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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회 유일한 문과 길
2020년 12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2절~16절 신약성경 241 페이지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12節~16節
“12.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なしに滅び、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
13.なぜなら、律法を聞く者が神の前に正しいのではなく、律法を行う者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14.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が、生まれつきのままで律法の命じることを行う場合は、律法を持たなくても、彼ら自身が自分に対する律法なのです。
15.彼らは、律法の命じる行いが自分の心に記され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らの良心 も証ししていて、彼らの心の思いは互いに責め合ったり、また弁明し合ったりさえするのです。
16.私の福音によれば、神のさばきは、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人々の隠された事柄をさばかれるその日に行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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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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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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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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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번째 시간으로서 “유일한 문과 길” 唯一の門と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2장 12절~13절입니다.

로마서 2장 12절~13절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2.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なしに滅び、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
13.なぜなら、律法を聞く者が神の前に正しいのではなく、律法を行う者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우리가 이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점은 12절 말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한 구절이 아니라 오늘 살펴볼 범위인 12절~16절에 대한 주제, 또는 제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선 간단히 살펴봅니다. 12절에서 언급된 말씀은 율법과 범죄와 멸망과 심판입니다. 이는 쉽게 말씀 드리자면 율법을 모르고 죄를 지었건, 율법을 알고 죄를 지었건 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역시 여기서도 율법의 행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운전면허를 갱신할 때에, 그 때까지 교통위반이 있건 없건 간에 반드시 안전운전에 대한 동영상을 보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위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보는 동영상의 길이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까지 위반이 없는 사람들이 보는 동영상을 짧지만, 위반이 이는 사람들이 보는 동영상은 아무래도 길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안전운전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봤다고 해도, 그 동영상을 보는 것이 안전운전이 아니라, 실제로 안전하게 운전을 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안전운전이라고 하는 사실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율법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학교에서 무슨 시험을 보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율법의 가치는 바로 행함이 동반되었을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보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14절~15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4.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が、生まれつきのままで律法の命じることを行う場合は、律法を持たなくても、彼ら自身が自分に対する律法なのです。
15.彼らは、律法の命じる行いが自分の心に記され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らの良心 も証ししていて、彼らの心の思いは互いに責め合ったり、また弁明し合ったりさえするのです。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 구절은 앞서 12절을 좀 풀어서 기록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이라고 하면 모두가 알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에 보면 벌칙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현대 문명국가에서 보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형벌의 종류는 대단히 많습니다. 뭐, 가벼운 죄는 벌금도 있습니다만, 무거운 죄는 금고나 징역도 있지요. 같은 금고나 징역이라 하더라도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몇 십 년까지 내려지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이는 드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만, 더욱 무거운 죄는 사형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보면 어떻습니까. 웬만한 죄는 다 죽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이 율법은 무섭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율법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나쁜 짓을 저지르면 심판이 내려지는데,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율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저질러도 명확한 심판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이지요.

말이 좀 이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율법을 알지 못했다면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율법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차라리 몰랐으면 벌을 받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이 율법을 알아가지고 벌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2절에 보면 율법이 있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서 결국 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듯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직 복음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도덕이나 교양에 대한 책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형법 같은 법조문을 본다 하더라도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시면 어떻습니까. 조금 머리가 좋으신 분들은 여기서부터 많은 생각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죠. 그래? 나쁜 짓을 저지르면 율법을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 벌을 받는 건 마찬가지네? 그렇다면 꼭 율법을 알아야 하나? 어차피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꼭 율법을 알지 않아도 된다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발생을 하냐 하면, 율법? 성경? 이런 게 없어도 우리는 이미 무엇이 나쁜 일인지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굳이 매주 교회에 나아가고 성경을 읽고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하고요, 조금 더 지나치면, 하나님? 예수님? 꼭 믿어야 돼? 그냥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야? 뭐 이렇게까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이라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혹시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씀을 들어보진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제외하면 수많은 종교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와 비슷한 종교, 그리고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입니다.


후자인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들 멋대로 새로운 이론,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낸 경우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보면 우리 기독교와 유사한 종교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유대교, 천주교, 이슬람교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종교들이 우리 기독교와 닮은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 노아의 홍수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다른 종교들을 보더라도 전세계가 홍수에 뒤덮였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에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렇겠지요. 당시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전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고 오로지 노아와 그의 가족인 총 여덟 명만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인류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만들어낸 종교들을 본다 하더라도 거기에 노아의 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들이나 경전을 보더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비슷한 모습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점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결국은 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굳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굳이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성경을 믿지 않더라도, 자기가 가진 종교를 열심히 믿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 종교다원주의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말 극히 일부 문제가 있는 종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들을 보면, 우리가 자세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무슨 나쁜 짓을 하라는 내용은 없잖아요? 다 그냥 좋은 일 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되고, 나쁜 짓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뭐예요? 오늘 말씀을 보면 꼭 율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각 사람마다 양심이 있다고 하니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간다고 하면,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 아니야?

만약에 누군가가 유창한 말솜씨로 이와 같이 여러분께 말을 한다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과 같이 믿음이 좋으신 분들은 이와 같은 말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만, 지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 하물며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분들이나,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거기에는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심판과 멸망에 대한 말씀은 있지만, 구원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율법을 알았던 사람들이나 몰랐던 사람들이나 나쁜 짓을 저지르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지만, 율법을 알았던 사람들이나 몰랐던 사람들이나 좋은 일을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예, 그렇습니다.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9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そこで、再びイエスは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は羊たちの門です。
わたしの前に来た者たちはみな、盗人であり強盗です。羊たちは彼らの言うことを聞きませんでした。
わたしは門です。だれでも、わたしを通って入るなら救われます。また出たり入ったりして、牧草を見つけます。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시 말해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멸망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기 위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 이 기독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즉 구세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4절~45절
“44.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イエスは大きな声でこう言われた。「わたしを信じる者は、わたし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を信じるのです。
また、わたしを見る者は、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を見るのです。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아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고, 성경에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보다도 더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 같은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왜 예수님도 믿어야 하나…… 이와 같은 소박한 의문을 혹시 가져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2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26절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なだ)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すなわち、ご自分が義であり、イエスを信じる者を義と認める方であることを示すため、今この時に、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천국은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가 무겁고 가볍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하더라도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제일 작은 죄 하나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옥불 속으로 떨어져야 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는 다면, 우리는 그 분의 근처에도 갈 수가 없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되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자 길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우리가 당당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너희들 힘만으로는 부족하니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나, 베드로 같은 사도나, 아니면 또 다른 예언자나 선지자의 힘을 빌려서 나한테로 오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 지금 있는 그대로 오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삶,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 지치고 쓰러질 때, 거기 그대로 있지 말로 너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기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이 죄를 좀 해결하고 난 다음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실려가는데, 넥타이 매고 정장 차림으로 갑니까.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얼굴 화장 고치고 예쁜 옷을 입고 간답니까. 그래야 병원에서 받아준다고 합니까.

아니면 지금 내 몸이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를 알고 가야 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가면 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는 병원에 가기만 하면 의사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해주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지은 죄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사방팔방 모두가 막혀버린 것 같아요. 그럴 때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유일한 문이 되시고 길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2장 16절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16.私の福音によれば、神のさばきは、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人々の隠された事柄をさばかれるその日に行われるのです。

16.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바울은 많은 서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 서신에는 물론이고,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심판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인지 슬픔으로 맞이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 어느 길로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길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먼 훗날 크나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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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회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
2020년 12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6절~11절 신약성경 241 페이지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6節~11節
6. 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7. 忍耐をもって善を行い、栄光と誉れと朽ちないものを求める者には、永遠のいのちを与え、
8. 利己的な思いから真理に従わず、不義に従う者には、怒りと憤りを下されます。
9. 悪を行うすべての者の上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苦難と苦悩が下り、
10. 善を行うすべての者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ます。
11. 神にはえこひいき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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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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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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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 行いという良い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역시 본문을 앞뒤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2장 6절~8절입니다.

로마서 2장 6절~8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6.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7.忍耐をもって善を行い、栄光と誉れと朽ちないものを求める者には、永遠のいのちを与え、
8.利己的な思いから真理に従わず、不義に従う者には、怒りと憤りを下されます。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우리는 이 6절에 우선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해오고, 그리고 주보 표지에도 적어드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입니다. 이 중에서 무엇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단순이 여기에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순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뛰어난 행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믿음이 있으면 충분하냐 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말씀, 즉 성경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말씀을 두 가지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요, 또 하나는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여기는 이게 잘못되었다. 저기는 저게 잘못 되었다, 하고 지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책은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에 불과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벌써 성경 처음부터 은혜가 넘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우주물리학자들은 전 우주가 이른바 빅뱅, 우연히 일어난 대폭발로 인해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절차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간에 걸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다섯째 날까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행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행사를 준비합니다. 크고 작은 시설들을 만들거나 요리를 준비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그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언제 등장합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지요.


무슨 정상회담이 있어요. 그러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며칠 전부터 나와서 자기들이 요리도 하고 카펫도 깔고 그러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준비를 해 놓으면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놓은 것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요리를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마찬가지지요.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땅을 정복하라거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사람에게 이 모든 권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천지창조는 바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사람을 위에 예비해주신,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기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처음에 세상을 지으셨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드셨을지는 모르지만,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니야?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 성경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 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もとい)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벌써 2020년도 12월입니다만, 올해 초에 계획했던 일을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 이루어놓으셨습니까. 아이고, 원래는 이러이러한 계획도 있었고 저러저러한 계획도 있었지만 코로나다 뭐다 하는 것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예,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지요.

우리 인간은 1년 계획? 아니요. 하루 계획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고사하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은혜가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것이 <행함>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열매라고 해서 다 같은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나쁜 열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20절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 말씀에 의하며 불에 던져지느냐 아니냐의 구분은 오로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좋은 나무면 당연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싶어도 나무가 나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과 불의를 따르는 사람을 판단하시고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말씀 후반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9절~11절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9.悪を行うすべての者の上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苦難と苦悩が下り、
10.善を行うすべての者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ます。
11.神にはえこひいきがないからです。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여기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와 같은 행함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요,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아, 그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첫째로 이스라엘 사람한테이고, 둘째로는 그리스 사람한테로구나……라고만 끝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한테 있어서 이 말씀은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그야말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성경을 그냥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 취급을 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나 허황된 전설이나 흥미만을 주는 문학이 아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유대인과 이방인,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의 시초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그 아브라함의 계보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 왕을 거쳐서 마침내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유대인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으며 사도행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믿음은 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는 먼저 믿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나중에 믿음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직분이 높은 분도 있을 것이요, 낮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먼저 믿은 사람들이 축복을 먼저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반대로 심판도 먼저 받을 수가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의하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요.

시간 관계상 오늘은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37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 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주된 등장인물들은 네 사람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셋째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넷째로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서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히 죽게 될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죽게 된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기록이 없습니다. 어쩌면 상처가 너무 심해서 구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잠시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사실 제사장도 레위인이긴 합니다만, 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이요, 둘째로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요, 셋째로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특별히 레위 지파는 출애굽 이후에 제사장 직분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 말씀의 율법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そのサマリアの女は言った。「あなたはユダヤ人なのに、どうしてサマリアの女の私に、飲み水をお求めになるのですか。」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と付き合いをしなかったのである。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차별했었습니다. 상종하지 않았다. 서로 교제하는 일이 없이 경멸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그런데 그들이 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모르지만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둘 다 피하여 지나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지나갔을까요. 그냥 귀찮아서요? 아니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원래 나쁜 사람들이라서요?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당시 왜 그랬냐고 우리가 물어볼 기회가 있다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귀찮아서라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아니야. 나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단 말이오.”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자기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피해서 갔다고 말한다면 의아해하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나중에 이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어서 물어본다면 10중 8, 9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무슨 말이 있기에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민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수기 19장 13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자, 봐라. 그 때 그 사람은 죽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제사장이고 레위인인데, 만약에 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을 만졌다면 내가 부정하게 되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지나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그가 이와 같은 율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고 냉대를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그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단순히 치료만 해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기서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갔다는 것은, 둘이 탔다기 보다는 그 사람을 짐승에 태우는 대신 자기는 걸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거기까지 데리고 갔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도 돌보아주었대요. 그러니까 간호를 정성껏 했다는 뜻이겠지요.

이 사람의 친절을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 볼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었는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막 주인한테 돈을 줍니다. 그리 큰 돈은 아니에요. 두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지금 돈으로 대략 10만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고, 만약에 돈이 더 들게 되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그 돈까지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면 어떻습니까. 물론 아주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착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과 같이 자비심이 많은 분들께서는, 아니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생각하실지는 모릅니다만, 저처럼 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니, 그냥 뭐, 치료해주기만 하면 됐지 않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자기가 희생까지 해가면서 돌보아주어야 하나? 너무 좀 지나친 것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2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악한 자가 너를 죽도록 패는 것이 아닌 그냥 뺨 한 대 때리는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네가 그냥 넘겨줘라. 새 옷도 아닌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을 빼앗으려고 소송까지 벌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네가 입던 겉옷까지 줘버려라. 억지로 오 리, 그러니까 한 2킬로 정도, 걸어서 30분 정도 가게 할 정도로 수고를 강요한다면, 차라리 4킬로 정도, 걸어서 1시간 정도 수고를 더 해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은 알았으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많은 지식을 알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걸맞은 행함이 없다면 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큰 돈이나 자기 인생을 희생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대신 이 사람을 짐승에 태우고 조금 걸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몇 개월이나 몇 년을 간호한 것이 아니라 하룻밤만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돈 몇 만원 정도만 주었을 뿐입니다.

이는 대단히 큰 돈을 들이거나 많은 시간이나 수고를 들여서 한 것이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조금 과한 행함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 눈으로 보면 조금 과한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도 이 사마리아 사람을 더욱 높이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돈이 많은 사람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지위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젊은 사람인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는 데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 그러니까 그 사람의 배경이나 성별이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것부터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높이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써, 우리의 조금 과한 행함, 조금 지나친 행함으로써 우리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믿음과 말씀에 의한 행함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창세 전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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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회 기다림의 믿음
2020년 11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절~5절 신약성경 240 페이지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1節~5節
“1.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2.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の上に、真理に基づいて神のさばきが下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4.それとも、神のいつくしみ深さ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いつくしみと忍耐と寛容を軽んじているのですか。
5.あなたは、頑なで悔い改める心がないために、神の正しいさばきが現れる御怒りの日の怒りを、自分のために蓄え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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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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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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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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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번째 시간으로서 “기다림의 믿음” 待つという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도 앞과 뒤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2장 1절~3절까지를 먼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1절~3절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2.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の上に、真理に基づいて神のさばきが下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1절에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도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한다면, 우리 주변에 어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아니, 이런 나쁜 사람이 다 있나! 하고 혼을 냈습니다.

이것만 본다면 전혀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던 로마서 1장 28절~32절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과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떤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잘못과 주관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있어서도 합법적인 심판과 불법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에 대해서만 본다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때렸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어요. 이것은 객관적인 잘못이지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만 본다면 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법을 어긴 범죄입니다. 명백한 잘못이지요.

그러나 잘못에는 객관적인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잘못도 있어요. 이는 쉽게 말해서, 무슨 법을 어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상당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뭐냐 하면 상대방은 잘못이 없는데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내 생각대로 미워하거나 비판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데, 괜히 나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이런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뉴스를 조금 살펴보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끔찍한 사건까지도 발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도 합법적인 심판과 불법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주민이 경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흥미를 가졌어요.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고는 마침내 범인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그 범인이 집에 있을 때를 노려서 쳐들어가고는 수갑을 채워서 경찰서에 데려갔습니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자기가 생각했을 때 징역 5년은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범인을 잡고 난 다음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서 5년 동안 거기 가둬놓았어요.

여러분, 이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 범인이 진짜 범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의 죄가 징역 5년에 해당하는 범죄라 하더라도, 아무나 그렇게 붙잡아서 가둬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불법적인 심판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범죄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수사나 체포라고 하는 과정은 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결도 합법적인 재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이는 많이 배운 사람이건 아니건, 구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얼마나 상대방을 잘 비판하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아니에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을 우리가 평소에 잘 아는 우리 이웃을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아, 그렇다고 여기 있는 분들 중에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안 계신 분들 중에서 한 분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종이에 적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처럼 믿음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당연히 좋은 점을 많이 적어나가시겠지만, 일반 사람들 같은 경우를 보면 상대방에 대한 나쁜 점이 더 많이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예전에 어느 텔레비전을 보니까 초등학교에 가서 저학년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 친구에 대해서 안 좋은 점을 한 번 말해보세요……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아주 와글와글 쏟아져 나옵니다. 쟤는 이래서 안 좋고요. 저래서 저런 게 안 좋고요……그래서 그럼 좋은 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어땠겠습니까. 억지로 한 가지 두 가지만 나오고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애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뉴스나 페이스북 같은 데에 보더러도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비난하는 말들이나 글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요? 로마서 2장 1절 후반부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네가 남을 비판하고도 네가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것은 잘못이라고 지적을 했다면 그 지적을 한 사람은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3절~5절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기서 들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큰 기둥입니다. 그리고 티는 작은 먼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잘못이다 저게 잘못이다 하고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네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비하면 아주 작은 먼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네 잘못은 거기에 비하면 티끌이 아니라 훨씬 큰 기둥과도 같은 거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말하자면 착한 척 하는 사람, 믿음이 좋은 척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는 먼저 너에게 있는 큰 기둥만한 잘못을 제거한 다음에 네 형제들의 잘못을 지적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웃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먼저 제게 있는 큰 잘못들을 빼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 이웃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되겠지요?

여러분 이런 생각 한 번 해보셨습니까.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해보느냐 하면 바로 기도할 때 해보는 것이지요. 기도를 드릴 때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한 번 이렇게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제 이웃들의 잘못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우선 제 눈에 있는 들보를 좀 빼보려고 합니다. 제게 무슨 들보가 있는지 한 번 알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드렸는데도 여전히 내 잘못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웃들에 대한 잘못만이 보이나요? 그것은 응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응답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예, 조금 있으면 얼굴이 화끈화끈 거립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요, 너무나도 미안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잘했다고 이웃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어디가 잘났다고 무슨 자격으로 이웃을 지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정으로 우리 눈에서 들보가 빠지는 순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에서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기게 하기 위해서 뱀이라고도 하는 이 마귀 사탄은 하와를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뜻에 맞으면 진실이고 하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몇 프로가 진실이고 몇 프로가 거짓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백 프로가 거짓입니다. 아무리 그 중에서 1프로나 2프로가 진실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그 중의 일부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아니, 하물며 100프로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100프로 거짓입니다. 100프로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창세기 3장 5절에 보면 마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기 위해 말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눈이 밝아진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셋째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중에서 하나라도 맞은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첫째로 눈이 밝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정도로 어두워졌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같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모두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선악을 알게 되었나요? 아니요. 선악을 알기는커녕 사람의 눈은 온통 들보로 가득 차게 되어, 아무런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나쁨을 엉터리로 판단하게 되어서 결국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가 위험운전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내 차 앞에 끼어들어와서 급정거를 하거나 하는 대단히 위험한 운전이지요.


이런 운전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상대방 차가 먼저 끼어들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서, 그렇게 운전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말하자면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고 자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그런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은 범죄자들을 심판한 정의의 화신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전문가는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정의의 화신도 아니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라 범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을 우리는 저지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충고>라는 이름으로 이웃을 비판하고 이웃을 비난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스스로도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웃의 티가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웃의 그 잘못이 우리에게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 같은 잘못을 저질러 왔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처럼 안경 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이 좀 지저분하게 보이십니까. 세상 탓을 하기 자신의 안경을 좀 닦아보십시오. 운전을 하시는데 바깥이 지저분해 보이십니까. 세상 탓을 하기 전에 차 유리를 좀 닦아보십시오.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3절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비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웃을 탓하기 전에 세상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이웃의 눈에 티가 보이는 이유, 작은 잘못이 보이는 이유는, 바로 내 눈 안에 큰 들보가 들어있기 때문이요, 내 마음 안에 더 큰 잘못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2장 4절~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2장 4절~5절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4.それとも、神のいつくしみ深さ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いつくしみと忍耐と寛容を軽んじているのですか。
5.あなたは、頑なで悔い改める心がないために、神の正しいさばきが現れる御怒りの日の怒りを、自分のために蓄えています。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자,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사람을 미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정말로 어떤 미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서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세상에 나쁜 사람들은 많고,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둬요. 좀 나쁜 짓을 저지르면 빨리빨리 벌을 받고 그런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죄도 짓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가끔 좀 일을 게을리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어디 그것 뿐이에요? 내가 좀 돈이 필요하다고 기도를 드리면 그때그때 입금시켜주면 얼마나 좋아요? 내가 무슨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지금 내가 이게 필요한데, 내가 이렇게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기도 응답을 빨리빨리 들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 정말 하나님 요즘 좀 저한테 무관심한 것 같아요……이렇게 생각되는 일도 솔직히 있을 것입니다.

잠시 사무엘상 13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로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제 여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출격하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싸우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더니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サウルは、サムエルがいることになっている例祭まで、七日間待ったが、サムエルはギルガルに来 なかった。それで、兵たちはサウルから離れて散って行こうとした。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이 문맥상으로 보면, 이번에도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기로 하고, 그리고 사무엘이 언제까지 올 테니까 기다리십시오. 하고 사울 왕에게 말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이 안 나타납니다.

사무엘이 와서 빨리 제사를 드려야 전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안 오니까 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 저기 보면 수많은 적군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사울 왕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는 간단합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어떻습니까. 지금 빨리 제사를 시작하고 전쟁을 시작해도 부족한데,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도록 사무엘은 안 나타나고, 기다리던 병사들은 사기가 점점 떨어져가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대충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이고 그런데 웬일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딱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 사무엘이 약속을 여기고 지각을 한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오겠다고 사무엘은 말하고 그리고 그 기한이 차기 전에 사무엘이 도착했는데, 사울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 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이여,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더라면 왕위가 굳건해졌을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고 맙니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사울은 나중에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왕위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느려 보입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무리 잘난 척 해 봤자, 아무리 똑똑한 척 해 봤자, 우리는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명철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쁜 사람에게 대한 심판이 늦는다고 한탄하시겠습니까. 나쁜 사람에 대한 심판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심판이 그때그때 순식간에 내려졌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장담을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살아남아있을 사람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옥 불에 떨어져서 지금 이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로마서 2장 4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서 뭘 해? 차라리 내가 내 힘으로 하고 말지……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내 판단이 훨씬 더 옳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에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다림으로 인해서 내가 구원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요, 이 기다림으로 인해서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닌, 이 판단에 대한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판단을 서두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판단하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내가 하겠다는 교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부끄럽고 죄가 많은 나를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낮아져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들보를 빼내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짐으로 인해서 주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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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회 사랑의 무게
2020년 11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32절 신약성경 240 페이지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 26節~32節
“26.こういうわけで、神は彼らを恥ずべき情欲に引き渡されました。すなわち、彼らのうちの女たちは自然な関係を自然に反するものに替え、
27.同じように男たちも、女との自然な関係を捨てて、男同士 で情欲に燃えました。男が男と恥ずべきことを行い、その誤りに対する当然の報いをその身に受けています。
28.また、彼らは神を知ることに価値を認めなかったので、神は彼らを無価値な思い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れで彼らは、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行っているのです。
29.彼らは、あらゆる不義、悪、貪欲、悪意に満ち、ねたみ、殺意、争い、欺き、悪巧みにまみれています。また彼らは陰口を言い、
30.人を中傷し、神を憎み、人を侮り、高ぶり、大言壮語(たいげんそうご)し、悪事を企み、親に逆らい、
31.浅はかで、不誠実で、情け知らずで、無慈悲です。
32.彼らは、そのような行いをする者たちが死に値するという神の定めを知りながら、自らそれを行っているだけでなく、それを行う者たちに同意もし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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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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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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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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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사랑의 무게” 愛の重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앞의 두 구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26절~27절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6.こういうわけで、神は彼らを恥ずべき情欲に引き渡されました。すなわち、彼らのうちの女たちは自然な関係を自然に反するものに替え、
27.同じように男たちも、女との自然な関係を捨てて、男同士 で情欲に燃えました。男が男と恥ずべきことを行い、その誤りに対する当然の報いをその身に受けています。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지금 여기서 <그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이는 앞의 로마서 1장 18절에 등장하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 (不義によって真理を阻んでいる人々)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不義によって真理を阻んでいる人々), 즉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서 27절에 보면 이는 대단히 독특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만, 그 중에 보면 제가 볼 때, 이게 정말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 맞는 것일까 하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언급된 부분은 이는 동성애에 대한 말씀이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종종 동성애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좁게 이야기를 하면 동성애이지만, 혹시 여러분께서는 LGBT라고 하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L은 레즈비언으로 여성 동성애자, G는 게이, 남성 동성애자, B는 바이섹슈얼 양성애자, T는 트랜스 젠더. 성별월경자라고도 합니다만, 이는 쉽게 말해서 선천적인 성이 아닌 다른 성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살아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성전환 수술까지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오로지 동성애만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에 보면 분명히 여성 동성애와 남성 동성애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겠습니다만, 여기서 동성애라고 하는 것은 우정 같은 친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성적인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일본 기독교에서의 입장은 명확하게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한국의 경우를 본다면 같은 기독교라 하더라도 이 동성애를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배척할 것인지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 코로나 사태 이전에 보면, 어느 정당이 제출한 동성애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계기로 해서 각 교회들마다 이 법안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 움직임이 대단했습니다. 서명운동도 하고 집회도 하고 그랬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그리고 한국의 경우를 보면 교회 예배나 모임을 통해서 확진자가 늘어나니까, 이제는 국민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오히려 교회가 차별을 당하게 되다 보니까 이런 움직임이 조금 잦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꼭 요즘이 아니더라도 이 동성애 문제, 특히 교회에서 이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동성애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먼저 이와 같은 내용, 좀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 성경을 바탕으로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는 성경에 등장하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8장 3절~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すると、律法学者とパリサイ人が、姦淫の場で捕らえられた女を連れて来て、真ん中に立たせ、
イエスに言った。「先生、この女は姦淫の現場で捕らえられました。
モーセは律法の中で、こういう女を石打ちにするよう私たちに命じています。あなたは何と言われますか。」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여기서 서기관이란 다른 말로 율법학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이 율법에 대해서는 대단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간음하던 여자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를 끌고 와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데에 세우고는 예수님한테 말하기를, 율법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자,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죽이라고 하는 율법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夫のある女と寝ている男が見つかった場合 は、その女と寝ていた男もその女も、二人と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에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끌고 온 사람은 여자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늘은 객관적이 사실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들이 이 율법을 어긴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실 지금 이 상황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있어서 위험한 상황이냐 하면,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돌에 맞아서 죽을 수도 있는 이 여자가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또한 잘못하면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강압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 그 지역에 어느 정도 자율권을 허용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재판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만 사형 집행에 대해서만은 로마 기관에 의한 판결을 받아야만 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기 위해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까지 끌고 갔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 여자를 죽여야 하냐 말아야 하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약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를 죽여랴, 라고 하셨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을 내리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당시 로마의 법률, 말하자면 현행법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반면에 이 여자를 죽이지 말아라, 라고 한다면, 아니,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다 뭐다 하더니만 결국 로마에 굴복하는 거네? 뭐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던 백성들의 믿음이 떨어져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요.

솔직히 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교묘한 함정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しかし、彼らが問い続けるので、イエスは身を起こし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中で罪のない者が、まずこの人に石を投げなさい。」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 너희들이 진정으로 이 여자를 심판하고 싶다면, 너희들 중에서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彼らはそれを聞くと、年長者たちから始まり、一人、また一人と去って行き、真ん中にいた女とともに、イエスだけが残された。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イエスは身を起こして、彼女に言われた。「女の人よ、彼らはどこにいますか。だれもあなたにさばきを下さなかったのですか。」
彼女 は言った。「はい、主よ。だれも。」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もあなたにさばきを下さない。行きなさい。これからは、決して罪を犯してはなりません。」〕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그 여자는 분명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만큼 죄가 없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당장에라도 그 여자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둘째로 이번에는 사도행전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彼は空腹を覚え、何か食べたいと思った。ところが、人々が食事の用意をしているうちに、彼は夢心地になった。
すると天が開け、大きな敷布(しきふ)のような入れ物が、四隅をつるされて地上に降りて来るのが見えた。
その中には、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がいた。
そして彼に、「ペテロよ、立ち上がり、屠って食べなさい」という声が聞こえた。
しかし、ペテロは言った。「主よ、そんな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このようなことが三回あってから、すぐにその入れ物は天に引き上げられた。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이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일입니다. 여기서 제 육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본다면 낮 12시, 정오가 됩니다. 이제 베드로가 기도를 하는데 환상이 보여요.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거기 안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온갖 짐승들이나 새 같은 것들이 거기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걸 잡아먹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는 무슨 말씀인가 하면 구약에 보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이 명확하게 율법으로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율법에 정해진 것 외에는 지금까지 먹은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거절을 한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베드로가 환상으로 본 그 보자기 안에는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먹으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만약에 그 중에서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안 되는 것도 섞여 있었다면, 그것만 어쩌면 잡아먹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베드로가 그 안을 보았을 때에는 아무리 봐도 율법적으로 금지된 것만 들어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렇게 먹지 못할 것만 들어 있는데도, 들리는 목소리는 자꾸만 잡아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런 깨끗하지 않은 것들은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하니까, 그 목소리가 말하기를, 아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왜 못 먹겠다고 하는 거냐……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환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상종을 안 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종차별을 철저하게 했었던 것이지요. 이방인들과는 말도 나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사자를 베드로에게 보내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마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너는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이방인을 거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라고 하는 뜻으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순종한 베드로는 이제 처음으로 이방인 가정에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을 받지 않는 방법, 간단합니다.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비판을 하는 사람이 흠이 없다면 비판을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비판을 하는 너한테도 얼마든지 비판을 받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판을 한다는 것은 항상 교만과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잠언 13장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高ぶりがあると、ただ争いが生じるだけ。知恵は勧告を聞く者とともにある。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사람들이 왜 상대방을 비판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 너나 나나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내가 뭘 잘났다고 너를 비판할 수 있겠냐……이렇게 되면 교만이 사라지고 다툼도 사라지고 평안과 화평이 찾아오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이야기였습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가 본 보자기 환상 이야기였고요, 세 번째는 비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본론으로 돌아와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성애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떤 경건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앞에 어떤 한 동성애자를 끌고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한쪽 손에 돌을 쥐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경건한 신앙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 이 사람은 동성애자다. 너는 이 사람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겠느냐.

이 경건한 신앙인은 성경말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3절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男がもし女と寝るように男と寝たなら、二人は忌み嫌うべきことをしたのである。彼ら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血の責任は彼らにある。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둣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래. 알았다” 하고 말씀을 하시더니 동성애자에게 돌을 던지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천사들도 그 동성애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동성애자는 수많은 돌에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처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 경건한 신앙인에게 묻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중 후반부인 로마서 1장 28절~32절까지 뭐라고 써있는지 한 번 읽어봐라.

그래서 이 경건한 신앙인이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32절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28.また、彼らは神を知ることに価値を認めなかったので、神は彼らを無価値な思い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れで彼らは、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行っているのです。
29.彼らは、あらゆる不義、悪、貪欲、悪意に満ち、ねたみ、殺意、争い、欺き、悪巧みにまみれています。また彼らは陰口を言い、
30.人を中傷し、神を憎み、人を侮り、高ぶり、大言壮語(たいげんそうご)し、悪事を企み、親に逆らい、
31.浅はかで、不誠実で、情け知らずで、無慈悲です。
32.彼らは、そのような行いをする者たちが死に値するという神の定めを知りながら、自らそれを行っているだけでなく、それを行う者たちに同意もしているのです。”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너 여기에 적힌 죄를 지금까지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니? 율법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야고보서 2장 10절에 뭐라고 적혀 있니?

이 경건한 신앙인은 또다시 서둘러 성경을 찾아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예수님께서는 이 경건한 신앙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율법 모두를 지키다가도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자나 마찬가지라고 되어 있지? 그러면 율법을 범하면 어떻게 된다고?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32절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일을 행하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적혀 있지 않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그 동성애자의 피가 흥건히 묻어 있는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십니다. 자, 저기 서. 이제 네 차례야.

여러분,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는 제 상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앞서 레위기 20장 13절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동성애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율법을 하나도 어긴 적이 없나요?

꼭 무슨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고, 바람을 피워야 간음이 아닙니다. 우리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昔の人々に対して、『殺してはならない。人を殺す者は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兄弟に対して怒る者は、だれでも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兄弟に『ばか者』と言う者は最高法院でさばかれます。『愚か者』と言う者は火の燃えるゲヘナに投げ込まれます。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情欲を抱いて女を見る者はだれでも、心の中ですでに姦淫を犯したのです。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앞서 22절에 나오는 <라가>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바보, 멍청이 같은 욕설을 말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욕설을 하기만 해도 그것은 살인한 것과 같고,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이성을 보기만 해도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살인과 간음은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다른 사람이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죄가 없는 사람입니까.

오해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동성애는 틀림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이를 비판한다는 것은 나는 그 사람들보다 의롭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요, 나는 그 사람들을 비판할 정도로 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누군가를 동성애자라고 해서 배척을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저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처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아니면,

앞서 살펴본 베드로가 본 환상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실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무엇입니까. 원수란 나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나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동성애자는 그와 같은 내 원수보다도 더 배척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8절~9절
"8.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も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聖書にしたがって、「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最高の律法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の行いは立派です。
しかし、もし人をえこひいきするなら、あなたがたは罪を犯しており、律法によって違反者として責められます。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는 그 무게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는 많은 피를 흘리시고, 죄인들을 위해서는 조금만 흘려주셨나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갈 만한 자격은 조금도 없고, 오로지 지옥불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모든 피를 흘려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예수님의 보혈 없이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차별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차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과 넘치는 축복을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 이웃을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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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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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회 조건과 결과
2020년 11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구약 1305페이지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ハバクク書 3章17節~18節
“17.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18.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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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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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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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지금까지 계속해서 로마서 강해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특별히 “조건과 결과” 条件と結果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코로나가 다시 확산국면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조금 주춤하나 싶었는데 또다시 확산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한국은 하루 신규확진자가 200명을 넘었다고 하고, 일본은 하루 신규확진자가 1,700명이 넘었다고 하지요.

이 숫자만 보더라도 심각한 일입니다만,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더 충격적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서는 하루 10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하루에 1,000명 정도가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0명의 확진자가 아니에요 하루에 1,000명씩 죽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0초에 한 명씩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이 무슨 중세도 아니고 첨단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되었다고 하는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로라하는 선진국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사망자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암담한 것은 이와 같은 사태가, 적어도 한 두 달 사이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어떤 전문가는 일러도 내년 후반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참으로 인간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감사>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인해서, 우리가 감사로 인한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제발 이 코로나인지 뭔지를 종식시켜주셔서, 하루 빨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코로나로 인해서 고통 받은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회복되도록 해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이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지기는커녕 벌써 몇 개월 동안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고 계셔서일까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좀 더 큰 소리로, 목이 쉬어라 기도를 해야 저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실까요?

이에 대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94편 8절~9절
“8.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気づけ。民のうちのまぬけな者どもよ 愚かな者どもよ いつになったら悟るのか。
耳を植えつけた方が 聞かないだろうか。 目を造った方が 見ないだろうか。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 코로나를 종식시켜주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기도도 듣지 않고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지 않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18.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이 기록된 책은 하박국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슨 국 이름이 아니고 하박국이라고 하는 선지자 이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좀 알기 쉽게 바꾸어보겠습니다. 내가 1년 동안 일을 했는데, 성과가 없었어요. 아니면 월급을 못 받았어요. 쌀은 오래 전에 떨어졌고요, 냉장고를 열어봐도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요. 통장에 잔고는 한 푼도 안 남았어요. 이제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해요.

이와 같이 참으로 딱한 상황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할렐루야! 제가 1년 동안 일을 했는데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았습니다. 쌀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가진 돈은 이제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너무너무 기쁩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분, 정말로 한 무슨 선지자급 되는 믿음의 소유자나, 아니면 무슨 의학적인 전문가의 돌봄이 필요한 분일 수도 있겠다……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습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자기가 가진 나무에 열매가 열려야 이를 팔아서 소득을 올릴 수가 있을 텐데, 전혀 열매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 양이나 소가 있어야 양의 털을 깎든지 소 젖을 짜서 팔거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모든 것이 다 막혔어요. 무엇 하나 방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성경은 도저히 무리한 것을 우리에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 하박국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단한 선지자다 라고 하는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건가요?

우리가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로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감사>라고 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잠시 우리는 이사야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6장 9절~10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すると主は言われた。「行って、この民に告げよ。『聞き続けよ。だが悟るな。見続けよ。だが知るな』と。
この民の心を肥え鈍らせ、その耳を遠くし、その目を固く閉ざせ。彼らがその目で見ることも、耳で聞くことも、心で悟ることも、立 ち返って癒やされることもないように。」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좀 어렵게 들리기도 하는 말씀입니다만, 구약에 있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인용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데, 제자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좀 단도직입적으로 알기 쉽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로 비유로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제자들이 좀 궁금하게 생각했나 보죠?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0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すると、弟子たちが近寄って来て、イエスに「なぜ、彼らにたとえでお話しになるのですか」と言った。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15절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こうしてイザヤの告げた預言が、彼らにおいて実現し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聞くには聞くが、決して悟ることはない。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知ることはない。
この民の心は鈍くなり、耳は遠くなり、目は閉じているからである。彼らがその目で見ることも、耳で聞くことも、心で悟ることも、立 ち返ることもないように。そして、わたしが癒やすこともないように。』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 구절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깨닫고 구원을 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럴까 봐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에요. 이는 참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렇게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보면 각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현금을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그것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지원금을 더 달라고 합니다만, 나라에서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좀처럼 추가지원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누구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라에 돈이 없어? 그러면 돈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에서 찍어내는 게 아냐? 그럼 나라에서 좀 넉넉하게 찍어서 국민들에게 나눠주면 되잖아. 혹시 이렇게 생각해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당장 돈을 마구마구 찍어서 한 사람당, 글쎄요. 얼마면 좋을까요. 1억 정도를 찍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씩 나눠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참 좋겠지요? 4인 가족이면 4억이 생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렇게 되면 그 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당장 사람들 주머니에 1억씩 생겼다 하면 소비는 늘어나겠지요. 순간적으로 보면 경제도 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제 인건비가 오롭니다. 그래서 인건비를 올리면 그 다음에는 물가가 오릅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 나라 경제가 만가지고 맙니다. 이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나라가 실제로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이처럼 인건비와 물가가 서로 오르다 보니까 화폐 숫자가 엄청납니다. 한때 1000억 짐바브웨 달러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계란 3개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짐바브웨 달러는 사용이 중단되고 미국 달러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축복이 주워진다는 것은 이는 재앙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질서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비밀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18.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7절에는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18절에서 선지자는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결과입니까.

좀 어려운가요? 그러면 좀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하는 것이 조건이라면, 우리가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인해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하는 것이 결과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 결과로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결과입니까. 예,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17절에 나와 있는 조건들은 전혀 좋은 일들이 아니에요. 좋기는커녕 이주 안 좋은 조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절에서 결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7절을 조건이 아닌 현실로, 그리고 18절을 조건이라고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17절 같은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18절은 조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조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넘치는 축복을 받는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2장 7절~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7절~10절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단히 의롭고 부유했던 사람입니다. 재산도 많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순간에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건강마저도 잃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좌절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좌절과 절망을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절망을 축복을 받을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의 믿음을 지킨 결과 그는 그 이전보다도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해서 히죽히죽 웃고 다니시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의학적인 전문가의 돌봄이 필요한 분이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さて、信仰は、望んでいることを保証し、目に見えないものを確信させるものです。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의 눈으로는 안 좋은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간에 모든 일들이 하나가 되어서 마침내 크나큰 축복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아무나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아무나 못합니다. 그러나 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다고요?

아니,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 기뻐하든 즐거워하든 할 것 아니야. 지금 다 망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냔 말이야. 이렇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을 결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못합니다.

하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아무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야 감사를 한다면, 그런 건 믿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도 할 줄 알아요. 이처럼 감사를 결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을 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들 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일을 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좌절할 때 나도 좌절하고, 남들이 절망할 때 나도 절망하고, 남들이 믿음을 버릴 때 나도 믿음을 버리고, 남들이 불평불만을 말할 때 나도 불평불만을 말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라고 하는 것은, 빼앗기 위해서 있는 힘껏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여러분 천국은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있는 힘껏 공격해야 빼앗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도 내 뒤에 있는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배해주신 상을 받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내 앞에 놓여 있는 저 푯대, 결승점을 향해서 있는 힘껏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주님의 축복을 앞당기는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렵거나 힘든 일이 눈앞에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되는, 이와 같은 환란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가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해야 할 때요, 그 때가 바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때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일수록, 선별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랍고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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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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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회 우상을 물리치라
2020년 11월 8일 설교 (로마서 강해 10)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25절 신약 240페이지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1章21節~25節
“21.彼らは神を知っていながら、神を神としてあがめず、感謝もせず、かえってその思いはむなしくなり、その鈍い心は暗くなったのです。
22.彼らは、自分たちは知者であると主張しながら愚かになり、
23.朽ちない神の栄光を、朽ちる人間や、鳥、獣、這うものに似たかたちと替えてしまいました。
24.そこで神は、彼らをその心の欲望のままに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25.彼らは神の真理を偽りと取 り替え、造り主の代わりに、造られた物を拝み、これに仕えました。造り主こそ、とこしえにほめたたえられる方です。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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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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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우상을 물리치라” 偶像を退けよ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중에서 먼저 로마서 1장 24절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장 24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そこで神は、彼らをその心の欲望のままに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께서 잘못 가고 있는 우리를 꾸짖으시는 것은, 그럼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안 좋은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언 3장 11절~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 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わが子よ、主の懲らしめを拒むな。その叱責を嫌うな。
父がいとしい子を叱るように、主は愛する者を叱る。

사람이 자동차나, 아니, 자전거라도 좋습니다. 자동차나 자전거를 운전하고 있을 때, 똑바로 가야 하는데 자꾸 삐뚤 빼뚤 가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빨리 어떻게 핸들을 돌려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징계이자 꾸지람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꾸지람을 들으면 마음이 괴롭고 힘들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고 계시다는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4절에 보면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장 24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そこで神は、彼らをその心の欲望のままに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이는 뭐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지요. 여기서 정욕대로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해가 되더라도, 아니면 주위 사람에게 해가 되더라도 아무런 상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뭐, 도박이다 마약이다 하는 데에 돈을 펑펑 씁니다.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고, 아무도 거기서 건져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인생은 보나마나 이제 끝난 것이지요. 큰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간음을 말합니다. 이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서에서뿐만 아니라 신구약을 불문하고 많은 부분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만, 그렇다면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뭐 대표적인 예로 남녀간의 불륜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미혼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사랑을 하는 것은 아름다울 수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한쪽이나 아니면 양쪽에게 이미 결혼한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것은, 이는 대단히 부적절한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간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에서 언급되는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외에도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훨씬 더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 이제 벌써 11월달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올 한해 어떠셨습니까. 이제 어느덧 2020년도 저물어 갑니다만, 다가오는 2021년,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좀 답하기 곤란하시죠?

혹시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은 받기 싫다고 하시는 분 계신가요? 예, 아마도 없으실 것입니다.

만약에 난 정말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돈을 많이 주셨어요. 그런 분이 계시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예, 그냥 버리지 마시고, 꼭 필요로 하는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 귀하게 써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사실 집도 좋고, 차도 좋지만 일단 돈만 있으면 좋은 집도 살 수 있고 좋은 차도 살 수 있잖아요. 가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분들 보면 체면을 차리시려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글쎄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 항상 성령충만 은혜충만만 기도해야 하나요? 어차피 주변 사람이 듣는 것도 아닌데, 아휴, 주님, 거 돈이 너무 없네요. 나가야 할 돈은 많은데 돈이 도무지 들어오지 않아요. 돈 좀 채워주시옵소서……이런 기도가 잘못된 건가요? 아니에요. 물론 과다한 욕심을 부리면서 100억을 주시옵소서 1000억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글쎄요.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만,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체면을 차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어린 아이처럼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물론 성령충만, 은혜충만도 좋지만, 돈도 좀 넉넉히, 그야말로 타락하지 않을 정도로 주셨으면 참 좋겠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무언가를 받고 싶다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설마 돈이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고 싶어하시나요? 그러면 돈을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실 건가요? 만약에 그런 관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입장을 바꾸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받고 싶어하실까요. 하나님께서도 우리한테 돈을 받고 싶어하실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거지입니까. 하나님이 가난하신가요?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主よ、偉大さ、力 、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만이 아니라 온 천하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받고 싶어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 그렇다면 마음만 드리며 되겠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십일조다 헌금이다 하면서 돈을 내래?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6절~17절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16.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あなたのうちの男子はみな、年に三度、種なしパンの祭り、七週の祭り、仮庵(かりいお)の祭りのときに、あなたの神、主が選ばれる場所で御前に出なければならない。主の前には何も持たずに出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神、主が与えてくださった祝福に応じて、それぞれ自分の贈り物を持って出なければならない。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イノンド、クミン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律法 の中ではるかに重要なもの、正義とあわれみと誠実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아니, 온 천하만물이 하나님 것이라면서 꼭 이렇게 가난한 나한테까지 십일조나 헌금을 내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돈, 재산 아닙니까.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가장 아끼는 물질 중 하나인 보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마음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도 똑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마귀 사탄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채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마귀도 하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가로채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죽음, 우리의 파멸입니다.

이는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창세기를 살펴보기 전에 자, 오늘의 질문입니다. 오늘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주관식이지만 단어를 묻는 질문입니다.

여러분께 누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란 무엇입니까> 좀 어려운 질문이지요?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물으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엇무엇이다>라고 하면 그 빈칸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다. 물론 맞습니다. 요한1서 4장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시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사랑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다. 예, 그것도 맞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안 계셨나요? 아니요. 계셨습니다. 그럼 예수님 전의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천하 온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이는 말씀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첫 율법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2장 16절~17절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이것이 바로 인류의 첫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누구는 말합니다.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다. 아니, 먹으면 안 되는 나무를 왜 굳이 만들어가지고서는 사람을 유혹하셨을까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으시고, 이를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사람에게 주셨을 때, 이 말씀을 따라서 사람이 먹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모두 순종한 것으로 쳐주겠다,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 드린 것으로 쳐주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사탄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5절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마귀 사탄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뭐라고 말했다고요?

창세기 3장 4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여기서 마귀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앞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뱀 곧 마귀 사탄이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했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와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이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극은 벌어졌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여자는 그러면 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열매를 따먹었습니까. 그것은 단순하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했던 말씀과 달리 죽지 않고, 그리고 자기들도 하나님과 같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에덴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그들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났고,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축복을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6절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ねたみの神。わたしを憎む者には父の咎を子に報い、三代、四代にまで及ぼし、
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命令を守る者には、恵みを千代にまで施す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너를 위하여 다른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그것이 바로 나에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상을 만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도 자기가 만든 그 우상이 자기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도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만들어놓은 우상들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못 배운 사람만이 우상을 섬기나요? 가진 것 없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우상을 섬기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아요.


오늘 말씀 중 로마서 1장 21절~23절을 봅니다.

로마서 1장 21절~23절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彼らは神を知っていながら、神を神としてあがめず、感謝もせず、かえってその思いはむなしくなり、その鈍い心は暗くなったのです。
彼らは、自分たちは知者であると主張しながら愚かになり、
朽ちない神の栄光を、朽ちる人間や、鳥、獣、這うものに似たかたちと替えてしまいました。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면서도, 지혜도 있고 배울 만큼 배우고 알만큼 아는 사람들, 세상적으로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마저도 어리석게도 우상을 섬깁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기가 더 잘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彼らは神の真理を偽りと取り替え、造り主の代わりに、造られた物を拝み、これに仕えました。造り主こそ、とこしえにほめたたえられる方です。アーメン。

바로 그렇게 믿기 때문에,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은 오로지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더욱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우상이 무엇입니까. 꼭 다른 종교에 있어서의 우상만이 우상인가요?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우상은 바로 돈, 재물입니다. 그리고 세상적 권력이나 지위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외모나 학벌이나 경력도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이 바로 선악과,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때로는 가족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동안 살았던 하란 땅을 떠난 것이 75세였습니다. 그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만, 정작 그에게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 하나를 달라고 소원했습니다만, 그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 그로부터 25년 뒤인 100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들 이름은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기뻤겠지요. 큰 민족이고 뭐고 간에 그의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은 참으로 소중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아들을 통해서 내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あなたの子、あなたが愛しているひとり子イサクを連れて、モリヤの地に行きなさい。そして、わたしがあなたに告げる一つの山の上で、彼を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 소중한 아들, 이 세상에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 이제 그의 나이로 보았을 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포기했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 그런데 이제 그 아이들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번제가 무엇입니까. 보통 양이나 염소를 죽이고는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도 남았겠지요. 어쩌면 이토록 잔인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명령에 대해서 단 한 마디 불평도 불만도 안 합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이삭을 사흘 걸려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산에까지 데리고 가서는, 이제 아들을 결박한 다음에 죽이려고 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御使いは言われた。「その子に手を下してはならない。その子に何もしてはならない。今わたしは、あなたが神を恐れていることがよく分かった。あなたは、自分の子、自分のひとり子さえ惜しむことがなかった。」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놀라십니다. 야, 아브라함아, 스톱. 그 아이한테 손 대지 마. 건드리지 마. 이처럼 다급하게 하나님께서는 만류를 하시지요. 그리고 이제 네가 그렇게 아끼는 아들마저도 네가 우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구나. 전적으로 나만을 의지하고 있구나. 그래. 이제 내가 너에게 넘치도록 복을 줄게……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물론 그렇다고 오해하실 분은 안 계시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녀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반드시 가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보다도 다른 대상, 그것이 돈이나 세상적인 권력이나 지위나 하물며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다 위에 두게 되면 그것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 그것이 자칫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고 불순종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특정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지식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한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유식한 것처럼, 아무리 고상한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것들은 한낱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111편 10절과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시편 111편 10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知恵の初め それは主を恐れること。 これを行う人はみな賢明さを得る。 主の誉れは永遠に立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아멘.
우리 모두, 모든 우상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닫고, 오직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심의 이음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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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회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
2020년 11월 1일 설교 (로마서 강해 9)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20절 신약 239페이지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8節~20節
“18.というのは、不義によって真理を阻んでいる人々のあらゆる不敬虔と不義に対して、神の怒りが天から啓示されているからです。
19.神について知りうることは、彼らの間で明らかです。神が彼らに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20.神の、目に見えない性質、すなわち神の永遠の力 と神性は、世界が創造されたときから被造物を通して知られ、はっきりと認められるので、彼ら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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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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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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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 大きな恵みと驚くべき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20절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18.というのは、不義によって真理を阻んでいる人々のあらゆる不敬虔と不義に対して、神の怒りが天から啓示されているからです。
19.神について知りうることは、彼らの間で明らかです。神が彼らに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20.神の、目に見えない性質、すなわち神の永遠の力 と神性は、世界が創造されたときから被造物を通して知られ、はっきりと認められるので、彼ら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


이 말씀, 적지 않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처음 접하시는 분들께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자, 먼저 18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8.というのは、不義によって真理を阻んでいる人々のあらゆる不敬虔と不義に対して、神の怒りが天から啓示されているからです。”

하나님의 진노, 즉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화를 내시느냐 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 그리고 불의 그 자체에 대해서 화를 내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를 불의, 즉 하나님 말씀에 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에서 구원하시려는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계획을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고, 그리고 지금 이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합니다. 성령님의 복음 전파를 방해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도 간혹 오해를 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도 되풀이해서 나오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써서 심판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떠한 불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징벌을 한다거나 비난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할이 아닙니다. 징벌을 내린다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사람들이나 저 단체들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고 하나님 계획을 방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이 그런 짓을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가 벌을 내려요?

여러분, 이러면 큰 일 납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법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심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범법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법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나 아무리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손으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18절에 보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너희들이 할 필요가 없어.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서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실 일이 있으시면 그 진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19절과 2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9절~20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19.神について知りうることは、彼らの間で明らかです。神が彼らに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20.神の、目に見えない性質、すなわち神の永遠の力 と神性は、世界が創造されたときから被造物を通して知られ、はっきりと認められるので、彼ら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

자,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나는데,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의 상상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 다 보여지고 다 알려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기록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대표적인 심판은 아무래도 노아 때의 대홍수와, 그리고 아브라함 때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5.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5.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また、かつての世界を放置せず、不敬虔な者たちの世界に洪水をもたらし、義を宣べ伝えたノアたち八人を保護されました。
また、ソドムとゴモラの町を破滅に定めて灰にし、不敬虔な者たちに起こることの実例とされました。

이와 같이 이 두 심판은 제가 대충 선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대표적인 심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대상으로 본다면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만, 우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곳은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창세기 13장 13절에는 소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3절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ところが、ソドムの人々は邪悪で、主に対して甚だしく罪深い者たちであった。

이는 소돔만이 아니라 고모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장 20절~21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主は言われた。「ソドムとゴモラの叫びは非常に大きく、彼らの罪はきわめて重い。
わたしは下って行って、わたしに届いた叫びどおり、彼らが滅ぼし尽くされるべきかどうかを、見て確かめたい。」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기로 작정 하십니다만, 그 소돔에 살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누구였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시켜서 이 롯과 그의 가정을 소돔 밖으로 도망가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너희들이 바깥으로 도망갈 때까지는 멸망시키지 않을 테니 서둘러 여기를 떠나라.

그리고 하나 더 말을 하지요.

창세기 19장 17절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彼らを外に連れ出したとき、その一人が言った。「いのちがけで逃げなさい。うしろを振り返ってはいけない。この低地のどこにも立 ち止まってはならない。山に逃げなさい。そうでないと滅ぼされてしまうから。」

하나님의 사자들은 롯과 그의 가족에게 말하기를 죄악의 도시 소돔을 빠져 나와서 도망 갈 때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합니다. 다른 가족들은 이 말을 지켰습니다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게 되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9장 24절~26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ロトのうしろにいた彼の妻は、振り返ったので、塩の柱になっ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유황과 불을 하늘로부터 내리셔서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거기에 사는 사람들 모두와 함께 멸망시켜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자들이 도망가는 도중에 머물거나 돌아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어기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대단히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와 같은 도시가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려서 한 순간에 망해요? 그런 일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어느 회사가 자금 사정이 안 좋아져서 망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몇 개월에서 몇 년은 걸립니다. 그런데 이는 회사 정도가 아니라 크나큰 도시. 그것도 풍요로웠던 도시가 한 순간에 망한다는 일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창세기 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神はノアに仰せられ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終わりが、わたしの前に来ようとしている。地は、彼らのゆえに、暴虐 で満ちているからだ。見よ、わたしは彼らを地とともに滅ぼし去る。

그러면서 큰 배를 지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 이후 수 십 년 뒤에 큰 배,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께서는 그 방주 안에 동물들을 암수 쌍으로 들어 보내고 노아의 가족도 함께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노아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는데, 그들은 각각 아내도 있었지요. 그래서 세 아들과 세 며느리, 이렇게 6명. 여기에 노아와 노아의 아내를 더하면 총 8명이 됩니다. 이제 그들이 다른 동물들과 함께 방주 안에 들어갔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냐 하면,

창세기 7장 10절~12절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七日たつと、大洪水の大水が地の上に生じた。
ノアの生涯の六百年目の第二の月の十七日、その日に、大いなる淵の源がことごとく裂け、天の水門が開かれた。
大雨は四十日四十夜、地に降り続いた。

그들이 방주 안에 들어갔더니 7일 후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하늘의 창문이 열리고 크고 깊은 샘들이 터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0년 올 한해는 다행히 예년에 비해 태풍의 큰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태풍이 한 번 제대로 지나가게 된다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도 대단히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리고 샘들이 터지고 그러니까 전세계가 땅에 덮이고는, 모든 산들이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그 이후 1년 이상 전세계가 물속에 잠겨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당시 전세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 총 8명을 남겨두고 모두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도 문제를 한 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당시 노아 때의 대홍수로 인해서 멸망한 사람들은 대충 몇 명쯤이었을까요.

물론 이렇게 질문을 드려도 사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는 없겠지요. 자, 그러면 좀 더 단순하게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 때의 대홍수로 인해서 당시 전세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 당시 살았던 전세계 인구. 지금보다 적었을까요. 많았을까요?

참고로 지금 전인구는 대략 78억 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홍수로 인해서 멸망한 사람들은 지금 인구인 약 78억명보다 적었을까요? 많았을까요?

이를 성경을 기준으로 본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부터 시작해서 야곱까지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노아의 홍수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를 아담창조 1년이라고 잡습니다. 그러면 노아의 홍수가 언제 일어났느냐 하면 아담이 창조되고 1656년 뒤인 아담창조 1657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 본다면, 노아의 홍수는 아담이 창조되고 1656년이 지난, 아담창조 1657년에 발생했다는 말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아담창조 1657년 당시 전세계의 인구는 어땠을까요. 물론 당시의 정확한 통계자료가 남아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 때 어딘가에 그런 기록이 있었다 하더라도 홍수로 인해서 사라졌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갑작스럽게 줄어들게 됩니다만, 홍수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의 수명은 대단합니다. 창세기 5장 1절부터 시작해서 아담의 계보가 나오는데, 여기에 기록된 수명들을 보면 800세, 900세가 드물지 않아요. 창세기 5장 5절에 보면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メトシェラ)는 창세기 5장 27절에 의하면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에 태어났던 노아도 9장 29절에 의하면 95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이 숫자들로 미루어본다면 어떠십니까. 물론 나라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대략 지금과 비교해서 10배 정도 오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어요?

노아의 홍수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3000년~2500년 정도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뭐, 넉넉잡아 기원전 3000년이라고 해봅시다. 그 때 쯤에 홍수가 일어나고, 이제 홍수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1000살 가까이 살았다고 치고, 홍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길어봤자 100살 정도 살았다고 가정을 합니다. 그러면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는 1656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었고, 홍수 이후에는 넉넉잡아 기원전 3000년부터 지금 2020년이니까 단순계산으로 5020년이 되지요.

이렇게 보면 홍수 전은 1656년, 홍수 후는 5020년이 되어서 홍수 후가 더 길어 보입니다만, 홍수 이전에는 10배나 오래 살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인구 증가속도를 10배로 잡아야 하니까 홍수 전은 1656년이 아니라 16560년이라고 생각해야 조건이 같아집니다.

그렇다면 홍수 후인 지금 인구는 기원전 3000년부터 5020년 걸쳐서 78억이 되었어요.

16560년과 5020년을 비교하면. 이는 3배가 넘는 세월이 됩니다. 이를 참고로 해서 단순계산을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5020년 걸쳐서 78억이 되었다고 한다면, 16560년은 230억 이상이 되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 당시 지금보다도 3배 이상이나 인구가 많았던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모두 한 순간에 멸망을 시키시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인 총 8명만 구원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놀랍고 끔찍한 심판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두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서. 그런데 왜 그렇게 죽이신 거야?

만약에 누가 이렇게 물으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예나 지금이나 소중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고 지금의 전세계 인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 십억, 수 백억의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보다도 더 큰 심판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성경은 더 큰 충격적인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에게 내려진 심판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한 방울에 대한 무게를, 이 지구가 아니라 전 우주의 모든 것을 합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소돔보다도 고모라보다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홍수보다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보다도 더 무거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죄 없는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심판을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요, 가장 놀라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서 멈추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큰 은혜, 놀라운 사랑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미 이처럼 수많은 심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핑계를 할 수 없다고 오늘 본문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누구는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이, 우리 이웃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 그런 게 적혀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심판을 받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때렸어요. 아니면 여러분의 물건을 훔쳤어요. 그래서 경찰이 그 사람을 붙잡고는, 당신은 왜 저 사람을 때리고 저 사람물건을 훔쳐서 법을 어겼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사람을 때리지 말라거나 훔치지 말라는 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처벌받지 않나요? 아닙니다. 무슨 개인이나 사적인 단체가 정한 규칙이라면, 이를 몰랐다고 하면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나라가 정한 법이라면, 이를 몰랐다 하더라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적혀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심판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멸망이 피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 이와 같은 심판과 구원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알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 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 구원의 날이 될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의 날, 고통의 날,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으로서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 드리고, 그리고 예수님의 그 마음을 가지고, 더 늦기 전에,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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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회 믿음과 소망
2020년 10월 25일 설교 (로마서 강해 8)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신약 239페이지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7節
“17.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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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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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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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믿음과 소망” 信仰と希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성경구절은 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좀 말씀이 어려워 보입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로마서 1장 17절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도록 좀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첫 부분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부분, 두 번째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는 성경말씀 전체를 가리키고, 그리고 좁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친히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시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는 모두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둘째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이는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이 책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책을 이렇게 가슴에 싸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 같이 느껴지나요? 악한 영이 다가올 때에 이 성경책을 짜잔 하고 들이대면 마귀 사탄이 물러갈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그것은 진정한 성경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성경책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성경책은 그냥 종이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안에 적혀 있는 그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의 능력은 일반 교과서나 다른 교양서적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책들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이 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물론 모두 사람의 손으로 쓰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의 뜻은 직접적으로 글을 쓴 것은 사람이지만 이를 쓰도록 하신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에는 일반 사람의 말에는 없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종이에 적힌 글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단순한 지식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리하고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추려고 한 우리의 본 모습을 들춰내기도 하시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끌어내시기도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가 변합니다. 우리 마음이 변하고 우리의 인생이 변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의 앞길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 성경을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그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니, 그게 이상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은 정말로 본받을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꼭 성경을 많이 외워야지만 말씀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요?

아휴, 나는 하루하루 바빠서 말씀을 외우기도 힘들어. 그럼 이제 난 틀렸나봐…….

그럼 인제 그런 분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그 교재에 있는 내용들을 많이 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성경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 기억하시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이 한 구절 가지고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면,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하고 인생을 보내면 그것이 다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냥 무슨 어항 안에 있는 금붕어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한평생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이셨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계획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이십니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계획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태어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계획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라는 계획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난 다음에 전세계에 나가야지만 꼭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가요? 물론 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받은 은사가 달라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ようになります。」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기 위해서 사람들 귀찮게 따라다닐 필요가 없어요. 지금 이 시대처럼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 시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지지 않고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갈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 이웃을 서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모습을 그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귀찮게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믿으라고, 우리 교회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아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이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복음 전파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 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음으로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중반부에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까지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오늘도 문제를 한 번 내겠습니다. 오늘 문제를 주관식으로 하면 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힌트가 있습니다. 끝까지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이와 반드시 함께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이것”도 함께 있다는 뜻이 되고, “믿음”이 없다면 “이것”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일까요.

힌트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이와 반드시 함께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이라기보다는 제가 생각했던 답은 바로 “소망”입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その中で 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랑>만 강조가 되고 <소망>은 좀 홀대 받는 경우가 적지 않나 합니다만, 아닙니다.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라고 하는 말씀부터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한 번 로켓 발사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로켓이 어떤 때에 활용되냐 하면 대표적으로 인공위성을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통신을 하기 위해서 통신위성을 발사할 때도 있을 것이요, 날씨를 관측하기 위해서 기상위성을 쏘아 올릴 때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그 발사장면을 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우선 5, 4, 3, 2, 1 이렇게 카운트 다운을 한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엔진에 불이 붙습니다. 그러면 이제 연기가 폭발하듯이 난 다음에 로켓이 하늘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차차 올라가면서 1차로켓이 분리되고 2차로겟이 분리됩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연료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무거운 본체를 하늘 높이 올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연료를 필요로 하는데, 그 연료가 다 떨어지면 그건 이제 필요가 없게 되니까, 말하자면 빈 통부터 하나하나 분리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주공간에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인공위성이 날개를 펴게 됩니다. 그 날개는 뭐냐 하면 태양에너지 패널입니다. 연료통은 지구상에서 우주공간에 도달할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지, 이제 거기서부터는 연료통이 필요하지 않고 태양에서 오는 태양에너지를 연료로 삼아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인공위성 발사를 생각할 때마다 대단히 영적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심어졌다는 것은, 이는 마치 엔진에 불이 붙고 천국을 향한 신앙생활이 시작한 것을 의미하지요.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이름의 불꽃이 소망이라고 하는 연료를 태우면서 하늘 높이 천국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하지만 믿음과 소망이 있다는 뜻은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로켓에 아직 불이 붙은 연료통이 달려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해요. 그렇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거기는 아직 우주가 아니에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을 갖는 것이지, 이미 이루어졌다면 믿음과 소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가졌던 믿음과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면 그 순간 믿음과 소망은 이제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지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그 동안 믿어왔던 믿음과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야구나 축구 경기를 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팀이 이길 것이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이길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응원하면서 보는 것이지, 절대로 이기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예를 들어서 이미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그 녹화방송을 보면서 열심히 응원을 해요?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 세상에서 아무리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님들을 보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노아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지금까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큰 배를 몇 십 년에 걸쳐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좀 모자란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에요. 창세기 6장 9절 중반부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누구보다도 상식이나 교양이 있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이 그 크나큰 방주를 짓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믿음의 불이 소망이라고 하는 연료통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아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나와 내 가족이 구원을 얻는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소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그 가족을 구원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꽃과 연료통이 올바로 작동하는 한 로켓은 틀림없이 우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꽃이 꺼지거나 연료통이 도중에 떨어져 나가버린다면 그 순간 로켓은 상승을 멈추고, 곧바로 추락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을 보실까요?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 원동력이 이 세상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말씀, 하나님 복음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소망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절망입니다. 우리는 이 절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절망은 무엇으로부터 온다고 여러분께서는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의심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기도할 때 막 악마야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막 소리를 질러가면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래야 할 때도 있겠지요. 악마나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너무 흥분하지 말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리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악마나 사탄 이전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 걸까.

이러한 의심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의심에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 불안해집니다. 지금까지 하나님만 믿고 살아왔는데, 예수님만 믿고 살아왔는데, 어쩌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 수도 있어. 내가 헛것을 믿었는지도 몰라.

이처럼 불안이 쌓이면 이제 불만이 됩니다.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예수님은 무슨 예수님이야. 내가 그 동안 교회에 다닌다고 들인 시간이나 노력, 교회에 낸 헌금이 아깝다……. 이렇게 되면 이제 겉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려움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그러면 이제 마지막에는 절망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하나도 없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난 거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안 될 것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었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이렇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 사이에 있는 것은 바로 <환난(苦難)>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아무리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을 해도, 때로는 환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환난이 찾아온다고 해서 소망을 버리겠습니까. 천국을 버리겠습니까.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환난 중에서도 믿음만 있으면 여기서 인내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줄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훨씬 더 큰 소망을 갖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노련한 운전자라 하더라도 운전할 때 손을 놓고 운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은 무슨 자동운전기능이라는 것이 있는 차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기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고 운전을 한다면 이는 노련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운전이지요.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두 손을 놓고 운전해도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면 얼마나 넓은 문이겠습니까. 하지만 그 문은 절대로 들어 가서는 안 되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그렇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는 믿음과 소망의 운전대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0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しかし、主を待ち望む者は新しく力を得、鷲のように、翼を広げて上ることができる。走っても力衰えず、歩いても疲れない。

이제 우리는 불꽃을 꺼뜨릴 수가 없습니다. 연료통을 떨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소망이라는 이름의 연료를 불태우며, 마침내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가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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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회 복음을 전하는 방법
2020년 10월 18일 설교 (로마서 강해 7)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5절~16절 신약 239페이지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5節~16節
“15.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16.私は福音を恥としません。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すべての人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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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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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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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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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번째 시간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 福音を宣べ伝える方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 1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5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5.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로마에 가고자 했던 진정한 목적을 명료하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성경을 통해서 바라본 사도 바울의 삶은 대단히 명확합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아니었나요? 우리가 좀 더 편안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으면 믿었지, 현재보다 더 힘들고 더 고생을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거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기록할 정도로 지식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뜨거웠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평탄했지요. 그는 청년고위관리로서 미래가 유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말하자면 고생길이 시작했습니다. 매도 많이 맞고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겼는지 모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천막을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청년고위관리로 살았더라면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와 같은 고생을 당할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그와 같은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한 삶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축복 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죽음을 앞둔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저는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예수님 이후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는 스데반(ステパノ)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58절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しかし、聖霊に満たされ、じっと天を見つめていたステパノは、神の栄光と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を見て、
「見なさい。天が開けて、人の子が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のが見えます」と言った。
人々は大声で叫びながら、耳をおおい、一斉にステパノに向かって殺到した。
そして彼を町の外に追い出して、石を投げつけた。証人たちは、自分たちの上着をサウロという青年の足もとに置いた。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그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직후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직 예수를 모르던 바울, 아직은 사울이라고 불리던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죽는 모습을 보고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참으로 미련한 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유대교를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무슨 예수네 하나님의 아들이네, 뭐네 하는 사람을 믿는 바람에 저렇게 어이없이 돌에 맞아 죽게 되다니 쯧쯧쯧……. 어쩌면 그런 시선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바라보았을 바울이, 이제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치 스데반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처럼, 이제 자신에게 주실 면류관을 예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바울의 삶은 지극히 험난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와 같은 그의 삶에 대해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아이구 참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얼마든지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데 바보같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왜 저렇게 고생을 하나.

사람들이 이렇게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를 그도 알았겠지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もし私たちが、この地上のいのちにおいてのみ、キリストに望みを抱いているのなら、私たちはすべての人の中で一番哀れな者です。

그래. 우리가 길어봐야 10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삶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이 짧은 생애만 잘 되기를 바라고 살아간다면, 이렇게 평생토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는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라고 돈이 좋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재산이나 이 세상 명예나 권력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돈이나 재산이나 이 세상 명예나 권력이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리고 그 결과 청년고위관리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고 깨달았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이 세상의 부귀영화요? 돈? 재산? 권력?

그런 것들은 잠깐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봤자 우리는 100년도 못 되어서 모두 다 버리고 세상을 떠야 하는 운명입니다.

재물도 그렇고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얼마나 아깝고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자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때로는 경쟁자를 물리치기도 하고, 때로는 냉혹한 짓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할 시기가 다가오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깝고 초조할까 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어땠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고백을 할 정도의 인생이라면, 그의 인생은 진정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수많은 고생을 하기도 하고 고난도 겪었습니다만,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로마로 가서 바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私は福音を恥としません。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すべての人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す。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우리는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바울이 이처럼 고백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이를 위해서만 살기를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이 복음을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이는 무슨 뜻일까요.

이는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나는 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니, 자랑스러운 이 복음을 주저 없이 전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저 사람한테 전하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바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다면서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 전하기에 힘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 뉴스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운전을 하다가 철도 건널목에 다가가니까, 전철이 지나간다고 해서 소리를 내며 차단기가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차단기 안 쪽으로 들어가시더래요. 이 모습을 보고 이 여자분이 자동차에서 황급히 내려서 그 자전거에 탄 할아버지를 간신히 철도건널목 바깥으로 끌어냈어요.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전철이 지나갔습니다.

이 영상은 이 여자분의 자동차에 부착된 카메라, 드라이브 레코더에 찍힌 모습이었습니다만, 정말로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이 여자분은 간호사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구조하게 되었냐고 하니까, 자기가 옛날에 신입일 때 교육을 받기를,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자기가 움직여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망설이게 되었을 때에는 빨리 움직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마음에 배어 있으니까 그 때도 순간적으로 몸이 움직였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만에 하나 몇 초만 더 망설였더라도 이 할아버지는 무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가져야 하는 마음도 바로 이 간호사님이 가졌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무료한 일요일에 교회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사느냐 죽느냐,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심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전철이 오기 전에,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기 전에 빨리 바깥 안전한 곳으로, 빨리 구원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문제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싫다고 해도 교회에 나올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2번, 기타.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전도를 해야 한다. 듣기 싫다고 해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교회에 나올 때까지 매달린다고 하는 방법을 권유하는 곳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던가요?

마태복음 10장 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だれか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ず、あなたがたのことばに耳を傾けないなら、その家や町を出て行くときに足のちりを払い落としなさい。

이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있는 관행이었는데 구약에 보면 느헤미야 5장13절,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18장 6절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옷을 터는 행위는 상대방과 완전히 관계를 끊겠다는 표현인데, 예수님께서는 옷을 터는 정도가 아니라 발에 있는 먼지들까지도 완전히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복음을 전하는 너희들을 거부하는 곳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지금까지의 많은 교회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어떻게 하든, 무슨 수를 써서든 끈질기게 매달려서 하나라도 많이 데려오면, 교회에서 전도왕이라고 해서 상도 주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 같은 곳이라면, 그 회사 상품을 많이 팔았거나 해서 상을 준다거나 하면 모르지만, 정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 교회에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은, 이는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전도를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이나 고집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저도 직접 방문을 하거나, 아니면 전도 메일을 보내거나 할 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하면 다시는 안 갑니다. 왜냐하면 말씀 드린 대로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때인데 내가 계속해서 하겠다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일을 내가 방해하는 것 밖에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 보면 또 무슨 전도를 하는데 안 되면 이는 마귀가 방해해서 그렇다는 둥, 사탄이 역사해서 안 된다는 둥 해가면서, 마치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을 마귀취급, 사탄취급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보면 무슨 컴퓨터가 이상하면, 어디서 뭐 좀 들었다고 금방 무슨 바이러스 때문이네 해킹 때문이네 합니다.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이러스나 해킹은 그리 쉽게 당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IT쪽에 좀 있었습니다만, 자고로 컴퓨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컴퓨터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컴퓨터 이용자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경우인데, 컴퓨터 초보자일수록 어느 쪽에 원인이 많겠습니까. 그렇죠. 컴퓨터는 멀쩡한데 쓰는 방법을 잘 몰라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아니,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클릭을 해도 프로그램이 안 뜬대요. 그래서 이게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마우스를 두 번 눌러야 하는데 한 번만 누르니 프로그램이 뜹니까? 그럼 이게 컴퓨터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컴퓨터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전도를 했는데 교회에 안 나온다고 무슨 마귀네 사탄이네,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문제만 있으면 뻑 하면 마귀 탓이다 사탄 탓이다 하면 그 근본원인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아무리 전도를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어쩌면 자기 자신한테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을 좀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회사가 고객을 무시하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우리가 이웃을 무시하면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안전한 곳,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습니다만, 이를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오늘의 두 번째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감옥에 가지 않는다. 사실인가요? 아닌가요. 예, 정답은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베드로나 바울을 보십시오. 감옥에 얼마나 자주 들락거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주인가요?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2절~25절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群衆も二人に反対して立ったので、長官たちは、彼らの衣をはぎ取ってむちで打つように命じた。
そして何度もむちで打たせてから二人を牢に入れ、看守に厳重に見張るように命じた。
この命令を受けた看守は、二人を奥の牢に入れ、足には木の足かせをはめた。
真夜中ごろ、パウロとシラスは祈りつつ、神を賛美する歌を歌っていた。ほかの囚人たちはそれに聞き入っていた。

이 차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족쇄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겨지고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발에는 족쇄까지 채워진 채로 깊은 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몸 여기저기가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발이 묶인 채로 감옥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절망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할 법했습니다만,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힘차게 큰 소리로 찬송을 했겠어요? 지금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하는 점도 있겠지만, 지금 그럴 기운도 없습니다. 간신히 나오는 목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간신히 숨을 쉬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했겠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라고요? 예, 이를 다른 죄수들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찬송을 막거나 따라 부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절망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이웃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들은 피범벅이 되고 눈도 제대로 안 떠지는 상황에서 헐떡거리면서도 그 기운을 하나님이나 세상을 원망하는 데에 쓰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때 이 모습을 바라보는 죄수들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고도 놀라운 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단순히 목사한테만 주어진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꼭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데려오는 것만이 전도가 아닙니다. 첫째도 둘째도 하나님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해서 예수님을 전하고 성경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평소의 우리 모습이 우리 이웃의 마음을 뜨겁게 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우리가 뛰어난 말솜씨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한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한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고통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사명,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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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5회 갚아야 할 빚
2020년 10월 11일 설교 (로마서 강해 6)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14절 신약 239페이지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3節~14節
“13.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14.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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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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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갚아야 할 빚” 返すべき負債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에 대해서 13절에서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식물에 있어서 열매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식물의 최종적인 결과물,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성과>라는 말도 한자로 쓰면 과실이 난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과수원 농장에서 농민 분들이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개인 날이나 눈비가 내리는 날이나 정성을 다해서 식물들을 가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것도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나무라 하더라도, 아무리 보기 좋은 나무라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농부들이 열심히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 나무를 키워봤자 이는 돈 낭비, 체력 낭비, 시간 낭비, 그리고 좋은 밭, 토양 낭비일 뿐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20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안 좋은 나무인지는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열매가 좋으면 그 나무는 좋은 것이요, 열매가 안 좋으면 그 나무는 안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중고등학교 때에는 프로야구도 참 좋아하고 그랬었습니다만, 요즘은 뭐, 워낙 볼 시간이 없다 보니, 가끔 보면 한국이나 일본 야구나 축구를 보더라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가끔 한국 축구 시합을 보면 해설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 축구는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대요. 제가 운동경기 같은 데에 워낙 문외한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본래 축구가 뭘 하는 경기예요. 공을 상대방 골에 넣어야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건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다……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개개인의 기술력이 좋다 하더라도, 아무리 선수들의 체력이 뛰어나거나, 하물며 아무리 선수들의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인간성이 참 좋다고 하더라도, 축구 시합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맨날 지기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야구 선수가 정말 잘생기고 팬 서비스도 잘하고 다 좋은데 시합에서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해요. 아니면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해요. 만약에 그런 선수가 있다면 프로 운동 선수로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장점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쓸모가 없게 되어서 소속팀으로부터 버려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 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이 말씀, 어떠십니까. 누구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배도 안 고프시고 아픔도 안 느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100% 하나님과 100%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이 아픔도 느끼시고 우리와 똑같이 허기도 느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도 아시고 우리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채찍에 맞아도 아프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뼈와 살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느끼는 아픔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나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가 있나 하고 보셨는데,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더러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고 저주를 하십니다. 그러자 11장 20절에 의하면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좋아요. 뭐, 예를 들어서 집에 있을 때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냉장고를 열어봤는데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럼 어떻겠습니까. 좀 화가 나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도 아마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배고플 때 무화과 열매가 없었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열매가 없었대요?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끝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마가복음 11장 13절 끝부분.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예수님, 이건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것은 그 나무 잘못이 아니래요. 아직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여버리는 것은,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성경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첫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반대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에 그 나무에 잎사귀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다가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열매를 찾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대와 달리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 열매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에 대해서 화를 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있었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만이 아니라 다른 과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무의 줄기가 자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무 모양을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인가요? 벌레들에게 잎사귀를 먹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오로지 나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나무에 잎사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보기는 좋겠지요. 물론 그 잎사귀를 벌레들이 먹고 자리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부분이지요. 무화과 나무 같은 과실나무에 잎사귀가 나는 최대의 이유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가 자라는 것이요, 열매를 맺기 위해 잎사귀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보니까 잎사귀만 여기저기 많이 달렸는데, 제일 중요한 열매가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도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잎사귀만 많이 달린 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에 대해서 저주를 하시자 그 나무는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프로 축구나 야구선수가 다른 것들은 다 잘하는데 골을 넣지 못한다거나, 점수를 따지 못한다면, 결국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이 무화과나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도 이 공식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방언도 유창하게 합니다. 예배도 빠짐없이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 또 신학교도 나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신학교를 졸업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높은 직분도 받았고, 신학서적도 아주 많이 썼어요. 뿐만 아니라 아주 유명한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세요.

이 정도면 대단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이 목사님인 경우도 있고, 또한 성도님일 수도 있겠지요. 이 정도 배경이면 부족함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아주 성격이 독특해요. 고집이 셉니다. 남이 하는 말을 안 듣고, 그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지만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전혀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다. 이웃 관계도 대단히 안 좋아요. 이웃한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래봬도 옛날에 어쩌고저쩌고,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고 어떻게 했고,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금식을 얼마나 많이 했고……하는 자랑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요. 이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어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열매가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그 배경이나 학벌이나 경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잎사귀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씨를 뿌리고 <말씀>의 물을 빨아들여서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좀 알고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행함>이라고 하면 금방 <야고보서>를 떠올립니다. 예, 이는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도 할 정도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야고보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善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いのちを受け、悪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さばきを受けるのです。


로마서 2장 6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디모데후서 4장 14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銅細工人のアレクサンドロが私をひどく苦しめました。その行いに応じて、主が彼に報いられ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이와 갈이 행함을 강조한 것은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열매>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금식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등등 이라고 해 봤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 없는 잎사귀 투성이인 무화과나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우리 안에 강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더라도, 행함이라는 열매가 없다면 이는 또한 모두가 잎사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제가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성경에서 이미 여러분께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빚을 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빚을 졌다고 하냐 하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 되겠지요.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지요.

마태복음 10장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病人を癒やし、死人を生き返らせ、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をきよめ、悪霊どもを追い出しなさい。あなたがたはただで受けたのですから、ただで与えなさ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권유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가 아니라, 이렇게 하라……라고 하는 명령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구약 시대 때 과거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게 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겠지요. 첫째는 우리 스스로의 죄가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면 우리의 죄가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통도, 예수님의 아픔도, 예수님의 보혈도,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마저도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심판,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져야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한 구원,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저입니다. 우리가 10만원을 거저 받으면 기뻐합니다. 100만원을 거저 받으면 더욱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축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돈을 받고 그렇게 해주셨나요? 아니요. 거저로 그와 같은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로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속담 중에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 안에서 보면 사실인가요?

예를 들어서 중고차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된 차라고 해도, 주인이 많이 바뀌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해요. 그것은 원래 하던 대로 운전을 하는 것이 차에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만년필 같은 경우를 보아도 다른 사람의 것을 쓰면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년필을 쓰게 되면 펜 끝이 닳게 되는데, 그게 사람마다 각각 다르대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쓰게 되면 금새 펜 끝이 닳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뭐예요? 예, 새것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고품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것이 아니라 중고품이라면 원래 하던 대로 사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우리가 중고품이라고 적혀 있나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비교적 깨끗한 중고품이 되었도다……가 아닙니다. 완전한 새것이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8절~20절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先のことに心を留めるな。昔のことに目を留めるな。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광야는 본래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막에도 강은 없어요. 사막에 강이 있다면 이는 사막이 아니지요. 광야에 길을 낸다는 일, 하물며 사막에 강을 낸다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 길이 나면 사람들이 왕래합니다. 그러면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서 그전에는 값어치가 없던 땅에 작은 마을이 생기고 큰 도시가 생겨납니다. 메마른 사막에 강이 생기면 죽었던 땅에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모래바람만 불었던 지역에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는 그 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는 부족해. 나는 참 못났어…….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줄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삶,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 지식인이냐 어리석은 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13절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その家に入るときには、平安を祈るあいさつをしなさい。
その家がそれにふさわしければ、あなたがたの祈る平安がその家に来るようにし、ふさわしくなければ、その平安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返って来 るようにしなさ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든 안 하든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제부터 새로운 삶,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갚아 가면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우리 인생의 광야에 길이 나고 우리 인생의 사막에 큰 강물이 생기는 삶, 큰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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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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