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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회 하나님 아들의 사랑
20209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신약 239페이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 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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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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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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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아들의 사랑” 神の子の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 번 통독을 해보려고 할 때, 구약을 보면 창세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경우를 보면 좀 어렵잖아요. 참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럼 신약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만, 그 때 처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비가 바로 이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계보입니다.

길이는 짧아요. 그래봤자 한 장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처음 읽는 분들한테는 이게 참 난감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 보면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래요. 뭐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죠. 참 어려운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계보의 제목이 무엇이죠?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ダビデの子、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계보인 것입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고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읽어보면, 이는 무슨 암호나 주문처럼 들리는 지루한 구절입니다만, 이러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이는 대단히 큰 은혜가 됩니다.

정말 구약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쫙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신약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계보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장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계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서 준비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다윗에서 요셉을 거쳐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예비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마태복음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후에 계신 분이신가요?

누가복음 20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44절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が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人々は、キリストを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ですか。
ダビデ自身が詩篇の中で、こう言っています。『主は、私の主に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ですから、ダビデがキリスト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す。それなら、どうしてキリストがダビデの子なのでしょう。」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이 쓴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主は 私の主に言われた。 「あなたは 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 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이 구절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는 <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주>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처럼 이미 주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그 당시 이미 예수님은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59절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に向かって言った。「あなたはまだ五十歳になっていないのに、アブラハムを見たの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る前から、『わたしはある』なのです。」
すると彼らは、イエスに投げつけようと石を取った。しかし、イエスは身を隠して、宮から出て行かれた。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계보는 조금 이상해지지요. 즉, 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계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준비단계를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이 부분은 제가 몇 번이나 말씀 드려왔던 부분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십니까.

요즘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떤 분의 설교를, 제가 얼마 전에 들어보았습니다만,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등장하는 빛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라, 이 빛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아멘! 그럽니다.

그래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을 예수님이라고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빛을 만드시게 되는데, 이 빛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뜻이 되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예수님 또한 이 온 세상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 처음 등장하십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이 등장하신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좀 여담입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순서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자, 창세기 1장 1절~3절 중에서 1절과 2절의 순서를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地は茫漠として何もなく、闇が大水の面の上にあり、神の霊がその水の面を動いていた。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맨 처음에 혼돈한 상황,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고 빛을 만드십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굳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라고 하는 구절을 가장 처음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 가장 처음에 예수님을 넣으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즉, 이렇게 됨으로 인해서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도 예수님으로 끝나는 완전한 예수님의 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이는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만 끝났다고 하면 이는 예수님에 의한 구속사역의 50% 달성? 아닙니다. 0%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전철을 탈 때, 돈을 내고 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출입구에 그 표를 찍었어요.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나요? 아닙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렇지요. 문이 열려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내고 표를 사고, 그 표를 개찰구에 찍 하고 댔다 하더라도, 문이 안 열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예수님께서 아무리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없다면 이는 구원으로 가는 출입문이 안 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이 있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다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정해주십니까. 그렇지요. 죄값이 충분히 치러졌는지 아닌지는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 내 아들이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다.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오히려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십자가를 통한 제사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실 전적인 권한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부활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 전에도 계셨고, 아브라함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잠시 오늘도 문제를 내볼까 합니다. 오늘은 연속해서 두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평소부터 성경을 얼마나 잘 읽고 계신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먼저 첫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얼마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올라가셨을까요.

1번 부활하시고 3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2번 부활하시고 1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3번 부활하시고 10일 이상 계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어떤 분은 부활하신 후에 곧바로 서둘러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 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선택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보기에는 물론 놀랐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 용기 있는 제자 하나가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예수님! 하고 덥석 끌어 안으려 했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뜨겁게 끌어 안을 수 있었다.
2번 투명인간처럼 끌어 안을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께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아있던 구절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イエスは彼女に「マリヤよ」と言われた。マリヤはふり返って、イエスにむかってヘブル語で「ラボニ」と言った。それは、先生という意味である。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さわってはいけない。わたしは、まだ父のみ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だから。ただ、わたしの兄弟たちの所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またあなたがたの父であって、わたしの神またあなたがたの神であられるかたのみもとへ上って行く』と、彼らに伝えなさい」。

자,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마리아가 랍오니……라고 하는데 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랍비>보다도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다는 것,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 왠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 수가 없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읽어드린 성경은 개역한글, 그러니까 우리가 예전에 사용했던 성경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는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자, 개역개정판 요한복음 20장 17절만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すがりついていてはいけません。わたしはまだ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です。わたしの兄弟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であり、あなたがたの父である方、わたしの神であり、あなたがたの神である方のもとに上る』と伝えなさ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의 반가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만류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을 끌어 안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자,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가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론 뭐, 사전에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요. 특히 이성간에는 사전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 만이 아니라 제3자의 동의까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끌어안았다가는 큰 일 나지요. 더구나 코로나가 난리를 치고 있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 가지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복잡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끌어 안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하냐 하면 뭐, 육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육체가 뭐예요. 예, 살과 뼈입니다.

자,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있었다면, 뜨겁게 끌어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없었다면 끌어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택지를 바꾸어보겠습니다. 1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있었다. 2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의심하시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38절~39절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제 장차 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거에 육신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은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였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エノクは神とともに歩んだ。神が彼を取られたので、彼はいなくなった。


열왕기하 2장 11절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こうして、彼らがなお進みながら話していると、なんと、火の戦車と火の馬が現れ、この二人の間を分け隔て、エリヤは竜巻に乗って天へ上って行った。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위대한 선지자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데려가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우리가 에녹과 엘리야를 믿는다고 해봤자 우리의 죄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용서 받고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누가 증언해주고 계십니까.


요한일서5장 5절~6절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世に勝つ者とはだれでしょう。イエスを神の御子と信じる者ではありませんか。
この方は、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た方、イエス・キリストです。水によるだけではなく、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ました。御霊はこのことを証しする方です。御霊 は真理だ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을 해주셨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예수님을 언제 직접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그것이 아니라면 장차 훗날에 천국에 가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라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이 사랑을 알게 되셨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바로 그 날,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을, 우리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뜨겁게 끌어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아무리 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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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회 참된 복음
20209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신약 239페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 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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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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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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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복음” 真の福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를 그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강해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서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어떤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면 내가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왠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 말씀을 듣기는 하거든요.

한국의 경우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주일예배 외에도 매일 새벽예배가 있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가 있습니다. 구역예배에서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많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무슨 함정이냐 하면, 성경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은 착각,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씀은 주일예배 때도 듣고 수예예배, 금요철야, 새벽예배 때도 들었어요. 이제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휘발유를 안 넣어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듣기만 하면 소용이 없어요. 믿음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그분 들이 좋아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여러분, 이 말씀이 이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듣기만 하다 보니 믿음이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하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러면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합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자기 생각.

이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가 다 아는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에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자,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알고 있었어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겠습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목사님 말씀, 3번 자기 생각.

물론 대다수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적힌 대로 말씀을 전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만, 그러나 100%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복음을 전하셨을 때에는, 이는 99%가 아니죠. 100%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항상 매순간 매순간 100%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제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아니면 제가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와 같이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주일 예배를 포함해서 말씀을 전해드렸는데, 좀 이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물어봐야죠. 그렇다고 설교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예배가 끝나고 나서 각 교회 목사님께 물어보신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다른 교역자 분들이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물으면 그건 목사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며 꾸짖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일인가요? 목사나 교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에 대한 불순종?

여러분, 목사가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목사님한테 순종해야지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면 선지자예요?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순종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사나 교역자가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왜 모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성경강해를 시작하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첫 강해로서 창세기도 아니요 마태복음도 아닌 로마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 믿음의 축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성경말씀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에 대한 내용이 확실하게 잡혀 있으면 성경 어디를 읽어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와 같이 강해라고 한다면 이를 몇 주에 나누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를 살펴봄으로 인해서 성경 전체를 함께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사도행전 내용도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라고 해서 로마서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1년, 아니면 평생 동안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면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이는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들 중에서 저자가 분명히 밝혀진 책 중 하나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유대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는 탄탄한 배경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교육도 받았다고 하니, 옛날 우리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 집에 태어나서, 성균관에서 배우고,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를 하고는 장래가 보장된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른바 엄친아. 일등 신랑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대까지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그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고는 부활을 했대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비웃었겠지요. 사이비 집단이 있는 것은 비단 요즘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스승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37절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先ごろテウダが立ち上がって、自分を何か偉い者のように言い、彼に従った男の数が四百人ほどになりました。しかし彼は殺され、従った者たちはみな散らされて、 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
彼の後、住民登録の時に、ガリラヤ人のユダが立ち上がり、民をそそのかして反乱を起こしましたが、彼も滅び、彼に従った者たちもみな散らされてしまいました。

그러니까 옛날에도 이상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교주가 죽거나 망하면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던 바울은, 역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남긴 성경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냐?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지만 뭐, 이미 죽었다고 하니까 어차피 저러다가 금방 또 없어지고 말겠지.

어쩌면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뭔지를 믿는 무리들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어쩌면 그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는데, 오직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무슨 이상한 사람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잖아.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청년 관리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이 무리들을 다 잡아서 일망탕진을 시켜버려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위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아래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9절~20절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そこで私は答えました。『主よ。この私が会堂ごとに、あなたを信じる者たちを牢に入れたり、むちで打ったりしていたのを、彼らは知っています。
また、あなたの証人ステパノの血が流されたとき、私自身もその場にいて、それに賛成し、彼を殺した者たちの上着の番をしていたのです。』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인지 하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가두고 때리고 온갖 학대를 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예수라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지역에까지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절~2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かして殺害しようと息巻き、大祭司のところに行って、
ダマスコの諸会堂宛ての手紙を求めた。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出し、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누구는 이른바 공무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냥 일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기만 해도 월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는 옛날에, 그것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요즘 공무원들을 보면 웬만한 일반 회사원들보다도 열심히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그저 자리만 지키는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솔선수범해서 일을 하는, 그야말로 공무원의 모범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흠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그는 열심히 무슨 일을 했었느냐. 교회를 탄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는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어디 그 뿐입니까.

훗날 바울의 열정적인 전도사역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9장 6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6절~9절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立ち上がって、町に入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告げられる。」
同行していた人たちは、声は聞こえてもだれも見えないので、ものも言えずに立っていた。
サウロは地面から立ち上がった。しかし、目を開けていたものの、何も見えなかった。それで人々は彼の手を引いて、ダマスコに連れて行った。
彼は三日間、目が見えず、食べることも飲むこともしなかった。

참으로 사람 팔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그는 당당한 고위관료로서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다메섹에 입성한 후로는 곧바로 회당으로 찾아가서 제사장으로부터 교부 받은 공문을 보이고는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말을 타고 위풍당당은 무슨, 지금 눈도 안 보이게 되어서 사람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예루살렘에서 높은 분이 오셨다고 하니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그랬을지도 몰랐습니다만, 그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예, 앞도 못 보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들 내겠습니다. 자,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다메섹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유다라는 사람의 집은 다메섹에 있는 어느 한 거리에 인접한 곳에 있었는데, 그 거리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사도행전 9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すると、主はこう言われた。「立って、『まっすぐ』と呼ばれる通りに行き、ユダの家にいるサウロという名のタルソ人を訪ねなさい。彼はそこで祈っています。

(新共同訳)直線通り

예, 그 유다의 집이 있었던 곳은 직가라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곧게 뻗은 거리라는 뜻이지요.

직가, 직선거리라고 하는 거리, 말하자면 종로 1가 2가 하는 식의 길 이름이지요. 아직도 그 직가라고 하는 거리가 남아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계속되는 내전 때문에 어쩌면 많이 파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역시 주님의 명을 받고는 직가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가서 당시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바울에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신약성경 총 27권 중에서 대체적으로 13권 정도를 바울이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읽을 때마다 적지 않게 궁금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라고는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한참 뒤의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었지요. 또한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도들로부터 직접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듣고 배웠는가 하면,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바울은 어쩌면 상하 관계에 있어야 했었겠습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서로 대등하게 교제를 한적은 있었지만 상하관계나 사제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그야말로 다른 사도들 못지않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적인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던 인물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자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するとただちに、サウロの目から鱗のような物が落ちて、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

이를 두고 일본에는 흥미로운 관용 표현이 있지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입니다. 일본어를 공부하시거나 일본어 시험을 준비중이신 분들은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지금도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이 표현은 바로 이 성경에서 온 관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떨 때 사용하냐 하면,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알게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를 알게 됨으로 인해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깨닫게 된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바울은 당시 성경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의문이 있는 부분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한테 아들이 있다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해결해준다는 내용이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은 채 그는 꼼짝없이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었겠지요. 분명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 동안 어두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눈이 안보였으니 얼마나 어두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지식과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그런 기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그러면서 그는 사흘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떠오르고 율법이 떠오릅니다. 이사야서와 같은 선지서가 떠오릅니다.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던 성경이라고 하는 이름의 자물쇠 안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를 넣고 돌리니까,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새로운 말씀, 아니, 그야말로 완전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순식간에 성경의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그가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늘 말씀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아아, 그랬구나.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때로는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되어 오신 그대로 오셨던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비밀을 알게 되니까, 그 동안 꽉 막혔던 성경의 비밀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로 풀리게 되니까, 이제 진정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통 올림픽 같은 장거리 마라톤을 보면, 출발점과 결승점이 똑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전해드리는 말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장거리 로마서 강해도,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결승점에는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1절~2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서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로마서 강해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복음, 진정한 복음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 참된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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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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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회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
2020년 8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신약 358페이지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5章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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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 固い食物を食べるべき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번 이와 같은 고난을 내리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운다.
2번 빨리빨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예, 이는 너무나도 쉬운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모두가 다 2번을 고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죠. 내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내리셨다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에서 닥쳐보면 이게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내가 방에 있는데, 아니면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일단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작은 지진이라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언제 크게 흔들릴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는 지진이 일어나면 우선 가스부터 잠그라고 가르쳤습니다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요즘은 안전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지진 때 굳이 사람이 안 잠그더라도 자동으로 잠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지진이 일어났다 하면 무조건 책상 밑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머리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고 해요. 이게 쉬운 것 같긴 합니다만, 막상 자기한테 일어나면 순간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진도 6~7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서 있기도 힘들다고 하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평소부터 훈련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경우 1923년(大正12年) 9월 1일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고 해서 지금도 매년 9월 1일이 되면 여기저기서 다양한 훈련을 합니다. 그래야지만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절~21절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절~21절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これらの災害によって殺されなかった、人間の残りの者たちは、悔い改めて自分たちの手で造った物から離れるということをせず、悪霊どもや、金、銀、銅、石、木で造られた偶像、すなわち見ることも聞くことも歩くこともできないものを、拝み続けた。
また彼らは、自分たちが行っている殺人、魔術、淫らな行いや盗みを悔い改めなかった。


여기에 보면 지금 주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서 환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재앙이 닥쳐오고 있어요. 그러면 어서 자신의 죄를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들을 섬긴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반성과 후회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반성과 후회, 이는 비슷한 것 같긴 합니다만 엄연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몰래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는 것, 이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잠시 세상의 유혹에 못 이겨서, 너무나도 살아가기가 힘들다 보니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려고 했는데, 아이구,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경찰한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반성과 후회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반성은 그야말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지요. 이미 잘못을 저질러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생활이 어렵다 보니까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이처럼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죄를 짓이 않겠습니다. 이게 반성이지요.

그렇다면 후회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이참, 내가 그 집이 아니라 옆집을 노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그 동네가 아니라 옆 동네에 갔어야 했었는데, 그 시간이 아니라 다른 시간에 했어야 됐었는데, 하필이면 그 집에, 그 동네에, 또는 그 시간에 들어가는 바람에 잡혀버렸네……이게 후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운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 내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런 후회는 백 번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주님이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빨리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욥기 5장 17절~21절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ああ、幸いなことよ、神が叱責するその人は。だから、全能者の訓戒を拒んではならない。
神は傷つけるが、その傷を包み、打ち砕くが、御手で癒やしてくださるからだ。
六つの苦しみから、神はあなたを救い出し、七つの中でも、わざわいはあなたに触れない。
飢饉のときには、あなたを死から、戦いのときには、剣の力から贖い出す。
舌のむちで打たれるときも、あなたは隠され、破壊がやって来ても、恐れることはな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때문에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다가오면,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를 합니다.


무엇을 후회합니까. 아이구, 내가 예수 괜히 믿었어. 교회 괜히 다녔어. 내가 모태신자인데, 내가 장로인데, 권사인데, 뭐, 심한 경우에는 내가 목사인데, 사모인데, 내가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냈는데,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해. 이러면서 헛된 우상을 섬깁니다.

우리가 다른 죄를 짓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를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세 가지를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제일 알기 쉬운 것이지요. 하나님,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에 대고 절을 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신명기 17장 2절~7절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町囲 みのどの一つでも、その中で男であれ女であれ、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主の契約を破り、
行ってほかの神々に仕え、また、太陽や月や天の万象など、私が命じなかったものを拝む者があり、
それがあなたに告げられて、あなたが聞いたなら、あなたはよく調査しなさい。もしそのことが事実で確かであり、この忌み嫌 うべきことがイスラエルのうちで行われたのなら、
あなたは、この悪しきことを行った男または女を町の広場に連れ出し、男でも女でも彼らを石で打ちなさい。彼ら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
二人の証人または三人の証人の証言によって、死刑に処さなければならない。一人の証言で死刑に処してはならない。
死刑に処するには、まず証人たちが手を下し、それから民全員が手を下す。こうして、あなたがた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여러분, 해나 달이나 별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피조물,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고 소원을 빈다거나 하는 일도 우상숭배이고, 세상에 있는 나무나 바위 같은 것에 대고 절을 하거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요, 예수님을 버리는 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그러면 누구는 이를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할지 모르겠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8절~9절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あなたがたは神の戒めを捨てて、人間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いるのです。」
また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の言い伝えを保つために、見事に神の戒め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ます。


우리 나라의 문화나 전통은 중요합니다. 보존해야 할 것, 계승해야 할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그렇게 성경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렇게 과학을 좋아하면서도 아직까지도 건물을 짓거나 하물며 무슨 자동차를 샀다 하면 돼지머리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술잔을 올리면서 절을 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이른바 <오하라이>라고 해서 무슨 종이로 만들어진 먼지떨이 같은 것으로 이렇게 하고 그렇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사를 참배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이나 회사에도 <카미다나>라고 해서 귀신 집을 모셔놓으면서 거기에 대고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축복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5절~6절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ですから、地にあるからだの部分、すなわち、淫らな行い、汚れ、情欲、悪い欲、そして貪欲を殺してしまいなさい。貪欲は偶像礼拝です。
これらのために、神の怒りが不従順の子らの上に下ります。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내 이익을 위해서, 내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우상에 대고 절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상숭배는 이른바 이단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와 같은 교회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듣다 보면 성경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냥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약에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십자가에 달림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의 죄조차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요,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성령 하나님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못 전하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할 수 있고, 나아가 심한 경우에는 교회 지도자가 선지자라고 한다거나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주님을 전하면서 엉뚱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우상이요, 하물며 자기가 선지자라면서,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면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또한 대표적인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우상숭배, 사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우상입니다만, 그게 뭐냐 하면 기존 교회에 있는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통적인 교회에 우상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예,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맹목적, 즉 눈을 가린 채로 무조건 믿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눈을 가리느냐 하면 바로 이 성경인 것입니다.

교회에 따라서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방언을 강조합니다. 예배를 강조합니다. 금식을 강조합니다. 찬양을 강조합니다.

기도가 잘못된 건가요? 예배가 잘못된 건가요? 금식이나 방언이나 찬양이 성경적이지 않나요? 아니요. 다 좋은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를 마치 무슨 만능인 것처럼 성경보다도 더 중요시하게 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나 방언이나 금식이나 기도가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 60년대를 보면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교육수준 대단히 낮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이라고 하면 적어도 신학교를 졸업한 분들이니까 사회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대표적인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대다수 국민들은, 문맹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한테 성경을 읽으라고 한다? 이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성경을 보면 지금보다도 훨씬 가격도 비싸고, 난해한 말투였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생활은 어렵고 애들은 많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쁜데, 지금까지 봤던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건 초등학교 교과서 밖에 없는데, 그것의 몇 배나 두껍고 글씨도 작고 말투도 어려운 성경책, 거기 나오는 이름도 철수야 영희야 정도가 아니잖아요? 그걸 읽으라고 하면 누가 읽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대해서는 주일날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설교가 다고, 그 외에는 그냥 주구장창 기도하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필요한 게 한 둘이 아닌데, 기도할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몸이 아프면 금식을 하라고 해요. 성경을 모르니까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도 몰라요. 그저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래서 옛날 분들을 보면 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십니다. 금식도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몰라요.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은 깍듯이 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성경을 모르는데, 목사님이 성경에 이래이래 나와 있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 안 따를 수가 있겠어요.


이러다 보니 목사님의 권위가 너무나도 높아집니다. 목사님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라도 갖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아, 그런 것 따지면 안 된다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그것 아니었습니까.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신약 358페이지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과거에는 그야말로 젖을 먹을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 새벽예배 철야예배 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것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빠졌어요? 그렇죠. 성경 말씀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그랬기 때문에 이는 젖을 먹는 단계, 아직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어떻습니까. 물론 목사님들도 많이 공부를 하십니다만, 일반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정말 높습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같은 경우를 보면 고등학교만 나오더라도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요즘은 학교 선생님 되려면 대학교 교수님보다도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1년에 석사, 박사가 얼마나 많이 배출이 됩니까. 지금 보면 교회 목사님보다도 많이 배운 분들이 무척이나 많은 세상입니다. 이제는 무조건 목사라고 해서 지식인 대우를 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 개신교에 있어서 목사라고 하는 지위는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그저 예배를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을 뿐이고, 교회의 머리는 목사님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목사님이 대우를 받지 못하게 돼요.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경우도 발생을 합니다.

그럼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성경 읽기를 즐겨 하시나요? 아니면 안 즐겨 하시나요? 예, 그냥 여전히 목사님이 말씀해주시면 편해요. 그런데 이런 것을 오늘 말씀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젖 먹는 단계가 지나고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젖을 먹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일 때에는 젖을 먹어야죠. 단단한 것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켜요. 그러면 젖을 주고, 그리고 이유식을, 그것도 손수 먹여 주고 그러지요.

그런데 유아에서 아동, 소년, 청소년, 청년, 그리고 성년으로 몸은 점점 커가는데, 여전히 젖을 달라고 하고, 단단한 음식을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몸의 체력은 떨어지고 저항력도 약해집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야채다 고기다 해서 많이 먹고 튼튼해져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시련이 닥쳐오면 이를 이겨내면서 힘을 길러가야 하는데, 여전히 젖 줘. 분유 줘. 라고 하면, 온몸의 뼈와 근육은 발달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그리고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에이, 예수님 괜히 믿었다 하고 후회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결국 타락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꿈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어렸을 때 꼭 한 번 타고 싶었던 것이 유모차가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타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어렸을 때 그걸 타볼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제가 유모차를 타고, 손에는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것을 들고는 좋다면서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오늘날 교회 모습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6절~27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리 높은 직분을 받았어도 성경 말씀이 없다면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행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이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기도 응답도 받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이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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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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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회 유익한 그릇
2020년 8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1절 신약 351페이지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ピレモンヘの手紙 11節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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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유익한 그릇” 役に立つ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성경은 빌레몬서입니다. 이 빌레몬서는 1장, 그것도 25절까지 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권위가 다른 책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각 책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권위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빌레몬서처럼 짧은 책보다도 상당히 분량이 있는 창세기나 이사야서가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고 짧은 책에 적힌 내용은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닌, 짧은 책에 적혀 있든 긴 책에 적혀 있든 그 내용의 중요성 역시 우리에게는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살펴볼 이 짧은 빌레몬서에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한 번 간단한 질문부터 해볼까요? 자, 이 쪽을 봐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등등이 있고, 신약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그 책의 내용에 의해 정해진 경우도 있고, 그 책의 주요 인물 이름이 붙여진 경우, 그 책을 적은 사람의 이름, 또는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이나 받는 교회 이름이 책 제목으로 붙여진 경우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대부분 서한, 그러니까 편지 형식으로 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도 편지형식으로 적힌 책입니다만, 그렇다면 빌레몬서에 나오는 이 <빌레몬>이라는 단어는 무슨 이름일까요. 오늘은 좀 선택지가 많습니다. 선택지는 4개입니다.

1번 이 편지를 쓴 사람 이름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
3번 이 편지를 받는 교회 이름
4번 이 편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이름

자, 몇 번일까요. 평소에 성경을 읽으시는 분에게는 어렵지 않겠지요. 예, 정답은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빌레몬서 1절~2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절~2절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キリスト・イエスの囚人パウロと兄弟テモテから、私たちの愛する同労者ピレモンと、
姉妹アッピア、私たちの戦友アルキポ、ならびに、あなたの家にある教会へ。

이 두 구절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전반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 병사 아킵보 그리고 그의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당시 갇혀있었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빌레몬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해서 아마도 로마에 갇혀 있을 때인 서기 60년 정도에 적힌 서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교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네 집, 그러니까 이 편지의 수신인인 빌레몬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게 됩니다만, 이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빌레몬서에 있어서 주인공은 편지 수신인인 빌레몬이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10절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獄中で生んだわが子オネシモのことを、あなたにお願いしたいのです。

사실 이 10절이야말로 이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주요 인물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 있고, 수신인인 빌레몬, 그리고 이 편지에 등장하는 수수깨끼의 인물 <오네시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간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간구인지 한 번 바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길지만 11절~18절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18절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私は、彼を私のもとにとどめておき、獄中にいる間、福音のためにあなたに代わって私に仕えてもらおうと思いました。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オネシモがしばらくの間あなたから離されたのは、おそらく、あなたが永久に彼を取り戻すためであったのでしょう。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ですから、あなたが私を仲間の者だと思うなら、私を迎えるようにオネシモを迎えてください。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핵심 구절은 12절과 14절, 그리고 16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2절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여기서 <너>는 빌레몬일 것이며, <그>는 오네시모입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단순히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돌려보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 쪽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에 대한 기록 중에서 14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4절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이 글을 보면 참으로 묘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무엇인가 해줄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될 것인데, 그 이전에 이를 위해서 빌레몬의 승낙을 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 당신의 승낙 없이는 오네시모에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를 푸는 열쇠가 바로 16절에 있습니다.


빌레몬서 16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오네시모를 다음부터는 종처럼 대하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마치 나 바울에게 하듯이 오네시모에게도 해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본다면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우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망을 나온 것 같습니다. 바울이 11절에서 “전에는 네게 무익했다 (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 고 쓴 것으로 짐작을 하자면 그는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새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것도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면 당시로서는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습니다. 주인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끔찍한 형벌을 내릴 수도 있었고, 하물며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마저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종을 죽일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를 해방시켜줄 권한, 즉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 곁에 두고 싶었음도 불구하고 우선 빌레몬에게 보낸다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오네시모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궁금한 사람은 빌레몬이지요. 여러 책에 보면 이 빌레몬은 골로새 시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골로새는 지금 현재 터키에 있는 호나스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고 오직 빌레몬서에만 등장하는데, 빌레몬서에 보면 골로새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를 골로새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로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역시 바울 서신인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また彼は、あなたがたの仲間の一人で、忠実な、愛する兄弟オネシモと一緒に行きます。この二人がこちらの様子をすべて知らせます。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너희에게서 왔다>라고 한다면 이는 골로새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왔다고 하면, 그가 골로새에서 있을 때에는 당연히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빌레몬은 골로새인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골로새 교회는 앞서 빌레몬서 2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서야 드디어 배경이 어느 정도 밝혀졌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살았었습니다만, 거기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일입니다.

그가 어디까지 도망쳤냐 하면 당시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에게까지 오게 되었는데, 골로새에서 로마까지는 거리가 무려 2000킬로가 넘습니다. 200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시 까지의 거리가 2200킬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평지만 있나요? 거기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습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잡히면 최소한 끔찍한 고문과 형벌을 받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친 노예인데 말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돈도 없었겠지요.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 없이 달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산 넘고 바다를 건너 2000킬로나 되는 거리를 도망쳤다는 것은 얼마나 결사적인 각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달린 결과 도착한 로마에서 그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무익했던 오네시모, 누군가의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에 불과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아들>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들고 빌레몬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발걸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온 그 길을 다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주인을 자기 발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이 이 편지를 읽기도 전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울로부터 신임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빌레몬의 노예였으며, 그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주인인 빌레몬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이 빌레몬서를 손에 쥐고서 목숨을 걸고 빌레몬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지난 날의 오네시모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제 종이 아니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서 동역자로서 대우를 해달라고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익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우리는 이 구절을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천하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여러 가지 그릇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하다는 구분을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는 금이나 은 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쓴다는 것도 아니요, 나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하게 쓴다는 것이 아니라, 금이든 은이든, 나무든 질그릇이든 이를 막론하고 귀하게 쓰는 경우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을 보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컵은, 이는 꽤 좀 값이 있어 보여요. 정말 기계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든 컵 같아요. 돈을 주고 산다면 적어도 몇 천엔 정도는 할 것만 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좀 애매해요.

물이나 주스를 마시기에는 좀 작고, 녹차를 마시기에는 입이 좀 좁아요. 그렇다고 진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불편해요.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지금은 저희 집에서 양치질 할 때 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좀 고급스러운 컵이나 그릇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릇은 잘 안 써지더라고요. 아무리 예쁘고 값이 나간다 하더라도 그 그릇을 쓸만한 요리를 해먹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어쩌면 찬장 저 안쪽에 들어 있어서,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릇들도 있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반면에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들도 있습니다. 어떤 그릇은 100엔 샵에서 산 그릇들인데 이건 국을 담아도 좋고, 밥을 비벼먹을 때도 좋고, 라면을 먹을 때도 좋고, 참 편리한 그릇입니다. 요즘 100엔짜리 그릇들을 보면 얼마나 잘 나오는지 몰라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내가 많이 쓰는 그릇, 내가 참 편리하게 쓰는 그릇이 그야말로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비슷하게 생긴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은 귀하게 쓰는 그릇이요, 또는 쓰레기통이나 걸레를 빨 때 쓰는 그릇들은 천하게 쓰는 그릇들입니다. 같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항상 깨끗하게 닦고 보기 좋은 곳, 언제든지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두지만, 지저분한 그릇들, 그리고 전혀 쓰지 않는 그릇들은 제아무리 비싼 그릇이라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 유익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익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요, 유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님께 있어서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릇이 유익합니까. 정말 돈 많고 재능 많은 사람이요? 비싼 옷에, 비싼 차에, 비싼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익한가요?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처럼 예쁘고 늘씬하고 키 크고 잘 생기고, 그리고 배도 안 나오고……그래야 귀한 그릇인가요?

아닙니다. 귀한 그릇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무익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리 형편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면, 이제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훌륭한 사도라 하더라도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해줄 권한이 없어요. 오로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한테만 그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머나먼 길을 다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종교지도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신 예수님 뿐입니다. 그 두 손에 십자가의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예수님 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 합니다.

성경 요한 삼서 2절,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한 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 삼서는 빌레몬서보다도 짧습니다. 15절까지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는 대체적으로 사도 요한이 썼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15절 중에 2절이니까 두 번째 나오는 글입니다.

글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항상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이게 특별한가요? 그냥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읽는 사람한테 하는 안부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영혼은 당연히 잘 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운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아니십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을 2천년 전에 누군가가 누군가한테 쓴 편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안부인사 하나로라도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을 보시겠습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私が償います」と書いています。あなたが、あなた自身のことで私にもっと負債があることは、言わないことにします。

이 글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오네시모가 만약 빌레몬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내가 물어주겠다. 그러나 빌레몬 당신도 나한테 빚진 것이 있다는 것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지요?

이 말씀, 어떻습니까. 그저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한테 한 말이요?

이 말씀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이 않습니까.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빌레몬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웃한테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시지요. 예,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이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주시겠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시겠대요. 걱정하지 마시래요.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기억하지? 너도 너를 괴롭힌 사람 못지 않게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기억하지 않니?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 이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나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를 괴롭혔냐. 그래. 내가 갚아줄게. 내가 너의 그 상처를 치료해줄게.

그리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자, 내가 그 녀석을 대신해서 이렇게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줘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지만 우리는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는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폭포수와도 같은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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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회 우리가 가져야 할 것
2020년 8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신약 47페이지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6章 52節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つるぎ)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つるぎ)を取る者はみな剣(つるぎ)で滅び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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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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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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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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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가져야 할 것” 私たちが取るべき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8절~52절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は彼らと合図を決め、「私が口づけをするのが、その人だ。その人を捕まえるのだ」と言っておいた。
それで彼はすぐにイエスに近づき、「先生、こんばんは」と言って口づけした。
イエスは彼に「友よ、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のとき人々は近寄り、イエスに手をかけて捕らえた。
すると、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が、見よ、手を伸ばして剣を抜き、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その耳を切り落とし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 외에 주된 등장인물이 세 명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는 48절에서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 둘째와 셋째는 51절에서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와 <대제사장의 종(大祭司のしもべ)>, 이렇게 세 명입니다.

여기서 첫째,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는 의심의 여지 없이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노렸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밤에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야지만 예수님이 계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는 가룟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갔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一方、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もその場所を知っていた。イエスが弟子たちと、たびたびそこに集まっ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의하면 그 곳은 감람 산(オリーブ山)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감람산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칼을 빼 들고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요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シモン・ペテロは剣を持っていたので、それを抜いて、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右の耳を切り落とした。そのしもべの名はマルコスであった。

이제 이 세 사람 이름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을 이끌고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서 공격을 하자,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 중에서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칼은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무겁고, 제대로 쓰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구나 이 때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주변은 어두웠을 것이고, 주위를 밝히고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군인들이 들고 왔을 횃불이 다였을 것입니다. 그런 어두침침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는 상대방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칼 솜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고기잡이를 하게 되면 힘은 남들보다 강했을지는 모르지만, 칼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힘만 가지고 되나요. 이를 제대로 써서 전투를 하려고 한다면 전문적인 훈련을 통한 기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귀를 떨어뜨릴 수 있었느냐 하면, 이는 의도적으로 귀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군대에 보면 <오발은 명중이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총이나 화살을 써서 과녁 정중앙에 맞추기를 상당히 힘들지만, 본의 아니게 사고로 이를 쏘게 될 경우에는 분명히 무엇인가에 맞아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기를 다룰 때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뜻의 경고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8절에 의하면 당시 그들은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검을 제대로 쓸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굳이 꼽는다면 사도들 중에서 이른바 셀롯,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열심당원 출신인 시몬 정도가 어쩌면 그나마 검을 다룰 수 있었지 않을까 하고, 그 외에는 다들 무기를 다루는 일에 능숙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검은 뭐냐 하면, 그저 단순한 호신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변은 어두컴컴한데 갑자기 무장을 한 여러 군인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밤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있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께서 방금 전에 이 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깊은 밤에 수많은 군대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까지도 잡아가거나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저 앞에 서 있는 놈은 누구야. 가룟 유다 아니야. 저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아도 혈기가 왕성했던 베드로가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행동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몰려오는 공포심과 가룟 유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는 대단히 흥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는 닥치는 대로 휘둘렀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그 중 한 군인의 귀를 베어버렸을 것입니다. 이제 큰 일 났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의 목적은 예수님 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그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자칫하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까지도 붙잡혀 갈 수도 있게 되거나, 더 나아가서 군대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면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는, 말하자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するとイエスは、「やめなさい。そこまでに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して、耳にさわって彼を癒やされた。

예수님께서는 귀가 잘린 대세자장의 군인인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 말고를 위해서 고쳐주셨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법상으로 보면 손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배상이나 보상을 청구할 수가 있는 것처럼, 형법상으로 볼 때에는 피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경찰에 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말이 이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누군가를 때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내 행위에 의해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피해가 발생해야지만 처벌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처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을 보더라도 베드로의 행위로 인해서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말고는 귀가 완전히 회복된 상황에서 베드로를 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즉, 예수님께서는 말고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을 위해서 그의 귀를 고쳐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칭찬을 받아야지요. 아니, 베드로가 왜 칼을 뽑았습니까. 예수님을 지키려고 그 서툴기 짝이 없는, 솔직히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는 칼을 겁도 없이 뽑아 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할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고로 검이라고 하는 것, 동양에서는 도라고 하지요. 검이나 도를 보면 예술적인 가치도 있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따라서도 그 값어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만, 그 본래 목적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 사람을 해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조각이나 문양 같은 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리고 금은보화로 장식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검이나 도의 본래 목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면 이는 그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 번에 한 명을 해칠 수 있는 무기보다는 한 번에 두 세 명을 해칠 수 있는 것이 뛰어난 검이고, 한 번에 열 명, 백 명을 해칠 수 있는 검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전혀 사용할 생각이 없다면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검을 가지고 있다면, 필요할 때가 되면 언제든지 그 칼을 칼집에서 뽑아서 상대방을 공격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그 검을 가지고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칼이라고 하는 것이 꽤 무겁습니다. 옛날 일본 사무라이들 보면 평소에도 항상 왼쪽에 두 자루의 칼, 하나는 길고 또 하나는 짧은 것인데, 이를 항상 꽂고 다니니까, 사무라이들은 좌우의 발바닥 크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칼을 항상 꽂고 다니는 왼쪽 발바닥이 오른쪽에 비해 더 컸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무겁고, 그러다 보니 몸에 부담도 많이 가는 무기였던 것이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떤 위험이 닥쳤을 때 그 무기를 쓴다면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아주 긴급할 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 그처럼 무겁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을 들고 다닐 필요는 전혀 없겠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그 무기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무기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칼이라는 것은 첫째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둘째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기껏 가지고 있는 칼을 쓰지 말고 칼집에 꽂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요?

자,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문제입니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율법이 있다? 없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레위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보십시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 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것을 너희들이 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만,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사람들이 말씀을 안 읽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 이것 어디서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는데요. 그리고 특별히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사님들이 성경말씀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펼치는 것은, 그것은 읽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리 교양서나 기독교서적을 읽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찬송과 금식과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혀 있지 않는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백성들도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ですから、明日のことまで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明日のことは明日が心配します。苦労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

참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의 두 번째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더러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더러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마태복음 5장 25절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 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 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이 생겼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옵니다. 나를 해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겨야겠지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강하고 담대하라. 주님을 믿고 당당히 나가서 싸워서 이기자.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고발하는 놈이 이웃이에요? 아니에요.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믿습니다! 하면서 당장 싸워야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러지 마. 싸우지 말라고. 너 좀 걱정 좀 해봐. 저놈이 너를 옥에 가둘지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 너 지금 당장 가서 빨리 화해 해.

그러면 우리는 뭐라 그래요? 아니, 예수님, 나 예수님을 믿는다니까요.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 듣기 싫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화해 해.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서 화해 하란 말이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말씀도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이웃이 먼저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기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말하자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배를 드리다가, 아차, 내가 형제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그 사람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래요?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리다 말고라도 좋으니까 어서 가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하고 나서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던지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対抗)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대적해야 합니까.

야고보서 4장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ですから、神に従い、悪魔に対抗しなさい。そうすれば、悪魔はあなたがたから逃げ去り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적(対抗)해야 할 상대는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 자매가 아닙니다. 바로 마귀 사탄을 대적(対抗)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 사탄한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 형제 자매는 아닙니다. 대적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상대요, 화목해야 할 상대입니다. 우리 이웃을 마귀 사탄이라 생각하고 칼을 뽑았다면 어서 다시 칼집에 꽂고는 더 늦기 전에 화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칼을 쓰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세상적인 지식과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맨날 가난하게 살고, 몸도 안 좋아서 맨날 병원 신세를 지고 사는데, 그러면서 이웃더러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저처럼 되요” 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풍요롭게 살아야 합니다. 강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그저 세상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세상적인 지식, 세상적인 재산, 세상적인 경험, 세상적인 명예만을 의지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한 삶,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무거운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 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혜,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부정하는 인간의 전통은 모두 초등학문이며, 그와 같은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명철은 무엇입니까.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주님을 경외하는 것,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참된 명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니래요. 그건 명철이 아니라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さげす)む。


벌써 이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멸시하면서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담배의 좋고 나쁨은 연기가 될 때가지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담배는 불을 붙여서 피워 봐야, 그리고 사람은 죽고 나서 화장을 해봐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아직은 몰라. 뭐든지 끝까지 가봐야 알아.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가봐야 아나요?

만약에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안 달리셨어요. 장차 미래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수도 있고, 안 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도 장담 못하지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주신다면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고,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의 죄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까지 가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칼을 가지는 자는 어떤 사람이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그렇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이웃 형제 자매를 공격하고 세상적인 힘과 지식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다 칼로 망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칼 대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십자가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만이 살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이웃을 공격할 칼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 대신 의지할 세상적인 힘과 돈과 명예가 있습니까. 어서 더 늦기 전에 그 칼을 빨리 칼집에 꽂으셔야 합니다. 다시는 뽑아서도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칼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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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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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2020년 8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 신약 257페이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21節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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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つ方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SNS를 이용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참으로 많은 글들이 올라옵니다. 페이스북에 보면 최대 5000명까지 친구를 맺을 수가 있는데, 저와 연결된 친구 수는 거기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글들을 보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인가에 대해서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은 저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하고 열변을 토합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글보다는 오히려 비판하고 비난하는 글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말들이 주를 이루는 곳은 아무래도 정치판에 비할 수가 없겠지요. 한국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다당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이 여당은 야당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을 비판할 것입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당제를 부정하고 일당독재를 하는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보면 더욱 부작용이 많다고 하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주목하고 비판할 부분이 있으면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건전한 정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비판만 있다면 이것도 문제겠지요. 가장 좋은 것은 비판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보다도 먼저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간에 평가를 해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서 무슨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무조건 비판과 비난 일색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거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정책, 자신들의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도, 때로는 상대방을 헐뜯고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정치하시는 분들이 교양이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학력이나 경력을 보면 참으로 화려한 경우가 적지 않지요. 대부분이 그야말로 상위 몇 프로에 해당될 정도로 고학력입니다.

그렇다면 배울 만큼 배우고 교양도 쌓을 만큼 쌓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선거 같을 것을 보면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것이 선거에 있어서 자신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내 지지가 1표 늘어난다고 가정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이미지가 깎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지지는 -1표, 그리고 상대방의 안 좋은 부분을 지적하니까 자신이 옳다고 강조할 수 있기 때문에 +1표, 이렇게 되면 2표가 늘어나게 됩니다.

즉, 나 혼자 좋은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두 배의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 분들이 못 배워서나 머리가 안 좋아서 그렇게 교양 없이 서로를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효과적인 전술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방을 비난하면, 자기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한테는 약점이 없나요? 자기 자신은 상대방에 비해서 오점도 없고 잘못도 없고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나요?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로 형편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속적인 것에 한 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왔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ために、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主であるからだ。あなたがたは聖なる者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が聖だからである。」

이와 같은 말씀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말씀으로 묵상하고 찬송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고는, 밤이 되면 감사와 기도로 잠이 듭니다.

여러분도 저를 본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분들은 뭐 워낙 배려심이 많으신 분들이시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아, 그런가 보다, 아멘, 하고 은혜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아오셨던 부모님, 이 말씀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은 날의 친구 선후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 집사람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거룩? 웃기고 있네”

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내가 자기를 아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면서 당연히 비웃겠지요.


그러면 제 주변 사람들만 저를 비웃을 것 같으십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여기에는 두 권의 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기록된 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행위는 이 책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록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거룩하게만 살아왔다는 말을 했을 때,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역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돈을 주세요, 집을 주세요, 차를 주세요, 하는 기도도 중요합니다만, 만약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꼭 한 번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만에 하나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면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여줄게. 자, 책 아무데나 한 번 펴볼까. 하고 펴신 다음에 주님께서 한 줄 한 줄 읽어가십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얼굴이 화끈화끈 거립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주위를 보니 주님께서 읽으시는 것을 수많은 천사들과 수많은 천국 백성들이 다 듣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로마서 2장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사람에 따라서는……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 대신 <누구를 막론하고>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너도 똑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행실이 완벽해서 주님의 십자가 없이도 스스로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시대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다고요?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을 해 봤자, 아무리 청렴 결백한 척을 해 봤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봐. 너나 그 쟤나 똑같잖아. 너도 그걸 잘 알잖아. 몰라? 그럼 그 책을 한 번 읽어줄까?

이렇게 말씀을 안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ですから、主が来 られるまでは、何についても先走って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主は、闇に隠れたことも明るみに出し、心の中のはかりごとも明らかにされます。そのときに、神からそれぞれの人に称賛が与えられるのです。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정죄한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는 저게 나쁘다. 너는 저게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요? 예,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그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잡아다가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경찰한테 말합니다.

“경찰 아저씨, 이 녀석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제가 데리고 온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가 뭔데?”라고 비웃겠지요.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반대로 제가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 경찰아저씨는 왜 저를 비웃었을까요. 그렇지요. 제가 판사입니까? 제가 뭔데 그 사람을 잡아가지고 징역 5년이다 10년이다 판단하고 가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물며 판사라고 해도 아무 사람이나 잡아다가 선고를 내릴 수가 없지요. 정해진 재판 절차에 따라서 행해질 때에만 그 행위가 유효합니다.

자, 답답합니다. 분명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물론 현행법을 어겼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 마음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주었어요. 너무나도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어요. 제 마음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고 판단하지도 말고 정죄하지도 말래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復讐と報復はわたしのもの。それは彼らの足がよろめくときのため。彼らのわざわいの日は近く、来たるべき時が速やかに来る。」

이 기록에 대해서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먼저 로마서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다음으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私たちは、「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また、「主は御民をさばかれる」と言われる方を知っています。

누군가가 너에게 상처를 줘도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너는 그냥 참고 있어라. 왜냐하면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묵묵히 참고만 있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걱정 말아. 너 대신 내가 갚아 주겠다. 내가 원수를 갚아 주겠다. 내가 억울함을 갚아 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해하고 억울해하고 속상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과 또 하나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요? 예, 있습니다. 일본 인기 드라마인 한자와 나오키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었지요? 倍返しだ. 두 배로 갚아주마. 이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게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당한 것의 두 배로 너한테 해주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한테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나한테 100이라는 죄를 지었어요. 이로 인해서 나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 배는 아니더라도 그대로 되갚아준다고 하면 나 또한 1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배로 갚아준다면 2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하지 말아. 내가 할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판단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진정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넘긴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힘들게 판단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수를 갚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판단을 다 해주시고, 원수 갚을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실 테니까, 억울함을 풀어주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테니까, 이를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인데, 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떵떵거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어요.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속이 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벌을 내리실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리실 것이요,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회개를 해서 나한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가 화목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안에는 고통이나 괴로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해 다녀야 하나요? 하나님이 언제 벌을 내리실지 숨어서 지켜보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12장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여기서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는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는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한테보다 원수한테 특별히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수든 아니든 똑같이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요즘은 법을 꼭 전공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법률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이른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씀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형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않는 한, 그 사람한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유죄가 확정되기 전이라 하더라도, 도주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하면 구속될 수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원칙적으로 범죄인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이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판단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생각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죄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우리 주변의 다른 이웃처럼 그가 배고파 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다고 하면 물을 주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 유죄판결을 내렸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도 그 사람을 죄인취급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못합니다.


억울하신가요? 아니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판결 전에 회개한다면 우리와 다시 만나서 화목(和解)할 수 있겠습니다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영원히 만날 수가 없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겨서는 안 됩니다. 악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당한 악보다도 훨씬 더 심한 악을 행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했는데, 그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는데, 또다시 우리가 죄에 물들게 된다면 얼마나 주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인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 평안과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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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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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회 율법의 참뜻
2020년 8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7절 신약 248페이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7節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 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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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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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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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율법의 참뜻” 律法の真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저를 포함해서 교회까지 오실 때에 차를 타고 오셨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운전을 하고 오시는 경우도 있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동네 교회에 갈 때 꼭 차를 타지 않더라도 걸어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를 타든 걷든 간에 이동을 하다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호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도 운전을 하다 보면 이 신호등이 참으로 묘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급할 때면 급할수록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지, 빨긴 신호가 수도 없이 잘 걸립니다. 정말 하나 걸러 하나씩, 마음이 더 급할 때면 조금 가다 걸리고, 또 조금 가다 걸리고, 연속으로 몇 번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정말 내려서 그 신호등을 한 대 때려주고 싶어요. 물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들 내려서 때릴까 봐 대부분 신호등은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요. 그래서 때릴 수도 없어요.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때면 어때요? 예를 들어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메일이나 카톡이 왔어요. 하지만 운전을 하고 있으면 확인할 수도 없잖아요. 옆에 저희 집사람이라도 있으면 좀 확인을 해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 혼자인 경우에는 그러지도 못합니다. 급할 경우에는 길 옆에 세우기라도 하면 되겠지만, 뭐 그렇게 급한 용무라면 카톡이나 메일이 아니라 전화가 걸려 왔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신호라도 걸리면 확인해봐야겠다고 하는데, 꼭 그럴 때일수록 또 기가 막히게 신호가 안 걸립니다. 뭐, 심할 때에는 10분~20분 정도 그냥 파란 신호가 착착 떨어져서 달릴 때도 있어요. 또 그럴 때는 별로 급한 일도 없습니다.

뭐, 사람사리가 다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이 신호등조차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일본에서는 일반 승용차인 경우 빨간 신호를 무시하면 벌금 9천 엔입니다. 그리고 속도를 15킬로 정도를 위반해도 9천엔, 그 이상은 12,000엔, 15,000엔……이런 식으로 늘어납니다. 그야말로 적지 않은 돈이 나가는 셈이지요.

왜 이렇게 벌금을 내야 하느냐 하면 이는 도로교통법에 규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아마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면허를 따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나라 중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시험도 어렵고 일반적으로 면허를 따는 데에 드는 비용만 하더라도 최소한 30만 엔 정도라고 하지요.

거기다가 이처럼 규정도 까다롭고 한 번 걸리면 인정사정 없이 딱지를 떼이게 됩니다. 옛날에는 한국에 보면 좀 봐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같으면 엄격해지면 엄격해졌지 그렇게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하지요.

자, 그러면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 참 살기가 힘든 나라라고 생각되시나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도 그렇게 차를 많이 타고 바깥에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리고 오늘도 교회까지 올 때 차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안 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그런 것입니다만, 세상적으로 본다면? 예, 그렇습니다. 신호등이 있었기 때문이요 도로교통법이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은 내 앞길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데 다른 차들이 나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깜빡깜빡 잊고는, 도대체 내 앞길을 가로막는 신호등, 나를 빨리 달리지 못하게 만드는 속도제한……이렇게만 생각을 하니 불평불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어떨까요.

신명기 25장에 나와 있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4절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脱穀をしている牛に口籠(くつこ)をはめてはならない。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밀 같은 곡식을 거두고 난 다음에는 껍질이 있기 때문에 타작을 해야 합니다. 당시 타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소한테 이렇게 밟게 해가지고 타작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을 하냐 하면, 소가 타작을 하나가 거기 떨어져 있는 낟알을 주워먹기도 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 기껏 공들여서 길러온 곡식을 이제 간신히 추수를 해서 타작을 하려는 상황인데, 이를 소들이 일하면서 주어먹으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그 때까지는 소 입에 망을 씌우고 일을 시켰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요 오히려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싶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자신이 만드신 짐승까지도 아끼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됩니까. 정말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라…… 물론 나쁜 말은 아니지요.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해서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9절~10절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モーセの律法には「脱穀をしている牛に口籠をはめてはならない」と書いてあります。はたして神は、牛のことを気にかけておられる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のために言っ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そうです。私たちのために書かれているのです。なぜなら、耕す者が望みを持って耕し、脱穀する者が分配を受ける望みを持って仕事をするのは、当然だからです。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는 소를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득을 보는 것은 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요. 사람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탈곡하는 소한테도 소망이 있어야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가 일을 하는데 배가 고파서 힘이 떨어지고 픽픽 쓰러지고 하면 그것은 누구 손해가 되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그 주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소가 일을 하면서 좀 주워먹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비슷한 규정들이 율법에는 꽤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あなたの土地の初穂の最上のものを、あなたの神、主の家に持って来なければならない。あなたは子やぎをその母の乳で煮てはならない。

레위기 22장 27절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牛か羊かやぎが生まれたときは、七日間、その母親のもとに置いておく。八日目以後、それは主への食物のささげ物として受け入れられる。

먼저 출애굽기 23장 19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요리할 때 염소 젖으로 삶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 쓰는 염소 젖을 그 새끼의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냐 하면, 당시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서, 새끼 염소를 요리할 때에, 그 새끼 염소의 어미 젖을 쓰면 맛이 더 좋아진다고 사람들이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겉보기는 그 새끼 염소의 어미 젖이나 다른 염소 젖이나 같을지는 모르지만, 본래 어미의 젖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새끼가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그 젖으로 새끼를 삶는다는 것이, 사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그리고 레위기 22장 27절에서 보면 당시에는 하나님께 새끼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도 바로 태어난 것을 곧바로 드리지 말고, 7일 정도는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친히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요, 세심한 데까지 배려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출애굽기 23장 19절이나 레위기 22장 27절의 기록이 양이나 염소를 위한 율법인가요?

만약에 이와 같은 규정이 양이나 염소를 위한 율법이라고 한다면, 이는 말하자면 도로교통법이 신호등과 도로 표지판을 위한 법률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니, 도로교통법이 신호등이나 무슨 횡단보도나 도로 표지판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법률인가요? 아니에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도로교통법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법률이나 규정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과거에는 독재자나 특정 소수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률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는 악법입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법들이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대부분의 헌법이나 법률, 법령, 조례 같은 규정들은, 이는 동물이나 식물과도 같은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하는 법률도 모두 포함해서, 모두가 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율법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잔인한 것에서 떠나고, 사람에 비한다면 아주 하찮다고도 할 수 있는 짐승한테까지도 자비를 베푸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아직 다행히 일본에서는 위반 딱지를 뗀 적은 없습니다만, 다른 나라에 있을 때에는 몇 번 뗀 적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속도위반이지요. ㅎㅎ

그런데 그걸 뗄 때에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사가 넘쳐 나오겠습니까. 할렐루야. 딱지를 떼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웬만해서는 안 나오겠지요. 오히려, 아이, 참 남들은 안 걸리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 그런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법률,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 또한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경찰에 안 잡히고 그대로 갔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다른 것에 부딪치거나 하면 이는 돈 몇 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전에 그런 일이 있을까 봐, 벌써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 정말 바쁜 경찰 아저씨들을 친히 그 자리까지 보내주셔서, 미리 큰 사고를 막게 하시고, 돈 몇 푼 내고 다시금 안전운전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서 12장 5절~8절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そして、あなたがたに向かって子どもたちに対するように語られた、この励 ましのことばを忘れています。「わが子よ、主の訓練を軽んじてはならない。主に叱られて気落ちしてはならない。
主はその愛する者を訓練し、受け入れるすべての子に、むちを加えられるのだから。」
訓練として耐え忍びなさい。神はあなたがたを子として扱っておられるのです。父が訓練しない子がいるでしょ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すべての子が受けている訓練を受けていないとしたら、私生児であって、本当の子ではありません。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참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と海、またそれら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んだからである。それゆえ、主は安息日を祝福し、これを聖なるものとした。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해서 쉬셨습니까.

이사야 40장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あなたは知らないのか。聞いたことがないのか。主は永遠の神、地の果てまで創造した方。疲れることなく、弱ることなく、その英知は測り知れない。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기록합니다. 6일이 아니라 600년, 6000년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더라도, 영원히 피곤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쉬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쉬어 주신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이 퇴근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막 벌건 눈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어요.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셔요. 그런 상황에서 밑에 있는 직원이,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윗사람이 쉬어야 아랫사람도 쉴 수 있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법률 중에서는 독재자나 권력자를 위한 악법이 더러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율법은 하나님을 위한 법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디를 차를 몰고 갔다가 집에 도착해서 차를 세울 때 보면, 다른 아파트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다 지정된 장소가 있잖아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세우는 곳 바로 옆에 보면 항상 검정색 차가 있어요. 그것도 작은 차가 아니라 좀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SUV 차량입니다. 그리고 저희 차를 세워 놓는 곳을 보면, 앞에 있는 공간이 그리 넓은 편이 아니거든요.

자, 그러면 오늘은 좀 간단한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디 갔다가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차를 주차하려고 해요. 그러면 옆에 그 제법 몸집이 큰 검은 SUV 차가 서 있는 게 주차하기 편할까요. 아니면 안 서있는 게 주차하기 편할까요.

금방 생각을 하면 아니, 당연히 옆에 아무 것도 없는 게 차를 세우기 편하겠죠. 잘못했다가 긁히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실제로 차를 세우다 보면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지금 이 집에 산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실제로 운전을 하다 보면, 그 차가 거기 서 있는 편이 오히려 주차하기가 훨씬 편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땅바닥에 그려진 그 주차 라인이 좀 희미합니다. 그래서 낮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예요.

그런데 주차를 할 때에 그 차가 서 있으면, 라인을 보지 않더라도 그 서 있는 차를 조심하면서 끼고 돌면 정확하게 주차 위치에 세울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차가 거기 안 서 있으면, 기준이 되는 것이 없으니까 오히려 좀 주차 위치에서 빗나가버리는 바람에 다시 주차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차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아, 이게 바로 율법이구나. 이 차가 여기 서 있어서 불편하게 느낄 때도 있지만, 이 차가 여기 세워져 있는 덕분에 내가 이를 피하면서 제대로 된 곳에 세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 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디로 가면 천국인지 어디로 가면 지옥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명확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떨 때는 참 귀찮을 때도 있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마음은 급한데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내려서 신호등을 막 때려주고 싶을 때처럼, 정말 힘든 일은 계속되고,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고 속이 상하고 답답할 때 당장 하나님 앞에 가서, 정말 이럴 수가 있냐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시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양과 염소까지도 잔인하게 대하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 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에게 더 이상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참뜻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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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회 활짝 열린 길 앞에서
20207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절~38절 신약 84페이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マルコの福音書 15章37節~38節
“しかし、イエスは大声をあげて、息を引き取られた。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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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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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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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활짝 열린 길 앞에서” 大きくひらかれた道の前で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데, 이 일은 공관복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 인해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휘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 성전에서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지성소인데, 지성소……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성소를 “거룩한 장소”라고 한다면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고 하는 뜻이 됩니다.

이 지성소의 넓이는 대략 4.5미터 곱하기 4.5미터 정도, 평수로 대략 6평 정도 다타미 12조 정도 되는 정사각형 모양을 한, 가정집 기준으로 본다면 조금 넓은 방, 정도 되는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거기는 왜 지성소 즉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고 불리느냐 하면,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하는데, 언약궤 안에는 일반적으로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돌판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친히 쓰셔서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일반적으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흥미로운 점은, 사실 이 언약궤 안에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의견이 갈립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면 보통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외에, 만나가 들었던 금 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만나라고 하는 것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수 백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무려 40년간이나 먹이셨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관된 것입니다.

한편 아론의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민수기 16장에 보면 광야에서 모세의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고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시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거죠.

우리도 할 수 있는데, 왜 너희들만 해 먹느냐 이것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각 지파 족장들을 모아놓고 각각 자기 지팡이에 이름을 적어서 언약궤 앞에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음날 보니까 어떻게 되었냐 하면, 민수기 17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17장 8절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その翌日、モーセはあかしの天幕に入って行った。すると見よ。レビの家のためのアロンの杖が芽を出し、つぼみをつけ、花を咲かせて、アーモンドの実を結んでいた。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을 본 다른 지파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택하시고 자기들은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론의 지팡이도 보관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하, 언약궤 안에는 돌판과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었구나……하면 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8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거든요.

열왕기상 8장 9절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箱の中には、二枚の石の板のほかには何も入っていなかった。これ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エジプトの地から出て来 たとき、主が彼らと契約を結ばれた際に、モーセがホレブでそこに納めたものである。

이와 같은 내용은 역대하 5장 10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 안에는 두 돌판이 들어있을 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적힌 돌판만 들어있었구나 하고 끝나면 좋겠는데, 여기에도 또 문제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3절~4절을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3절~4절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また、第二の垂れ幕のうしろには、至聖所と呼ばれる幕屋があり、
そこには金の香壇と、全面を金でおおわれた契約の箱があり、箱の中には、マナの入った金の壺、芽を出したアロンの杖、契約の板がありました。


참 이럴 때 보면 난감합니다. 우리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8장 9절에 보면 돌판만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서 9장 3절~4절에 보면 돌판만이 아니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까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처음에는 언약궤 안에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중에 없어졌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 이 언약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때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없어지고 돌판만 남았다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이는 성경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 여기서 돌판과 만나와 지팡이를 보관할 때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돌판에 대한 기록을 봅니다.

출애굽기 40장 20절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また、さとしの板を取って箱に納め、棒を箱に付け、「宥(なだ)めの蓋」を箱の上に置き、


신명기 10장 5절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私は向き直って山を下り、それらの板を、私が作った箱の中に納めた。主が私に命じられたとおり、それらはそこにある。

이렇게 본다면 돌판을 언약궤 안에 넣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만나가 든 금 항아리입니다.

출애굽기 16장 32절~34절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モーセは言った。「主が命じられたことはこうだ。『それを一オメル分、あなたがたの子孫のために保存し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ときに、荒野であなたがたに食べさせたパンを、彼らが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モーセはアロンに言った。「壺を一つ持って来て、マナを一オメル分その中に入れ、それを主の前に置いて、あなたがたの子孫のために保存しなさい。」
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とおり、アロンはそれを保存するために、さとしの板の前に置いた。


여기서는 언약궤 안에 보관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증거판 앞에” 두게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론의 지팡이에 대해서 보면 민수기 17장 10절입니다.

민수기 17장 10절
“1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アロンの杖をあかしの箱の前に戻して、逆らう者たちへの戒めのために、しるしとせよ。彼らの不平をわたしから全くなくせ。彼らが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여기서 보면 이 또한 증거궤 안이 아니라 증거궤 앞으로 가져다가 보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사실 언약궤 안에는 돌판만 들어 있었고,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는 언약궤 바깥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그러면 히브리서 기록은 어떻게 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히 언약궤 안에 모두 들어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언약궤의 개념적인 설명이었기 때문에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기록하였다고 주장을 합니다.

솔직히 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당장 그걸 한 번 열어보면 되잖아요. 하지만 이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벧세메스(ベテ・シェメシュ) 사람들이 이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열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지금은 이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불명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지요. 그러니까 열어보고 싶어도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열어볼 방법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학문적으로는 흥미로울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믿음에 있어서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언약궤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 물건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 언약궤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라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다라고 하는 점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는 대단히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뿐이었는데, 그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지성소에는 1년에 한 번만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곳입니다.

이 지성소 입구에 있던 것이 바로 오늘의 핵심 내용인 휘장이었던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이 휘장 때문에 지성소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휘장의 크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고대 문헌에 의하면 길이가 대략 22미터, 폭은 11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평수로 따지자면 73평이나 됩니다. 아파트 중에서도 꽤 넓은 아파트가 되겠지요.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넓이가 아니라 두께입니다. 많은 분들이 <휘장>이라고 하면 무슨 커튼 같은 얇은 것을 상상하기 쉽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이 휘장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십니까.

한번 여러분의 손바닥을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손가락 사이를 붙여서 한 번 펼쳐보세요. 이 폭이 바로 그 휘장 두께였다고 합니다. 대략 9센티에서 10센티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껍죠? 그렇다고 여기 안에 솜이나 스펀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빽빽하고 단단한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넓은 아파트 한 채 정도 되는 크기의 카페트, 그리고 두께가 10센티 정도나 되는 카페트가 순식간에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상이 가십니까.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카페트는 어느 정도 두께예요? 아무리 두꺼워 봤자 1센티에서 2센티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찢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솔직히 일반 가위나 칼을 쓴다 하더라도 쉽게 자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센티도 아니고 10센티라고 하면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찢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 휘장이 어떻게 찢어졌다고 합니까.

마가복음 15장 38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앞서서 휘장은 높이가 22미터 정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백 보 양보를 해서, 정말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과도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이 휘장을 찢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럴 경우 휘장은 어떻게 찢어져야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찢어져야 했겠지요. 하지만 오늘 기록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를 찢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휘장을 이렇게 찢으셔야만 했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속이 상해서 찢으셨을까요?

이를 푸는 중요한 단서는 바로 이 휘장에 그려진 무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 31절~33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32.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33.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また、青、紫、緋色の撚り糸、それに撚り糸で織った亜麻布を用いて、垂れ幕を作る。これに意匠を凝らしてケルビムを織り出す。
この垂れ幕を、金をかぶせたアカシヤ材の四本の柱に付ける。その鉤は金で、柱は四つの銀の台座の上に据えられる。
その垂れ幕を留め金の下に掛け、垂れ幕の内側に、あかしの箱を運び入れる。その垂れ幕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聖所と至聖所との仕切りとなる。

여기에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는 그룹(ケルビム)들을 수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예전에 제가 말씀 드렸던 천사의 구분에 대해서 기억하십니까.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반 천사와 스랍천사(セラフィム), 그리고 그룹천사(ケルビム)였지요. 일반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를 실행하는 충실한 천사입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장 미가엘(御使いのかしらミカエル), 가브리엘 천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스랍천사(セラフィム)는 이사야 6장에만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천사가 바로 그룹천사(ケルビム)입니다. 그룹천사가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벌써 등장을 합니다. 천사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사실은 기억하시지요?

그 때의 상황에서 이 그룹천사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즉 이 그룹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는 누구로부터 지키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죄인 아담과 하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룹 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에 새겨진 그룹 천사의 역할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에 그룹 천사가 새겨진 이유는, 이 휘장의 역할을 잘 말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룹천사가 새겨진 그 크고 두꺼운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그 때까지는 우리가 죄인이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고,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던 그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는 친히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휘장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용서를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를 보면 모세 때의 홍해가 떠오릅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울 수 있는 무기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마치 그 두꺼운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주셨던 것처럼 홍해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로 남녀노소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추격해오는 애굽의 최정예 군대를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힘으로는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로막힌 휘장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 주시고, 휘장을 갈라서 길을 내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イエスはご自分の肉体という垂れ幕を通して、私たちのために、この新しい生ける道を開いてくださいました。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동안 우리를 가로막고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찢어진 휘장,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18절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実に、キリストこそ私たちの平和です。キリストは私たち二つのものを一つにし、ご自分の肉において、隔ての壁である敵意を打ち壊し、
様々な規定から成る戒めの律法を廃棄されました。こうしてキリストは、この二つをご自分において新しい一人の人に造り上げて平和を実現し、
二つのものを一つのからだとして、十字架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敵意を十字架によって滅ぼされました。
また、キリストは来て、遠くにいたあなたがたに平和を、また近くにいた人々にも平和を、福音として伝えられました。
このキリストを通して、私たち二つのものが、一つの御霊によって御父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라는 이름의 담을, 주님의 육체로 헐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あがな)いを通して、価(あたい)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없습니다.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홍해 바다를 1센티도 가르지 못합니다. 그 두꺼운 휘장을 1센티도 찢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 앞에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앉아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만 계시겠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하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시 그들은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에 의해 처참만 모습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살 수 있었습니까. 그렇죠. 눈앞에 열린 길을 과감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추격해오는 이들이 없습니까. 아니요.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마귀 사탄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주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함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からだが霊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と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です。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 결과 홍해가 갈라졌어요. 휘장이 찢어졌어요. 이제 홍해를 건널 수 있습니다. 지성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건너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되면 이는 애굽 군대한테 죽든 마귀 사탄에게 삼킴을 당하든, 아무리 믿음이 있어봤자 행함이 없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는 역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을 들으면 참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말씀을 보면 뭐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과연 그것이었나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죽으려고 가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 생각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기부인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마저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거창한 일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기 싫어요. 성경을 읽기 싫어요. 기도하기 싫어요. 봉사하기 싫어요. 전도하기 싫어요. 내가 미워하는 이웃과 화해하기 싫어요.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 내가 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이는 죽으러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꼭 고생을 해야지만 복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꼭 누구처럼 일본 군마현에 있는 시골까지 선교를 하러 가야지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6절~8절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私たちは、与えられた恵みにしたがって、異なる賜物を持っているので、それが預言であれば、その信仰に応じて預言し、
奉仕であれば奉仕し、教える人であれば教え、
勧めをする人であれば勧め、分け与える人は惜しまずに分け与え、指導する人は熱心に指導し、慈善を行う人は喜んでそれを行いなさい。

이처럼 저에게 맡겨진 은사는 따로 있고 여러분께 맡겨진 은사는 따로 있습니다. 이 모든 행함이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우리에게 맡기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활짝 열린 믿음의 길을, 우리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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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20207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3장 25절 구약 265페이지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申命記 3章25節
“どうか私が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またレバノンを見られ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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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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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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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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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カナンの地に入る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민수기 20장 2절부터 보면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이른바 미르바의 물(メリバの水) 사건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만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물이 떨어져서였습니다. 민수기 20장 2절~5절까지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20장 2절~5절
“2.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4.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そこには、会衆のための水がなかった。彼らは集まってモーセとアロンに逆らった。
民はモーセと争って言った。「ああ、われわれの兄弟たちが主の前で死んだとき、われわれも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に。
なぜ、あなたがたは主の集会をこの荒野に引き入れ、われわれと、われわれの家畜をここ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
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り、このひどい場所に引き入れたのか。ここは穀物も、いちじくも、ぶどうも、ざくろも育つような場所ではない。そのうえ、飲み水さえない。」

사람들이 이렇게 모세한테 불만을 토로하니까 모세와 아론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어서 7절~8절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20장 7절~8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이와 갈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고 이제 모세가 움직입니다. 그 다음 9절~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민수기 20장 9절~11절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여기까지의 내용,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좀 식상하기도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남의 나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해오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로 탈출시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홍해를 갈라주셔서 당시 200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건너게 해주시고, 반면에 애굽의 최정예 군대들을 전멸시켜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해주신 하나님.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뻑하면 물이 없네, 고기가 먹고 싶네 하고 맨날 불평 불만을 달고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당시 이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지금 있는 것,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보지는 않고, 그저 없는 것만 달라고 하면서 살았던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응답해주시곤 했었습니다. 뭐, 한 두 번 있어왔던 일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인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민수기 20장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본다면, 그렇게 믿음이 적어서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혼나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냥 꾸짖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기로 한 땅에 너희들 모세와 아론은 들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화가 나신 것일까요.

이 일을 논할 때에는 이번 일과 가장 비슷했던 경우를 한 번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6절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出エジプト記 17章 1節~6節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主の命によりシンの荒野を旅立ち、旅を続けてレフィディムに宿営した。しかし、そこには民の飲み水がなかった。
民はモーセと争い、「われわれに飲む水を与えよ」と言った。モーセは彼らに「あなたがたはなぜ私と争うのか。なぜ主を試みるのか」と言った。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そこで、モーセは主に叫んで言った。「私はこの民をどうすればよいのでしょう。今にも、彼らは私を石で打ち殺そうとしています。」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民の前を通り、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何人か連れて、あなたがナイル川を打ったあの杖を手に取り、そして行け。
さあ、わたしはそこ、ホレブの岩の上で、あなたの前に立 つ。あなたはその岩を打て。岩から水が出て、民はそれを飲む。」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の目の前で、そのとおりに行った。

어떠십니까. 이 말씀과, 방금 전에 보셨던 민수기 20장 말씀을 보시면 거의 비슷하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민수기 20장에서는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일단 두 말씀 중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말씀부터 볼까요? 출애굽기 17장 5절~6절입니다.


출애굽기 17장 5절~6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民の前を通り、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何人か連れて、あなたがナイル川を打ったあの杖を手に取り、そして行け。
さあ、わたしはそこ、ホレブの岩の上で、あなたの前に立 つ。あなたはその岩を打て。岩から水が出て、民はそれを飲む。」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の目の前で、そのとおりに行った。

그리고 민수기 20장 7절~11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民数記 20章 7節~11節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이 두 말씀을 단순하게 비교해본다면, 먼저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그대로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반면에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치지 말고 그냥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라고 말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냐 하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모세더러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모세가 지금까지 고생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최종목표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없는 돈 쪼개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4년 동안 대학공부를 했는데, 마지막 학기 한달 앞두고, 넌 졸업 못해……라는 말을 들어도 충격적일 텐데, 이는 4년이 아니라 4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제 조금 있으면 그토록 꿈에도 그렸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직전에 너는 못 들어가……라는 무서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모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바위에 막대기를 두 번 두드린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요?

이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모세가 이러이러한 구체적인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라고 하는 명확한 답이 성경 어디에도 적혀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뭐냐 하면, 모세가 지나치게 신경질을 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꽤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민수기 20장 10절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이를 좀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야 나쁜 놈들아, 우리가 너희들 같은 놈들한테도 물을 줘야겠냐!” 하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고 생각하시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 어떠신가요? 아무리 모세라도 그렇지 너무 말이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세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주장에는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하나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거룩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성질을 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한 말 기억하시나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고 한 이 말은 너무나도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걸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모세가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이 모세가 두드린 반석은 예수님을 뜻하는데,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 17장에서 반석을 두드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석을 두드릴 필요가 없이 말로만 하면 되었는데, 민수기 20장에서 또다시 반석을 두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다는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모세에게 실수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이토록 엄하게 하시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일반인이 아니라 지도자의 실수는 이처럼 엄격하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이렇게 그분들은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 이유는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하는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통곡을 하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30절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이는 같은 민수기이지만 14장 이 부분은 민수기 20장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이 때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40년 전에 모세를 가나안 땅에 안 들여보내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하는 주장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의견들을 여러분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시점에서 잠시 모세의 변호인이 되어보고자 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먼저 첫 번째 이유는, 이 일이 있기 직전, 그에게는 어떤 중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 1절
“1.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第一の月にツィンの荒野に入った。民はカデシュにとどまった。ミリアムはそこで死んで葬られた。


여기서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를 가리킵니다. 이 일이 있던 시기는 광야에서 나오고 대략 40년 정도 된 시점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가고, 드디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날이 다가옵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까지 고생은 고생대로 해왔던 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대단히 상심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자, 앞서 출애굽기 17장에서의 경우와 이번 민수기 20장의 경우를 보면, 상황은 비슷합니다. 백성들이 마실 물이 떨어졌고,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분명히 다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 1세대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도 봤지요. 홍해의 기적도 봤지요. 만나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습니다. 노예신분이었던 부모한테서 태어났으며, 어른이 될 그 나이까지 노예로만 살아왔습니다. 노예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꿈이 없습니다. 장차 내가 무엇을 하겠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인생의 꿈과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삶, 그것이 바로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겠지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광야 1세대였다고 하면, 그런 이들이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모세에게 불만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래요, 뭐,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고 쳐요.


하지만 민수기 20장에서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 중에는 광야에서 태어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태어난 곳이 광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머지않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철없이 광야 1세대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야, 너희들의 부모들을 잊어버렸냐.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더니 모두다 이 광야 땅에서 죽어버리지 않았냐. 너희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를 좀 덧붙이자면, 아무리 모세라 하더라도 말을 너무 함부로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세와 광야 2세대들의 나이차이는 상당히 컸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당시 나이가 80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만, 그 때 성년들은 다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20장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아무리 많아도 19세 정도라고 한다면, 모세와 나이 차이가 60세나 됩니다. 그러니 민수기 20장 당시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을 때이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부분 많아 봤자 60세가 안됐을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120세였습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연장자라 하더라도 모세에게 있어서는 60세의 나이 차이, 예를 들어 70세 어르신이 열살 아이들을 보는 정도의 수준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그 정도 신경질 좀 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서,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일단 반석이 예수님의 십자가다라고 하는 주장은, 그야말로 신학자들의 소설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지요. 성경 어디에도 그와 같은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시 모세가 그 반석을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드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40년 전부터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계셨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민수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미르바의 물 사건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주장에도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성경 특히 모세오경에 있어서 이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노예로 살아왔던 우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적인 성질을 낸 것은 잘못했지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단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세한테도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다윗을 보더라도 실수를 했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수를 반복해왔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도자가 아니라서 괜찮고 모세는 지도자라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그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도자는 어디서부터 포함이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 이렇게 막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성경 말씀으로 막혔을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고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본문부터 우리가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부터 민수기 20장 7절~12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국어시간에 독해문제 같은 것을 보면 이런 문제가 많지요? 본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자, 지금부터 읽어드릴 본문, 아까도 읽어드렸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0장 7절~12절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民数記 20章 7節~11節
主はモーセに告げられた。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て、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そこでモーセは、主が彼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主の前から杖を取った。
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われわ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豊かな水が湧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잘 들으셨나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질문 나갑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화가 난 원인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1번 모세와 아론, 2번 이스라엘 자손

어떠십니까. 이는 12절 말씀을 보시면 분명히 들어납니다.

민수기 20장 12절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信頼せず、イスラエルの子らの見ている前でわたしが聖であることを現さなかった。それゆえ、あなたがたはこの集会を、わたしが彼らに与えた地に導き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이 말씀 중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너희”(あなたがた)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모세와 아론입니다. 그들이 성질을 냈다는 것이 문제인지, 반석을 두 번 두드린 것이 문제인지는 성경에 명확히 안 나왔기 때문에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근본적인 잘못이 “너희” 즉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는 말이 어떤지 아십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신명기 3장 23절~27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3장 23절~27절
“23.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神、主よ。あなたは、あなたの偉大さとあなたの力強い御手を、このしもべに示し始められました。あなたのわざ、あなたの力 あるわざのようなことができる神が、天あるいは地にいるでしょうか。
どうか私が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またレバノンを見られ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二度とわたしに語ってはならない。
ピスガの頂に登り、目を上げて西、北、南、東を見よ。あなたのその目でよく見よ。あなたがこのヨルダン川を渡ることはないからだ。

여러분, 알아차리셨나요?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너무나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신명기 3장 26절에서 모세는 이 미르바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3장 26절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二度とわたしに語ってはならない。

민수기 20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은 모세와 아론의 잘못이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의 “너희”는 분명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3장 26절에 보면 모세는 그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너희” 때문에 내가 책망 받았다 (主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私に激しく怒り). 즉, 그 원인을 “너희” 때문에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너희”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이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세 탓을 하고 있는데, 모세 자신은 이스라엘 자손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더러, 너희들 때문에 내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창세기 내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는 자신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추궁하실 때 그들이 뭐라고 답합니까.


창세기 3장 12절~13절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人は言った。「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神である主は女に言われた。「あなたは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女は言った。「蛇が私を惑わしたのです。それで私は食べました。」

하와는 뱀이 유혹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은 더욱 대범합니다. 그냥 하와 탓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이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준 여자 때문에 내가 열매를 먹었잖아요. 당신이 여자를 주지 않았다면 내가 나무 열매를 먹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면서, 이는 그야말로 여자 탓 만이 아니라 하나님 탓까지 하고 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 아담이 바로 그 순간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시는 (思い直される)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26장 13절 エレミヤ書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さあ今、あなたがたの生き方と行いを改め、あなたがたの神、主の御声に聞き従いなさい。そうすれば、主も、あなたがたに語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されます。

요엘 2장 13절 ヨエル書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衣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心を引き裂け。あなたがたの神、主に立ち返れ。主は情け深く、あわれみ深い。怒るのに遅く、恵 み豊かで、わざわいを思い直してくださる。

요나 3장 10절 ヨナ書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神は彼らの行いを、すなわち、彼らが悪の道から立ち返ったのをご覧になった。そして神は彼らに下すと言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し、それを行われなかった。

그렇다면 언제 돌이키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려고 했다가도 돌이키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가 만약 한 번 이라도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었더라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 때까지 거절하셨던 가나안까지 가는 문을 모세에게도 여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끝내 모세에게서 그와 같은 회개의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고, 결국 그는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남의 탓을 하겠습니까. 그 이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닫혔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셨던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이어지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가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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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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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회 감추인 이름과 드러난 이름
20207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신약 186페이지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24節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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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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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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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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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추인 이름과 드러난 이름” おおわれた名前と明かされた名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라고 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해서 그 관점이나 구성 그리고 비유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보면 공관복음에 비해서 관점이나 구성 등으로 볼 때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과 겹치는 부분도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로 요한복음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미리 말씀해드립니다만, 여러분께서 그냥 가만히 듣고만 계시면 평소보다도 졸음이 더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함께 생각하면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를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도 이름을 찾아보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름, 특히 예수님의 사도 이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니까 잘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총 열두 명이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열두 사도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듣고, 질문이 끝나자마자 열두 명의 이름이 줄줄 나온다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뭐, 유명한 사람으로는 베드로, 요한, 그리고 가룟 유다 정도는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점점 가면 갈수록 이름이 가물가물해지지요.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 중에서 기초 정보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특히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이름을 살펴볼 때에는 사전지식이 좀 필요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한 사람에게 이름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사도들의 대표격라고도 할 수 있는 베드로만 보더라도 <베드로>라는 이름 외에 <시몬>이라는 이름도 있고, 또한 <게바>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는 총 세 개의 이름이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식으로 그 사람에게는 하나 이상의 이름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식으로 동일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으로 성경에 적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시고 말씀을 들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우선 열두 사도의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만,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절~4절
2.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十二使徒の名は次のとおりである。まず、ペテロと呼ばれる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
ピリポとバルトロマイ、トマスと取税人マタイ、アルパヨの子ヤコブとタダイ、
熱心党のシモンと、イエスを裏切っ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ある。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이렇게 열 두 명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야고보가 두 명 나오는데 뒤에 나오는 야고보는 마가복음 15장 40절에 따라서 이른바 <작은 야고보(小ヤコブ)>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두 번째 나오는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마태복음의 열두 사도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トマス、マタイ、 小ヤコブ、タダイ、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일단 여기서 보면 형제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ペテロ、アンデレ)는 형제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ゼベダイの子)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ヤコブ、ヨハネ)도 형제이지요.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다대오(小ヤコブ、タダイ)가 형제지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서 또 말씀 드려야 할 부분은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좀 이 이름이 낯설 수도 있습니다만, 이 바돌로매라고 하는 사도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ナタナエル)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사실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와 나다나엘은 완전히 다른 이름처럼 보이겠습니다만,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의 <바>(バル)는 히브리어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풀어본다면 <바돌로매 나다나엘>(バルトロマイ)이라고 하면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 또는 나다나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도 빌립(ピリポ)과 대단히 친한 친구 사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3절~51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먼저 만난 빌립이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강권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그렇습니다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더라도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는 항상 두 명이 함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자, 다음으로 마가복음에 나온 사도 이름입니다.

마가복음 3장 16절~19절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こうしてイエスは十二人を任命された。シモンにはペテロという名をつけ、
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ヤコブの兄弟ヨハネ、この二人にはボアネルゲ、すなわち、雷の子という名をつけられた。
さらに、アンデレ、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タダイ、熱心党のシモン、
イスカリオテのユダを任命された。このユダがイエスを裏切ったのである。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인 시몬, 다대오, 그리고 가룟 유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タダイ、 シモン、イスカリオテのユダ

어떠세요. 두 번째 들으니까 그래도 처음 들을 때보다 좀 들리는 이름이 있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 사이인 빌립과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도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누가복음부터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누가복음 6장 14절~16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すなわち、ペテロという名を与えられた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そして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
マタイ、トマス、アルパヨの子ヤコブ、熱心党員と呼ばれていたシモン、
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で、このユダが裏切る者となった。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ペテロ、アンデレ、ヤコブ、ヨハネ、ピリポ、バルトロマイ、マタイ、トマス、小ヤコブ、シモン、ヤコブの子ユダ、イスカリオテのユダ。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이 걸립니다.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나인>이라고 소개가 된 시몬인데, 여기서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되어 있고, 또한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다대오>(タダ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나나인 시몬>과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말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나>라고 하는 것은 시몬의 출신지이지만 <셀롯>이라는 말은 지명이 아니라 현대인의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열심당원>, 새번역 성경에는 <혁명 당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참고로 일본 성경을 보더라도 <열심당> 또는 <열심당원>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열심당원, 혁명당원이라는 뜻은 무엇이냐 하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셀롯, 즉 열심당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급진적 독립, 즉, 무력으로 민족이 단결해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내자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시몬>은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강했을 것이고, 또한 비교적 과격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적혀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ヤコブの子ユダ)라고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명확한 단서가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맥 흐름상,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몇 개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열두 제자 이름을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라고(バルトロマイ)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어떠십니까. 이제 조금 이름에 익숙해지려고 하시나요?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시면 조금 차이는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명확하게 사도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어떠냐 하면 이와 같이 정리된 열두 사도가 모두가 자세하게 정리된 구절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좀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이 가려진 제자>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만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 하면 <그가 사랑하시는 자>( 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 <사랑하시는 제자>( 愛する弟子), 심한 경우에는 그냥 <그 다른 제자>( もう一人の弟子), <또 다른 제자>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는 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 이름을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큰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이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먼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이는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라서 들어보신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이른바 마지막 만찬,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순간,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전후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시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
“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イエスは、これらのことを話されたとき、心が騒いだ。そして証しさ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 裏切ります。」
弟子たちは、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分からず当惑し、互いに顔を見合わせていた。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がパン切れを浸して与える者が、その人です。」それからイエスはパン切れを浸して取 り、イスカリオテのシモンの子ユダに与えられた。
ユダがパン切れを受け取ると、そのとき、サタンが彼に入った。すると、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すぐしなさい。」
席に着いていた者で、なぜイエスがユダにそう言われたのか、分かった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ある者たちは、ユダが金入 れを持っていたので、「祭りのために必要な物を買いなさい」とか、貧しい人々に何か施しをするようにとか、イエスが言われたのだと思っていた。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은 23절~25절입니다.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そこで、シモン・ペテロは彼に、だれのことを言われたのか尋ねるように合図した。
その弟子は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まま、イエスに言った。「主よ、それはだれのことですか。」

이 부분이 한글 개역개정으로 보면 잘 감이 안 옵니다. 그런데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3장 23절~25절
“23.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예수님 품에 기대 누웠는데
24.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여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물어 보라고 하였다.
25.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품에 기댄 채로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게 이해가 되시나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는 어떤 인물입니까. 정말 남들은 미처 하지 못할 말도 나서서 하는 그런 좀 저돌적인 성경을 가진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축복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혼나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던 제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긴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 중에서 자기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평소 베드로라면 당장 예수님 앞에 나서서, “도대체 그런 나쁜 놈이 누구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 놈을 잡아서 당장……” 뭐 이럴 만도 한데, 베드로는 지금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냐 하면 예수님 옆에 있는 그 제자한테 눈짓을 보내서, 야, 그게 누군지 니가 좀 여쭤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베드로도 당장 일어나서 여쭙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묻는 것보다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가 묻는 편히 훨씬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야, 내가 묻는 것보다도 니가 묻는 게 낫겠다. 니가 어서 빨리 여쭤봐.” 이렇게 머릿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히 신임을 얻고 있었고, 이 사실을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요한복음 중 어디에 등장하는지를 정리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하는 곳은 총 일곱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은 바로 앞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마지막 만찬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1절~29절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18절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シモン・ペテロともう一人の弟子は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この弟子は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ので、イエスと一緒に大祭司の家の中庭に入ったが、
ペテロは外で門のところに立っていた。それで、大祭司の知り合いだったもう一人の弟子が出て来て、門番の女に話し、ペテロを中に入れた。
すると、門番をしていた召使いの女がペテロに、「あなたも、あの人の弟子ではないでしょうね」と言った。ペテロは「違う」と言った。
しもべたちや下役(したやく)たちは、寒かったので炭火を起こし、立って暖まっていた。ペテロも彼らと一緒に立って暖まっていた。

예수님께서 체포가 된 다음, 베드로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와 함께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곳까지 갑니다. 하지만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못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당시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말하자면 연줄을 이용해서 그 안까지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비록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라고 표기는 없습니다만, 이름이 의도적으로 가려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기서의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イエスの十字架のそばには、イエスの母とその姉妹、そしてクロパの妻マリアとマグダラのマリアが立っていた。
イエスは、母とそばに立っている愛する弟子を見て、母に「女の方、ご覧なさい。あなたの息子です」と言われた。
それから、その弟子に「ご覧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と言われた。その時から、この弟子は彼女を自分のところに引き取った。


역시 이 부분도 좀 알기 쉽게 현대인의 성경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25.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26.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선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성경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한 뒤에도 많은 형제 자매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을 앞두고 계신 상황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이르시기를 “저 제자가 당신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자,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이 아닌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0장 1절~8절에 보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먼저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만,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나중에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8절입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절~9절까지의 부분인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시고는 제자들과 만났던 장면입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좀 길더라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9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節~9節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一方、ほかの弟子たちは、魚の入った網を引いて小舟で戻って行った。陸地から遠くなく、二百ペキスほどの距離だったからである。
こうして彼らが陸地に上がると、そこには炭火がおこされていて、その上には魚があり、またパンがあるのが見えた。

여기서 이 <디베랴(ティベリア)>라고 되어 있는 곳은 갈릴리 서쪽 지방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その後、イエスはガリラヤの湖、すなわち、ティベリアの湖の向こう岸に行かれた。

그래서 <디베랴 호수>라고 하는 말과 갈릴리 바다 라고 하는 말은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기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원래 하던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이런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예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가 베드로한테 말하기를, 야, 저기 주님이 계시다! 이렇게 말했더니 베드로가 배를 곁에 댈 겨를도 없이 그냥 무작정 바다에 뛰어 내려서 예수님께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기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엄연히 다른 장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여섯 번째 장면은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23절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 21章 18節~23節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若いときには、自分で帯をして、自分の望むところを歩きました。しかし年をとると、あなたは両手 を伸ばし、ほかの人があなたに帯をして、望まないところに連れて行きます。」
イエスは、ペテロがどのような死に方で神の栄光を現すかを示すために、こう言われたのである。こう話してから、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いなさい。」
ペテロは振り向いて、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がついて来るのを見た。この弟子は、夕食の席でイエスの胸元に寄りかかり、「主よ、あなたを裏切 るのはだれですか」と言った者である。
ペテロは彼を見て、「主よ、この人はどうなのですか」とイエスに言った。
イエスは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あなたは、わたしに従いなさい。」
それで、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いう話が兄弟たちの間に広まった。しかし、イエスはペテロに、その弟子は死なないと言われたのではなく、「わたしが来 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と言われたのである。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는 대단히 무서울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너는 네가 가고 싶은 것에 가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이후에는 네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거야 라고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었지요. 순간 베드로는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가 있어요. 그 때 베드로는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그런 힘든 삶을 살게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던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어봐요. 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친구는 어떻게 되나요? 참 저돌적인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남들 생각하지 말고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해. 이러신 것이지요.

이른바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이 사랑 받는 제자는 역시 신경이 쓰였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입니다. 일곱 번째 장면은 그 바로 뒤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이 말씀,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도 역시 현대인의 성경판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성경판 요한복음 21장 24절
“이 일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안다.”

여기서 <그 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イエスが愛された弟子) 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요한복음에 적힌 내용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한 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등장한 일곱 장면,

첫 번째는, 마지막 만찬, 두 번째는 대제사장 집 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 네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무덤 앞, 다섯 번째 장면은 디베랴 호수(ティベリア湖畔), 그러니까 갈릴리 바닷가, 여섯 번째 장면은 앞서가던 베드로의 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요한복음 마무리 장면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검토작업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우리 한 번 같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베드로도 인정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얻었던 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어디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왔습니다. 일단 그 주장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적으로서는 이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옛날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 외에도 마가라고 하는 주장, 사도 도마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또한 여러 근거를 대면서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라고 하는 주장, 베드로라고 하는 주장, 나아가서는 막달라 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물며 상징설, 그러니까 이 인물은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을 가상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라고 하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먼저 소거법을 사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이건 아니다 라고 하는 주장부터 지워가자는 것이지요.

우선, 막달라 마리아 설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요한복음 13장 23절,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弟子の一人がイエスの胸のところで横になっていた。イエス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ある。

라고 해서, 어쩌면 그 제자는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소설에다가 영화로까지 되었지요? 다빈치 코드에 보면 이게 무슨 막달라 마리아다 뭐다 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바로 이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엉터리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경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장면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켜서 분명히 <아들>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남자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다, 아니면 다른 여성이다 하는 주장은 모두 틀렸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근거입니다. 첫 번째 장면,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제자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이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0절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食卓に着かれた。

마가복음 14장 17절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夕方になって、イエスは十二人と一緒にそこに来られた。

누가복음 22장 14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その時刻が来て、イエスは席に着かれ、使徒たちも一緒に座った。

사도라고 함은 열두 사도입니다. 이 때 바울은 아직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라고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열두 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성경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 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반드시 열두 사도 중 한 명입니다. 열두 사도가 아닌 마가다 나사로다 하는 주장은 역시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베드로냐 하면, 아니, 베드로와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장면인 마지막 만찬에서는 베드로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에게 머리짓을 하고 있고, 다섯 번째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알려준 사람이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였고, 여섯 번째 장면에서도 베드로가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냐고 가리켰던 인물이 바로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아닙니다.

자, 좀 지루하시더라도 이제 점점 중요한 부분이 다가옵니다.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번째 장면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러 갔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혹시 누구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21장 1절~4절까지를 다시 한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4절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その後、イエスはティベリア湖畔で、再び弟子たちにご自分を現された。現された次第はこうであった。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여기서 2절에 보면 그 제자 이름이 나오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또다른 제자 둘이라고 합니다.

ペテロ、トマス、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과 요한, 그리고 또다른 제자는 편의상 제자 A와 제자 B라고 해두죠. 이렇게 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제자 A, 제자 B, 이렇게 일곱 명입니다. 우리가 찾는 제자는 반드시 이 안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 그 제자는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빠진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여섯 명입니다. 열두 명 중에서 절반까지 줄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하나 더 줄일 수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다음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밑에 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사람도 제외를 해야겠지요.

그러면 벌써 남은 사람은 다섯 명입니다.

자, 그럼 누구일까. 정말 요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예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권위를 갖는 근거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웨스트코트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해서 다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의 어휘나 유대 풍습, 특성에 대한 지식에 밝은 것으로 보아 저자는 유대인이다.

둘째,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다.

셋째, 지역이나 사람들, 시간 방법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보아 그는 이와 같은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넷째,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사도였을 것이다.


다섯째,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다른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서 이 분은 그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리고 상당히 많은 분들도 이 근거에 동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그럼 완벽하냐 하면, 아니요.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첫째 약점은, 두 번째 장면에 대한 해석입니다. 베드로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체포된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뜰에 못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서 베드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개 고기잡이에 불과했던 요한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약점입니다.

둘째 약점은, 다섯 번째 주장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기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는 하는데, 다섯 번째 장면인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장면을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여기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나오는데, 이처럼 누구누구집 아들……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을 특정할 때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하면 이는 누구나 다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세베대의 아들들, 그것도 단수가 아니라 분명히 복수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야고보나 요한 중 하나가 아니라, 분명히 둘 모두를 가리키고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요한이 쓴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점, 이 점이 바로 두 번째 약점입니다.

이와 같은 약점은 이름이 가려진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서 일개 어부가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하면,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에 대해서도, <요한>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쓰지는 않았다고 해서 여전히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저와 함께 살펴보았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방금 명단에 있었던 <또 다른 제자 둘>이 마음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저도 이 두 사람이 좀 신경을 쓰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기에 빠진 사람, 다시 말해서 이 명단에 없으면 부자연스러운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있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누구냐 하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베드로의 형제였지요. 그러면 안드레도 고기잡이였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데 거기에 형제인 안드레가 빠진다는 것은 이는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냐 하면, 빌립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갈이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바돌로매가 등장하는 곳에는 항상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과 절친이었지요. 더구나 빌립의 고향은 베드로와 같은 벳세다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 보면 나다나엘만 나와 있고 빌립 이름이 안 보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이 또다른 제자 A와 제자 B는 안드레와 빌립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이것도 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 13장 23절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어떠냐 하면 요한복음 1장, 6장, 12장에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기록하다가 나중에 이름을 가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요.

빌립에 대해서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13장과 19장 이후에 등장합니다만, 빌립 이름은 14장에도 나옵니다. 그러면 한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썼다가 가렸다가 하고 보는 것은 어렵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도마도 명단에 있었습니다만 그의 이름도 요한복음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총 여덟 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사도들 명단을 다시 한 번 봐야겠지요? 전체 열두 사도 명단에서 아니라고 한 사람들, 이름이 이미 나온 사람들을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체 명단은, 베드로, 그의 형제인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인 요한, 빌립, 그의 친구인 바돌로매(バルトロマ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과격한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다대오(タダイ), 그리고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

여기서 뺄 사람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으니까 과감하게 야고보와 요한도 빼버립시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이니까 이것도 빼고, 빌립도 이름이 많이 나와 있으니까 뺍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벌써 죽었으니까 빼야 한다고 말씀 드렸죠?

자 알기 쉽게 정리해보면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세리 마태, 도마,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가룟 유다.

여기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라고도 하는 나다나엘, 도마, 그리고 가룟 유다, 이렇게 여덟 명을 빼면 누가 남느냐 하면 12-8, 네 명이 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걸쳐서 걸어온 길이 맞다면 이 네 명중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그리고 이 요한복음을 증언한 제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남은 네 명을 말씀 드립니다.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タダ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신임을 가장 받았던 제자는, 바로 세리 마태입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웨스트코트의 근거를 기억하지요. 다섯까지 근거를 대가면서 요한복음을 증언한 사람, 즉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에 대한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이다.
둘째로 그는 팔레스틴 출신이다.
셋째로 그는 친히 목격한 사람이다.
넷째로 그는 사도 중 한 사람이다.
다섯째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마태는 모든 조건에 부합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팔레스틴인 갈릴리 태생입니다. 그는 사도였기 때문에 친히 예수님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에 대한 기록은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단순히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리였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복음서 모두에 마태를 부르신 후 마태 집에서 다른 세리들도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당시 세리라고 하는 직업은 죄인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리를 사도로 부르셨다는 일은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는 마태에 관련하여 그와 같은 내용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가려진 제자를 <요한>이라고 했을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약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요한에 대해서는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만, 마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기록조차도 없이 완벽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일개 고기잡이였던 요한이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되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만, 이 문제도 마태였다고 하면 충분히 풀릴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는 그 집에까지 가서 식사를 했던 장면이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특별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레위>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そこから進んで行き、マタイという人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 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마가복음 2장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イエスは道を通りながら、アルパヨの子レビ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すると、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누가복음 5장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その後、イエスは出て行き、収税所に座っているレビという取税人に目を留められた。そし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た。

이 기록을 본다면 단순히 <마태>와 <레위>라는 이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히 흡사합니다. 따라서 마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짐작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마태>와 <레위>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주로 자기 조상님들 이름 중에서 따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아 이 사람이 어느 집안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의 또 다른 이름이 <레위>였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그는 레위지파 (レビ族)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그렇습니다. 제사장 지파입니다.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모세와 아론 형제는 모두 레위지파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이후 제사장은 대대로 레위지파가 맡아서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가 레위였다고 한다면, 같은 레위 지파인 대제사장을 알았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 번째 장면에서 알아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몇몇 여성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입니까. 말하자면 사형수 바로 앞입니다. 거기는 분명 통제구역이었을 것입니다. 곳곳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욕했던 사람들도 멀리서 소리를 쳤을 뿐이고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할 수 있었을까 하면, 저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가 레위 지파였기 때문에 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한다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다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게 돈을 바치는 일을 해왔습니다. 말하자면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 로마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로마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비록 고위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부분 지위를 인정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그는 제사장 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로마 관리들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대단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다른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마태가 본인이 직접 듣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로마 관료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오랫동안 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요한복음을 요한이 쓰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고 썼다는 주장입니다.

제가 만약에 어떤 책을 썼어요. 아니, 명함을 찍었다고 해보죠. 그런데 거기에 명함에 보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홍성필 목사> 이렇게 적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뭐, 여러분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우시니까, 아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만약에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메일을 받았는데 자기를 가리켜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누구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뭐, 드러내고 말은 안 하더라도 속으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또, 아 그 성경은 옛날에 적힌 책이니까 그렇겠지. 옛날 스타일 아니겠어?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이 요한복음 하나뿐인가요. 성경의 다른 책을 보더라도 자기를 가리켜서 그와 같이 표현한 책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제게는 이 점이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証しし、これらのことを書いた者は、その弟子である。私たちは、彼の証しが真実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

즉 이 말씀을 본다면, 여기는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가 등장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근거로 해서 증언한 사람이 있고 그 내용을 정리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주장이 맞다고 하면, 그리고 증언한 사람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라고 한다면, 마태는 그 누군가에게 이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정리를 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제 가설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 정리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는 증언을 정리하되 거기서 내 이름은 빼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리한 인물은 그의 요청대로 그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드러내야 할 분,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자기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이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이름이 가려진 제자는 존재감이 불분명하지 않은, 대단히 확실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는 기록자가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분명히 그 외의 이유가 있어서 일 것입니다.


기록자는 증언자에 대해서 악의를 가지고 이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에게는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왕 가설을 제기하는 김에 조금 더 보태볼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 기억하시죠?

요한복음 21장 2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만약에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마태였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지만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있는 <또 다른 제자 둘> 중의 하나, 제자 A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제자 B는 누구일까요. 제3의 인물이었다면 굳이 이름을 감출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제자 B가 바로 제자 A인 마태로부터 얻은 증언과 기록을 정리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남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세리 마태,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여기서 제자 A를 마태라고 한다면 제자 B도 분명 이 중에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세 명입니다.

작은 야고보, 가나나 출신인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도 하는 다대오,

저는 이 중에서 셀롯 시몬을 지목합니다.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혁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단결하여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사도가 되었다면, 그런 그와 가장 맞지 않았던 사람, 물과 기름이었던 사람은 바로 마태였을 것입니다. 자주 독립을 외치는 시몬에게 있었어 세리 마태는 자신의 민족을 팔아서 지배자인 로마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회개를 하고 세리에서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증오심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44절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이 말씀이 당시 시몬에게 꽂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회심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마태의 증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니면 마태가 먼저 시몬에게 자신의 증언을 기록해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릅니다. 시몬이 급진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당대에 있어서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시몬도 사도였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세리였던 마태는 대제사장 쪽과 로마 관료 쪽 양쪽의 정보를 모두 접할 수 있었기에, 마태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 가설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나나인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 등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와중에 페르시아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에 대한 전승을 보면 에티오피아 외에 시몬과 같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정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그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세리 마태와 혁명당원 시몬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복음서를 기록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 이를 증언한 마태가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는데 어찌 내 이름을 넣을 수가 있을까 해서 자기 이름도 지운 채 그저 그와 함께 <다른 제자 둘>이라고 기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 쓰여진 것이 요한복음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복음서의 귀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시면, 그렇다면 요한복음이라고 하는 책 제목은 어떻게 되느냐. 요한이 썼기 때문에 요한복음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바울 서신이나 다른 서신들과 같이 저자가 명확하게 드러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 요한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도 모두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승에 불과하며 이 저자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요한복음이라고 되어 있을 책을 이제 마태복음으로 바꾸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이름은 그냥 책 이름이지요.

그리고 또 혹시, 어? 홍 목사 이거 이상한 주장을 하는데, 혹시 이단 아니야? 라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의 저자를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이단이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우리 믿음에 있어서 복음주의, 개혁주의적인 견지에서 여러 학설을 주장하고 또한 이를 검증해가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 말씀을 들어오신 분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가려진 제자> 이름이 요한이면 어떻고, 마태면 어떤가. 저자 이름이 나와 있으면 어떻고 나와있지 않으면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임원이나 직분을 받을 때가 되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눈에 띄지는 않고 힘들기만 한 일이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収穫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ご自分の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い。」

그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자기 이름을 감추고 주님의 일을 감당한 그에게,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기쁨으로 삼아야겠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을 가지고 기쁨을 삼아야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걸고 알리려 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우리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님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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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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