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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회 예수님과의 만남
2020년 10월 4일 설교 (로마서 강해 5)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2절 신약 239페이지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9節~12節
“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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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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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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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 イエス様との出会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9절~10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0절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10.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우리가 시간 관계상 적어도 두 가지 시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의 시각입니다. 그는 이제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이방인에게 주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 보더라도, 물론 국내 선교를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본처럼 기독교인구가 적은 나라만이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처럼 기독교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목회를 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에서 목회를 하게 될 경우 외국에서 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문제될 부분이 좀 적기는 하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선교를 하게 된다면 비자 문제가 걸리게 됩니다. 요즘은 며칠이나 몇 개월 정도 관광으로 외국을 방문한다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곳도 많지만, 그 나라에 정착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비자를 발급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나라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바뀌기도 하고 하니 해외에서 사역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이 비자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도 사실 이 비자문제 때문에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서 도합하면 한 5개월 정도나 이산가족이 된 상태로 지내야 했었습니다. 입국관리국도 여기 군마현에 있는 다카사키 출장소에도 갔다가, 동경에 있는 입관에도 갔다가, 거기서는 담당자와 면담까지도 하기도 하고 해서 아무튼, 지난 2018년에는 1년 동안 그 비자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고 정말 얼마나 막막해지는지 모릅니다.

해외선교에 대한 어려움은 물론 지금과 바울 당시 때와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외국에 간다는 것이 국내에서의 이동보다 어려움이 동반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말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방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때로는 아무도 안 알아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외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꿈이나 환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뭐, 만나셨다고 하니 정말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무슨 흔한 그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저는 모르지요. 저 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저기 중심이 예수님이라고 해요. 저 그림을 본다 하더라도 글쎄요.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옷이라도 좀 입고 계시지 왜 저렇게 벗고 계실까 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습니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보아도 글쎄요. 이런 말을 하면 좀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명화다 뭐다 하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좀 표정들이 대체적으로 무서워요. 어떻게 좀 더 자연스럽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기도원에 갑니다.

물론 기도를 하는 것 중요합니다. 금식을 하는 것도 성경적인 것이지요. 저도 기도원에 몇 번 가보았습니다만, 거기 가면 일상에서 떠나와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해서 꽤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금식을 해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산속에 가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남녀가 연애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서로간에 있어서 어느 쪽이 상대방을 더 보고 싶어할까. 그래서 아무래도 상대방이 나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내가 더 보고 싶어하면 왠지 손해를 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야기도 한다고 해요. 남녀가 연애를 할 때, 맨 처음에 누가 먼저 좋아했냐 하는 것이죠. 이럴 때에도 서로 미룬다고 하지요? 네가 먼저 좋아했다. 아니다 네가 먼저 좋아했다. 뭐, 그러면서 다투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건 다툰다 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과 나, 어느 쪽이 서로를 보고 싶어 할까요. 어느 쪽이 먼저 서로를 사랑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 믿기가 쉽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고 은혜가 넘치고 축복이 넘쳐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어떻게 된 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다들 잘 살고, 그래도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나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이고, 도대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누구누구는 저렇게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예수님을 믿는 나는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만 생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

솔직히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누가 나 믿으라 그랬어? 네가 좋다고 네 마음대로 믿었던 것 아냐.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하는데? 싫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이 가벼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고 계신가요?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한 거야.”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일서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 내가 너를 먼저 택했어.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어. 그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다 책임져줄게.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러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나요? 예수님 믿는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20절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悪者には将来がなく、悪しき者のともしびは消えるからだ。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이 적힌 시기는 솔로몬 왕 때이니까 대략 기원전 9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00년 이상 옛날에도 지금과 똑같이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에서 볼 때 한국은 서쪽에 있습니다. 여기 한국에 가려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까. 그렇죠. 목적지인 한국이 서쪽에 있으면 서쪽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습니다.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아니, 바보같이 한국은 동쪽인데 왜 서쪽으로 가고 있어?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서쪽으로 간 사람은 한국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서쪽으로 간 사람은 자기 힘으로 열심히 뛰어갔고, 동해바다를 자기 힘으로 헤엄쳐서 건너려고 하다가 그만 빠져버렸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은 거기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먼저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만 가지고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광야로 나왔을 때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결별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롯에게 먼저 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네가 가는 길을 먼저 택하면 나는 그와 다른 길을 가겠다.

그러자 롯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됩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사막에서는 무엇보다도 물이 많은 곳이 좋은 땅이지요. 그런데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까 물이 넉넉해서 그 모습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애굽 땅처럼 보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롯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땅이 어디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죄악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참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꾸만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자꾸만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호세아 11장 8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エフライムよ。わたしはどうしてあなたを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イスラエルよ。どうしてあなたを見捨て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アデマのように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ツェボイムのように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わたしの心はわたしのうちで沸き返り、わたしはあわれみで胸が熱くなっている。

여기서 <아드마(アデマ)>와 <스보임(ツェボイム)>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희들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 같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먼저 택해버린 것이 잘못이요. 먼저 사랑한 것이 잘못이지요.
先に選ん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先に愛して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그렇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먼저 택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만나러 오셨습니다. 제아무리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는 것보다 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까 일본의 한 패럴림픽 대표선수를 소개하는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수의 좌우명을 써달라고 하니까 “기적은 없다”라고 적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로지 연습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연습 없이 게으름을 피워도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기적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의 말로서 본다면 정말 멋진 말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으로 보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코로나인지 뭔지가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해결해줍니까. 뉴스에 보면 돈 많은 사람들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영국이나 브라질 총리도 코로나에 걸렸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며칠 전에 보니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영부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백악관이 어떤 곳입니까. 핵전쟁이 나도 무사하다고 하는 곳이 백악관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미국 대통령이 타는 전용차량은 별명이 비스트, 짐승, 야수라고 하는데, 정말 짐승이나 야수라 불릴 정도로 탄탄하고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할 때에는 이 자동차까지도 비행기로 운반한다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씁니다.

자고로 미국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권력, 세계 최강의 군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니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보내려고 하는데 바로 왕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의 장남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서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바로의 장남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바로 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권력보다도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코로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마치 깊은 늪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회복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그 늪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갖고 서로가 안위함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 인해서 믿음을 통해 힘을 얻게 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축복, 영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막혔던 것이 뚫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문들은 때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문과,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문입니다. 축복의 문과 저주의 문,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가장 믿을만하지 못한 방법은 다수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자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다수결로 선택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올바른 선택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드리는 문을 여시면 됩니다. 그 문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문이요, 기뻐하시는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생명의 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문, 축복의 문, 생명의 문을 활짝 열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맛 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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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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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회 예수님 것으로서의 사명
20209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6절~8절 신약 239페이지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章6節~8節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ローマにいるすべての、神に愛され、召された聖徒たちへ。私たちの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 恵 みと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りますように。まず初めに、私はあなたがたすべてについて、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私の神に感謝します。全世界であなたがたの信仰が語り伝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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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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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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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 것으로서의 사명” イエス様のものとしての使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1장 6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

여기서 <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1장 5절을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서 순종하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인 <그들 중에서>라고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장 6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우리도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 보면 이 번역,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것> 그러니까 소유격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무슨 번역판을 사용해야지만 된다고 하면서, 옛날에 어떤 기독교 신문을 보니까 아주 신문광고까지 내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은 어디가 틀렸다, 어디가 잘못되어 있다, 하는 그런 내용을 싣기도 하는 분들이 계신데, 자꾸 이런 것에 휩쓸리다 보면 성경을 읽을 때 은혜가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안 들어와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고, 그러면 뭐가 맞냐 하면 무슨 무슨 성경을 써야지만 된다고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잘 들어보면 결국 그 사람, 자기가 하는 말이 맞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 하는 이야기예요.

이와 같은 일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외국에서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전에 미국에 보니까,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이 NIV라는 성경이 있는데, 이 성경은 어디가 틀렸고 어디가 잘못됐고 하는 것을 아예 책으로 출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좀 문제가 있는 성경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인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성경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 번역을 한 것이고 다양하게 검증된 책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혹시 이 성경은 좀 이상한 것이 아닌지 궁금할 경우에는 저한테 물어보시거나 아니면 다른 목사님께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한글 개역개정이나 일본 신개역2017에 보면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본문 내용을 따라 말씀을 전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말 그대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금은 로마 쪽에 보면 바티칸도 있고 큰 교회들도 있습니다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사실 바울은 아직 이 당시에 로마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방지역인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이를 알고 로마에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라고 하는 점 또한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오늘 6절 말씀에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가 본다면 그다지 감동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법이나 성경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추측입니다만, 그 당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하더라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당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라고 하는 말은 크나큰 힘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육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만, 영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인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한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질문도 선택지가 있습니다만, 조금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끝까지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질문입니다. 우리는 방금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의 것일까요.

1번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2번 기타

자, 제 질문 취지를 아시는 분들께서는 어쩌면 고개를 좀 갸우뚱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저는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제가 드리는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대부분 그게 정답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자, 그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입고 계신 옷,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스마트폰, 누구의 것입니까. 예, 혹시 남의 옷을 입고 계시거나, 뭐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만, 혹시 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시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대부분 자신의 옷을 입고 있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이나 스마트폰이 여러분 것이라는 이유가 여러분이 직접 만드셨기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 옷 정도는 솜씨가 좋다면 직접 만드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처음부터 조립해서 자기고 다시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손수 만들지도 않은 옷인데도 불구하고, 손수 납땜질을 해가면서 조립한 스마트폰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것이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반드시 자기가 돈을 내고 사야지만 되는 것인가요?

그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 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습니다. 무엇으로 값을 치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악 속에 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1장 7절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ローマにいるすべての、神に愛され、召された聖徒たちへ。私たちの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恵みと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りますように。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넘쳐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 분은 어린이집 교사에요. 그런데 이 분이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예전에 탈북자 가족 중에서 그 어린이를 돌봐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국의 일반 아이들과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무슨 물건을 쓰라고 주어도 조금 쓰다가 아무데나 내팽개쳐버린대요. 그리고 전혀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무래도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까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누구누구야, 이건 네 것이니까 네 이름을 적어놓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해. 하고 가르쳤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 우리가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가만히 할렐루야 하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さあ、わたしは歌おう。わが愛する者のために。そのぶどう畑についての、わが愛の歌を。わが愛する者は、よく肥えた山腹に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 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극상품 포도나무, 샤인 머스캣이나 거봉 같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튼튼하게 자라기 위한 모든 환경을 조성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들포도가 맺혔습니다. 최고급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키었는데, 결과적으로 맺힌 것은 짐승 사료로도 쓸 수 없는 들포도가 맺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이사야 5장 4절~6절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わがぶどう畑になすべきことで、何かわたしがしなかったことがあるか。なぜ、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のに、酸いぶどうができたのか。
さあ、今度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知らせよう。わたしが、わがぶどう畑に対してすることを。わたしはその垣を取 り払い、荒れすたれるに任せ、その石垣を崩して、踏みつけられるままにする。
わたしはこれを滅びるままにしておく。枝は下ろされず、草は刈られず、茨やおどろが生い茂る。わたしは雨雲に命じて、この上に雨を降らせないようにする。」

하나님께서는 이를 무섭게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밭의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데 큰 빚을 졌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을 정도의 빚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취업도 할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을 누가 써주겠습니까.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요. 법적으로 볼 때 개인파산, 자기 파산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채무가 면제됩니다. 모든 빚이 해결돼요.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채무가 면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죄인이었습니다.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은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반복해서 죄를 지어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는 자기가 무거운 죄인인지 아닌지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예외인가요? 아니요.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얼마나 많이 가족이나 이웃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른 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죄,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내 죄가 햇빛을 쬐면 드러나듯 점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모두 완전히 해결해졌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면 극상품 포도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혔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하는 포도밭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극상품 포도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자,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는 주관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をエデンの園から追い出し、人が自分が取り出された大地を耕すようにされた。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우리 마음의 땅을 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인 것입니다.


우선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작정 땅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나무를 심기 위해 바치겠다고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땅을 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무엇으로 땅을 갈겠습니까. 설마 손으로 갈아요? 그러면 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대로 갈아보지도 못하고 금방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총이나 칼로 갈아요? 연필로 갈아요? 아닙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 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땅을 갈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올바른 도구, 바로 괭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있는 힘을 다 해서 갈려고 해 봤자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땅을 올바로 갈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갈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괭이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경작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밭을 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 괭이질을 하면 그만인가요? 아닙니다. 아침이고 밤이고 반복적으로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괭이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단단했던 땅이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바위나 돌멩이들이 튀어나옵니다. 잡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그대로 놔두면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도, 아무리 좋은 나무를 심어도 다 말라 죽어버립니다. 이런 바위나 돌멩이나 잡초들을 쑥쑥 뽑아서 내버려야지만 보들보들하고 기름진 옥토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은 옥토가 되면, 이제 극상품 포도를 심으면 극상품 포도가 나고, 극상품 야채를 심어도 극상품 야채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것으로 끝인가요? 포도를 심었어요. 포도나 났어요. 포도를 먹었어요.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다면, 포도나무가 죽으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배를 시켜서 늘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8절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まず初めに、私はあなたがたすべてについて、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私の神に感謝します。全世界であなたがたの信仰が語り伝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 하더라도 작은 컵에 담아서 내버려 둬보십시오. 며칠 지나면 냄새가 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우리 안에만 가두어놓는다면 이는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척을 해봐도, 아주 고집이 세요. 남의 말을 안 듣고 그 마음이 아주 단단해요.

또는 기도도 많이 하고, 방언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는데 그 마음 안에 올바른 성경말씀이 없어요. 꿈 이야기를 하고 환상 이야기를 하고 예언 이야기를 하고, 도저히 그 마음 안에 성경 말씀이 없어요.

이렇게 된다면 그 마음은 단단해져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항상 마음이 아주 보들보들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는 언제나 입에 달기만 한 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시련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항상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괭이로써 매일매일 부지런히 행함이라고 하는 괭이질이 된 보들보들한 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 고난을 심어도 극상품 은혜라는 열매가 맺히고, 극상품 시련을 심어도 극상품 평강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극상품 고난과 극상품 시련을 주세요? 예, 그렇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야고보서 1장 2절~3절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私の兄弟たち。様々な試練にあうときはいつでも、この上もない喜びと思いなさい。
あなたがたが知っているとおり、信仰が試されると忍耐が生まれます。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더욱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극상품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신 우리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 앞에 좌절은 없습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로지 은혜와 평강이 넘쳐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고백과 말씀의 괭이로써 우리의 마음을 갈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불신의 바위나 돌멩이들, 이 세상 근심걱정이라는 잡초들을 모두 깨끗하게 뽑아내 버리고는, 우리 일생 속에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열매 맺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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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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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회 순종하는 그릇
20209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5절 신약 239페이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1章5節
“この方によって、私たちは恵みと使徒の務めを受けました。御名のために、すべての異邦人の中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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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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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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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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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순종하는 그릇” 従順する器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 다섯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대단히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신 모습은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만, 만약에 사도행전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이 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고,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책 이름이 사도행전이긴 합니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선지자를 통해서, 때로는 천사들을 통해서 역사하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갑자기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시더니 이제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 위에 성령님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 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4장 25절~27절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これらのことを、わたしは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間に話しました。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は、世が与えるのと同じようには与えません。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ひるんではなりません。


요한복음 15장 26절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 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반복해서 성령님이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은 앞서 살펴본 사도행전 2장 1절~4절로 인해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부 극소수 선지자들만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야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 성령을 부어주신 이후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 어떤 때는지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 이후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이제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그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행전이라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핵심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도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우선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중에서 어느 쪽이 이스라엘 전도에 적합하고, 어느 쪽이 이방인 전도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두 사도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비교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도 베드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그가 살던 곳은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벳새다(ベツサイダ)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이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 이름의 뜻은 “어부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동네에 여러 직업이 있는 사람 중의 어부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어부의 일밖에 모르는 사람, 당시에는 의무교육이나 그와 같은 제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철이 들고 난 다음부터 그저 고기잡이만 해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강림 사건 때에 그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니까 아무리 많이 배우지 못했기는 하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아무리 못 배운 베드로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니까 설교를 한 번 하자, 3천 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바울은 어떤지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이와 같은 구절로 볼 때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キリキアのタルソ)라고 하는데, 당시 이 곳은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였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이라고 맨날 예수님한테 혼 나고, 자기들은 맨날 잘난 척이나 하고, 결국 대제사장과 결탁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장본인들 중 하나입니다만, 사실 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 본다면 지도자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또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고 하는데, 사도행전 5장 34절에 보면 그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학이라고 하면 캠퍼스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님들 계셔서 수업을 듣고 졸업을 하고 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느 선생님에게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로 좋은 학교,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배경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장 27절~29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そこで、千人隊長はパウロ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に言いなさい。あなたはローマ市民なのか。」パウロは「そうです」と答えた。
すると千人隊長は言った。「私は多額の金でこの市民権を手に入れたのだ。」パウロは言った。「私は生まれながらの市民です。」
そこで、パウロを取 り調べようとしていた者たちは、すぐにパウロから身を引いた。千人隊長も、パウロがローマ市民であり、その彼を縛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恐れた。

그를 재판하고 있는 천부장은 지금으로 본다면 외국으로부터 이민을 와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어렵게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이지요.

자, 이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바울은 대도시에서 자랐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유대인이었겠으나 구체적인 지파나 집안 내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내세울만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반면에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바리새파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중에서도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고기잡이 집안이었는데, 바울은 쉽게 말해서 훌륭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했었으나, 바울은 고급 관료였습니다.

자, 지금 이 두 사람을 이용해서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를 벌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본다면 누가 유대인 선교에 적합하고, 누가 이방인 선교에 적합하겠습니까.

이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제게 말을 해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어느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래요. 지인들 중에 한국 명문 사립대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는 서울대를 나왔는데, 미국에 가서 얼마 안 되어서 미국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도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그 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들이 나온 그 명문 사립대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뭐 그 미국인이 한국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대학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고, 그 학교를 나온 한국인 친구가 좀 실망을 하더래요.

그래서 서울대를 나온 그 분이, 아무리 그래도 서울대는 알겠지, 하고, 아, 자기는 서 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때까지 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국 학생 표정이 아주 밝아지더래요. 그래서, 그래, 역시 서울대 정도 되면 이 미국인 친구도 알아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미국인이 의외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미국인 대학생이 뭐라 그랬냐 하면 아주 활짝 웃으면서 “Oh, I know Seoul! I know Seoul Olympic!”

아하! 나 서울 알아! 서울올림픽 알아! 그랬다는 것이에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 미국인 친구는 서울대라고 하는 대학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를 나도 알아!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지요.

뭐, 물론 그 미국인 대학생 친구가 너무 뭘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이 일을 경험하고 느낀 것이, 아, 그래 한국에서는 그렇게 죽어라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다 우물 안 개구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허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보았을 때, 아무리 바울이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왔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급 공무원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나 알아주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와~ 정말 대단하네~ 뭐 그러면서 인정해줄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한발자국 나가면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그리스 같은 외국에 가서 아~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베냐민 지파고 바리새파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나요.

반면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제 한 번 설교를 하니까 수 천명이 모여들어요. 하지만 화려한 배경이나 학벌이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알아주는 배경과 실력을 갖춘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맡고, 그러한 학력이나 배경 같은 것이 없는 베드로는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방인 선교로 돌리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학벌도 배경도 없는 베드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더니 3천명이 모였다고? 그렇다면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적어도 3만 명은 모이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혼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많이 부족한 저였더라면,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사도행전 13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6절~41절까지 보면 안식일 날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이 작심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날은 반응이 좀 괜찮았어요.

사도행전 13장 42절~43절
“42.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二人が会堂を出るとき、人々は、次の安息日にも同じことについて話してくれるように頼んだ。
会堂の集会が終わってからも、多くのユダヤ人と神を敬う改宗者たちがパウロとバルナバについて来たので、二人は彼らと語り合い、神の恵 みにとどまるように説得した。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랐다고 합니다. 반응이 좋으니까 다음 주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 봐라. 역시 내 적성은 유대인 선교야……. 어쩌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주 안식일입니다.

바울은 역시 그 날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무리들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여든 유대인들의 반응이 좀 이상해요.

사도행전 13장 44절~45절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次の安息日には、ほぼ町中の人々が、主のことばを聞くために集まって来た。
しかし、この群衆を見たユダヤ人たちはねたみに燃え、パウロが語ることに反対し、口汚くののしった。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것을 보고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목사나 전도사라고 하는 직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 말씀을 전할 사람을 섭외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했었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그 자리에는 평소에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설교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면 질투가 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많이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시기가 나니까 바울이 말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고 트집을 잡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화가 난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6절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そこで、パウロとバルナバは大胆に語った。「神のことばは、まずあなたがたに語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あなたがたはそれを拒んで、自分自身 を永遠のいのちにふさわしくない者にしています。ですから、見なさい、私たちはこれから異邦人たちの方に向かいます。

이봐, 유대인들아, 너희들이 먼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왜 이를 안 받아들이냔 말이야. 너희들 자꾸 이러면 차라리 이방인한테 가는 수가 있어?

자, 바울이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아이구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바울을 만류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ところが、ユダヤ人たちは、神を敬う貴婦人たちや町のおもだった人たちを扇動して、パウロとバルナバを迫害させ、二人をその地方から追い出した。

참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귀와 명예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전하기로 작정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렇다면 좀 일이 술술 풀려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도 일이 꼬이게 되니 바울도 참 답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사실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울에게 안수를 줄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 그러니까 바울더러 이방인 선교를 하라는 주님의 뜻을 바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13장 47절에서 바울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主が私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し、地の果てにまで救いをもたらす者とする。』」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서 빨리 이방인들에게로 향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있다 보니까, 사람들을 충동해서 아예 내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울을 가리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면 축복을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예,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면 축복, 그것도 큰 축복,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러분 앞에 나타나셔서, 너를 내 그릇으로 삼겠다, 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기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1번 기쁘다. 2번 두렵다.

자, 우리는 당연히 기쁘다, 1번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한 그릇으로 택해주셨다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 구절입니다. 이사야 30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30장 12절~14절
“12.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13.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14.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言うことを退けて、虐げと悪巧みに拠り頼み、これに頼った。
それゆえ、このあなたがたの不義は、そそり立つ城壁に広がって今にもそれを倒す裂け目のようになる。その倒壊は瞬く間に来る。
その倒壊は、陶器師の壺が容赦なく打ち砕かれるときのよう。その破片の中には、炉から火を取り、水溜めから水を汲むかけらさえ見つからない。」

지금도 실제로 손으로 도자기를 만드시는 분들을 보면요, 가마에서 구워 나온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망치로 박살을 내버립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가마에 넣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다 구워 나온 상태에서는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깨버리시냐 하면 그 조각을 가지고 불을 붙이거나 물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완전히 박살내 버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목이 말라요. 그래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컵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물을 안 마셔요? 아니요. 다른 컵을 꺼내서 마시면 그만입니다.

에스더 4장 14절을 봅니다.

에스더 4장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이제 유다 민족이 망하게 생겼는데 왕비 에스더가 자기 목숨이 귀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겠지만, 너는 망한다고 에스더의 의부인 모르드개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인데 얼마나 큰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그 그릇이 하나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거부한다고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포기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그 그릇을 아끼지는 않으십니다. 흔적도 없이 박살을 내신 다음, 새 그릇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꼭 목사나 교역자, 또는 직분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내가 지금 하는 일, 이는 모두가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거기 있고, 내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 후에는 주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거부한 채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다른 그릇을 선택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 선교를 하겠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시라고, 내가 이방인 선교보다는 유대인 선교가 더 낫지 않겠느냐고 끝까지 우겼다고 한다면, 주님은 결국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을 깨고 다른 그릇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릇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희망적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려갈 길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릇, 예수님의 그릇으로서 바울이 끝까지 순종하여 의의 면류관을 얻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남겨진 삶 속에서 끝까지, 순종하는 그릇으로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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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회 하나님 아들의 사랑
20209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신약 239페이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 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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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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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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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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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아들의 사랑” 神の子の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 번 통독을 해보려고 할 때, 구약을 보면 창세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경우를 보면 좀 어렵잖아요. 참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럼 신약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만, 그 때 처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비가 바로 이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계보입니다.

길이는 짧아요. 그래봤자 한 장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처음 읽는 분들한테는 이게 참 난감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 보면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래요. 뭐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죠. 참 어려운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계보의 제목이 무엇이죠?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ダビデの子、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계보인 것입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고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읽어보면, 이는 무슨 암호나 주문처럼 들리는 지루한 구절입니다만, 이러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이는 대단히 큰 은혜가 됩니다.

정말 구약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쫙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신약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계보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장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계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서 준비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다윗에서 요셉을 거쳐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예비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마태복음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후에 계신 분이신가요?

누가복음 20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44절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が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人々は、キリストを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ですか。
ダビデ自身が詩篇の中で、こう言っています。『主は、私の主に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ですから、ダビデがキリスト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す。それなら、どうしてキリストがダビデの子なのでしょう。」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이 쓴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主は 私の主に言われた。 「あなたは 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 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이 구절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는 <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주>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처럼 이미 주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그 당시 이미 예수님은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59절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に向かって言った。「あなたはまだ五十歳になっていないのに、アブラハムを見たの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る前から、『わたしはある』なのです。」
すると彼らは、イエスに投げつけようと石を取った。しかし、イエスは身を隠して、宮から出て行かれた。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계보는 조금 이상해지지요. 즉, 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계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준비단계를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이 부분은 제가 몇 번이나 말씀 드려왔던 부분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십니까.

요즘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떤 분의 설교를, 제가 얼마 전에 들어보았습니다만,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등장하는 빛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라, 이 빛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아멘! 그럽니다.

그래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을 예수님이라고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빛을 만드시게 되는데, 이 빛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뜻이 되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예수님 또한 이 온 세상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 처음 등장하십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이 등장하신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좀 여담입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순서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자, 창세기 1장 1절~3절 중에서 1절과 2절의 순서를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地は茫漠として何もなく、闇が大水の面の上にあり、神の霊がその水の面を動いていた。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맨 처음에 혼돈한 상황,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고 빛을 만드십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굳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라고 하는 구절을 가장 처음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 가장 처음에 예수님을 넣으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즉, 이렇게 됨으로 인해서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도 예수님으로 끝나는 완전한 예수님의 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이는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만 끝났다고 하면 이는 예수님에 의한 구속사역의 50% 달성? 아닙니다. 0%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전철을 탈 때, 돈을 내고 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출입구에 그 표를 찍었어요.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나요? 아닙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렇지요. 문이 열려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내고 표를 사고, 그 표를 개찰구에 찍 하고 댔다 하더라도, 문이 안 열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예수님께서 아무리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없다면 이는 구원으로 가는 출입문이 안 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이 있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다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정해주십니까. 그렇지요. 죄값이 충분히 치러졌는지 아닌지는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 내 아들이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다.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오히려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십자가를 통한 제사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실 전적인 권한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부활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 전에도 계셨고, 아브라함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잠시 오늘도 문제를 내볼까 합니다. 오늘은 연속해서 두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평소부터 성경을 얼마나 잘 읽고 계신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먼저 첫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얼마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올라가셨을까요.

1번 부활하시고 3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2번 부활하시고 1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3번 부활하시고 10일 이상 계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어떤 분은 부활하신 후에 곧바로 서둘러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 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선택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보기에는 물론 놀랐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 용기 있는 제자 하나가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예수님! 하고 덥석 끌어 안으려 했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뜨겁게 끌어 안을 수 있었다.
2번 투명인간처럼 끌어 안을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께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아있던 구절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イエスは彼女に「マリヤよ」と言われた。マリヤはふり返って、イエスにむかってヘブル語で「ラボニ」と言った。それは、先生という意味である。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さわってはいけない。わたしは、まだ父のみ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だから。ただ、わたしの兄弟たちの所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またあなたがたの父であって、わたしの神またあなたがたの神であられるかたのみもとへ上って行く』と、彼らに伝えなさい」。

자,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마리아가 랍오니……라고 하는데 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랍비>보다도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다는 것,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 왠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 수가 없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읽어드린 성경은 개역한글, 그러니까 우리가 예전에 사용했던 성경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는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자, 개역개정판 요한복음 20장 17절만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すがりついていてはいけません。わたしはまだ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です。わたしの兄弟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であり、あなたがたの父である方、わたしの神であり、あなたがたの神である方のもとに上る』と伝えなさ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의 반가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만류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을 끌어 안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자,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가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론 뭐, 사전에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요. 특히 이성간에는 사전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 만이 아니라 제3자의 동의까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끌어안았다가는 큰 일 나지요. 더구나 코로나가 난리를 치고 있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 가지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복잡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끌어 안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하냐 하면 뭐, 육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육체가 뭐예요. 예, 살과 뼈입니다.

자,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있었다면, 뜨겁게 끌어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없었다면 끌어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택지를 바꾸어보겠습니다. 1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있었다. 2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의심하시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38절~39절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제 장차 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거에 육신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은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였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エノクは神とともに歩んだ。神が彼を取られたので、彼はいなくなった。


열왕기하 2장 11절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こうして、彼らがなお進みながら話していると、なんと、火の戦車と火の馬が現れ、この二人の間を分け隔て、エリヤは竜巻に乗って天へ上って行った。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위대한 선지자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데려가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우리가 에녹과 엘리야를 믿는다고 해봤자 우리의 죄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용서 받고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누가 증언해주고 계십니까.


요한일서5장 5절~6절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世に勝つ者とはだれでしょう。イエスを神の御子と信じる者ではありませんか。
この方は、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た方、イエス・キリストです。水によるだけではなく、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ました。御霊はこのことを証しする方です。御霊 は真理だ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을 해주셨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예수님을 언제 직접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그것이 아니라면 장차 훗날에 천국에 가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라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이 사랑을 알게 되셨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바로 그 날,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을, 우리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뜨겁게 끌어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아무리 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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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회 참된 복음
20209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신약 239페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 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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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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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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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복음” 真の福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를 그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강해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서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어떤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면 내가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왠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 말씀을 듣기는 하거든요.

한국의 경우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주일예배 외에도 매일 새벽예배가 있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가 있습니다. 구역예배에서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많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무슨 함정이냐 하면, 성경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은 착각,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씀은 주일예배 때도 듣고 수예예배, 금요철야, 새벽예배 때도 들었어요. 이제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휘발유를 안 넣어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듣기만 하면 소용이 없어요. 믿음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그분 들이 좋아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여러분, 이 말씀이 이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듣기만 하다 보니 믿음이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하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러면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합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자기 생각.

이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가 다 아는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에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자,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알고 있었어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겠습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목사님 말씀, 3번 자기 생각.

물론 대다수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적힌 대로 말씀을 전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만, 그러나 100%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복음을 전하셨을 때에는, 이는 99%가 아니죠. 100%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항상 매순간 매순간 100%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제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아니면 제가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와 같이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주일 예배를 포함해서 말씀을 전해드렸는데, 좀 이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물어봐야죠. 그렇다고 설교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예배가 끝나고 나서 각 교회 목사님께 물어보신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다른 교역자 분들이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물으면 그건 목사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며 꾸짖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일인가요? 목사나 교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에 대한 불순종?

여러분, 목사가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목사님한테 순종해야지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면 선지자예요?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순종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사나 교역자가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왜 모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성경강해를 시작하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첫 강해로서 창세기도 아니요 마태복음도 아닌 로마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 믿음의 축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성경말씀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에 대한 내용이 확실하게 잡혀 있으면 성경 어디를 읽어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와 같이 강해라고 한다면 이를 몇 주에 나누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를 살펴봄으로 인해서 성경 전체를 함께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사도행전 내용도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라고 해서 로마서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1년, 아니면 평생 동안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면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이는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들 중에서 저자가 분명히 밝혀진 책 중 하나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유대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는 탄탄한 배경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교육도 받았다고 하니, 옛날 우리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 집에 태어나서, 성균관에서 배우고,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를 하고는 장래가 보장된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른바 엄친아. 일등 신랑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대까지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그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고는 부활을 했대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비웃었겠지요. 사이비 집단이 있는 것은 비단 요즘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스승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37절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先ごろテウダが立ち上がって、自分を何か偉い者のように言い、彼に従った男の数が四百人ほどになりました。しかし彼は殺され、従った者たちはみな散らされて、 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
彼の後、住民登録の時に、ガリラヤ人のユダが立ち上がり、民をそそのかして反乱を起こしましたが、彼も滅び、彼に従った者たちもみな散らされてしまいました。

그러니까 옛날에도 이상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교주가 죽거나 망하면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던 바울은, 역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남긴 성경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냐?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지만 뭐, 이미 죽었다고 하니까 어차피 저러다가 금방 또 없어지고 말겠지.

어쩌면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뭔지를 믿는 무리들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어쩌면 그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는데, 오직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무슨 이상한 사람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잖아.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청년 관리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이 무리들을 다 잡아서 일망탕진을 시켜버려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위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아래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9절~20절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そこで私は答えました。『主よ。この私が会堂ごとに、あなたを信じる者たちを牢に入れたり、むちで打ったりしていたのを、彼らは知っています。
また、あなたの証人ステパノの血が流されたとき、私自身もその場にいて、それに賛成し、彼を殺した者たちの上着の番をしていたのです。』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인지 하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가두고 때리고 온갖 학대를 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예수라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지역에까지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절~2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かして殺害しようと息巻き、大祭司のところに行って、
ダマスコの諸会堂宛ての手紙を求めた。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出し、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누구는 이른바 공무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냥 일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기만 해도 월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는 옛날에, 그것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요즘 공무원들을 보면 웬만한 일반 회사원들보다도 열심히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그저 자리만 지키는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솔선수범해서 일을 하는, 그야말로 공무원의 모범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흠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그는 열심히 무슨 일을 했었느냐. 교회를 탄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는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어디 그 뿐입니까.

훗날 바울의 열정적인 전도사역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9장 6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6절~9절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立ち上がって、町に入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告げられる。」
同行していた人たちは、声は聞こえてもだれも見えないので、ものも言えずに立っていた。
サウロは地面から立ち上がった。しかし、目を開けていたものの、何も見えなかった。それで人々は彼の手を引いて、ダマスコに連れて行った。
彼は三日間、目が見えず、食べることも飲むこともしなかった。

참으로 사람 팔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그는 당당한 고위관료로서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다메섹에 입성한 후로는 곧바로 회당으로 찾아가서 제사장으로부터 교부 받은 공문을 보이고는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말을 타고 위풍당당은 무슨, 지금 눈도 안 보이게 되어서 사람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예루살렘에서 높은 분이 오셨다고 하니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그랬을지도 몰랐습니다만, 그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예, 앞도 못 보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들 내겠습니다. 자,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다메섹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유다라는 사람의 집은 다메섹에 있는 어느 한 거리에 인접한 곳에 있었는데, 그 거리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사도행전 9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すると、主はこう言われた。「立って、『まっすぐ』と呼ばれる通りに行き、ユダの家にいるサウロという名のタルソ人を訪ねなさい。彼はそこで祈っています。

(新共同訳)直線通り

예, 그 유다의 집이 있었던 곳은 직가라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곧게 뻗은 거리라는 뜻이지요.

직가, 직선거리라고 하는 거리, 말하자면 종로 1가 2가 하는 식의 길 이름이지요. 아직도 그 직가라고 하는 거리가 남아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계속되는 내전 때문에 어쩌면 많이 파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역시 주님의 명을 받고는 직가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가서 당시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바울에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신약성경 총 27권 중에서 대체적으로 13권 정도를 바울이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읽을 때마다 적지 않게 궁금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라고는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한참 뒤의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었지요. 또한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도들로부터 직접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듣고 배웠는가 하면,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바울은 어쩌면 상하 관계에 있어야 했었겠습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서로 대등하게 교제를 한적은 있었지만 상하관계나 사제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그야말로 다른 사도들 못지않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적인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던 인물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자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するとただちに、サウロの目から鱗のような物が落ちて、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

이를 두고 일본에는 흥미로운 관용 표현이 있지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입니다. 일본어를 공부하시거나 일본어 시험을 준비중이신 분들은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지금도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이 표현은 바로 이 성경에서 온 관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떨 때 사용하냐 하면,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알게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를 알게 됨으로 인해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깨닫게 된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바울은 당시 성경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의문이 있는 부분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한테 아들이 있다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해결해준다는 내용이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은 채 그는 꼼짝없이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었겠지요. 분명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 동안 어두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눈이 안보였으니 얼마나 어두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지식과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그런 기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그러면서 그는 사흘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떠오르고 율법이 떠오릅니다. 이사야서와 같은 선지서가 떠오릅니다.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던 성경이라고 하는 이름의 자물쇠 안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를 넣고 돌리니까,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새로운 말씀, 아니, 그야말로 완전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순식간에 성경의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그가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늘 말씀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아아, 그랬구나.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때로는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되어 오신 그대로 오셨던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비밀을 알게 되니까, 그 동안 꽉 막혔던 성경의 비밀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로 풀리게 되니까, 이제 진정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통 올림픽 같은 장거리 마라톤을 보면, 출발점과 결승점이 똑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전해드리는 말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장거리 로마서 강해도,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결승점에는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1절~2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서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로마서 강해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복음, 진정한 복음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 참된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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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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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회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
2020년 8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신약 358페이지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5章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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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 固い食物を食べるべき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번 이와 같은 고난을 내리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운다.
2번 빨리빨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예, 이는 너무나도 쉬운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모두가 다 2번을 고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죠. 내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내리셨다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에서 닥쳐보면 이게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내가 방에 있는데, 아니면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일단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작은 지진이라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언제 크게 흔들릴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는 지진이 일어나면 우선 가스부터 잠그라고 가르쳤습니다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요즘은 안전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지진 때 굳이 사람이 안 잠그더라도 자동으로 잠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지진이 일어났다 하면 무조건 책상 밑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머리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고 해요. 이게 쉬운 것 같긴 합니다만, 막상 자기한테 일어나면 순간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진도 6~7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서 있기도 힘들다고 하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평소부터 훈련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경우 1923년(大正12年) 9월 1일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고 해서 지금도 매년 9월 1일이 되면 여기저기서 다양한 훈련을 합니다. 그래야지만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절~21절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절~21절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これらの災害によって殺されなかった、人間の残りの者たちは、悔い改めて自分たちの手で造った物から離れるということをせず、悪霊どもや、金、銀、銅、石、木で造られた偶像、すなわち見ることも聞くことも歩くこともできないものを、拝み続けた。
また彼らは、自分たちが行っている殺人、魔術、淫らな行いや盗みを悔い改めなかった。


여기에 보면 지금 주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서 환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재앙이 닥쳐오고 있어요. 그러면 어서 자신의 죄를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들을 섬긴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반성과 후회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반성과 후회, 이는 비슷한 것 같긴 합니다만 엄연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몰래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는 것, 이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잠시 세상의 유혹에 못 이겨서, 너무나도 살아가기가 힘들다 보니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려고 했는데, 아이구,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경찰한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반성과 후회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반성은 그야말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지요. 이미 잘못을 저질러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생활이 어렵다 보니까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이처럼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죄를 짓이 않겠습니다. 이게 반성이지요.

그렇다면 후회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이참, 내가 그 집이 아니라 옆집을 노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그 동네가 아니라 옆 동네에 갔어야 했었는데, 그 시간이 아니라 다른 시간에 했어야 됐었는데, 하필이면 그 집에, 그 동네에, 또는 그 시간에 들어가는 바람에 잡혀버렸네……이게 후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운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내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런 후회는 백 번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주님이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빨리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욥기 5장 17절~21절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ああ、幸いなことよ、神が叱責するその人は。だから、全能者の訓戒を拒んではならない。
神は傷つけるが、その傷を包み、打ち砕くが、御手で癒やしてくださるからだ。
六つの苦しみから、神はあなたを救い出し、七つの中でも、わざわいはあなたに触れない。
飢饉のときには、あなたを死から、戦いのときには、剣の力から贖い出す。
舌のむちで打たれるときも、あなたは隠され、破壊がやって来ても、恐れることはな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때문에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다가오면,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를 합니다.


무엇을 후회합니까. 아이구, 내가 예수 괜히 믿었어. 교회 괜히 다녔어. 내가 모태신자인데, 내가 장로인데, 권사인데, 뭐, 심한 경우에는 내가 목사인데, 사모인데, 내가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냈는데,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해. 이러면서 헛된 우상을 섬깁니다.

우리가 다른 죄를 짓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를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세 가지를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제일 알기 쉬운 것이지요. 하나님,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에 대고 절을 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신명기 17장 2절~7절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町囲 みのどの一つでも、その中で男であれ女であれ、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主の契約を破り、
行ってほかの神々に仕え、また、太陽や月や天の万象など、私が命じなかったものを拝む者があり、
それがあなたに告げられて、あなたが聞いたなら、あなたはよく調査しなさい。もしそのことが事実で確かであり、この忌み嫌 うべきことがイスラエルのうちで行われたのなら、
あなたは、この悪しきことを行った男または女を町の広場に連れ出し、男でも女でも彼らを石で打ちなさい。彼ら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二人の証人または三人の証人の証言によって、死刑に処さなければならない。一人の証言で死刑に処してはならない。
死刑に処するには、まず証人たちが手を下し、それから民全員が手を下す。こうして、あなたがた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여러분, 해나 달이나 별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피조물,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고 소원을 빈다거나 하는 일도 우상숭배이고, 세상에 있는 나무나 바위 같은 것에 대고 절을 하거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요, 예수님을 버리는 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그러면 누구는 이를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할지 모르겠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8절~9절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あなたがたは神の戒めを捨てて、人間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いるのです。」
また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の言い伝えを保つために、見事に神の戒め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ます。


우리 나라의 문화나 전통은 중요합니다. 보존해야 할 것, 계승해야 할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그렇게 성경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렇게 과학을 좋아하면서도 아직까지도 건물을 짓거나 하물며 무슨 자동차를 샀다 하면 돼지머리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술잔을 올리면서 절을 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이른바 <오하라이>라고 해서 무슨 종이로 만들어진 먼지떨이 같은 것으로 이렇게 하고 그렇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사를 참배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이나 회사에도 <카미다나>라고 해서 귀신 집을 모셔놓으면서 거기에 대고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축복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5절~6절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ですから、地にあるからだの部分、すなわち、淫らな行い、汚れ、情欲、悪い欲、そして貪欲を殺してしまいなさい。貪欲は偶像礼拝です。
これらのために、神の怒りが不従順の子らの上に下ります。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내 이익을 위해서, 내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우상에 대고 절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상숭배는 이른바 이단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와 같은 교회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듣다 보면 성경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냥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약에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십자가에 달림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의 죄조차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요,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성령 하나님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못 전하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할 수 있고, 나아가 심한 경우에는 교회 지도자가 선지자라고 한다거나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주님을 전하면서 엉뚱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우상이요, 하물며 자기가 선지자라면서,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면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또한 대표적인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우상숭배, 사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우상입니다만, 그게 뭐냐 하면 기존 교회에 있는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통적인 교회에 우상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예,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맹목적, 즉 눈을 가린 채로 무조건 믿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눈을 가리느냐 하면 바로 이 성경인 것입니다.

교회에 따라서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방언을 강조합니다. 예배를 강조합니다. 금식을 강조합니다. 찬양을 강조합니다.

기도가 잘못된 건가요? 예배가 잘못된 건가요? 금식이나 방언이나 찬양이 성경적이지 않나요? 아니요. 다 좋은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를 마치 무슨 만능인 것처럼 성경보다도 더 중요시하게 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나 방언이나 금식이나 기도가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 60년대를 보면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교육수준 대단히 낮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이라고 하면 적어도 신학교를 졸업한 분들이니까 사회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대표적인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대다수 국민들은, 문맹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한테 성경을 읽으라고 한다? 이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성경을 보면 지금보다도 훨씬 가격도 비싸고, 난해한 말투였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생활은 어렵고 애들은 많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쁜데, 지금까지 봤던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건 초등학교 교과서 밖에 없는데, 그것의 몇 배나 두껍고 글씨도 작고 말투도 어려운 성경책, 거기 나오는 이름도 철수야 영희야 정도가 아니잖아요? 그걸 읽으라고 하면 누가 읽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대해서는 주일날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설교가 다고, 그 외에는 그냥 주구장창 기도하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필요한 게 한 둘이 아닌데, 기도할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몸이 아프면 금식을 하라고 해요. 성경을 모르니까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도 몰라요. 그저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래서 옛날 분들을 보면 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십니다. 금식도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몰라요.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은 깍듯이 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성경을 모르는데, 목사님이 성경에 이래이래 나와 있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 안 따를 수가 있겠어요.


이러다 보니 목사님의 권위가 너무나도 높아집니다. 목사님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라도 갖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아, 그런 것 따지면 안 된다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그것 아니었습니까.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신약 358페이지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과거에는 그야말로 젖을 먹을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 새벽예배 철야예배 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것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빠졌어요? 그렇죠. 성경 말씀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그랬기 때문에 이는 젖을 먹는 단계, 아직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어떻습니까. 물론 목사님들도 많이 공부를 하십니다만, 일반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정말 높습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같은 경우를 보면 고등학교만 나오더라도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요즘은 학교 선생님 되려면 대학교 교수님보다도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1년에 석사, 박사가 얼마나 많이 배출이 됩니까. 지금 보면 교회 목사님보다도 많이 배운 분들이 무척이나 많은 세상입니다. 이제는 무조건 목사라고 해서 지식인 대우를 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 개신교에 있어서 목사라고 하는 지위는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그저 예배를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을 뿐이고, 교회의 머리는 목사님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목사님이 대우를 받지 못하게 돼요.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경우도 발생을 합니다.

그럼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성경 읽기를 즐겨 하시나요? 아니면 안 즐겨 하시나요? 예, 그냥 여전히 목사님이 말씀해주시면 편해요. 그런데 이런 것을 오늘 말씀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젖 먹는 단계가 지나고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젖을 먹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일 때에는 젖을 먹어야죠. 단단한 것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켜요. 그러면 젖을 주고, 그리고 이유식을, 그것도 손수 먹여 주고 그러지요.

그런데 유아에서 아동, 소년, 청소년, 청년, 그리고 성년으로 몸은 점점 커가는데, 여전히 젖을 달라고 하고, 단단한 음식을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몸의 체력은 떨어지고 저항력도 약해집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야채다 고기다 해서 많이 먹고 튼튼해져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시련이 닥쳐오면 이를 이겨내면서 힘을 길러가야 하는데, 여전히 젖 줘. 분유 줘. 라고 하면, 온몸의 뼈와 근육은 발달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그리고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에이, 예수님 괜히 믿었다 하고 후회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결국 타락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꿈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어렸을 때 꼭 한 번 타고 싶었던 것이 유모차가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타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어렸을 때 그걸 타볼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제가 유모차를 타고, 손에는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것을 들고는 좋다면서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오늘날 교회 모습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6절~27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리 높은 직분을 받았어도 성경 말씀이 없다면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행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이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기도 응답도 받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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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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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회 유익한 그릇
2020년 8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1절 신약 351페이지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ピレモンヘの手紙 11節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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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유익한 그릇” 役に立つ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성경은 빌레몬서입니다. 이 빌레몬서는 1장, 그것도 25절까지 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권위가 다른 책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각 책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권위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빌레몬서처럼 짧은 책보다도 상당히 분량이 있는 창세기나 이사야서가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고 짧은 책에 적힌 내용은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닌, 짧은 책에 적혀 있든 긴 책에 적혀 있든 그 내용의 중요성 역시 우리에게는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살펴볼 이 짧은 빌레몬서에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한 번 간단한 질문부터 해볼까요? 자, 이 쪽을 봐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등등이 있고, 신약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그 책의 내용에 의해 정해진 경우도 있고, 그 책의 주요 인물 이름이 붙여진 경우, 그 책을 적은 사람의 이름, 또는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이나 받는 교회 이름이 책 제목으로 붙여진 경우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대부분 서한, 그러니까 편지 형식으로 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도 편지형식으로 적힌 책입니다만, 그렇다면 빌레몬서에 나오는 이 <빌레몬>이라는 단어는 무슨 이름일까요. 오늘은 좀 선택지가 많습니다. 선택지는 4개입니다.

1번 이 편지를 쓴 사람 이름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
3번 이 편지를 받는 교회 이름
4번 이 편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이름

자, 몇 번일까요. 평소에 성경을 읽으시는 분에게는 어렵지 않겠지요. 예, 정답은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빌레몬서 1절~2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절~2절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キリスト・イエスの囚人パウロと兄弟テモテから、私たちの愛する同労者ピレモンと、
姉妹アッピア、私たちの戦友アルキポ、ならびに、あなたの家にある教会へ。

이 두 구절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전반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 병사 아킵보 그리고 그의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당시 갇혀있었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빌레몬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해서 아마도 로마에 갇혀 있을 때인 서기 60년 정도에 적힌 서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교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네 집, 그러니까 이 편지의 수신인인 빌레몬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게 됩니다만, 이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빌레몬서에 있어서 주인공은 편지 수신인인 빌레몬이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10절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獄中で生んだわが子オネシモのことを、あなたにお願いしたいのです。

사실 이 10절이야말로 이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주요 인물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 있고, 수신인인 빌레몬, 그리고 이 편지에 등장하는 수수깨끼의 인물 <오네시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간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간구인지 한 번 바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길지만 11절~18절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18절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私は、彼を私のもとにとどめておき、獄中にいる間、福音のためにあなたに代わって私に仕えてもらおうと思いました。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オネシモがしばらくの間あなたから離されたのは、おそらく、あなたが永久に彼を取り戻すためであったのでしょう。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ですから、あなたが私を仲間の者だと思うなら、私を迎えるようにオネシモを迎えてください。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핵심 구절은 12절과 14절, 그리고 16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2절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여기서 <너>는 빌레몬일 것이며, <그>는 오네시모입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단순히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돌려보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 쪽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에 대한 기록 중에서 14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4절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이 글을 보면 참으로 묘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무엇인가 해줄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될 것인데, 그 이전에 이를 위해서 빌레몬의 승낙을 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 당신의 승낙 없이는 오네시모에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를 푸는 열쇠가 바로 16절에 있습니다.


빌레몬서 16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오네시모를 다음부터는 종처럼 대하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마치 나 바울에게 하듯이 오네시모에게도 해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본다면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우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망을 나온 것 같습니다. 바울이 11절에서 “전에는 네게 무익했다 (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 고 쓴 것으로 짐작을 하자면 그는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새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것도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면 당시로서는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습니다. 주인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끔찍한 형벌을 내릴 수도 있었고, 하물며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마저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종을 죽일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를 해방시켜줄 권한, 즉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 곁에 두고 싶었음도 불구하고 우선 빌레몬에게 보낸다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오네시모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궁금한 사람은 빌레몬이지요. 여러 책에 보면 이 빌레몬은 골로새 시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골로새는 지금 현재 터키에 있는 호나스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고 오직 빌레몬서에만 등장하는데, 빌레몬서에 보면 골로새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를 골로새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로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역시 바울 서신인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また彼は、あなたがたの仲間の一人で、忠実な、愛する兄弟オネシモと一緒に行きます。この二人がこちらの様子をすべて知らせます。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너희에게서 왔다>라고 한다면 이는 골로새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왔다고 하면, 그가 골로새에서 있을 때에는 당연히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빌레몬은 골로새인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골로새 교회는 앞서 빌레몬서 2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서야 드디어 배경이 어느 정도 밝혀졌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살았었습니다만, 거기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일입니다.

그가 어디까지 도망쳤냐 하면 당시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에게까지 오게 되었는데, 골로새에서 로마까지는 거리가 무려 2000킬로가 넘습니다. 200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시 까지의 거리가 2200킬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평지만 있나요? 거기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습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잡히면 최소한 끔찍한 고문과 형벌을 받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친 노예인데 말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돈도 없었겠지요.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 없이 달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산 넘고 바다를 건너 2000킬로나 되는 거리를 도망쳤다는 것은 얼마나 결사적인 각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달린 결과 도착한 로마에서 그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무익했던 오네시모, 누군가의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에 불과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아들>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들고 빌레몬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발걸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온 그 길을 다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주인을 자기 발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이 이 편지를 읽기도 전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울로부터 신임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빌레몬의 노예였으며, 그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주인인 빌레몬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이 빌레몬서를 손에 쥐고서 목숨을 걸고 빌레몬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지난 날의 오네시모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제 종이 아니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서 동역자로서 대우를 해달라고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익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우리는 이 구절을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천하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여러 가지 그릇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하다는 구분을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는 금이나 은 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쓴다는 것도 아니요, 나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하게 쓴다는 것이 아니라, 금이든 은이든, 나무든 질그릇이든 이를 막론하고 귀하게 쓰는 경우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을 보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컵은, 이는 꽤 좀 값이 있어 보여요. 정말 기계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든 컵 같아요. 돈을 주고 산다면 적어도 몇 천엔 정도는 할 것만 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좀 애매해요.

물이나 주스를 마시기에는 좀 작고, 녹차를 마시기에는 입이 좀 좁아요. 그렇다고 진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불편해요.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지금은 저희 집에서 양치질 할 때 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좀 고급스러운 컵이나 그릇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릇은 잘 안 써지더라고요. 아무리 예쁘고 값이 나간다 하더라도 그 그릇을 쓸만한 요리를 해먹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어쩌면 찬장 저 안쪽에 들어 있어서,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릇들도 있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반면에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들도 있습니다. 어떤 그릇은 100엔 샵에서 산 그릇들인데 이건 국을 담아도 좋고, 밥을 비벼먹을 때도 좋고, 라면을 먹을 때도 좋고, 참 편리한 그릇입니다. 요즘 100엔짜리 그릇들을 보면 얼마나 잘 나오는지 몰라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내가 많이 쓰는 그릇, 내가 참 편리하게 쓰는 그릇이 그야말로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비슷하게 생긴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은 귀하게 쓰는 그릇이요, 또는 쓰레기통이나 걸레를 빨 때 쓰는 그릇들은 천하게 쓰는 그릇들입니다. 같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항상 깨끗하게 닦고 보기 좋은 곳, 언제든지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두지만, 지저분한 그릇들, 그리고 전혀 쓰지 않는 그릇들은 제아무리 비싼 그릇이라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 유익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익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요, 유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님께 있어서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릇이 유익합니까. 정말 돈 많고 재능 많은 사람이요? 비싼 옷에, 비싼 차에, 비싼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익한가요?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처럼 예쁘고 늘씬하고 키 크고 잘 생기고, 그리고 배도 안 나오고……그래야 귀한 그릇인가요?

아닙니다. 귀한 그릇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무익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리 형편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면, 이제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훌륭한 사도라 하더라도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해줄 권한이 없어요. 오로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한테만 그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머나먼 길을 다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종교지도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신 예수님 뿐입니다. 그 두 손에 십자가의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예수님 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 합니다.

성경 요한 삼서 2절,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한 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 삼서는 빌레몬서보다도 짧습니다. 15절까지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는 대체적으로 사도 요한이 썼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15절 중에 2절이니까 두 번째 나오는 글입니다.

글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항상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이게 특별한가요? 그냥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읽는 사람한테 하는 안부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영혼은 당연히 잘 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운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아니십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을 2천년 전에 누군가가 누군가한테 쓴 편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안부인사 하나로라도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을 보시겠습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私が償います」と書いています。あなたが、あなた自身のことで私にもっと負債があることは、言わないことにします。

이 글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오네시모가 만약 빌레몬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내가 물어주겠다. 그러나 빌레몬 당신도 나한테 빚진 것이 있다는 것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지요?

이 말씀, 어떻습니까. 그저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한테 한 말이요?

이 말씀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이 않습니까.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빌레몬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웃한테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시지요. 예,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이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주시겠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시겠대요. 걱정하지 마시래요.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기억하지? 너도 너를 괴롭힌 사람 못지 않게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기억하지 않니?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 이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나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를 괴롭혔냐. 그래. 내가 갚아줄게. 내가 너의 그 상처를 치료해줄게.

그리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자, 내가 그 녀석을 대신해서 이렇게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줘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지만 우리는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는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폭포수와도 같은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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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회 우리가 가져야 할 것
2020년 8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신약 47페이지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6章 52節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つるぎ)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つるぎ)を取る者はみな剣(つるぎ)で滅び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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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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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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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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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가져야 할 것” 私たちが取るべき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8절~52절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は彼らと合図を決め、「私が口づけをするのが、その人だ。その人を捕まえるのだ」と言っておいた。
それで彼はすぐにイエスに近づき、「先生、こんばんは」と言って口づけした。
イエスは彼に「友よ、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のとき人々は近寄り、イエスに手をかけて捕らえた。
すると、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が、見よ、手を伸ばして剣を抜き、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その耳を切り落とし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 외에 주된 등장인물이 세 명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는 48절에서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 둘째와 셋째는 51절에서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와 <대제사장의 종(大祭司のしもべ)>, 이렇게 세 명입니다.

여기서 첫째,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는 의심의 여지 없이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노렸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밤에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야지만 예수님이 계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는 가룟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갔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一方、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もその場所を知っていた。イエスが弟子たちと、たびたびそこに集まっ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의하면 그 곳은 감람 산(オリーブ山)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감람산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칼을 빼 들고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요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シモン・ペテロは剣を持っていたので、それを抜いて、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右の耳を切り落とした。そのしもべの名はマルコスであった。

이제 이 세 사람 이름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을 이끌고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서 공격을 하자,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 중에서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칼은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무겁고, 제대로 쓰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구나 이 때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주변은 어두웠을 것이고, 주위를 밝히고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군인들이 들고 왔을 횃불이 다였을 것입니다. 그런 어두침침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는 상대방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칼 솜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고기잡이를 하게 되면 힘은 남들보다 강했을지는 모르지만, 칼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힘만 가지고 되나요. 이를 제대로 써서 전투를 하려고 한다면 전문적인 훈련을 통한 기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귀를 떨어뜨릴 수 있었느냐 하면, 이는 의도적으로 귀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군대에 보면 <오발은 명중이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총이나 화살을 써서 과녁 정중앙에 맞추기를 상당히 힘들지만, 본의 아니게 사고로 이를 쏘게 될 경우에는 분명히 무엇인가에 맞아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기를 다룰 때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뜻의 경고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8절에 의하면 당시 그들은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검을 제대로 쓸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굳이 꼽는다면 사도들 중에서 이른바 셀롯,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열심당원 출신인 시몬 정도가 어쩌면 그나마 검을 다룰 수 있었지 않을까 하고, 그 외에는 다들 무기를 다루는 일에 능숙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검은 뭐냐 하면, 그저 단순한 호신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변은 어두컴컴한데 갑자기 무장을 한 여러 군인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밤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있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께서 방금 전에 이 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깊은 밤에 수많은 군대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까지도 잡아가거나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저 앞에 서 있는 놈은 누구야. 가룟 유다 아니야. 저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아도 혈기가 왕성했던 베드로가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행동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몰려오는 공포심과 가룟 유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는 대단히 흥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는 닥치는 대로 휘둘렀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그 중 한 군인의 귀를 베어버렸을 것입니다. 이제 큰 일 났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의 목적은 예수님 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그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자칫하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까지도 붙잡혀 갈 수도 있게 되거나, 더 나아가서 군대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면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는, 말하자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するとイエスは、「やめなさい。そこまでに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して、耳にさわって彼を癒やされた。

예수님께서는 귀가 잘린 대세자장의 군인인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 말고를 위해서 고쳐주셨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법상으로 보면 손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배상이나 보상을 청구할 수가 있는 것처럼, 형법상으로 볼 때에는 피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경찰에 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말이 이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누군가를 때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내 행위에 의해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피해가 발생해야지만 처벌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처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을 보더라도 베드로의 행위로 인해서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말고는 귀가 완전히 회복된 상황에서 베드로를 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즉, 예수님께서는 말고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을 위해서 그의 귀를 고쳐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칭찬을 받아야지요. 아니, 베드로가 왜 칼을 뽑았습니까. 예수님을 지키려고 그 서툴기 짝이 없는, 솔직히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는 칼을 겁도 없이 뽑아 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할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고로 검이라고 하는 것, 동양에서는 도라고 하지요. 검이나 도를 보면 예술적인 가치도 있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따라서도 그 값어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만, 그 본래 목적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 사람을 해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조각이나 문양 같은 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리고 금은보화로 장식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검이나 도의 본래 목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면 이는 그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 번에 한 명을 해칠 수 있는 무기보다는 한 번에 두 세 명을 해칠 수 있는 것이 뛰어난 검이고, 한 번에 열 명, 백 명을 해칠 수 있는 검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전혀 사용할 생각이 없다면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검을 가지고 있다면, 필요할 때가 되면 언제든지 그 칼을 칼집에서 뽑아서 상대방을 공격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그 검을 가지고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칼이라고 하는 것이 꽤 무겁습니다. 옛날 일본 사무라이들 보면 평소에도 항상 왼쪽에 두 자루의 칼, 하나는 길고 또 하나는 짧은 것인데, 이를 항상 꽂고 다니니까, 사무라이들은 좌우의 발바닥 크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칼을 항상 꽂고 다니는 왼쪽 발바닥이 오른쪽에 비해 더 컸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무겁고, 그러다 보니 몸에 부담도 많이 가는 무기였던 것이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떤 위험이 닥쳤을 때 그 무기를 쓴다면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아주 긴급할 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 그처럼 무겁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을 들고 다닐 필요는 전혀 없겠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그 무기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무기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칼이라는 것은 첫째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둘째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기껏 가지고 있는 칼을 쓰지 말고 칼집에 꽂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요?

자,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문제입니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율법이 있다? 없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레위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보십시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 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것을 너희들이 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만,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사람들이 말씀을 안 읽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 이것 어디서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는데요. 그리고 특별히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사님들이 성경말씀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펼치는 것은, 그것은 읽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리 교양서나 기독교서적을 읽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찬송과 금식과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혀 있지 않는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백성들도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ですから、明日のことまで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明日のことは明日が心配します。苦労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

참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의 두 번째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더러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더러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마태복음 5장 25절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 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 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이 생겼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옵니다. 나를 해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겨야겠지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강하고 담대하라. 주님을 믿고 당당히 나가서 싸워서 이기자.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고발하는 놈이 이웃이에요? 아니에요.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믿습니다! 하면서 당장 싸워야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러지 마. 싸우지 말라고. 너 좀 걱정 좀 해봐. 저놈이 너를 옥에 가둘지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 너 지금 당장 가서 빨리 화해 해.

그러면 우리는 뭐라 그래요? 아니, 예수님, 나 예수님을 믿는다니까요.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 듣기 싫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화해 해.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서 화해 하란 말이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말씀도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이웃이 먼저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기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말하자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배를 드리다가, 아차, 내가 형제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그 사람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래요?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리다 말고라도 좋으니까 어서 가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하고 나서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던지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対抗)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대적해야 합니까.

야고보서 4장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ですから、神に従い、悪魔に対抗しなさい。そうすれば、悪魔はあなたがたから逃げ去り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적(対抗)해야 할 상대는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 자매가 아닙니다. 바로 마귀 사탄을 대적(対抗)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 사탄한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 형제 자매는 아닙니다. 대적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상대요, 화목해야 할 상대입니다. 우리 이웃을 마귀 사탄이라 생각하고 칼을 뽑았다면 어서 다시 칼집에 꽂고는 더 늦기 전에 화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칼을 쓰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세상적인 지식과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맨날 가난하게 살고, 몸도 안 좋아서 맨날 병원 신세를 지고 사는데, 그러면서 이웃더러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저처럼 되요” 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풍요롭게 살아야 합니다. 강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그저 세상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세상적인 지식, 세상적인 재산, 세상적인 경험, 세상적인 명예만을 의지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한 삶,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무거운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 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혜,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부정하는 인간의 전통은 모두 초등학문이며, 그와 같은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명철은 무엇입니까.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주님을 경외하는 것,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참된 명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니래요. 그건 명철이 아니라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さげす)む。


벌써 이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멸시하면서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담배의 좋고 나쁨은 연기가 될 때가지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담배는 불을 붙여서 피워 봐야, 그리고 사람은 죽고 나서 화장을 해봐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아직은 몰라. 뭐든지 끝까지 가봐야 알아.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가봐야 아나요?

만약에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안 달리셨어요. 장차 미래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수도 있고, 안 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도 장담 못하지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주신다면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고,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의 죄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까지 가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칼을 가지는 자는 어떤 사람이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그렇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이웃 형제 자매를 공격하고 세상적인 힘과 지식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다 칼로 망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칼 대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십자가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만이 살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이웃을 공격할 칼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 대신 의지할 세상적인 힘과 돈과 명예가 있습니까. 어서 더 늦기 전에 그 칼을 빨리 칼집에 꽂으셔야 합니다. 다시는 뽑아서도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칼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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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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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2020년 8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 신약 257페이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21節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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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つ方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SNS를 이용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참으로 많은 글들이 올라옵니다. 페이스북에 보면 최대 5000명까지 친구를 맺을 수가 있는데, 저와 연결된 친구 수는 거기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글들을 보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인가에 대해서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은 저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하고 열변을 토합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글보다는 오히려 비판하고 비난하는 글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말들이 주를 이루는 곳은 아무래도 정치판에 비할 수가 없겠지요. 한국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다당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이 여당은 야당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을 비판할 것입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당제를 부정하고 일당독재를 하는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보면 더욱 부작용이 많다고 하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주목하고 비판할 부분이 있으면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건전한 정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비판만 있다면 이것도 문제겠지요. 가장 좋은 것은 비판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보다도 먼저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간에 평가를 해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서 무슨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무조건 비판과 비난 일색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거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정책, 자신들의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도, 때로는 상대방을 헐뜯고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정치하시는 분들이 교양이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학력이나 경력을 보면 참으로 화려한 경우가 적지 않지요. 대부분이 그야말로 상위 몇 프로에 해당될 정도로 고학력입니다.

그렇다면 배울 만큼 배우고 교양도 쌓을 만큼 쌓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선거 같을 것을 보면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것이 선거에 있어서 자신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내 지지가 1표 늘어난다고 가정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이미지가 깎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지지는 -1표, 그리고 상대방의 안 좋은 부분을 지적하니까 자신이 옳다고 강조할 수 있기 때문에 +1표, 이렇게 되면 2표가 늘어나게 됩니다.

즉, 나 혼자 좋은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두 배의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 분들이 못 배워서나 머리가 안 좋아서 그렇게 교양 없이 서로를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효과적인 전술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방을 비난하면, 자기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한테는 약점이 없나요? 자기 자신은 상대방에 비해서 오점도 없고 잘못도 없고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나요?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로 형편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속적인 것에 한 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왔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ために、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主であるからだ。あなたがたは聖なる者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が聖だからである。」

이와 같은 말씀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말씀으로 묵상하고 찬송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고는, 밤이 되면 감사와 기도로 잠이 듭니다.

여러분도 저를 본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분들은 뭐 워낙 배려심이 많으신 분들이시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아, 그런가 보다, 아멘, 하고 은혜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아오셨던 부모님, 이 말씀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은 날의 친구 선후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 집사람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거룩? 웃기고 있네”

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내가 자기를 아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면서 당연히 비웃겠지요.


그러면 제 주변 사람들만 저를 비웃을 것 같으십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여기에는 두 권의 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기록된 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행위는 이 책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록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거룩하게만 살아왔다는 말을 했을 때,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역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돈을 주세요, 집을 주세요, 차를 주세요, 하는 기도도 중요합니다만, 만약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꼭 한 번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만에 하나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면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여줄게. 자, 책 아무데나 한 번 펴볼까. 하고 펴신 다음에 주님께서 한 줄 한 줄 읽어가십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얼굴이 화끈화끈 거립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주위를 보니 주님께서 읽으시는 것을 수많은 천사들과 수많은 천국 백성들이 다 듣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로마서 2장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사람에 따라서는……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 대신 <누구를 막론하고>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너도 똑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행실이 완벽해서 주님의 십자가 없이도 스스로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시대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다고요?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을 해 봤자, 아무리 청렴 결백한 척을 해 봤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봐. 너나 그 쟤나 똑같잖아. 너도 그걸 잘 알잖아. 몰라? 그럼 그 책을 한 번 읽어줄까?

이렇게 말씀을 안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ですから、主が来 られるまでは、何についても先走って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主は、闇に隠れたことも明るみに出し、心の中のはかりごとも明らかにされます。そのときに、神からそれぞれの人に称賛が与えられるのです。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정죄한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는 저게 나쁘다. 너는 저게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요? 예,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그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잡아다가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경찰한테 말합니다.

“경찰 아저씨, 이 녀석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제가 데리고 온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가 뭔데?”라고 비웃겠지요.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반대로 제가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 경찰아저씨는 왜 저를 비웃었을까요. 그렇지요. 제가 판사입니까? 제가 뭔데 그 사람을 잡아가지고 징역 5년이다 10년이다 판단하고 가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물며 판사라고 해도 아무 사람이나 잡아다가 선고를 내릴 수가 없지요. 정해진 재판 절차에 따라서 행해질 때에만 그 행위가 유효합니다.

자, 답답합니다. 분명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물론 현행법을 어겼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 마음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주었어요. 너무나도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어요. 제 마음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고 판단하지도 말고 정죄하지도 말래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復讐と報復はわたしのもの。それは彼らの足がよろめくときのため。彼らのわざわいの日は近く、来たるべき時が速やかに来る。」

이 기록에 대해서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먼저 로마서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다음으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私たちは、「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また、「主は御民をさばかれる」と言われる方を知っています。

누군가가 너에게 상처를 줘도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너는 그냥 참고 있어라. 왜냐하면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묵묵히 참고만 있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걱정 말아. 너 대신 내가 갚아 주겠다. 내가 원수를 갚아 주겠다. 내가 억울함을 갚아 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해하고 억울해하고 속상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과 또 하나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요? 예, 있습니다. 일본 인기 드라마인 한자와 나오키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었지요? 倍返しだ. 두 배로 갚아주마. 이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게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당한 것의 두 배로 너한테 해주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한테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나한테 100이라는 죄를 지었어요. 이로 인해서 나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 배는 아니더라도 그대로 되갚아준다고 하면 나 또한 1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배로 갚아준다면 2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하지 말아. 내가 할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판단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진정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넘긴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힘들게 판단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수를 갚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판단을 다 해주시고, 원수 갚을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실 테니까, 억울함을 풀어주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테니까, 이를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인데, 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떵떵거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어요.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속이 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벌을 내리실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리실 것이요,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회개를 해서 나한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가 화목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안에는 고통이나 괴로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해 다녀야 하나요? 하나님이 언제 벌을 내리실지 숨어서 지켜보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12장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여기서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는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는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한테보다 원수한테 특별히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수든 아니든 똑같이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요즘은 법을 꼭 전공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법률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이른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씀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형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않는 한, 그 사람한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유죄가 확정되기 전이라 하더라도, 도주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하면 구속될 수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원칙적으로 범죄인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이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판단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생각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죄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우리 주변의 다른 이웃처럼 그가 배고파 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다고 하면 물을 주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 유죄판결을 내렸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도 그 사람을 죄인취급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못합니다.


억울하신가요? 아니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판결 전에 회개한다면 우리와 다시 만나서 화목(和解)할 수 있겠습니다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영원히 만날 수가 없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겨서는 안 됩니다. 악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당한 악보다도 훨씬 더 심한 악을 행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했는데, 그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는데, 또다시 우리가 죄에 물들게 된다면 얼마나 주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인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 평안과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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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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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회 율법의 참뜻
2020년 8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7절 신약 248페이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7節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 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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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율법의 참뜻” 律法の真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저를 포함해서 교회까지 오실 때에 차를 타고 오셨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운전을 하고 오시는 경우도 있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동네 교회에 갈 때 꼭 차를 타지 않더라도 걸어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를 타든 걷든 간에 이동을 하다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호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도 운전을 하다 보면 이 신호등이 참으로 묘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급할 때면 급할수록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지, 빨긴 신호가 수도 없이 잘 걸립니다. 정말 하나 걸러 하나씩, 마음이 더 급할 때면 조금 가다 걸리고, 또 조금 가다 걸리고, 연속으로 몇 번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정말 내려서 그 신호등을 한 대 때려주고 싶어요. 물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들 내려서 때릴까 봐 대부분 신호등은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요. 그래서 때릴 수도 없어요.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때면 어때요? 예를 들어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메일이나 카톡이 왔어요. 하지만 운전을 하고 있으면 확인할 수도 없잖아요. 옆에 저희 집사람이라도 있으면 좀 확인을 해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 혼자인 경우에는 그러지도 못합니다. 급할 경우에는 길 옆에 세우기라도 하면 되겠지만, 뭐 그렇게 급한 용무라면 카톡이나 메일이 아니라 전화가 걸려 왔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신호라도 걸리면 확인해봐야겠다고 하는데, 꼭 그럴 때일수록 또 기가 막히게 신호가 안 걸립니다. 뭐, 심할 때에는 10분~20분 정도 그냥 파란 신호가 착착 떨어져서 달릴 때도 있어요. 또 그럴 때는 별로 급한 일도 없습니다.

뭐, 사람사리가 다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이 신호등조차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일본에서는 일반 승용차인 경우 빨간 신호를 무시하면 벌금 9천 엔입니다. 그리고 속도를 15킬로 정도를 위반해도 9천엔, 그 이상은 12,000엔, 15,000엔……이런 식으로 늘어납니다. 그야말로 적지 않은 돈이 나가는 셈이지요.

왜 이렇게 벌금을 내야 하느냐 하면 이는 도로교통법에 규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아마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면허를 따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나라 중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시험도 어렵고 일반적으로 면허를 따는 데에 드는 비용만 하더라도 최소한 30만 엔 정도라고 하지요.

거기다가 이처럼 규정도 까다롭고 한 번 걸리면 인정사정 없이 딱지를 떼이게 됩니다. 옛날에는 한국에 보면 좀 봐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같으면 엄격해지면 엄격해졌지 그렇게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하지요.

자, 그러면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 참 살기가 힘든 나라라고 생각되시나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도 그렇게 차를 많이 타고 바깥에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리고 오늘도 교회까지 올 때 차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안 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그런 것입니다만, 세상적으로 본다면? 예, 그렇습니다. 신호등이 있었기 때문이요 도로교통법이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은 내 앞길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데 다른 차들이 나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깜빡깜빡 잊고는, 도대체 내 앞길을 가로막는 신호등, 나를 빨리 달리지 못하게 만드는 속도제한……이렇게만 생각을 하니 불평불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어떨까요.

신명기 25장에 나와 있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4절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脱穀をしている牛に口籠(くつこ)をはめてはならない。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밀 같은 곡식을 거두고 난 다음에는 껍질이 있기 때문에 타작을 해야 합니다. 당시 타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소한테 이렇게 밟게 해가지고 타작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을 하냐 하면, 소가 타작을 하나가 거기 떨어져 있는 낟알을 주워먹기도 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 기껏 공들여서 길러온 곡식을 이제 간신히 추수를 해서 타작을 하려는 상황인데, 이를 소들이 일하면서 주어먹으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그 때까지는 소 입에 망을 씌우고 일을 시켰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요 오히려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싶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자신이 만드신 짐승까지도 아끼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됩니까. 정말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라…… 물론 나쁜 말은 아니지요.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해서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9절~10절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モーセの律法には「脱穀をしている牛に口籠をはめてはならない」と書いてあります。はたして神は、牛のことを気にかけておられる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のために言っ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そうです。私たちのために書かれているのです。なぜなら、耕す者が望みを持って耕し、脱穀する者が分配を受ける望みを持って仕事をするのは、当然だからです。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는 소를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득을 보는 것은 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요. 사람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탈곡하는 소한테도 소망이 있어야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가 일을 하는데 배가 고파서 힘이 떨어지고 픽픽 쓰러지고 하면 그것은 누구 손해가 되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그 주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소가 일을 하면서 좀 주워먹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비슷한 규정들이 율법에는 꽤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あなたの土地の初穂の最上のものを、あなたの神、主の家に持って来なければならない。あなたは子やぎをその母の乳で煮てはならない。

레위기 22장 27절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牛か羊かやぎが生まれたときは、七日間、その母親のもとに置いておく。八日目以後、それは主への食物のささげ物として受け入れられる。

먼저 출애굽기 23장 19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요리할 때 염소 젖으로 삶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 쓰는 염소 젖을 그 새끼의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냐 하면, 당시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서, 새끼 염소를 요리할 때에, 그 새끼 염소의 어미 젖을 쓰면 맛이 더 좋아진다고 사람들이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겉보기는 그 새끼 염소의 어미 젖이나 다른 염소 젖이나 같을지는 모르지만, 본래 어미의 젖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새끼가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그 젖으로 새끼를 삶는다는 것이, 사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그리고 레위기 22장 27절에서 보면 당시에는 하나님께 새끼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도 바로 태어난 것을 곧바로 드리지 말고, 7일 정도는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친히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요, 세심한 데까지 배려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출애굽기 23장 19절이나 레위기 22장 27절의 기록이 양이나 염소를 위한 율법인가요?

만약에 이와 같은 규정이 양이나 염소를 위한 율법이라고 한다면, 이는 말하자면 도로교통법이 신호등과 도로 표지판을 위한 법률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니, 도로교통법이 신호등이나 무슨 횡단보도나 도로 표지판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법률인가요? 아니에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도로교통법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법률이나 규정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과거에는 독재자나 특정 소수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률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는 악법입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법들이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대부분의 헌법이나 법률, 법령, 조례 같은 규정들은, 이는 동물이나 식물과도 같은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하는 법률도 모두 포함해서, 모두가 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율법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잔인한 것에서 떠나고, 사람에 비한다면 아주 하찮다고도 할 수 있는 짐승한테까지도 자비를 베푸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아직 다행히 일본에서는 위반 딱지를 뗀 적은 없습니다만, 다른 나라에 있을 때에는 몇 번 뗀 적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속도위반이지요. ㅎㅎ

그런데 그걸 뗄 때에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사가 넘쳐 나오겠습니까. 할렐루야. 딱지를 떼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웬만해서는 안 나오겠지요. 오히려, 아이, 참 남들은 안 걸리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 그런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법률,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 또한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경찰에 안 잡히고 그대로 갔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다른 것에 부딪치거나 하면 이는 돈 몇 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전에 그런 일이 있을까 봐, 벌써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 정말 바쁜 경찰 아저씨들을 친히 그 자리까지 보내주셔서, 미리 큰 사고를 막게 하시고, 돈 몇 푼 내고 다시금 안전운전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서 12장 5절~8절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そして、あなたがたに向かって子どもたちに対するように語られた、この励 ましのことばを忘れています。「わが子よ、主の訓練を軽んじてはならない。主に叱られて気落ちしてはならない。
主はその愛する者を訓練し、受け入れるすべての子に、むちを加えられるのだから。」
訓練として耐え忍びなさい。神はあなたがたを子として扱っておられるのです。父が訓練しない子がいるでしょ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すべての子が受けている訓練を受けていないとしたら、私生児であって、本当の子ではありません。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참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と海、またそれら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んだからである。それゆえ、主は安息日を祝福し、これを聖なるものとした。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해서 쉬셨습니까.

이사야 40장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あなたは知らないのか。聞いたことがないのか。主は永遠の神、地の果てまで創造した方。疲れることなく、弱ることなく、その英知は測り知れない。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기록합니다. 6일이 아니라 600년, 6000년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더라도, 영원히 피곤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쉬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쉬어 주신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이 퇴근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막 벌건 눈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어요.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셔요. 그런 상황에서 밑에 있는 직원이,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윗사람이 쉬어야 아랫사람도 쉴 수 있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법률 중에서는 독재자나 권력자를 위한 악법이 더러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율법은 하나님을 위한 법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디를 차를 몰고 갔다가 집에 도착해서 차를 세울 때 보면, 다른 아파트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다 지정된 장소가 있잖아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세우는 곳 바로 옆에 보면 항상 검정색 차가 있어요. 그것도 작은 차가 아니라 좀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SUV 차량입니다. 그리고 저희 차를 세워 놓는 곳을 보면, 앞에 있는 공간이 그리 넓은 편이 아니거든요.

자, 그러면 오늘은 좀 간단한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디 갔다가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차를 주차하려고 해요. 그러면 옆에 그 제법 몸집이 큰 검은 SUV 차가 서 있는 게 주차하기 편할까요. 아니면 안 서있는 게 주차하기 편할까요.

금방 생각을 하면 아니, 당연히 옆에 아무 것도 없는 게 차를 세우기 편하겠죠. 잘못했다가 긁히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실제로 차를 세우다 보면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지금 이 집에 산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실제로 운전을 하다 보면, 그 차가 거기 서 있는 편이 오히려 주차하기가 훨씬 편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땅바닥에 그려진 그 주차 라인이 좀 희미합니다. 그래서 낮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예요.

그런데 주차를 할 때에 그 차가 서 있으면, 라인을 보지 않더라도 그 서 있는 차를 조심하면서 끼고 돌면 정확하게 주차 위치에 세울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차가 거기 안 서 있으면, 기준이 되는 것이 없으니까 오히려 좀 주차 위치에서 빗나가버리는 바람에 다시 주차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차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아, 이게 바로 율법이구나. 이 차가 여기 서 있어서 불편하게 느낄 때도 있지만, 이 차가 여기 세워져 있는 덕분에 내가 이를 피하면서 제대로 된 곳에 세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 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디로 가면 천국인지 어디로 가면 지옥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명확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떨 때는 참 귀찮을 때도 있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마음은 급한데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내려서 신호등을 막 때려주고 싶을 때처럼, 정말 힘든 일은 계속되고,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고 속이 상하고 답답할 때 당장 하나님 앞에 가서, 정말 이럴 수가 있냐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시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양과 염소까지도 잔인하게 대하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 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에게 더 이상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참뜻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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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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