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추인 이름과 드러난 이름” おおわれた名前と明かされた名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라고 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해서 그 관점이나 구성 그리고 비유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보면 공관복음에 비해서 관점이나 구성 등으로 볼 때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과
겹치는 부분도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로 요한복음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미리 말씀해드립니다만, 여러분께서 그냥 가만히 듣고만 계시면 평소보다도
졸음이 더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함께 생각하면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를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도 이름을 찾아보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름, 특히
예수님의 사도 이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니까 잘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총 열두 명이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열두 사도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듣고, 질문이 끝나자마자 열두 명의 이름이 줄줄 나온다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뭐, 유명한 사람으로는
베드로, 요한, 그리고 가룟 유다 정도는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점점 가면 갈수록 이름이 가물가물해지지요.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 중에서 기초 정보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특히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이름을 살펴볼 때에는 사전지식이 좀 필요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한 사람에게 이름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사도들의 대표격라고도 할 수 있는 베드로만 보더라도 <베드로>라는 이름 외에 <시몬>이라는 이름도 있고, 또한 <게바>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는 총 세 개의 이름이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식으로 그 사람에게는 하나 이상의 이름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식으로
동일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으로 성경에 적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시고 말씀을 들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우선 열두 사도의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만,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절~4절
2.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十二使徒の名は次のとおりである。まず、ペテロと呼ばれる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
ピリポとバルトロマイ、トマスと取税人マタイ、アルパヨの子ヤコブとタダイ、
熱心党のシモンと、イエスを裏切っ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ある。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이렇게 열 두 명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야고보가 두 명 나오는데 뒤에 나오는 야고보는 마가복음 15장 40절에 따라서 이른바
<작은 야고보(小ヤコブ)>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두 번째 나오는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마태복음의 열두 사도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 小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일단 여기서 보면 형제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ペテロ、アンデレ)는 형제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ゼベダイの子)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ヤコブ、ヨハネ)도 형제이지요.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다대오(小ヤコブ、タダイ)가 형제지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서 또 말씀 드려야 할 부분은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좀 이 이름이 낯설 수도 있습니다만, 이 바돌로매라고
하는 사도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사실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와 나다나엘은 완전히 다른 이름처럼 보이겠습니다만,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의 <바>(バル)는 히브리어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풀어본다면 <바돌로매 나다나엘>(バルトロマイ)이라고 하면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 또는 나다나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도 빌립(ピリポ)과 대단히 친한 친구 사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3절~51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먼저 만난 빌립이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강권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그렇습니다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더라도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는
항상 두 명이 함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자, 다음으로 마가복음에 나온 사도 이름입니다.
마가복음 3장 16절~19절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こうしてイエスは十二人を任命された。シモンにはペテロという名をつけ、
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ヤコブの兄弟ヨハネ、この二人にはボアネルゲ、すなわち、雷の子という名をつけられた。
さらに、アンデレ、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タダイ、熱心党のシモン、
イスカリオテのユダを任命された。このユダがイエスを裏切ったのである。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인 시몬, 다대오, 그리고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タダイ、 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어떠세요. 두 번째 들으니까 그래도 처음 들을 때보다 좀 들리는 이름이 있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 사이인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도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누가복음부터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누가복음 6장 14절~16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すなわち、ペテロという名を与えられた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そして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
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熱心党員と呼ばれていたシモン、
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このユダが裏切る者となった。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シモン、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이 걸립니다.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나인>이라고 소개가 된 시몬인데, 여기서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되어 있고, 또한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다대오>(タダ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나나인 시몬>과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말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나>라고 하는
것은 시몬의 출신지이지만 <셀롯>이라는 말은 지명이 아니라 현대인의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열심당원>, 새번역 성경에는 <혁명
당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참고로 일본 성경을 보더라도 <열심당> 또는 <열심당원>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열심당원, 혁명당원이라는 뜻은 무엇이냐 하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셀롯,
즉 열심당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급진적 독립, 즉, 무력으로 민족이 단결해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내자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시몬>은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강했을 것이고, 또한 비교적
과격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적혀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명확한 단서가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맥 흐름상,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몇 개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열두 제자 이름을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라고(バルトロマイ)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어떠십니까. 이제 조금 이름에 익숙해지려고 하시나요?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시면 조금 차이는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명확하게 사도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어떠냐 하면 이와 같이 정리된 열두 사도가 모두가 자세하게 정리된 구절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좀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이 가려진 제자>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만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 하면 <그가 사랑하시는 자>( 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 <사랑하시는 제자>( 愛する弟子),
심한 경우에는 그냥 <그 다른 제자>( もう一人の弟子), <또 다른 제자>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는 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 이름을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큰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이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먼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이는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라서 들어보신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이른바 마지막 만찬,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순간,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전후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시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
“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イエスは、これらのことを話されたとき、心が騒いだ。そして証しさ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
裏切ります。」
弟子たちは、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分からず当惑し、互いに顔を見合わせていた。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がパン切れを浸して与える者が、その人です。」それからイエスはパン切れを浸して取
り、イスカリオテのシモンの子ユダに与えられた。
ユダがパン切れを受け取ると、そのとき、サタンが彼に入った。すると、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すぐしなさい。」
席に着いていた者で、なぜイエスがユダにそう言われたのか、分かった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ある者たちは、ユダが金入
れを持っていたので、「祭りのために必要な物を買いなさい」とか、貧しい人々に何か施しをするようにとか、イエスが言われたのだと思っていた。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은 23절~25절입니다.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이 부분이 한글 개역개정으로 보면 잘 감이 안 옵니다. 그런데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3장 23절~25절
“23.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예수님 품에 기대 누웠는데
24.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여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물어 보라고 하였다.
25.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품에 기댄 채로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게 이해가 되시나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는 어떤 인물입니까. 정말 남들은 미처 하지 못할 말도 나서서 하는 그런 좀
저돌적인 성경을 가진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축복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혼나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던 제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긴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 중에서 자기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평소
베드로라면 당장 예수님 앞에 나서서, “도대체 그런 나쁜 놈이 누구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 놈을 잡아서 당장……” 뭐 이럴
만도 한데, 베드로는 지금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냐 하면 예수님 옆에 있는 그 제자한테 눈짓을 보내서, 야,
그게 누군지 니가 좀 여쭤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베드로도 당장 일어나서 여쭙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묻는 것보다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가 묻는 편히 훨씬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야, 내가 묻는 것보다도 니가
묻는 게 낫겠다. 니가 어서 빨리 여쭤봐.” 이렇게 머릿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히 신임을 얻고 있었고, 이 사실을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요한복음 중 어디에 등장하는지를 정리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하는 곳은 총
일곱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은 바로 앞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마지막 만찬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シモン・ペテロともう一人の弟子は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この弟子は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ので、イエスと一緒に大祭司の家の中庭に入ったが、
ペテロは外で門のところに立っていた。それで、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もう一人の弟子が出て来て、門番の女に話し、ペテロを中に入れた。
すると、門番をしていた召使いの女がペテロに、「あなたも、あの人の弟子ではないでしょうね」と言った。ペテロは「違う」と言った。
しもべたちや下役(したやく)たちは、寒かったので炭火を起こし、立って暖まっていた。ペテロも彼らと一緒に立って暖まっていた。
예수님께서 체포가 된 다음, 베드로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와 함께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곳까지 갑니다. 하지만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못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당시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말하자면 연줄을 이용해서 그 안까지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비록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라고 표기는 없습니다만, 이름이 의도적으로 가려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기서의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イエスの十字架のそばには、イエスの母とその姉妹、そしてクロパの妻マリアとマグダラのマリアが立っていた。
イエスは、母とそばに立っている愛する弟子を見て、母に「女の方、ご覧なさい。あなたの息子です」と言われた。
それから、その弟子に「ご覧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と言われた。その時から、この弟子は彼女を自分のところに引き取った。
역시 이 부분도 좀 알기 쉽게 현대인의 성경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26.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선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성경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한 뒤에도 많은 형제 자매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을 앞두고
계신 상황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이르시기를 “저 제자가 당신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자,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이 아닌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0장 1절~8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먼저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만,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나중에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8절입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절~9절까지의 부분인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시고는 제자들과
만났던 장면입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좀 길더라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9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節~9節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一方、ほかの弟子たちは、魚の入った網を引いて小舟で戻って行った。陸地から遠くなく、二百ペキスほどの距離だったからである。
こうして彼らが陸地に上がると、そこには炭火がおこされていて、その上には魚があり、またパンがあるのが見えた。
여기서 이 <디베랴(ティベリア)>라고 되어 있는 곳은 갈릴리 서쪽 지방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その後、イエスはガリラヤの湖、すなわち、ティベリアの湖の向こう岸に行かれた。
그래서 <디베랴 호수>라고 하는 말과 갈릴리 바다 라고 하는 말은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기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원래 하던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이런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예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가 베드로한테 말하기를, 야, 저기 주님이 계시다! 이렇게
말했더니 베드로가 배를 곁에 댈 겨를도 없이 그냥 무작정 바다에 뛰어 내려서 예수님께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기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엄연히 다른 장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여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8節~23節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若いときには、自分で帯をして、自分の望むところを歩きました。しかし年をとると、あなたは両手
を伸ばし、ほかの人があなたに帯をして、望まないところに連れて行きます。」
イエスは、ペテロがどのような死に方で神の栄光を現すかを示すために、こう言われたのである。こう話してから、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いなさい。」
ペテロは振り向いて、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がついて来るのを見た。この弟子は、夕食の席で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り、「主よ、あなたを裏切
るのはだれですか」と言った者である。
ペテロは彼を見て、「主よ、この人はどうなのですか」とイエスに言った。
イエスは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あなたは、わたしに従いなさい。」
それで、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いう話が兄弟たちの間に広まった。しかし、イエスはペテロに、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言われたのではなく、「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と言われたのである。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는 대단히 무서울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너는 네가 가고 싶은 것에 가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이후에는 네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거야 라고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었지요. 순간 베드로는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가 있어요. 그 때 베드로는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게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던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어봐요. 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친구는 어떻게 되나요? 참 저돌적인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남들 생각하지 말고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해. 이러신 것이지요.
이른바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이 사랑 받는 제자는 역시 신경이 쓰였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입니다. 일곱 번째 장면은 그 바로 뒤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이 말씀,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도 역시 현대인의 성경판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21장 24절
“이 일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안다.”
여기서 <그 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 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요한복음에 적힌 내용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한 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한 일곱 장면,
첫 번째는, 마지막 만찬, 두 번째는 대제사장 집 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 네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무덤 앞,
다섯 번째 장면은 디베랴 호수(ティベリア湖畔), 그러니까 갈릴리 바닷가, 여섯 번째 장면은 앞서가던 베드로의 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요한복음 마무리 장면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검토작업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우리 한 번 같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베드로도 인정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얻었던 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어디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왔습니다. 일단 그 주장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적으로서는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옛날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 외에도 마가라고 하는 주장, 사도 도마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또한 여러 근거를 대면서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라고 하는 주장,
베드로라고 하는 주장, 나아가서는 막달라 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물며 상징설, 그러니까 이 인물은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을 가상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라고 하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먼저 소거법을 사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이건 아니다 라고 하는 주장부터 지워가자는 것이지요.
우선, 막달라 마리아 설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요한복음 13장 23절,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라고 해서, 어쩌면 그 제자는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소설에다가
영화로까지 되었지요? 다빈치 코드에 보면 이게 무슨 막달라 마리아다 뭐다 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바로 이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엉터리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경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장면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분명히 <아들>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남자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다, 아니면 다른 여성이다 하는 주장은 모두 틀렸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근거입니다. 첫 번째 장면,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제자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이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0절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食卓に着かれた。
마가복음 14장 17절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そこに来られた。
누가복음 22장 14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その時刻が来て、イエスは席に着かれ、使徒たちも一緒に座った。
사도라고 함은 열두 사도입니다. 이 때 바울은 아직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라고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열두 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성경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 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반드시 열두 사도 중 한 명입니다. 열두 사도가 아닌 마가다 나사로다 하는 주장은 역시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베드로냐 하면, 아니,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장면인 마지막
만찬에서는 베드로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에게 머리짓을 하고 있고, 다섯 번째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알려준
사람이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였고, 여섯 번째 장면에서도 베드로가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냐고 가리켰던 인물이 바로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아닙니다.
자, 좀 지루하시더라도 이제 점점 중요한 부분이 다가옵니다.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번째 장면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러 갔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혹시 누구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21장 1절~4절까지를 다시 한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4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여기서 2절에 보면 그 제자 이름이 나오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또다른
제자 둘이라고 합니다.
ペテロ、トマス、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과 요한, 그리고 또다른 제자는 편의상 제자 A와 제자 B라고 해두죠. 이렇게 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제자 A, 제자 B, 이렇게 일곱 명입니다. 우리가 찾는 제자는 반드시 이 안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 그 제자는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빠진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여섯 명입니다. 열두 명 중에서 절반까지
줄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하나 더 줄일 수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다음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밑에 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사람도 제외를 해야겠지요.
그러면 벌써 남은 사람은 다섯 명입니다.
자, 그럼 누구일까. 정말 요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예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권위를 갖는 근거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웨스트코트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해서 다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의 어휘나 유대 풍습, 특성에 대한 지식에 밝은 것으로 보아 저자는 유대인이다.
둘째,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다.
셋째, 지역이나 사람들, 시간 방법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이와 같은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넷째,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사도였을 것이다.
다섯째,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다른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서 이 분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분들도 이 근거에 동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그럼 완벽하냐 하면, 아니요.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첫째 약점은, 두 번째 장면에 대한 해석입니다. 베드로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체포된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뜰에
못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서 베드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개 고기잡이에 불과했던 요한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약점입니다.
둘째 약점은, 다섯 번째 주장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기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는 하는데, 다섯 번째 장면인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장면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여기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나오는데, 이처럼 누구누구집 아들……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을 특정할 때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하면 이는 누구나 다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세베대의 아들들, 그것도
단수가 아니라 분명히 복수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야고보나 요한 중 하나가 아니라, 분명히 둘 모두를 가리키고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요한이 쓴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점, 이 점이 바로
두 번째 약점입니다.
이와 같은 약점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서 일개
어부가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하면,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에 대해서도, <요한>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쓰지는 않았다고 해서 여전히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저와 함께 살펴보았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방금
명단에 있었던 <또 다른 제자 둘>이 마음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저도 이 두 사람이 좀 신경을 쓰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기에 빠진 사람, 다시 말해서 이 명단에 없으면 부자연스러운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있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누구냐 하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베드로의 형제였지요.
그러면 안드레도 고기잡이였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데 거기에 형제인 안드레가 빠진다는 것은 이는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냐 하면, 빌립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갈이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바돌로매가
등장하는 곳에는 항상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과 절친이었지요. 더구나 빌립의 고향은 베드로와 같은 벳세다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 보면 나다나엘만 나와 있고 빌립 이름이 안 보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이 또다른 제자 A와 제자 B는 안드레와 빌립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이것도 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 13장 23절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어떠냐 하면 요한복음 1장, 6장, 12장에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기록하다가 나중에 이름을 가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요.
빌립에 대해서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13장과 19장 이후에 등장합니다만, 빌립 이름은
14장에도 나옵니다. 그러면 한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썼다가 가렸다가 하고 보는 것은 어렵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도마도 명단에 있었습니다만 그의 이름도 요한복음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총 여덟 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사도들 명단을 다시 한 번 봐야겠지요? 전체 열두 사도 명단에서 아니라고 한 사람들, 이름이 이미 나온 사람들을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체 명단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여기서 뺄 사람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으니까 과감하게 야고보와 요한도 빼버립시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이니까 이것도 빼고, 빌립도 이름이 많이 나와 있으니까 뺍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벌써 죽었으니까 빼야 한다고 말씀
드렸죠?
자 알기 쉽게 정리해보면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가룟 유다.
여기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도마, 그리고 가룟 유다, 이렇게 여덟 명을 빼면 누가
남느냐 하면 12-8, 네 명이 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걸쳐서 걸어온 길이 맞다면 이 네 명중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그리고 이 요한복음을 증언한 제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남은 네 명을 말씀 드립니다.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タダ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신임을 가장 받았던 제자는, 바로 세리
마태입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웨스트코트의 근거를 기억하지요. 다섯까지 근거를 대가면서 요한복음을 증언한 사람, 즉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에
대한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이다.
둘째로 그는 팔레스틴 출신이다.
셋째로 그는 친히 목격한 사람이다.
넷째로 그는 사도 중 한 사람이다.
다섯째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마태는 모든 조건에 부합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팔레스틴인 갈릴리 태생입니다. 그는 사도였기 때문에 친히
예수님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에 대한 기록은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단순히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리였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복음서 모두에 마태를 부르신 후
마태 집에서 다른 세리들도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당시 세리라고 하는 직업은 죄인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리를 사도로 부르셨다는 일은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는
마태에 관련하여 그와 같은 내용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요한>이라고 했을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약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요한에 대해서는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만, 마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기록조차도 없이 완벽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일개 고기잡이였던 요한이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되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만, 이 문제도 마태였다고 하면 충분히 풀릴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는 그 집에까지 가서 식사를 했던 장면이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특별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레위>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そこから進んで行き、マタイという人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
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마가복음 2장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道を通りながら、アルパヨの子レビ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누가복음 5장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その後、イエスは出て行き、収税所に座っているレビという取税人に目を留められた。そし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
이 기록을 본다면 단순히 <마태>와 <레위>라는 이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히 흡사합니다. 따라서 마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짐작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마태>와 <레위>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주로 자기 조상님들 이름 중에서 따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아 이 사람이 어느 집안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의 또 다른 이름이 <레위>였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그는 레위지파 (レビ族)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사장 지파입니다.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모세와 아론 형제는 모두 레위지파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이후 제사장은 대대로 레위지파가 맡아서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가 레위였다고 한다면,
같은 레위 지파인 대제사장을 알았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 번째 장면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몇몇 여성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입니까. 말하자면 사형수 바로 앞입니다. 거기는 분명 통제구역이었을 것입니다. 곳곳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욕했던 사람들도 멀리서 소리를 쳤을 뿐이고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할 수 있었을까 하면, 저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가 레위
지파였기 때문에 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한다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다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게 돈을 바치는 일을
해왔습니다. 말하자면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 로마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로마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비록 고위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부분 지위를 인정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그는 제사장 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로마 관리들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대단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다른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마태가 본인이 직접 듣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로마 관료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오랫동안 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요한복음을 요한이 쓰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썼다는 주장입니다.
제가 만약에 어떤 책을 썼어요. 아니, 명함을 찍었다고 해보죠. 그런데 거기에 명함에 보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홍성필 목사>
이렇게 적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뭐, 여러분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우시니까, 아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만약에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메일을 받았는데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누구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뭐, 드러내고 말은 안 하더라도 속으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또, 아 그 성경은 옛날에 적힌 책이니까 그렇겠지. 옛날 스타일 아니겠어?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이 요한복음 하나뿐인가요. 성경의 다른 책을 보더라도 자기를 가리켜서 그와 같이 표현한 책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제게는 이 점이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즉 이 말씀을 본다면, 여기는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가 등장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근거로
해서 증언한 사람이 있고 그 내용을 정리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주장이 맞다고 하면, 그리고 증언한 사람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라고 한다면, 마태는 그 누군가에게 이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정리를 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제 가설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 정리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는 증언을 정리하되 거기서 내 이름은 빼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리한 인물은 그의 요청대로 그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드러내야 할 분,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자기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이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존재감이 불분명하지 않은, 대단히 확실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는 기록자가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분명히 그 외의 이유가 있어서 일 것입니다.
기록자는 증언자에 대해서 악의를 가지고 이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에게는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왕 가설을 제기하는 김에 조금 더 보태볼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 기억하시죠?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만약에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였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지만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있는 <또 다른 제자 둘> 중의 하나, 제자 A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제자 B는 누구일까요. 제3의 인물이었다면 굳이 이름을 감출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제자 B가 바로 제자 A인 마태로부터 얻은 증언과 기록을 정리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남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여기서 제자 A를 마태라고 한다면 제자 B도 분명 이 중에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세 명입니다.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저는 이 중에서 셀롯 시몬을 지목합니다.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혁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단결하여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사도가 되었다면, 그런 그와 가장 맞지 않았던 사람, 물과 기름이었던 사람은 바로 마태였을 것입니다. 자주 독립을
외치는 시몬에게 있었어 세리 마태는 자신의 민족을 팔아서 지배자인 로마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회개를 하고 세리에서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증오심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44절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이 말씀이 당시 시몬에게 꽂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회심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마태의 증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니면
마태가 먼저 시몬에게 자신의 증언을 기록해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릅니다. 시몬이 급진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당대에 있어서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시몬도 사도였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세리였던 마태는 대제사장 쪽과 로마 관료 쪽 양쪽의 정보를 모두 접할 수 있었기에,
마태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 가설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나나인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 등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와중에 페르시아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에 대한 전승을 보면 에티오피아 외에 시몬과 같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정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그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세리 마태와 혁명당원 시몬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복음서를 기록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 이를 증언한 마태가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는데 어찌 내 이름을 넣을 수가 있을까 해서 자기 이름도 지운 채 그저
그와 함께 <다른 제자 둘>이라고 기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 쓰여진 것이 요한복음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복음서의 귀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시면, 그렇다면 요한복음이라고 하는 책 제목은 어떻게 되느냐. 요한이 썼기 때문에 요한복음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바울 서신이나 다른 서신들과 같이 저자가 명확하게 드러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 요한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도 모두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승에 불과하며 이 저자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요한복음이라고 되어 있을 책을 이제 마태복음으로 바꾸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이름은 그냥 책
이름이지요.
그리고 또 혹시, 어? 홍 목사 이거 이상한 주장을 하는데, 혹시 이단 아니야? 라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의 저자를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이단이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우리 믿음에 있어서 복음주의, 개혁주의적인 견지에서 여러 학설을 주장하고 또한 이를 검증해가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 말씀을 들어오신 분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이름이 요한이면 어떻고, 마태면
어떤가. 저자 이름이 나와 있으면 어떻고 나와있지 않으면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임원이나 직분을 받을 때가 되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눈에 띄지는 않고 힘들기만 한 일이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収穫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ご自分の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い。」
그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자기 이름을 감추고 주님의 일을 감당한 그에게,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기쁨으로 삼아야겠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을 가지고 기쁨을 삼아야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걸고 알리려 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우리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님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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