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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회 활짝 열린 길 앞에서
20207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절~38절 신약 84페이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マルコの福音書 15章37節~38節
“しかし、イエスは大声をあげて、息を引き取られた。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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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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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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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활짝 열린 길 앞에서” 大きくひらかれた道の前で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데, 이 일은 공관복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 인해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휘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 성전에서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지성소인데, 지성소……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성소를 “거룩한 장소”라고 한다면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고 하는 뜻이 됩니다.

이 지성소의 넓이는 대략 4.5미터 곱하기 4.5미터 정도, 평수로 대략 6평 정도 다타미 12조 정도 되는 정사각형 모양을 한, 가정집 기준으로 본다면 조금 넓은 방, 정도 되는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거기는 왜 지성소 즉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고 불리느냐 하면,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하는데, 언약궤 안에는 일반적으로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돌판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친히 쓰셔서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일반적으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흥미로운 점은, 사실 이 언약궤 안에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의견이 갈립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면 보통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외에, 만나가 들었던 금 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만나라고 하는 것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수 백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무려 40년간이나 먹이셨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관된 것입니다.

한편 아론의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민수기 16장에 보면 광야에서 모세의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고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시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거죠.

우리도 할 수 있는데, 왜 너희들만 해 먹느냐 이것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각 지파 족장들을 모아놓고 각각 자기 지팡이에 이름을 적어서 언약궤 앞에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음날 보니까 어떻게 되었냐 하면, 민수기 17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17장 8절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その翌日、モーセはあかしの天幕に入って行った。すると見よ。レビの家のためのアロンの杖が芽を出し、つぼみをつけ、花を咲かせて、アーモンドの実を結んでいた。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을 본 다른 지파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택하시고 자기들은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론의 지팡이도 보관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하, 언약궤 안에는 돌판과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었구나……하면 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8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거든요.

열왕기상 8장 9절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箱の中には、二枚の石の板のほかには何も入っていなかった。これ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エジプトの地から出て来 たとき、主が彼らと契約を結ばれた際に、モーセがホレブでそこに納めたものである。

이와 같은 내용은 역대하 5장 10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 안에는 두 돌판이 들어있을 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적힌 돌판만 들어있었구나 하고 끝나면 좋겠는데, 여기에도 또 문제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3절~4절을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3절~4절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また、第二の垂れ幕のうしろには、至聖所と呼ばれる幕屋があり、
そこには金の香壇と、全面を金でおおわれた契約の箱があり、箱の中には、マナの入った金の壺、芽を出したアロンの杖、契約の板がありました。


참 이럴 때 보면 난감합니다. 우리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8장 9절에 보면 돌판만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서 9장 3절~4절에 보면 돌판만이 아니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까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처음에는 언약궤 안에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중에 없어졌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 이 언약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때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없어지고 돌판만 남았다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이는 성경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 여기서 돌판과 만나와 지팡이를 보관할 때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돌판에 대한 기록을 봅니다.

출애굽기 40장 20절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また、さとしの板を取って箱に納め、棒を箱に付け、「宥(なだ)めの蓋」を箱の上に置き、


신명기 10장 5절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私は向き直って山を下り、それらの板を、私が作った箱の中に納めた。主が私に命じられたとおり、それらはそこにある。

이렇게 본다면 돌판을 언약궤 안에 넣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만나가 든 금 항아리입니다.

출애굽기 16장 32절~34절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モーセは言った。「主が命じられたことはこうだ。『それを一オメル分、あなたがたの子孫のために保存し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ときに、荒野であなたがたに食べさせたパンを、彼らが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モーセはアロンに言った。「壺を一つ持って来て、マナを一オメル分その中に入れ、それを主の前に置いて、あなたがたの子孫のために保存しなさい。」
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とおり、アロンはそれを保存するために、さとしの板の前に置いた。


여기서는 언약궤 안에 보관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증거판 앞에” 두게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론의 지팡이에 대해서 보면 민수기 17장 10절입니다.

민수기 17장 10절
“1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アロンの杖をあかしの箱の前に戻して、逆らう者たちへの戒めのために、しるしとせよ。彼らの不平をわたしから全くなくせ。彼らが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여기서 보면 이 또한 증거궤 안이 아니라 증거궤 앞으로 가져다가 보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사실 언약궤 안에는 돌판만 들어 있었고,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는 언약궤 바깥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그러면 히브리서 기록은 어떻게 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히 언약궤 안에 모두 들어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언약궤의 개념적인 설명이었기 때문에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기록하였다고 주장을 합니다.

솔직히 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당장 그걸 한 번 열어보면 되잖아요. 하지만 이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벧세메스(ベテ・シェメシュ) 사람들이 이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열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지금은 이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불명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지요. 그러니까 열어보고 싶어도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열어볼 방법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학문적으로는 흥미로울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믿음에 있어서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언약궤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 물건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 언약궤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라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다라고 하는 점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는 대단히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뿐이었는데, 그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지성소에는 1년에 한 번만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곳입니다.

이 지성소 입구에 있던 것이 바로 오늘의 핵심 내용인 휘장이었던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이 휘장 때문에 지성소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휘장의 크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고대 문헌에 의하면 길이가 대략 22미터, 폭은 11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평수로 따지자면 73평이나 됩니다. 아파트 중에서도 꽤 넓은 아파트가 되겠지요.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넓이가 아니라 두께입니다. 많은 분들이 <휘장>이라고 하면 무슨 커튼 같은 얇은 것을 상상하기 쉽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이 휘장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십니까.

한번 여러분의 손바닥을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손가락 사이를 붙여서 한 번 펼쳐보세요. 이 폭이 바로 그 휘장 두께였다고 합니다. 대략 9센티에서 10센티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껍죠? 그렇다고 여기 안에 솜이나 스펀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빽빽하고 단단한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넓은 아파트 한 채 정도 되는 크기의 카페트, 그리고 두께가 10센티 정도나 되는 카페트가 순식간에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상이 가십니까.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카페트는 어느 정도 두께예요? 아무리 두꺼워 봤자 1센티에서 2센티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찢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솔직히 일반 가위나 칼을 쓴다 하더라도 쉽게 자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센티도 아니고 10센티라고 하면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찢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 휘장이 어떻게 찢어졌다고 합니까.

마가복음 15장 38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앞서서 휘장은 높이가 22미터 정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백 보 양보를 해서, 정말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과도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이 휘장을 찢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럴 경우 휘장은 어떻게 찢어져야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찢어져야 했겠지요. 하지만 오늘 기록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를 찢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휘장을 이렇게 찢으셔야만 했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속이 상해서 찢으셨을까요?

이를 푸는 중요한 단서는 바로 이 휘장에 그려진 무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 31절~33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32.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33.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また、青、紫、緋色の撚り糸、それに撚り糸で織った亜麻布を用いて、垂れ幕を作る。これに意匠を凝らしてケルビムを織り出す。
この垂れ幕を、金をかぶせたアカシヤ材の四本の柱に付ける。その鉤は金で、柱は四つの銀の台座の上に据えられる。
その垂れ幕を留め金の下に掛け、垂れ幕の内側に、あかしの箱を運び入れる。その垂れ幕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聖所と至聖所との仕切りとなる。

여기에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는 그룹(ケルビム)들을 수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예전에 제가 말씀 드렸던 천사의 구분에 대해서 기억하십니까.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반 천사와 스랍천사(セラフィム), 그리고 그룹천사(ケルビム)였지요. 일반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를 실행하는 충실한 천사입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장 미가엘(御使いのかしらミカエル), 가브리엘 천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스랍천사(セラフィム)는 이사야 6장에만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천사가 바로 그룹천사(ケルビム)입니다. 그룹천사가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벌써 등장을 합니다. 천사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사실은 기억하시지요?

그 때의 상황에서 이 그룹천사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즉 이 그룹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는 누구로부터 지키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죄인 아담과 하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룹 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에 새겨진 그룹 천사의 역할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에 그룹 천사가 새겨진 이유는, 이 휘장의 역할을 잘 말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룹천사가 새겨진 그 크고 두꺼운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그 때까지는 우리가 죄인이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고,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던 그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는 친히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휘장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용서를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를 보면 모세 때의 홍해가 떠오릅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울 수 있는 무기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마치 그 두꺼운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주셨던 것처럼 홍해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로 남녀노소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추격해오는 애굽의 최정예 군대를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힘으로는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로막힌 휘장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 주시고, 휘장을 갈라서 길을 내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イエスはご自分の肉体という垂れ幕を通して、私たちのために、この新しい生ける道を開いてくださいました。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동안 우리를 가로막고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찢어진 휘장,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18절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実に、キリストこそ私たちの平和です。キリストは私たち二つのものを一つにし、ご自分の肉において、隔ての壁である敵意を打ち壊し、
様々な規定から成る戒めの律法を廃棄されました。こうしてキリストは、この二つをご自分において新しい一人の人に造り上げて平和を実現し、
二つのものを一つのからだとして、十字架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敵意を十字架によって滅ぼされました。
また、キリストは来て、遠くにいたあなたがたに平和を、また近くにいた人々にも平和を、福音として伝えられました。
このキリストを通して、私たち二つのものが、一つの御霊によって御父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라는 이름의 담을, 주님의 육체로 헐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あがな)いを通して、価(あたい)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없습니다.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홍해 바다를 1센티도 가르지 못합니다. 그 두꺼운 휘장을 1센티도 찢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 앞에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앉아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만 계시겠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하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시 그들은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에 의해 처참만 모습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살 수 있었습니까. 그렇죠. 눈앞에 열린 길을 과감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추격해오는 이들이 없습니까. 아니요.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마귀 사탄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주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함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からだが霊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と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です。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 결과 홍해가 갈라졌어요. 휘장이 찢어졌어요. 이제 홍해를 건널 수 있습니다. 지성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건너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되면 이는 애굽 군대한테 죽든 마귀 사탄에게 삼킴을 당하든, 아무리 믿음이 있어봤자 행함이 없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는 역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을 들으면 참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말씀을 보면 뭐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과연 그것이었나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죽으려고 가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 생각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기부인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마저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거창한 일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기 싫어요. 성경을 읽기 싫어요. 기도하기 싫어요. 봉사하기 싫어요. 전도하기 싫어요. 내가 미워하는 이웃과 화해하기 싫어요.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 내가 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이는 죽으러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꼭 고생을 해야지만 복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꼭 누구처럼 일본 군마현에 있는 시골까지 선교를 하러 가야지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6절~8절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私たちは、与えられた恵みにしたがって、異なる賜物を持っているので、それが預言であれば、その信仰に応じて預言し、
奉仕であれば奉仕し、教える人であれば教え、
勧めをする人であれば勧め、分け与える人は惜しまずに分け与え、指導する人は熱心に指導し、慈善を行う人は喜んでそれを行いなさい。

이처럼 저에게 맡겨진 은사는 따로 있고 여러분께 맡겨진 은사는 따로 있습니다. 이 모든 행함이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우리에게 맡기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활짝 열린 믿음의 길을, 우리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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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20207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3장 25절 구약 265페이지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申命記 3章25節
“どうか私が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またレバノンを見られ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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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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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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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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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カナンの地に入る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민수기 20장 2절부터 보면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이른바 미르바의 물(メリバの水) 사건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만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물이 떨어져서였습니다. 민수기 20장 2절~5절까지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20장 2절~5절
“2.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4.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そこには、会衆のための水がなかった。彼らは集まってモーセとアロンに逆らった。
民はモーセと争って言った。「ああ、われわれの兄弟たちが主の前で死んだとき、われわれも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に。
なぜ、あなたがたは主の集会をこの荒野に引き入れ、われわれと、われわれの家畜をここ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
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り、このひどい場所に引き入れたのか。ここは穀物も、いちじくも、ぶどうも、ざくろも育つような場所ではない。そのうえ、飲み水さえない。」

사람들이 이렇게 모세한테 불만을 토로하니까 모세와 아론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어서 7절~8절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20장 7절~8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이와 갈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고 이제 모세가 움직입니다. 그 다음 9절~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민수기 20장 9절~11절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여기까지의 내용,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좀 식상하기도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남의 나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해오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로 탈출시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홍해를 갈라주셔서 당시 200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건너게 해주시고, 반면에 애굽의 최정예 군대들을 전멸시켜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해주신 하나님.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뻑하면 물이 없네, 고기가 먹고 싶네 하고 맨날 불평 불만을 달고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당시 이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지금 있는 것,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보지는 않고, 그저 없는 것만 달라고 하면서 살았던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응답해주시곤 했었습니다. 뭐, 한 두 번 있어왔던 일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인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민수기 20장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본다면, 그렇게 믿음이 적어서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혼나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냥 꾸짖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기로 한 땅에 너희들 모세와 아론은 들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화가 나신 것일까요.

이 일을 논할 때에는 이번 일과 가장 비슷했던 경우를 한 번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6절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出エジプト記 17章 1節~6節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主の命によりシンの荒野を旅立ち、旅を続けてレフィディムに宿営した。しかし、そこには民の飲み水がなかった。
民はモーセと争い、「われわれに飲む水を与えよ」と言った。モーセは彼らに「あなたがたはなぜ私と争うのか。なぜ主を試みるのか」と言った。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そこで、モーセは主に叫んで言った。「私はこの民をどうすればよいのでしょう。今にも、彼らは私を石で打ち殺そうとしています。」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民の前を通り、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何人か連れて、あなたがナイル川を打ったあの杖を手に取り、そして行け。
さあ、わたしはそこ、ホレブの岩の上で、あなたの前に立 つ。あなたはその岩を打て。岩から水が出て、民はそれを飲む。」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の目の前で、そのとおりに行った。

어떠십니까. 이 말씀과, 방금 전에 보셨던 민수기 20장 말씀을 보시면 거의 비슷하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민수기 20장에서는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일단 두 말씀 중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말씀부터 볼까요? 출애굽기 17장 5절~6절입니다.


출애굽기 17장 5절~6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民の前を通り、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何人か連れて、あなたがナイル川を打ったあの杖を手に取り、そして行け。
さあ、わたしはそこ、ホレブの岩の上で、あなたの前に立 つ。あなたはその岩を打て。岩から水が出て、民はそれを飲む。」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の目の前で、そのとおりに行った。

그리고 민수기 20장 7절~11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民数記 20章 7節~11節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이 두 말씀을 단순하게 비교해본다면, 먼저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그대로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반면에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치지 말고 그냥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라고 말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냐 하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모세더러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모세가 지금까지 고생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최종목표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없는 돈 쪼개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4년 동안 대학공부를 했는데, 마지막 학기 한달 앞두고, 넌 졸업 못해……라는 말을 들어도 충격적일 텐데, 이는 4년이 아니라 4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제 조금 있으면 그토록 꿈에도 그렸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직전에 너는 못 들어가……라는 무서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모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바위에 막대기를 두 번 두드린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요?

이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모세가 이러이러한 구체적인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라고 하는 명확한 답이 성경 어디에도 적혀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뭐냐 하면, 모세가 지나치게 신경질을 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꽤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민수기 20장 10절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이를 좀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야 나쁜 놈들아, 우리가 너희들 같은 놈들한테도 물을 줘야겠냐!” 하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고 생각하시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 어떠신가요? 아무리 모세라도 그렇지 너무 말이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세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주장에는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하나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거룩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성질을 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한 말 기억하시나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고 한 이 말은 너무나도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걸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모세가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이 모세가 두드린 반석은 예수님을 뜻하는데,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 17장에서 반석을 두드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석을 두드릴 필요가 없이 말로만 하면 되었는데, 민수기 20장에서 또다시 반석을 두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다는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모세에게 실수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이토록 엄하게 하시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일반인이 아니라 지도자의 실수는 이처럼 엄격하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이렇게 그분들은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 이유는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하는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통곡을 하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30절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이는 같은 민수기이지만 14장 이 부분은 민수기 20장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이 때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40년 전에 모세를 가나안 땅에 안 들여보내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하는 주장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의견들을 여러분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시점에서 잠시 모세의 변호인이 되어보고자 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먼저 첫 번째 이유는, 이 일이 있기 직전, 그에게는 어떤 중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 1절
“1.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第一の月にツィンの荒野に入った。民はカデシュにとどまった。ミリアムはそこで死んで葬られた。


여기서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를 가리킵니다. 이 일이 있던 시기는 광야에서 나오고 대략 40년 정도 된 시점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가고, 드디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날이 다가옵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까지 고생은 고생대로 해왔던 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대단히 상심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자, 앞서 출애굽기 17장에서의 경우와 이번 민수기 20장의 경우를 보면, 상황은 비슷합니다. 백성들이 마실 물이 떨어졌고,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분명히 다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 1세대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도 봤지요. 홍해의 기적도 봤지요. 만나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습니다. 노예신분이었던 부모한테서 태어났으며, 어른이 될 그 나이까지 노예로만 살아왔습니다. 노예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꿈이 없습니다. 장차 내가 무엇을 하겠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인생의 꿈과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삶, 그것이 바로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겠지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광야 1세대였다고 하면, 그런 이들이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모세에게 불만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래요, 뭐,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고 쳐요.


하지만 민수기 20장에서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 중에는 광야에서 태어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태어난 곳이 광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머지않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철없이 광야 1세대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야, 너희들의 부모들을 잊어버렸냐.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더니 모두다 이 광야 땅에서 죽어버리지 않았냐. 너희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를 좀 덧붙이자면, 아무리 모세라 하더라도 말을 너무 함부로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세와 광야 2세대들의 나이차이는 상당히 컸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당시 나이가 80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만, 그 때 성년들은 다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20장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아무리 많아도 19세 정도라고 한다면, 모세와 나이 차이가 60세나 됩니다. 그러니 민수기 20장 당시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을 때이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부분 많아 봤자 60세가 안됐을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120세였습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연장자라 하더라도 모세에게 있어서는 60세의 나이 차이, 예를 들어 70세 어르신이 열살 아이들을 보는 정도의 수준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그 정도 신경질 좀 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서,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일단 반석이 예수님의 십자가다라고 하는 주장은, 그야말로 신학자들의 소설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지요. 성경 어디에도 그와 같은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시 모세가 그 반석을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드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40년 전부터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계셨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민수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미르바의 물 사건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주장에도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성경 특히 모세오경에 있어서 이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노예로 살아왔던 우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적인 성질을 낸 것은 잘못했지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단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세한테도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다윗을 보더라도 실수를 했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수를 반복해왔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도자가 아니라서 괜찮고 모세는 지도자라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그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도자는 어디서부터 포함이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 이렇게 막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성경 말씀으로 막혔을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고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본문부터 우리가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부터 민수기 20장 7절~12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국어시간에 독해문제 같은 것을 보면 이런 문제가 많지요? 본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자, 지금부터 읽어드릴 본문, 아까도 읽어드렸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0장 7절~12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民数記 20章 7節~11節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잘 들으셨나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질문 나갑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화가 난 원인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1번 모세와 아론, 2번 이스라엘 자손

어떠십니까. 이는 12절 말씀을 보시면 분명히 들어납니다.

민수기 20장 12절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이 말씀 중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너희”(あなたがた)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모세와 아론입니다. 그들이 성질을 냈다는 것이 문제인지, 반석을 두 번 두드린 것이 문제인지는 성경에 명확히 안 나왔기 때문에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근본적인 잘못이 “너희” 즉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는 말이 어떤지 아십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신명기 3장 23절~27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3장 23절~27절
“23.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神、主よ。あなたは、あなたの偉大さとあなたの力強い御手を、このしもべに示し始められました。あなたのわざ、あなたの力 あるわざのようなことができる神が、天あるいは地にいるでしょうか。
どうか私が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またレバノンを見られ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二度とわたしに語ってはならない。
ピスガの頂に登り、目を上げて西、北、南、東を見よ。あなたのその目でよく見よ。あなたがこのヨルダン川を渡ることはないからだ。

여러분, 알아차리셨나요?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너무나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신명기 3장 26절에서 모세는 이 미르바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3장 26절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二度とわたしに語ってはならない。

민수기 20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은 모세와 아론의 잘못이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의 “너희”는 분명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3장 26절에 보면 모세는 그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너희” 때문에 내가 책망 받았다 (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 즉, 그 원인을 “너희” 때문에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너희”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이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세 탓을 하고 있는데, 모세 자신은 이스라엘 자손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더러, 너희들 때문에 내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창세기 내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는 자신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추궁하실 때 그들이 뭐라고 답합니까.


창세기 3장 12절~13절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人は言った。「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神である主は女に言われた。「あなたは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女は言った。「蛇が私を惑わしたのです。それで私は食べました。」

하와는 뱀이 유혹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은 더욱 대범합니다. 그냥 하와 탓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이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준 여자 때문에 내가 열매를 먹었잖아요. 당신이 여자를 주지 않았다면 내가 나무 열매를 먹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면서, 이는 그야말로 여자 탓 만이 아니라 하나님 탓까지 하고 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 아담이 바로 그 순간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시는 (思い直される)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26장 13절 エレミヤ書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さあ今、あなたがたの生き方と行いを改め、あなたがたの神、主の御声に聞き従いなさい。そうすれば、主も、あなたがたに語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されます。

요엘 2장 13절 ヨエル書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衣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心を引き裂け。あなたがたの神、主に立ち返れ。主は情け深く、あわれみ深い。怒るのに遅く、恵 み豊かで、わざわいを思い直してくださる。

요나 3장 10절 ヨナ書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神は彼らの行いを、すなわち、彼らが悪の道から立ち返ったのをご覧になった。そして神は彼らに下すと言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し、それを行われなかった。

그렇다면 언제 돌이키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려고 했다가도 돌이키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가 만약 한 번 이라도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었더라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 때까지 거절하셨던 가나안까지 가는 문을 모세에게도 여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끝내 모세에게서 그와 같은 회개의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고, 결국 그는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남의 탓을 하겠습니까. 그 이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닫혔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셨던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이어지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가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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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회 감추인 이름과 드러난 이름
20207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신약 186페이지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24節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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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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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추인 이름과 드러난 이름” おおわれた名前と明かされた名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라고 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해서 그 관점이나 구성 그리고 비유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보면 공관복음에 비해서 관점이나 구성 등으로 볼 때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과 겹치는 부분도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로 요한복음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미리 말씀해드립니다만, 여러분께서 그냥 가만히 듣고만 계시면 평소보다도 졸음이 더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함께 생각하면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를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도 이름을 찾아보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름, 특히 예수님의 사도 이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니까 잘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총 열두 명이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열두 사도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듣고, 질문이 끝나자마자 열두 명의 이름이 줄줄 나온다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뭐, 유명한 사람으로는 베드로, 요한, 그리고 가룟 유다 정도는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점점 가면 갈수록 이름이 가물가물해지지요.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 중에서 기초 정보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특히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이름을 살펴볼 때에는 사전지식이 좀 필요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한 사람에게 이름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사도들의 대표격라고도 할 수 있는 베드로만 보더라도 <베드로>라는 이름 외에 <시몬>이라는 이름도 있고, 또한 <게바>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는 총 세 개의 이름이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식으로 그 사람에게는 하나 이상의 이름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식으로 동일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으로 성경에 적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시고 말씀을 들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우선 열두 사도의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만,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절~4절
2.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十二使徒の名は次のとおりである。まず、ペテロと呼ばれる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
ピリポとバルトロマイ、トマスと取税人マタイ、アルパヨの子ヤコブとタダイ、
熱心党のシモンと、イエスを裏切っ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ある。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이렇게 열 두 명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야고보가 두 명 나오는데 뒤에 나오는 야고보는 마가복음 15장 40절에 따라서 이른바 <작은 야고보(小ヤコブ)>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두 번째 나오는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마태복음의 열두 사도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 小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일단 여기서 보면 형제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ペテロ、アンデレ)는 형제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ゼベダイの子)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ヤコブ、ヨハネ)도 형제이지요.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다대오(小ヤコブ、タダイ)가 형제지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서 또 말씀 드려야 할 부분은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좀 이 이름이 낯설 수도 있습니다만, 이 바돌로매라고 하는 사도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사실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와 나다나엘은 완전히 다른 이름처럼 보이겠습니다만,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의 <바>(バル)는 히브리어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풀어본다면 <바돌로매 나다나엘>(バルトロマイ)이라고 하면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 또는 나다나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도 빌립(ピリポ)과 대단히 친한 친구 사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3절~51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먼저 만난 빌립이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강권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그렇습니다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더라도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는 항상 두 명이 함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자, 다음으로 마가복음에 나온 사도 이름입니다.

마가복음 3장 16절~19절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こうしてイエスは十二人を任命された。シモンにはペテロという名をつけ、
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ヤコブの兄弟ヨハネ、この二人にはボアネルゲ、すなわち、雷の子という名をつけられた。
さらに、アンデレ、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タダイ、熱心党のシモン、
イスカリオテのユダを任命された。このユダがイエスを裏切ったのである。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인 시몬, 다대오, 그리고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タダイ、 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어떠세요. 두 번째 들으니까 그래도 처음 들을 때보다 좀 들리는 이름이 있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 사이인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도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누가복음부터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누가복음 6장 14절~16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すなわち、ペテロという名を与えられた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そして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
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熱心党員と呼ばれていたシモン、
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このユダが裏切る者となった。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シモン、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이 걸립니다.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나인>이라고 소개가 된 시몬인데, 여기서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되어 있고, 또한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다대오>(タダ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나나인 시몬>과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말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나>라고 하는 것은 시몬의 출신지이지만 <셀롯>이라는 말은 지명이 아니라 현대인의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열심당원>, 새번역 성경에는 <혁명 당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참고로 일본 성경을 보더라도 <열심당> 또는 <열심당원>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열심당원, 혁명당원이라는 뜻은 무엇이냐 하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셀롯, 즉 열심당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급진적 독립, 즉, 무력으로 민족이 단결해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내자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시몬>은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강했을 것이고, 또한 비교적 과격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적혀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명확한 단서가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맥 흐름상,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몇 개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열두 제자 이름을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라고(バルトロマイ)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어떠십니까. 이제 조금 이름에 익숙해지려고 하시나요?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시면 조금 차이는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명확하게 사도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어떠냐 하면 이와 같이 정리된 열두 사도가 모두가 자세하게 정리된 구절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좀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이 가려진 제자>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만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 하면 <그가 사랑하시는 자>( 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 <사랑하시는 제자>( 愛する弟子), 심한 경우에는 그냥 <그 다른 제자>( もう一人の弟子), <또 다른 제자>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는 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 이름을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큰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이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먼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이는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라서 들어보신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이른바 마지막 만찬,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순간,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전후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시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
“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イエスは、これらのことを話されたとき、心が騒いだ。そして証しさ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 裏切ります。」
弟子たちは、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分からず当惑し、互いに顔を見合わせていた。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がパン切れを浸して与える者が、その人です。」それからイエスはパン切れを浸して取 り、イスカリオテのシモンの子ユダに与えられた。
ユダがパン切れを受け取ると、そのとき、サタンが彼に入った。すると、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すぐしなさい。」
席に着いていた者で、なぜイエスがユダにそう言われたのか、分かった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ある者たちは、ユダが金入 れを持っていたので、「祭りのために必要な物を買いなさい」とか、貧しい人々に何か施しをするようにとか、イエスが言われたのだと思っていた。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은 23절~25절입니다.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이 부분이 한글 개역개정으로 보면 잘 감이 안 옵니다. 그런데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3장 23절~25절
“23.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예수님 품에 기대 누웠는데
24.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여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물어 보라고 하였다.
25.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품에 기댄 채로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게 이해가 되시나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는 어떤 인물입니까. 정말 남들은 미처 하지 못할 말도 나서서 하는 그런 좀 저돌적인 성경을 가진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축복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혼나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던 제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긴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 중에서 자기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평소 베드로라면 당장 예수님 앞에 나서서, “도대체 그런 나쁜 놈이 누구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 놈을 잡아서 당장……” 뭐 이럴 만도 한데, 베드로는 지금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냐 하면 예수님 옆에 있는 그 제자한테 눈짓을 보내서, 야, 그게 누군지 니가 좀 여쭤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베드로도 당장 일어나서 여쭙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묻는 것보다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가 묻는 편히 훨씬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야, 내가 묻는 것보다도 니가 묻는 게 낫겠다. 니가 어서 빨리 여쭤봐.” 이렇게 머릿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히 신임을 얻고 있었고, 이 사실을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요한복음 중 어디에 등장하는지를 정리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하는 곳은 총 일곱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은 바로 앞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마지막 만찬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シモン・ペテロともう一人の弟子は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この弟子は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ので、イエスと一緒に大祭司の家の中庭に入ったが、
ペテロは外で門のところに立っていた。それで、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もう一人の弟子が出て来て、門番の女に話し、ペテロを中に入れた。
すると、門番をしていた召使いの女がペテロに、「あなたも、あの人の弟子ではないでしょうね」と言った。ペテロは「違う」と言った。
しもべたちや下役(したやく)たちは、寒かったので炭火を起こし、立って暖まっていた。ペテロも彼らと一緒に立って暖まっていた。

예수님께서 체포가 된 다음, 베드로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와 함께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곳까지 갑니다. 하지만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못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당시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말하자면 연줄을 이용해서 그 안까지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비록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라고 표기는 없습니다만, 이름이 의도적으로 가려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기서의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イエスの十字架のそばには、イエスの母とその姉妹、そしてクロパの妻マリアとマグダラのマリアが立っていた。
イエスは、母とそばに立っている愛する弟子を見て、母に「女の方、ご覧なさい。あなたの息子です」と言われた。
それから、その弟子に「ご覧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と言われた。その時から、この弟子は彼女を自分のところに引き取った。


역시 이 부분도 좀 알기 쉽게 현대인의 성경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26.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선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성경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한 뒤에도 많은 형제 자매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을 앞두고 계신 상황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이르시기를 “저 제자가 당신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자,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이 아닌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0장 1절~8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먼저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만,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나중에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8절입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절~9절까지의 부분인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시고는 제자들과 만났던 장면입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좀 길더라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9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節~9節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一方、ほかの弟子たちは、魚の入った網を引いて小舟で戻って行った。陸地から遠くなく、二百ペキスほどの距離だったからである。
こうして彼らが陸地に上がると、そこには炭火がおこされていて、その上には魚があり、またパンがあるのが見えた。

여기서 이 <디베랴(ティベリア)>라고 되어 있는 곳은 갈릴리 서쪽 지방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その後、イエスはガリラヤの湖、すなわち、ティベリアの湖の向こう岸に行かれた。

그래서 <디베랴 호수>라고 하는 말과 갈릴리 바다 라고 하는 말은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기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원래 하던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이런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예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가 베드로한테 말하기를, 야, 저기 주님이 계시다! 이렇게 말했더니 베드로가 배를 곁에 댈 겨를도 없이 그냥 무작정 바다에 뛰어 내려서 예수님께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기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엄연히 다른 장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여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8節~23節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若いときには、自分で帯をして、自分の望むところを歩きました。しかし年をとると、あなたは両手 を伸ばし、ほかの人があなたに帯をして、望まないところに連れて行きます。」
イエスは、ペテロがどのような死に方で神の栄光を現すかを示すために、こう言われたのである。こう話してから、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いなさい。」
ペテロは振り向いて、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がついて来るのを見た。この弟子は、夕食の席で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り、「主よ、あなたを裏切 るのはだれですか」と言った者である。
ペテロは彼を見て、「主よ、この人はどうなのですか」とイエスに言った。
イエスは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あなたは、わたしに従いなさい。」
それで、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いう話が兄弟たちの間に広まった。しかし、イエスはペテロに、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言われたのではなく、「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と言われたのである。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는 대단히 무서울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너는 네가 가고 싶은 것에 가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이후에는 네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거야 라고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었지요. 순간 베드로는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가 있어요. 그 때 베드로는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게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던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어봐요. 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친구는 어떻게 되나요? 참 저돌적인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남들 생각하지 말고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해. 이러신 것이지요.

이른바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이 사랑 받는 제자는 역시 신경이 쓰였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입니다. 일곱 번째 장면은 그 바로 뒤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이 말씀,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도 역시 현대인의 성경판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21장 24절
“이 일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안다.”

여기서 <그 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 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요한복음에 적힌 내용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한 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한 일곱 장면,

첫 번째는, 마지막 만찬, 두 번째는 대제사장 집 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 네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무덤 앞, 다섯 번째 장면은 디베랴 호수(ティベリア湖畔), 그러니까 갈릴리 바닷가, 여섯 번째 장면은 앞서가던 베드로의 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요한복음 마무리 장면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검토작업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우리 한 번 같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베드로도 인정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얻었던 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어디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왔습니다. 일단 그 주장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적으로서는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옛날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 외에도 마가라고 하는 주장, 사도 도마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또한 여러 근거를 대면서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라고 하는 주장, 베드로라고 하는 주장, 나아가서는 막달라 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물며 상징설, 그러니까 이 인물은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을 가상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라고 하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먼저 소거법을 사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이건 아니다 라고 하는 주장부터 지워가자는 것이지요.

우선, 막달라 마리아 설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요한복음 13장 23절,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라고 해서, 어쩌면 그 제자는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소설에다가 영화로까지 되었지요? 다빈치 코드에 보면 이게 무슨 막달라 마리아다 뭐다 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바로 이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엉터리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경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장면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분명히 <아들>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남자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다, 아니면 다른 여성이다 하는 주장은 모두 틀렸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근거입니다. 첫 번째 장면,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제자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이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0절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食卓に着かれた。

마가복음 14장 17절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そこに来られた。

누가복음 22장 14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その時刻が来て、イエスは席に着かれ、使徒たちも一緒に座った。

사도라고 함은 열두 사도입니다. 이 때 바울은 아직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라고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열두 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성경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 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반드시 열두 사도 중 한 명입니다. 열두 사도가 아닌 마가다 나사로다 하는 주장은 역시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베드로냐 하면, 아니,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장면인 마지막 만찬에서는 베드로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에게 머리짓을 하고 있고, 다섯 번째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알려준 사람이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였고, 여섯 번째 장면에서도 베드로가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냐고 가리켰던 인물이 바로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아닙니다.

자, 좀 지루하시더라도 이제 점점 중요한 부분이 다가옵니다.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번째 장면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러 갔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혹시 누구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21장 1절~4절까지를 다시 한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4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여기서 2절에 보면 그 제자 이름이 나오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또다른 제자 둘이라고 합니다.

ペテロ、トマス、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과 요한, 그리고 또다른 제자는 편의상 제자 A와 제자 B라고 해두죠. 이렇게 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제자 A, 제자 B, 이렇게 일곱 명입니다. 우리가 찾는 제자는 반드시 이 안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 그 제자는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빠진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여섯 명입니다. 열두 명 중에서 절반까지 줄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하나 더 줄일 수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다음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밑에 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사람도 제외를 해야겠지요.

그러면 벌써 남은 사람은 다섯 명입니다.

자, 그럼 누구일까. 정말 요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예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권위를 갖는 근거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웨스트코트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해서 다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의 어휘나 유대 풍습, 특성에 대한 지식에 밝은 것으로 보아 저자는 유대인이다.

둘째,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다.

셋째, 지역이나 사람들, 시간 방법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이와 같은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넷째,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사도였을 것이다.


다섯째,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다른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서 이 분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분들도 이 근거에 동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그럼 완벽하냐 하면, 아니요.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첫째 약점은, 두 번째 장면에 대한 해석입니다. 베드로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체포된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뜰에 못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서 베드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개 고기잡이에 불과했던 요한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약점입니다.

둘째 약점은, 다섯 번째 주장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기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는 하는데, 다섯 번째 장면인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장면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여기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나오는데, 이처럼 누구누구집 아들……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을 특정할 때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하면 이는 누구나 다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세베대의 아들들, 그것도 단수가 아니라 분명히 복수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야고보나 요한 중 하나가 아니라, 분명히 둘 모두를 가리키고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요한이 쓴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점, 이 점이 바로 두 번째 약점입니다.

이와 같은 약점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서 일개 어부가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하면,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에 대해서도, <요한>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쓰지는 않았다고 해서 여전히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저와 함께 살펴보았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방금 명단에 있었던 <또 다른 제자 둘>이 마음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저도 이 두 사람이 좀 신경을 쓰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기에 빠진 사람, 다시 말해서 이 명단에 없으면 부자연스러운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있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누구냐 하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베드로의 형제였지요. 그러면 안드레도 고기잡이였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데 거기에 형제인 안드레가 빠진다는 것은 이는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냐 하면, 빌립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갈이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바돌로매가 등장하는 곳에는 항상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과 절친이었지요. 더구나 빌립의 고향은 베드로와 같은 벳세다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 보면 나다나엘만 나와 있고 빌립 이름이 안 보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이 또다른 제자 A와 제자 B는 안드레와 빌립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이것도 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 13장 23절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어떠냐 하면 요한복음 1장, 6장, 12장에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기록하다가 나중에 이름을 가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요.

빌립에 대해서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13장과 19장 이후에 등장합니다만, 빌립 이름은 14장에도 나옵니다. 그러면 한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썼다가 가렸다가 하고 보는 것은 어렵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도마도 명단에 있었습니다만 그의 이름도 요한복음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총 여덟 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사도들 명단을 다시 한 번 봐야겠지요? 전체 열두 사도 명단에서 아니라고 한 사람들, 이름이 이미 나온 사람들을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체 명단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여기서 뺄 사람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으니까 과감하게 야고보와 요한도 빼버립시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이니까 이것도 빼고, 빌립도 이름이 많이 나와 있으니까 뺍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벌써 죽었으니까 빼야 한다고 말씀 드렸죠?

자 알기 쉽게 정리해보면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가룟 유다.

여기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도마, 그리고 가룟 유다, 이렇게 여덟 명을 빼면 누가 남느냐 하면 12-8, 네 명이 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걸쳐서 걸어온 길이 맞다면 이 네 명중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그리고 이 요한복음을 증언한 제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남은 네 명을 말씀 드립니다.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タダ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신임을 가장 받았던 제자는, 바로 세리 마태입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웨스트코트의 근거를 기억하지요. 다섯까지 근거를 대가면서 요한복음을 증언한 사람, 즉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에 대한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이다.
둘째로 그는 팔레스틴 출신이다.
셋째로 그는 친히 목격한 사람이다.
넷째로 그는 사도 중 한 사람이다.
다섯째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마태는 모든 조건에 부합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팔레스틴인 갈릴리 태생입니다. 그는 사도였기 때문에 친히 예수님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에 대한 기록은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단순히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리였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복음서 모두에 마태를 부르신 후 마태 집에서 다른 세리들도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당시 세리라고 하는 직업은 죄인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리를 사도로 부르셨다는 일은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는 마태에 관련하여 그와 같은 내용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요한>이라고 했을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약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요한에 대해서는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만, 마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기록조차도 없이 완벽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일개 고기잡이였던 요한이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되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만, 이 문제도 마태였다고 하면 충분히 풀릴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는 그 집에까지 가서 식사를 했던 장면이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특별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레위>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そこから進んで行き、マタイという人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 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마가복음 2장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道を通りながら、アルパヨの子レビ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누가복음 5장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その後、イエスは出て行き、収税所に座っているレビという取税人に目を留められた。そし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

이 기록을 본다면 단순히 <마태>와 <레위>라는 이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히 흡사합니다. 따라서 마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짐작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마태>와 <레위>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주로 자기 조상님들 이름 중에서 따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아 이 사람이 어느 집안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의 또 다른 이름이 <레위>였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그는 레위지파 (レビ族)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사장 지파입니다.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모세와 아론 형제는 모두 레위지파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이후 제사장은 대대로 레위지파가 맡아서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가 레위였다고 한다면, 같은 레위 지파인 대제사장을 알았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 번째 장면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몇몇 여성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입니까. 말하자면 사형수 바로 앞입니다. 거기는 분명 통제구역이었을 것입니다. 곳곳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욕했던 사람들도 멀리서 소리를 쳤을 뿐이고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할 수 있었을까 하면, 저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가 레위 지파였기 때문에 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한다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다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게 돈을 바치는 일을 해왔습니다. 말하자면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 로마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로마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비록 고위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부분 지위를 인정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그는 제사장 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로마 관리들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대단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다른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마태가 본인이 직접 듣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로마 관료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오랫동안 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요한복음을 요한이 쓰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썼다는 주장입니다.

제가 만약에 어떤 책을 썼어요. 아니, 명함을 찍었다고 해보죠. 그런데 거기에 명함에 보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홍성필 목사> 이렇게 적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뭐, 여러분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우시니까, 아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만약에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메일을 받았는데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누구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뭐, 드러내고 말은 안 하더라도 속으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또, 아 그 성경은 옛날에 적힌 책이니까 그렇겠지. 옛날 스타일 아니겠어?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이 요한복음 하나뿐인가요. 성경의 다른 책을 보더라도 자기를 가리켜서 그와 같이 표현한 책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제게는 이 점이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즉 이 말씀을 본다면, 여기는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가 등장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근거로 해서 증언한 사람이 있고 그 내용을 정리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주장이 맞다고 하면, 그리고 증언한 사람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라고 한다면, 마태는 그 누군가에게 이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정리를 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제 가설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 정리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는 증언을 정리하되 거기서 내 이름은 빼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리한 인물은 그의 요청대로 그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드러내야 할 분,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자기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이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존재감이 불분명하지 않은, 대단히 확실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는 기록자가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분명히 그 외의 이유가 있어서 일 것입니다.


기록자는 증언자에 대해서 악의를 가지고 이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에게는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왕 가설을 제기하는 김에 조금 더 보태볼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 기억하시죠?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만약에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였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지만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있는 <또 다른 제자 둘> 중의 하나, 제자 A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제자 B는 누구일까요. 제3의 인물이었다면 굳이 이름을 감출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제자 B가 바로 제자 A인 마태로부터 얻은 증언과 기록을 정리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남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여기서 제자 A를 마태라고 한다면 제자 B도 분명 이 중에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세 명입니다.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저는 이 중에서 셀롯 시몬을 지목합니다.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혁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단결하여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사도가 되었다면, 그런 그와 가장 맞지 않았던 사람, 물과 기름이었던 사람은 바로 마태였을 것입니다. 자주 독립을 외치는 시몬에게 있었어 세리 마태는 자신의 민족을 팔아서 지배자인 로마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회개를 하고 세리에서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증오심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44절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이 말씀이 당시 시몬에게 꽂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회심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마태의 증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니면 마태가 먼저 시몬에게 자신의 증언을 기록해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릅니다. 시몬이 급진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당대에 있어서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시몬도 사도였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세리였던 마태는 대제사장 쪽과 로마 관료 쪽 양쪽의 정보를 모두 접할 수 있었기에, 마태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 가설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나나인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 등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와중에 페르시아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에 대한 전승을 보면 에티오피아 외에 시몬과 같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정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그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세리 마태와 혁명당원 시몬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복음서를 기록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 이를 증언한 마태가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는데 어찌 내 이름을 넣을 수가 있을까 해서 자기 이름도 지운 채 그저 그와 함께 <다른 제자 둘>이라고 기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 쓰여진 것이 요한복음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복음서의 귀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시면, 그렇다면 요한복음이라고 하는 책 제목은 어떻게 되느냐. 요한이 썼기 때문에 요한복음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바울 서신이나 다른 서신들과 같이 저자가 명확하게 드러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 요한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도 모두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승에 불과하며 이 저자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요한복음이라고 되어 있을 책을 이제 마태복음으로 바꾸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이름은 그냥 책 이름이지요.

그리고 또 혹시, 어? 홍 목사 이거 이상한 주장을 하는데, 혹시 이단 아니야? 라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의 저자를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이단이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우리 믿음에 있어서 복음주의, 개혁주의적인 견지에서 여러 학설을 주장하고 또한 이를 검증해가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 말씀을 들어오신 분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이름이 요한이면 어떻고, 마태면 어떤가. 저자 이름이 나와 있으면 어떻고 나와있지 않으면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임원이나 직분을 받을 때가 되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눈에 띄지는 않고 힘들기만 한 일이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収穫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ご自分の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い。」

그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자기 이름을 감추고 주님의 일을 감당한 그에게,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기쁨으로 삼아야겠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을 가지고 기쁨을 삼아야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걸고 알리려 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우리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님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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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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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회 세 과부 이야기
20207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신약 260페이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3節
“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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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과부 이야기” 三人のやもめの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 본다면 아직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상당부분 개선되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성의 권리가 그나마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참정권, 그러니까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여성의 참정권,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세계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00년도 들어서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100년 정도밖에 안 된 제도인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부터 2000년 전이었다면 오죽했겠습니까.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상당부분 제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혼인을 한 여성은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남성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존중될 수도 있고, 결혼을 한다면 그 남편을 힘입어서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부, 즉 혼인을 하였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십중팔구 나이가 아직 어린 아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남편이 있어야 직업을 통해서 수익을 얻어 양육을 할 수 있을 텐데, 여성의 몸으로서 당시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러니 집안 상황이 넉넉할 수가 없었지요.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세 명의 과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여기서는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약자의 대표적인 존재는 바로 남편이 없고 아이만 있는 과부, 그리고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인 고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셨습니다만, 이는 남녀노소를 떠나 다름아닌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세 명의 과부, 다시 말해서 세 명의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성경 말씀을 살펴봄으로 인해서, 이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살펴볼 첫 번째 과부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 8절~16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구약성경 545페이지입니다. 조금 길지만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8절~16절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すると、彼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さあ、シドンのツァレファテに行き、そこに住め。見よ。わたしはそこの一人のやもめに命じて、あなたを養うようにしている。」
彼はツァレファテへ出て行った。その町の門に着くと、ちょうどそこに、薪を拾い集めている一人のやもめがいた。そこで、エリヤは彼女 に声をかけて言った。「水差しにほんの少しの水を持って来て、私に飲ませてください。」
彼女が取りに行こうとすると、エリヤは彼女を呼んで言った。「一口のパンも持って来てください。」
彼女は答えた。「あなたの神、主は生きておられます。私には焼いたパンはありません。ただ、かめの中に一握 りの粉と、壺の中にほんの少しの油があるだけです。ご覧 のとおり、二、三本の薪を集め、帰って行って、私と息子のためにそれを調理し、それを食べて死のうとしているのです。」
エリヤは彼女 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ません。行って、あなたが言ったようにしなさい。しかし、まず私のためにそれで小さなパン菓子を作り、私のところに持って来 なさい。その後で、あなたとあなたの子どものために作りなさい。
イスラエルの神、主が、こう言われるからです。『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る日まで、そのかめの粉は尽きず、その壺の油はなくならない。』」
彼女は行って、エリヤのことばのとおりにした。彼女と彼、および彼女の家族も、長い間それを食べた。
エリヤを通して言われた主のことばのとおり、かめの粉は尽きず、壺の油はなくならなかった。

엘리야라고 하면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선지자라 하더라도 엘리야만큼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한 선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거기는 사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지역이었습니다. 엘리야로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지역으로 보내신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외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당시 그 지역은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먹을 것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보아서 제일 저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약자인 과부라고 하면 이는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엘리야가 그 지역에 갔더니 어떤 과부가 나뭇가지들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를 보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물 한 잔과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지요.

평소라면 대단한 부탁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거기다가 이 사람은 과부였지요. 이 과부가 하는 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2절을 다시 볼까요?


열왕기상 17장 12절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彼女は答えた。「あなたの神、主は生きておられます。私には焼いたパンはありません。ただ、かめの中に一握 りの粉と、壺の中にほんの少しの油があるだけです。ご覧 のとおり、二、三本の薪を集め、帰って行って、私と息子のためにそれを調理し、それを食べて死のうとしているのです。」

그 사람은 지금 가난해서 어려워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끼 식사가 있는데, 이것을 먹고 난 다음에는 이제 더 이상 식량을 얻을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볼품없는 식량이라 하더라도 배를 한 번 채워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를 보고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다음 구절, 13절~14절을 살펴봅니다.


열왕기상 17장 13절~14절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エリヤは彼女 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ません。行って、あなたが言ったようにしなさい。しかし、まず私のためにそれで小さなパン菓子を作り、私のところに持って来 なさい。その後で、あなたとあなたの子どものために作りなさい。
イスラエルの神、主が、こう言われるからです。『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る日まで、そのかめの粉は尽きず、その壺の油はなくならない。』」

이를 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과부가 지금 먹을 것이 떨어져서 컵라면 하나밖에 없어요. 이제 이걸 아들과 나눠먹고 죽어버릴 생각입니다. 자신은 이미 아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온 누군지도 모르는 사림이, 지금 그 마지막 식사,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고 죽으려고 했던, 말하자면 컵라면 하나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렇게만 한다면 이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너희 집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컵라면 하나 남았는데, 그걸 하나 내 놓으래요. 저 같으면요? 아니,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무슨 헛소리냐고, 저리 꺼지라고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과부는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정말 그 마지막 남은 식량을 엘리야를 위해서 바쳤다는 것이에요. 그러자 정말로 엘리야가 했던 말처럼 식량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음에는 두 번째 과부입니다. 이는 열왕기하 4장 1절~7절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구약성경 565페이지입니다.

열왕기하 4장 1절~7절
1.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預言者の仲間の妻の一人がエリシャに叫 んで言った。「あなたのしもべである私の夫が死にました。ご存じのように、あなたのしもべは主を恐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債権者が来 て、私の二人の子どもを自分の奴隷にしようとしています。」
エリシャは彼女に言った。「何をしてあげようか。私に話しなさい。あなたには、家の中に何があるのか。」彼女 は答えた。「はしためには、家の中に何もありません。ただ、油の壺一つしかありません。」

すると、彼は言った。「外に行って、近所の皆から、器を借りて来なさい。空の器を。それも、一つや二つではいけません。
家に入ったら、あなたと子どもたちの背後の戸を閉めなさい。そしてすべての器に油を注ぎ入れなさい。いっぱいになったものは、わきに置きなさい。」
そこで、彼女は彼のもとから去って行き、彼女と子どもたちが入った背後の戸を閉めた。そして、子どもたちが次々と自分のところに持って来 る器に油を注ぎ入れた。
器がどれもいっぱいになったので、彼女は子どもの一人に言った。「もっと器を持って来なさい。」その子どもが彼女 に、「もう器はありません」と言うと、油は止まった。
彼女が神の人に知らせに行くと、彼は言った。「行ってその油を売り、あなたの負債を払いなさい。その残りで、あなたと子どもたちは暮らしていけます。」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이름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친족관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와의 두 관계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지자의 제자가 곧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습니다만, 이 엘리야는 얼마나 대단한 선지자였냐 하면,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나 왕이라 하더라도 이 땅에서 한 번 죽고 난 다음에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만, 구약에 보면 에녹과 엘리야만이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다음에는 이 엘리사가 역시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적 중 하나가 바로 이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두 번째 등장인물인 과부가 엘리사에게 호소를 합니다. 남편이 있었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가정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빚을 졌는지, 아니면 죽고 난 다음에 빚을 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를 갚으라고 사람들이 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갚을 돈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자기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남편이 죽은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거기다가 두 아들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완전히 절망 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희 집에 뭐가 있느냐. 그러자 기름 한 그릇이 있다고 하지요.

지금 이 이야기의 흐름에 본다면서 그 기름으로 나한테 떡을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할 만도 한데, 엘리사는 조금 특이한 말을 합니다. 지금 당장 이웃들한테 가서 빈 그릇을 빌리라고 합니다. 뭐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라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다가 기름을 부어보래요. 그래서 하나하나 빈 그릇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을 부어갔더니, 어떻게 됐냐 하면 그 빌려온 그릇 모두에 기름이 다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기쁨에 찬 과부가 엘리사에게 이 일을 말하자, 엘리사는 담담하게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그리고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 과부입니다. 이번에는 신약으로 한 번 넘어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4절입니다.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目を上げて、金持ちたちが献金箱に献金を投げ入れているのを見ておられた。
そして、ある貧しいやもめが、そこにレプタ銅貨を二枚投げ入れるのを見て、
こう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貧しいやもめは、だれよりも多くを投げ入れました。
あの人たちはみな、あり余る中から献金として投げ入れたのに、この人は乏しい中から、持っていた生きる手立てのすべてを投げ入れたのですから。」

이 유명한 두 렙돈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누가복음 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대체적으로 교회에서 이 구절을 말씀 드리면, 들으시는 분들이 좀 긴장을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인상을 찌푸리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그게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과부가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활비를 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돈이 넉넉하건 궁핍하건 간에 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종교 지도자들이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의외로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는 모든 화폐가 동전이었습니다. 지폐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 소리가 납니다. 많이 넣게 되면 와르르 하고 소리가 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리만 들으면 누가 돈을 많이 넣었고 누가 적게 넣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화폐 동전을 일부러 적은 액수로 바꾸어서, 다시 말해서 같은 액수라도 동전 개수를 늘려서 붓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2천년 전 교회에서는 부자들이 헌금을 할 때 막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주변에서는 와, 누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해? 하고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눈치가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적게 헌금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난하다고 흉 볼 거야. 놀릴지도 몰라. 하나님은 저렇게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나처럼 적게 헌금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거야.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어려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두 렙돈(レプタ)이라고 하는 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이 두 렙돈이 그러면 어느 정도 되는 돈이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당시 화폐 중에서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단위라고 한다면, 데나리온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 데나리온은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 렙돈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데나리온의 128분의 1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이 되겠지요.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을 넉넉잡아 편의상 100,000원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얼마가 되냐 하면 100,000원 나누기 64를 하면 (156엔) 반올림 해서 1,563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1563원이라고 하는 금액이 이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시 과부의 생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적게 내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많게 내든 적게 내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살펴본 세 명의 과부 이야기. 어떠십니까.

첫 번째 과부는 마지막 남은 식량, 그야말로 컵라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들과 나눠먹고 죽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 과부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막막하고 죽음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절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순간에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그 작은 떡 하나를 바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 보잘 것 없는 세상적인 떡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여기서의 재물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 말하자면 육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육적인 방법은 동시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첫 번째 과부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육적인 생각, 작은 떡 하나를 움켜쥐고 그것을 먹고 아들과 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육적인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잡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 선택 앞에서 첫 번째 과부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소망으로 본인과 아들,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이 임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과부는 남편도 잃고 이제 두 아들마저도 종으로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돈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의외의 명을 내립니다. 이웃집에서 빈 그릇들을 빌려오라고 시켰습니다. 여러 분, 이게 그리 쉬울 것 같으십니까.

당시는 지금보다도 서로의 사정을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도시는 좀 그렇겠지만, 지방이나 시골에서 오래 살게 되면 서로의 형편들은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다 알게 된다고 하지요. 아마도 분명 이 과부가 사는 동네에서 이 과부의 형편, 대단히 가난하다는 사실은 그 주변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매일 같이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이제 끝내는 두 아들을 노예로 끌고 가겠다고 난리를 쳐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웃한테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들한테 그릇을 빌리러 가면, 이웃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구, 담을 기름도 식량도 없으면서 그릇을 빌려다가 뭘 하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놀리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이 과부의 자존심은 대단히 상했을 것입니다.

당시 기름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 집에는 빈 그릇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빈 그릇을 빌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하는 말이 독특합니다. 그 빌려온 빈 그릇에 네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부으면 모든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찬다고 합니다.

참 믿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과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하라고 했으니까 안 할 수는 없겠지요. 이제 이 과부는 이웃한테서 크고 작은 그릇들을 빌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과부가 그릇을 얼마나 빌려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집안 가득 찰 정도로 빌려왔는지, 아니면 두 세 개만 빌려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다 붓고 나니까 더 이상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과부가 빈 그릇을 빌려 왔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것이요, 엘리사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오지 않았다면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리고 또한 빈 그릇을 가져왔다고 해도 많이 가져왔을 수도 있고 적게 가져왔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빌려온 그릇의 개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과부가 가졌던 소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가져왔을 텐데 그 믿음에 소망이 많았다면, 그 빈 그릇에 모두 기름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은 생각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집안 가득히 그릇을 빌려왔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망이 없었다면 그저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듣는 시늉만 해서 그릇을 서너 개 가져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기름을 따르고 있는데, 그릇이 막 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놀라서 그릇을 더 가져오라고 했는데, 추가로 더 빌려올 시간이 없습니다. 빌려온 그릇이 이게 다라고 하자 거기서 기름이 딱 멈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약에 빈 그릇을 많이 빌려왔었다면, 다시 말해서 애초에 하나님께 큰 소망을 두었더라면 그 과부는 넉넉히 찬 기름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 작은 소망만을 두고 그릇 서너 개만 빌려왔었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부, 그녀는 생활비가 두 렙돈 밖에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1560원밖에 안 들어있어요.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운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전 두 개를 넣으면 주변에서 놀릴지도 모릅니다. 멸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바칠 힘도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시고 이 과부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에이, 무슨 칭찬만 하고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는 안 적혀 있잖아?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셨는데 아무런 축복이 없으셨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일만 골라서 하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돈만 많이 바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으십니까. 예전에 제가 다니던 어떤 교회에서 보면, 자기가 헌금 많이 한다고 목에 힘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1장 11절~13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 、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もう、むなしいささげ物を携えて来るな。香の煙、それはわたしの忌み嫌 うもの。新月の祭り、安息日、会合の召集──わたしは、不義と、きよめの集会に耐えられない。

우리는 헛된 재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정성을 담아서,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재물이면 재물로 섬기고, 가진 것이 시간이면 시간으로 섬기고, 그리고 봉사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에 바친 작은 떡이요, 이웃한테서 빌려온 빈 그릇들이요, 하나님께 바친 두 렙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3節

“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이 세상의 모든 절망은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아무리 캄캄한 절망이라 하더라도 놀라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육적인 소망이 아닌 영적인 소망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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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0회 믿음의 중심
2020년 6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 신약 56페이지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マルコの福音書2章27節~28節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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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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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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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중심” 信仰の中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조금 더 앞부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27절까지의 말씀인데, 우선 이 전체를 한 번 살펴보고, 그 다음에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2장 23절~28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28절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道を進みながら穂を摘み始めた。
すると、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に言った。「ご覧なさい。なぜ彼ら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食べ物がなくて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大祭司エブヤタルのころ、どのようにして、ダビデが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の人が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食べて、一緒 にいた人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실 때에, 제자들이 남의 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모습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穂を摘んで、手でもみながら食べていた。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만,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으면 밀가루가 나오는데, 옛날에는 그걸 두 손으로 비벼서 먹으면 꽤 먹을 만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기가 자기들 소유의 밭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으니, 말하자면 무단으로 남의 밭에 나 있는 이삭을 먹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그랬을까요. 뭐, 당연히 배가 고파서 그랬겠지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そのころ、イエスは安息日に麦畑を通られた。弟子たちは空腹だったので、穂を摘んで食べ始めた。

글쎄요. 제자들은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예수님은 도무지 밥을 먹자는 말씀을 안 하세요. 그런데 마침 밀밭 사이로 자나가게 되었어요. 얼씨구나 잘됐다 싶어서 제자들은 그 이삭을 비벼서 먹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다.

“어허, 이 보시오. 거 자기 밭도 아닌 남의 밭에서 멋대로 밀을 먹으면 어떡해!”

요즘 우리들 생각에는 당연히 그렇게 주의를 주었을 것도 같습니다만, 율법상으로 보면 이는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4절~2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3장 24절~25절
“24.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隣人のぶどう畑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思う存分、満ち足りるまでぶどうを食べてもよいが、あなたのかごに入れてはならない。
隣人の麦畑の中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穂を手で摘んでもよい。しかし、隣人の麦畑で鎌を使ってはならない。

저는 그런 세대가 아닙니다만, 옛날에 한국에 보면 무슨 수박 서리 같은 것들을 하고 그랬다고 하지요. 옛날에는 그게 추억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지금은 절대로 안 됩니다. 엄연한 절도이기 때문이지요. 큰 일 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율법, 모세오경, 레위기, 신명기, 뭐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다는 느낌이 있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보면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이 신명기 23장 24절~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이웃이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고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포도원이나 곡식밭에 들어가는 것은 불법침입이요, 뿐만 아니라 포도를 먹거나 이삭을 따는 것은 절도입니다. 이를 벌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율법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거기 들어가서 혼자 먹는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들어갔겠습니까. 배가 고파서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남의 집 포도원이나 곡식밭에 들어갔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혼자 실컷 먹었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포도밭 같은 곳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에 대한 용도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냥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를 포도주로도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보존식품으로 건포도로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포도원 규모는 상당히 컸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너무나도 배가 고플 때에, 포도를 몇 송이나 드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이 먹어봤자, 글쎄요, 1송이? 2송이? 저도 아무리 배가 고팠다 하더라도 솔직히 3송이 이상을 먹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 많은 포도 중에서 그 정도는 그냥 줘라, 물론 그릇에 담거나 낫으로 베어가지고 모조리 가져가거나 하는 것은 안 되지만, 지금 배고파 죽겠다는데 자존심도 버리고 남의 밭에서 먹으려는 사람을 막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넘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9절~10절
9.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がたが自分の土地の収穫を刈り入れるときは、畑の隅々まで刈り尽くしてはならない。収穫した後の落ち穂(ぼ)を拾い集めてはならない。
また、あなたのぶどう畑の実を取り尽く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ぶどう畑に落 ちた実を拾い集めてはならない。それらを貧しい人と寄留者のために残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곡식을 거둘 때에는 싹 쓸어버리지 말고 좀 남겨두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추수를 할 때에도 이삭 단이나 포도들을 들고 가거나 마차로 옮길 때에 보면 좀 흘릴 경우도 있잖아요? 그거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사람이 그걸 줍도록 하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웠던 사람이 누구예요. 가족이나 재산을 모두 다 잃고 자기 시어머니와 베들레헴에 왔던 룻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율법이 없었다면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굶어서 죽었을 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다윗 왕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남의 밭에서 왜 함부로 밀을 먹냐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2장 24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すると、パリサイ人たちがイエスに言った。「ご覧なさい。なぜ彼ら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일곱째 날을 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11절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と海、またそれら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んだからである。それゆえ、主は安息日を祝福し、これを聖なるものとした。

이 안식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규정을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 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아니, 뭐, 쉬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무섭게 하시나. 무슨 뭐 월차나 연차를 쓰지 않으면 죽일지니라 뭐 그렇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내용에 담긴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말씀과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安息日を守っ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とおりに。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 むことができる。

앞서 출애굽기 내용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나서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있어서 주인이나 종이 있을 수 없겠지요. 모두가 공평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금 율법을 말할 때에는 이제 40년이라고 하는 광야생활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도 있었을 것이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종을 두고 생활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이제 주인, 말하자면 사용자를 향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어기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회사 사장님들한테 말씀하시기를,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쉬게 하지 않으면 죽여버려라.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지금 사장과 직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종은 당시 주인의 재산, 그러니까 물건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집안에 있는 모든 일을 종들이 하고, 농사도 다 종들이 하는데, 이 정도로 무섭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주인들이 따랐겠습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엄하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무슨 하나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백성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약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알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뭐라고 하냐 하면, 왜 당신들 제자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아니, 배가 고파서 이삭을 좀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해서 뭐가 큰 죄입니까. 더구나 율법에서도 남의 밭에서 먹어도 된다면서요.

여기에는 바리새인들에게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을 따는 행위는 말하자면 추수에 해당되고, 손으로 비비는 행위는 탈곡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안식일에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어려운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삭을 따는 행위는 추수이고 손으로 비비는 행위는 탈곡에 해당한다는 내용,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답은 율법에 그와 같은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당당하게 예수님에게 따지고 들었을까요.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율법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야말로 모세오경에 적힌 율법, 둘째는 자기 조상들이 만들었던 규칙.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에 의하면 애초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613가지라고 하는데,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이것저것 붙여가다 보니 어떻게 되었냐 하면 2134가지가 되었습니다. 3배 이상이나 많아진 것이지요.

물론 애초에 이런 것을 만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을 잘 좀 지켜보려고 시작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하나 둘 추가를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이나 23장 등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오해, 잘못된 율법해석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가복음 2장 25절~26절을 봅니다.

마가복음 2장 25절~26절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イエスは言わ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食べ物がなくて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大祭司エブヤタルのころ、どのようにして、ダビデが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の人が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食べて、一緒 にいた人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이 내용은 사무엘상 21장 1절~6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시간관계상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 왕에게 쫓겨서 몇몇 소년들과 함께 도망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의 전에 있는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찾아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성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떡밖에 없었는데, 이는 율법적으로는 일반인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배고파하는 다윗 일행에게 이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채 하는 것이 아닌, 율법을 어긴다 하더라도 사람을 위한 행함을 한다는 것, 이는 얼핏 보기에는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그것이 율법의 참뜻, 하나님의 참뜻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무엘상 말씀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한 작은 교회에 다닐 때였습니다만, 평소에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식사시간이 없어요. 그날 주일은 왠지 모르지만 아침부터 참 배가 고팠어요.

그런데 마침 그 날이 성찬식이었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작은 과자와 포도주스로 성찬식을 드리는데, 거기는 이렇게 큰 빵을 앞쪽에 놓고, 성도님들이 줄을 서서 강대상 앞에까지 가면 거기서 큰 빵 중에서 자기가 뜯어서 먹고, 그리고 옆에 있는 포도주 잔을 마시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느낀 것이지만, 그 빵이 참 맛있어요. 물론 뭐 어디서 사온 것이긴 한데 아무튼 평소부터 참 맛있다고 생각했던 빵이었는데, 하물며 그 날은 제가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으니까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그래서 성찬식 때도 좀 큼지막하게 뜯어서 먹었습니다만, 그래 봤자 한 조각이잖아요. 여전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염치고 체면이고 다 내려놓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거기 집사님한테 가서, 제가 배가 고파서 그런데 아까 그 성찬식 때 먹었던 빵이 남았으면 좀 먹어도 되겠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 아, 그 빵은 다른 사람은 못 먹고 목사님과 전도사님만 드신대요. 그래서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서, 예? 하고 다시 물었더니만, 그 분이 다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빵은 성찬식 때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목사님과 전도사님만 드실 수 있는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좀 부족해서, 흠, 뭐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나왔죠. 그래서 나가서 뭘 사먹었는지, 아니면 그냥 집에 갔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만, 아무튼 그 때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 성경을 좀 읽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아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제사장만 먹는다고 하는 내용은 레위기나 민수기에 보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구약이지요. 그렇다면 성찬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떡과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좀 더 덧붙인다면 예를 들어서 가톨릭에서는 성찬식을 다 한 후에 남은 것을 사제가 먹고는 하는데, 개신교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화체설이다 영적임재설이다 하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 있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빵은 빵일 뿐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것이지 그 빵 자체가 예수님의 몸이거나 그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진짜 보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 교회에서 성찬식에 썼던 빵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구약, 신약, 구교, 신교 뭐 이런 것을 이것저것 안 가리고 완전히 뒤섞어놓은 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마치 대단한 율법이라도 지키는 것처럼 하면서, 정작 배가 고픈 굶주린 불쌍한 사람한테는 안 주고 말이에요. 벌써 한 10, 7, 8년 전의 일이긴 합니다만, 아이, 참 그거 지금 생각해도 좀 화가 납니다.


자, 그렇다면 좀 진정을 하고, 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문제였고, 당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정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바리새인들이 멋대로 말씀을 해석해서 만들어낸 2000개가 넘는 율법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안식일을 어기면 죽여야 한다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데,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의외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의외의 인물은 바로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저들이 끌고 온 예수님을 직접 조사를 해본 결과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잠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5절~17절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ところで、総督は祭りのたびに、群衆のため彼らが望む囚人を一人釈放することにしていた。
そのころ、バラバ・イエスという、名の知れた囚人が捕らえられていた。
それで、人々が集まったとき、ピラトは言った。「おまえたちはだれ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バラバ・イエスか、それともキリストと呼ばれているイエスか。」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명절에는 총독이 죄수 중 한 사람을 사면해주곤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는 총독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오늘 이 장면을 보면 빌라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지를 줍니다.

자, 바라바와 예수, 둘 중 누구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이 바라바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마태복음에는 단순히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합니다만, 다른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そこに、バラバという者がいて、暴動で人殺しをした暴徒たちとともに牢につながれていた。


누가복음 23장 19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バラバは、都に起こった暴動と人殺しのかどで、牢に入れられていた者であった。

요한복음 18장 40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すると、彼らは再び大声をあげて、「その人ではなく、バラバを」と言った。バラバは強盗であった。

이렇게 보면 바라바는 단순한 죄인이 아닌, 강도에 살인, 거기에 민란까지도 저질렀던, 다시 말해서 지독한 흉악범이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빌라도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그래도 바라바와 예수라고 하는 두 사람을 백성에게 선택지로 준다면, 틀림없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을 석방시켜달라고 하겠지. 설마 자기 동족을 죽인 흉악범 바라바를 석방하라고는 할 리가 없지 않는가……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27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ピラトは、彼らがねたみからイエスを引き渡した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ある。

성경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아온 이유를 <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가 아닙니다.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왔다는 사실,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ピラトは、祭司長たちがねたみからイエスを引き渡した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ある。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하지요. 그들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내세우고 율법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들을 비판하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 말씀만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합니다.

이제 백성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아요. 다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립니다. 이대로 있다가 자신들의 체면은 완전히 구겨지고, 그 때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권력들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른다면,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면,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까지도 저지를지 모릅니다.

아닌 것 같으신가요? 뭐, 요즘 보면 교파에 따라서는 자신들도 개신교라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서도 본래 안식일이 토요일이라고 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죠.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고까지 하셨으니 구약대로라면 지켜야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구약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태워서 바치라고 하셨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하냐는 거예요. 그 사람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과거에는 아무리 많은 제사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제사예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완벽한 제사를 드려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면서 구약대로 행한다면 이는 마치 여전히 양을 바치고 염소를 바치면서 불완전한 제사를 고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내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으십니까. 예를 들어서 사업장을 운영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믿음이 있다면 일요일에 사업장 문을 닫아야 해요? 말아야 해요?

예, 대체적으로 보면 사업장을 닫으시더라고요. 물론 그 시간이 예배 시간과 겹치는 경우도 그렇지만 겹치지 않는 경우도, 아, 주일이라고 해서 사업장 문을 닫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성도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도저히 일요일에 문을 닫을 수가 없어요. 쉬운 예로 보면 편의점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거기는 회사와의 계약으로 365일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믿음이 적은 건가요? 그 분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편의점을 그만 둬야 하나요? 아니면 교회에 나가는 시간에는 가게 문을 열어두되, 자기는 교회에 나가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쓰면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아르바이트생은 교회에 못 나가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아니면 꼭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은 쉴 수 있는데 그 사업 특성상 일요일은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분은 어떠십니까. 교회가 커져서 이런 분들이 많아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번, 어떻게 해서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도록 한다.
2번, 이 분들을 위해서 일요일만이 아니라 다른 요일에도 예배를 드린다.


한국에서는 성수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일예배라는 말은 우리 교회에서도 쓰지요. 하지만 저는 꼭 주일이라는 말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일본에서는 일요예배라는 말을 흔히 쓰고, 서양에서도 Sunday worship 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이 토요일이지만 일요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하여 그 날 모이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신다면, 주일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주님의 날, 예수님의 날,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안식일인 토요일이 예수님께서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토요일에 주인이신 건가요? 아니면 일요일에 주인이신 건가요? 아니면 둘 다인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주인 되신 건가요? 아닙니다. 하루하루 1년 365일, 윤달이 있는 해는 366일 모두가 예수님께서 주인 되신 날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매일 쉬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고, 매일매일 쉬기만 하시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요즘에는 <과로사>라고 하는 말이 흔히 쓰이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쉬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주로 일요일에 드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일요일에 쉬고, 마음을 하나로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요일에 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드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우리 이웃 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일요일에 교회에 못 나오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른 요일에라도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은혜가 넘쳐나겠습니까. 제게 말씀해주시면 함께 갈 수도 있고, 목사님이 안 계시면 동영상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아니, 성경을 읽고 기도만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그 날이 일요일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낸 율법으로 우리 이웃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강도 살인마인 바라바를 풀어놓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믿음의 중심, 마음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갖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우리들을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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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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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9회 믿음의 이유
2020년 6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27절 신약 153페이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ヨハネの福音書6章26節~27節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それは、人の子が与える食べ物です。この人の子に、神である父が証印を 押さ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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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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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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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이유” 信仰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조금 깊게 들어가면 지리적인 위치나 기타 사항에 대해서도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가급적 간략하게 필요한 핵심내용만 추려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전날에 말씀을 전하시고는 거기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가버나움으로 가시게 되는데,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간신히 배를 타고 와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기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그래, 너희가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찾으니, 너희 믿음이 크도다……뭐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하실 만도 한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칭찬은커녕 그 무리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 꾸짖는 이유가 바로 오늘 말씀 중에 요한복음 6장 26절입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


즉,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좀 이상합니다. 아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서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이게 그렇게 혼이 나야 할만한 일인가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 외에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병자를 많이 고치셨습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도 고치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병에 걸리지 않나요?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죽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역시 수명이 다 하면 모두가 다 죽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가 있게 되었나요? 폭풍이 불어올 때 이를 잔잔하게 하셨으면, 이제 두 번 다시 갈릴리에는 폭풍이 치지 않나요?

아닙니다.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는 그 누구도 순식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도 없었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에는 폭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천국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오시면, 우리 마음이 바로 천국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신 기적은 말하자면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토록 완전하게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던 그 무리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원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떡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음?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생각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화수분과 같은 打ち出の小槌도구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 많은 무리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성인 남성만 5천명이었다고 하니, 여성과 아이들을 합하면 최소한 만 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 있지요? 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이 복음서는 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들인데 그 내용을 보면 몇몇 내용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 책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에 대한 내용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오병이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에 대한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떡이나 생선을 꽤 큼지막하게 설정을 해놓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땠는지 성경을 한 번 보시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자세히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 8절~9절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여기에 보면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이 가지고 오거나 한 것이 아니에요. 그 무리 중 마침 음식, 말하자면 도시락 정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내용물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었던 떡은 밀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보리떡이라고 합니다. 보리는 밀가루보다도 값이 쌌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쌀밥이 아니라 꽁보리밥 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싼 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땠을까요. 떡 하나를 보더라도 값싼 떡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가 설마 고등어나 잉어만한 고기였겠습니까. 그것도 지금 이 도시락 주인이 누구입니까. 당시에는 사람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인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는 큰 생선이 아니라, 기껏해야 멸치? 정도 되는 작은 생선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꽁보리밥 다섯 덩이와 멸치 두 마리. 그러나 이 볼품없는 식량으로 예수님께서는 적게 잡아 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에 직접 계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배가 고프고, 내가 가지고 온 식량은 다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만 명이 넘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어린 애가 가지고 있는 작은 도시락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서 식량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비록 보리떡과 멸치 정도 되는 식사였지만, 지금 배가 고파서 눈이 돌아갈 마당인데 그게 문제인가요? 아주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일 같이 집에서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에도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4복음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처럼 놀라운 식사를 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도 없고, 예수님께 정말 잘 먹었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출애굽기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이제 홍해를 건너 광야를 행진합니다. 하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식량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과 만나와 때로는 메추라기까지도 주시면서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마다, 오,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먹여 주시오니 감사 드립니다……라는 말을 했었습니까? 아니요.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왜 안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사라지면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능력이 참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대단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요. 뭐를 사달라, 뭐를 해달라, 이렇게 자기한테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그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옵니다.

이 능력 있는 사람은 충분히 들어줄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들어주었어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이제 나중에는 소원을 들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안 들어주면 서운해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자기가 필요하지 않으면 안 만나줘요. 어디 그뿐인가요. 심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성 친구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가 되면 찾아와서 이걸 해달라 저걸 해 달라 하고, 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 해주면 서운해하고 불평을 하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감사가 없으면 사랑 또한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버린 적이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사랑이 사라집니다. 해주면 당연하고 안 해주면 불평불만이에요.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아내와 남편 간에도 서로에게 감사가 있으면 불만이 없습니다. 감사할 만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그 때부터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 하루하루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불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볼까요?

여러분들도 돈이 필요하시지요? 예,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쯤 있으면 충분하시겠습니까. 1억엔? 2억엔?

좋습니다. 제가 좀 쓰겠습니다. 100억엔 정도면 되겠습니까? 요즘 보면 코로나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지원금을 준다고는 하는데, 이 지원금이 고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여러분께 100억 엔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사기가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미안하지만 이 돈을 받으러 동경에 있는 일본은행까지 직접 와달라는 거예요. 그럼 안 가겠어요? 아니, 지금 10만엔 20만엔 정도로도 감지덕지 하고 있는 마당에 100억 엔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동경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이라 하더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돈을 받으러 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내면 안 된대요.

자, 기한은 없어요. 언제라도 좋으니까 동경에 가기만 하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 돈만 생기면 코로나가 문제예요? 내 평생 동안 편안하게 살고도 남을만한 돈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자식, 내 손주까지도 돈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지요. 동경으로 가는 그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울 것입니다. 마음에는 감사가 넘쳐나겠지요.

자, 이제 다카사키에서 신칸센을 타고 갑니다. 그런데 사이타마까지 가다가 신칸센이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도중에 내려서 근처 역까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자, 이제 역에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에 새치기를 해요.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지나가는 어떤 어려운 사람이 천 엔만 도와달래요. 여러분,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화를 안 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볼품없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100억 엔을 내고 사게 되면 그 물건은 100억 엔의 값어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 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무엇과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바로 예수님의 피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됩니까. 100억이요? 200억이요? 이는 전세계가 아니라 전 우주를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바로 우리 자신의 가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값어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귀한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화가 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가 넘쳐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 바로 이 감사,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시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 주신다고 실망하거나 불평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주시면 감사, 그리고 안 주신다 하더라도 더욱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단순히 떡 몇 개, 물고기 몇 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할 때에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부족할 때에는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이기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50편 14절~15절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感謝のいけにえを神に献げよ。 あなたの誓いをいと高き神に果たせ。
苦難の日に わたしを呼び求めよ。 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出し あなたはわたしをあがめる。」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잠언 4장 8절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それを尊べ。それはあなたを高める。それを抱きしめると、それはあなたに誉れを与える。

우리 모두 감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기쁨과 찬양으로 우리 주님을 높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영화롭게 여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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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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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8회 이슬과 거듭남
2020년 6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신약 62페이지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マルコの福音書6章1節~3節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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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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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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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슬과 거듭남” 露と生まれ変わ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여기 저기를 다니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기도 하고, 천국 복음을 말씀해주시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그리고 폭풍 가운데에서 파도를 잠재우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이제 예수님은 이제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이는 그렇다고 무슨 명절날에 귀성을 하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시는 과정에서 방문을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그곳에 살고 있던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2장 4절에 의하면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말하자면 주민등록신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 식으로 본다면 멀리 떨어진 본적지로 가서 주민신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야곱의 후손 중에서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누가복음 2장을 한 번 살펴볼까요?


누가복음 2장 1절~7절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そのころ、全世界の住民登録をせよという勅令が、皇帝アウグストゥスから出た。
これは、キリニウスがシリアの総督であったときの、最初の住民登録であった。
人々はみな登録のために、それぞれ自分の町に帰って行った。
ヨセフも、ダビデの家に属し、その血筋であったので、ガリラヤの町ナザレから、ユダヤのベツレヘムというダビデの町へ上って行った。
身重になっていた、いいなずけの妻マリアとともに登録するためであった。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은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 대단히 오래된 지역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아내 중 한 명인 라헬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만, 성경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가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리고 이방 지역으로 갔다가 남편도 잃고 아들 둘마저도 잃어버린 나오미. 이제 그 집안은 누가 보더라도 망한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습니다. 둘 있던 며느리 중 하나는 떠나 보내고, 또 한 며느리인 룻도 떠나가라고 하는데 끝까지 안 갑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그래도 여성의 역할이 많이 늘어가고는 있습니다만, 당시는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느니 우리가 한 번은 버렸던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간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보신 여러분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그 곳에서 룻이 보아스(ボアズ)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オベデ)이고, 오벳 아들이 이새(エッサイ)이고, 이새 아들이 바로 다윗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한편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유다 지파 그것도 다윗의 계보에 속한 자손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본적지가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민등록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그 거리가 얼마나 되냐 하면 지도상으로 보면 직선거리로 150킬로가 넘는 거리라고 합니다. 성인 남성이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 정도라고 하니, 단순계산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쉬지 않고 4킬로로 걸었다고 하더라도 40시간 정도, 거의 이틀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틀 동안 걷기만 하나요? 식사도 해야지요, 잠도 자야 합니다. 하루에 부지런히 10시간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40킬로, 그렇다면 대략 4일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인가요? 당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성령님의 능력으로 만삭이었습니다. 출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 여정은 아마도 4일보다 더 길고도 그리고 힘든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마침 도착을 했는데 그 때는 이스라엘 전체가 이 호적 하는 사람을 때문에 이동인구가 많았을 때였을 테니,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는데 여관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마리아한테 진통이 왔어요.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리아도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간신히 출산을 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당연히 본래 집이 아닙니다. 어서 호적을 마치고는 아이를 데리고 또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헤롯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헤롯은 두 살 밑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어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몇 년 동안 지내고 있었더니 헤롯 왕이 죽게 되자 다시 돌아와서 본래 살던 나사렛으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거기서는 태어나시기만 하셨고, 잠시 애굽으로 몇 년 갔다가 어린 나이에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질적인 고향은 나사렛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저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입니다만, 거기서는 아마 1년 정도 있었다가 서울로 올라오고, 거기서 7살 정도까지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와서 동경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살았으니까 뭐 고향은 동경, 특히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11년은 도쿄타워 있는 곳에 살았으니까 거기가 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집도 좁았는데,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셋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님께서 살았던 나사렛,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삼으셨을 정도이니까 꽤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베들레헴은 구약 그것도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대단히 유서 깊은 동네인데 반해, 나사렛은 어떠냐 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마태복음 2장 23절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역사는 그리 깊지 않지만 그래도 꽤 잘 사는 곳이었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ピリポ)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역설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사렛 예수야.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뭐라고 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개역개정에는 되어 있습니다만,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어떠세요? 대단히 직설적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무슨 지역감정이다 뭐다가 아니라, 그 지역은 정말 볼 것이 없는 동네, 한국에도 뭐 그런 곳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말씀 드리면 좀 그렇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전통적으로 깡패들 출신이 많은 동네, 뭐 그런 것으로 유명한 동네라고 한다면, 하필이면 거기서, 예를 서울 뭐 강남이라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대문 안이라면 모를까, 저 지방 시골 촌구석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오겠어? 말하자면 이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 정도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 바로 그 곳이 나사렛이었던 것입니다.


자, 배경설명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난 다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 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안식일에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은 각 교회마다 목사님이 계셔서, 그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성경말씀을 전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는 회당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회당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회당장이 직접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랍비라고 하는 선생을 지명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에 들어가셨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목사님들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많은 은혜를 받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정말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났던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요? 감동을 했나요? 넘치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랬나요?

오늘 본문 중에서 마가복음 6장 2절 후반부부터 3절까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2절 중반부~3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 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 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그 놀라운 말씀을 듣고 감사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이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30세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보아서 당시에는 그 자리에 예수님보다도 연배가 많은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야아, 말씀 정말 놀랍고 은혜로운데……그리고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병자들도 고치고 그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놀라운 그 광경을 보고 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냐 하면,

어? 잠깐, 지금 저 친구 거 마리아의 아들 목수였던 애잖아? 쟤네 집안은 잘 알지. 쟤 동생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잖아. 그리고 누이들도 아직까지 우리 동네에 같이 살잖아. 아니, 그런데 쟤가 조금 못 보던 사이에 어디서 저렇게 성경을 공부했대? 어쭈, 그래도 말하는 것 보니까 공부 좀 꽤 했나 본데? ……아이구 웃기고 있네. ㅎㅎ

뭐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 해도 이미 마음에 장벽을 쌓아 놓아버렸으니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을 했었더라면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수도 있을 텐데,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것을 거부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 어떠십니까. 그냥 뭐, 그런가 보다……정도이신가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적지 않게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지역에 어려서부터 자라고, 그리고 그 동네가 그리 큰 지역도 아니라고 한다면, 서로 집안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 형제 이름까지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참고로 말이 나온 김에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 영원한 처녀라고 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형제를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다, 아니면 이복형제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부인이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 우리의 기도를 도와준다, 하물며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처럼 승천을 했다, 뭐 이런 주장까지 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그야말로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왜 나오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유일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 전혀 모순이 없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맞는 내용이라면 받아 들이지만, 아무리 유명한 사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아무리 말씀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적힌 내용과 다르다면 이는 우리가 받아 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이 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 쉽게 말하자면 신부나 교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권위 있는 신부나 교황이 말을 하면, 그 내용이 성경만큼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영향으로 우리도 모르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리아가 나쁜 여성이었을 리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과정으로 마리아를 통하게 하셨을 정도이니 믿음이나 성품도 좋은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기 전이었으나, 예수님을 출산하신 뒤에는 요셉과 결혼을 하고, 둘 사이에 자녀를 두었다 하더라도 이는 전혀 흠이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야말로 좋은 아내에 좋은 어머니, 이상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다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이름에 보면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중에서 야고보가 성경 야고보서를 쓰고, 유다가 성경 유다서를 쓴 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생들도 비록 육신으로는 자신의 형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믿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 이와 같이 서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봐왔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나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를 하기 전에 이미 잉태를 했었고, 이 사실은 천사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미리 알려주었던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상으로 본다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유전자적으로 본다면 요셉의 피는 섞여 있지 않고, 전무후무하게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성경에서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실을 하늘의 별로 인해서 알아낸 박사들이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32절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そのとき、エルサレムにシメオン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正しい、敬虔な人で、イスラエルが慰めら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た。また、聖霊が彼の上におられた。
そして、主のキリストを見るまでは決して死を見ることはないと、聖霊によって告げられていた。
シメオンが御霊に導かれて宮に入ると、律法の慣習を守るために、両親が幼子イエスを連れて入って来た。
シメオンは幼子を腕に抱き、神をほめたたえて言った。
「主よ。今こそあなたは、おことばどおり、しもべを安らかに去らせてくださいます。
私の目があなたの御救いを見たからです。
あなたが万民の前に備えられた救いを。
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御民イスラエルの栄光を。」

이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저 메시야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아기 예수를 보고 이 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또한 같은 누가복음 2장 후반부에 보면 열두 살 된 예수님께서 율법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 선생들이 예수님의 지혜에 놀랍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한참 전부터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롭고 지혜롭고 놀라워요.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야만 자연스럽겠습니까.

와아, 그래. 내가 일찍부터 알아봤어. 어렸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었다니까.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보통 이런 작은 동네라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조금 잘해도 금방 소문이 나고, 운동을 잘 해도 소문이 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선수가 갑자기 그렇게 잘했겠어요? 다 어려서부터 자기 동네 지역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선수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사람들은, 그래, 정말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참 잘했었다. 나중에는 프로가 될 줄 알았다……뭐, 이런 말을 대부분 듣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그와 같이 놀라운 말씀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는,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이 사실을 두고 당시 나사렛 사람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저는 당시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좀 동정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그 막연한 정보만 가지고도 당시 베들레헴 지역에 사는 갓난아기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릴 정도로 권력에 대해서는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권력에 대한 집착은 비단 헤롯 왕만이 아니라 모든 권력자들이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내 권력을 위협할만한 세력이 있다고 눈치를 채면 곧바로 이를 짓밟아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20장 31절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エッサイの子がこの地上に生きているかぎり、おまえも、おまえの王位も確立されないのだ。今、人を遣わして、あれを私のところに連 れて来い。あれは死に値する。」

사울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를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인데, 괜히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은 한시도 평온한 생활을 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정말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고향 사람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지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일까요?

저는 사실 이 말씀을 보면서 다른 쪽으로 은혜를 더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예정된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 조용히 살아오시고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비로소 자신을 나타내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구세주도 아닌 우리의 인생은 어떨까요.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탄생하고 멸망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한국도 그렇고 일본이나 여러 나라들을 보아도 수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이 태어나고 사라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꿈을 펼치려고 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은 그렇게 큰 뜻을 품어보긴 했으나, 결국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가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야말로 이슬과 같은 삶을 살다 가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 또한 이슬처럼 잊혀지고 말지 않았을까.

호세아 13장 3절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それゆえ、彼らは朝もやのように、朝早く消え去る露のようになる。打ち場から吹き散らされる籾殻のように、また、穴から出る煙のようになる。

자기들은 좋은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주장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는 삶, 금새 잊혀지는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닐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 했는냐,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동행하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이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0절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目覚めの夢のように 主よ あなたが目を覚ますとき 彼らの姿を蔑(さげす)まれます。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셨다고 한다면 이는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인생,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생,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인생은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구름 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이요, 잠에서 깬 다음에는 사라지는 꿈과도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삶은 성경에 거의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기, 청년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20대에는 무엇을 하시면서 보내셨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시작하셨을 때부터 비로소 성경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주목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본연의 삶을 펼치시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모세가 들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지팡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팡이가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また、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부터 자기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전혀 매끌매끌하지도 않은 투박한 지팡이, 언제나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평범한 지팡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자, 그 때부터 성경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투박한, 여전히 평범한 지팡이처럼 보이지만 이제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어제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아니, 방금 전까지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불만족스러우십니까. 아쉬움이 많습니까. 후회가 됩니까. 아니면 너무나도 평범합니까. 부끄러운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넉넉하지 않습니까. 배경이 보잘 것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자라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과 동행하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쓰임 받으시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거듭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거듭난 삶,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슬과 같은 허무한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삶,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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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회 유혹과 은혜 4
2020년 6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 신약 4페이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節~2節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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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 誘惑と恵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마지막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까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서 잠깐만, 우리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문제라기 보다는 여러분의 생각을 좀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이 성경구절을 잘 알고 계셨던 분들도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셔서 시험을 받으시면 됐잖아요. 그런데 40일간이나 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요.

1번. 예수님께서는 이제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신 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사역과 십자가까지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40일 금식을 하셨다.

2번 기타.


물론 제가 내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정답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번 문제에 대해서는 1번이 그럼 정말 틀렸다……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꽤 많은 신학자들이 이처럼 이해를 하기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생애를 앞두시고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런 말씀,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잠시 멈추어 서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대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기간은 그리 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여정을 대부분 두 발로 걸어 다니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 시간 낭비는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반드시 꼭 필요하신 사역만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40일 금식도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공생애를 앞둔 간절한 기도였다……라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에 대해서 기도를 드렸다……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모든 내용들이 100% 다 나와 있다면 문제가 안 되겠으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이 안 된 부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짐작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을 하셨으니까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40일 금식부터 시작하여야 하나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예전 시간에 언급을 했던 에스더서의 기록을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스더서 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에스더 4장 11절에서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게에게 말합니다.


에스더 4장 11절
“11.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1節
「王の家臣たちも王の諸州の民も、だれでも知っているように、召されないのに奥の中庭 に入って王のところに行く者は、男でも女でも死刑に処せられるという法令があります。ただし、王がその人に金の笏(しゃく)を差し伸ばせば、その人は生きながらえます。私はこの 三十日間、まだ王のところへ行くようにと召されていません。」

그리고 에스더 4장 15절~16절
“15.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に返事を送って言った。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숙적 하만이 자신의 민족 유다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각오를 합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왕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데 당시의 왕실 규율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으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함부로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왕은 30일 동안이나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면 무슨 사람을 시킨다거나 아니면 카톡이라도 보내서, 잘 지내시냐고 안부라도 묻거나, 아니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요즘 왜 나한테 무관심하시냐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부를 묻기는커녕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왕 앞에 나갔을 때, 왕이 가지고 있는 규를 내밀면 왕 앞에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는 뜻이기에 생명을 보존할 수는 있지만, 만약에 왕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서, 아니,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감히 어디를 얼쩡거려! 라고 한다면, 아무리 왕비라 하더라도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민족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금식을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지금 공생애를 막 시작하시려는 순간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 있어서도 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제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를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고난의 시작이 다가왔습니다. 너무나도 괴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38절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そして、ペテロとゼベダイの子二人を一緒に連れて行かれたが、イエスは悲しみもだえ始められ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悲しみのあまり死ぬほどです。ここにいて、わたしと一緒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이 장면은 당시 에스더가 괴로워했던 장면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예수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을 하셨을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괜히 복잡하게 신학자들의 추측이나 주장이나 학설을 다루는 것이 아닌, 단순하게 오로지 성경 기록만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논리학에는 이른바 인과관계라는 말이 있지요.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를 줄여서 인과관계라고 합니다.

이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A라고 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B라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 두 사건이 서로 별개이고 서로 연관된 것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면 인과관계는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고 이해하게 된다면 A라고 하는 원인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는 서로간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가 일어났다는 뜻은, 이를 뒤집어 본다면 A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B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공식을 오늘 말씀에 대입을 시켜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오늘 이 성경에도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A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시고는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B는 예수님께서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기 때문에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 시험을 당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제 상상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가셨는데 거기에 마귀가 있었어요. 그러면 거기 있는 마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すると見よ、彼らが叫んだ。「神の子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もう私たちを苦しめに来たのですか。」


마가복음 1장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ナザレの人イエス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私たちを滅ぼしに来たのですか。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여러분, 이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닙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보고 한 말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무슨 마귀들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 사탄들은 예수님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평소에는 예수님 앞에서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마귀 사탄이 어떻게 해서 광야에서는 감히 대담하게도 예수님을 시험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누구는 주장합니다. 당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는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절절 맸던 마귀들은 졸개들이지만 사탄의 우두머리인 루시퍼 정도 되면 예수님까지도 시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루시퍼라고 하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자, 오늘 두 번째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 루시퍼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없다?


간단하게 말씀 드립니다. 없습니다. 보통 사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면 이사야 14장 12절을 많이 듭니다.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明けの明星、暁の子よ。どうしておまえは天から落ちたのか。国々を打ち破った者よ。どうしておまえは地に切り倒されたのか。

여기서 이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이 금성을 말합니다. 이 구절이 타락천사, 즉 사탄을 뜻한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 중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영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NIV에서는 이를 morning star, NASB는 star of morning, 이를 직역하면 “아침의 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KJV에서만 이 계명성을 “Lucifer”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를 가지고 마귀의 이름이 루시퍼라고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사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름이 나오는 천사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 이름은 두 개 뿐입니다. 하나는 천사장 미가엘이요, 또 하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천사 이름이 등장할 때에는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합니다.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ユダの手紙 1章9節
御使いのかしらミカエルは、モーセのからだについて悪魔と論 じて言い争ったとき、ののしってさばきを宣言することはあえてせず、むしろ「主がおまえをとがめてくださるように」と言いました。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御使いは彼に答えた。「この私は神の前に立つガブリエルです。あなたに話をし、この良い知らせを伝えるために遣わされたのです。

이처럼 구체적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 우두머리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면 이도 역시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텐데, 영어 번역서 중 하나인 KJV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역 ウルガータ訳 등 일부 번역서에 적힌 막연한 단어인 루시퍼라는 말을 가지고 이를 마귀의 우두머리 이름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 보 양보를 해서, 사실 이는 백 보가 아니라 단 한 발자국도 양보를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굳이 백 보 양보를 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 사탄이 마귀의 우두머리였다고 치고, 마귀의 우두머리쯤 되면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가끔 단어 때문에 혼란을 겪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과 악령. 이 둘은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보기에는 성령과 악령,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성령은 좋은 쪽, 악령은 나쁜 쪽, 이렇게 대등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크나큰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성령님은 성령 하나님, 이것이 삼위일체 아니겠습니까.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천사장 미가엘이나, 제아무리 마귀 사탄의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이 두 관계는 절대로 대등할 수 없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로 뒤바뀔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창조주와 피조물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마귀 사탄의 시험을 결과 B라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원인 A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40일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영화에서 가끔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제가 본 영화에서는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여전히 멀쩡했습니다.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이 아주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여러분, 광야라고 하는 데가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을만한 것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맨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우리한테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그러면서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조차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계셨습니다. 거기에 누군가가 지어놓은 허름한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허름한 초가집 같은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어요. 그야말로 바깥에서 노숙을 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숲 속이라면 그늘이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광야에는 제대로 된 나무들도 없습니다. 그냥 햇빛이 내리쬐는 허허벌판에서 지내시면서 밤에는 그곳에서 주무셨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식사는 물론이고 물 한 먹음도 못 마셨습니다. 그 동안 편안한 잠자리에서 주무시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혀 괴롭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100%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모두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40일 동안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잠도 편안하게 못 주무시고, 당연히 옷도 갈아입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온몸에서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는 것조차 힘에 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계속 입고 계셨던 옷은 지저분해지다 못해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을 것이고, 얼굴은 입술이 부르트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마귀들이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마귀들은 우리들의 틈을 노리고 우는 사자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8장 7절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主は、あなたに向かい立つ敵どもをあなたの前で敗走させる。彼らは一つの道からあなたを攻めて来るが、あなたの前で七つの道に逃げ去る。

우리에게 틈이 없다면 마귀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며 소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마귀 사탄과 맞선다면,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원수들이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병에 걸렸다가도 자연히 낫는대요. 그리고 사람들마다 병균이 몸 속에 있다고 하는데, 건강하면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체력이 떨어지고 저항력이 약해지면 그 동안 가만히 있던 이 나쁜 병균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굳건하고 영육간에 건강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약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평소 때에는 꼼짝도 못하던 마귀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평소에는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그럴 때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손도 못 대더니, 체포를 하고 나서 이제 자기들한테 유리하다고 판단되니까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채찍으로 때리고는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다 마귀 짓이지 무엇입니까. 이처럼 마귀 사탄들은 상대방이 약할 때를 노려서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도 분명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인과관계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굳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이유는, 이로 인해서 영적으로 마귀 사탄에게 틈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로 하여금 시험을 하도록 허락하셨다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런 의문이 생기겠지요. 그래. 좋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시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뭐 그렇게 영화에 대해서 조예가 깊거나, 남들에 비해서 많이 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세대 다른 사람들보다 좀 적게 본 축에 속하지 않나 합니다.

그런데 작년엔가에 본 영화가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왕과 왕의 호위무사, 그리고 배신자가 등장합니다만, 먼저 배신자와 호위무사가 싸움을 합니다. 왕의 호위무사니까 얼마나 칼 싸움을 잘하겠어요. 그래서 이 배신자를 수세에 몰지만, 막판에 이 배신자가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작은 칼을 뽑아서 이 호위무사를 공격합니다.

설마 그런 무기가 있다고는 예상을 못했던 호위무사는 어깨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 다친 몸을 끌고 간신히 왕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결국 거기서 쓰러집니다.

거기까지 추격해왔던 배신자와 왕이 이제 칼로 겨루게 되는데, 이 왕의 칼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 배신자가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왕한테도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역시 그 때 또다시 이 배신자가 자신의 큰 칼 손잡이에 숨겨놨던 비밀무기, 작은 칼을 뽑아 들고는 기습적으로 왕을 찌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이 그 기습공격을 피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위무사가 왜 여기까지 왔겠느냐.

호위무사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왕에게 왔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자신이 입은 그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본 왕은, 배신자가 어떤 작전을 쓰는지를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그 기습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제가 40일 금식을 한 분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분은 물을 마시면서, 그리고 잠자리도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주무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실 물도 없고 침대는 고사하고 마땅한 이불조차 없는 광야 허허벌판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다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토록 힘이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했던 이유가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시기 위함이셨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 마귀가 어떤 유혹으로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그 마귀의 수법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마귀의 수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여기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뜻을 보다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5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뱀의 모습을 한 마귀 사탄은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권력에 대한 유혹까지를 모두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그토록 힘들게 40일 금식을 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마귀 사탄이 유혹하는 궤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였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애초에 말씀 제목을 “유혹과 은혜”로 붙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아차린 마귀는 어쩌면 자신의 작전이 노출되었다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을까요? 아니요. 아마도 마귀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문득 씨익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괜찮다는 거예요. 아무리 들통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법이 알려졌다 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다, 나는 자신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처럼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남들보다도 성경을 훨씬 더 많이 안다고 하는 신앙인이나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잘못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의해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마귀 사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육의 생각, 사탄이 주는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 주님이 주시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생각을 따르고, 주님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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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6회 유혹과 은혜 3
2020년 5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8절~10절 신약 5페이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8節~10節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 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 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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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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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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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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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 誘惑と恵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시험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서 첫 번째는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에 대해서 시험하고 두 번째는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명예에 대해서 시험을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오늘 세 번째는 무엇에 대한 시험인 것 같으십니까.

먼저 오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8절~10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이제 마귀는 예수님께 말하기에 앞서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보십시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 사탄은 예수님을 어디로 모시고 갔습니까.


마태복음 4장 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이는 마귀의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지극히 높은 산까지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어느 산인가에 대해서 이 또한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산은 단순히 고도가 높기만 한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산인가 하면, 그냥 높은 산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보였다고 합니다.

일단 물리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지구는 둥급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높은 산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아니, 하물며 우주에서 내려본다 하더라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을 모두 한 번에 바라볼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나라들을 바라보았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영광을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 나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화려한 것? 얼마나 그 나라가 멋지고 잘 사는 나라인지에 대한 것일까요?

마귀 사탄은 이 영광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만약에 자기한테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한테 주리라.

이는 단순히 나라를 주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고 마귀 사탄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시험입니까. 이를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바로 세속적인 방법에 의한 권력에 대한 유혹인 것입니다.

권력.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참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시험은 재물이요, 두 번째 시험은 명예였습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 한꺼번에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돈은 얻었으나 명예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요, 반면에 돈은 못 얻었지만 명예만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어떻습니까.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 이유는 이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면, 이는 100프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권력이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경우가 솔로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와 명예, 그리고 지혜까지도 얻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이나 10장 등을 보면 그 부귀와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권력이라고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얼마나 여자를 많이 거느리느냐 하는 것도 역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점으로 본다 하면 솔로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에 의하면 후궁이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側女(そばめ) 이 숫자에 의하면 도합 1000명의 여성이 있었다는 뜻인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그가 죽은 다음에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만, 그에게 주어졌던 이 축복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또한 마귀 사탄이 세속적인 권력으로 유혹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당하지 않은 방법, 떳떳하지 않은 방법,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얻는 권력이야말로 마귀 사탄에 굴복해서 얻는 권력이기에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권력을 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 권력의 맛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른바 지배자를 영어로 룰러라고 하는데, 이 룰러의 또다른 의미는 길이를 재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룰러라고 하는 단어를 보면 룰을 만드는 사람, 즉 규칙을 만드는 사람, 기준을 만드는 사람, 법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를 재는 자와 똑 같은 뜻을 가진 권력자,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면 참 오묘합니다. 사람이 길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기존에는 10센티인 것을 가지고 지배자가 오늘부터 이것을 1미터로 한다고 하면 그게 1미터가 되는 것이요, 반대로 오늘부터 1센티로 한다고 하면 1센티가 된다는,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아도 권력은 다른 재물과 명예와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게 된다면, 이를 당시 헌법이나 법률에 따라서 처벌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잘못된 방법으로 권력을 얻게 된 사람은 처벌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얻게 된 권력을 가지고 법을 바꾸게 되면, 자신의 잘못된 모든 행위를 불법이 아닌 합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합법은 옳은 것이요, 불법은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으로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권력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나치의 히틀러의 경우를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행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있어서 모두가 합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나요? 아닙니다.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자기가 얻어낸 막강한 권력으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합법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권력은 감미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 권력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간에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권력을 한 번 가져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아, 나도 갖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반면에, 아휴, 그런 걸 가져서 뭘해……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무슨 정치다 권력이다 하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잘 감이 안 와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 개인적인 예를 들어서 한 번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에 와서 이제 6년 뒤에 한국학교 초등부를 졸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제가 살던 그 지역에 있는 일본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당연히 일본말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지만, 6년 동안 학교에서 한국어와 함께 일본어를 배웠으니 당연히 일본어도 늘지요. 어른도 아닌 어렸을 때 6년 동안 그것도 학교에서 매일같이 공부를 하게 되니 이제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이 꽤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 일본 중학교에 들어가서 일본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게 좀 차이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학교에서는 한국 학생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지만, 일본인 학교에서는 일본인 사이에서 외국인으로서, 말하자면 소수파로서 생활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학년 때에는 이른바 이지메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어떨 때에는 끌려가서 동기들이나 선배들한테 두들겨 맞았던 적도 있었어요.

이게 몇 번 이렇게 되니까 참 인생이 피곤해 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제 2학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각 반에서 무슨 위원 같은 것을 종류별로 뽑는 것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정말 감투라고 할만한 것이 있지요. 학급 반장이나 회장 같은 것은 서로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 중에는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귀찮기만 하고 대우도 못 받는 그런 말하자면 한직 같은 위원도 있습니다. 그런 건 보통 아무도 안 하려고 하지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위원이 뭐냐 하면, 한자로 정미위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리한다고 할 때의 정 자와, 아름다울 미 자를 써서 정미위원인데 이 위원도 각 반에 두 명씩 뽑아야 합니다.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저희 학교에서는 이를 아무도 하기 싫어해요. 이게 각 반에 있는 빗자루나 대걸레 관리를 하고 그러는, 쉽게 말해서 청소반장인데 누가 그런 걸 하고 싶어하겠어요.

그러던 와중에 별로 반에서 대우도 못 받고 있던 저한테 이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런 것 있잖아요? 야, 너 해. 그러면 너도나도 갑자기, 그래, 너 하면 되겠네, 너 해라. 뭐 이렇게 해서 가만히 있는데 정해져 버리는. 저도 그래서 얼떨결에 정미위원인지 뭔지가 되었습니다.


다른 위원회도 그렇습니다만, 이 정미위원들도 한 달에 몇 번 꼴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위원회가 열립니다. 그래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각 반에서 두 명씩 한 교실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거기서 또 보니까 정미위원 위원장을 뽑아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또 몸집이 커서 선배들 눈에 띄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떠밀려서 위원장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참 이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몰라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내 방 하나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는데, 대우도 못 받고 귀찮기만 한 청소반장, 그것도 위원장이 되어버렸으니까 이제 3학년 선배들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잖아요. 아 참,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플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죠. 좀 지나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그러니까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야 할 내용들이 많아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까 교무실 선생님들 대부분과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정미위원회 위원장의 힘이 참 놀랍더군요. 뭐냐 하면, 내가 승인을 하지 않으면 각 반에 대걸레나 빗자루가 채워지지 않아요. 그런 게 망가지거나 없어져서 못 쓰게 되면 청소할 때 보통 불편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그 때까지 저를 우습게 보던 아이들이 나한테 와서 부탁을 하는 거예요. 자기 반에 대걸레, 빗자루, 쓰레받기를 넣어달라고요. 이것 참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때까지 있었던 이지메는 싹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온하게, 정말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그와 같은 저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이 친구는 얼마나 저를 미워했냐 하면, 이 친구는 다른 반이었는데, 다음 학기에 일부러 남들이 싫어하는 정미위원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저를 밀어내고 정미위원회 위원장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 집념의 사나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래서 2학년 2학기에는 아마도 거의 유래가 없었겠지요. 정미위원회 위원장이 후보가 두 명이 되어서 선거까지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압도적인 표차로 제가 위원장을 연임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위원장은 3학년 1학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만, 결국 3학년 1학기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이런 시시한 경력을 가지고 여러분께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냥 동네 중학교 청소반장도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권력들을 보십시오. 정말 옆에서 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시시한 자리 같은데도 서로들 하고 싶어서 난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물며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 여기까지 가면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대단한 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 비하면 요즘 권력은 권력도 아니라고 해요. 그렇지요. 임기가 되면 내려와야 하고, 선거에 지면 정권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자식을 죽이면서까지도 손에 쥐려고 하는데, 임기가 되었다고, 선거에 졌다고 아무런 저항 없이 내려온다는 일은, 이것만 보더라도 대단한 정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어제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오늘 암살 당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꼭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회사나 단체에도 존재합니다. 하물며 가족 간에도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힘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권력이 영원한가요? 영원히 그 힘을 가질 수 있나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아무리 수많은 나라들을 지배하고, 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그리고 여자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내려와야 하는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재판과는 전혀 다릅니다.

누가복음 12장 2절~3절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おおわれているもので現されないものはなく、隠されているもので知られずにすむもの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서의 재판은 감추려고 하면 감추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놓인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추고자 했던 일이 하나도 남김 없이 알려지게 되고, 어두운 데서 작은 소리로 한 말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한 귓속말이 모두 전파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대해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아, 나는 내 일생에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죄를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내 비밀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만약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 기억력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는 그냥 제 생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성경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 뜻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의인이라고 한다면 이는 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가 없다,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기억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밖에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수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겸손해집니다. 이 땅의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나 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도 되십시오, 회장님도 되십시오. 하다못해 청소반장도 되십시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되는 과정이나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귀 사탄에게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6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たましいを殺せ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たましいもからだもゲヘナで滅ぼすことができる方を恐れなさい。

시편 32편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私は自分の罪をあなたに知らせ 自分の咎を隠しませんでした。 私は言いました。 「私の背きを主に告白しよう」と。 すると あなたは私の罪のとがめを 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마치고 난 다음,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마귀 사탄에 굴복한 지난 날들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오로지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천국에서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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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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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5회 유혹과 은혜 2
2020년 5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マタイの福音書 4章 7節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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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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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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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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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2 ” 誘惑と恵み 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4장 5절~6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시험으로서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내더니, 이제는 높은 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배경설정이 매우 독특합니다. 그냥 높은 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앞서 냈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을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이라고 한다면, 이번 시험은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험이라는 뜻이요, 두 번째 의미는, 이번 시험은 단순히 세상적인 유혹이 아니라 신앙적인 유혹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돈이나 재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일 식사도 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자기 것이든 하물며 남의 것이든 간에 돈이나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물을 얻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물론, 아, 내가 큰 회사를 차려서 큰 돈을 벌어보겠다……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오늘 한끼 먹는 것이, 예컨대 상황이 대단히 어려울 때에는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 먹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한 끼 두 끼 먹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하지만 오늘 이 시험은 어떻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내 인생의 최종목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시험인 것입니다.

첫 시험이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두 번째 시험은 바로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명예에 대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험에 담긴 두 번째 의미, 그냥 높은 곳이 아니라 하필이면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시험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층빌딩도 없었을 테니까, 만약 지금 같았으면, 서울이면 남산타워나, 동경이면 스카이트리? 우리가 살고 있는 군마현이라면 군마현청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성전 꼭대기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갔었던 것일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에 말씀 드릴 세 번째 시험을 보시면 아실 수 있겠습니다만, 마귀 사탄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성전 꼭대기가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곳에라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시험을 본다면 굳이 성전 꼭대기에서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예 중에서도 신앙적인 명예로 유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확인해주는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놀랍게도 마귀 사탄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기록은 성경에 있는 부분입니다.


시편 91편 9절~12절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それは わが避(さ)け所 主を いと高き方を あなたが自分の住まいとしたからである。
わざわいは あなたに降りかからず 疫病も あなたの天幕に近づかない。
主が 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て あなたのすべての道で あなたを守られるからだ。
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 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

이를 보더라도 사탄이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자,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다면서? 그렇다면 뛰어내려봐.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다른데도 아닌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는데도 다치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다고 믿을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할렐루야 소리가 나고 너는 박수를 받으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거야.

이게 지금 마귀가 했다는 말 때문에 그렇지, 만약에 그걸 빼고 들으면 어떻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틀린 부분이 있나요?


만약에 제가 다음 주 주일 아침에, 아니 뭐 꼭 다음 주가 아니더라도, 오늘 이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들 잠시 바깥으로 나오시라고 하고, 제가 우리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주님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면서 점프를 했는데, 그 순간 정말 여기저기서 천사가 날아오더니 제 몸을 붙잡아주어서 제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면, 여러분께서 그것을 보고, “사탄아 물어가라!”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퍼져서 우리 교회도 부흥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그런데도 제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 번 제가 오늘, 아니, 지금 곧바로 뛰어내려 볼까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미국 CNN과 AP 통신이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뭐냐 하면 미국 캔터키 주에 사는 교회의 어느 한 목사님이 뱀에 물려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소식 아닙니까.

그래서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을까 했습니다만,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이게 좀 이상합니다. 뭐냐 하면 이 목사님은 예배를 드릴 때에 뱀을 가지고, 그것도 살아 있는 독사를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께서도 어쩌면 이 소식을 접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니 허고 많은 좋은 것들을 내버려두고 왜 하필이면 뱀을 들고 예배를 드렸을까 했더니만, 이 목사님,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소식을 전한 한국의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이 목사님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럼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느냐. 아니요. 있기는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18절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信じる人々には次のようなしるしが伴います。すなわち、わたし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新しいことばで語り、
その手で蛇をつかみ、たとえ毒を飲んでも決して害を受けず、病人に手を置けば癒やされます。」

자, 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미국의 그 분도 목사님이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겠지요. 그렇다면 뱀을 집어 올려도, 뱀에 물려도 죽지 말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연합뉴스의 그 기사에 의하면, 그 목사님은, 그 날 뱀에 물리고 밤 8시 30분에 귀가하셨는데,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목사님은 이를 거부를 했고, 결국 밤 10시 쯤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노릇이지요. 저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도 그냥 예배 때 무슨 뱀을 유리 상자 안에 넣어두고 그냥 좀 만지거나 하는 수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인터넷에 보니까 동영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큰 뱀을 꺼내서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목에 걸기도 하고 그러면서 예배를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재작년 기사에 보니까 또 이런 내용이 실렸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 8월 17일에 그 교회에서 또 목사님이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니, 그 목사님은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이번에는 누가 또 그런 변을 당했나 했더니만, 누구겠습니까. 예, 그 목사 아드님이시래요.

이 아드님도 목사님이셨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물리는 순간의 동영상까지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뭐,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니까 한 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이 분도 아버지를 따라서 예배 시간에 뱀을 꺼내고 그러는데, 뭐 자기 아버지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주 그 큰 뱀을 목에 걸고 점프도 하면서 마이크로 설교를 하더라고요.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뱀을 손으로 잡고 이렇게 높이 들어올리는데, 그 순간 뱀이 이 목사님 목을 콱 하고 물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막 피가 셔츠에 젖을 정도로 흐르더라고요.

그래도 이 아들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한 가지 배운 점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아버지와 달리 순순히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다행이 목숨은 건졌다고 합니다만, 참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16절~17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이렇게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성경말씀에 적힌 대로 천사가 나를 살려줄 거라면서, 교회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면서 설교를 하겠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제발 저를 말려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전파되고 십자가가 전파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건 복음전파가 아닌 구경거리, 싸구려 서커스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자신이 가로채려고 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만, 아마도 2017년 12월 정도로 기억을 합니다. 제가 한 통의 메일을 받았는데 “한국 목사님들을 위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출간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더러 설교집을 출판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제의였습니다.

메일을 보내신 분은 알고 보니 한국에 있는 어느 기독교 출판사 대표님이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이와 갈은 메일을 받으니 참 감사하지요. 그래서 그 메일을 받은 것이 2017년 12월이고,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에는 마침 또 한국에서 제 개인적으로 중대사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 어차피 다음 달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단 연락을 해보았더니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설교 원고 중에서 주제를 정하고 분류를 한 다음에 며칠에 걸쳐서 교정을 본 다음에 보내 드리고는, 2018년 1월에 한국에 가서 또 출판사 쪽과 연락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가 좀 이상해지더라고요. 한국에 가서 거기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책이 나오면 제가 몇 권을 구입해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기독교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다른 책들은 몇 권 내보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 제가 몇 권을 구입한다거나 내가 돈을 얼마 낸다거나 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출판사가 책을 출판하고 책이 팔리면 그 중에서 인세로 제가 얼마 가져가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니, 제가 책을 구입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물었더니만 그 쪽 담당자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책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내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래서 저는 속으로, 내가 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 책을 사지, 내 책을 내가 왜 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그게 아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꽤 많은 목사님들이 출판사를 통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내고는 그 책을 어느 정도 매입을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기 돈을 내면서 출판하는 자비출판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구입을 해야 하냐고 하니까 무슨 200권이라나, 300권인가를 구입하라는 것이에요.

당연히 저는 거절했습니다. 물론 책을 구입할 그런 돈도 없거니와, 만약에 제가 그렇게 구입을 한다면, 출판사 측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이득은 확보가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책을 판매할 의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도대체 이런 식으로 누가 책을 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출판사 건물이 있는 위치가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서울에서도 상당히 땅값이 비싼 지역, 그것도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도 어느 방 하나를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닌, 어렴풋이 기억하기에 4~5층짜리 건물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그 출판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임대라 하더라도 그 비용이 보통 비싸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책만 출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 대형출판사도 아닌 중소규모 기독교출판사인데 그와 같은 곳에서 그 규모를 유지한다는 것은 뭐냐.

꽤 장사가 된다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가끔 다른 교회 홈페이지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목사님들의 프로필을 보게 되면, 책 집필 목록이 이렇게 쫘악 적혀 있잖아요? 물론 훌륭한 책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이런 사실을 제가 직접 경험하고 난 후로는, 좀 기존과는 다른 식으로 제게는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명예라고 하는 것이 어디 책 출판 뿐인가요? 무슨 학위 같은 것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위를 받는 목회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책을 출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들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명예로 유혹하는 사탄에 굴복하는 모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특히 한국에 보면 금식을 많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금식에 대한 능력을 간증하는 사람들도 많이 계시지요. 믿음이 있으신 분들 중에서 금식에 대해서 이를 나쁘다고 하는 분들은 안 계실 것입니다. 금식의 능력, 금식에 대한 간증 같은 것을 들어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금식>이라고 검색어에 넣어보니까 무려 200권 가까이의 책이 나왔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좀 다른 내용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만,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100권 이상의 금식에 대한 책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다고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문 같은 곳에 보면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 하고 나온 기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했더니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잘 안 알려진 사실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40일 금식 하다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은 잘 안 알려집니다. 그러면서 신앙에 있어서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이 계셔요. 믿음이 있다면 40일 금식 정도는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40일 금식도 하지 못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40일 금식에는 근처에도 못 가본 저 같은 경우에는 찌그러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왜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금식기도에 대한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은, 그 분들은 정말 성경적인 금식을 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40일 금식기도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셨고, 그리고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금식을 했을까요.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그리고 에스더서도 봅니다. エステル記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6節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 떡을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왕비였던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금식을 당부하는데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고 합니다.

요즘 금식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도 물론 그랬습니다만 물을 많이 마시잖아요? 금식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니까 물로라도 허기를 채우지 않으면 참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기도원에 보면, 금식할 때에는 물을 마실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보면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물을 마시면서 하는 금식은 가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제대로 금식을 하려면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금식을 한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자랑이 되기 위한 것인가요? 39일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40일 하면 구원을 받는 건가요? 3일 금식한 사람보다 10일 금식한 사람이 믿음이 더 많은 건가요?

어차피 다 물 마시면서 금식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슨 보호식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기 금식하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조금씩 식단 조절을 해야 하고, 금식이 끝난 다음에는 조금씩 또 조절을 해야 한대요.

그게 그러면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까. 아니, 그게 틀렸다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면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도 먼저, 무엇을 위한 금식인지를 알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금식은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40일 금식을 했다고 자랑할 필요 없습니다. 금식기간 동안에 물을 마셨느냐, 안 마셨느냐, 금식을 3일 했느냐 40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면 금식을 오래 하셔서 아무 것도 못하고 기운이 없어서 누워 계신 분들 꽤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어나서 물을 드십시오. 식사를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이웃을 섬기십시오. 전도를 하시고 봉사로 섬기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 며칠 금식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금식을 한다면, 이는 분명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금식만이 아닌, 돈 들여서 안 팔릴 책을 내는 거나, 떳떳하지 않은 방법으로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거나 뱀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님 같은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が、心配したからといって、少しでも自分のいのちを延ばす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키나 수명에 대한 말씀 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나 자신을 높이려고 해도, 그것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누가 높여 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우리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높이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7장 10절~12절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彼らは大声で叫んだ。「救いは、御座に着いておられる私たちの神と、子羊にある。」
御使いたちはみな、御座と長老たちと四つの生き物の周りに立っていたが、御座の前にひれ伏し、神を礼拝して言った。
「アーメン。賛美と栄光と知恵と感謝と誉れと力と勢いが、私たちの神に世々限りなくあるように。アーメン。」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는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21장 26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エゼキエル書 21章26節
神である主はこう言われる。かぶり物を取り、冠を外せ。すべてがすっかり変わる。低い者を高くし、高い者を低くせよ。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イザヤ書 52章13節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우리를 낮추고 높이는 권세는 오로지 우리 주님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길이 형통하고 주님께서 높이 들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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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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