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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회 세 과부 이야기
20207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신약 260페이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3節
“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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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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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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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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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과부 이야기” 三人のやもめの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 본다면 아직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상당부분 개선되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성의 권리가 그나마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참정권, 그러니까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여성의 참정권,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세계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00년도 들어서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100년 정도밖에 안 된 제도인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부터 2000년 전이었다면 오죽했겠습니까.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상당부분 제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혼인을 한 여성은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남성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존중될 수도 있고, 결혼을 한다면 그 남편을 힘입어서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부, 즉 혼인을 하였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십중팔구 나이가 아직 어린 아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남편이 있어야 직업을 통해서 수익을 얻어 양육을 할 수 있을 텐데, 여성의 몸으로서 당시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러니 집안 상황이 넉넉할 수가 없었지요.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세 명의 과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여기서는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약자의 대표적인 존재는 바로 남편이 없고 아이만 있는 과부, 그리고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인 고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셨습니다만, 이는 남녀노소를 떠나 다름아닌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세 명의 과부, 다시 말해서 세 명의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성경 말씀을 살펴봄으로 인해서, 이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살펴볼 첫 번째 과부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 8절~16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구약성경 545페이지입니다. 조금 길지만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8절~16절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すると、彼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さあ、シドンのツァレファテに行き、そこに住め。見よ。わたしはそこの一人のやもめに命じて、あなたを養うようにしている。」
彼はツァレファテへ出て行った。その町の門に着くと、ちょうどそこに、薪を拾い集めている一人のやもめがいた。そこで、エリヤは彼女 に声をかけて言った。「水差しにほんの少しの水を持って来て、私に飲ませてください。」
彼女が取りに行こうとすると、エリヤは彼女を呼んで言った。「一口のパンも持って来てください。」
彼女は答えた。「あなたの神、主は生きておられます。私には焼いたパンはありません。ただ、かめの中に一握 りの粉と、壺の中にほんの少しの油があるだけです。ご覧 のとおり、二、三本の薪を集め、帰って行って、私と息子のためにそれを調理し、それを食べて死のうとしているのです。」
エリヤは彼女 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ません。行って、あなたが言ったようにしなさい。しかし、まず私のためにそれで小さなパン菓子を作り、私のところに持って来 なさい。その後で、あなたとあなたの子どものために作りなさい。
イスラエルの神、主が、こう言われるからです。『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る日まで、そのかめの粉は尽きず、その壺の油はなくならない。』」
彼女は行って、エリヤのことばのとおりにした。彼女と彼、および彼女の家族も、長い間それを食べた。
エリヤを通して言われた主のことばのとおり、かめの粉は尽きず、壺の油はなくならなかった。

엘리야라고 하면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선지자라 하더라도 엘리야만큼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한 선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거기는 사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지역이었습니다. 엘리야로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지역으로 보내신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외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당시 그 지역은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먹을 것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보아서 제일 저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약자인 과부라고 하면 이는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엘리야가 그 지역에 갔더니 어떤 과부가 나뭇가지들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를 보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물 한 잔과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지요.

평소라면 대단한 부탁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거기다가 이 사람은 과부였지요. 이 과부가 하는 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2절을 다시 볼까요?


열왕기상 17장 12절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彼女は答えた。「あなたの神、主は生きておられます。私には焼いたパンはありません。ただ、かめの中に一握 りの粉と、壺の中にほんの少しの油があるだけです。ご覧 のとおり、二、三本の薪を集め、帰って行って、私と息子のためにそれを調理し、それを食べて死のうとしているのです。」

그 사람은 지금 가난해서 어려워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끼 식사가 있는데, 이것을 먹고 난 다음에는 이제 더 이상 식량을 얻을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볼품없는 식량이라 하더라도 배를 한 번 채워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를 보고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다음 구절, 13절~14절을 살펴봅니다.


열왕기상 17장 13절~14절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エリヤは彼女 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ません。行って、あなたが言ったようにしなさい。しかし、まず私のためにそれで小さなパン菓子を作り、私のところに持って来 なさい。その後で、あなたとあなたの子どものために作りなさい。
イスラエルの神、主が、こう言われるからです。『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る日まで、そのかめの粉は尽きず、その壺の油はなくならない。』」

이를 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과부가 지금 먹을 것이 떨어져서 컵라면 하나밖에 없어요. 이제 이걸 아들과 나눠먹고 죽어버릴 생각입니다. 자신은 이미 아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온 누군지도 모르는 사림이, 지금 그 마지막 식사,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고 죽으려고 했던, 말하자면 컵라면 하나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렇게만 한다면 이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너희 집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컵라면 하나 남았는데, 그걸 하나 내 놓으래요. 저 같으면요? 아니,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무슨 헛소리냐고, 저리 꺼지라고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과부는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정말 그 마지막 남은 식량을 엘리야를 위해서 바쳤다는 것이에요. 그러자 정말로 엘리야가 했던 말처럼 식량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음에는 두 번째 과부입니다. 이는 열왕기하 4장 1절~7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구약성경 565페이지입니다.

열왕기하 4장 1절~7절
1.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預言者の仲間の妻の一人がエリシャに叫 んで言った。「あなたのしもべである私の夫が死にました。ご存じのように、あなたのしもべは主を恐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債権者が来 て、私の二人の子どもを自分の奴隷にしようとしています。」
エリシャは彼女に言った。「何をしてあげようか。私に話しなさい。あなたには、家の中に何があるのか。」彼女 は答えた。「はしためには、家の中に何もありません。ただ、油の壺一つしかありません。」

すると、彼は言った。「外に行って、近所の皆から、器を借りて来なさい。空の器を。それも、一つや二つではいけません。
家に入ったら、あなたと子どもたちの背後の戸を閉めなさい。そしてすべての器に油を注ぎ入れなさい。いっぱいになったものは、わきに置きなさい。」
そこで、彼女は彼のもとから去って行き、彼女と子どもたちが入った背後の戸を閉めた。そして、子どもたちが次々と自分のところに持って来 る器に油を注ぎ入れた。
器がどれもいっぱいになったので、彼女は子どもの一人に言った。「もっと器を持って来なさい。」その子どもが彼女 に、「もう器はありません」と言うと、油は止まった。
彼女が神の人に知らせに行くと、彼は言った。「行ってその油を売り、あなたの負債を払いなさい。その残りで、あなたと子どもたちは暮らしていけます。」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이름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친족관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와의 두 관계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지자의 제자가 곧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습니다만, 이 엘리야는 얼마나 대단한 선지자였냐 하면,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나 왕이라 하더라도 이 땅에서 한 번 죽고 난 다음에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만, 구약에 보면 에녹과 엘리야만이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다음에는 이 엘리사가 역시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적 중 하나가 바로 이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두 번째 등장인물인 과부가 엘리사에게 호소를 합니다. 남편이 있었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가정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빚을 졌는지, 아니면 죽고 난 다음에 빚을 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를 갚으라고 사람들이 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갚을 돈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자기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남편이 죽은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거기다가 두 아들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완전히 절망 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희 집에 뭐가 있느냐. 그러자 기름 한 그릇이 있다고 하지요.

지금 이 이야기의 흐름에 본다면서 그 기름으로 나한테 떡을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할 만도 한데, 엘리사는 조금 특이한 말을 합니다. 지금 당장 이웃들한테 가서 빈 그릇을 빌리라고 합니다. 뭐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라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다가 기름을 부어보래요. 그래서 하나하나 빈 그릇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을 부어갔더니, 어떻게 됐냐 하면 그 빌려온 그릇 모두에 기름이 다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기쁨에 찬 과부가 엘리사에게 이 일을 말하자, 엘리사는 담담하게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그리고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 과부입니다. 이번에는 신약으로 한 번 넘어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4절입니다.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目を上げて、金持ちたちが献金箱に献金を投げ入れているのを見ておられた。
そして、ある貧しいやもめが、そこにレプタ銅貨を二枚投げ入れるのを見て、
こう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貧しいやもめは、だれよりも多くを投げ入れました。
あの人たちはみな、あり余る中から献金として投げ入れたのに、この人は乏しい中から、持っていた生きる手立てのすべてを投げ入れたのですから。」

이 유명한 두 렙돈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누가복음 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대체적으로 교회에서 이 구절을 말씀 드리면, 들으시는 분들이 좀 긴장을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인상을 찌푸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그게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과부가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활비를 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돈이 넉넉하건 궁핍하건 간에 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종교 지도자들이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의외로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는 모든 화폐가 동전이었습니다. 지폐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 소리가 납니다. 많이 넣게 되면 와르르 하고 소리가 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리만 들으면 누가 돈을 많이 넣었고 누가 적게 넣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화폐 동전을 일부러 적은 액수로 바꾸어서, 다시 말해서 같은 액수라도 동전 개수를 늘려서 붓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2천년 전 교회에서는 부자들이 헌금을 할 때 막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주변에서는 와, 누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해? 하고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눈치가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적게 헌금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난하다고 흉 볼 거야. 놀릴지도 몰라. 하나님은 저렇게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나처럼 적게 헌금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거야.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어려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두 렙돈(レプタ)이라고 하는 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이 두 렙돈이 그러면 어느 정도 되는 돈이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당시 화폐 중에서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단위라고 한다면, 데나리온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 데나리온은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 렙돈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데나리온의 128분의 1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이 되겠지요.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을 넉넉잡아 편의상 100,000원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얼마가 되냐 하면 100,000원 나누기 64를 하면 (156엔) 반올림 해서 1,563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1563원이라고 하는 금액이 이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시 과부의 생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적게 내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많게 내든 적게 내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살펴본 세 명의 과부 이야기. 어떠십니까.

첫 번째 과부는 마지막 남은 식량, 그야말로 컵라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들과 나눠먹고 죽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 과부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막막하고 죽음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절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순간에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그 작은 떡 하나를 바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 보잘 것 없는 세상적인 떡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여기서의 재물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 말하자면 육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육적인 방법은 동시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첫 번째 과부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육적인 생각, 작은 떡 하나를 움켜쥐고 그것을 먹고 아들과 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육적인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잡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 선택 앞에서 첫 번째 과부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소망으로 본인과 아들,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이 임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과부는 남편도 잃고 이제 두 아들마저도 종으로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돈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의외의 명을 내립니다. 이웃집에서 빈 그릇들을 빌려오라고 시켰습니다. 여러 분, 이게 그리 쉬울 것 같으십니까.

당시는 지금보다도 서로의 사정을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도시는 좀 그렇겠지만, 지방이나 시골에서 오래 살게 되면 서로의 형편들은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다 알게 된다고 하지요. 아마도 분명 이 과부가 사는 동네에서 이 과부의 형편, 대단히 가난하다는 사실은 그 주변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매일 같이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이제 끝내는 두 아들을 노예로 끌고 가겠다고 난리를 쳐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웃한테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들한테 그릇을 빌리러 가면, 이웃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구, 담을 기름도 식량도 없으면서 그릇을 빌려다가 뭘 하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놀리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이 과부의 자존심은 대단히 상했을 것입니다.

당시 기름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 집에는 빈 그릇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빈 그릇을 빌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하는 말이 독특합니다. 그 빌려온 빈 그릇에 네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부으면 모든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찬다고 합니다.

참 믿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과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하라고 했으니까 안 할 수는 없겠지요. 이제 이 과부는 이웃한테서 크고 작은 그릇들을 빌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과부가 그릇을 얼마나 빌려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집안 가득 찰 정도로 빌려왔는지, 아니면 두 세 개만 빌려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다 붓고 나니까 더 이상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과부가 빈 그릇을 빌려 왔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것이요, 엘리사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오지 않았다면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리고 또한 빈 그릇을 가져왔다고 해도 많이 가져왔을 수도 있고 적게 가져왔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빌려온 그릇의 개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과부가 가졌던 소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가져왔을 텐데 그 믿음에 소망이 많았다면, 그 빈 그릇에 모두 기름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은 생각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집안 가득히 그릇을 빌려왔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망이 없었다면 그저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듣는 시늉만 해서 그릇을 서너 개 가져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기름을 따르고 있는데, 그릇이 막 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놀라서 그릇을 더 가져오라고 했는데, 추가로 더 빌려올 시간이 없습니다. 빌려온 그릇이 이게 다라고 하자 거기서 기름이 딱 멈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약에 빈 그릇을 많이 빌려왔었다면, 다시 말해서 애초에 하나님께 큰 소망을 두었더라면 그 과부는 넉넉히 찬 기름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 작은 소망만을 두고 그릇 서너 개만 빌려왔었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부, 그녀는 생활비가 두 렙돈 밖에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1560원밖에 안 들어있어요.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운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전 두 개를 넣으면 주변에서 놀릴지도 모릅니다. 멸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바칠 힘도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시고 이 과부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에이, 무슨 칭찬만 하고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는 안 적혀 있잖아?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셨는데 아무런 축복이 없으셨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일만 골라서 하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돈만 많이 바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으십니까. 예전에 제가 다니던 어떤 교회에서 보면, 자기가 헌금 많이 한다고 목에 힘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1장 11절~13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 、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もう、むなしいささげ物を携えて来るな。香の煙、それはわたしの忌み嫌 うもの。新月の祭り、安息日、会合の召集──わたしは、不義と、きよめの集会に耐えられない。

우리는 헛된 재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정성을 담아서,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재물이면 재물로 섬기고, 가진 것이 시간이면 시간으로 섬기고, 그리고 봉사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에 바친 작은 떡이요, 이웃한테서 빌려온 빈 그릇들이요, 하나님께 바친 두 렙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3節

“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이 세상의 모든 절망은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아무리 캄캄한 절망이라 하더라도 놀라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육적인 소망이 아닌 영적인 소망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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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0회 믿음의 중심
2020년 6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 신약 56페이지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マルコの福音書2章27節~28節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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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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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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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중심” 信仰の中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조금 더 앞부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27절까지의 말씀인데, 우선 이 전체를 한 번 살펴보고, 그 다음에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2장 23절~28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28절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道を進みながら穂を摘み始めた。
すると、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に言った。「ご覧なさい。なぜ彼ら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食べ物がなくて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大祭司エブヤタルのころ、どのようにして、ダビデが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の人が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食べて、一緒 にいた人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실 때에, 제자들이 남의 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모습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穂を摘んで、手でもみながら食べていた。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만,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으면 밀가루가 나오는데, 옛날에는 그걸 두 손으로 비벼서 먹으면 꽤 먹을 만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기가 자기들 소유의 밭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으니, 말하자면 무단으로 남의 밭에 나 있는 이삭을 먹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그랬을까요. 뭐, 당연히 배가 고파서 그랬겠지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そのころ、イエスは安息日に麦畑を通られた。弟子たちは空腹だったので、穂を摘んで食べ始めた。

글쎄요. 제자들은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예수님은 도무지 밥을 먹자는 말씀을 안 하세요. 그런데 마침 밀밭 사이로 자나가게 되었어요. 얼씨구나 잘됐다 싶어서 제자들은 그 이삭을 비벼서 먹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다.

“어허, 이 보시오. 거 자기 밭도 아닌 남의 밭에서 멋대로 밀을 먹으면 어떡해!”

요즘 우리들 생각에는 당연히 그렇게 주의를 주었을 것도 같습니다만, 율법상으로 보면 이는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4절~2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3장 24절~25절
“24.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隣人のぶどう畑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思う存分、満ち足りるまでぶどうを食べてもよいが、あなたのかごに入れてはならない。
隣人の麦畑の中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穂を手で摘んでもよい。しかし、隣人の麦畑で鎌を使ってはならない。

저는 그런 세대가 아닙니다만, 옛날에 한국에 보면 무슨 수박 서리 같은 것들을 하고 그랬다고 하지요. 옛날에는 그게 추억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지금은 절대로 안 됩니다. 엄연한 절도이기 때문이지요. 큰 일 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율법, 모세오경, 레위기, 신명기, 뭐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다는 느낌이 있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보면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이 신명기 23장 24절~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이웃이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고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포도원이나 곡식밭에 들어가는 것은 불법침입이요, 뿐만 아니라 포도를 먹거나 이삭을 따는 것은 절도입니다. 이를 벌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율법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거기 들어가서 혼자 먹는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들어갔겠습니까. 배가 고파서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남의 집 포도원이나 곡식밭에 들어갔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혼자 실컷 먹었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포도밭 같은 곳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에 대한 용도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냥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를 포도주로도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보존식품으로 건포도로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포도원 규모는 상당히 컸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너무나도 배가 고플 때에, 포도를 몇 송이나 드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이 먹어봤자, 글쎄요, 1송이? 2송이? 저도 아무리 배가 고팠다 하더라도 솔직히 3송이 이상을 먹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 많은 포도 중에서 그 정도는 그냥 줘라, 물론 그릇에 담거나 낫으로 베어가지고 모조리 가져가거나 하는 것은 안 되지만, 지금 배고파 죽겠다는데 자존심도 버리고 남의 밭에서 먹으려는 사람을 막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넘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9절~10절
9.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がたが自分の土地の収穫を刈り入れるときは、畑の隅々まで刈り尽くしてはならない。収穫した後の落ち穂(ぼ)を拾い集めてはならない。
また、あなたのぶどう畑の実を取り尽く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ぶどう畑に落 ちた実を拾い集めてはならない。それらを貧しい人と寄留者のために残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곡식을 거둘 때에는 싹 쓸어버리지 말고 좀 남겨두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추수를 할 때에도 이삭 단이나 포도들을 들고 가거나 마차로 옮길 때에 보면 좀 흘릴 경우도 있잖아요? 그거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사람이 그걸 줍도록 하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웠던 사람이 누구예요. 가족이나 재산을 모두 다 잃고 자기 시어머니와 베들레헴에 왔던 룻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율법이 없었다면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굶어서 죽었을 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다윗 왕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남의 밭에서 왜 함부로 밀을 먹냐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2장 24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すると、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に言った。「ご覧なさい。なぜ彼ら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일곱째 날을 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11절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と海、またそれら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んだからである。それゆえ、主は安息日を祝福し、これを聖なるものとした。

이 안식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규정을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 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아니, 뭐, 쉬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무섭게 하시나. 무슨 뭐 월차나 연차를 쓰지 않으면 죽일지니라 뭐 그렇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내용에 담긴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말씀과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安息日を守っ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とおりに。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 むことができる。

앞서 출애굽기 내용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나서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있어서 주인이나 종이 있을 수 없겠지요. 모두가 공평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금 율법을 말할 때에는 이제 40년이라고 하는 광야생활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도 있었을 것이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종을 두고 생활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이제 주인, 말하자면 사용자를 향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어기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회사 사장님들한테 말씀하시기를,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쉬게 하지 않으면 죽여버려라.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지금 사장과 직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종은 당시 주인의 재산, 그러니까 물건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집안에 있는 모든 일을 종들이 하고, 농사도 다 종들이 하는데, 이 정도로 무섭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주인들이 따랐겠습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엄하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무슨 하나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백성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약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알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뭐라고 하냐 하면, 왜 당신들 제자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아니, 배가 고파서 이삭을 좀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해서 뭐가 큰 죄입니까. 더구나 율법에서도 남의 밭에서 먹어도 된다면서요.

여기에는 바리새인들에게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을 따는 행위는 말하자면 추수에 해당되고, 손으로 비비는 행위는 탈곡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안식일에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어려운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삭을 따는 행위는 추수이고 손으로 비비는 행위는 탈곡에 해당한다는 내용,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답은 율법에 그와 같은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당당하게 예수님에게 따지고 들었을까요.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율법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야말로 모세오경에 적힌 율법, 둘째는 자기 조상들이 만들었던 규칙.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에 의하면 애초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613가지라고 하는데,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이것저것 붙여가다 보니 어떻게 되었냐 하면 2134가지가 되었습니다. 3배 이상이나 많아진 것이지요.

물론 애초에 이런 것을 만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을 잘 좀 지켜보려고 시작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하나 둘 추가를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이나 23장 등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오해, 잘못된 율법해석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가복음 2장 25절~26절을 봅니다.

마가복음 2장 25절~26절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食べ物がなくて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大祭司エブヤタルのころ、どのようにして、ダビデが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の人が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食べて、一緒 にいた人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이 내용은 사무엘상 21장 1절~6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시간관계상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 왕에게 쫓겨서 몇몇 소년들과 함께 도망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의 전에 있는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찾아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성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떡밖에 없었는데, 이는 율법적으로는 일반인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배고파하는 다윗 일행에게 이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채 하는 것이 아닌, 율법을 어긴다 하더라도 사람을 위한 행함을 한다는 것, 이는 얼핏 보기에는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그것이 율법의 참뜻, 하나님의 참뜻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무엘상 말씀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한 작은 교회에 다닐 때였습니다만, 평소에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식사시간이 없어요. 그날 주일은 왠지 모르지만 아침부터 참 배가 고팠어요.

그런데 마침 그 날이 성찬식이었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작은 과자와 포도주스로 성찬식을 드리는데, 거기는 이렇게 큰 빵을 앞쪽에 놓고, 성도님들이 줄을 서서 강대상 앞에까지 가면 거기서 큰 빵 중에서 자기가 뜯어서 먹고, 그리고 옆에 있는 포도주 잔을 마시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느낀 것이지만, 그 빵이 참 맛있어요. 물론 뭐 어디서 사온 것이긴 한데 아무튼 평소부터 참 맛있다고 생각했던 빵이었는데, 하물며 그 날은 제가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으니까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그래서 성찬식 때도 좀 큼지막하게 뜯어서 먹었습니다만, 그래 봤자 한 조각이잖아요. 여전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염치고 체면이고 다 내려놓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거기 집사님한테 가서, 제가 배가 고파서 그런데 아까 그 성찬식 때 먹었던 빵이 남았으면 좀 먹어도 되겠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아, 그 빵은 다른 사람은 못 먹고 목사님과 전도사님만 드신대요. 그래서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서, 예? 하고 다시 물었더니만, 그 분이 다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빵은 성찬식 때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목사님과 전도사님만 드실 수 있는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좀 부족해서, 흠, 뭐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나왔죠. 그래서 나가서 뭘 사먹었는지, 아니면 그냥 집에 갔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만, 아무튼 그 때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 성경을 좀 읽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아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제사장만 먹는다고 하는 내용은 레위기나 민수기에 보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구약이지요. 그렇다면 성찬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떡과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좀 더 덧붙인다면 예를 들어서 가톨릭에서는 성찬식을 다 한 후에 남은 것을 사제가 먹고는 하는데, 개신교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화체설이다 영적임재설이다 하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 있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빵은 빵일 뿐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것이지 그 빵 자체가 예수님의 몸이거나 그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진짜 보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 교회에서 성찬식에 썼던 빵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구약, 신약, 구교, 신교 뭐 이런 것을 이것저것 안 가리고 완전히 뒤섞어놓은 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마치 대단한 율법이라도 지키는 것처럼 하면서, 정작 배가 고픈 굶주린 불쌍한 사람한테는 안 주고 말이에요. 벌써 한 10, 7, 8년 전의 일이긴 합니다만, 아이, 참 그거 지금 생각해도 좀 화가 납니다.


자, 그렇다면 좀 진정을 하고, 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문제였고, 당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정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바리새인들이 멋대로 말씀을 해석해서 만들어낸 2000개가 넘는 율법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안식일을 어기면 죽여야 한다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데,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의외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의외의 인물은 바로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저들이 끌고 온 예수님을 직접 조사를 해본 결과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잠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5절~17절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ところで、総督は祭りのたびに、群衆のため彼らが望む囚人を一人釈放することにしていた。
そのころ、バラバ・イエスという、名の知れた囚人が捕らえられていた。
それで、人々が集まったとき、ピラトは言った。「おまえたちはだれ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バラバ・イエスか、それともキリストと呼ばれているイエスか。」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명절에는 총독이 죄수 중 한 사람을 사면해주곤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는 총독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오늘 이 장면을 보면 빌라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지를 줍니다.

자, 바라바와 예수, 둘 중 누구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이 바라바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마태복음에는 단순히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합니다만, 다른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そこに、バラバという者がいて、暴動で人殺しをした暴徒たちとともに牢につながれていた。


누가복음 23장 19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バラバは、都に起こった暴動と人殺しのかどで、牢に入れられていた者であった。

요한복음 18장 40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すると、彼らは再び大声をあげて、「その人ではなく、バラバを」と言った。バラバは強盗であった。

이렇게 보면 바라바는 단순한 죄인이 아닌, 강도에 살인, 거기에 민란까지도 저질렀던, 다시 말해서 지독한 흉악범이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빌라도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그래도 바라바와 예수라고 하는 두 사람을 백성에게 선택지로 준다면, 틀림없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을 석방시켜달라고 하겠지. 설마 자기 동족을 죽인 흉악범 바라바를 석방하라고는 할 리가 없지 않는가……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27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ピラトは、彼らがねたみからイエスを引き渡した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ある。

성경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아온 이유를 <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가 아닙니다.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왔다는 사실,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ピラトは、祭司長たちがねたみからイエスを引き渡した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ある。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하지요. 그들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내세우고 율법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들을 비판하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 말씀만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합니다.

이제 백성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아요. 다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립니다. 이대로 있다가 자신들의 체면은 완전히 구겨지고, 그 때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권력들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른다면,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면,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까지도 저지를지 모릅니다.

아닌 것 같으신가요? 뭐, 요즘 보면 교파에 따라서는 자신들도 개신교라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서도 본래 안식일이 토요일이라고 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죠.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고까지 하셨으니 구약대로라면 지켜야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구약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태워서 바치라고 하셨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하냐는 거예요. 그 사람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과거에는 아무리 많은 제사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제사예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완벽한 제사를 드려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면서 구약대로 행한다면 이는 마치 여전히 양을 바치고 염소를 바치면서 불완전한 제사를 고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내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으십니까. 예를 들어서 사업장을 운영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믿음이 있다면 일요일에 사업장 문을 닫아야 해요? 말아야 해요?

예, 대체적으로 보면 사업장을 닫으시더라고요. 물론 그 시간이 예배 시간과 겹치는 경우도 그렇지만 겹치지 않는 경우도, 아, 주일이라고 해서 사업장 문을 닫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성도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도저히 일요일에 문을 닫을 수가 없어요. 쉬운 예로 보면 편의점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거기는 회사와의 계약으로 365일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믿음이 적은 건가요? 그 분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편의점을 그만 둬야 하나요? 아니면 교회에 나가는 시간에는 가게 문을 열어두되, 자기는 교회에 나가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쓰면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아르바이트생은 교회에 못 나가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아니면 꼭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은 쉴 수 있는데 그 사업 특성상 일요일은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분은 어떠십니까. 교회가 커져서 이런 분들이 많아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번, 어떻게 해서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도록 한다.
2번, 이 분들을 위해서 일요일만이 아니라 다른 요일에도 예배를 드린다.


한국에서는 성수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일예배라는 말은 우리 교회에서도 쓰지요. 하지만 저는 꼭 주일이라는 말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일본에서는 일요예배라는 말을 흔히 쓰고, 서양에서도 Sunday worship 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이 토요일이지만 일요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하여 그 날 모이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신다면, 주일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주님의 날, 예수님의 날,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안식일인 토요일이 예수님께서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토요일에 주인이신 건가요? 아니면 일요일에 주인이신 건가요? 아니면 둘 다인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주인 되신 건가요? 아닙니다. 하루하루 1년 365일, 윤달이 있는 해는 366일 모두가 예수님께서 주인 되신 날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매일 쉬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고, 매일매일 쉬기만 하시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요즘에는 <과로사>라고 하는 말이 흔히 쓰이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쉬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주로 일요일에 드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일요일에 쉬고, 마음을 하나로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요일에 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드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우리 이웃 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일요일에 교회에 못 나오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른 요일에라도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은혜가 넘쳐나겠습니까. 제게 말씀해주시면 함께 갈 수도 있고, 목사님이 안 계시면 동영상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아니, 성경을 읽고 기도만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그 날이 일요일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낸 율법으로 우리 이웃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강도 살인마인 바라바를 풀어놓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믿음의 중심, 마음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갖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우리들을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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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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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9회 믿음의 이유
2020년 6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27절 신약 153페이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ヨハネの福音書6章26節~27節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それは、人の子が与える食べ物です。この人の子に、神である父が証印を 押さ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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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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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이유” 信仰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조금 깊게 들어가면 지리적인 위치나 기타 사항에 대해서도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가급적 간략하게 필요한 핵심내용만 추려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전날에 말씀을 전하시고는 거기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가버나움으로 가시게 되는데,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간신히 배를 타고 와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기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그래, 너희가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찾으니, 너희 믿음이 크도다……뭐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하실 만도 한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칭찬은커녕 그 무리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 꾸짖는 이유가 바로 오늘 말씀 중에 요한복음 6장 26절입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


즉,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좀 이상합니다. 아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서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이게 그렇게 혼이 나야 할만한 일인가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 외에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병자를 많이 고치셨습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도 고치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병에 걸리지 않나요?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죽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역시 수명이 다 하면 모두가 다 죽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가 있게 되었나요? 폭풍이 불어올 때 이를 잔잔하게 하셨으면, 이제 두 번 다시 갈릴리에는 폭풍이 치지 않나요?

아닙니다.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는 그 누구도 순식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도 없었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에는 폭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천국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오시면, 우리 마음이 바로 천국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신 기적은 말하자면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토록 완전하게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던 그 무리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원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떡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음?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생각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화수분과 같은 打ち出の小槌도구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 많은 무리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성인 남성만 5천명이었다고 하니, 여성과 아이들을 합하면 최소한 만 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 있지요? 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이 복음서는 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들인데 그 내용을 보면 몇몇 내용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 책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에 대한 내용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오병이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에 대한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떡이나 생선을 꽤 큼지막하게 설정을 해놓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땠는지 성경을 한 번 보시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자세히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 8절~9절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여기에 보면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이 가지고 오거나 한 것이 아니에요. 그 무리 중 마침 음식, 말하자면 도시락 정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내용물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었던 떡은 밀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보리떡이라고 합니다. 보리는 밀가루보다도 값이 쌌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쌀밥이 아니라 꽁보리밥 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싼 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땠을까요. 떡 하나를 보더라도 값싼 떡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가 설마 고등어나 잉어만한 고기였겠습니까. 그것도 지금 이 도시락 주인이 누구입니까. 당시에는 사람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인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는 큰 생선이 아니라, 기껏해야 멸치? 정도 되는 작은 생선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꽁보리밥 다섯 덩이와 멸치 두 마리. 그러나 이 볼품없는 식량으로 예수님께서는 적게 잡아 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에 직접 계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배가 고프고, 내가 가지고 온 식량은 다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만 명이 넘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어린 애가 가지고 있는 작은 도시락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서 식량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비록 보리떡과 멸치 정도 되는 식사였지만, 지금 배가 고파서 눈이 돌아갈 마당인데 그게 문제인가요? 아주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일 같이 집에서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에도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4복음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처럼 놀라운 식사를 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도 없고, 예수님께 정말 잘 먹었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출애굽기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이제 홍해를 건너 광야를 행진합니다. 하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식량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과 만나와 때로는 메추라기까지도 주시면서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마다, 오,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먹여 주시오니 감사 드립니다……라는 말을 했었습니까? 아니요.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왜 안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사라지면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능력이 참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대단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요. 뭐를 사달라, 뭐를 해달라, 이렇게 자기한테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그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옵니다.

이 능력 있는 사람은 충분히 들어줄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들어주었어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이제 나중에는 소원을 들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안 들어주면 서운해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자기가 필요하지 않으면 안 만나줘요. 어디 그뿐인가요. 심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성 친구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가 되면 찾아와서 이걸 해달라 저걸 해 달라 하고, 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 해주면 서운해하고 불평을 하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감사가 없으면 사랑 또한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버린 적이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사랑이 사라집니다. 해주면 당연하고 안 해주면 불평불만이에요.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아내와 남편 간에도 서로에게 감사가 있으면 불만이 없습니다. 감사할 만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그 때부터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 하루하루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불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볼까요?

여러분들도 돈이 필요하시지요? 예,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쯤 있으면 충분하시겠습니까. 1억엔? 2억엔?

좋습니다. 제가 좀 쓰겠습니다. 100억엔 정도면 되겠습니까? 요즘 보면 코로나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지원금을 준다고는 하는데, 이 지원금이 고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여러분께 100억 엔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사기가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미안하지만 이 돈을 받으러 동경에 있는 일본은행까지 직접 와달라는 거예요. 그럼 안 가겠어요? 아니, 지금 10만엔 20만엔 정도로도 감지덕지 하고 있는 마당에 100억 엔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동경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이라 하더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돈을 받으러 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내면 안 된대요.

자, 기한은 없어요. 언제라도 좋으니까 동경에 가기만 하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 돈만 생기면 코로나가 문제예요? 내 평생 동안 편안하게 살고도 남을만한 돈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자식, 내 손주까지도 돈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지요. 동경으로 가는 그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울 것입니다. 마음에는 감사가 넘쳐나겠지요.

자, 이제 다카사키에서 신칸센을 타고 갑니다. 그런데 사이타마까지 가다가 신칸센이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도중에 내려서 근처 역까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자, 이제 역에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에 새치기를 해요.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지나가는 어떤 어려운 사람이 천 엔만 도와달래요. 여러분,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화를 안 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볼품없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100억 엔을 내고 사게 되면 그 물건은 100억 엔의 값어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 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무엇과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바로 예수님의 피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됩니까. 100억이요? 200억이요? 이는 전세계가 아니라 전 우주를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바로 우리 자신의 가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값어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귀한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화가 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가 넘쳐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 바로 이 감사,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시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 주신다고 실망하거나 불평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주시면 감사, 그리고 안 주신다 하더라도 더욱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단순히 떡 몇 개, 물고기 몇 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할 때에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부족할 때에는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이기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50편 14절~15절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感謝のいけにえを神に献げよ。 あなたの誓いをいと高き神に果たせ。
苦難の日に わたしを呼び求めよ。 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出し あなたはわたしをあがめる。」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잠언 4장 8절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それを尊べ。それはあなたを高める。それを抱きしめると、それはあなたに誉れを与える。

우리 모두 감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기쁨과 찬양으로 우리 주님을 높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영화롭게 여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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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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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8회 이슬과 거듭남
2020년 6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신약 62페이지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マルコの福音書6章1節~3節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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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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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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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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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슬과 거듭남” 露と生まれ変わ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여기 저기를 다니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기도 하고, 천국 복음을 말씀해주시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그리고 폭풍 가운데에서 파도를 잠재우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이제 예수님은 이제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이는 그렇다고 무슨 명절날에 귀성을 하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시는 과정에서 방문을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그곳에 살고 있던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2장 4절에 의하면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말하자면 주민등록신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 식으로 본다면 멀리 떨어진 본적지로 가서 주민신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야곱의 후손 중에서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누가복음 2장을 한 번 살펴볼까요?


누가복음 2장 1절~7절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そのころ、全世界の住民登録をせよという勅令が、皇帝アウグストゥスから出た。
これは、キリニウスがシリアの総督であったときの、最初の住民登録であった。
人々はみな登録のために、それぞれ自分の町に帰って行った。
ヨセフも、ダビデの家に属し、その血筋であったので、ガリラヤの町ナザレから、ユダヤのベツレヘムというダビデの町へ上って行った。
身重になっていた、いいなずけの妻マリアとともに登録するためであった。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은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 대단히 오래된 지역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아내 중 한 명인 라헬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만, 성경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가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리고 이방 지역으로 갔다가 남편도 잃고 아들 둘마저도 잃어버린 나오미. 이제 그 집안은 누가 보더라도 망한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둘 있던 며느리 중 하나는 떠나 보내고, 또 한 며느리인 룻도 떠나가라고 하는데 끝까지 안 갑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그래도 여성의 역할이 많이 늘어가고는 있습니다만, 당시는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느니 우리가 한 번은 버렸던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간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보신 여러분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그 곳에서 룻이 보아스(ボアズ)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オベデ)이고, 오벳 아들이 이새(エッサイ)이고, 이새 아들이 바로 다윗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한편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유다 지파 그것도 다윗의 계보에 속한 자손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본적지가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민등록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그 거리가 얼마나 되냐 하면 지도상으로 보면 직선거리로 150킬로가 넘는 거리라고 합니다. 성인 남성이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 정도라고 하니, 단순계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쉬지 않고 4킬로로 걸었다고 하더라도 40시간 정도, 거의 이틀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틀 동안 걷기만 하나요? 식사도 해야지요, 잠도 자야 합니다. 하루에 부지런히 10시간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40킬로, 그렇다면 대략 4일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인가요? 당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성령님의 능력으로 만삭이었습니다. 출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 여정은 아마도 4일보다 더 길고도 그리고 힘든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마침 도착을 했는데 그 때는 이스라엘 전체가 이 호적 하는 사람을 때문에 이동인구가 많았을 때였을 테니,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는데 여관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마리아한테 진통이 왔어요.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리아도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간신히 출산을 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당연히 본래 집이 아닙니다. 어서 호적을 마치고는 아이를 데리고 또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헤롯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헤롯은 두 살 밑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어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몇 년 동안 지내고 있었더니 헤롯 왕이 죽게 되자 다시 돌아와서 본래 살던 나사렛으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거기서는 태어나시기만 하셨고, 잠시 애굽으로 몇 년 갔다가 어린 나이에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질적인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저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입니다만, 거기서는 아마 1년 정도 있었다가 서울로 올라오고, 거기서 7살 정도까지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와서 동경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살았으니까 뭐 고향은 동경, 특히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11년은 도쿄타워 있는 곳에 살았으니까 거기가 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집도 좁았는데,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셋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님께서 살았던 나사렛,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삼으셨을 정도이니까 꽤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베들레헴은 구약 그것도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대단히 유서 깊은 동네인데 반해, 나사렛은 어떠냐 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마태복음 2장 23절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역사는 그리 깊지 않지만 그래도 꽤 잘 사는 곳이었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ピリポ)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역설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사렛 예수야.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뭐라고 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개역개정에는 되어 있습니다만,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어떠세요? 대단히 직설적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무슨 지역감정이다 뭐다가 아니라, 그 지역은 정말 볼 것이 없는 동네, 한국에도 뭐 그런 곳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말씀 드리면 좀 그렇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전통적으로 깡패들 출신이 많은 동네, 뭐 그런 것으로 유명한 동네라고 한다면, 하필이면 거기서, 예를 서울 뭐 강남이라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대문 안이라면 모를까, 저 지방 시골 촌구석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오겠어? 말하자면 이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 정도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 바로 그 곳이 나사렛이었던 것입니다.


자, 배경설명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난 다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안식일에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은 각 교회마다 목사님이 계셔서, 그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성경말씀을 전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는 회당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회당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회당장이 직접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랍비라고 하는 선생을 지명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에 들어가셨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목사님들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많은 은혜를 받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정말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났던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요? 감동을 했나요? 넘치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랬나요?

오늘 본문 중에서 마가복음 6장 2절 후반부부터 3절까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2절 중반부~3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 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그 놀라운 말씀을 듣고 감사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이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30세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보아서 당시에는 그 자리에 예수님보다도 연배가 많은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야아, 말씀 정말 놀랍고 은혜로운데……그리고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병자들도 고치고 그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놀라운 그 광경을 보고 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냐 하면,

어? 잠깐, 지금 저 친구 거 마리아의 아들 목수였던 애잖아? 쟤네 집안은 잘 알지. 쟤 동생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잖아. 그리고 누이들도 아직까지 우리 동네에 같이 살잖아. 아니, 그런데 쟤가 조금 못 보던 사이에 어디서 저렇게 성경을 공부했대? 어쭈, 그래도 말하는 것 보니까 공부 좀 꽤 했나 본데? ……아이구 웃기고 있네. ㅎㅎ

뭐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 해도 이미 마음에 장벽을 쌓아 놓아버렸으니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을 했었더라면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수도 있을 텐데,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것을 거부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 어떠십니까. 그냥 뭐, 그런가 보다……정도이신가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적지 않게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지역에 어려서부터 자라고, 그리고 그 동네가 그리 큰 지역도 아니라고 한다면, 서로 집안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 형제 이름까지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참고로 말이 나온 김에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 영원한 처녀라고 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형제를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다, 아니면 이복형제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부인이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 우리의 기도를 도와준다, 하물며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처럼 승천을 했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그야말로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왜 나오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유일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 전혀 모순이 없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맞는 내용이라면 받아 들이지만, 아무리 유명한 사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아무리 말씀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적힌 내용과 다르다면 이는 우리가 받아 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이 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 쉽게 말하자면 신부나 교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권위 있는 신부나 교황이 말을 하면, 그 내용이 성경만큼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영향으로 우리도 모르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리아가 나쁜 여성이었을 리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과정으로 마리아를 통하게 하셨을 정도이니 믿음이나 성품도 좋은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기 전이었으나, 예수님을 출산하신 뒤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고, 둘 사이에 자녀를 두었다 하더라도 이는 전혀 흠이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야말로 좋은 아내에 좋은 어머니, 이상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다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이름에 보면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중에서 야고보가 성경 야고보서를 쓰고, 유다가 성경 유다서를 쓴 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생들도 비록 육신으로는 자신의 형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믿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 이와 같이 서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봐왔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나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를 하기 전에 이미 잉태를 했었고, 이 사실은 천사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미리 알려주었던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상으로 본다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유전자적으로 본다면 요셉의 피는 섞여 있지 않고, 전무후무하게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성경에서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실을 하늘의 별로 인해서 알아낸 박사들이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32절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そのとき、エルサレムにシメオン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正しい、敬虔な人で、イスラエルが慰めら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た。また、聖霊が彼の上におられた。
そして、主のキリストを見るまでは決して死を見ることはないと、聖霊によって告げられていた。
シメオンが御霊に導かれて宮に入ると、律法の慣習を守るために、両親が幼子イエスを連れて入って来た。
シメオンは幼子を腕に抱き、神をほめたたえて言った。
「主よ。今こそあなたは、おことばどおり、しもべを安らかに去らせてくださいます。
私の目があなたの御救いを見たからです。
あなたが万民の前に備えられた救いを。
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御民イスラエルの栄光を。」

이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저 메시야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아기 예수를 보고 이 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또한 같은 누가복음 2장 후반부에 보면 열두 살 된 예수님께서 율법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 선생들이 예수님의 지혜에 놀랍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한참 전부터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롭고 지혜롭고 놀라워요.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야만 자연스럽겠습니까.

와아, 그래. 내가 일찍부터 알아봤어. 어렸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었다니까.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보통 이런 작은 동네라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조금 잘해도 금방 소문이 나고, 운동을 잘 해도 소문이 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선수가 갑자기 그렇게 잘했겠어요? 다 어려서부터 자기 동네 지역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선수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사람들은, 그래, 정말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참 잘했었다. 나중에는 프로가 될 줄 알았다……뭐, 이런 말을 대부분 듣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그와 같이 놀라운 말씀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는,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이 사실을 두고 당시 나사렛 사람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저는 당시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좀 동정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그 막연한 정보만 가지고도 당시 베들레헴 지역에 사는 갓난아기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릴 정도로 권력에 대해서는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권력에 대한 집착은 비단 헤롯 왕만이 아니라 모든 권력자들이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내 권력을 위협할만한 세력이 있다고 눈치를 채면 곧바로 이를 짓밟아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20장 31절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エッサイの子がこの地上に生きているかぎり、おまえも、おまえの王位も確立されないのだ。今、人を遣わして、あれを私のところに連 れて来い。あれは死に値する。」

사울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를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인데, 괜히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은 한시도 평온한 생활을 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정말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고향 사람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지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일까요?

저는 사실 이 말씀을 보면서 다른 쪽으로 은혜를 더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예정된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 조용히 살아오시고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비로소 자신을 나타내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구세주도 아닌 우리의 인생은 어떨까요.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탄생하고 멸망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한국도 그렇고 일본이나 여러 나라들을 보아도 수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이 태어나고 사라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꿈을 펼치려고 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은 그렇게 큰 뜻을 품어보긴 했으나, 결국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가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야말로 이슬과 같은 삶을 살다 가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 또한 이슬처럼 잊혀지고 말지 않았을까.

호세아 13장 3절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それゆえ、彼らは朝もやのように、朝早く消え去る露のようになる。打ち場から吹き散らされる籾殻のように、また、穴から出る煙のようになる。

자기들은 좋은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주장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는 삶, 금새 잊혀지는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닐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 했는냐,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동행하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이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0절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目覚めの夢のように 主よ あなたが目を覚ますとき 彼らの姿を蔑(さげす)まれます。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셨다고 한다면 이는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인생,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생,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인생은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구름 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이요, 잠에서 깬 다음에는 사라지는 꿈과도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삶은 성경에 거의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기, 청년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20대에는 무엇을 하시면서 보내셨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시작하셨을 때부터 비로소 성경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주목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본연의 삶을 펼치시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모세가 들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지팡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팡이가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また、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부터 자기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전혀 매끌매끌하지도 않은 투박한 지팡이, 언제나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평범한 지팡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자, 그 때부터 성경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투박한, 여전히 평범한 지팡이처럼 보이지만 이제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어제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아니, 방금 전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불만족스러우십니까. 아쉬움이 많습니까. 후회가 됩니까. 아니면 너무나도 평범합니까. 부끄러운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넉넉하지 않습니까. 배경이 보잘 것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자라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과 동행하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 받으시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거듭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거듭난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슬과 같은 허무한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삶,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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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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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회 유혹과 은혜 4
2020년 6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 신약 4페이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節~2節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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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 誘惑と恵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마지막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까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서 잠깐만, 우리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문제라기 보다는 여러분의 생각을 좀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이 성경구절을 잘 알고 계셨던 분들도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셔서 시험을 받으시면 됐잖아요. 그런데 40일간이나 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요.

1번. 예수님께서는 이제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신 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사역과 십자가까지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40일 금식을 하셨다.

2번 기타.


물론 제가 내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정답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번 문제에 대해서는 1번이 그럼 정말 틀렸다……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꽤 많은 신학자들이 이처럼 이해를 하기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생애를 앞두시고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런 말씀,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잠시 멈추어 서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대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기간은 그리 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여정을 대부분 두 발로 걸어 다니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 시간 낭비는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반드시 꼭 필요하신 사역만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40일 금식도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공생애를 앞둔 간절한 기도였다……라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에 대해서 기도를 드렸다……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모든 내용들이 100% 다 나와 있다면 문제가 안 되겠으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이 안 된 부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짐작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을 하셨으니까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40일 금식부터 시작하여야 하나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예전 시간에 언급을 했던 에스더서의 기록을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스더서 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에스더 4장 11절에서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게에게 말합니다.


에스더 4장 11절
“11.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1節
「王の家臣たちも王の諸州の民も、だれでも知っているように、召されないのに奥の中庭 に入って王のところに行く者は、男でも女でも死刑に処せられるという法令があります。ただし、王がその人に金の笏(しゃく)を差し伸ばせば、その人は生きながらえます。私はこの 三十日間、まだ王のところへ行くようにと召されていません。」

그리고 에스더 4장 15절~16절
“15.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に返事を送って言った。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숙적 하만이 자신의 민족 유다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각오를 합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왕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데 당시의 왕실 규율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으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함부로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왕은 30일 동안이나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면 무슨 사람을 시킨다거나 아니면 카톡이라도 보내서, 잘 지내시냐고 안부라도 묻거나, 아니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요즘 왜 나한테 무관심하시냐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부를 묻기는커녕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왕 앞에 나갔을 때, 왕이 가지고 있는 규를 내밀면 왕 앞에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는 뜻이기에 생명을 보존할 수는 있지만, 만약에 왕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서, 아니,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감히 어디를 얼쩡거려! 라고 한다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민족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금식을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지금 공생애를 막 시작하시려는 순간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 있어서도 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제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를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고난의 시작이 다가왔습니다. 너무나도 괴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38절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そして、ペテロとゼベダイの子二人を一緒に連れて行かれたが、イエスは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悲しみのあまり死ぬほどです。ここにいて、わたしと一緒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이 장면은 당시 에스더가 괴로워했던 장면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예수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을 하셨을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괜히 복잡하게 신학자들의 추측이나 주장이나 학설을 다루는 것이 아닌, 단순하게 오로지 성경 기록만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논리학에는 이른바 인과관계라는 말이 있지요.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를 줄여서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이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A라고 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B라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 두 사건이 서로 별개이고 서로 연관된 것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면 인과관계는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고 이해하게 된다면 A라고 하는 원인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는 서로간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는 뜻은, 이를 뒤집어 본다면 A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B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공식을 오늘 말씀에 대입을 시켜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오늘 이 성경에도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A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시고는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B는 예수님께서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기 때문에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 시험을 당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제 상상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가셨는데 거기에 마귀가 있었어요. 그러면 거기 있는 마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すると見よ、彼らが叫んだ。「神の子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もう私たちを苦しめに来たのですか。」


마가복음 1장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ナザレの人イエス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私たちを滅ぼしに来たのですか。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여러분, 이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닙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보고 한 말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무슨 마귀들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 사탄들은 예수님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평소에는 예수님 앞에서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마귀 사탄이 어떻게 해서 광야에서는 감히 대담하게도 예수님을 시험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누구는 주장합니다. 당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는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절절 맸던 마귀들은 졸개들이지만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 정도 되면 예수님까지도 시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루시퍼라고 하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자, 오늘 두 번째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 루시퍼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없다?


간단하게 말씀 드립니다. 없습니다. 보통 사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면 이사야 14장 12절을 많이 듭니다.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明けの明星、暁の子よ。どうしておまえは天から落ちたのか。国々を打ち破った者よ。どうしておまえは地に切り倒されたのか。

여기서 이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이 금성을 말합니다. 이 구절이 타락천사, 즉 사탄을 뜻한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 중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영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NIV에서는 이를 morning star, NASB는 star of morning, 이를 직역하면 “아침의 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KJV에서만 이 계명성을 “Lucifer”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를 가지고 마귀의 이름이 루시퍼라고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사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름이 나오는 천사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 이름은 두 개 뿐입니다. 하나는 천사장 미가엘이요, 또 하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천사 이름이 등장할 때에는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합니다.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ユダの手紙 1章9節
御使いのかしらミカエルは、モーセのからだについて悪魔と論 じて言い争ったとき、ののしってさばきを宣言することはあえてせず、むしろ「主がおまえをとがめてくださるように」と言いました。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御使いは彼に答えた。「この私は神の前に立つガブリエルです。あなたに話をし、この良い知らせを伝えるために遣わされたのです。

이처럼 구체적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 우두머리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면 이도 역시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텐데, 영어 번역서 중 하나인 KJV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역 ウルガータ訳 등 일부 번역서에 적힌 막연한 단어인 루시퍼라는 말을 가지고 이를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 보 양보를 해서, 사실 이는 백 보가 아니라 단 한 발자국도 양보를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굳이 백 보 양보를 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 사탄이 마귀의 우두머리였다고 치고, 마귀의 우두머리쯤 되면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가끔 단어 때문에 혼란을 겪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과 악령. 이 둘은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보기에는 성령과 악령,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성령은 좋은 쪽, 악령은 나쁜 쪽, 이렇게 대등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크나큰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성령님은 성령 하나님, 이것이 삼위일체 아니겠습니까.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천사장 미가엘이나, 제아무리 마귀 사탄의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이 두 관계는 절대로 대등할 수 없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로 뒤바뀔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창조주와 피조물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마귀 사탄의 시험을 결과 B라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원인 A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40일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영화에서 가끔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제가 본 영화에서는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여전히 멀쩡했습니다.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이 아주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여러분, 광야라고 하는 데가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을만한 것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맨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우리한테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그러면서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계셨습니다. 거기에 누군가가 지어놓은 허름한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허름한 초가집 같은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어요. 그야말로 바깥에서 노숙을 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숲 속이라면 그늘이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광야에는 제대로 된 나무들도 없습니다. 그냥 햇빛이 내리쬐는 허허벌판에서 지내시면서 밤에는 그곳에서 주무셨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식사는 물론이고 물 한 먹음도 못 마셨습니다. 그 동안 편안한 잠자리에서 주무시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혀 괴롭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100%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모두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40일 동안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잠도 편안하게 못 주무시고, 당연히 옷도 갈아입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온몸에서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는 것조차 힘에 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계속 입고 계셨던 옷은 지저분해지다 못해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을 것이고, 얼굴은 입술이 부르트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마귀들이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마귀들은 우리들의 틈을 노리고 우는 사자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8장 7절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主は、あなたに向かい立つ敵どもをあなたの前で敗走させる。彼らは一つの道からあなたを攻めて来るが、あなたの前で七つの道に逃げ去る。

우리에게 틈이 없다면 마귀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며 소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마귀 사탄과 맞선다면,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원수들이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병에 걸렸다가도 자연히 낫는대요. 그리고 사람들마다 병균이 몸 속에 있다고 하는데, 건강하면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체력이 떨어지고 저항력이 약해지면 그 동안 가만히 있던 이 나쁜 병균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굳건하고 영육간에 건강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약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평소 때에는 꼼짝도 못하던 마귀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평소에는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그럴 때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손도 못 대더니, 체포를 하고 나서 이제 자기들한테 유리하다고 판단되니까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채찍으로 때리고는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다 마귀 짓이지 무엇입니까. 이처럼 마귀 사탄들은 상대방이 약할 때를 노려서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도 분명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인과관계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굳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이유는, 이로 인해서 영적으로 마귀 사탄에게 틈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로 하여금 시험을 하도록 허락하셨다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런 의문이 생기겠지요. 그래. 좋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시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뭐 그렇게 영화에 대해서 조예가 깊거나, 남들에 비해서 많이 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세대 다른 사람들보다 좀 적게 본 축에 속하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작년엔가에 본 영화가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왕과 왕의 호위무사, 그리고 배신자가 등장합니다만, 먼저 배신자와 호위무사가 싸움을 합니다. 왕의 호위무사니까 얼마나 칼 싸움을 잘하겠어요. 그래서 이 배신자를 수세에 몰지만, 막판에 이 배신자가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작은 칼을 뽑아서 이 호위무사를 공격합니다.

설마 그런 무기가 있다고는 예상을 못했던 호위무사는 어깨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 다친 몸을 끌고 간신히 왕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결국 거기서 쓰러집니다.

거기까지 추격해왔던 배신자와 왕이 이제 칼로 겨루게 되는데, 이 왕의 칼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 배신자가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왕한테도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역시 그 때 또다시 이 배신자가 자신의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비밀무기, 작은 칼을 뽑아 들고는 기습적으로 왕을 찌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이 그 기습공격을 피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위무사가 왜 여기까지 왔겠느냐.

호위무사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왕에게 왔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자신이 입은 그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본 왕은, 배신자가 어떤 작전을 쓰는지를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기습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제가 40일 금식을 한 분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분은 물을 마시면서, 그리고 잠자리도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주무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실 물도 없고 침대는 고사하고 마땅한 이불조차 없는 광야 허허벌판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다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토록 힘이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했던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시기 위함이셨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 마귀가 어떤 유혹으로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그 마귀의 수법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마귀의 수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여기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뜻을 보다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5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뱀의 모습을 한 마귀 사탄은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권력에 대한 유혹까지를 모두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그토록 힘들게 40일 금식을 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마귀 사탄이 유혹하는 궤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였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애초에 말씀 제목을 “유혹과 은혜”로 붙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아차린 마귀는 어쩌면 자신의 작전이 노출되었다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을까요? 아니요. 아마도 마귀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문득 씨익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괜찮다는 거예요. 아무리 들통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법이 알려졌다 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다, 나는 자신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처럼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남들보다도 성경을 훨씬 더 많이 안다고 하는 신앙인이나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잘못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의해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마귀 사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육의 생각, 사탄이 주는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 주님이 주시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생각을 따르고, 주님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38회 이슬과 거듭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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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6회 유혹과 은혜 3
2020년 5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8절~10절 신약 5페이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8節~10節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 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 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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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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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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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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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 誘惑と恵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시험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서 첫 번째는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에 대해서 시험하고 두 번째는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명예에 대해서 시험을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오늘 세 번째는 무엇에 대한 시험인 것 같으십니까.

먼저 오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8절~10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이제 마귀는 예수님께 말하기에 앞서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보십시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어디로 모시고 갔습니까.


마태복음 4장 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이는 마귀의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지극히 높은 산까지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어느 산인가에 대해서 이 또한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산은 단순히 고도가 높기만 한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산인가 하면, 그냥 높은 산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보였다고 합니다.

일단 물리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지구는 둥급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높은 산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아니, 하물며 우주에서 내려본다 하더라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을 모두 한 번에 바라볼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나라들을 바라보았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영광을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 나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화려한 것? 얼마나 그 나라가 멋지고 잘 사는 나라인지에 대한 것일까요?

마귀 사탄은 이 영광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만약에 자기한테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한테 주리라.

이는 단순히 나라를 주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고 마귀 사탄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시험입니까. 이를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바로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권력에 대한 유혹인 것입니다.

권력.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참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시험은 재물이요, 두 번째 시험은 명예였습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 한꺼번에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돈은 얻었으나 명예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요, 반면에 돈은 못 얻었지만 명예만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어떻습니까.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 이유는 이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면, 이는 100프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권력이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경우가 솔로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와 명예, 그리고 지혜까지도 얻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이나 10장 등을 보면 그 부귀와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권력이라고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얼마나 여자를 많이 거느리느냐 하는 것도 역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점으로 본다 하면 솔로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에 의하면 후궁이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側女(そばめ) 이 숫자에 의하면 도합 1000명의 여성이 있었다는 뜻인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그가 죽은 다음에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만, 그에게 주어졌던 이 축복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또한 마귀 사탄이 세속적인 권력으로 유혹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당하지 않은 방법, 떳떳하지 않은 방법,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얻는 권력이야말로 마귀 사탄에 굴복해서 얻는 권력이기에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권력을 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 권력의 맛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른바 지배자를 영어로 룰러라고 하는데, 이 룰러의 또다른 의미는 길이를 재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룰러라고 하는 단어를 보면 룰을 만드는 사람, 즉 규칙을 만드는 사람, 기준을 만드는 사람, 법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를 재는 자와 똑 같은 뜻을 가진 권력자,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면 참 오묘합니다. 사람이 길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기존에는 10센티인 것을 가지고 지배자가 오늘부터 이것을 1미터로 한다고 하면 그게 1미터가 되는 것이요, 반대로 오늘부터 1센티로 한다고 하면 1센티가 된다는,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아도 권력은 다른 재물과 명예와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게 된다면, 이를 당시 헌법이나 법률에 따라서 처벌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잘못된 방법으로 권력을 얻게 된 사람은 처벌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얻게 된 권력을 가지고 법을 바꾸게 되면, 자신의 잘못된 모든 행위를 불법이 아닌 합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합법은 옳은 것이요, 불법은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으로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권력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나치의 히틀러의 경우를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행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있어서 모두가 합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나요? 아닙니다.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자기가 얻어낸 막강한 권력으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합법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권력은 감미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 권력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간에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권력을 한 번 가져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아, 나도 갖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반면에, 아휴, 그런 걸 가져서 뭘해……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무슨 정치다 권력이다 하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잘 감이 안 와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 개인적인 예를 들어서 한 번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에 와서 이제 6년 뒤에 한국학교 초등부를 졸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제가 살던 그 지역에 있는 일본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당연히 일본말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지만, 6년 동안 학교에서 한국어와 함께 일본어를 배웠으니 당연히 일본어도 늘지요. 어른도 아닌 어렸을 때 6년 동안 그것도 학교에서 매일같이 공부를 하게 되니 이제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이 꽤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 일본 중학교에 들어가서 일본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게 좀 차이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학교에서는 한국 학생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지만, 일본인 학교에서는 일본인 사이에서 외국인으로서, 말하자면 소수파로서 생활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학년 때에는 이른바 이지메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어떨 때에는 끌려가서 동기들이나 선배들한테 두들겨 맞았던 적도 있었어요.

이게 몇 번 이렇게 되니까 참 인생이 피곤해 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제 2학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각 반에서 무슨 위원 같은 것을 종류별로 뽑는 것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정말 감투라고 할만한 것이 있지요. 학급 반장이나 회장 같은 것은 서로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 중에는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귀찮기만 하고 대우도 못 받는 그런 말하자면 한직 같은 위원도 있습니다. 그런 건 보통 아무도 안 하려고 하지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위원이 뭐냐 하면, 한자로 정미위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리한다고 할 때의 정 자와, 아름다울 미 자를 써서 정미위원인데 이 위원도 각 반에 두 명씩 뽑아야 합니다.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저희 학교에서는 이를 아무도 하기 싫어해요. 이게 각 반에 있는 빗자루나 대걸레 관리를 하고 그러는, 쉽게 말해서 청소반장인데 누가 그런 걸 하고 싶어하겠어요.

그러던 와중에 별로 반에서 대우도 못 받고 있던 저한테 이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런 것 있잖아요? 야, 너 해. 그러면 너도나도 갑자기, 그래, 너 하면 되겠네, 너 해라. 뭐 이렇게 해서 가만히 있는데 정해져 버리는. 저도 그래서 얼떨결에 정미위원인지 뭔지가 되었습니다.


다른 위원회도 그렇습니다만, 이 정미위원들도 한 달에 몇 번 꼴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위원회가 열립니다. 그래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각 반에서 두 명씩 한 교실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거기서 또 보니까 정미위원 위원장을 뽑아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또 몸집이 커서 선배들 눈에 띄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떠밀려서 위원장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참 이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몰라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내 방 하나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는데, 대우도 못 받고 귀찮기만 한 청소반장, 그것도 위원장이 되어버렸으니까 이제 3학년 선배들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잖아요. 아 참,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플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죠. 좀 지나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그러니까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야 할 내용들이 많아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까 교무실 선생님들 대부분과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정미위원회 위원장의 힘이 참 놀랍더군요. 뭐냐 하면, 내가 승인을 하지 않으면 각 반에 대걸레나 빗자루가 채워지지 않아요. 그런 게 망가지거나 없어져서 못 쓰게 되면 청소할 때 보통 불편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그 때까지 저를 우습게 보던 아이들이 나한테 와서 부탁을 하는 거예요. 자기 반에 대걸레, 빗자루, 쓰레받기를 넣어달라고요. 이것 참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때까지 있었던 이지메는 싹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온하게, 정말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그와 같은 저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이 친구는 얼마나 저를 미워했냐 하면, 이 친구는 다른 반이었는데, 다음 학기에 일부러 남들이 싫어하는 정미위원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저를 밀어내고 정미위원회 위원장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 집념의 사나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래서 2학년 2학기에는 아마도 거의 유래가 없었겠지요. 정미위원회 위원장이 후보가 두 명이 되어서 선거까지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압도적인 표차로 제가 위원장을 연임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위원장은 3학년 1학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만, 결국 3학년 1학기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이런 시시한 경력을 가지고 여러분께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냥 동네 중학교 청소반장도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권력들을 보십시오. 정말 옆에서 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시시한 자리 같은데도 서로들 하고 싶어서 난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물며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 여기까지 가면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대단한 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 비하면 요즘 권력은 권력도 아니라고 해요. 그렇지요. 임기가 되면 내려와야 하고, 선거에 지면 정권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자식을 죽이면서까지도 손에 쥐려고 하는데, 임기가 되었다고, 선거에 졌다고 아무런 저항 없이 내려온다는 일은, 이것만 보더라도 대단한 정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어제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오늘 암살 당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꼭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회사나 단체에도 존재합니다. 하물며 가족 간에도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힘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권력이 영원한가요? 영원히 그 힘을 가질 수 있나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아무리 수많은 나라들을 지배하고, 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그리고 여자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내려와야 하는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재판과는 전혀 다릅니다.

누가복음 12장 2절~3절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おおわれているもので現されないものはなく、隠されているもので知られずにすむもの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서의 재판은 감추려고 하면 감추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놓인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추고자 했던 일이 하나도 남김 없이 알려지게 되고, 어두운 데서 작은 소리로 한 말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한 귓속말이 모두 전파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대해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아, 나는 내 일생에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죄를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내 비밀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만약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 기억력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는 그냥 제 생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성경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 뜻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의인이라고 한다면 이는 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가 없다,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기억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밖에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수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겸손해집니다. 이 땅의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나 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도 되십시오, 회장님도 되십시오. 하다못해 청소반장도 되십시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되는 과정이나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귀 사탄에게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6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たましいを殺せ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たましいもからだもゲヘナで滅ぼすことができる方を恐れなさい。

시편 32편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私は自分の罪をあなたに知らせ 自分の咎を隠しませんでした。 私は言いました。 「私の背きを主に告白しよう」と。 すると あなたは私の罪のとがめを 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마치고 난 다음,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마귀 사탄에 굴복한 지난 날들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오로지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천국에서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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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5회 유혹과 은혜 2
2020년 5월 24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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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マタイの福音書 4章 7節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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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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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2 ” 誘惑と恵み 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4장 5절~6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시험으로서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내더니, 이제는 높은 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배경설정이 매우 독특합니다. 그냥 높은 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앞서 냈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을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이라고 한다면, 이번 시험은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험이라는 뜻이요, 두 번째 의미는, 이번 시험은 단순히 세상적인 유혹이 아니라 신앙적인 유혹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돈이나 재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일 식사도 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자기 것이든 하물며 남의 것이든 간에 돈이나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물을 얻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물론, 아, 내가 큰 회사를 차려서 큰 돈을 벌어보겠다……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오늘 한끼 먹는 것이, 예컨대 상황이 대단히 어려울 때에는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 먹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한 끼 두 끼 먹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하지만 오늘 이 시험은 어떻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내 인생의 최종목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시험인 것입니다.

첫 시험이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두 번째 시험은 바로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명예에 대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험에 담긴 두 번째 의미, 그냥 높은 곳이 아니라 하필이면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시험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층빌딩도 없었을 테니까, 만약 지금 같았으면, 서울이면 남산타워나, 동경이면 스카이트리? 우리가 살고 있는 군마현이라면 군마현청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성전 꼭대기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갔었던 것일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에 말씀 드릴 세 번째 시험을 보시면 아실 수 있겠습니다만, 마귀 사탄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성전 꼭대기가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곳에라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시험을 본다면 굳이 성전 꼭대기에서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예 중에서도 신앙적인 명예로 유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확인해주는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놀랍게도 마귀 사탄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기록은 성경에 있는 부분입니다.


시편 91편 9절~12절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それは わが避(さ)け所 主を いと高き方を あなたが自分の住まいとしたからである。
わざわいは あなたに降りかからず 疫病も あなたの天幕に近づかない。
主が 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て あなたのすべての道で あなたを守られるからだ。
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 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

이를 보더라도 사탄이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자,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다면서? 그렇다면 뛰어내려봐.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다른데도 아닌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는데도 다치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다고 믿을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할렐루야 소리가 나고 너는 박수를 받으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거야.

이게 지금 마귀가 했다는 말 때문에 그렇지, 만약에 그걸 빼고 들으면 어떻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틀린 부분이 있나요?


만약에 제가 다음 주 주일 아침에, 아니 뭐 꼭 다음 주가 아니더라도, 오늘 이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들 잠시 바깥으로 나오시라고 하고, 제가 우리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주님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면서 점프를 했는데, 그 순간 정말 여기저기서 천사가 날아오더니 제 몸을 붙잡아주어서 제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면, 여러분께서 그것을 보고, “사탄아 물어가라!”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퍼져서 우리 교회도 부흥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그런데도 제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 번 제가 오늘, 아니, 지금 곧바로 뛰어내려 볼까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미국 CNN과 AP 통신이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뭐냐 하면 미국 캔터키 주에 사는 교회의 어느 한 목사님이 뱀에 물려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소식 아닙니까.

그래서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을까 했습니다만,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이게 좀 이상합니다. 뭐냐 하면 이 목사님은 예배를 드릴 때에 뱀을 가지고, 그것도 살아 있는 독사를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께서도 어쩌면 이 소식을 접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니 허고 많은 좋은 것들을 내버려두고 왜 하필이면 뱀을 들고 예배를 드렸을까 했더니만, 이 목사님,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소식을 전한 한국의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이 목사님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럼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느냐. 아니요. 있기는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18절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信じる人々には次のようなしるしが伴います。すなわち、わたし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新しいことばで語り、
その手で蛇をつかみ、たとえ毒を飲んでも決して害を受けず、病人に手を置けば癒やされます。」

자, 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미국의 그 분도 목사님이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겠지요. 그렇다면 뱀을 집어 올려도, 뱀에 물려도 죽지 말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연합뉴스의 그 기사에 의하면, 그 목사님은, 그 날 뱀에 물리고 밤 8시 30분에 귀가하셨는데,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목사님은 이를 거부를 했고, 결국 밤 10시 쯤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노릇이지요. 저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도 그냥 예배 때 무슨 뱀을 유리 상자 안에 넣어두고 그냥 좀 만지거나 하는 수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인터넷에 보니까 동영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큰 뱀을 꺼내서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목에 걸기도 하고 그러면서 예배를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재작년 기사에 보니까 또 이런 내용이 실렸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 8월 17일에 그 교회에서 또 목사님이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니, 그 목사님은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이번에는 누가 또 그런 변을 당했나 했더니만, 누구겠습니까. 예, 그 목사 아드님이시래요.

이 아드님도 목사님이셨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물리는 순간의 동영상까지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뭐,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니까 한 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이 분도 아버지를 따라서 예배 시간에 뱀을 꺼내고 그러는데, 뭐 자기 아버지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주 그 큰 뱀을 목에 걸고 점프도 하면서 마이크로 설교를 하더라고요.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뱀을 손으로 잡고 이렇게 높이 들어올리는데, 그 순간 뱀이 이 목사님 목을 콱 하고 물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막 피가 셔츠에 젖을 정도로 흐르더라고요.

그래도 이 아들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한 가지 배운 점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아버지와 달리 순순히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다행이 목숨은 건졌다고 합니다만, 참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16절~17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이렇게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성경말씀에 적힌 대로 천사가 나를 살려줄 거라면서, 교회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면서 설교를 하겠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제발 저를 말려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전파되고 십자가가 전파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건 복음전파가 아닌 구경거리, 싸구려 서커스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자신이 가로채려고 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만, 아마도 2017년 12월 정도로 기억을 합니다. 제가 한 통의 메일을 받았는데 “한국 목사님들을 위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출간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더러 설교집을 출판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제의였습니다.

메일을 보내신 분은 알고 보니 한국에 있는 어느 기독교 출판사 대표님이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이와 갈은 메일을 받으니 참 감사하지요. 그래서 그 메일을 받은 것이 2017년 12월이고,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에는 마침 또 한국에서 제 개인적으로 중대사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 어차피 다음 달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단 연락을 해보았더니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설교 원고 중에서 주제를 정하고 분류를 한 다음에 며칠에 걸쳐서 교정을 본 다음에 보내 드리고는, 2018년 1월에 한국에 가서 또 출판사 쪽과 연락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가 좀 이상해지더라고요. 한국에 가서 거기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책이 나오면 제가 몇 권을 구입해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기독교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다른 책들은 몇 권 내보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 제가 몇 권을 구입한다거나 내가 돈을 얼마 낸다거나 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출판사가 책을 출판하고 책이 팔리면 그 중에서 인세로 제가 얼마 가져가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니, 제가 책을 구입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물었더니만 그 쪽 담당자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책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내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래서 저는 속으로, 내가 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 책을 사지, 내 책을 내가 왜 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그게 아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꽤 많은 목사님들이 출판사를 통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내고는 그 책을 어느 정도 매입을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기 돈을 내면서 출판하는 자비출판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구입을 해야 하냐고 하니까 무슨 200권이라나, 300권인가를 구입하라는 것이에요.

당연히 저는 거절했습니다. 물론 책을 구입할 그런 돈도 없거니와, 만약에 제가 그렇게 구입을 한다면, 출판사 측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이득은 확보가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책을 판매할 의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도대체 이런 식으로 누가 책을 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출판사 건물이 있는 위치가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서울에서도 상당히 땅값이 비싼 지역, 그것도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도 어느 방 하나를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닌, 어렴풋이 기억하기에 4~5층짜리 건물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그 출판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임대라 하더라도 그 비용이 보통 비싸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책만 출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 대형출판사도 아닌 중소규모 기독교출판사인데 그와 같은 곳에서 그 규모를 유지한다는 것은 뭐냐.

꽤 장사가 된다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가끔 다른 교회 홈페이지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목사님들의 프로필을 보게 되면, 책 집필 목록이 이렇게 쫘악 적혀 있잖아요? 물론 훌륭한 책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이런 사실을 제가 직접 경험하고 난 후로는, 좀 기존과는 다른 식으로 제게는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명예라고 하는 것이 어디 책 출판 뿐인가요? 무슨 학위 같은 것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위를 받는 목회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책을 출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들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명예로 유혹하는 사탄에 굴복하는 모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특히 한국에 보면 금식을 많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금식에 대한 능력을 간증하는 사람들도 많이 계시지요. 믿음이 있으신 분들 중에서 금식에 대해서 이를 나쁘다고 하는 분들은 안 계실 것입니다. 금식의 능력, 금식에 대한 간증 같은 것을 들어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금식>이라고 검색어에 넣어보니까 무려 200권 가까이의 책이 나왔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좀 다른 내용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만,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100권 이상의 금식에 대한 책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다고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문 같은 곳에 보면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 하고 나온 기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했더니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잘 안 알려진 사실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40일 금식 하다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은 잘 안 알려집니다. 그러면서 신앙에 있어서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이 계셔요. 믿음이 있다면 40일 금식 정도는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40일 금식도 하지 못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40일 금식에는 근처에도 못 가본 저 같은 경우에는 찌그러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왜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금식기도에 대한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은, 그 분들은 정말 성경적인 금식을 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40일 금식기도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셨고, 그리고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금식을 했을까요.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그리고 에스더서도 봅니다. エステル記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6節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 떡을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왕비였던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금식을 당부하는데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고 합니다.

요즘 금식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도 물론 그랬습니다만 물을 많이 마시잖아요? 금식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니까 물로라도 허기를 채우지 않으면 참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기도원에 보면, 금식할 때에는 물을 마실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보면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물을 마시면서 하는 금식은 가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제대로 금식을 하려면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금식을 한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자랑이 되기 위한 것인가요? 39일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40일 하면 구원을 받는 건가요? 3일 금식한 사람보다 10일 금식한 사람이 믿음이 더 많은 건가요?

어차피 다 물 마시면서 금식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슨 보호식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기 금식하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조금씩 식단 조절을 해야 하고, 금식이 끝난 다음에는 조금씩 또 조절을 해야 한대요.

그게 그러면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까. 아니, 그게 틀렸다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면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도 먼저, 무엇을 위한 금식인지를 알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금식은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40일 금식을 했다고 자랑할 필요 없습니다. 금식기간 동안에 물을 마셨느냐, 안 마셨느냐, 금식을 3일 했느냐 40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면 금식을 오래 하셔서 아무 것도 못하고 기운이 없어서 누워 계신 분들 꽤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어나서 물을 드십시오. 식사를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이웃을 섬기십시오. 전도를 하시고 봉사로 섬기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 며칠 금식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금식을 한다면, 이는 분명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금식만이 아닌, 돈 들여서 안 팔릴 책을 내는 거나, 떳떳하지 않은 방법으로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거나 뱀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님 같은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が、心配したからといって、少しでも自分のいのちを延ばす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키나 수명에 대한 말씀 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나 자신을 높이려고 해도, 그것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누가 높여 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우리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높이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7장 10절~12절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彼らは大声で叫んだ。「救いは、御座に着いておられる私たちの神と、子羊にある。」
御使いたちはみな、御座と長老たちと四つの生き物の周りに立っていたが、御座の前にひれ伏し、神を礼拝して言った。
「アーメン。賛美と栄光と知恵と感謝と誉れと力と勢いが、私たちの神に世々限りなくあるように。アーメン。」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는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21장 26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エゼキエル書 21章26節
神である主はこう言われる。かぶり物を取り、冠を外せ。すべてがすっかり変わる。低い者を高くし、高い者を低くせよ。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イザヤ書 52章13節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우리를 낮추고 높이는 권세는 오로지 우리 주님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길이 형통하고 주님께서 높이 들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36회 유혹과 은혜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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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4회 유혹과 은혜 1
2020년 5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マタイの福音書 4章 4節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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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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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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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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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유혹과 은혜 1 ” 誘惑と恵み 1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사실 고백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이 부분 중에서 어떤 부분이 떠올라서, 이 세 가지 시험에 대한 부분은 빨리빨리 간략하게 전해드리고, 제일 핵심이 되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아서, 도저히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두 번에 나누어야 하는지 아니면 3번이나 4번에 나누어야 하는지 아직 잘 감이 오지 않아서 일단 번호를 붙여보았습니다.

이 점 이해해 주시고, 몇 주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시간에 제가 처음에 전해드리고자 했던 말씀까지 듣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는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게 됩니다.

오늘 이 장면은 마태복음 4장 1절~11절 외에도 누가복음 4장1절~13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과 누가복음 4장 1절~2절 말씀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4장 1절~2절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누가복음 4장 1절~2절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さて、イエスは聖霊に満ちてヨルダンから帰られた。そして御霊によって荒野に導かれ、
四十日間、悪魔の試みを受けられた。その間イエスは何も食べず、その期間が終わると空腹を覚えられた。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시는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대체적으로는 40일 금식이 끝나셨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시험을 했다고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에 40일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당하셨다고 한다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시험의 종류는 수 십 가지가 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시험을 보면 세 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마귀는 예수님께서 금식을 끝내셨을 때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시험의 종류는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4장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둘째는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셋째는 마태복음 4장 8절~9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이 세 문제, 이것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모든 문제들이었습니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시고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귀는 첫째 시험에서 예수님더러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40일 금식을 마치셨습니다. 저도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만, 금식 시간이 땡 하면 서둘러 식당으로 달려가서 허겁지겁 죽을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셨습니까. 광야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사는 동네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장 잡수실 죽이나 떡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배고픔도 못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배고픔도 별로 힘들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성경에서의 희생이란 곧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들은 모두가 살아 있는 동물이나 새들을 잡아서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신 어린 양으로 오셨다면 죽으셔야 하는데, 하나님으로서 오셨다면 죽으실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만 오셨냐 하면, 이렇게 해석해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만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도 대신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100% 하나님으로서만 오셨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고, 100% 인간으로서만 오셨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중간을 따서 50% 정도로 하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50% 하나님과 50% 사람이라고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50%의 값어치밖에 없게 되고, 우리의 죄는 50%밖에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0% 하나님과 100%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고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100%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뿐만 아니라 100% 사람으로도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다음에는 우리 인간과 100% 똑같이 굶주림을 느끼셨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4장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이 얼마나 감미로운 말입니까. 너 지금 배고프잖아. 그리고 너 하나님 아들이잖아. 자, 어서 이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라.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돌멩이로 떡을 못 만드시겠어요? 아니에요.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보조적인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조물주이시며, 예수님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까지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분한테 지금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요? 이것은 미슐랭 별 세 개 급 되는 쉐프가 컵라면 끓이는 것 정도? 아니요, 그것보다도 더 수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이 일이 어려워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돌멩이를 떡덩이로 만들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그런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거절하셨을까요.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부분이 예수님의 답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내용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이는 모세가 한 말입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해서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며 지금처럼 농사를 짓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 이동하다가 그 기둥이 머물면 거기에 정착합니다. 그랬다가도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제 그들도 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어쩌면 에이,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살래 삐뚤어질거야……하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론 그런 시도를 누군가가 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고 대열에서 이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돌아왔거나,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풀이 많아서 목축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식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가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매일 아침 모아서는 이를 먹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야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는 광야 전체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내려주시는 식량이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다가 우연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내리는 만나였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량이라고 하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광야에서는 철칙이 있지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200명도 아닌 당시 이스라엘 민족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일이나 40일도 아닌 40년 동안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몸소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모세가 신명기에서 한 말은 무슨 비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대단히 현실적인, 대단히 상식적인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돌을 떡덩이로 해서 먹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먹고 살아가기 캄캄하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특히나 요즘처럼 어렵고 힘든 시기, 사람의 머리로는 이 코로나인지 뭔지가 언제쯤 끝나서 예전과 같은 생활이 돌아올지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길을 열어 주삽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잘 안 나오더라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채워 주십니다. 아멘.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돌멩이들을 떡덩이로 만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말씀하시면서 이 둘을 똑같이 섬길 수가 없다, 소중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어느 한쪽만 소중하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만 보면 놀랍습니다. 아니,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과 한 낯 재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이 똑같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은 전혀 같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이 하나님만큼 재물을 생각하고 의지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필요 없나요? 아니요. 필요 합니다. 재물이 있어야 하루하루 생활도 할 수 있고, 하나님도 섬기고 이웃도 섬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들 먹을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잠언 10장 22절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人を富ませるのは主の祝福。人の苦労は何も増し加えない。

마태복음 7장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가난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근심이 없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재물만이 아니라 건강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주님께서 지혜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나 먹고 살기도 빠듯해요. 이러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웃을 외면하고, 오직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돌을 떡덩이로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행원을 생각해보십시오. 손님이 돈을 맡기러 왔습니다. 누구는 1000만원을 맡기러 왔습니다. 누구는 1000원을 맡기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한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습니까.

고객이라면 당연히 모두에게 친절해야지요. 그런데 만약에 1000만원을 맡기러 온 사람한테만 친절하게 대하고, 1000원을 맡기러 온 사람한테는 불친절하게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직원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직원은 어쩌면 고객이 가지고 온 돈을 자기 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객이 가지고 오는 돈이 자기 돈이에요? 자기 월급이에요? 아닙니다. 그 돈은 자기 월급이 아니에요. 그 돈은 회사 돈이요, 회사 운영을 위해서, 그리고 고객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돈입니다. 그러면 자기 돈은 뭐예요?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자기 돈인 것입니다.

이를 착각하고, 무엇이 자기 돈인지, 무엇이 자기 돈이 아닌지도 모르고, 이야, 은행원이 되니까 창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막 돈을 가져다 주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잘못하면 그 돈 중에서 슬쩍 주머니에 넣다가 잡혀가게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 시험 중에서 첫 번째 시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여기서의 떡덩이는 단지 돈이나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적인 근심걱정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걱정만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새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한숨 쉬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싸워서 마침내 승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35회 유혹과 은혜 2 →

← 제233회 달려가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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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3회 달려가야 할 이유
2020년 5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ピリピ人への手紙 3章13節∼14節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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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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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달려가야 하는 이유” 走ら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문 중에는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기도문이 아니더라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즉 선민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자부심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인가 하는 것이지요.

성경 특히 구약에서 보여주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리십니다. 이로 인해서 평화와 평안이 찾아 오지요. 하지만 이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머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 보내서 경고를 합니다. 권면을 합니다. 너희를 지금이라도 회개를 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たちを石で打つ者よ。わたしは何度、めんどりがひなを翼 の下に集めるように、おまえの子らを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それなのに、おまえたちはそれを望まなかった。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섬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삼판을 하십니다. 천재지변이나 또는 주변에 있는 민족들을 격동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게 하십니다.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이제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사사, 또는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아,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우상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고 또다시 그 땅에 평화가 찾아오지요. 그런데 그러면 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버립니다.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들의 무한반복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일들을 되풀이 해왔는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본다면 글쎄요. 그렇게 자랑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한 마디로 정리를 한다면 배반과 고통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배반은 당연히 유대인들이 보여왔던 안 좋은 역사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고통의 역사는 무엇인가 하면, 이는 우리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하시고 싶으십니까. 아이고,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고통의 시작은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는 이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을 봅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드시고는, 사람한테는 단지 무슨 지키기만 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 천하 만물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온 천하는 다름 아닌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자손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축복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단 한 가지 명령,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그 단 한 가지 명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 아름다웠던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하나님 마음은 어떠셨겠습니까.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디 뜨거운 맛 좀 봐라……라고 고소해하면서 벌을 내리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아파하셨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두 구절입니다. 먼저 창세기 3장 15절을 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두 번째 구절은 조금 아래 창세기 3장 21절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神である主は、アダムとその妻のために、皮の衣を作って彼らに着せられた。

우리는 이미 이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마귀는 여자의 후손을 헤치려 하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마귀 사탄을 완전하게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를 보고, 아,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처럼 가죽옷을 짠 하고 만드셨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분명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순서에 따라서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전에는 모두가 이 세상에 없었던 것들, 완전히 새로운 것들입니다.

빛을 만드시기 전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까지는 해와 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때 처음으로 이 세상에 빛이 생겨나고 해와 달도 생겨났으며, 모든 생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이미 세상에 있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죽 옷이 소가죽인지 호랑이 가죽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분명 <생명의 죽음>이라고 하는 희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짐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이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죽음>이라고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희생은 어디로 이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어디 유대인 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방인입니까. 성경에서 주인공은 저기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이고 우리는 그럼 성경의 엑스트라, 행인 1, 2와도 갈은 존재인가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육신의 유전자적인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면적인 유대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은 우리 모두가 이면적인 유대인, 진정한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우리도 역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통을 받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약에 이와 같은 고통을 안 받으시려면 어떻게 하시면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싹 쓸어버리면 깨끗하지요.

이거 처음 만들다 보니 잘 안 되네. 아담과 하와? 됐어. 너희들은 없던 걸로 치고, 자, 이번엔 좀 신경을 더 써서 새로 만들어보자……어떠세요? 차라리 그게 더 훨씬 현명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질문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한 번 저만 볼 수 있도록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는 데에 찬성!
2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는 데에 반대!

1번을 선택하신 분들은 참으로 하나님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2번을 선택하신 분들은 참으로 하나님 생각을 안 하시는 분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찌감치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셨더라면 굳이 사탄이 메시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일도 없었겠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 필요도, 없었고, 가시관을 쓰씨고 피범벅이 되신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필요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좀 하나님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1번을 선택하셨어야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토록 빨리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실 정도의 하나님이셨다면, 어떠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옛날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많고 불순종한 우리를 아마도 수 십 번은 포기하고도 남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2장 3절~4절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傷んだ葦を折ることもなく、くすぶる灯芯を消すこともなく、真実をもってさばきを執り行う。
衰えず、くじけることなく、ついには地にさばきを確立する。島々もそのおしえを待ち望む。」

아무리 죄가 많고 부족한 우리라 하더라도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까지 하시면서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던 사도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 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로 미루어 본다면 부활하신 예수님 손과 옆구리에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났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남아 있었을까요. 아직 부활한지 얼마 안 되어서 상처가 덜 아물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마태복음 11장 4절~5절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行って、自分たちが見たり聞いたり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질병이 순식간에 나았으며 죽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3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든 오시지 않든,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이나 짊어지신 다음이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다만 큰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손에 있는 못 자국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위대하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손에 못 자국이 없으시다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시고 죽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손의 못 자국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분,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끝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두꺼운 성경 중에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만 하고 예배만 드렸더니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응답했습니다. 축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를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났나요? 아니요. 실천에 옮겼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이는 모세도 그랬었고, 그 이전에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았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그저 감사하면서 찬양하고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면 된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가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그냥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편안한 침대 위에 누운 것처럼 살다 가라고 그러신 것입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그냥 우리더라 편안하게 살다 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들은 완전히 쓸데없는 고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요즘을 보면 참 취업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합니다만, 대학이나 회사가 매년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을 뽑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자기 학교, 자기 회사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쉬게 하기 위해서 모집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뽑기 위해서 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나 좋은 회사는 편안하게 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곳은 어디든지 들어가기가 어렵지요. 여기에는 물론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정말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대학 재수를 하고 1년 뒤에 다시 입학시험을 보는데……아직도 기억이 나요. 국어 시험이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한자 읽기 문제도 나온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뭐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었는데, 그런데 제 기억에 시험 시작하기 20~30분 전이었나 그래요. 이렇게 보는데 제 친구녀석이 막 종이에 한자를 적으면서 외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시작 시간 다 됐는데 지금 공부한다고 뭐가 되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뭘 하나 하고 봤더니만, 지금도 제가 눈이 나쁩니다만 그 때도 제가 눈이 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서 책상에 보니까, 작은 글씨로 공책에 빼곡하게 글씨들이 적혀 있는데, 한 가운데에 하얗게 빈칸이 뻥 뚫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하다. 저게 뭐지? 조금 유심히 보니까 다른 곳에는 볼펜으로 진하게 글씨가 적혀 있는데, 딱 글자가 두 글자 들어갈만한 넓이인데 거긴 글씨가 안 적혀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왜 부자연스럽게 여기만 비워놓았나 하고 조금 더 자세히 봤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은 다 진하게 볼펜으로 한자가 적혀있는데, 딱 그 두 글자만 연필로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뭐야? 왜 이것만 연필로 적어놓았어……라고 물으려고 그 한자를 봤더니, 저도 못 읽겠더라구요. 당시 제가 처음 보는 한자예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야, 이게 뭐라고 읽냐? 그랬더니 그 친구 했던 말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 친구가 뭐라 그랬냐 하면 “야, 이게 농담이라고 읽는대. 골 때리지 않냐?” 그러더라고요.

<농담>이라는 한자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일본식과는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야, 이걸 <농담>이라고 읽어? 신기하네……라고 하고, 이제 시험 시간이 되어서 이제 문제지를 받아보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딱 그 한자가 나와 있는 거예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대학 입학시험이잖아요. 어쩌면 그 문제 하나 때문에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이 <농담>의 <농>자가 우롱하다, 희롱하다…할 때의 <롱>자인데, 아마도 이 <농담>이라는 한자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그 친구를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너 붙으면 자기 덕분인줄 알아라.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에, 아니 왜 거기에 그 한자 두 글자만 연필로 썼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대요. ㅎㅎ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참고로 그 친구도 붙었어요. 공대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이름이 용민이라고 기억하는데, 참 똑똑한 친구였어요. 글쎄요. 지금은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저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는 제 대학 후배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이 후배는 음대 친구인데, 역시 대학 입학 때 이제 음대니까 음악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데, 딱 한 문제가 도저히 답이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그게 국악에서의 도레미파솔라시도 같은 음계 중에서 하나를 맞추는 문제였다고 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답이 한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자기가 아는 답이래요. 그리고 그 한자는 그리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도 더 이상 기억이 안 나더랍니다.

자, 이제 시험이 끝날 때까지 3분이 남았어요. 그래서 이 친구도 믿음이 있는 친구였는데, 그 시험시간 때 기도를 했다고 해요. 주님. 제가 이 문제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 이 답을 알려주시면 제가 평생을 간증을 할 테니 제발 답을 알려달라고 기도를 했더랍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눈을 딱 떴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하는 동안에 시험 감독관 선생님이 답안지에 도장을 찍고 가는데, 그 감독관이 찍은 도장에 수풀 림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게 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 이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냐 하면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전도사로 아주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이 친구가 성악을 전공을 했는데, 예전에 제가 이 친구 노래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데,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 노래를 듣고 실제로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정말 놀라운 능력을 가진 전도사님이에요.

참 이런 것은 정말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그와 같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혹시 이런 말씀을 듣고 부럽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주님의 손길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대학입시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들을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옆 사람 답안지를 봤다거나 몰래 무슨 책을 봤다거나 하면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이라면 이는 부정행위가 안 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면 영적인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부정행위 중의 부정행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죄가 많고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근처에도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학교나 대학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자격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 좋네. 할렐루야~ 하고 그냥 감사만 하고 예배만 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학교에서 뽑아준 이유는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뽑아준 것이고, 회사나 자격시험에 합격시켜준 이유는 했다면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합격시켜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속에서 구원해주신 것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라고 구원해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그리고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바울이 이루어놓은 일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실 상을 내가 아직 받았다고 안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이걸 했다 저걸 했다 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일들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주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바라면서 달려간다고 합니다.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나 달려간다고 상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전세계에 보면 자동차 회사는 대부분 대기업이지요. 그만큼 들어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 회사에는 물론 여러 부서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자동차를 많이 팔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월급도 많이 받고 승진도 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회사 자동차를 많이 판다고 아무나 그 회사에서 월급을 받거나 승진을 하나요?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렇죠. 그 회사에 입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달려간다고 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에 입사를 했습니다. 이제 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달려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달려가면 상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께 어떤 일을 맡겨주셨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무슨 돈 많이 내라는 거구나 하고 들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섬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건강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은 고된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우리들의 특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이유, 우리가 달려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일을 했다, 저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날까지 우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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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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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2회 신앙, 성경, 실천 3 - 행함
2020년 5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マタイの福音書 7章 21節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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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 • 성경 • 실천” 信仰・聖書・実践 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는 세 번째 시간으로서 실천 즉 “행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에 행함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씀 드렸던 믿음과 말씀에 대해서도 함께 종합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논의를 하다 보면 종종 혼란이 생기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 중에서 특히 믿음과 행함의 관계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믿음과 행함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지요.

우선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듭니다.

로마서 4장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ります。


로마서 4장 18절~22절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彼は、およそ百歳になり、自分のからだがすでに死んだも同然であること、またサラの胎が死んでいることを認めても、その信仰は弱まりませんでした。
不信仰にな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かえって信仰が強められて、神に栄光を帰し、
神には約束したことを実行する力がある、と確信していました。
だからこそ、「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す。

이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창세기 15장 3절~6절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3절~6절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さらに、アブラムは言った。「ご覧ください。あなたが子孫を私に下さらなかったので、私の家のしもべが私の跡取りになるでしょう。」
すると見よ、主のことばが彼に臨 んだ。「その者があなたの跡を継いではならない。ただ、あなた自身から生まれ出てくる者が、あなたの跡を継が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して主は、彼を外に連れ出して言われた。「さあ、天を見上 げなさい。星を数えられるなら数えなさい。」さらに言われた。「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은 당시 거의 100세가 된 고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도 역시 나이가 많아서,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도시 갈은 경우에는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하더라도 밤하늘에 별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깨끗하고, 그리고 달이나 주변에 불빛 같은 것이 없는 사막 같은 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지금도 별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인다고 하지요.

너는 지금 아들 하나만 달라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너에게 줄 축복은 아들 하나 정도가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손을 네게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말씀이라고 하겠지요.

여러분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다면 기쁘실 것 같으세요?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그러면 별로 안 기쁠 것 같으세요? 그렇다면 좀 우리에게 와 닿는 말씀으로 해 볼까요?

100세 가까운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나이가 많이 먹었는데 지금 이 나이 먹도록 집 한 채가 없어요. 작은 단칸방이라도 좋으니까 집을 하나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기도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단칸방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집을 짓게 될 건설회사 사장으로 너를 시켜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제가 탈 자동차가 없어요. 작은 차 중고라도 좋으니 한 대만 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더니 작은 중고차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동차를 만드는 자동차회사 사장을 시켜주겠다.

하나님, 제가 돈이 없어요. 매달 100만원 밖에 벌지 못해요. 이것 가지고는 생활이 안 됩니다. 정말 최소한 200만원 정도만 되더라도 좋겠어요. 제발 제 수입이 매달 200만원 정도가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했더니만, 아니야, 200만원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돈과 재산을 너에게 주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시겠어요?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면 뭘 해요. 하루 이틀 나이는 먹어가지요. 실제 상황을 보면 전혀 이루어지는 것 같은 기미가 안 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를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라고 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지요.

반면에 야고보서에는 어떻습니까.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からだが霊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と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です。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는 이를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믿음과 행함은 어느 쪽이 중요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 라고 하고, 야고보는 아니다, 행함이 있어야 진짜 신앙이다…….이렇게 주장을 한 것이라면 서로간에 모순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간에 전혀 모순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앞서 살펴본 행함에 대한 구절 때문에 로마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가 행함을 중요시했다고 한다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행함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2장을 봅니다.

로마서 2장 13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なぜなら、律法を聞く者が神の前に正しいのではなく、律法を行う者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이처럼 바울도 행함의 중요성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관계를 명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을 전할 때에 이 상호관계에 대해서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기록을 살펴보니까 작년 5월 달에 전해드린 말씀이었어요.

하지만 이번에 또다시 정리를 해보니까 조금 시각을 달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작년에는 믿음이 씨이고 말씀이 밭이고, 행함이 가꾸기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아무래도 믿음이 밭이고, 말씀이 씨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무거운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주시고는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는 해결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그 귀한 믿음이야말로 기름진 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직 예수님을 믿기 전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주셔서 병이 나음을 받았다거나, 아직 믿음이 없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더니 문제가 해결 되었다거나, 여러 가지 경우는 있겠습니다만, 이 믿음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말씀을 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밭에 좋은 씨를 심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놔두기만 한다면 제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하면서 가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 중에서 하나만 빠지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먼저, 믿음이 없어지고 말씀과 행함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의 능력이 적혀 있어요. 이 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합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병이 든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해줬더니 병이 나았어요.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해줬더니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해줬더니 귀신이 물러갔어요.

이것만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 마음 안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多く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多くの奇跡を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わたしはそのとき、彼らにはっきりと言います。『わたしはおまえたちを全く知らない。不法を行う者たち、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그런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물리치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하더라도 이는 불법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파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이를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게 아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한테는 그 아픈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수술할 수 있는 지식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수술을 하고 약을 지어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참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저는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됐느냐. 칭찬은 고사하고 경찰한테 잡혀갔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수술을 할 자격이 있는 의사도 아니었고, 약을 지어서 줄 자격이 있는 약사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의사 자격이 있는 사람이 진찰했었어도 나와 같은 수술을 했을 것이며, 아무리 약사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약을 지었어도 제가 주었던 약을 지어주었을 것이라 하더라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이러한 일을 했다면 이는 명백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도 알고 행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하면 그와 같은 일들을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로 돌려버립니다.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신앙은 올바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오히려 불법을 저지른 자가 되어버린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과 행함은 있는데 말씀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 또한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가 되고 맙니다. 그의 말에는 성경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니까 꿈에서 이런 계시를 받았다, 천사가 나와서 저런 환상을 보여주었다……뭐 이런 말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까 엉뚱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생각이 마귀가 준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 성경 말씀이 없으니까 그것이 하나님 말씀인지 마귀의 장난인지도 구분이 안 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어떤 기숙사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만, 아마도 밤 1~2시쯤이 아니었을까 해요. 주변은 다 조용할 때였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뻥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형폭발사고……정도는 아니고요. 하지만 그래도 무슨 물건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소리가 아닌,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근데 그게 다예요. 뭐 그 다음이 경보기가 울리거나 불이 나거나 심한 냄새가 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저는 계속 하던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제 방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고 방문을 열어봤더니 옆방에 있는 학생이에요. 그래서 뭐 그 친구도 고3이었으니까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나 보죠.

그런데 제 방으로 찾아왔는데 얼굴을 보니까 하얗게 질려 있어요. 그래서 아까 무슨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너 방에서 난 소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맞대요. 자기 방에서 난 소리래요.


그래서, 뭔가 터지는 소리 같던데 뭐가 터졌냐고 물었지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전화기가 터졌대요. 그렇다고 지금처럼 무슨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이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집전화기가 터졌다는 것이에요.

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어떻게 전화기가 터지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방 전화가 잘 안됐는데, 자기 친구한테 들었는데, 전화기 선을 전기 꽂는 곳에 꽂으면 전화가 된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착한 어린이와 철없는 어른들은 절대로 따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이 친구가 머리가 나쁜 친구가 아니거든요. 결국 대학은 꽤 좋은 명문대 좋은 학과에 들어갔어요. 공부에 대한 지식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전화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겁 없이 저질러서 결국 전화기가 터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아무리 행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 성경 말씀이 없다면 이는, 옥토에 씨를 심지 않고 물 주고 비료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아무 것도 안 자라요? 차라리 그러면 낫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좋은 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은 채로 물 주고 비료를 주기만 하면 온갖 잡초들이 생겨서 열매는 거두지 못하고, 잡초들로 인해서 밭만 엉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과 말씀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계셨는지 모릅니다만, 저는 그런 사람을 몇몇 봐온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 기도도 많이 합니다. 방언 기도를 얼마나 기차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만이 아니라 수요예배, 금요철야, 그리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그리고 금식도 밥 먹듯이 하십니다. ……뭐 금식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도 좀 말이 이상합니다만, 아무튼 금식도 그렇게 자주 하십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직분도 있습니다. 저보다도 연배가 훨씬 위인 분이십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분이 행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지 않아요. 그저 기도하고 예배하고 금식하고 성경만 봅니다. 제가 이 분과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느낀 것이 뭐냐 하면 그 마음 안에 불평과 불만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마디 말씀을 나눌 때마다 얼마나 제가 피곤함을 느꼈는지 몰라요.

여러분, 행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よう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행함 중에 가장 아름다운 행함, 가장 중요한 행함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믿음이 있고 말씀을 많이 안다고는 하나, 그 안에 사랑이라고 하는 행함이 없다면, 이는 믿음이라고 하는 좋은 밭에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씨를 심었으나, 물도 주지 않고 가꾸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서 열매를 거둘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요?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지, 행함이 없는 사랑은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사랑, 죽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믿음이라고 하는 좋은 밭,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그 아름다운 밭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경 말씀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이는 한 두 번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이나 밤이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私が植えて、アポロが水を注ぎました。しかし、成長させたのは神です。
ですから、大切なのは、植える者でも水を注ぐ者でもなく、成長させてくださる神です。


바울은 참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겸비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밭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심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함으로 가꾸어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300배 600배 1000배의 열매를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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