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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회 부활은 사랑입니다
2018년 4월 1일 설교

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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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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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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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은 사랑입니다”復活は愛です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시나요? 아멘, 예, 이 부활을 믿으신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것입니다. 왜 믿으시는 거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에 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믿느냐 하면 이도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믿음은 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 생각이요,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이는 사람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모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매장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육체가 썩어지고 무슨 귀신처럼 희미하게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육신을 가지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렇게 살아나야 하셨을까요. 어차피 살아나실 것, 안 죽으시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어떤 죄입니까. 교도소에서 몇 년 복역하면 해결되는 죄인가요? 아니면 채찍으로 몇 대 맞거나, 벌금을 얼마 내면 되는 죄인가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우리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가장 엄한 벌이 죽음인데, 그 600가지가 넘은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하니,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아무리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려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양이나 염소 몇 마리를 바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죄인한테 무슨 선택의 여지입니까.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가는 죽음? 아닙니다. 이는 그렇게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재판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 받게 되지만, 영적인 재판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 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사형은 아무리 어린 나이에 확정되어봤자 결국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형 판결은 100년이나 200년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형 판결,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판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와 주셨습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가는 우리들을 위로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짐을 모두 덜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누가 부탁했나요? 과거 구약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보고, 아~ 우리 죄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던가요? 아니요. 아무도 안 그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양이나 염소 몇 마리 바치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죄는 그런 호락호락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아야지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아야지만, 우리가 받을 대신 죽음을 대신 받아야지만 해결되는 죄,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형수가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사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해요. 그래야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상태인데 자신의 죄값은 치렀을지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한테 희망이 있습니까? 자, 이제 당신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으니까 어서 가서 자유롭게 사세요! 라고 하면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납니까. 아니에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바로 부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값을 모두 치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용서의 증거입니다. 죄가 모두 해결되었는데 부활이 없다거나, 아니면 죄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부활이 된다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 부활입니다. 이를 누가 얻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을 치르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또한 사하심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해결과 부활. 하나님께서 가장 원했던 것은 어느 쪽일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선택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이 결과 우리가 부활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2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활을 원하셨고,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가 해결되도록 해주셨다.

1번은 죄 사함이 더 중요하다. 2번은 부활이 더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그거나그거나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부활을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시셨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다 보니 어쩌다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생명을, 예수님의 보혈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조금 화제를 바꿔볼까요? 여러분, 남녀가 만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합니다. 그러면 결혼을 하고 싶어지죠. 같이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이미 하고 계신 여러분께서는,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사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른 생을 보낸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함께 살겠다, 또는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배우자가 아닌 다른 배우자와 살겠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신가요? 아, 물론 손을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를 비교한 데이터가 있는데 한국에서 작년에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남녀 9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남성 응답자는 45%가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부인을 선택하겠다고 했다는데, 반면에 여성 응답자 중에서 다시 태어나도 현재 남편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불과 19.4%였다는 것입니다.

이거 좀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이를 두고 하물며 이를 보도하는 남성 앵커도 <우리나라 남성이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모든 책임이 마치 남성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아내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무심하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굳이 좀 남성들을 위해 변명을 좀 해볼까 하는데, 아무래도 이는 여성보다 남성이 좀 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인 아닐까 합니다.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물론 이런저런 좋은 점도 많겠지만, 이런저런 점이 안 좋을 수 있겠다, 또는 불편할 수 있겠다는, 결혼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측을 이미 하고 난 다음에 결혼을 하기 때문에, 결혼 후에 부인에 대한 불만이 좀 적은 게 아닐까.

반면에 여성은 결혼이나 배우자에 대해서 너무 좀 좋은 부분만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을 한 다음에는 이것도 실망 저것도 실망……이렇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즘 특히 한국에 보면 몇몇 나쁜 남자들 때문에, 죄 없는 대다수의 남성분들까지 좀 기운이 빠져있지는 않을까 해서 제가 애써 남성분들의 변호를 해보았습니다만,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참고로 일본의 경우는, 여기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많다는 점은 비슷했습니다만, 남성은 40%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 부인과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반면에 여성은 33%였다고 해요. 그래도 한국보다는 좀 높죠? ㅎㅎ

이 숫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무슨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그냥 재미 반으로 여러분께 말씀 드린 것입니다만, 어찌 되었든 다시 태어나도 지금 아내와, 또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같이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여러분,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신랑이 예수님이고 신부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서로가 부부처럼 가까운 경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부활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も、権威ある者も、今あるものも、後(のち)に来るものも、力 ある者も、高さも、深さ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신랑과 신부였다면 그렇다면 혼인서약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전과가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ますか。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

이 질문에 대해 면목 없다는 듯이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마지막에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はい。主よ。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
「はい。主よ。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
ペテロは、イエスが三度「あなたはわたしを愛しますか」と言われたので、心を痛めてイエスに言った。「主よ。あなたはいっさいのことをご存じです。あなたは、私があなたを愛することを知っておいでになります。」

평소에는 사도들 중에서도 언제나 나서기 좋아했던 베드로, 언제나 남들보다도 자신을 내세우려던 베드로, 그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당당했었습니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구차한 자기 한 목숨 구해보자고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런 기운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계속 물으시니까, 정말 마지막에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휴, 예수님, 자꾸 물으면 물으실수록 제가 죄송해지잖아요. 아~정말 미치겠네……라는 생각까지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제 상상입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말들 중에서 이 세 마디가 가장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ㅎㅎ

하지만 아무리 작은 목소리였다 하더라도 이는 훌륭한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혼인서약이었던 것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그럼 어떻게 말쓸하셨어야 할까요.

“네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 베드로야”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わたしの小羊を飼いなさい。」
「わたしの羊を牧しなさい。」
「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

모두 예수님의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을 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면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요? 쫀쫀해요? 그냥 말로 하면 그런 줄 아시지, 꼭 보여드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 말로 해서 안 들어서 직접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무리 말로 해도 안 들어요, 선지자들을 보내서 해도 안 들어요,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남자가, 또는 여자가……이러면 좀 불공평해질 것 같으니까 그냥 한쪽이……라고 합시다. 한쪽이, 사랑해……라고 말하니까, 다른 한쪽은 얼굴도 안 봅니다.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보다 못해 또 말합니다. “사랑해.” 그러니까 상대방도 “나도 사랑해” 그러면서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스마트폰만 바라봅니다. 그래도 또 말해봅니다. “자기야, 사랑해.” 그러니까 상대방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나도 사랑한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이게 사랑인가요? 아니요,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행동이 있는 사랑입니다. 희생이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상대방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십시오. 먼저 희생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멋있는 말 같으세요? 사실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가짜 사랑과 진짜 사랑을 구분하는 방법은 쉽습니다. 가짜 사랑은 말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어떻습니까. 진짜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위해 가장 힘든 일,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십자가의 희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똑같이 십자가를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천분의 일, 만분의 일만이라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며, 나아가 부활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また、キリストがすべての人のために死なれたのは、生きている人々が、もはや自分のためにで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んでよみがえった方のために生きるためなのです。

아멘.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는 가장 현명한 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것이 가장 힘들게 사는 방법입니다. 이는 내가 내 힘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힘으로 내 죄를 해결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자신의 죄가 해결 되나요? 아니요. 힘은 힘대로 들고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위해 삽시다. 예수님과 함께 삽시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피 한 방울 남김 없이 흘려 주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을 위해 삽시다.
예수님과 함께 삽시다.
예수님의 일을 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믿음 안에서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예수님과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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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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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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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회 믿음과 순종
2018년 3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장 21절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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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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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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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과 순종”信仰と従順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여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제가 흥미롭다고 말씀 드리는 근거는, 어떤 이는 축복을 받을 만한 환경과 여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나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인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울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그는 처음에는 대단히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용모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를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부귀와 영화가 그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축복의 촛대는 사울로부터 다윗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맙니다.

한편, 성경에는 반대로 환경으로 보나 여건으로 보나, 축복을 받을만한 구석이 한 곳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라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라합. 그는 기생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누구는 그녀를 두고 <여관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히브리서 へブル人への手紙 11장 31절, 그리고 야고보서 ヤコブの手紙 2장 25절에서는 라합을 가리키는 말로서 헬라어 <포르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어김없이 기생 또는 매춘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를 두고 <여관주인>이라고 하려고 하는 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장 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ヌンの子ヨシュアは、シティムからひそかにふたりの者を斥候として遣わして、言った。「行って、あの地とエリコを偵察しなさい。」彼らは行って、ラハブという名の遊女の家に入り、そこに泊まった。

이 구절만 보고 만약에 라합이 여관주인이 아니라 기생이자 매춘부였다고 한다면,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은 그럼 본인의 임무를 망각하고 기생 집에 놀러 갔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분명 비난 받아야 할 일이겠으나 성경 어디에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질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일까요.

지금은 직업이 여러 가지로 많이 세분화가 되어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지금처럼 그렇게 복잡하지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병원에 가면 진료과목도 수 십 가지가 넘는 줄로 압니다만, 과거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단순했을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혹시 중국어를 공부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만, 중국어로 ‘호텔’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쓸까요.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호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라호텔. 이를 중국 사람들은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 바로 <신라주점>이라고 씁니다. 한자 그대로만 본다면 술집이에요. 하지만 중국에서는 과거에 주점에서 숙박업도 함께 했기 때문에 여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중국에서 <주점>이라고 하면 최고급 호텔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다음 가는 수준의 호텔은 한자로 뭐라고 적냐 하면 <반점>이라고 한답니다. 한자로만 쓰면 우리는 밥집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여기도 호텔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는 모두 그 나라의 역사와 관습이라는 점에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의 문화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당시 여리고의 여관에서는 숙박업도 하고 술도 팔고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여 정탐꾼이 정탐을 하다 말고 밤에는 놀러 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라합이 하는 장사가 술집이건 숙박업이건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로 보아 그녀는 그리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기생 라합>이라는 말은 꽤 잘된 번역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 라합의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해서 그 직업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술집 겸 여관을 운영하며, 여리고라고 하는 큰 성읍 한 켠에서, 사람들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술집이건 여관이건 간에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사람들 민심을 가장 빨리 아는 방법이 바로 택시 아저씨랑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손님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니까 얼마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그리고 더구나 한국 사람들이 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까, 손님들이 그렇게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면, 아하, 지금 민심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던 라합. 그녀에게도 여러 정보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말들을 사람들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기 요단강 건너편 광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래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400년 가까이 그런 생활을 하다가 애굽을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이 탈출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라합이 살고 있는 여리고에도 종들이 있었겠지요. 그러니 더욱 종들이 탈출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라합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여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홍해를 갈라서 그 한 가운데를 건너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이 되기는 하였으나, 광야로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자살행위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전갈과 불뱀이 득실거리는 곳이고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힘든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곳곳에는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리는, 그와 같은 살벌한 곳이 바로 광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와 같이 풀 한 포기 안 나는 광야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민족들이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잔인무도한 왕들을 모두 물리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 그런가보다. 정말 신기하다. 놀랍다……하고 끝날 수도 있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바로 이 여리고 쪽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큰 일 났습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힘을 가진 민족,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민족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라합의 집에 바로 그 정탐꾼이 들어온 것입니다. 라합은 이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을 추격해온 무리들에게 정탐꾼들을 내줄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숨겨줄 것인지. 세상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그 놀라운 하나님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운명의 갈림길 앞에서 라합은 의연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편에 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추격해온 무리들로부터 숨겨주면서 이제 그들과 생명을 건 계약을 맺습니다.

여호수아 2장 12절~13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どうか、私があなたがたに真実を尽く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また私の父の家に真実を尽くすと、今、主にかけて私に誓ってください。そして、私に確かな証拠を下さい。私の父、母、兄弟、姉妹、また、すべて彼らに属する者を生かし、私たちのいのちを死から救い出してください。」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는데, 남들 몰래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매달아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정탐꾼들이 말합니다.

여호수아 2장 18절~21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
v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私たちが、この地に入って来 たなら、あなたは、私たちをつり降ろした窓に、この赤いひもを結びつけ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また、あなたの父と母、兄弟、また、あなたの父の家族を全部、あなたの家に集め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の家の戸口から外へ出る者があれば、その血はその者自身のこうべに帰する。私たちは誓いから解かれる。しかし、あなたといっしょに家の中にいる者に手をかけるなら、その血は私たちのこうべに帰する。
だが、もしあなたが私たちのこのことをしゃべるなら、あなたが私たちに誓わせたあなたの誓いから私たちは解かれる。」
ラハブは言った。「おことばどおりにいたしましょう。」こうして、彼女は彼らを送り出したので、彼らは去った。そして彼女は窓に赤いひもを結んだ。

라합이 굵은 줄을 밧줄로 그들을 내려 보냈는데 마침 그 줄이 붉은 줄이었나봅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이 말합니다. 그래, 지금 네가 우리를 도망쳐 보낸 이 창문에 지금처럼 이 붉은 줄을 매달아놔라. 그리고 네 집에 너만이 아니라 네 부모와 형제, 일가친척들을 모아놔라. 그렇게 해서 너와 함께 그 집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나갈 때에 우리를 만나면 그는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너와 너희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하는데, 그 때 사진이 있습니까 신분증이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전합니다. 여리고 성 안에 쳐들어왔을 때에 이 붉은 줄이 매달려 있는 집은 공격하지 말아라! 라고 하면 그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라합의 부모나 친인척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전할래야 전해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말에 라합은 동의를 하고 정탐꾼들은 성을 빠져나갑니다.

자,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라합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혼자만 살려고 했다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문 걸어 잠그고 창밖으로 붉은 줄만 매놓으면 됩니다. 하지만 라합은 자신의 부모와 일가 친척을 모두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모두를 찾아가서 설득을 해야 합니다. 일단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3일 동안 숨어 있다가 빠져나가라고 했으니까 적어도 3일간은 시간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이 공격해오기까지 집안에 있어야 하니까 식량을 비축해놓아야 하겠지요? 분주하게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식량을 사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을 모아야겠지요. 가족이나 친척들이 모두가 같은 집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가서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지금 저기 광야에 있는 저 민족들이 이제 머지않아 이 여리고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리고는 틀림없이 멸망합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 집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집에 있기만 하면 살 수 있지만, 집 문 바깥에 나가면 죽습니다.

그 때 그들의 반응들은 어땠을까요. 그래, 라합아!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네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고맙다. 할렐루야! 그랬을까요? 여러분, 전도 중에서도 가족 전도가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롯한테 말합니다.

창세기 19장 12절~13절을 봅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ふたりはロトに言った。「ほかにあなたの身内の者がここにいますか。あなたの婿やあなたの息子、娘 、あるいはこの町にいるあなたの身内の者をみな、この場所から連れ出しなさい。
わたしたちはこの場所を滅ぼそうとしているからです。彼らに対する叫びが主の前で大きくなったので、主はこの町を滅 ぼすために、わたしたちを遣わされたのです。」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 그러니까 지금 말로 하자면 약혼자들이지요? 그들한테 말을 해서 어서 함께 여기를 같이 빠져나가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했대요?

다음 구절입니다. 창세기 19장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そこでロトは出て行き、娘たちをめとった婿たちに告げて言った。「立ってこの場所から出て行きなさい。主がこの町を滅 ぼそうとしておられるから。」しかし、彼の婿たちには、それは冗談のように思われた。

세상에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성이 멸망할 거야. 어서 빨리 도망치자……라고 지금 누가 말하고 있어요? 예, 장인어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급박한 상황에서 장인 표정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겠어요? 무척이나 진지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간절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괘씸한 사위들은 그와 같은 장인 어른의 말을 듣고 농담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사실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멀쩡한 날에 갑자기 허겁지겁 장인어른이 와서, 이 성이 망하니까 도망가자고 하면, 그걸 곧이곧대로 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장인어른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농담으로 여길만한 판국에, 지금 라합이 누구입니까. 예, 라합은 기생입니다. 일가 친척 중에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을 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하는 것이죠. 그러니 라합은 어땠겠습니까. 이제 곧 이 여리고는 망합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우리 집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나가면 죽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세요. 라합은 그 사람들에게 간절히 당부를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는 어쩌면 믿으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 좋아. 그럼 그 사람들이 언제 쳐들어오는데?”

이 말을 듣고 라합은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밤이고 낮이고 여기 안에만 있으라고? 야, 됐다. 난 간다.”

그러면서 뿌리치고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어떻게 해서든 잡아보려고 하겠지요.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여기 있어야 삽니다. 나가면 죽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참고 있었던 사람들도 어쩌면 하나 둘 빠져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정탐꾼이 왔던 때는 여호수아 2장입니다만, 여리고성 함락은 6장에 가서야 실현됩니다. 이게 참 얼마나 길었을까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예, 마지막 때는 반드시 왔습니다.

만약 그 때, 성벽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들이닥쳤을 때, 라합의 말을 듣지 않고 잠깐 밖에 나가 있었어요. 그런데 공격해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그 때 어떻게 말하겠어요?

“아이구, 이거 제가 라합이랑 친척이거든요. 그런데 라합이랑 친척이면 살려준다면서요? 제가 원래 라합이랑 같은 집에 있었는데 지금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왔었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분, 지금 무슨 천천히 서로 여유 부리고 있는 시간이 있나요? 여호수아 6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여리고성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수 십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손에 칼을 들고 쳐들어 옵니다. 얼굴에는 살기가 등등합니다. 닥치는 대로 살육을 벌입니다. 여기 저기서 좇아가는 사람들, 쫓기는 사람들, 우는 소리, 비명 소리가 성 안에 가득 찼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곳곳에서 불이 납니다.

그 때, 아뇨 사실은 그게…… 라고 말할 시간이 있을 것 같으신가요? 제가 원래 라합이랑……이라는 말도 채 끝나기 전에 목이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 6장 25절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しかし、遊女ラハブとその父の家族と彼女 に属するすべての者とは、ヨシュアが生かしておいたので、ラハブはイスラエルの中に住んだ。今日(こんにち)もそうである。これは、ヨシュアがエリコを偵察させるために遣わした使者たちを、ラハブがかくまったからである。

이게 바로 심판의 날,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기생 라합.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하찮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 뿐만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했던 일가친척이 모두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지요. 마태복음 1장 5절에 의하면 라합은 살몬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살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어쩌면 이 살몬이라는 사람은 여호수아의 명을 받고 여리고를 정탐하러 갔던 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요. 사실 하나님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살몬과 라합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누구입니까.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살몬과 라합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룻의 남편 보아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이어지죠? 라합의 아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오벳 オベデ 이 태어나고, 오벳의 아들이 이새 エッサイ 이고, 그리고 이새의 아들이 바로 다윗 왕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다윗 왕의 족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메시아의 족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안에서 이 라합이라는 사람은 어쩌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윗 왕의 계보에 넣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의 족보에도 넣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만이 아닌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할 때 보면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それと同じように、信仰も、もし行いがなかった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그러나 오늘 저는 조금 더 밑에 있는 구절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たましいを離れたからだが、死んだものであるのと同様に、行いのない信仰は、死んでいるの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없는 몸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시체죠.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면 썩어갈 뿐입니다. 우리 믿음을 썩어가는 믿음이 아닌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행함이나 순종이라고 해서 무슨 거룩하고 깨끗한 것 뿐이겠습니까? 전도나 봉사가 거룩하고 깨끗합니까. 라합이 거룩하고 깨끗한 일만 했나요? 라합이 설득해서 집안에 불러놓은 가족들이 때로는 성질도 부리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걸 또 말립니다. 이렇게 싸워서 의리가 상하는 바람에 나가면 어떻게 되요. 죽습니다. 그러면 또 그걸 달래고 위로합니다. 여기서 배고프다고 하면 밥도 해 먹입니다. 빨래도 해야죠. 험한 일 궂은 일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라합의 집을 생각할 때마다 노아의 방주가 떠오릅니다. 1년이 넘는 생활 동안 그 안에서 얼마나 난리 치고 지지고 볶고 그랬을까요. 짐승들은 여기서 울고 저기서 짖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걸 또 뒤치다꺼리를 다 해줍니다.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렇죠. 그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 안에 있어야 죽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어야지만 구원을 받는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교회가 주님의 머리 되신 교회, 주님의 몸 되신 교회라 하는데, 여러분 교회 생활이 항상 깨끗하기만 하고 거룩하기만 하나요? 뻑 하면 누가 속 썩이기도 하고, 누가 열 받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문제인 것인가요? 그러면 나가야 됩니까? 아닙니다. 그 곳에 계셔야 합니다. 바깥이 더 좋은 것 같지요? 바깥에 나가면 죽습니다. 방주 바깥에 나가면 물에 빠져 죽고요, 라합의 집 바깥에 나가면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그렇습니다. 주님의 집에 영원히 살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품 안에만 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일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려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를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약한 존재인 라합을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처럼 우리도 높이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갖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이 한 주,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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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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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회 천국을 얻는 자
2018년 3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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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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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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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천국을 얻는 자”天国を得る者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요즘 평온하십니까. 안정된 삶을 보내고 계십니까. 요즘 세상을 어떨까요. 과거에는 전쟁을 좋아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그랬습니다만, 요즘에는 어떻게든 전쟁을 회피하려는 노력 덕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안정은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는 안정된 삶을 보내고 계신가요? 어떤 분은 이른바 <안정된 삶>이라고 하면 무슨 많은 돈이 매달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꼭 그렇지만 않더라도,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 돌아갈 집이 있고, 집에 가면 전기, 수도, 가스 같은 게 안정적으로 공급이 된다는 것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안정된 삶을 살고 계신 것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보여도 전세계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정말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전쟁이 터졌어요. 물론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니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지진이나 불이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상황에 따라서 해야 할 일들은 여러 가지 많겠지만, 일단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 집에서 불이 났는데, 지금 지진이 일어나서 쓰나미가 몰려 오는데 집에서 태연하게 잠만 자고 있어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빨리 일어나서 무슨 수를 써야 하겠지요.

사회적으로도 역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위기가 다쳐오는데 아무런 수를 쓰지 않아요. 조금만 더 일찍 그 위기를 알아차리고 대처를 했었더라면 회피할 수도 있었을 덴데 그저 나는 괜찮겠지, 우리는 괜찮겠지……하면서, 설마 우리에게 그런 일이 닥칠까 하는, 그런 안전불감증…사실 이 안전불감증이라는 말도 좀 이상합니다.

불감증이라는 것은 느끼지 못하는 것인데,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위험이나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 위험불감증이나 위기불감증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요. 어쨌든 설마 설마 하다가 결국 작게는 회사가 부도나고 크게는 국가적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마는 것입니다.

일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그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야말로 잿더미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국민들의 노력과 여러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나라살림이 살아납니다. 우리나라는 1988년에야 개최할 수 있었던 올림픽을 일본은 이보다도 24년이나 앞선 1964년에 열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경제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를 본다면 <경제대국>이라는 말은 일본을 위해서 있던 말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경기는 어마어마하게 좋았습니다. 특히 80년대를 본다면 일본의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일본 땅을 모두 팔면 미국 땅을 전부 사고도 남는다는 말까지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당시 일본의 기업을 본다면 두 가지 상징적인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었습니다. 종신고용이라는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정년 퇴직할 때까지 그 회사에 계속해서 고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연공서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회사에 근무를 하면 몇 년 뒤면 대리로, 몇 년 뒤면 과장으로 자동으로 승진하는 것이지요.

사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안정적인 제도가 있었기에 회사 직원들은 회사를 신뢰하고 안심하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나라 경기가 좋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즉, 나라 경기가 좋으니까 직원들에게 줄 월급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연공서열을 하면 상사가 부하직원을 돌보아줍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에는 남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회사 상사가 부하직원 결혼상대를 구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유대관계가 강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있어서 회사는 단지 일만 하는 곳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충성을 바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어느 정도 열심히 일을 했냐 하면, 말 그대로 죽도록 일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과로사>가 처음 등장한 곳은 바로 일본입니다. 그래서 일본말로 <과로사>를 뜻하는 <過労死>는 국제어로도 등재되어 있어서, 영어 사전에도 <karoshi>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대호황도 결국 종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는 1986년부터 극심해진 일본의 거품경제는 1991년에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러자 처음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제였습니다.

회사가 충분한 돈을 벌고 그래야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그러겠으나, 회사가 지금 넘어가느냐 하는 마당에, 건물 팔고 땅 팔고 해가면서 직원 월급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연공서열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경기가 좋을 때는 괜찮았어요. 솔직한 말로 누가 상사로 앉아 있든지 간에,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일을 진행하고, 부하직원도 매뉴얼 대로 일만 하면 돈이 벌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경험이 많고 경력이 많은 사원은 부하직원에 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사회가 변해갑니다. 경제가 변해갑니다. 컴퓨터가 들어오고 인터넷이 들어와요. 이제 영어는 기본이고 제2외국어까지 하는 신입사원이 물밀듯이 들어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신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검증되고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번역서가 나온 다음에야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선배나 상사들에 비해, 부하직원들은 인터넷으로 영어신문들을 보면서, 현지에 보도가 되자마자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도저히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회사 차원에서 보면 능력 없는 상사한테 비싼 월급을 주는 것보다는, 그 돈으로 차라리 여러 신입사원을 뽑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니 종신고용이나 연공서열은 무너지고, 이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원은 아무리 직급이나 경력이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부하직원들한테 추월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 일본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우리 한 번 영적인 문제로 들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평온합니까. 영적으로 안정된 삶을 보내고 계신가요? 만약에 세상이 격변하고 그런다면 우리는 금방 위기를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위기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둔감합니다.

그저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안정되고 평온한 줄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그저 안주를 하게 되요. 더욱 믿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以来今日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여기서 침노 당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하자면 공격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를 잘못 이해해서 천국을 무슨 멸망시키려는 의도로 공격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럴 리가 없겠지요. 이는 천국을 멸망시키거나 허물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닌, 천국을 얻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가만히 앉아서 평온하게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껏 공격을 해야지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고 세례만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던가요.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なぜ、わたしを『主よ、主よ』と呼びながら、わたしの言うことを行わないのですか。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을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
v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その日には、大ぜい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 아닌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그랬다면,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인가요?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밖에서는 하나님 말대로 행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지도 않고 그저 세상 속에서 자기 멋대로만 하다가, 교회에 와서 거룩한 척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엄히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잠언 6장 9절~11절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なまけ者よ。いつまで寝ているのか。いつ目をさまして起きるのか。
しばらく眠り、しばらくまどろみ、しばらく手をこまねいて、また休む。
だから、あなたの貧しさは浮浪者のように、あなたの乏しさは横着者のようにやって来る。

이 말씀이 그저 윤리책에 적힌 글처럼 보이시나요?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그러면서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지, 게으름을 피우면 가난해진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는 세례도 받았다, 나는 믿음이 좋다,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다, 나는 헌금도 많이 낸다……뭐 이러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데에 게을리 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데에 게을리 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하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나는 걱정 없어, 틀림 없이 천국 갈 거야 하고 그러면서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이웃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한 마디도 안정이라는 말씀을 안 하고 계십니다. 걱정 말아라. 그냥 교회 나가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러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집사, 권사, 장로 직분 받고, 그리고 나중에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어. 그렇게 적혀 있나요? 제가 이 말씀을 할 때에는 몇 번이나 이 말씀도 같이 드립니다. 정말 저도 그렇게 적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일성수? 성수주일? 그런 말은 제가 알기로 한국에만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주일이 거룩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주일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거룩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 나가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구원 받을 수 있어, 찬양하고 기도만 열심히 드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무조건 교회에만 와, 그러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하면 교회 성도는 많이 모일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내용의 글이 성경 66권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처럼 침노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있는 힘껏, 기를 쓰고 하나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안정적입니다. 평온함 그 자체죠. 완전한 곳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영적으로 지극히 혼탁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제가 그냥 상상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さ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ほ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食い尽くすべきものを捜し求めながら、歩き回っています。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으로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세상이래요? 예, 그렇습니다. 마귀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삼켜먹기 위해서 찾아 다니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디 평온한 세상일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들이나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이겠지요. 거기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아프리카 초원 한 복판에 서있는데 마음이 평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사자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공격해올지도 모릅니다. 바짝 긴장해야죠. 잠을 잘 수가 있나요?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

しかし、あなたがたは、やがて起ころうとしてい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のがれ、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油断せずに祈っていなさい。」

성경에서도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보십시오. 이른바 미투 운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수 십 년에 걸쳐 쌓아온, 정말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고 쌓아온 공든 탑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삼키려고 두루 다니는 유혹이라는 이름의 마귀 사탄을 이기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믿음 좋은 사람이라면 마귀를 이길 수가 있을까요? 목사 정도 되면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드는 마귀와 대항해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상태라면 내가 정신이 들기 전에 이미 삼킴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이 든 순간, 우리가 방심한 순간, 우리가 믿음이라는 이름의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마귀 사탄은 우리를 향해 달려들 것이라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평온한가요? 아니요.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항상 이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위험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결코 안정적인 상황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종신고용입니까. 한 번 세례 받고, 한 번 직분 받고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나요?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안심하지 말라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넘어지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넘어지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종신고용은커녕 중도에 해고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연공서열도 없습니다. 그런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예, 그렇죠. 우리도 잘 아는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いいですか、今しんがりの者があとで先頭になり、いま先頭の者がしんがりになるのです。」

교회 다니고 30년 된 사람은 천국 S석, 20년 된 사람은 A석, 10년 된 사람은 B석, 1년도 안 된 사람은 무슨 뭐, 입석……그런가요? 아닙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어디에 연공서열이 있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우리는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왔다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내고, 찬송 잘 부르고, 그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고, 힘써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합시다.

그렇다고 이제 짐 싸 들고 먼 나라까지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웃, 사랑하는 우리 이웃, 예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웃, 믿었다가도 지금 믿지 않고 있는 이웃이 있는 곳이 바로 온 천하입니다. 전도라는 것이 꼭 우리 교회 나오라고 말하는 것만이 전도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전하고 그 사람이 자기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가도 좋습니다. 저도 매주 전도를 나가면서 그런 심정으로 나갑니다. 제 교회 나오시라는 말씀 안 드려요. 다만 전도지를 들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복음 전하는 것도 열심히 기를 쓰고 하려고 합니다. 말씀 준비도 열심히 기를 쓰고 하려고 합니다. 안 좋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동영상 설교 찍어서 메일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왜요? 돈 좀 많이 벌어보려고요? 유명해지고 싶어서요?

제가 하나님 일을 기를 쓰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천국 가고 싶어서예요. 그 일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기를 쓰고 이 일을 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천국 갑시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 잘 믿으면서, 복음 전하고서,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서 천국 국민으로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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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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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회 거룩한 땅, 거룩한 길
2018년 3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룩한 땅, 거룩한 길”聖なる地、聖なる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일이 끝나면 주일 말씀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메일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하시는 분들도 물론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부터 보내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분께서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짧은 글이니 읽어드리겠습니다.

수신거부. 축복 있기를 축원합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합장

문맥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종교를 믿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만, 이 짧은 글을 읽고 저는 대단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길, 좋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길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과연 무엇인지, 어떤 길인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고 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넓은 길, 탁 트인 길, 환한 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 새소리가 들려오는 길, 시냇물이 흐르는 길……

우리가 가는 길이 항상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두워서 한 치 앞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길바닥이 얼어서 미끌미끌 거리기도 합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어제는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있는 자전거도로를 달렸습니다만, 갈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올 때는 맞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갈 때는 30분 걸렸는데 올 때는 1시간 이상 걸린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좋은 길, 축복된 길로 가야 할 것도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의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み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訳すと、神は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우리 모두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만을 만나셨으며,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맨 마지막 구절이죠? 28장 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

ま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彼らを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예수님께서도 직접 우리와 언제 함께 계시겠다고요? 예,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라면 이 얼마나 축복되고 거룩한 길이요, 거룩한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좀 거룩한 삶 같으신가요?

하이고, 거룩하긴 뭐가 거룩해요. 그냥 사는 거죠. 뭐,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속상한 일, 답답한 일도 많습니다. 건강은 여기도 안 좋고 저기도 아프고요, 고민거리 걱정거리가 끊이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거룩한 삶이랍니까.

이러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それは、「わたしが聖であるから、あなたがたも、聖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어떻게 보면 참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우리더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에이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거룩하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어?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거룩하다……라고 하면 글쎄요. 사람이 거룩하다고 하면, 옛날에 예수님이나 성인들을 그려놓으면 머리 뒤에 이렇게 후광이 동그랗게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시겠습니다만, 우리 나중에 집에 가서 거울 한 번 보세요. 혹시 내 머리 뒤에 둥그런 게 있나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둥그런 게 있을까요? 아니면, 여러분, 저는 어떻습니까. 제 머리 뒤에 희미하게나마 뭔가 좀 보이세요?


예, 만약에 보인다……라고 하시는 분은 내일 예쁜 안경 하나를 맞춰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보이긴 뭐가 보이겠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거룩함은 어떻게 기록되어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柴の木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데, 이에 대해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神は仰せられた。「ここに近づいてはいけない。あなたの足のくつを脱げ。あなたの立っている場所は、聖なる地である。」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래요. 그러면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을 잘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대면한 순간이에요. 자, 어느 정도 상상이 가시나요?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예>, <아니오>로 마음 속으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라고 모세한테 말씀하시기 전에, 모세는 그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라고 모세한테 말씀하시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눈부신 빛이 나면서 그곳 땅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했을까요?

어떠십니까.


자, 그렇다면 마지막 세번째 질문입니다. 만약에 첫째 질문도, 둘째 질문도 답이 <아니요>였다면, 그렇다면 그곳 땅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예, 정답은 모두 다 아셨을 것입니다. 이 세 문제 모두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모세는 그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기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신 순간, 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거룩한 땅으로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땅이

어떻게 생겼겠어요? 부르신 땅이 호렙산이었으니까 그냥 산길이었겠지요. 제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인터넷으로 보니까 완전히 바위산이더라구요. 그러니 아마도 하나님께서 거기가 거룩한 땅이라고 하시기 전이나 하신 다음이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바위산에 바위 바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곳이 거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디가 거룩하다고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네가 선 곳>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곳이 어디입니까. 거룩한 땅을 이른바 <성지>라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성지순례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주로 기독교인 분들이 성지순례라고 하면 이스라엘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을 돌아오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전한 것을 찾아보니까 작년 8월달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이는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관광>이다, 라고 했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이는 좀 적절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럼 성지순례도 아니고 성지관광도 아니라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역지 관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뭐, 굳이 <관광>이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한다면 <탐방>, <답사>, <방문>, <견학> 이라는 말을 쓰셔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갈릴리 등을 다녀오시는 것은 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사역했던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지요.

오해하지 마세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 곳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 한 번 가 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순례>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순례>라고 한다면 어떤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그 지역이나 장소를 방문하고 참배를 하는 종교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가는 것이 종교행위가 되나요? 만약에 이를 두고 종교행위라고 한다면, 여기를 안 간 사람보다 갔다 온 사람이 더욱 신앙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요. 그래서 뭐 여기를 꼭 갔다와야지 목사나 장로나 권사 직분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 준다거나, 그런 게 있어야 되는거 아니겠어요? 글쎄요. 실제로 이런 황당한 규정을 둔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행이 저는 아직 그런 규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갔다 오면 믿음이 더해지나요? 신앙심이 깊어져요? 아닙니다. 무슨 여행사나 그런 곳에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성지순례>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역지 방문>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지금도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한다면 성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꼭 그 곳에 가야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무소부재라고 합니다만, 그것이 것이 무엇입니까. 무소부재.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계시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지인가요? 거룩한 곳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예수님을 모셔드린 우리 마음이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되신 이곳 교회가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다는 길이 거룩합니까? 아니요. 그보다 여러분께서 주일에 교회로 나오신 그 발걸음이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했다고 하는 교회에 들어가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전해지는 장소를 보거나,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돌항아리를 보며 감탄하는 시간 보다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시는 곳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이야말로 거룩한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이 곳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곳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그럼 왜 여기 있는 것일까요?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여기 오셨습니까? 그냥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여기 앉아계신 건가요?

물론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계신 곳이나 상황에 만족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 분들은 어떻습니까.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아,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옛날에는 얼마나 잘나갔는지 알아? 날 무시하지마.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이러는 분들 꽤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죠?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현실 속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나요? 아니요.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못나고 모자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이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금 이 곳에 옮겨놨어요. 아무도 안 알아 줍니다. 답답합니다. 정말 내가 여기서 썩을 인물이 아닌데 말이에요. 참 그럴 때는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굳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으셨다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태복음 7장 9절~11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왜 이처럼 고단하고 답답하고, 되는 일은 없고 주변 사람들은 맨날 속만 썩이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왜 이런 곳으로, 왜 이런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셨어요.

그것은 바로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 믿어져요? 그러나 이를 믿으셔야 합니다. 이를 안 믿으면 불평과 불만으로 인생이 파탄 나고 맙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믿었을 때, 진정으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축복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완전히 믿어버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의 팔자가 얼마나 기구했습니까.

어린 나이에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그런데 이 요셉은 어느 순간에도 불평과 불만이 없었습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39장 2절~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主がヨセフとともにおられたので、彼は幸運な人となり、そのエジプト人の主人の家にいた。彼の主人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主が彼のすることすべて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のを見た。

그리고 어이없는 누명을 써서 감옥으로 갇혔을 때는요?

창세기 39장 21절~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しかし、主はヨセフとともにおられ、彼に恵 みを施し、監獄の長の心にかなうようにされた。それで監獄の長は、その監獄にいるすべての囚人をヨセフの手にゆだねた。ヨセフはそこでなされるすべてのことを管理するようになった。監獄の長は、ヨセフの手に任せたことについては何も干渉しなかった。それ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彼が何をしても、主がそれ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る。

겉으로만 보면 요셉의 운명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불행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나이 서른에 애굽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의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 요셉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혀야만 했고, 그 전에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야만 했고, 그 전에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눈에는 가장 안 좋은 것만 받았던 요셉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는 노예로 팔려갔던 자리, 감옥에 갇혔던 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가장 거룩한 곳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 장군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에 갇혔을 때, 바로 그 자리가 너무나도 거룩한 자리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저 노예로 팔려가 이국땅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야곱의 아들 요셉……정도로만 기록되고 말았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지금 상황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속상한 일들이 많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고난이고 고통이고 역경이고 저주이고 불행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거룩한 순간이요, 지금 이 곳이야말로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야말로 거룩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잠언 4장 27절을 봅니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이 외에도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는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요 세상을 의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힘들지요, 고달프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세상을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힘들고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허락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길은 절망으로 가는 길도 아니요, 오직 구원으로 가는 길, 축복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저 멀리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가고 있는 길이 거룩한 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큰 이유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믿음의 길, 거룩한 길, 영광된 길, 축복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으로 가는 길, 구원의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조금 힘들더라도, 우리 모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곳이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거룩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마침내 요셉이 받았던 큰 축복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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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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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회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2018년 3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37장 5절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大いなる働きをされる神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을 보니까 어떤 분께서 이런 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모두가 양반이 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나라, 모두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나라, 모두가 정규직이 되지 않아도 여유있는 나라, 모두가 자가주택에서 살지 않아도 걱정이 없는 나라를 위해

참 좋은 말 아니에요? 물론 요즘 세상에 양반 같은 것은 없지만, 사회적 계층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어디를 나왔냐, 얼마나 배웠는지 하는 것에 상관 없이 생활할 수 있고, 기를 쓰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야근이다 뭐다 하면서 살 필요 없는 여유 있는 나라, 집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들을 정말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선거판에 뛰어들어 국회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정치학이나 행정학 공부를 해서 이 나라를 뜯어고쳐야 하나요?

우리 모두 우리 나라,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행복한 나라란 어떤 나라일까요? 우리는 그 표본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信者となった者たちはみないっしょにいて、いっさいの物を共有にしていた。
そして、資産や持ち物を売っては、それぞれの必要に応じて、みなに分配していた。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すべての民に好意を持たれた。主も毎日救われる人々を仲間に加えてくださった。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물건을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대요? 예,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언제 모습입니까. 예,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초대교회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기쁨에 충만한 모습입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회, 초대교회와도 같은 사회를 인간의 힘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는 말합니다. 바로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모형이 이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유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재산이 아닌 모두 국가 소유의 재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사회는 내가 내 능력껏 일을 할만큼만 하고, 일한 만큼 가져다가 쓰는 사회, 그리고 공산주의는 내가 내 능력껏 일을 할만큼만 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가 쓰는 사회라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비슷한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수입만큼 일정금액을 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 무엇이겠습니까. 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료보험, 건강보험이 바로 그와 같은 제도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료보험이라고 하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제도입니다.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그렇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고는, 집이 필요하니까 넓은 집을 사달라, 차가 필요하니까 고급 차를 사달라 한다고 모두에게 넓은 저택이나 고급 외제차를 사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무작정 글자 그대로만 따라 한다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이 사도행전 구절만 보고 이를 따라 한 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자,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는 있으나 북한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 독재국가에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자유>는 어떻습니까. 미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쳤던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민들은 독재자들이 빼앗아간 자유를 되찾기 위해 오래 세월 동안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와 같은 자유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자유가 있나요?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정반대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순종입니다. 복종입니다. 자유는 자기의 생각을 강조하지만 순종이나 복종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자신에게 내려지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온통 순종과 복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유로웠나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는 대로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요? 모세가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싶다고 했던가요? 아니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뭐예요? 예,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셔서 강제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는 순종했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땠습니까. 다윗이 언제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압적인 쓰임에 의해 사울한테 오랫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밤낮없이 사울한테 쫓기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도대체 내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울까. 그냥 형들이랑 함께 지내면서, 양들이나 치고 편히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고달픈 삶을 살아가야 할까……하면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가 없었던 대표적인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こころ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し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여기서 벌써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유롭게 사역하러 오신 것이 아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니까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게 사실입니까. 성경에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ば、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のとおりにしてくださ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바로 밑에 44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실 정도로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결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のとおりにしてください。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ました。

성경에는 자유가 아닌 온통 순종과 복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자본주의 사회에는 있으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나 독재국가에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등, 민주주의, 권리, 다수결, 투표, 선거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역시 성경에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삭의 아들 중에서 형인 에서를 미워하고 동생인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이 평등인가요? 아닙니다. 지극히 불평등입니다. 민주주의요?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선거로 뽑혔나요? 아니면, 모세가 행진하는 방향을 다수결로 정했나요?

홍해가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들의 다수 의견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2절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 의견은 뭐였습니까. 쫓아오는 애굽 군대한테 항복 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법대로 하자면, 다수결의 원칙대로 하자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노예생활로, 종살이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人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し、海を分けて、イスラエル人が海の真ん中のかわいた地を進み行くようにせよ。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쓸데없는 생각 말아! 이스라엘 자손들을 홍해 쪽으로 가게 만들어! 홍해가 갈라지게 해!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도 없고 다수결도 없고 선거나 투표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자유도 없고 평등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자유나 평등이나 민주주의가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자유도 평등도 민주주의도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민주주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민주주의 핵심인 다수결이 항상 올바르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요? 만약에 다수결이 항상 올바르다면 문제가 있는 정치인이 당선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문제가 심각한 정치인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들 다스리는 경우는 모두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수결이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지, 만약에 한 지도자가 완벽하고 항상 옳은 판단을 한다면 사실 민주주의도 필요 없고 자유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왜요? 그 지도자가 하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완벽한가요?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실수를 하고 후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사람이 하나님인 것처럼 독재를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민주주의를 짓밟게 된다면 이로 인해서 모든 국민들이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없더라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서는 혹시 연금술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고대 중세에 걸쳐 오랜 역사가 있는 이 연금술이라는 것은, 값진 금을 값싼 금속들을 섞어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는 성공할 수가 없었지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본래 금이라고 하는 금속은 여러 물질이 섞여서 만들어진 합금이 아니라 원자번호 79번, Au라고 하는 단일원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수 십 가지 수 백 가지 금속을 섞는다 하더라도 금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지상낙원을 꿈꿔왔습니다. 도원경, 무릉도원, 유토피아, 샹그릴라, 파라다이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을 무시한 채,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하나님 흉내를 내고자 하기 때문 다름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진짜 황금처럼 색깔을 칠하고 황금처럼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금이 아니듯이,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처럼 판단을 하고 하나님처럼 다스리려고 해도,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처럼 될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지상낙원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낙원이라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지상낙원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상상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狼は子羊とともに宿り、ひょうは子やぎとともに伏し、子牛、若獅子、肥えた家畜が共にいて、小さい子どもがこれを追っていく。
雌牛と熊とは共に草をはみ、その子らは共に伏し、獅子も牛のようにわらを食う。
乳飲み子はコブラの穴の上で戯れ、乳離れした子はまむしの子に手を伸べる。

여러분, 이런 세상이 말이 됩니까.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는 맹수입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먹는 무서운 동물이지요. 그런데 그런 무서운 맹수들이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사자들과 함께 놀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 킹 코브라 같은 독사들과 장난 친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인간의 지식으로 어떠한 제도와 규칙을 만든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세상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평화, 절대적인 평안이 우리 마음 안에 임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고민이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무슨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다니요, 저 그런 교만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요……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요 자기가 하나님 흉내를 내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전도하는 길에 대단히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눈앞에서 사자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자도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사자들이 닭고기를 뜯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거리로 하면 10센티 정도? 10미터도 아니고 10센티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깝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사자들을 본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주변에도 젊은 여성분들도 있었는데, 피를 뚝뚝 흘려가면서 닭고기를 뜯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 귀엽네~>라고 하는, 정말 놀라운 말을 하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ㅎㅎ 뭐, 짐작은 하셨겠지만, 사실 동물원에 갔었습니다. 전도하는 길에 기류 쪽에 가니까 무료 동물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랑 잠시 들렀는데, 시간 관계상 다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참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그렇게 가깝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뭐 당연하겠습니다만, 투명한 유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리로 볼 수가 있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유리는 투명해서 눈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분명 그 유리 덕분에 저희는 그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도 정말 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안 계신가요?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37장 5절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神は、御声で驚くほどに雷鳴をとどろかせ、私たちの知りえない大きな事をされる。

그리고 시편 121편 4절을 보십니다.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지상낙원을 만들려고 해 봤자 하나님 없는 나라는 진정한 지상낙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복된 삶을 살려고 해 봤자 하나님 없는 삶은 진정한 복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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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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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회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
2018년 2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 장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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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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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神様の中での勝負師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월 9일에 평창에서 개최된 한국 최초 동계올림픽도 이제 오늘 저녁이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참 여러 가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상했던 대로 좋은 성과를 올려준 낸 경기도 있었나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종목에서 뜻밖의 메달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좋은 소식만이 있을 수야 없겠지요. 분명히 이 종목에서는 메달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하는데 아쉬운 결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올림픽처럼 세계적인 경기를 할 때에는 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예를 들어서 한국이 어느 나라와 축구를 한다고 하면, 뭐 굳이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나라 골이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와~ 하는 함성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국에 살고 있다 보면, 예를 들어서 쇼트트랙은 우리나라의 효자 종목입니다만 일본은 그리 강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보려고 했더니만 해외에서는 또 볼 수 없게 되어 있더라구요? 참 여러 가지로 아쉬운 부분이 많지요.

반면에 아주 잘 보여준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에서도 대단히 인기를 끌고 있는 컬링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일본에서도 잘 볼 수가 있었어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예, 일본도 이번에 대단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죠. 특히 지난 금요일에 한국과 일본, 한일전은 대단히 멋진 경기였습니다. 그와 같은 선수들을 보면 경기를 할 때의 표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특히 여성 선수의 경우에는 아무리 곱상하고 귀엽게 생긴 선수라 하더라도 경기가 일단 시작만 하면 그야말로 표정이 승부사처럼 돌변합니다. 여자 컬링의 안경선배 김은정 선수 보세요. 평소에는 정말 참 밝은 얼굴인데 경기에서 투구할 때보면 정말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승부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기기 위해서는 승부사 기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승부사 기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반드시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상대방을 이기고야 말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이런 강한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비단 스포츠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 대학 동기들 중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가끔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보면, 자기는 아무래도 승부사 기질이 있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겠다는 그런 집념이 강하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죠. 뭐, 여러 경우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일단 재판이 시작 되었다면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겠지요. 아무리 성실하고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노력을 열심히 하는데 맨날 재판에서 지기만 해봐요. 그 변호사가 어떻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재판도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그야말로 승부사 기질, 반드시 이긴다, 기필코 이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라는 식으로 승리에 대한 집착, 집념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어떠냐 하면, 저는 이른바 승부사 기질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형제가 없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하십니다만, 글쎄요. 원인이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승부사 기질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가끔 그런 말을 듣습니다만,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제가 어느 친척집에 갔었는데 거기 집에서 먹을 것을 주었대요. 그런데 어떤 아이는 누가 뺏어 먹을 까봐 열심히 집어먹고 있는데, 저는 그 먹는 걸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하기사 그런 면에서 보면 제게 형제가 없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무슨 먹을 게 있는데 형제가 있으면 누가 뺏어먹을까봐 내가 먼저 먹어야 하는데……하면서 서로 막 열심히 먹는다고 하는데, 저는 형제가 없다보니, 무슨 맛있는 게 있다 해도 설마 부모님이 제걸 빼앗아가시겠어요? 그러다보니 무슨 경쟁심이나 경계심이 없었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오늘은 이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 아니,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서 이제는 포기했던 아이, 그러나 100세가 되어서야 얻을 수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정작 이 이삭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 보면 조금씩 나오기는 해요. 하지만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의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좀 많이 등장하는 곳이라고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이 있는 창세기 26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26장에 보면 이삭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15절을 보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イサクはその地に種を蒔き、その年に百倍の収穫を見た。主が彼を祝福してくださったのである。こうして、この人は富み、ますます栄えて、非常に裕福になった。彼が羊の群れや、牛の群れ、それに多くのしもべたち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で、ペリシテ人は彼をねたんだ。それでペリシテ人は、イサクの父アブラハムの時代に、父のしもべたちが掘ったすべての井戸に土を満たしてこれをふさいだ。

이삭이 당시 그랄 땅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하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복을 주셨냐 하면 그가 농사를 짓는데 심은 것에 비해 100배나 얻었다는 것이에요. 10만원어치를 심었다면 1000만원어치를 거뒀다는 것이고, 100만원어치를 심었다면 1억원어치를 거두었다는 것이니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항상 축복을 주시니 이삭은 마침내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대요? 예, 그 지역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보고 시기해서, 세상에,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때에 팠던 그의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메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누가 우리 집 수돗물을 못 나오게 해버렸어요. 사실 그것만 가지고도 정말 화가 날 만한 일입니다만, 오늘 성경에서 당시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전기, 수도, 가스를 끊고, 자동차를 빼앗아버리고 일자리도 잃게 되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다음과 갈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6장 16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そうしてアビメレクはイサクに言った。「あなたは、われわれよりはるかに強くなったから、われわれのところから出て行ってくれ。」

아비멜렉은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도 역시 이삭에게 그 땅을 떠날 것을 명합니다. 당시 그 지역은 블레셋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아비멜렉 또한 블레셋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것 때문이었겠지요. 지금 우리 블레셋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러다가 내가 다스리는 지역에 난리가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떠나라.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지역은 아브라함 때도 살았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면서 세금도 냈겠지요. 나름대로 공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길 떠나라고 하니, 이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목숨 걸로 싸워도 시원찮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이삭이 분을 내어 일어서더니 아비멜렉과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더라……라고 기록하나요?

아니요. 그 다음 구절을 봅니다.

창세기 26장 17절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イサクはそこを去って、ゲラルの谷間に天幕を張り、そこに住んだ。

이게 뭐예요? 반박 한 번 안 해보고 오랜 세월 동안 지내왔던 그 곳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또 우물을 팠는데, 20절에 보니까 역시 또 그랄 지역의 목자들이 와서 말하기를 기껏 판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겼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을 봅니다.
창세기 26장 21절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しもべたちは、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ところが、それについても彼らが争ったので、その名をシテナと呼んだ。

여기서 다투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쪽이 빼앗으려고 하는데 이를 안 빼앗기려고 싸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의제기를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죠.

여기까지 오면 그래도 한 번 쯤은 싸워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하고 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도대체 몇 번이나 당하면서 삽니까.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인 2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ほかの井戸を掘った。

이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여러분, 이게 지금 남 이야기니까 아, 그래? 뭐 그런가보지……하고 끝나는 것이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친구가 이렇게 해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장사를 해왔는데, 장사가 좀 잘 되니까 해코지를 해요. 막 거기서 장사를 못 하게 합니다.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일해온 회사예요. 제가 막 좋은 성과도 많이 내고 승진도 빨리 하니까 동료들이 나를 시기해서 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싸워야죠. 그런데 싸우지도 않고, 나가란다고 나가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 부분을 읽으면요, 정말 속 터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22절을 끝까지 봅니다.

창세기 26장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ほかの井戸を掘った。その井戸については争 いがなかったので、その名をレホボテと呼んだ。そして彼は言った。「今や、主は私たちに広い所を与えて、私たちがこの地でふ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

밀리고 빼앗기고 양보하고 나서 네 번째로 우물을 팠더니만 이제 아무도 빼앗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를 르호봇レホボテ, <넓은 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뭐 한 마디 싫은 소리라도 할 것 같은데, 빼앗는 사람한테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한테도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냐고 불만을 토했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왜 이랬을까요. 원래 이삭은 순진했으니까요? 인간성이 좋았기 때문에요?

ㅎㅎ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온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몇 살일 때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바로 앞장인 25장을 보면 이미 야곱이 태어나 있었습니다.

25장 26절에 의하면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물을 빼앗기는 일을 겪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 이삭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삭이 75세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삭이 태어나고 60세 이상이 될 때까지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계속해서 보면서 살아왔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이라고 하면 우리는 무엇보다 모리아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 어렵사리 얻은 아들입니다. 얼토당토 않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아무런 반박도 안 하고는 그저 온전히 순종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이삭은 어땠을까요. 아브라함을 따라서 모리아산까지 함께 갔던 이삭의 당시 나이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습니다만, 창세기 22장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2장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アブラハムは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たきぎを取り、それをその子イサクに負わせ、火と刀とを自分の手に取り、ふたりはいっしょに進んで行った。

당시 번제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는 양이나 염소 같은 큰 짐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불로 태울 만한 나무가 필요했을 텐데, 고작 나뭇가지 서너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겠지요. 적어도 상당한 양의 나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이삭이 지우고 갔을 정도라고 하면, 적어도 초중학생 정도 가지고는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이삭의 나이는 25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때 이삭의 나이가 정확하게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부분은, 이삭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아브라함을 뿌리칠 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2장 9절~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ふたりは神がアブラハムに告げられた場所に着き、アブラハムはその所に祭壇を築いた。そうしてたきぎを並べ、自分の子イサクを縛り、祭壇の上のたきぎの上に置いた。アブラハムは手を伸ばし、刀を 取って自分の子をほふろうとした。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전히 결박하고 난 다음에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면 그건 뭡니까. 이미 그는 아, 아버지가 나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구나……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순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스톱! 그 아이한테 손 대지 마! 이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22장 13절~14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角をやぶにひっかけている一頭の雄羊がいた。アブラハムは行って、その雄羊 を取り、それを自分の子の代わりに、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た。
そうしてアブラハムは、その場所を、アドナイ・イルエと名づけた。今日でも、「主の山の上には備えがある」と言い伝えられている。

여호와 이레. アドナイ・イルエ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신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분이시구나. 내가 노력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제 이삭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달았어요? 예,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았더니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준비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삭은, 지금 눈앞에서 우물을 빼앗긴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요? 더 좋은 곳에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생을 통해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삭의 삶에 대해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을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예, 바로 그의 아들 야곱입니다. 물론 이삭에 대해서 야곱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어쩌면 이삭의 삶을 보면서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냥 순진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해보면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야곱, 그는 먼저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장자의 명분 長子の権利 을 형 에서 エサウ 한테서 빼앗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형이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 リベカ의 지혜를 동원해서 가로챕니다. 그 결과 축복을 받기는커녕 자신의 형 에서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망쳐 나온 야곱이 자신의 부인을 얻을 때에는 어땠나요. 야곱은 라헬 ラケル 을 얻으려고 7년 동안이나 무료로 노동을 해야 했으나, 그 결과 라헬을 얻기는 얻었으나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레아 レア까지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7년이나 더 보수도 받지 못하고 노동을 해야 했지요.

그렇게 해서 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습니다만, 자신이 사랑한 여인인 라헬 ラケル 이 낳은 아들 중 요셉은 어렸을 때 행방불명이 됩니다. 딸 디나 ディナ는 이민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시므온 シメオン과 레위 レビ는 세겜シェケム이 사는 성읍 모든 남성들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곱더러 네가 축복을 받으려면 네 지혜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네 형과 네 친척들, 네 이웃한테서 빼앗아라. 그래야 네가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나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子どもたちが彼女の腹の中でぶつかり合うようになったとき、彼女 は、「こんなことでは、いったいどうなるのでしょう。私は」と言った。そして主のみこころを求めに行った。
すると主は彼女に仰せら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他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여기서 두 민족이라고 하신 것은, 에서는 에돔족속이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즉 에돔이 이스라엘 민족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언제 하셨어요? 예,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는 어디 말씀을 인용한 것인가 하면 말라기 マラキ書 1장 2절~3절 말씀입니다.

말라기 1장 2절~3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マラキ書1章2節~3節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愛している」と主は仰せられる。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あなたが私たちを愛されたのですか」と。「エサウはヤコブの兄ではなかったか。――主の御告げ――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た。
わたしはエサウを憎み、彼の山を荒れ果てた地とし、彼の継いだ地を荒野のジャッカルのものとした。」


여기에도 하나님께서는 형인 에서를 미워하고 동생인 야곱을 사랑했다고 하십니다만, 그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상해요? 말이 안 되요? 불공평해요? 예, 맞습니다. 이상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하고 말이 안 되고 불공평한 사실을 말씀 드릴까요?

おかしい、納得がいかない、不公平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고,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까.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우리가 그만한 일을 했나요? 우리가 그런 엄청난 하나님을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했나요? 세상에서 우리가 그토록 의인인가요? 훌륭한 인물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요, 이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요, 이것이야말로 불공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감사요, 이것이야말로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승부사는 자신의 노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수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믿습니다. 자신의 방법을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갖고 승부에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승부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과 수단과 지혜와 방법과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려 했던 야곱의 일생은 어땠습니까.

애굽 왕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왕의 질문에 야곱은 답합니다.

창세기 47장 9절을 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ヤコブはパロに答えた。「私のたどった年月は百三十年です。私の齢の年月はわずかで、ふしあわせで、私の先祖のたどった齢の年月には及びません。」

나 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내 능력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좀 제 상상을 덧붙이자면, 적어도 내 아버지처럼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삶, 아버지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했어요.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어요? 예, 험악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승부사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그 순간은 이긴 것 같고,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더 많이 얻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것이 바로 험악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세상적인 승부사가 자신의 노력과 수단과 지혜와 방법과 경험과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신다. 아멘!

이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닌,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닌, 나를 사랑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요?

예, 지금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한테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내가 잘 하면 성공이고 내가 잘 못하면 실패입니다만, 우리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도 성공이고 저렇게 되도 성공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조금 어렵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거나 다투실 필요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이 순간도 인도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승부사가 되어서,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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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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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회 설레는 믿음
2018년 2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 장 51절~52절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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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설레는 믿음”胸躍る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그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누가 아파요. 아니면 갑자기 아이가 태어나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 승객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여기 탑승하고 계신 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하고 승무원들이 애타게 찾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예, 거기 승객 중 한 사람이 서둘러 손을 듭니다. 제가 의사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그러면 이제 급한 환자에 대한 진찰을 하거나, 임산부 같은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하기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긴급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꼭 비행기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불이 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겨울철이라서 화제에 대한 뉴스도 많이 볼 수 있고, 그 중에는 정말 안타까운 소식도 있어서 가슴이 아픕니다만, 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물론 작은 불이라면 어떻게든 끄려고 해보아야겠지요. 하지만 도저히 안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예, 재빨리 신고를 해야지요. 119를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어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한국은 112, 일본은 110번에 서둘러 전화를 겁니다.

자, 이와 같이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애타게 승객들 중에서 의사를 찾거나, 불이 났을 때 소방소에 신고를 하거나 사건 또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경찰에 신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ㅎㅎ 물론 그렇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자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사 선생님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불이 났습니다. 소방소에 신고를 하면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와서는 불을 꺼줍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죠.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그 이유 또한 경찰이 가장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문제를 처리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우리 기독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승객분들 중에 기독교인은 안 계십니까!” 라고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기 탑승하고 계신 분들 중에 크리스천은 안 계십니까! 예수 믿는 분은 안 계십니까!” 라고 간절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찾는 목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세요? 예, 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경우와 비교를 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어떤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의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사가 있으면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타게, 간절하게 의사를 찾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인은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럴 때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찾습니까? 아, 나에게 지금 너무나도 큰 문제가 생겼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주세요… 라고 예수님을 믿지 않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봤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존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v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け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けをつけるのでしょう。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捨てられて、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어라도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비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소금이 무엇입니까. 싱거운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그 음식 맛이 변하는 것입니다. 싱거운 음식, 밋밋한 음식에 소금을 분명히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많이 넣어도 맛이 변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진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 소금이 맛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소금이 들어감으로 인해서 그 음식의 맛이 변화했는지 안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금이 들어갔다면 그 음식 맛이 변화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안 변해요. 그냥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적으로만 살아가고 예수님에 의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주변에서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의 비밀은 바로 소금 자체가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틀어서 대단히 훌륭한 곰탕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사골을 가져다가 오랜 시간 동안 푹 과서 육수가 기가 막히게 나온 곰탕입니다. 이것을 이제 먹으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싱겁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재료로 정성 들여서 만들었다고는 해도 역시 소금을 넣어야 맛이 납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최고급 소금을 준비했습니다.


자, 그 맛있는 곰탕에 최고급 소금을 넣고 먹었습니다. 당연히 맛이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그 먹은 사람이 곰탕맛과 소금맛, 어느 쪽을 칭찬하겠습니까. 야, 이 곰탕에 넣은 소금이 정말 맛있네……글쎄요. 만약에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소금을 칭찬했다기보다는 곰탕이 맛없다는 것을 비꼬아서 말한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음식에 소금을 넣었는데, 먹어보니까 음식 맛은 안 나고 소금 맛만 나요. 그게 과연 훌륭한 소금입니까. 그건 제대로 된 소금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소금이었다 하더라도 정말 뛰어난 소금은 스스로의 맛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 본연의 맛을 변화시켜서 기가 막힌 맛으로 만들어주는 소금,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금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분명히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소금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 우리 이웃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마치 요리에 소금을 넣었더니 무조건 짠 맛만 나게 하는 소금과 아무런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금이 제대로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기독교인을 찾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있어봤자 어떠한 문제들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을 스스로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어디 한 번 대단히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매주 주일날 할 일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는 여러 답변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함께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설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설렘, 가슴 뛰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매주 교회에 나오는 이유, 그것이 어쩌면 습관적이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냥 왠지 안 나가면 찝찝하니까 나가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그냥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거나 하는 식으로, 믿음이 아닌 다른 데에 이유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에 대해서 감동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으시나요?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날 기적을 믿으시나요?

이렇게 물으면 예, 아멘도 하시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우리 마음 안에 그 기적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이, 뭐, 기적을 뭘 믿어요. 그냥 교회 다니는 거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듣고, 사람들 만나고 하면 위로가 되요. 기도도 가끔 하고, 성경도 뭐 성경책은 집에 몇 권 있어요. 찬양요? 그건 교회에서 하잖아요.

혹시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エリコ)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 여리고에는 바디메오(バルテマイ)라고 하는 맹인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하니까, 예수님께 소리를 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웅성웅성 거리는 무리 쪽을 보고 무작정 큰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v“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ダビデの子のイエス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주변에서 조용히 좀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ダビデの子のイエス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누구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고도 합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그런 순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예배를 드릴 때에 대표기도를 드리거나 한다면,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니만큼 그 내용도 한 가지가 아니겠지요. 거기에 담아내야 하는 내용도 많을 것이고 순서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어디를 지나가다가 머리를 부딪쳤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면, 천장은 낮은 편은 아닌데, 방과 방 사이를 지날 때의 그 미닫이문이 있는 그 높이가 좀 낮아요. 그래서 거기를 지날 때에는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가끔 보면 지나가면서 머리를 빡 하고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 무슨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뭐라고 뭐라고 한 다음에 나중에 가서 “아이구 아파!” 그러나요? 그럴 새가 어디 있겠어요. 아파 죽겠는데.

우리에게 무슨 다급한 기도제목이 있어요. 그러면 역시 그 때도 무슨 순서를 정해서 기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기도를 합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바디메오(バルテマイ)의 기도를 보세요. 여기에 무슨 서론 본론 결론이 있습니까.

예수님! 지금 날 도와주세요!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찾았지? 그래,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바디메오(バルテマイ)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가 원하는 소원은 명확합니다. 딱 여덟 글자(14文字)였습니다.

v“보기를 원하나이다”
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 이 바디메오(バルテマ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우선 그가 애초에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그는 앞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귀가 있었어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요.

“지금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말이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더라……”

今イエスという人がいるんだけどさあ、目の見えない者が見、足のなえた者が歩き、病に冒された者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が聞き、死人が生き返るそうだぞ

어쩌면 그는 이런 소문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갈래야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죽기 전에 그 예수인지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내 눈을 고쳐주실 것 같은데, 내가 앞을 보게 될 것만 같은데, 도대체 그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러 갈 방법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이렇게 애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지 모릅니다. 체면이요? 창피해요? 지금 그거 가리고 있을 때입니까?

10장 46절에 보면 성경은 그 바디메오(バルテマイ)를 가리켜 맹인 거지(盲人の物ごい)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원래부터 거지인지 아니면 맹인이기 때문에 거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이미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습니다. 목청이 터지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目が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여러분,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냥 되면 그만이고 안 되도 그만인, 싱겁고 밋밋한 그런 표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는 내 눈을 치료해주신다고 하는 강력한 믿음과 확신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일본 vSONY 라는 회사를 알고 있습니다. 이 소니는 이른바 일본경제를 견인해온, 일본경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회사의 창업정신은 무엇이었냐 하면,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만들어진 전자제품들은 편리하고 우수한 기능들이 많긴 했는데 너무나도 크고 투박해요. 그래서 소니에서는 이를 무조건 작게 만들자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영어에서 작은 아이나, 청년, 소년을 뜻하는 <v소니>로 했는데, 본래 영서 철자는 SONNY입니다만, 이것도 너무 크다고 해서 여기서도 vN을 하나 빼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바로 vSONY인 것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오디오입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이 오디오는 너무나도 컸어요. 그래서 이것을 작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디오에서 가장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바로 스피커입니다. 그러면 작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요?

예, 쉽습니다. 스피커를 떼어버리면 됩니다. 스피커를 떼어내어서 귀에 꽂고 듣게 하면 된다는 거죠.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회사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걸어 다니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냐 하는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품이 출시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도전 정신, 설레는 마음,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제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워크맨이었고,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이 위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전문가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과거의 일본 기업은 도전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게 아니면 외국 기업들에게 밀린다고 하는 위기의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일본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도전>이 아니라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믿음은 어땠습니까. 한국의 50년대 60년대의 교회를 보십시오. 그야말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대는 주님에게 매달렸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밥도 없었습니다.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기도제목이요? 부자가 되고 뭐고 간에 우리 가족이 내일 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위생상태도 안 좋고, 좋은 약도 부족하고 하니 얼마나 병들이 많았습니까. 그러니 뭐예요? 제발 우리 가족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건 무슨 상투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절박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돈도 한 두 푼 가지고 해결이 안됩니다. 하물며 그 지독한 질병들이 어떻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디메오(バルテマイ)처럼 그저 주님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나라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질병에 시달릴 때에 우리가 원했던 것은 바디메오(バルテマイ)가 그랬던 것처럼 오직 기적만을 간구했습니다. 기적만이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을 의지하겠지만,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냥 기도해도 안 되니까 금식하고 철야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그렇게 주님만을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953년 6.25가 끝나고 잿더미가 된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세계 선진국 대열에까지 오르는 성장을 보였습니다. 전세계에 파송하는 선교사가 2위에 오르는 믿음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성장을 두고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합니다만, 아닙니다. 이는 믿음의 기적, 주님의 기적이라고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왜 교회에 다니냐고,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냥 뭐 믿는 거죠. 종교는 정신 건강에 좋아요. 부활이요? 구원이요? 십자가요? 기적이요? ㅎㅎ 뭐 그렇다기 보다는, 교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면 즐겁잖아요.”


그러시겠습니까. 왜요.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니까 체면 차리느라고 그러십니까.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지식이나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말에 심심해서 할 일 없으니까 교회에 나와서 사람들이나 만나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그것은 바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설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 기적을 바라는 믿음,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레는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은 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 한 번 같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v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아멘!

설레는 믿음,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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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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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회 알았더라면
2018년 2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장 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알았더라면” 知っていたなら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미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1월 하순에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무사히 결혼식을 잘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의 제가 한 가지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차, 조금 더 빨리 결혼할 걸 그랬다……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뭐,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조금 더 빨리 <결혼식을 올릴 걸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 결혼식은 수 십 번도 더 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도 있었지요. 친척이나 특히 선배 결혼식이다 하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신기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맨날 같이 지냈던 선배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도 않았고 매우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결혼식이다 하면 이제 좀 식상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특별할지 모르지만, 제게 있어서는 결혼식도 언제부터인지 그거나 그거나가 됩니다. 제가 서울에서 지낼 때 한 번은 아침에 있는 성가대 식구 결혼식이었는데 좀 늦었어요. 그래서 택시를 탔지요. 그리고 결혼식장 장소를 말하면서 거기로 가달라고 했더니 기사님 하시는 말씀이, 아, 세금 내러 가시나요?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아뇨, 아는 분 결혼식이 있어서요……라고 하니까 이 기사님 말씀이, “아, 그게 다 세금이죠 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장에 가면 거기 서 있는 신랑이나 신부한테 얼굴도장 찍고, 인사하고 악수 하고, 그리고 이름 쓰고 축의금 내고 식권 받고, 주변 돌아보고 아는 사람 있으면 인사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식이 시작하면 신랑신부 입장하는 것 정도는 간단하게 봐주고,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요? 예, 배 고픈데 빨리 식당으로 가야지요. 거기서 스크린에 비치는 결혼식 장면을 잠깐씩 보면서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식이 끝나가면 제 식사도 끝나갑니다.

그러면 이제 서서히 식장으로 돌아가서 사진 몇 장 찍고, 부케 던지는 것 웃으면서 박수 쳐 주고, 그러고 오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까지 제가 갔던 결혼식 중에서 90% 이상은 대충 이런 흐름이었습니다. 여기서 크게 벗어나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례 선생님이 누구인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때 식당에서 열심히 밥 먹고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신부가 얼마나 이쁜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도 보고 그랬습니다만, 몇 번 가보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별로 관심도 없어집니다. 신랑 턱시도 색깔이 검정색이었는지 흰색이었는지도 몰라요. 하물며 밥이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솔직히 기억도 못하게 됩니다.

왜 그래요? 예, 결혼식 한 두 번 가봐요? 이제 새로운 것이 없어요. 다 아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을 준비할 때에도 물론 쉽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그래도 뭐 결혼식 준비라고 하면 식장 예약이나 드레스다 뭐다 하고 어떻게 보면 뻔하잖아요? 그래서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 그래도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새롭거나 의외의 사실에 놀라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웠던 것은 어디서부터냐 하면 바로 결혼식이 끝난 후부터였습니다. 어느 정도 식순이 마무리되고 혼주들의 식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 저희 신랑과 신부는 어느 구석진 방으로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하면 바로 식권 계산을 하는 것이었죠. 신랑측 신부측으로 나누어서 한 묶음씩 되어 있는 것을 이제 정산을 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세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작업이었습니다만, 저는 그런 작업을 그렇게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참 무척 새롭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다음에 저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결혼식에서 사용된 혼인서약서와 방명록, 그리고 그 방명록이 리스트로 정리된 명단과 축의금 봉투였습니다.

저는 그 때 솔직히 놀랐습니다. 제가 좀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그렇게 정리한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화환을 보내주신 분들의 그 리본을 또 정리해서 주더라구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 누가 화환을 보내주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솔직히 당일 날은 경황이 없어서 누가 왔는지, 어느 분이 화환을 보내주셨는지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명단과 리본들을 보니까 다시금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거기에는 축의금에 대한 금액도 회계를 맡아준 제 사촌 동생들이 말끔하게 정리를 해주었습니다만, 그 목록을 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아, 조금 더 빨리 <결혼식을 올릴 걸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어떠세요. 일본에 계신 분들은 보니까 예쁜 봉투에 정성껏 담아서 주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만, 한국에 있을 때 저 자신도 그랬습니다. 예전에는 봉투를 자기가 준비해야 하고 그랬습니다만, 요즘은 웬만한 곳에 가면 봉투들도 다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냥 가서 대충 넣고 이름 적어서 내고, 식권 받아오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렇게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내용들을, 저는 별 생각 없이 해왔던 일들을 그 사람들, 결혼 당사자들은 하나하나 모두 리스트로 정리해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 목록을요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 있게 볼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자세하게 열심히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예, 제가 그 리스트를 그렇게 자세하게 열심히 보고 있었더라니까요. 만약에 그날 결혼하신 분들이 내가 낸 돈의 액수도 그렇습니다만, 축의금 봉투까지도 관심 있게 볼 줄 알았더라면 내가 내는 봉투도 좀 더 신경을 쓸 걸,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를 조금 더 생각할 걸, 봉투에 쓰는 글씨도 조금 더 정성껏 쓸 걸……이라는 생각이 정말 굴뚝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믿음생활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제 평신도 시절을 돌아보면 가장 쉽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일어납니다. 대충 씻고 습관적으로 집을 나서고 교회에 도착합니다. 주보와 헌금 봉투를 들고 앉습니다. 주보를 봅니다. 성경도 찾지 않아요. 요즘 한국의 웬만한 교회에서는 스크린으로 다 보여줍니다. 준비찬송이 끝나고 예배가 시작합니다. 대표기도 할 때에 봉투에 특별한 생각 없이 헌금을 넣습니다. 또 찬송 부르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면 어때요? 이게 이 말 같고 저게 저 말 같습니다. 어디서 들었던 예화가 나오면 아, 저거 예전에 했던 예화인데 또 하시네. 그러지요.

그리고 헌금 시간이 되면 헌금 합니다. 광고가 끝나면 축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요? 빨리 나가야 주차장에서 차 빼기가 쉽거든요.

이것이 우리 교회 생활. 틀에 박힌 믿음 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우리>라기보다는 과거의 저 자신의 믿음생활이 이랬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기쁨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왜 그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는 그와 같은 밋밋한 믿음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내 믿음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내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지금 이 순간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그처럼 따분하게 믿음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なぜなら、私たちはみな、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に現れて、善であれ悪であれ、各自その肉体にあってした行為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이 외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을 마치고 난 다음, 아니, 그 이전이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는 이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은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そして、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また、別の一つの書物も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人々は、これらの書物に書きしるされているところに従って、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성경에 의하면 그 심판대 앞에는 여러 책들이 펼쳐져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직 제가 그 자리에 서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쩌면 그 자리에 서게 되면 그 내용을 우리 스스로가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무엇이 써 있을까요.

거기에는 우리가 했던 일들의 좋은 것, 안 좋은 것 모두가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기록들을 보면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간에 틀림없이 놀랄 것입니다. 왜 놀라겠어요?

그것은 바로, 아니, 이런 것까지 적혀 있어? 이거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별 생각 없이 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우리는 분명 놀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두 무리로 나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한 쪽 무리한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食べる物を与え、わたしが渇いていたとき、わたしに飲ませ、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宿 を貸し、わたしが裸のとき、わたしに着る物を与え、わたしが病気をしたとき、わたしを見舞い、わたしが牢にいたとき、わたしをたずねてくれたからです。』

그러니까 그들이 뭐라고 해요?

마태복음 25장 37절~40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
v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て言い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る物を差し上げ、渇いておられるのを見て、飲ませてあげましたか。いつ、あなたが 旅をしておられるときに、泊まらせてあげ、裸なのを見て、着る物を差し上げましたか。また、いつ、私たちは、あなたのご病気やあなたが牢 におられるのを見て、おたずねしましたか。』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て言い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しか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의인들이 지금 뭐라고 합니까. 예, 그럼요. 저도 알아요. 저 착한 일 많이 했어요. 이러던가요? 아니에요. 몰랐어요.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반면에 다른 쪽 무리들은 어떤가요?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v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食べる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も飲ませず、わたしが旅人 であったときにも泊まらせず、裸であったときにも着る物をくれず、病気のときや牢 にいたときにもたずねてくれなかった。』そのとき、彼らも答えて言い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り、渇き、旅をし、裸であり、病気をし、 牢 におられ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て言い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告げます。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です。』

역시 이들도 자기들이 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앞서 의인들이 자신들의 행한 좋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겸손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반면에 이 나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요? 이것도 겸손해서요? 아니면 원래 선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억력이 떨어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자신들이 한 행동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는 틀림없이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행한 일들은 대단히 사소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본인들은 자신들이 행한 행동들이 대수롭지 않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리가 없을 정도로 작은 일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의로운 일이든 악한 일이든 간에 그들이 하는 행위들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의인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말을 들은 악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휴, 나 그런 사소한 일을 하나님이 문제 삼을 줄 몰랐어요. 나 그런 것까지 하나님이 보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은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은 안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우리한테 별로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처럼 한쪽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다른 한 쪽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가 아니라,
주님께서 크나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가 아니라,
주님께서 대단한 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순간 하나님은 안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가 아니라,
그 순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은 우리한테 별로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대단히 관심이 많으신 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요, 그 결과 영원한 형벌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제가 한국에서 지인들 결혼식에 갔을 때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었습니다. 왜라고요? 예, 그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차려 입고 감동도 없이 감흥도 없이 결혼식에 갔다가 돈 내고 밥 먹고 사진도 내키면 찍기도 하고, 아니면 안 찍기도 하고는 그냥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랬던 제가,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제 결혼식에 대한 자료는 자신이 대단히 관심을 갖고 그 리스트를 보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 만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사진들이 파일로 도착했는데, 사진을 보고도 누가 왔는지, 어떤 옷을 입고 왔는지를 매우 진지하게 자세하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 혼인잔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2절~14절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있을 잔치를 바로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혼인잔치라고 기록하죠?

요한계시록 19장 9절을 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小羊の婚宴に招かれた者は幸いだ、と書き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は神の真実のことばです」と言った。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 바로 그 날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 즉 예수님의 혼인잔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홍성필의 혼인잔치에 홍성필이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신 여러분들께서는 어떠십니까. 혹시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의 모습,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후회되지 않습니까?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가 많이 부족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후회가 나쁜가요? 사실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우리는 늦지 않았습니다. 후회를 하실 부분이 있으면 지금 후회를 철저하게 하시고, 그리고는 내일부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우리의 믿음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위 하나하나, 우리의 믿음생활 하나하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는, 우리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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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회 보아야 할 것만을 봅시다
2018년 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민수기 13 장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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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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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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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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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보아야 할 것만을 봅시다’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병원에 갑니다. 그럼 때로는 엑스레이를 찍지요. 그리고 탁탁 꽂아놓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저 하얗고 까만 사진일 뿐이죠. 하지만 그 분들은 그 사진을 보고 어디가 정상인지 또는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집어냅니다. 왜 그게 가능한거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인 것이죠. 다른 전문가들은 어떻습니까. 날씨를 예측하는 기상예보관은 똑같은 구름을 보고도 이것이 비구름인지 아닌지를 알아봅니다. 어디 보는 것만이 전문가인가요. 자동차 기술자는 엔진소리를 듣기만 해도 벌써 이 차가 몇 년쯤 된 차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 맞춘다고 해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바로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무엇이 핵심인지, 무엇이 군더더기인지를 분간하고 잘 대처하는 사람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1절~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정복에 앞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을 보내서 정탐을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지휘관을 새로 뽑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지휘관들을 보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당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의 수를 보면 성인 남성만 60만명이 넘었습니다. 여기서 각 지파의 인원수들을 보면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7만에 달했고, 그 지휘관들은 그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그 인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 중에서 선발된 12명의 대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단지 정탐을 위해서 그냥 급하게 뽑힌 사람이 아니라, 본래부터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휘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립니다
민수기 13장 17절~20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이제 40일동안 정탐하고 난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정탐결과를 보고합니다. 그런데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14 장 1절~4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제 온 민족이 난리가 납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구나. 절망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일이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물론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름아닌 바로 모세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민수기 13 장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그런데 모세가 명령한 내용은 어땠습니까.
앞서 민수기 13장17절~20절에 있는 모세의 명령을 정리해본다면, 먼저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고 하면서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명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대해서 정탐하라고 하셨지, 언제 그 땅의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았던 지시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모세가 그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에 얽매어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비록 그는 히브리 인이었기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몇 살까지요? 예, 그의 나이 마흔까지 애굽의 왕실에 살면서 당시 최고의 학문을 익혔습니다. 그 학문 중에는 당연히 전쟁에 관한 학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애굽의 왕자로서 자라던 모세는 수많은 전쟁에도 참여하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그는 비록 그 후 40여년 간을 광야에서 지내고 지금은 팔십 먹은 노인에 불과했으나, 당시 전쟁에 있어서 전략과 전술에 관해서는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에게 있어서 전쟁을 하기 전에, 공략대상인 지역에 정탐꾼을 보내서 살피는 일은, 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그야말로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략대상 지역을 정탐할 때에는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 군이 진격했을 때 어디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 병력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하겠죠. 아무리 우리 병력이 강하고 많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더 강하고 더 많다고 한다면 전쟁이 매우 어렵기 되기 때문입니다.
정탐해야 할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땅이 비옥한지 아닌지, 그 땅에 식량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상대방 병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식량이 넉넉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 병력이 약하고 상대 병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쪽에 식량이 넉넉하게 있고 상대방에게는 식량이 부족할 경우, 속전속결을 하면 불리하지만 장기전으로 몰고 가면 승산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식량사정을 알아오는 것도 정탐꾼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전쟁에 관한 훌륭한 학문을 했던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어땠을까요.
“아니, 하나님, 내가 전쟁에 있어서는 공부도 많이 했는데, 제가 그걸 모를까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 제가 이제 각 지파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멋지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간단히 말씀하셨지만, 제가 내린 명령을 보세요. 아주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저 잘했죠?”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민수기 13 장27절~29절입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그리고 민수기 13 장31절~33절까지에는요,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의 보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그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래요? 예, 하나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서 난 과일도 증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예, 올라가서 빨리 그 땅을 얻어야지요! 그런데 모세는 또 뭐라고 지시했었습니까. 예,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보고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해요? 예, 거기 사는 사람들이요? 무지 크고 무지 강해요. 그리고 그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이제 우리는 다 죽었어요!
이게 그들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가서, 아! 여기가 하나님께서 주실 땅이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너무나도 좋은 땅을 우리에게 주시려는구나! 하고,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살아갈 희망을 꿈꾸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가 보낸 정탐꾼 12명 중에서 10명은 모세의 말을 너무나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 땅만 본 것이 아니라 그 거민들까지도 충실히 보았기 때문에, 덜컥 겁을 먹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한 땅은 분명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나, 모세가 보라고 했던 거민들을 보니 우리들은 이제 다 죽은 목숨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이 밤새도록 대성통곡을 합니다.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6절~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정탐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의 거민들이 강한지 약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땅 거민들이 많은지 적은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기로 한 땅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세도 거기 사는 사람들만 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보라고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유혹이나 함정은 가장 약한 일부분에서 시작합니다. 작은 쥐구멍 때문에 댐이 무너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오래된 일본 토크쇼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회자가 어떤 여성 출연자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여성 출연자는 얼마 전에 이혼을 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그 전 남편이 좀 잘못을 저질렀나 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여성 출연자가 화가 나서 이혼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사회자가 이 여성 출연자한테 말을 합니다. 아마도 여성 출연자가 사회자보다 후배인 것 같은데, 이 사회자가 뭐라고 하냐 하면, 물론 너의 전 남편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나쁜 부분은 5%에 불과하다. 그 전 남편의 나머지 95%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좋은 부분인 95%를 바라보지 않고 나쁜 5%만 바라보게 되면, 결국 그 5%가 그 사람의 100%로 보이게 되고 만다. 너는 전 남편의 나쁜 5%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인 95%를 보았어야 했다. 그런데 너는 좋은 부분인 95%를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나쁜 부분인 5%만을 보았기 때문에 마치 그 나쁜 부분인 5%가 100%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그 사람의 나쁜 5% 중에서 4.2%는 너한테 책임이 있다……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참 웃기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남자는 옳고 여자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겠다고 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 속에 겁이 자리잡고 부정적인 생각이 꽉 들어찬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좋은 땅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적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왜 그들의 믿음이 적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혼동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볼 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동차 전문가가 엔진 소리를 듣고 그 자동차의 증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만 보라고 말씀하시면 땅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까지 굳이 보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한 것만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예,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라고 한 것 외의 것을 보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어떤 분들은 즉시 못 들어가고 40년 뒤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40년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40년 전 당시 미성년자들이었을 뿐이고, 당시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낼 때 어떻게 말하는지 한 번 볼까요? 여러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2장 1절 전반부를 한 번 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말씀하신 것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이것저것 세상적인 것을 따져가며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결국 광야에서 죽고 마느냐. 이 둘 중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집중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시간이 없습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만 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정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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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회 순종하는 마음
2018년 1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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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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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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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순종하는 마음” 従う心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새해 2018년 첫 주일예배입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보통 1월 3일~4일 정도까지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제 연휴도 끝나고 대부분이 평상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좀 2018년이라고 하는 새해에 적응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휴일에서 벗어나 머리 회전에 도움이 되도록 제가 문제 하나를 내드릴까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끼리 여러 가지 수수깨끼를 내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 수수깨끼의 답이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분명 내 것은 내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답을 아실 수 있겠어요? 예,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에요? 바로 이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분명 내 것이지만 나 자신이 그 이름을 쓸 때보다도 다른 사람이 오히려 나를 부를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겠죠. 내가 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뭐, 때로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름을 아예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이름을 없애고자 하더라도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오늘은 이 이름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으면 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이름,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이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한 사람당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이름, 그러나 이름의 가치라는 것을 보았을 때, 모두가 똑같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여러분께서는 그 기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물론 쉽게 떠오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떠오르실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경우가 바로 정치인들이겠지요. 선거 때 보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포스터에 이름을 찍어서 여기저기 붙이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걸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이름을 소리높이 외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 때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병원이나 노인시설 같은 곳을 방문해서 서툰 솜씨로 일을 돕기도 합니다. 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다 자기 이름을 남들한테 알리고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알리려고 힘을 쓰는 사람들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물론이지만 웬만한 직장인들은 모두 무엇을 가지고 있어요? 예,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원들에게 있어서는 이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가면 맨 처음에 받는 매너교육 중 하나가 바로 이 명함을 주고 받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내 이름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이름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이름이리고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이름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내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누군가가 나를 불러줄 때에만 그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름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이름의 가치는, 그렇다면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불러줄 때에만 가치가 올라가나요? 아니요.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솔 펄머터 ソール・パールマッター>
<브라이언 슈밋 ブライアン・P・シュミット>
<애덤 리스 アダム・リース>……
이런 분들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단 세흐트만 ダニエル・シェヒトマン>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모르세요?

그렇다면 <브루스 보이틀러 ブルース・ボイトラー>
<율레스 호프만 ジュール・ホフマン>
<랠프 스타인먼 ラルフ・スタインマン>이라는 이름은 어떠십니까. 이 분들도 잘 모르시겠습니까. 흠……그러시군요.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한테 있어서도 무척이나 낯선 이름들이긴 합니다만, 이분들은 대단히 유명한 분들입니다. 어느 정도 유명한 분들이냐 하면 이 분들은 모두 2011년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입니다.

<솔 펄머터> <브라이언 슈밋> <애덤 리스>는 분들은 노벨 물리학상을, <단 세흐트만>이라는 분은 노벨 화학상을, 그리고 <보이틀러> <호프만> <스타인먼>이라는 분들은 노벨 의학 • 생리학상을 각각 2011년에 수상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이름에 대한 가치는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 같은 비전문가가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 쪽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와 같은 분들의 이름에 대한 가치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글쎄요. 또 어떤 이름은 이 또한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이지만,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한테 알려져 있냐 하면, 경찰이나 검사들, 깡패들, 교도관들한테는 아주 잘 알려진 이름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고 해서 그 이름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이름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는 좀 문제가 많겠지요.

이와 같이 그 이름의 가치란 단순히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들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정작 우리 이름은 어떻겠습니까.

예배가 끝나면 예배 때 전해드렸던 말씀을 가지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여러 곳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만, 그 중 한 일본 목사님께서 제게 매주 섬기시는 교회의 주보를 보내주고 계십니다.


사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다른 교회 주보를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매주 주보를 보내주시니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목사님께서 보내주시는 주보에 보면 헌금을 하신 분들의 성함이 적혀 있는데, 가끔 <신지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지명, 즉 하나님이 이름을 아신다는 한자겠지요. 처음에 봤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만, 아마도 이름을 적지 않고 헌금을 하신 분을 이렇게 주보에 적어놓으신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이름이 헌금봉투에 적혀 있지 않으니 우리들은 그 이름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일본에 살면서 믿음생활을 했습니다만, 정작 일본 교회에 다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일본교회에서는 일반적인 것인가 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없더라구요. 그래서 아무래도 이 <신지명>이라는 표현은 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 같았습니다.

저희 주보에도 헌금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을 제가 주보에 기록합니다만, 그 중에는 성함을 적지 않은 분들을 그저 <무명>이라고 해왔습니다만, 사실 무명……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신지명>이라고 똑같이 따라 하기에는 좀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얼마 전부터는 <무명>이 아니라 <무기명>, 그러니까 <이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적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보에 싣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보내주신 주보에 적혀 있었던 <신지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가치가 있는 이름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세계에는 이름만 대면 어느 교회 목사님이라고 널리 알려진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여겨지는 이름에 대한 가치가 꼭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가치와 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유명한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가 없다고 말씀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다를 수도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 성경구절을 한 번 비교해볼까 합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 8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私は、「だれを遣わそう。だれが、われわれのために行くだろう」と言っておられる主の声を聞いたので、言った。「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또 한 구절은 누가복음 10장 2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実り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収穫の主(しゅ)に、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祈りなさい。

이 두 말씀, 어떻게 보면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만, 교회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쓰입니까.

예를 들어서 무슨 교회나 교단에서 무슨 회장 자리에 출마하려고 해요. 아니면 믿는 사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할 때 어떻게 기도해요?

예, 그렇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主よ、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이 말이 뭐예요? 하나님 앞에서 막 손 들면서, 저요, 저요, 저 여기 있으니까 저 시켜주세요. 하는 거잖아요. 나 당선시켜 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반면에 뭐예요? 교회에서 봉사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전도해야 할 일이 있어요. 돈이나 시간으로 섬겨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요?

예, 그렇죠.


“주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主よ、実り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い。

이게 무슨 뜻이에요? 물론 본인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래도 나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니까 함께 일을 할 사람들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 중에는 뭐예요? 나는 이래저래 바쁘고 하니까 좀 나 대신 일을 할 사람들을 보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솔직히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정말로 훌륭한 교회, 훌륭한 사회는 이 두 말씀의 쓰임새가 지금과는 반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무슨 회장이요? 무슨 의원이요? 아이, 그런 건 저보다도 더 훌륭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힘든 일, 궂은 일, 봉사하는 일, 섬기는 일, 티 안 나는 일 같은 것을 할 때에는,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와 같은 교회, 그와 같은 사회가 있다면이야 무슨 법률이 필요하고 무슨 율법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묵묵히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일을 섬기고 하면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니까 우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반겨주십니다. 이건 무슨 제 상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ことを思って大いに喜びました。彼は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볼 것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마주치는 천사들과 천국시민들이 모두가 나를 알아줍니다. 반겨줍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이겠습니까.

그런데 반면에 어떤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 に指一本さわろうとはしない。

자기들은 몸에 힘을 주고 이래라 저래라 성도들한테 말만 하면서 자기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예수님, 저 아시죠? 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이렇게 많은 책도 썼어요. 이렇게 큰 교회도 지었어요. 이렇게 무슨 박사 학위도 많이 받았고요, 높은 직분도 받았고요, 이렇게 많은 상도 받았어요……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만약에 마태복음 7장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라고 말씀하시면 어쩌겠습니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70명을 뽑아서 전도사역을 맡기니까 그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니까 귀신들도 항복했었다고 기뻐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だがしかし、悪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からといって、喜んではなりません。ただ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しる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믿음 좋다고, 높은 직분을 받았다고, 출세했다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물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아무리 훌륭한 뜻이 담긴 이름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고 소박한 이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서 아껴주시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이름이라면, 하늘나라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라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자주 불러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렀을 때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만약에 회사라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날 사장님이 한 직원을 불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게 좀 귀찮은 일인데 말이야. 이걸 자네가 해줄 수 있나? 그러면 그 직원이 뭐라고 해요?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무슨 중요한 일만 있다 하면 꼭 그 직원을 찾아요. 그러면 어때요? 예, 그 사람의 출세는 이미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내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일을 맡겨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이구, 왜 귀찮게 나한테만 그래요? 나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이에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러시겠습니까.


그래도 아직 감이 안 잡히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십시오. 저 넓은 운동장에 만원자리 지폐가 막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거 다 너 가져.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휴, 저걸 귀찮게 어떻게 다 가져가요? 사람들을 더 불러서 가져가라고 하세요…… 라고 하시겠어요? 아니면 밤을 새고라도 다 싸서 가져가겠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저 넓은 운동장에 축복이 많은데 저거 다 너 가져…….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 제가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혹시 이렇게 물어보실지도 모릅니다. “너 혼자 하기에 좀 벅차면 누구 좀 더 부를까?” 이걸 보고 눈치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겠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 축복, 다 내가 가지겠습니다!

이것이 욕심이라고 생각하세요? 욕심이라고 다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한 욕심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以来今日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이렇게 되면 내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시는지 하늘나라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천사들이 그럽니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뻑 하면 그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기신단 말이야……뭐 이러면서 하늘나라에 소문이 퍼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힘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돈이요? 시간이요?

예전에 007 영화를 보면 시작이 대략 비슷해요. 007 제임스 본드가 무슨 작전 수행 임무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가라고 해요? 아뇨. 놀랍고도 신기한 도구 같은 것을 다 받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냥 맨몸으로 시킬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도 주시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마음> 이것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리게 되면, 하늘나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올 한해 2018년. 하나님 나라의 유명인사가 됩시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예, <순종하는 마음>뿐입니다.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올 한해 주님께 우리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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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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