた。「ある人が盛大な宴会を催し、大ぜいの人を招いた。宴会の時刻になったのでしもべをやり、招いておいた人々に、『さあ、おいでください。もうすっかり、用意ができましたから。』と言わせた。ところが、みな同じように断わり始めた。最初の人はこう言った。『畑を買ったので、どうしても見に出か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すみませんが、お断わりさせていただきます。』もうひとりはこう言った。『五くびきの牛を買ったので、それをためしに行くところです。すみませんが、お断わりさせていただきます。』また、別の人はこう言った。『結婚したので、行くことができません。』


우리가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우리 같이 교회에 나가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 이번 주 일요일에는 이런 일이 있다, 저런 일이 있다 하는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는 내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잔치를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한가하신 분이십니까? 2천년 전에 마침 잠깐 시간이 나셔서 이 땅에 오셨나요? 아니지요. 하지만 아무런 핑계도 없이, 아무런 변명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나를 찾으려 오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나를 도우려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와주셨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외 같은 말씀은 직접적인 이해가 아니라 비유적인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문화적인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절~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教会では、妻たちは黙っていなさい。彼らは語ることを許されていません。律法 も言うように、服従しなさい。もし何かを学びたければ、家で自分の夫に尋ねなさい。教会で語ることは、妻にとってはふさわしくないことです。

디모데전서 2장 11절~12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第一テモテへの手紙
女は、静かにして、よく従う心をもって教えを受けなさい。私は、女が教えたり男を支配したりすることを許しません。ただ、静かにしていなさい。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지금도 일부 교단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안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꼭 목사를 안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러면 주일학교 교사도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다면, 그럼 이 분들의 시각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교단은 이단이겠네요?


이와 같은 구절은 그 당시의 문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는요, 이스라엘에서의 여성 인권은 지극히 열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시초라고도 일컬어지는 로마에서도 여성에게는 시민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는 교육의 의무도 권리도 없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여성의 참정권이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불과 100년 정도밖에 안 된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여성들이 교회나 믿음, 그리고 신앙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으니 알래야 알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고 간섭하게 된다면 오히려 혼란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본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예를 들어서 예배나 교회 운영에 대해서 아무런 신학적 지식이 없는 대도 예배는 이렇게 해라, 교회 운영은 저렇게 해라, 설교는 이래라 저래라 하고 간섭을 한다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여성을 차별하게 된다면, 이는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는 이 외에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평신도 때 어떤 권사님한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머리를 좀 기르고 다녔습니다만, 그런 저를 보고, 머리를 깎으래요. 그래서, 그런 말이 성경에 있나요? 라고 농담삼아 말했더니만, 이 분이 정색을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아 글쎄, 성경에 있더라구요?

고린도전서 11장 14절,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自然自体が、あなたがたにこう教えていないでしょうか。男が長い髪をしていたら、それは男として恥ずかしいことであり、

아이고, 그래서 이거 예수님을 믿으면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성경의 조금 앞을 살펴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고린도전서 11장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しかし、女が、祈りや預言をするとき、頭にかぶり物を着けていなかったら、自分の頭をはずかし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髪をそっているのと全く同じことだからです。

이 구절이 있기 때문에 가톨릭 성당에서는 여성분들이 기도를 할 때 이른바 미사포를 머리에 씁니다만, 그렇다면 제게 성경구절을 근거로 머리를 깎으라고 하신 그 권사님은 기도할 때 미사포를 쓰시는지 봤더니, 이 분은 가톨릭이 아니라 기독교 권사님이시거든요. 당연히 아무 것도 쓰지 않으십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것도 역시 당시 문화적인 측면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사회에서 남성의 정장차림이라고 하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뭐겠습니까? 바로 양복, 구두, 넥타이겠지요. 물론 요즘은 여름에 에너지절약 차원에서 넥타이를 안 매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정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넥타이, 양복, 구두입니다.


그와 같은 관행으로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은 당시 문화적으로 정숙한 여인의 차림새로서 예를 갖추라는 것이고, 여인과 같은 겉모습을 멀리하는 의미에서 남성에게는 머리를 깎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입맛에 맞춰서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앞서 본 권사님 말씀처럼 어이없는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좀 마음이 상하실지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앙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분이라면 교회에 들어서서 주보를 펼쳐 들고, 그날 성경말씀이 <말라기 3장 8절>이나 <3장 10절>이라고 하면 벌써 얼굴부터 찌푸립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건 바로 그 구절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マラキ書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ようか。ところ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それは、十分の一と 奉納物によってである。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ほうもつぐら)に携 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ためしてみよ。――万軍の主は仰せら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をためしてみよ。


하지만 이 말씀을 하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해요? “아이구, 저 목사님 또 돈 얘기한다”라고 하지요. 누가 그래요? 예, 바로 저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일조, 그러니까 자신의 수입 중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구약에서만 있었던 거야. 예수님은 그런 말씀 안 하셨어. 누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인가요?

마태복음 23장 23절에는 예수님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이것>이 뭐고 <저것>이 뭐고 그래서 헷갈리시나요? 그러실까봐 공동번역본과 현대인의 성경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공동번역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일조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돈이 좀 필요해서요? 생각해보십시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한테 돈을 내라고 하세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に、あなたの心もあるからです。

이처럼 돈이 필요해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많은 사람만이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수입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10분의 1을 주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목사님들 중에는 이 십일조 말씀을 설교에서 잘 안 하신다고 해요. 왜요? 성도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성도님들의 눈치가 보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부흥회 때 외부 목사님들이 오시면, 그 때 이 말씀하기를 부탁한다고 해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있는 것처럼 해도 죄이지만, 성경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전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한테 마치 벼룩의 간을 빼먹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대로 우리가 축복을 받는 방법을, 축복 받는 비결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좀 민감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 동성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두 사자가 등장합니다. 마침 롯이 그들을 보고 자기 집에 초청을 합니다.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자 일이 벌어집니다.

창세기19장 4절~5절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彼らが床(とこ)につかないうちに、町の者たち、ソドムの人々が、若い者から年寄りまで、すべての人が、町の隅々から来て、その家を取 り囲んだ。そしてロトに向かって叫んで言った。「今夜お前のところにやって来た男たちはどこにいるのか。ここに連れ出せ。彼らをよく知りたいのだ。」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자면,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남자들이 몰려와서 지금 온 두 남자들을 끌어내라, 우리들이 집단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온 단어가 있는데, 영어로 sodomy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동성애 같은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뜻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신약에도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27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神は彼らを恥ずべき情欲に引き渡されました。すなわち、女は自然の用を不自然なものに代え、同じように、男も、女の自然な用を捨てて男どうしで情欲に燃え、男が男と恥ずべきことを行なうようになり、こうしてその誤りに対する当然の報いを自分の身に受けているのです。

이처럼 동성애는 타락의 상징이요, 죄악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에는 어디에도 비유적이거나 문화적인 측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 동성끼리의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고 외친다 한들, 성경에 이처럼 옳지 않다고 적혀 있는데, 제가 많이 부족하기는 하나 그래도 목사라고 하는 제가, 어떻게 성경 말씀을 저버리고 동성애를 옳다고,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동성애자에게 목사 안수까지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동성애자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성애자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품행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품행이 올바르지 않아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범죄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질러야 합니까. 마약 중독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야 합니까. 이처럼 말씀을 왜곡하는 가르침이 이 세상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동성애자를 차별하자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으로 그분들을 보듬고 기도를 해주고, 주님의 말씀과 올바른 믿음을 심어주고,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이 치유 받도록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즘 이 시대에 기독교의 위기는, 교인들이 말씀을 멀리하고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서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몇 가지만 요약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외에도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로 정통 교단이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그것도 교리라고 내세우는 이단들한테 공격을 받고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오직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지키고 따르는, 그리하여 우리 삶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하나도 빠짐 없이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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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17년 6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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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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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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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見えるものと見えない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2007년부터 여기 일본으로 오게 된 2015년까지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성가대에는 교회의 공식적인 주보가 아니라 성가대 내에서 공유하는 주보가 따로 있었습니다.

저도 그 주보를 제작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 성가대 주보 이름이 참 좋았습니다. 이름이 바로 ‘기대’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는 <주보>라고 부르기 보다는 <기대지>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실현에 옮기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힘을 의지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힘을 의지할까요?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힘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첫째는 <자기 자신의 힘>입니다. 다음으로 둘째로는 <다른 사람의 힘>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라고도 합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노력을 해야지, 자기는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어떻게 일이 잘 되기를, 또는 성공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마침내 그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보면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독특하게 해석을 합니다.

잠언 3장 5절 후반부에 보면요, 이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自分の悟りにたよるな。

성경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야곱을 보면,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긴 했습니다. 축복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자신이 열심히 죽어라고 노력해서 따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잔머리를 굴립니다. 꾀를 씁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았지만 결국 그는 그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고백합니다.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바로 왕이 그의 나이를 묻자, 야곱은 힘없이 대답합니다.

창세기 47장 9절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ヤコブはパロに答えた。「私のたどった年月は百三十年です。私の齢の年月はわずかで、ふしあわせで、私の先祖のたどった齢の年月には及びません。」

新共同訳 苦しみ多く

내가 내 조상들에 비하면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코 평탄하지 못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고자 했던 야곱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다른 사람의 힘을 의지해야 하나요? 과거에 김영삼 대통령은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대통령으로 유명했지요. 제 기억으로 미국의 카터 대통령도 조깅을 했었던 것 같았습니다만, 이 김영삼 대통령이 했던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관리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만, 이것을 뒤집어보면, 건강은 못 빌려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머리나, 다른 사람의 능력, 다른 사람의 힘을 의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도 역시 세상적으로 보면 전혀 나쁜 것이 아닌,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본인의 인생도 매우 효율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어떻게 기록할까요.

성경에서 특히 구약을 보면요,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인 방법, 내가 구원 받기 전 과거의 악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넘도록 애굽에 살면서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냅니다.

이제 종살이를 하고 있던 애굽에서 탈출한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 하나님의 민족,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새로운 자주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무슨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人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なべのそばにすわ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私たち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に。事実、あなたがたは、私たちをこの荒野に 連れ出して、この全集団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

민수기 11장 5절~6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たまねぎ、にんにくも。


아니, 하나님이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끝내게 하고 해방시켜주셨는데, 뭐요?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떡을 배불리 먹던 때?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 나?

그게 어디 자기들 겁니까? 노예한테 무슨 자기 것이 있어요? 종살이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그럼 이건 무슨 소리냐 하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종살이하면서 주인 것을 몰래 훔쳐먹은 것이 생각난다는 거예요.

그래요. 큰 집에 살았겠지요. 맛있는 음식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러면 뭘해요. 그건 다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애굽 주인들 것이에요. 그것 뿐인가요? 자기 자신, 종 역시 그 주인 소유입니다. 아무런 자유도 없고 결정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래요?

민수기 14장 3절~4절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私たち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で倒そうとされるのか。私たちの妻子は、さらわれてしまうのに。エジプトに帰ったほうが、私たち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私たちは、ひとりのかしらを 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이렇게 큰 역사를 이루어주셨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다시 그 종살이를 하려고 애굽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이사야 36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おまえは、あのいたんだ葦の杖、エジプトに拠り頼んでいるが、これは、それに寄りかかる者の手を刺し通すだけだ。エジプトの王、パロは、すべて彼に拠り頼 む者たちにそうするのだ。

이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마치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다고 하는 것인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팡이로 쓰기 위해서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야지, 부드러운 갈대로 무슨 지팡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상한 갈대라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 있어요? 갈대가 상하니까 그 줄기가 까칠까칠해져서 오히려 손이 찔린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그렇게 하면 도움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해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시편도 한 번 보겠습니다. 시편 146편 3절~4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君主たちにたよってはならない。救いのない人間の子に。
霊が出て行くと、人はおのれの土に帰り、その日のうちに彼のもろもろの計画は滅びうせる。

이사야 2장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鼻で息をする人間をたよりにするな。そんな者に、何の値うちがあろうか。

여기서의 <인생>이라는 것은요, 다른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의지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무슨 지위가 높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청탁을 하기도 하고, 아부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뇌물을 바치기도 합니다.

자, 어서 받으세요.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람을 의지하다가, 뇌물을 주고 받다가 망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더라도 요즘 신문을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의 힘을 의지한 결과는 실로 처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겠습니까. 하지만 공든 탑이 안 무너지기는커녕, 때로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 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だ。確かに主は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先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地で、長く生きて住む。


시편 56장 4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神にあって、私はみことばを、ほめたたえます。私は神に信頼し、何も恐れません。肉なる者が、私に何をなしえましょう。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데, 세상 사람들이 뭐가 두려울 게 있냐는 고백입니다.

시편 115편 9절~10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이처럼 성경에서는 너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세상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명철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이고, 알아요, 목사님. 내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어디 세상 사는 게 그런가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나 자신도 보이고, 돈 많은 사람, 힘 있는 사람도 내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에요? 그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기대해야 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요? 아니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이요?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こそ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いつまでも続くからで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의지하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はい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はい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여러분,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기대하면 어떻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대하면, 베풀지 못하게 됩니다. 겸손하지 못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부활이나 심판이나 천국이나 지옥이나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약에 부활도 없고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도 없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무>가 되고 아무 것도 안 남게 된다면,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뭐 하러 남한테 베풉니까. 남들보다도 내 자존심이 중요한데 겸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용서요? 용서는 무슨. 복수는 나의 힘! 이것 아니겠어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부활도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하나님의 구원도 없고, 사람이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한다면 이런 건 다 필요 없겠지요.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もし、私たちがこの世にあってキリストに単なる希望を置いているだけなら、私たちは、すべての人の中で一番哀れな者です。

대단히 흥미로운 말이죠? 예수 믿는 많은 분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복을 받으려고 해요. 물론 그건 중요합니다.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질병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요해져야 합니다.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말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가기만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당한 고생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27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v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ユダヤ人から三十九の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あり、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幾度も 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国民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都市の難、荒野の難、海上の難、にせ兄弟の難に会い、労 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れぬ夜を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に凍え、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만약에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그럼 예수 믿고 호강을 했냐 하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강은 무슨 호강……아주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파했는데 죽으니까 아무 것도 없이 사라져? 그렇다면 얼마나 불쌍하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v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そして、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また、別の一つの書物も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人々は、これらの書物に書きしるされているところに従って、自分の行な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海はその
v中にいる死者を出し、死もハデス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そして人々はおのおの自分の行な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それから、死とハデスと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第二の死である。いのちの書に名のしる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この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 끝에는 반드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간단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천국. 없으면 지옥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렇게 어려움을 많이 겪은 바울은, 체포되어서 포송줄로 묶인 상황에서도 확신에 차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パウロはこう答えた。「ことばが少なかろうと、多かろうと、私が神に願うことは、あなたばかりでなく、きょう私の話を聞いている人がみな、この鎖は別として、私のようになってくださることです。」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치 바울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일 것만 같습니다. 내가 많은 고생을 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지금도 이렇게 잡힌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믿음을 갖기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私たちは、この望み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だれでも目で見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さらに望むでしょう。

그렇지요. 보이면 그건 소망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안 보이니까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어려우십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기대하고 소망을 꼭 쥐고서 기다려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そればかりではなく、患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患難が忍耐を生み出し、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 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知っているからです。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우리들의 힘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한, 결국에는 잘 됩니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으로부터 넘치도록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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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
2017년 5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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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2019. 5. 21

창세기 40장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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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내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그는 레아의 여동생 라헬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그녀를 얻는 대가로 그녀의 아버지이자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 그러니까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을 위해 도합 14년 동안이나 무료봉사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라반을 섬겼지만 그의 딸 라헬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짧은 시간처럼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야곱은 모두 네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이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니 야곱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리고 그 두 아이가 하나는 요셉이요 둘째는 베냐민이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무척 사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애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예, 세상에나, 그 형들은 그를 애굽으로 가는 노예상인에게 은 20을 받고 팔아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참 잔인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요셉은 영문도 모른 채 막무가내로 끌려갑니다. 그 때까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매라도 안 맞으면 다행이고, 밥이라도 안 굶으면 다행입니다.
그는 이제 산 설고 물 설고 낯선 애굽 땅에 왔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곳에 무슨 관광객으로 온 것도 아닌,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디발 장군 집으로 넘겨지게 됩니다.
평민도 아닌 장군 집이라고 하니 거기서 일하는 노예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거기서 이제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7살이었을 때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텃세도 있었겠지요. 나이도 어리고 신참인데다가 말도 안 통하는 요셉, 거기에다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정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랐을 텐데, 무슨 힘든 일을 해보기라도 했겠어요? 모든 일이 생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이도 어리고 일도 제대로 못하고 하니, 처음에는 괴롭힘도 당하고 모진 일도 당하고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이제 귀한 집 아들내미가 아닙니다. 그저 일개 종에 불과합니다. 그는 죽지 않으려면 거기서 버텨야 했습니다. 참고 인내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수밖에 그의 살 길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를 데려온 보디발 장군이, 하나님께서 이 나이도 어리고 애굽 말도 못하는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보디발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요 이렇게 티가 나는 법입니다.
이 보디발 장군이 가만히 지켜보니까 무슨 일이든 요셉한테 맡기기만 하면 일이 잘 되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대요?
창세기 39장 4절~5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맨 처음에는 나이도 어린 외국인 노예였습니다만 요셉이 맡아서 일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세요. 그래서 보디발 장군은 이 청년 요셉한테 집안 일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대요? 그 애굽 사람 집에 복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될 단어가 있습니다. 왜 그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나요?
예, 바로 <요셉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한테 만이 아니라 요셉이 속해있던 그 이방인 보디발 장군 집에까지도 복을 내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로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이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이제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습니까? 이제 좀 살아볼 만 하니까,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합니다.
창세기 39장 6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요셉이 이처럼 능력 있고 거기에다가 외모까지 멋지게 생겼다고 하니 음란한 보디발 장군 부인, 이 미세스 보디발이 가만히 못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유혹을 하려고 합니다만, 요셉은 완고하게 거절을 합니다.
창세기 39장 8절~9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렇게 요셉이 유혹이 넘어가지 않으니까 이 보디발 장군 부인, 미세스 보디발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억지를 부려서 그만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말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때 요셉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어떤 실수를 해서, 아니면 소위 재수가 없어서 돈 얼마를 손해 보았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종으로 외국에 팔려간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신 적이 있으십니까?
일반 사람들한테는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 연달아 이 청년 요셉에게 덮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남들도 아니고 자신의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와서는, 힘들고 고달픈 종살이를 하다가 이제 좀 살만 했는데, 주인한테 귀여움도 받아가면서 이제야 좀 팔자가 피나 했는데, 이게 웬 봉변입니까.
정말로 신세 한탄을 해도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옆에서 이 요셉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랬을지도 모르죠.
하이구……그거 참 팔자도 기구하다…형들한테 버림 받고, 주인한테 버림 받고……저걸 보니 분명히 하나님한테도 버림 받은 게 분명해……. 쯧쯧쯧. 이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이처럼 딱한 경우를 겪는 사람이 성경에는 또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욥기 1장 1절~3절에는 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이것 보십시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자식들도 많았고 재산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인품이 완벽한 데다가 재산까지 많았으니 정말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재앙이 닥치기 시작합니다. 종들이 살해 당합니다. 재산을 모두 빼앗깁니다. 자녀들까지 한 명도 남김 없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 자신도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욥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7절~8절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정말 여느 왕이 안 부러울 정도로 부귀를 누리고, 좋은 옷에 좋은 음식에, 큰 집에 화목한 가족들.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었던 가정이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이 뭐라고 합니까.
욥기 2장 9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아내가 보기에도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모든 재산들이 순식간에 날라가고 자녀들도 하루 만에 일곱 명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질병으로 허덕이고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가끔 이런 말 하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러지는 않을 거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어”
욥의 아내도 똑 같은 심정이었겠죠.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었더니만 결국 이 꼴이 나고 말았지 않느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 때에 욥은 어떻게 말합니까. 그래, 여보, 당신 말이 맞네. 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팍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이러나요?
욥기 2장 10절을 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잘 될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는 이처럼 이렇게 위기가 닥쳤을 때 이 위기관리를 어떻게 잘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어떻게 되나요? 욥기 42장에 보면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요셉도 마찬가지이죠. 팔자도 기구하지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닥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요셉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으나, 요셉 만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39장 20절~23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라면 우리가 죄 없이 노예로 팔려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를 믿고 묵묵히 감옥생활을 했었습니다. 언젠가 기회를 주실 것이다. 언젠가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믿음이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습니다. 창세기 40장에 보니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해서 잡혀 들어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라고 하면 무슨 청와대 주방장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이건 그렇지 않고 훨씬 더 정치적이고 실무적인 자리, 말하자면 대단히 벼슬이 높은 자리입니다. 글쎄요. 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청와대 수석 정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지체 높으신 분들이 어떤 잘못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 꿈 내용을 요셉이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대로 풀어보니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좋은 꿈이에요. 이제 3일만에 석방되고 본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이 말을 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0장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이렇게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거죠. 그들이 감옥에 있으면서 아마도 요셉은 자신이 놓인 처지를 설명하지 않았겠어요? 사실 제가 이러이러 해서 애굽까지 팔려오게 됐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러저러하게 되어서 억울하게 감옥에까지 갇혔지만, 난 하나도 잘못한 게 없으니까, 높은 지위로 복직되면 왕한테 말해서 나를 좀 내보내달라……이런 말이었겠지요.
이렇게 말할 시점을 보면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오고 11년이나 지난 시기였습니다. 그 때까지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해본 요셉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정말 작심하고 큰맘 먹고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도 드디어 찬스가 왔다. 할렐루야. 이제서야 나가게 되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꿈을 해석해준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는 일반 죄수들이라면 몰라도, 이 요셉은 죄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모든 관리를 맡고 있었다고 하니, 이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었다는 소식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뭐예요? 예, 이제 소식만 기다리면 됩니다. 이제 술 맡은 관원장이 왕한테 내 억울한 사정을 말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될 거야……하고 밤이고 낮이고 기다렸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안 옵니다.
분명히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됐는데,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놓았는데, 드디어 이제 누명을 벗고 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창세기 40장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기껏 그렇게 부탁을 해놨는데, 내가 그렇게 꿈을 해몽해줬는데, 그리고 그 사람이 갇혀 있을 때 내가 그 사람한테 신경 써서 해준 게 얼만데, 그걸 까먹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아니, 여보쇼.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그렇게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 이거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뭐 이렇게 따지고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똑 같은 죄수 신분이라서 서로 이야기도 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 한쪽은 왕의 비서실장이고, 요셉은 여전히 죄수입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글쎄요. 저 같으면……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봤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그 관원장한테 한번 메모라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그렇잖아요? 뭐 긴 말이 필요하겠어요? <요셉이 궁금해합니다>라고 단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거 아니에요?
하지만 요셉이 그처럼 사람의 방법대로 했다는 이야기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안 나와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감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나갑니다. 하지만 이제 언제 또 다시 그런 기회가 돌아올지 전혀 모를 상황이죠.
그러던 중 드디어 기회가 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바로가 꿈을 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을 누가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최측근인 비서실장인 술 맡은 관원장이 들었겠지요.
그러고보니 아차차차……내 정신 좀 봐. 맞아 맞아. 그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내 꿈을 해몽해준 친구가 하나 있었지? ……라고 비로소 요셉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왕한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1장 9절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라면서 요셉이 해몽을 했는데 그게 딱 맞았더라……라고 왕한테 말씀을 전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술 맡은 관원장이 얼마 만에 요셉을 떠올렸는지 아세요?
창세기 41장 1절 전반부를 봅니다.
“만 이 년 후에……”
그러니까 자신이 석방되고 나서 만 2년이 지나서야 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냈다는 것이지요. 참 너무하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억력이 안 좋은 관원장을 비난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2년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요셉이 감옥에 있으면서 사람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메모를 전달했다고 칩시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뭐 그래도 뇌물을 준다든지 어떻게 해서 성공했다고 칩시다.
이 메모를 본 술 맡은 관원장. 어. 그래 맞아. 내가 깜빡 했었네. 그래. 내가 왕한테 말씀을 드려서 나오게 해줘야지……라고 해서 나왔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제 요셉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유인이 된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죄를 짓지 않았지만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인이 되나요? 아니요. 본래부터 요셉은 노예로 애굽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요셉이 풀려났다고 한들 결국은 노예, 종살이입니다.
글쎄요. 술 맡은 관원장이 특별히 왕에게 말을 해서 풀려났다고 해도 여전히 미세스 보디발이 있는데, 보디발 장군 집으로 가서 예전처럼 일을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특별히 배려를 해서 내가 너를 데리고 있겠다……뭐 이렇게 해서 술 맡은 관원장 집에서 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뭐 그런 인생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렇게 술 맡은 관원장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늙어서 죽었다……라는 요셉의 인생이 그런 식이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요셉의 삶이 그러한 삶이었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아니,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성경 구석에 작게, 그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적혀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에 맡겼습니다. 불평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년 후. 17살에 자신의 고향 가나안 땅에서부터 끌려온 지 13년 만에 그는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됩니까. 예, 바로 왕으로부터 직접 애굽의 총리로 임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임명하는 장면을 한 번 보십시오.
창세기 41장 38절~43절을 봅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총리라고 해서 그냥 말만 총리가 아니에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명실상부한 강대국의 2인자가 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요셉이 그와 같은 강대국의 2인자가 되기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고시에 합격했습니까?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맥을 총동원해서 이루어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자신이 놓인 위치에서 종살이를 하건 억울한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혀있건 간에,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했다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요? 그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바로 왕으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위임 받은 총리 요셉에게 비하겠습니까? 오히려 그가 요셉까지도 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나 문제가 닥쳐왔을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선택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 하나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당장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국 잘 돼봐야 노예로서, 종으로서 신분이 회복될 뿐입니다. 그게 다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참고 인내하고 견뎌야 합니다. 어찌 보면 매우 미련한 방법처럼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어떻습니까.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의지할 것은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리 미련해 보이더라도 십자가의 방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방법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문제가 있으십니까? 여차하면 하나님이고 뭐고, 내 생각대로 해버리고 싶으십니까? 조금만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의 방법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요, 반드시 요셉이 받은 축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설령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어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또한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절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바라는 마음으로,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서 주님의 생각을, 주님의 방법을 사모하면서, 주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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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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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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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예수님을 영접하면
2017년 5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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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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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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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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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면”イエス様を迎え入れれ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데 그 도중에 여리고를 지나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직업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세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으로 본다면 세무공무원을 뜻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의 국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세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하는 세무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국세청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유독 이 세리들에 대해서 나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만 보아도 이 <세리>라는 말과 맨날 같이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죄인>입니다.

마태복음 9장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すると、これを見た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の弟子たちに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の先生は、取税人や罪人といっしょに食事をするのですか。」

마가복음 2장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パリサイ派の律法学者たちは、イエスが罪人や取税人たちといっしょに食事をしておられるのを見て、イエスの弟子たちにこう言った。「なぜ、あの人は取税人 や罪人たちといっしょに食事をするのですか。」


누가복음 5장 30절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すると、パリサイ人やその派の律法学者たちが、イエスの弟子たちに向かって、つぶやい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取税人 や罪人どもといっしょに飲み食いするのですか。」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고는, 이 간섭하기 좋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말을 하죠?

누가복음 19장 7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これを見て、みなは、「あの方は罪人のところに行って客となられた。」と言ってつぶやいた。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도 세금을 걷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에요? 국세청이나 세무서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죄인들인가요? ㅎㅎ

물론 뭐,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좀 줄이려고 하시는데, 그런데도 세금을 꼬박꼬박 거둬가는 걸 보면 미울 수도 있겠지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죠. 월급을 받고 보면 소득세다 무슨 세다 해서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국세청이나 세무서 잘못은 아닙니다. 그건 모두 국회나 정부에서 정하는 것이고, 세무 공무원들은 그대로 집행하는 것일 뿐이니까, 국세청이나 세무서 직원분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는 걸맞지 않다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과거에는 왜 세리들이 이처럼 죄인이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당시의 세금 징수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걷어지는 세금은 모두 로마 정부한테로 갔지요.

이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는데, 당시 로마에서는 매우 간교한 방법을 취합니다. 그것은 첫째, 세리들은 로마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걷도록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는, 그 세리한테 <징수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 징수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세대에 부과하는 세금액을 책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세대에 부과해야 할 세금이 100,000원이었다고 해보죠. 이 금액은 로마 정부에서 할당됩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그 가정으로부터 100,000원을 징수해서 로마 정부에 납부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징수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100,000원이 부과된 가정에 대해 자의적으로 200,000원, 또는 300,000원……이라는 식으로 과징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이 되면 그 세대에서는 그 금액을 내야 되요. 그게 법입니다. 그리고 세리는 어떻게 해요? 로마 정부에는 공식적으로 부과된 100,000원만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취한 이유는 이런 것이겠죠. 우선 로마인이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족인 유대인이 징수를 하게 되면, 다른 민족한테 세금을 낸다는 거부감을 덜 수 있을 것이고, 만약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자기들끼리 해결하라는 식으로 일을 떠넘길 수도 있는 장점이 있겠지요. 그리고 세리들한테 그와 같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징수권> 같은 것을 부여함으로 인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세금을 걷도록 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같은 동족들한테 몇 배나 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뜯어가서 자기들의 배를 채우게 되니까 같은 유대인들끼리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일제 시대 때 앞잡이 노릇을 시킨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리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했던 것은 당시 로마법에 위반해서 죄인이라는 게 아니라, 합법적이긴 하지만 동족인 자신들한테 많은 돈을 뜯어가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삭개오. 이 사람은요, 그냥 세리가 아닙니다. 세리장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라고 소개합니다.

ここには、ザアカイという人がいたが、彼は取税人のかしらで、金持ちであった。

그러니 그 때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거둬들여서 로마 정부에 갖다 바쳤으면 세리장까지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아무리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좋아했을 리가 없겠지요. 아니, 좋아하기는커녕 지극히 증오스러운 존재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때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꽤 높았겠지요. 일제시대 때로 본다면 앞잡이 중에서도 목에 힘 좀 주는 그런 지위였을 것입니다.

자, 그와 같은 인물, 사회적으로는 꽤 지위는 높고 돈도 많았으나 같은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삭개오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 삭개오가 거리를 지날 때 우연히 사람들 무리를 본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날 그 곳을 지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었던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삭개오는 그 사람들 무리 쪽으로 다가갑니다. 왜요? 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한 번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슨 대단한 신앙심이나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힘들겠지요. 그 때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대단히 유명인사셨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나도 어디 한 번 보자……라고 하는 수준의 어쩌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더구나 삭개오는 키가 작았어요. 이제 큰일 났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것을 보니까 이제 예수님이 점점 더 가까이 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볼까 하지만, 사람들이 보니까 그 미운털이 박힌 삭개오에요. 그렇다고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엄연한 지위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뭐 어떻게 했겠어요. 글쎄요. 막 그 사이로 끼어들어오려는 삭개오를 모르는 척 하고 팔꿈치로 밀어버리고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평소 같았으면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뭐 이러면서 따질 법도 합니다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우물쭈물 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지나가버릴 것만 같아요.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오늘 본문 4절을 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それで、イエスを見るために、前方に走り出て、いちじく桑の木に登った。ちょうどイエスがそこを通り過ぎようとし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오늘은 유대인의 옷차림에 대한 특징을 두 가지 들 수 있겠습니다만, 먼저 첫째로, 당시 유대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도저히 뛰거나 하기 매우 불편한 차림입니다. 그래서 특히나 어른 또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웬만해서 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마음이 급합니다. 서둘러야 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아마도 옷자락을 든 채로 뛰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대요? 예, 나무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나무에 올라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는 높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만, 이 삭개오는 자신의 약점, 그러니까 키가 작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무에 오른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만 보면, 그래 뭐 그런가보다……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나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시 생각해보셨나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온다고 하고,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고 한다면, 지금 같았으면 당연히 여러 사람들이 뭐 나무에도 오르고, 지붕 위에도 오르고 그랬을 것 아니에요? 만약에 그랬다면 어쩌면 삭개오는 나무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나무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무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하죠? 왜일까요? 나무에 올라가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유대인의 옷차림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성경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을 봅니다.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あなたは階段で、わたしの祭壇に上っ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裸が、その上にあらわれてはならないから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남성도 지금의 무슨 원피스처럼 통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여성이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나무에 오른다고 하면 그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잘못하면 속옷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나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점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무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어땠을까요. 그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 같은 것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세리장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나 체면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가자 저기쯤에서 예수님이 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가 있는 곳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イエスは、ちょうどそこに来られて、上を見上げて彼に言われた。「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きょうは、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あるから。」

삭개오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왜 놀랐겠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있으니,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님 얼굴도 알 수 있었겠습니다만, 삭개오 조차도 예수님 얼굴을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4절~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もとい)の置かれる前からキリストのうちに選び、御前(みまえ)で聖(きよ)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神は、ただ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たのです。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닌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알고 계시다는 것은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기서 빨리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세요? 오늘 네 집에 가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위해서 삭개오가 한 일은 뭐였습니까. 예, 나무에 올라갔던 일 밖에 없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에 나무에 올라갔다가, 이제 예수님과 아는 사이가 됐고,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이하게 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 5절을 보면요, 참으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치마 같은 옷을 입고 나무 위에 있습니다. 자존심도 체면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 한 번 보겠다는 심정으로 나무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그냥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까 살펴본 대로 5절에 보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

라고 말씀하세요.

나를 갈망하는 너의 그 마음은 내가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어서 내려와서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세심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까.

이제 삭개오는 신이 났습니다. 서둘러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수군수군 대도 삭개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 오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거나, 아니면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 무슨 병을 고쳐달라고 한다거나, 질문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글쎄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앞에 앉혀놓고 “아, 예수님, 제가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나쁜놈 취급 하는데, 저도 처자식이 있잖아요. 다 먹고 살라고 하는 일인데 저를 나무라는 사람들을 좀 혼이라도 내주세요”

뭐 이러면서 넋두리를 했다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만, 삭개오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ところがザアカイは立って、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の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また、だれからでも、私がだまし取 った物は、四倍にして返します。」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시던가요?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막 혼자서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보면 삭개오가 앉지도 않고 서서 말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모습입니까.

그리고 삭개오의 말을 보면요, 율법에서는 도둑질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4절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もし盗んだ物が、牛でも、ろばでも、羊でも、生きたままで彼の手の中にあるのが確かに見つかったなら、それを二倍にして償わなければならない。

도둑질 한 것이 있으면 2배를 배상하라고 되어 있는데, 삭개오는 4배를 배상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 절반을 포기하고, 내가 규정보다도 지나치게 세금을 맥인 것이 있다면 율법보다도 더 많이 배상하겠다……그러니까 이제 뭐예요? 나는 이제부터 규정된 세금만 걷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서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오늘 삭개오를 보면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그 책에 무슨 내용을 더 담을까 생각하면 좋은 책은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여기에 담고 싶은 내용은 많은데, 어떤 걸 뺄까 하고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면 정말로 좋은 책을 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드는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도 갖고 싶다, 저것도 갖고 싶다. 하는 말하자면 뭔가를 갖고 싶다는 삶은요, 이건 좋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것도 나누어 주고 싶고, 우리 이웃을 위해 저것도 함께 나누어 주고 싶고……이렇게 뭐든지 나누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삭개오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나요? 아니요, 욕심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리가 되고, 또 세리장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오히려 남들보다도 욕심이 많으면 많았지 욕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렇게 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준다느니, 남들한테서 속여 빼앗은 것을 네 갑절로 배상 한다느니 했을까요?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人はその宝を見つけると、それを隠しておいて、大喜びで帰り、持ち物を全部売り払って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다 합쳐봐도 그 밭에 감추인 보화보다도 못하니까, 내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삭개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때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영화보다도 더욱 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얻었어요? 예, 바로 예수님을 얻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얻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얻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온 세계와 온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을 얻었는데 지금 돈 몇 푼이 중요해요? 이건 비교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하십니다. 본문 9절~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きょう、救いがこの家に来ました。この人もアブラハムの子なのですから。人の子は、失われた人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던 세리들은 모두가 다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말씀하실 것도 없이 혈통으로는 당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육적인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혈통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29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ユダヤ人もギリシヤ人もなく、奴隷 も自由人もなく、男子も女子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あなたがたはみな、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一つだからです。もし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ものであれば、それ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約束による相続人なのです。

그러니까 유대인이라고 모두가 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요, 아브라함의 축복을 모두 받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함으로 인하여 삭개오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내 것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지요. 구할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구하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하신 예수님이 계신데, 조금 부족하다고, 조금 어렵다고 낙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삭개오가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예수님께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찬양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헌신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 누구누구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きょうは、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あるから。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모셔 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그 때부터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찬양하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 예배하는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때까지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면서 악랄하게 세금을 착취했던 삭개오 보다 우리가 더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못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까지 흘려주셨는데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모습 그대로 기도로, 찬양으로, 헌신으로, 예배로 나아감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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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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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회 떠남과 버림
2017년 5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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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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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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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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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떠남과 버림”離れることと捨てる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한테 복을 주어서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생각해보면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습니다. 그것도 무슨 혈기 넘치는 이팔청춘 젊은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 다섯 살 먹은 사람한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 그 때 일흔 다섯은 지금 일흔 다섯이랑 달라. 그 때 일흔 다섯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다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을 하겠습니다만, 제가 계산을 해본 결과, 요즘 나이로 봐서 대략 마흔 다섯 정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0세 정도에 이삭을 낳았다고 본다면 그리 큰 오차는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좀 현실감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마흔 다섯 살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어떤 자료에 보면 아브라함이 집을 나섰을 때 그의 아버지인 데라는 세상을 떠났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장 26절에 보면,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テラは七十年生きて、アブラムとナホルとハランを生んだ。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창세기 11장 32절에 의하면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の一生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カランで死んだ。

여기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가 75세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그의 아버지 데라는 145세, 이걸 좀 엉성하긴 합니다만,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지금 나이로 대략 86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년이긴 합니다만 당시 아버지는 분명 살아계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이로 환산해서 대략 마흔 다섯 정도 되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요즘 나이로 마흔 다섯 살, 집에는 여든 여섯이 되는 아버님이 계세요. 부모님이 연로하면 자식이 부양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더했겠지요.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사회에서 40대 중반이라고 한다면 어떤 존재일까요. 회사에서는 중견사원이겠지요? 관리직이긴 합니다만, 실무진과 함께 실질적으로 회사를 견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을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그 나라의 핵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떨까요? 가족을 부모님을 부양하면서, 이제 안정된 수입과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안락한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기, 또는 절정기를 준비하는 바로 직전인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거기서 떠나라! 거기서 나와라! 내가 인도하는 새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그 때까지 쌓아 놓은 실적이나 경력, 배경, 이 모든 것을 단숨에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몇 십 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주저하고 망설였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지금 당장 집을 떠나라는 것일까요? 가출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중에서 창세기 12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その後、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단순히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고향을 떠나고 너희 친척을 떠나고, 그리고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만, 그 전에 잠시 화제를 바꿔볼까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고등학문을 익힌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약에서는 모세를 꼽을 수 있겠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부터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고, 왕족으로서의 최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바울은 지금으로 한다면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말하자면 앞날이 보장된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당시 유대 총독인 베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당당히 전파했을 때, 유대 총독 베스도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が大声で、「気が狂っているぞ。パウロ。博学があなたの気を狂わせている。」と言った。
당시 유대 총독은 로마의 고위 관료입니다. 그런 유대 총독이 예수님을 전파하는 바울을 보고,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할 정도로, 다시 말해서 로마 고위 관료도 인정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두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40년간 왕궁에서 자라면서 모세 장군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많이 벌였고 공도 많이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와 같은 눈부신 성과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오직 사도행전 7장 22절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モーセはエジプト人のあらゆる学問を教え込まれ、ことばにもわざにも力がありました。

라고 기록될 뿐입니다.

그리고 40세 때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는 도망 나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는 동안에 대해서도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22절까지 달랑 여덟 절에 걸쳐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내용은 부인과 결혼해서 아들 낳고 살았다……이게 전부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길리기아의 다소 출생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바리새파 사람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그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공부했고 어떻게 엘리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어느 시점부터는 성경에서 마치 일거수일투족까지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입니까. 예,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동안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을 떠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성경은 모세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어떨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앞날이 창창했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고백을 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むな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のとりこにもならぬよう、注意しなさい。そのようなものは、人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であり、この世に属する幼稚な教えによるものであって、キリスト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을 통 털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 그리고 초등학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등학문과 사람의 전통을 따르지 말라고 하지요. 그 대신 누구를 따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말을 만약에 공부를 안 해본 사람이 했다면, 에이, 공부도 안 해본 게 뭘 안다고 그러느냐. 뭐 그럴 거 아니에요? 하지만 바울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많은 학문을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전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문화적인 전통이요, 두 번째는 신앙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적인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반신앙적인, 즉 신앙에 위배되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을 보면 정초에 신사참배를 합니다. 그리고 또 정초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신사에 가면 습관적으로 동전을 던져 넣고 딸랑딸랑 종을 흔든 다음에 참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을 무슨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전통문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무섭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무슨 종교의식이라고 여긴다면 그 생각을 바꾸기는 오히려 쉽겠습니다만, 아니다, 종교가 아니라 그냥 오랜 역사 속에서 자라온 우리의 문화다……이렇게 여기면서 습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정말로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골치 아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적인 전통문화입니다. 예컨대 본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가지입니다만, 여기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이것저것 다 갖다 붙인 결과 율법의 종류가 2134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점점 종교 지도자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악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律法の専門家たちも忌まわしいものだ。あなたがたは、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 に指一本もさわろうとはしない。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에 마틴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킬 때의 당시에는요, 정말 교회에서는 지금 보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당시 유럽 교회에서 사용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교인들은 라틴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종교인들은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했고, 찬양도 라틴어로만 해왔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뭐예요? 그냥 명 하니 앉아 있다가, 성찬식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예배가 됩니까. 그래서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키면서 처음 한 일이 뭐냐 하면, 카톨릭이 이래서는 안 된다면서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입니다. 그리고는 이 마틴 루터는 독일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모두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예, 프로테스턴트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항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저항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만들어낸 낡아빠진 전통에 대한 저항, 사람들이 만들어낸 권위주위에 대한 저항,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특히 한국 기독교를 보면, 저항정신이요? 저항정신은 무슨요, 오히려 과거 가톨릭이 보여주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요, 권력지향적이요, 불의와 부당함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권위주의에 대한 것을 잠시 보도록 합니다. 어느 목사님들 보면 예배 때 가운을 입으세요. 저도 성찬식 때에는 가운을 입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찬식을 치를 때에 경건함을 더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무슨 성경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그래요. 설교하실 때 가운을 입으시는 것? 저는 성가대 활동을 7~8년 정도 했습니다만, 성가대도 가운을 입죠? 그게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왔든, 적어도 예배 시간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뜻으로 가운을 입는 것,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이 앞에서 설교하실 때 가운을 입으시는 것,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도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소매에 줄 세 개 있는 가운을 입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예, 이른바 학위가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줄 세 개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학위가운을 입고 설교하시는 목사님들 보면 다들 그 줄 세 개짜리 학위가운, 그러니까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계십니다.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대학에서 얼마나 훌륭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지는 모릅니다만, 그게 과연 주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지 심히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예배 시간에는 누구를 찬양하고 누구를 경배해야 하겠습니까. 예, 찬양 받으실 분, 경배 받으실 분,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박사학위 받았어. 이것 봐. 멋있지? 대단하지? 라고 한다면 이건 예배 때 누구를 자랑하고 누구를 내세우고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제가 뭐, 대학원도 못 나왔고, 목사 안수도 작은 교단에서 받았기 때문에 무슨 배가 아파서, 샘이 나서, 부러워서 그런다고 할지 모릅니다만, 여러분, 냉정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よって、世界は私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私も世界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어디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아예 가운에 그 학교 마크를 새겨서 한다거나, 아니면 그 학교 마크가 달린 졸업식 가운을 사서 입고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목사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성도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 직분이 뭐냐, 장로냐, 권사냐, 집사냐……너 이 교회 언제부터 다녔냐……심한 경우에는 교인 번호가 몇 번이냐……또 뭐,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방언을 받았느냐…… 이런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지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 정말로 과장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김동호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한 번 맞아도 크게 맞아야 할 만 큼 타락했다. 만에 하나 이 땅에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라고 말할 용기도 없고 말할 양심도 없다”

정말 이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제 아까 화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떠나지 못하고 있나요? 예, 우리의 고향과 우리의 친척과 우리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떠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출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과거의 전통,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 신앙을 방해하는 모든 전통이나 관습이나 관행에서 떠나야만 합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안락함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떠나야 해요? 예, 미련 없이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v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しかし、私にとって得であったこのようなものをみな、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損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いっさいのこと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のものを捨てて、それらをちりあく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私には、キリストを得、また、キリストの中にある者と認められ、 律法による
v自分の義ではなくて、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望みがあるからです。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배설물처럼 미련을 갖지 않고 모두 버려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이나 경험이나 전통이나 관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내가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지식이나 전통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 어떻게 해야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였나요? 농담 삼아 이런 말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어떤 애한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저건 저렇게 한 번 해봐……이렇게 조언을 하면, 상대방이 이렇게 말합니다.

“냅둬. 이렇게 살다 죽을래.”

요즘은 별로 안 쓰는 것 같습니다만 어떠세요?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이건 물론 농담으로 하는 유행어이지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지금 믿음에 만족하시나요? 주일 되면 대충 예배 드리고, 헌금도 대충 하고, 뭐 그 정도면 된 거 아냐?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る。あなたの若さは、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는데, 언제까지 병아리 믿음을 가지고 병아리 신앙생활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그렇게 시시하게 시작해서 시시하게 끝날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시시하게 살다가 시시하게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얽매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날아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도전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지금까지 해본 것.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하는 것은 결코 도전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안 해본 것을 과감하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또 누구는 이런 말을 할지 모릅니다. 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대……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수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헤엄쳐서 오끼나와까지 가보겠대요. 예, 그럼 죽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님을 위한 도전을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은 이것이겠지요.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전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 누구한테 같이 교회 가보자고 해보거나, 아니면 해본 적이 있어도 거절 당했어. 그렇다면 뭐예요? 예,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 번 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く。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あけるなら、わたしは、彼のところにはい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두드리세요? 노크하실 때 딱 한 번 딱 두드리고 마시나요? 아니겠죠. 보통 서너 번은 두드립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다는데 우리도 서너 번은 해봅시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분들한테 하면 그건 좀 예의가 아니죠. 아직 안 믿고 있는 분들한테 한 번 권해보세요.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데 너무나 좋다. 우리 같이 가보자. 그러면 누가 그 마음을 알아주세요? 예. 바로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우리가 도전해 볼 것이 전도밖에 없나요? 아니요. 봉사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찾아보면요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안 해보셨나요?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를 한 적이 없으세요? 그렇다면 매일 하루 10분, 아니, 5분이라도 좋습니다. 바로 시작해보세요. 그것도 얼마나 믿음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도전인지 모릅니다.

집에서 성경을 읽어보지 않으셨어요?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시작해보십시오. 그리고 읽는 것은 많이 해봤다고 하시는 고수분들은요, 필사를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정말이지 성경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에게……별 것 아니네……혹시 그렇게 생각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도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극적으로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요? 예, 날아오릅시다.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주신다고 하는데 언제까지 시시하게 병아리처럼 지내시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지금까지 허무하게 살아왔나요? 그냥 그럭저럭인 인생,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듯한 삶을 살아오셨나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봅시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바로 그 때부터 우리 인생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에서 떠나고, 모든 것을 버려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독수리처럼 드높이 날아올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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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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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섬김의 의미
2017년 5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44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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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섬김의 의미”仕えるという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한국은 대통령 선거 때문에 이에 대한 열기가 대단합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없는데도 그 열기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니, 한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정말 만나는 사람마다 선거 이야기, 무슨 말만 나왔다 하면 선거 이야기, TV를 틀면 선거 이야기…어디 그것 뿐이겠어요? 거리에 나가면 여기저기에 선거 포스터가 붙여있을 것이고, 사방에서 유세차량, 선거운동 차량이 오가고 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선되면 이것을 이렇게 하겠다. 저것을 저렇게 하겠다…….
그렇게 열심히 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 바로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그 분들한테 물으면, 아~ 무슨 지금 한국에서는 이러이러한 문제들이 있고, 저러저러한 문제들이 있는데, 내가 당선이 되면 이것을 이렇게 하고 저것을 저렇게 하고……이런 멋진 말씀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말합니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 국민을 최고로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닙니다.

성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보면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番偉大な者は、あなたがたに仕える人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44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目には目で、歯には歯で。』と言われ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 頬を打つような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 もやりなさい。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けと強いるような者とは、いっしょに二ミリオン
行きなさい。求める者には与え、借りようとする者は断わ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自分の隣人 を愛し、自分の敵を憎め。』と言われ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기는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얼핏 보기에는 각각 서로 다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결국은 한 가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39절 말씀부터 볼까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目には目で、歯には歯で。』と言われ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 頬を打つような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이 38절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23절~25절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しかし、殺傷事故があれば、いのちにはいのちを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目には目。歯には歯。手には手。足には足。やけどにはやけど。傷には傷。打ち傷には打ち傷。

라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을 가끔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에서는 내가 당했으면 반드시 복수를 하라……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시는 분이 계신데, 이건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国の人々を恨んで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쪽에서는 복수를 하라고 했다가, 다른 쪽에서는 하지 말라고 했다가 그러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배상책임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손이나 발에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 나한테 100만원어치 피해를 주었다고 하면, 그 사람한테 100만원까지만 피해를 청구해야지, 그 이상으로 청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세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악한 자, 그러니까 나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대적해서 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요? 누구 좋으라구요? 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봅니다.


잠언 22장 23절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主が彼らの訴えを弁護し、彼らを奪う者のいのちを奪うからだ。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人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任せなさい。それは、こう書いてあ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することである。わたしが報いをする、と主は言われ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예요? 니가 힘들게 원수 갚을 필요가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걱정 하지 마…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리고 39절 후반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ような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여기서는 단순히 뺨을 때린다는 것만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분명히 오른편 뺨을 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욕적인 공격입니다. 보통 오른손잡이인 경우에는 상대방의 왼쪽 뺨을 때리기가 쉽겠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오른쪽 뺨을 친다고 기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오른손잡이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상대방을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가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는 공격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상대방에게 보다 큰 심리적인 모욕감을 안겨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점은, 공격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오른손잡이가 상대방의 왼쪽 뺨을 가격했다고 한다면, 물론 손바닥으로 때릴 수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먹으로도 때릴 수 있잖아요? 그럼 정말 아프겠죠? 잘못하면 턱이 돌아가거나 어금니가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손등으로 아무리 세게 때려봤자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큼 세게 때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만약에 누가 나를 주먹으로 치려고 한다거나 몽둥이로 때리려고 해요. 아니면, 좀 무서운 말이지만, 총으로 쏘려고 해요. 그럴 때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되요? 아이, 당장 도망치거나 피하거나 해야죠.
하지만 여기서는 육체적인 통증은 별거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만약에 상대방이 나한테 심한 모욕적인 행동을 할 때, 곧바로 맞대응을 해서 똑같이 굴지 말고, 나는 그 정도 가지고는 끄떡 없어. 그래, 그 정도로 니 직성이 풀린다면 자, 이 쪽도 한 번 더 쳐봐……라고 담대하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5장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やりなさい。

이 말을 또 잘못 이해를 하면요, 아니, 누가 달라고 하면 다 줘야 하는 겁니까. 만약에 누가 나한테 내가 타고 있는 차를 달라고 하면 차도 줘야 하고, 집을 달라고 하면 집도 줘야 하는 겁니까……. 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문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해석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오히려 단순하게 <겉옷>과 <속옷>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나를 고발까지 해가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속옷>을 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세상이 좀 이상해져서 여성의 속옷을 훔치고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당연히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그리 값어치가 없는, 말하자면 뭐 제가 입고 있는 러닝 같은 게 값어치가 있겠어요? 하지만 소송이다 고발이다 해가면서까지 이걸 내놓으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 가져가라.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속옷보다 조금 더 값어치가 있는 겉옷도, 옛다 가져가라……. 이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수 백만 원 수 천만 원 하는 것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것이라면 차라리 줘버리고, 오히려 큰 분쟁을 키우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 41절이죠?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けと強いるような者とは、いっしょ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여기서 억지로 가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킨다는 것이지요. 나는 그 일을 하기 싫은데, 누군가가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거절하지 말고 다 하라는 게 아닙니다. 100리 200리를 가라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5리라고 하는 것을 원어에 의하면 1000발자국. 그러니까 1~2킬로 정도? 그 정도 되는 일을 강제로 시킨다고 한다면, 그리고 자칫하면 그 일로 분쟁까지 일어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냥 선심 쓴다고 생각하고 4~5킬로 정도까지 더 가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借りようとする者は断わ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이는 지금까지 문맥으로 봤을 때 큰 돈을 꿔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한테 없는 돈을 꿔달라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풀어서 말씀 드리면, 나한테는 그다지 큰 돈도 아니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정도의 돈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 돈을 누가 간절하게 필요로 할 때에는 거절하지 말고 그냥 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3절을 볼까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씀이 구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답을 말씀 드립니다. 앞서 살펴본 구절을 다시 한번 볼까요?


레위기 19장 18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国の人々を恨んで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이처럼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습니다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이미 성경을 왜곡해서, 있지도 않은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되어 있지, 미워하라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제 좀 눈치를 채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모욕을 주었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고 열 받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뭐 어째고 어째? 라고 하고 싶은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그걸 그냥 넘기라는 것입니다.
돈이나 일이나, 나한테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조금 도와 달라면, 너무 야박하게 거절하지 말고 기왕 도와주는 것 조금 더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원수가 잘 되는 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는 내가 갚겠다. 그러니까 사람을 미워하는 죄를 짓지 말고, 차라리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고 한다면, 오늘 이 말씀에는요 큰 돈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대단한 육체적인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하죠? 예,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참기 힘드십니까?

저는 글쎄요. 아무래도 이 모욕적인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누가 나한테 심한 모욕을 주었어요. 아니면 심한 창피를 주게 했어요. 그런데 그걸 가만히 넘기는 것. 글쎄요. 그게 과연 쉬울까요? 어렵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더욱 어려운 것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
V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道を行く人々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て、言った。「神殿を打ちこわ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十字架から降りて 来い。」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長老たちといっしょになって、イエスをあざけって言った。「彼は他人を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イスラエル
の王さまなら、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か。そうしたら、われわれは信じるから。彼は神により頼 んでいる。もし神のお気に入りなら、いま救っていただくがいい。『わたしは神の子だ。』と言っているのだから。」イエスといっしょ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強盗どもも、同じようにイエスをののしった。

마가복음 15장 19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また、葦の棒でイエスの頭をたたいたり、つばきをかけたり、ひざまずいて拝んだりしていた。


참으로 온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욕을 참으셨는데 우리가 참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예수님의 자존심보다도 큰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 전 일본의 어떤 장관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한 기자가 질문을 한 것을 가지고 성질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의 질문하는 방식도 좀 사람을 긁는 듯한 태도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장관이 기자한테 말하기를, 당장 여기서 나가라, 다시는 오지 말아라, 시끄럽다……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국 몇 시간 뒤에 기자들 앞에서 사과를 했습니다만, 이 일을 두고 어떤 분이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기자들한테 말을 할 때에는 눈앞에 있는 기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시청자들, 국민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 정말 때로는 얄밉고 치사하게 보이는 그 이웃 너머에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대통령선거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정치인들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치인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거운동 기간 중에 그 후보들이 국민들을 만나고, 악수하고, 목청껏 외치고, 때로는 자존심도 뭐도 다 버리고 고개를 숙이고, 또 큰 절까지 하면서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국민을 그처럼 존경해서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정말로 국민의 머슴으로서 국민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요? 에이, 솔직해져야죠.

현재 한국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특권들이 있을까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장난이 아니더군요. 지금이 무슨 사회 수업도 아니니까 간략하게 정리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되면, 현재 대통령 연봉은 대략 1억 8천만원 정도, 월급으로는 155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더라도 매달 월급의 95%에 해당하는 1000여만원을 받습니다. 여기에 교통 통신비 면목으로 지원되는 1700만원을 더하면 모두 2788만원을 받는 셈입니다. 또한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이 사망하면 배우자가 보수의 70%를 받게 됩니다.
여기에 전속 의료진과 요리사가 붙고, 그것만이 아니라 전속 스타일팀이 붙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경호팀이 붙게 되는데, 이는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당선된 순간부터 경호를 받게 됩니다. 이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특별경호를 받게 된다고 하네요. 대통령 차량은 당연히 최고급 특수차량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대통령 전용기는 보잉 747, 여기에 전용헬기와 전용 KTX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63만 국군 통수권자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대통령은 공무원 임명권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쥐고 있는 공무원 임명권은 직접적인 것만 하더라도 1500개, 간접적으로는 2만여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대통령 한 번 해보고 싶어지지 않으세요? 이렇게 한 번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적어도 5년 동안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이 대통령 한 번 해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당연히 국민의 세금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하면, 이는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이 대통령을 섬기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을 상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존심도 버리고 안간 힘을 쓰는 것입니다. 지금 그 순간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당선만 되면 모든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장차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상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작은 노력을 아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2장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勝利を得る者、また最後までわたしのわざを守る者には、諸国の民を支配する権威を与えよう。

요한계시록 22장 3절~5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もはや、のろわれるものは何もない。神と小羊との御座 が都の中にあって、そのしもべたちは神に仕え、神の御顔を仰ぎ見る。また、彼らの額には神の名がついている。もはや夜がない。神である主が彼らを照らされるので、彼らにはともしびの光も太陽の光もいらない。彼らは永遠に王である。

우리가 받을 상은 5년짜리 임금님 놀이가 아닙니다.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그깟 알량한 자존심 팔아서, 우리의 작은 노력을 팔아서, 우리의 인내심 하나 팔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수 있다면, 이건 정말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이웃을 섬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릅니다만 여기에 따라오는 상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섬기고, 우리 이웃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함으로 섬김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질 크나큰 상을 놓치지 않고 모두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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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무엇을 보십니까
2017년 4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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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1절~12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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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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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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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무엇을 보십니까”何を見ていますか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뭐가 보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가 보인다고 해요. 그러자 이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말씁하십니다.

오늘 본문 12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すると主は私に仰せられた。「よく見たものだ。わたしのことばを実現しようと、わたしは見張っているから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몇몇 주석서를 찾아보니 살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살구라기보다는 아몬드나 밤 같은 견과류를 뜻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신 이유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의견으로는, 이 아몬드나무가 겨울에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신속하게 성취된다는 의미라고도 하고, 존 칼빈은 '살구나무 가지'를 '파수꾼의 막대기'로 해석하면서 선지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파수꾼처럼 지켜볼 것이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고요, 또한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전달한 심판의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깨어서 지켜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글쎄요. 제가 좀 공부부족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자료를 보니까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살구나무’의 발음입니다. 제가 발음이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어로 살구나무는 ‘shaqed’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발음인, ‘shoqed’가 바로 <계속 지키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를 보여주시면서 뭐가 보이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샤케드>가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래 내 말을 <쇼케드>해서 그대로 이룰 것이다……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를 보여주시면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일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ロトがアブラムと別れて後、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さあ、目を上げて、あなたがいる所から北と南、東と西を見渡しなさい。わたしは、あなたが見渡しているこの 地全部を、永久にあなたとあなたの子孫とに与えよう。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わたしは確かに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数多く増し加えよう。そしてあなたの子孫は、その敵の門を勝ち取るであろう。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그냥 무슨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누구나가 볼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봅니다. 열왕기상 18장 41절~46절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v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v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それから、エリヤはアハブに言った。「上って行って飲み食いしなさい。激しい大雨の音がするから。」そこで、アハブは飲み食いするために上って行った。エリヤはカルメル山の頂上に登り、地にひざまずいて自分の顔をひざの間にうずめた。それから、彼は若い者に言った。「さあ、上って行って、海のほうを見てくれ。」若い者は上って、見て 来て、「何もありません。」と言った。すると、エリヤが言った。「七たび
vくり返しなさい。」七度目 に彼は、「あれ。人の手のひらほどの小さな雲が海から上っています。」と言った。それでエリヤは言った。「上って行って、アハブに言いなさい。『大雨に閉じ込められないうちに、車を整えて下って行きなさい。』」しばらくすると、空は濃い雲と風で暗くなり、やがて激しい大雨となった。アハブは車に乗って
vイズレエルへ行った。主の手がエリヤの上に下ったので、彼は腰をからげてイズレエルの入口までアハブの前を走って行った。

오랫동안 가뭄이 이어진 가운데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사환에게 말하기를 바다쪽으로 가서 뭔가 보이는지 가보라고 시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아무것도 안 보인대요. 그러자 또 기도해보고, 얘 어서 가봐. 그랬더니 역시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번까지 다시 가보라고 시켰대요? 예, 일곱 번씩이나 다시 가보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어에 보면 <손 만한>이라기보다는 <손바닥만한>이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요만한 구름이 하나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해요? 아합 왕에게 하는 말이 <비가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치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합니다. 아니, 비가 지금 오고 있지도 않아요. 당시 가뭄은 그냥 가뭄이 아닙니다.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거대한 시커먼 비구름도 아닌, 그저 손바닥만한 구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그 구름을 보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열왕기상 18장 45절에는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しばらくすると、空は濃い雲と風で暗くなり、やがて激しい大雨となった。

이것이 바로 놀라운 믿음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예, 정말로 그 땅을 주셨습니다. 엘리야는요? 예, 그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믿은 믿음이 실제로 크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간혹 살다가 보면, 우리는 분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안 볼 때, 못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パロのもとに遣わそう。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人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せ。」

모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끈질기게 설득을 하시지요. 어쩌면 모세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내가 혼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온단 말이야? 그러면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대단한 군대를 붙여주시거나 하는 걸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예요?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の手にあるそれ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그리고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な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게 무슨 말씀이에요? 당시 최강의 선진국인 애굽에 사로잡혀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200만명이라고 추산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는데, 뭔가 새로운 무기를 주신 것도 아니요, 막강한 군대를 붙여주신 것도 아니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 나무막대기로 이적을 행해서 구출해내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참 답답하십니다. 이걸로 제가 어떻게 가요. 저는 말주변도 없어서 저는 안 돼요. 다른 사람을 보내주세요.

이렇게 말하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출애굽기 4장 14절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すると、主の怒りがモーセ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こう仰せられた。「あなたの兄、レビ人アロンが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は彼がよく話すことを知っている。今、彼はあなたに会いに出て 来ている。あなたに会えば、心から喜ぼう。

하나님이 이제 화를 내십니다. 야, 그럼 니 형 아론 있잖아? 아론이랑 가!

이 말씀을 들으면 모세가 그 순간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랬겠습니까? 당시 모세와 모세 형인 아론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세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パロ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세상에……아니, 지금 하나님은 팔십 먹은 노인네 모세한테 하시는 말씀이, 너 혼자 애굽에 가서 왕하고 단판을 짓고, 사로잡혀 있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요, 여기 군마에 있는 한 팔십 먹은 할아버지한테, 지금 당장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어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가지고는 그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200만명을 데리고 나오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게 정상이겠어요?

그래, 좋아요. 백 보 양보해서 그런다고 칩시다. 그런데 기껏 붙여주신다는 게, 팔팔한 젊은이 수 천 명을 붙여주셔도 모자란 판에,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팔십 삼세 노인네를 붙여주세요?

참 그래도 모세는 믿음이 좋습니다. 저 같으면, 하이고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나는 이제 기운도 없고, 돈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런데, 차라리 제가 미우시다면 여기서 곱게 그냥 죽으라고나 하시지 나무 지팡이 하나 짚고 노인네 둘이 애굽에 가서 뭘 어쩌라고 하시는 것입니까……이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제가 이상해요?

이 모세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답답해 했던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출애굽기 3장 12절 전반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神は仰せられた。「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

생각해보십시오. 최신무기가 없으면 어떻고 천군만마가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見よ。わたしは、すべての肉なる者の神、主である。わたしにとってできないことが一つでもあろうか。」


만군의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결국 모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가진 것이라고는 나무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팔십 먹는 노인네와, 그것도 모자라서 3살이나 더 먹은 팔십 삼세 먹은 두 노인네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요? 아니요, 세상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을 때, 그 볼품없는 두 노인네 둘이서 무엇을 해내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 200만명을 탈출시키고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했을 뿐만 아니라 40년간에 걸쳐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었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점령할만한 크나큰 용사로 성장시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무슨 그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동상을 세워놓고 거기에 절하고 내 소원을 비는, 그와 같은 허망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는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지팡이와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라보는 것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성도님이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세탁소>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샌드위치> 가게를 해야 할지를 놓고 망설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했대요. 그랬더니 기도하는 가운데 영어 C자가 보이는 것 같더라는 거예요. 세탁소를 영어로 하면 클리닝…이라고 해서 C이고, 샌드위치는 S거든요. 그래서, 아하, 이건 하나님께서 세탁소를 하라는 응답인가 보구나 하고 세탁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겠어요? 예, 영 제대로 사업이 안 되더래요. 그래서 거기 목사님한테 와서 상담을 했답니다.

목사님…아무래도 제가 기도할 때 보였던 글자가 C가 아니라 그 밑이 조금 꼬부라진 S였나봐요……했다는 거예요.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든지 아니면 밤에 잠을 잘 때든지 하면 가끔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을 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믿음 안에서 모두 믿어야 하는 것인가요? 어떤 때는 누가 또 꿈을 해석해주는 무슨 해몽 같은 것을 해주기도 하고, 또 그것을 믿기도 하는 분도 더러는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걸 왜 믿느냐고 하면, 아니,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어요. 창세기 40장에 보면 요셉이 함께 갇혀 있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다음 41장에 보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애굽의 총리 자리에 앉게 됩니다.

다니엘 2장에서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꾼 꿈이 어떤 것인지 말을 하기도 전에 꿈의 내용까지도 왕에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다니엘 2장 48절에 보면,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そこで王は、ダニエルを高い位につけ、彼に多くのすばらしい贈り物を与えて、彼にバビロン全州を治めさせ、また、バビロンのすべての知者たちをつかさどる長官とした。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꿈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요, 모든 환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서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29장 8절~9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仰せら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あなたがたが夢 を見させている、あなたがたの夢見 る者の言うことを聞くな。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のであって、わたしが彼らを遣わしたのではないからだ。―主の御告げ。―」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조건 꿈을 꿨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다 계시다 하고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가장한 종교들이 판을 치고, 선지자를 가장한 사이비 교주들이 있는 곳은 비단 요즘만이 아닙니다. 이 예레미야 시대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4장 14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主は私に仰せられた。「あの預言者たち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している。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たこともなく、彼らに命じたこともなく、語ったこともない。彼らは、偽りの幻と、むなしい占いと、自分の心の偽りごと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のだ。

예레미야 23장 32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見よ。わたしは偽りの夢 を預言する者たちの敵となる。―主の御告げ。―彼らは、偽りと自慢話をわたしの民に述べて惑わしている。わたしは彼らを遣わさず、彼らに命じもしなかった。彼らはこの民にとって、何の役にも 立ちはしない。―主の御告げ。―

예레미야 27장 15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

「わたしは彼らを遣わさなかったのに、―主の御告げ。―彼ら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している。それで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追い散らし、あなたがたも、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預言者たちも 滅びるようにする。」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00년 이상이나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인데, 이미 그 때부터 벌써 백성들을 미혹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미혹하는 대상이 그냥 일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이비 신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そして、彼らを惑わした悪魔は火と硫黄(いおう)との池に投げ翔まれた。そこは獣も、にせ預言者もいる所で、彼らは永遠に昼も夜も苦しみを受け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헛된 꿈이나 하나님 말씀을 어지럽히는 헛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イエ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 びのゆえに、はずかし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ました。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눈앞에 놓인 현실이 아닙니다. 믿음의 근원이시고 우리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31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何を食べたらよいか、何を飲んだらよいか、と捜し求めることをやめ、気をもむことをやめなさい。これらはみな、この世の異邦人たち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父は、それがあなたがたにも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何はともあれ、あなたがたは、神の国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物は、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많은 사람들은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바라보지 않고, 없는 것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없는 것만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예,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시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없다고 불평 불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주신 것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바라봅시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믿고, 언제나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만군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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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누구의 것입니까
2017년 4월 23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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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2019. 5. 21

마태복음 22장 15절~22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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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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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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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누구의 것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어려운 질문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기한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가이사한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복음서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누구는 천국에 대해서 묻기도, 누구는 부활에 대해서 묻기도 했고, 또 누구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질문을 보면, 그런 천국이나 부활이나 마지막 날에 대한 것에 비하면 지극히 단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과 <세금>이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누가 우리에게,
“이보시오,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당연히 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니, 대답만이 아니라 세금은 내야지요. 물론 수입이 없다면 내고 싶어도 낼 수 없겠습니다만, 회사원으로 일하건 아니면 사업을 하건 간에 수입이 있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지, 세금이 없다면 그 나라는 파산하고 말겠지요.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에 보면 국민의 의무 중에 반드시 이 <납세의 의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사업을 하면서 세금을 일부러 안내거나 하면 탈세가 되어서 처벌까지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2장 15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어땠냐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기 위해서, 또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율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교리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는 이를 따르라고 짐을 지우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그 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 말을 따르라. 내가 만든 교리들에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러면서 백성들한테 겁을 줍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당시 그들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천국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기들보다도 예수님 말씀에 귀를 더 기울입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영향력이 커져만 가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비판하시니까, 이제 백성들까지도 자신들을 우습게 볼 것이요,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예, 바로 예수님을 어떻게든 책을 잡아서, 어떻게 해서든 잡아넣을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바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면, 사실 좀 더 어려운 질문을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왜 이런 쉬운 질문을 했을까요.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든 일본에 살고 있든, 아니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든지 간에,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게 어려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대단히 민감한 질문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지요. 과거 역사 속에서 강대국이 식민지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장점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식민지를 만들면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군사적인 거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식민지에서 지배를 당하는 백성들은 지배를 하는 나라에게 세금을 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만, 이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있던 상당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대해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그것도 아주 많은 세금을 거둬가고 했으니까 당시 세리들이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로마에 순종하지 말고 이스라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만약에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의 불만은 폭발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말자고 해요?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는 반역죄가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대해 반역하자고 선동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체포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제시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사람들한테 대단히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순종하자! 라고 하면 뭐라고 했겠어요?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친일파, 매국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일본에 복종하지 말자고 해요? 만약에 그랬다가는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들한테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이사한테 세금을 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기뻐했을 것이요,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은 반역죄인으로서 로마에 의해 체포 당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는 이처럼 간교한 그들의 생각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에 대한 답변 한 마디로 인하여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 악한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 다음 말씀에 대해 공관복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른바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12장 15절에,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20장 24절에,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앞서 살펴본 오늘 말씀 중인 마태복음 22장 19절에 보면,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마가나 누가는 이 말씀의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만, 마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마태의 전직이 다름 아닌 세리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세금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다른 제자들보다도 바로 이 부분을 더욱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나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자들의 질문은 단순히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금 자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뭐? 세금? 그래, 그럼 너희들이 바쳐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묻는 그 세금에 낼 돈 한 번 가져와봐.”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과 그들의 대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0절~21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온 이 동전의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 동전에서 뭐가 보이느냐. 뭐가 적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합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야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후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듣고 질문한 이들이 놀랍게 여겨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말씀이기에 그들이 놀랍게 여긴 것일까요.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목적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 너희는 이 동전에서 가이사를 봐? 그래. 이게 그럼 너희들은 가이사 거라고 생각하는 거네.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바쳐.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바쳐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즉, 로마를 두둔한 것도 아니면서도 반역을 한 것도 아닌 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더 이상 어떻게 물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참 놀랍긴 합니다만, 이 답변,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질문은 분명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이사한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답변이라면,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이사한테 바치고, 그렇지 않으면 바치지 말아라”
라고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하나님한테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는데, 왜 뜬금없이 하나님 말씀을 하세요? 이런 생각 혹시 들지 않으십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예수님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너무나도 놀라운 예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말씀 서두에 식민지 백성들, 즉 지배를 당하는 백성들은 지배를 하는 나라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지금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냐. 너는 지금 누구의 소유이냐? 가이사? 너희들이 말이야, 지금 모르고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야. 너희는 너희가 가이사의 소유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하나님 소유라고 생각하니? 너희가 너희 스스로의 주인을 가이사라고 생각하면 가이사한테 세금을 바쳐. 하지만, 너희 스스로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한테 바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완전히 승복했다는 근거는 뭐냐 하면 정해진 시기마다 꼬박꼬박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 내가 너희들을 살려줄게. 하지만 그 대신 조공을 바쳐. 이것입니다. 조공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세금입니다.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자나 문학을 하는 분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찍어보니까 무려 363권의 책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사색합니다만, 책을 읽는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나요? 그 책 속에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적혀 있나요?
나 자신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도 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너무 비관적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제가 실수하고 못난 짓하고 그랬을 때만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아이고……난 참 못 났구나……. 합니다.
나에 대해서 되돌아볼 때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것도 하려고 해도 안 됐고, 저것도 하려 해도 안 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 소유인가> <나는 누구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에 보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한다고 답이 나옵니까? 안 나와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답이 안 나와요? 예, 나 자신은 너무나도 부족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그냥 귀합니까? 우연히 어쩌다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지으셨어요?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불순종하면서 죄를 거듭합니다. 그래도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봅니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나 미국 백악관에는 대통령이 키우는 강아지가 있다고 하던데, 아마도 무척이나 애지중지 키우고 있겠지요. 얼마나 귀한 대우를 받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유는 그 강아지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강아지의 주인이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주인은 누구십니까. 우리 주인은 대통령 정도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주셨는데, 우리가 그깟 강아지보다 못합니까? 그러니 아무리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없고 잘나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우리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학교나 직장에서 내가 나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 이름을 적어놓습니다. 성경에도 바로 그와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이름이 어디에 적히냐 하면 이마에 적힙니다.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14장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집에 가서 거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옆사람을 한 번 보세요.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나요?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일지라도,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 모두에게는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또 어디에 적혀 있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도 적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금입니다. 세금은 돈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363권이 나왔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누구 것인가>로 검색해보았더니 얼마나 나왔을까요? 10권이요? 5권이요? 0권이었습니다. 단 1권도 안 나왔습니다.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문제가 해결이 될 리가 있나요.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누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인은, 우리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래야 모든 고민이 해결됩니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내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면서, 항상 승리하고,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75회 무엇을 보십니까 →

← 제73회 부활하신 예수님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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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73회 부활하신 예수님
2017년 4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요한복음 20장 24절~27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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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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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모진 고통과 수모를 당하시고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모습은 그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쌍하게 보이려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모습은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그 죄의 무게에 따라서 누구는 벌금형, 누구는 징역형이라는 것이 있지요. 똑 같은 벌금형이라 하더라도 그 죄의 무게에 따라 액수가 바뀝니다. 징역형도 마찬가지죠. 징역 몇 개월부터 길게는 30년, 또는 무기징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600개가 넘는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 600개가 넘는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됩니다. 모두를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600개는 고사하고 십계명조차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아니, 십계명 중에서 열 개는 고사하고 그 중 한 개라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래, 내가 여러 죄는 졌지만 그래도 살인하지는 않았어.” 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말씀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속이 비었다. 즉 어리석다는 뜻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는 욕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한테 심한 욕설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욕설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그런 적이 있으셨다면 그건 이미 살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겉으로는 아무리 거룩한 척, 점잖은 척을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 17절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율법을 어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율법을 어긴 죄값은 사망입니다. 저주를 받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저주를 받은 자는 어떻게 하라고 성경에 기록합니까.
신명기 21장 23절 후반부를 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려 죽어갔습니다. 우리의 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어긴 우리는 저주를 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 나무에 달려 사망에 이르러야 마땅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바로 예수님께서 모두 대신 받아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이미 2천년 전에 모두 대신 받아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죽음에서 구원으로 옮겨진 바가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이를 상징으로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는 양이나 염소 등을 나를 대신해서 죽이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 계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면서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과거에는 아무리 짐승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지고, 오직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러면 된 것 아니겠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시고 애굽으로 보내서 이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난 이적이 바로 애굽의 첫째 아들의 사망입니다. 그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들의 처음 난 새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은 죽음의 영이 지나갔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신약시대, 성령님의 시대에 가장 큰 명절은 바로 오늘 부활절입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큰 사건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성경을 논할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대속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땅에 묻히셨다면, 만약에 그랬다면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러 뷔페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이것도 먹고 저것도 마시고 했습니다. 뷔페니까 아무리 많이 시켜도 괜찮아요. 사람들은 그곳이 천국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가려고 하니까 계산서를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그 계산서에 보니까 얼마가 적혀 있었어요? 얼마라고 할까요? 예, 100억 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지금 무슨 장난하십니까? 식당 사장을 부릅니다. 이게 뭐 잘못된 거 아니냐. 아니, 1~2만원도 아니고 100억이라니?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있냐. 하지만 사장님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거기 안내판을 보세요. 여기 뷔페식당은 100억 원입니다. 아니, 난 그렇게 많이 안 먹었다니까……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뷔페식당은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가격이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그 돈을 내야죠. 하지만 혹시 여기에 100억 현찰 가지고 계신 분들 계신가요? 그런 분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은 그 순간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심판의 때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 사람이 자신이 먹고 마신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면, 이 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항상 100억원 정도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 항상 100억 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겠으며, 또한 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 하나도 안 먹고 다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카드요? 그런 것 안 받습니다.
식당 사장님은 지금 당장 100억 원을 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넘기겠다고 해요. 이제 큰일 났습니다. 즐겁게 먹고 마실 때까지는 좋았지만 이렇게 될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한테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저, 돈 없어요. 그리고 경찰한테 잡혀가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그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고, 그뿐만 아니라 내 목숨까지 팔아서 네가 빚진 돈을 갚아주겠다고 하시면서, 정말로 주께서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식당에서 나올 수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직이에요. 왜냐하면 식당 사장님이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빚이 모두 탕감되었다고 인정해주어야지만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내 빚이 그대로 있고. 내 죄가 여전히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여전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의인으로 죽으셨습니까, 죄인으로 죽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죄인, 그것도 아주 철저한 죄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절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두 사람만의 죄가 아닌 온 세상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죄가 무겁겠습니까. 그처럼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죄인이 되셔서, 그처럼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끝은 무엇인가 하면 이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빚이 모두 탕감되었고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인정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 한 몸에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활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는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빚이 모두 탕감되고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이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도 무려 40일 동안이나 사도들에게 보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 앞아 나타나셨을 때, 그때 마침 도마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도들이 도마에게 말합니다. 이봐, 주님이 부활하셨어.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니까.
이렇게 말하자 도마는 뭐라고 말을 하냐 하면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합니다. 오늘 말씀 중 25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참 끔찍한 말을 합니다. 그랬더니 곧바로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아니에요. 26절을 보니까 그 후 여드레, 즉 8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 때는 도마도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보고 뭐라고 하세요?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한 구절 한 구절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고, 아 참 신기하네~ 라고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씀을 듣고 계십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도마가 “내가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본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 분명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안 보이셨지만, 그 말씀을 모두 듣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눈에 예수님이 보이든 안 보이든 모든 대화를 예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즉, 육신은 그대로 무덤 안에 있고 영만으로 희미하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완벽한 육신을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부분은 누가복음 24장 38절~39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채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오늘 26절에 보면 분명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 전에는 우리와 똑 같은 3차원이라는 틀에 갇힌 존재이셨습니다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가둬놓은 공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버리신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 봅니다. 27절을 다시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도마가 매우 불손한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내 손을 보고, 그리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마지막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뭐라고 하세요?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래? 그렇게도 못 믿어져? 그렇다면 내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봐. 괜찮아. 네가 원한다면, 네가 믿기만 하겠다면, 나는 괜찮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그 모진 고통과 수모를 겪고 죽었는데 내가 그 정도 못 해주겠니. 그렇게 해서 안 해보고 안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해보고 믿는 사람이 되라……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넘칩니까.
여러분, 이것을 또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혹시 이런 말을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안 보고 믿는 믿음이 보고 믿는 믿음보다 크다” 이런 말이 성경에 있습니까? 이런 말을 언제 쓰냐 하면, 아, 나는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어, 예수님한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어. 뭐, 이런 말을 하면, 그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 보고 믿는 믿음이 보고 믿는 믿음보다 크다”……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예수님을 만났건 안 만났건, 기도 응답을 받았건 못 받았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 이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러셨나요?
이 말과 비슷한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구절은 역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직접 눈앞에 나타나셔서 자, 만져봐. 손가락? 그래 넣어봐. 그러니까 도마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완전히 두 손 들었죠. 아니, 예수님이 직접 눈 앞에 나타나셨는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주님한테 항복선언을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까 살펴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지 말고도 무작정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2천년 전에 직접 우리 육안으로 보지 않고서도 믿은 자들,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냥 믿으라면 믿어!”라고 말씀하셨다면, 왜 예수님께서 오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직접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볼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도 믿음만 있으면 또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 중에서, “이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나만이 할 수 있어”라고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너희들도 믿음이 있으면 다 할 수 있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도 옮길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었죠? 예, 그것은 가장 힘든 것, 가장 고된 것, 우리를 위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과거에 바리새인들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 가장 힘든 일을 홀로 모두 다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안 봐도 믿어! 가 아닌, 잘 보고 믿어!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단순히 죽었다가 그대로 살아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교도소 안에서 죄인으로 죽었는데, 부활해보니 여전히 교도소 안에 갇혀 있어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입니다.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이요 진정한 해방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놀라운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신 부활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하나도 남김 없이 대신 짊어지셨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조금 힘들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조금 고달프면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 품에 있기만 합시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루 하루, 한 순간 한 순간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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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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