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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2 - 비(悲)
2020년 2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4節
“悲しむ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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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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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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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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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두 번째 시간으로서 <애통하는 자>(悲しむ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비(悲)’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기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슬플 때도 있습니다. 슬픈 일이라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상황을 떠올리십니까. 사실 힘들다거나 괴로운 상황은 어느 정도 상상이 됩니다만, 막상 슬프다고 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사람의 죽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이나 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슬프다는 감정의 대표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悲しむ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 등장하는 “애통하는 자”는 원어에서 <호이 펜둔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에 대해서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보았을 때 저는 아, 참으로 절묘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애도를 뜻함과 동시에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애통함에 대한 진정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분명히 애통해야 하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이요, 둘째는 우리 이웃의 죽음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분은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음? 예수님의 죽음과 이웃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야 한다면, 그렇다면 빠진 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 죽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굳이 나 자신의 죽음을 뺀 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애통해야 할 내 죽음은 애통해야 할 예수님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애통해야 할 첫 번째 죽음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단순하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머리는 가시로 만들어진 관을 쓰심으로 인해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시고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올라가셔서, 거기서 팔과 다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 사람을 매다는 형벌은 예수님만 당하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있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것이 형벌 중에서도 상당히 잔혹한 형벌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것을 생각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왜 죽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냥 생각해본다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출혈과다로 사망하거나, 아니면 팔과 다리를 못 박혔기 때문에 그 고통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실제로 결정적인 사망 원인은 호흡을 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십자가에 사람을 매달게 되면 온몸이 축 쳐지게 되는데 이 상태로는 폐가 눌려서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몸을 위로 올려서 가슴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못에 박힌 팔과 다리로 인해서 온몸이 통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조금 무서운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1분 1초라도 빨리 목숨이 끊어지는 편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못 박힌 팔다리의 고통, 그리고 호흡을 할 수 없는 고통을 오랜 시간 동안 겪게 만드는, 대단히 잔인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는 얼마 후에 죽으셨을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까지 얼마 동안이나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는 그 시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봅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彼らが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のは、午前九時であった。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하는 점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시간은 유대식 시간입니다. 그래서 삼시, 육시, 구시는 지금의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가 됩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로마식 표기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죽으셨냐 하면, 다른 복음서에도 나옵니다만,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
“44.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さて、時はすでに十二時ごろであった。全地が暗くなり、午後三時まで続いた。
太陽は光を失っていた。すると神殿の幕が真ん中から裂けた。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제육시, 그러니까 오후 12시가 되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온 세상에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어둠은 제구시, 그러니까 오후 3시까지 이어지더니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숨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로 매달려 계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머리는 가시관에 의해 피로 흐르고 온몸은 채찍에 의해 살이 찢긴 상태에서 피범벅이었습니다. 어디가 눈 코 입인지 알 수 조차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셨습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일곱 번이나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언덕까지 오르시고는 팔다리에 못이 박힌 채로 힘들게 호흡을 하시면서 6시간 동안이나 매달려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했었나요. 사람들은 대단히 잔인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모욕을 당하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あざけ)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彼は神に拠り頼んでいる。神のお気に入りなら、今、救い出してもらえ。『わたしは神の子だ』と言っているのだから。」
イエスと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強盗たちも、同じようにイエスをののしった。

참으로 끔찍한 시간입니다. 전날 밤 밤중에 체포된 다음부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를 두고 슬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슬프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까지만 보고 느끼는 슬픔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슬픔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느껴야 하는 슬픔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베드로전서 2장 24절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그와 같은 끔찍한 형벌을 받았으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사람이 와서 우리를 끌고 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벌금 얼마 정도 내면 풀려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받았더니 사형도 아니에요.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의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겠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채찍에 맞고 모욕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리고는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너는 이제 가도 된대요. 네 죄가 모두 해결 되었으니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습니까? 아니요.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에 느끼는 마음이 바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고통을 예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애통을 알아야 사랑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애통을 알아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 받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돌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애통해야 할 두 번째 죽음인 이웃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모두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외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기쁠 때나 어려움을 겪을 때나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답이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되신 인도자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많은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 사람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옥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6장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6절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その期間、人々は死を探し求めるが、決して見出すことはない。死ぬことを切に願うが、死は彼らから逃げて行く。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요?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영혼에 대한 애통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도소는 형기가 끝나면 나올 수나 있지요. 그러나 지옥에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 하물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서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저쪽에서 전철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선로 쪽으로 걸어가요. 가만히 있으면 선로 쪽으로 떨어져서 큰 일이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잡아야죠.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학교나 회사에서 내가 아주 미워하는 사람, 아니면 나를 아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역시 전철이 저쪽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스마트폰만 보면서 선로 쪽으로 걸어가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민이 되시나요? 고민될 게 뭐가 있습니까. 막말로 싸울 때 싸우더라도, 따질 때 따지더라도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나중에 화해할 기회도 생기고 화목해질 기회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우리가 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인가요? 잘나서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장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그와 같이 빚진 자라고 생각하니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나 하면 바로 다음 구절,

로마서 1장 15절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전세계가 이른바 코로나19라고 하는 폐렴 바이러스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보니까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고 여러 교회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기 때문에 폐렴이 발생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 동안 그래도 어느 정도 잘 막아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불과 며칠 전부터 갑자기 대구에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인 신천지를 통해서 갑자기 하루에도 몇 십 명씩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또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사이비 종교집단들한테 벌을 내려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집단이 잘하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거기는 분명히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많은 교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기존 교회가 공격을 한다면 그게 올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기존 대형 교단이나 대형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정도로 의롭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그와 같은 신흥종교집단들이 생겨난 원인은 기존 교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교회들이 돈에 눈이 멀고, 세상 권력에 눈이 멀고, 정욕에 눈이 멀어서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신흥종교가 판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신천지만이 아니라 모든 신흥종교집단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물이나 빵이 있는데, 지금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눈 앞에서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물을 안 주겠습니까. 지금 이상한 신흥종교집단 사람이나, 하물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내 눈 앞에서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빵을 안 나누어 주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밉더라도 일단 살려놓고 봐야지요. 그래야 전도를 하든 화해를 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모르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물며 기존 교회를 공격하기도 하는 나라나 신흥종교집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역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 구원 받지 못한 이웃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로해주십니다. 치유해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치유와 문제 해결과 기도 응답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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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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