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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회 의로운 과정
2021년 1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3章5節~6節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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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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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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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의로운 과정” 義なる過程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계속해서 바울의 자문자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소설을 읽듯이 본문을 보게 된다면 조금 혼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구성이 문법적으로 조금 난해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처럼 하나하나 살펴가면 충분이 이해할 수가 있고, 이 말씀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될 경우에는 종종 현대인의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는 개역개정이나 현대인의 성경이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어려운 이유가 단어에 있지 않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장 구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 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여기에 보면 <불의>와 <의>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선 이 단어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문장을 좀 쉽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러면 여기서 단어도 조금 바꾸어서 말씀 드리면 다음가 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부당하시냐”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시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 즉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라는 것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시편 145편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私の神 王よ 私はあなたをあがめます。 あなたの御名を 世々限りなくほめたたえます。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송축하겠다, 찬송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그리고 이사야 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정해졌지요?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 삶의 목적이 정해졌다면, 다음은 그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의 직접적인 뜻은, 앞을 보고 걸어가든, 게처럼 옆 걸음으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뜻으로서,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애초에 정한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어에도 이런 말은 있지요.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끝이 좋으면 다 좋아》<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는 셰익스피어 희곡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이 뜻도 역시 최종적인 결과만 좋다면 그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삶의 목적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행함에는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행함이란 예배도 있겠지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흔히들 성수주일이라고 해서 주일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토요일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 때문에 지금도 일부 교회에 따라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는 성경적으로 볼 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토요일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 일요 예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이는 마치 구약의 모든 규례들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사를 지낼 때도 구약의 율법처럼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불로 태우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구약에 적힌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지금도 할례를 받는다거나 짐승들을 끌어다가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린다거나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다른 건 안 지키면서, 안식일이 토요일이니까 그것만 지키면 된다? 이건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인가요? 우리가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님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날이에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まことに、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二人が、どんなことでも地上で心を一つにして祈るなら、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はそれをかなえてくださいます。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모였을 때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다만 관행상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 월요일이든 화요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주님은 그 예배를 언제든지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는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에베소서 1장 22절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すべて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キリストを、すべて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として教会に与え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회사는 사장님이 주인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의 머리는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회사들 보면 참 다양합니다.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모습도 다양하지요. 그 이유는 그 회사의 주인인 사장님이나 경영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인마다 경영방침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기업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영방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 경영방침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되어야 하겠지요. 모든 교회가 100% 처음부터 끝까지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대원칙인 이 성경에서 벗어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를 물질로나 봉사로 섬기는 일 또한 하나님을 높이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렇죠. 하나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것 또한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먼 곳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저도 여러 방법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때 보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위로와 격려를 받을 때가 있나 하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심한 말을 들을 때도 있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들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도 주님께서 기억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축복해주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늘도 한 걸음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있어서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나 헌신이나 전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이는 일은 의로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에 불의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역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이게 할 수 있다고 할 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부당하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에 하나님이 부당하시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5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라는 표현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검은 것은 하얗다>, <선한 것은 악하다>라고 하는 전혀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요.


이처럼 성경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인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기 쉬운 사건을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작년 2020년 10월에 한국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어떤 사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만, 한 1년 전쯤부터 어떤 사람이 그 사찰에 와서는 할렐루야,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사찰의 현수막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종을 치려고 하면 그 종을 못 치게 방해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결국 작년 10월에는 그 사찰에 불을 붙여서 건물 모두를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신의 계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실 의외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문화재관련 책을 읽어보니까, 거기에 의하면 어느 사찰에 가보았더니 그 사찰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 위에 누군가가 십자가 모양으로 낙서를 해놓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종교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이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간음이라고 하겠지요. 왜 이를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이는 바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성경에서 간음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역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신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한다는 일은,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배신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철저하게 금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수 천년 동안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다른 종교행위를 불법적으로 방해하거나 종교시설을 불법적으로 훼손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를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신다고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세상의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용의자 중에서 어떤 사람이 대단히 수상하게 여겨졌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어요. 그래서 하루는 경찰이 그 집에 몰래 들어가서 방을 뒤졌는데, 그 용의자 집에서 그 살인사건에 쓰였던 흉기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 흉기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었고 용의자의 지문도 찍혀 있었어요. 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를 증거로 해서 이 용의자를 교도소에 보낼 수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정말로 그 용의자가 틀림없는 범인이었다고 해도, 그 증거를 가지고는 이 용의자를 교도소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경찰이 아무런 영장도 없이 몰래 그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 행위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건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로운 일입니다. 정당한 일이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다양한 수사방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진정한 증거와 진정한 범인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도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면, 결국 범인체포라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도 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일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만으로 족해요? 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솔직히 눈에 보이는 선물을 안 받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사람마다 취향은 각각이라서 단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 생일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아서 기뻐했던 그 선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물은 이 사람이 산 것이 아니라 어느 가게에서 몰래 훔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속여서 얻은 돈으로 산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의로운 결과를 위해서는 그 과정 역시 의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39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를 잇는 것이 39절 전반부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입니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러면 불완전한 신앙이란 100점 만점에 50점이라는 뜻이에요? 아닙니다. 불완전한 신앙은 50점도 40점도 아닌 0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또한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전해지겠습니까. 비록 그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훼방을 하고, 불을 지르고 하면, 그 사람들이 회개해서, 아, 예수님을 믿어야겠구나 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오!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런다고 하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진노를 내리신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불의가 아닙니다. 불법이나 부당함도 아닙니다. 불의나 불법이나 부당함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그 어떠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로마서 12장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선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의한 의로운 과정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전하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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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회 참되신 하나님 말씀
2021년 1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3절~4절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3節~4節
“3.では、どうですか。彼らのうちに不真実な者がいたなら、その不真実は神の真実を無にするのでしょうか。
4.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すべての人が偽り者であるとしても、神は真実な方であるとすべきです。「それゆえ、あなたが告げるとき、あなたは正しくあられ、さばくとき、勝利を得られ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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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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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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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참되신 하나님 말씀” 真実なる神のこと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3절~4절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3節~4節
“3.では、どうですか。彼らのうちに不真実な者がいたなら、その不真実は神の真実を無にするのでしょうか。
4.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すべての人が偽り者であるとしても、神は真実な方であるとすべきです。「それゆえ、あなたが告げるとき、あなたは正しくあられ、さばくとき、勝利を得られ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항상 그랬습니다만, 이 말씀을 보면 적지 않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선 이 <미쁘다>라는 말이 좀 애매하게 들릴 수가 있겠지요. 일상생활에서는 잘 안 쓰이는 말입니다만, 이 말은 그 어감 상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실 수가 있는데, 사실 이 뜻은 그게 아니라, <참되다> <진실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에 나온 성경구절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
“3.그런데 만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디 가겠습니까?
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성경에도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하시는 데에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합니다.

자, 오늘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 측면, 상대방의 믿음과 나의 믿음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먼저 첫째로는 상대방의 믿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책들처럼 단순히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책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것입니다만,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된다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이 변화합니다. 우리 생각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완전히 변하게 되어서, 사람만을 의지하고 세상 만을 의지했던 삶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땅 끝이 어디입니까. 저기 먼 나라. 아프리카나 이름도 잘 모르는 먼 곳이 땅끝인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곳만이 땅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먼 나라까지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킬 수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의 땅 끝은 그런 먼 나라, 먼 지역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복음을 전파한 적이 없는 우리 이웃, 그 곳이 바로 땅끝이라고 하겠습니다.

꼭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 그 곳에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전하라고 했으니,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했더니 정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린 땅처럼, 바싹 마른 땅이 옥토가 되어가듯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지요.

하지만 전도를 좀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되나요? 아니요. 그게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한테는 전도 하기가 쉬울까요?

어떤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전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도 중 하나가 바로 가족 전도라고 합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까운 존재라고는 해도, 이 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아니, 하나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베드로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그 날에 신도 수가 3천 명이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전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요. 말씀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서요? 마귀 사탄이 방해해서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요?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크게 붙여놓았던 글씨인데, 거기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냐 하면, 참 간단합니다. “손님이 짜다면 짜다”

참으로 간단명료하고도 멋진 글 아닌가요? 예전에는 식당 사장님이 왕이요, 주방장이 만드는 음식맛이 진리였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방장이 맛있다 하더라도 고객에게 그 맛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고객 중심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만, 상황이 안 좋을 때 보면 선생님들마다 반응이 대체적으로 둘 중 하나에요.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학생 탓이나 환경 탓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는 거예요. 자기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또는 요즘 자기 수업의 학생이 적은 이유는 한일관계가 안 좋아서라는 거예요. 이 이유들을 보면 자기 탓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업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교재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환경 탓이나 학생 탓을 하게 되면, 그 선생님한테는 본인이 바뀔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됩니다. 자기는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을 바꾸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무엇인가 잘 안 될 경우에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자기에게 있어서 개선점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이 전파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원인을 상대방이나 아니면 하물며 하나님 탓을 해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야지만 우리 스스로가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전도를 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요. 이럴 경우를 보면 대체적으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힘써 알자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는 이유도 다름아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말씀이 이웃에게 전파되어 우리 이웃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지역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둘째로는 나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여러분의 믿음은 강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약한 믿음입니까.

예, 이상적으로라면 모든 분들이 강한 믿음,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그는 자신이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흔들릴 때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이 때에는 과거에 기도 응답을 받은 체험이나 아니면 여러 신앙서적이 도움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이 되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위인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계보, 우리 식으로 한다면 족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렇죠.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도 완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계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41대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계보에 보면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계보에 여성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본다면 요즘에는 족보에 여성 이름을 적는 경우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옛날에는 족보에 여자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기록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 그 남자 쪽 족보에 성씨만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여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미성년자나 여성은 그 인구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것도 다섯 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와 같은 남녀차별이 심했던 상황에서 이 신성한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여성이라고 하면 상당히 훌륭하고도 완벽한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름을 본다면, 마태복음 1장 3절에 다말(タマル), 5절에 라합과 룻, 6절에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16절에 마리아, 이렇게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남녀차별만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차별도 상당히 심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냐 하면, 아니에요. 적어도 5절에 등장하는 라합과 룻은 이방인 여성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를 함락 시켰을 때에 그 여리고 주민이었고, 룻이라고 하는 여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모압이라고 하는 지역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출신성분이라도 좀 괜찮았냐 하면, 이것도 꼭 그렇지가 않아요. 3절에 등장하는 다말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를 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ユダがタマルによってペレツとゼラフを生み……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쌍둥이입니다.

그렇다면 다말이라고 하는 여인은 유다의 아내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지요.


창세기 38장에 보면 시간 관계상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ペレツ)와 세라(ゼラフ)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성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지요.

그리고 6절에 등장하는 우리야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이는 다윗 왕이 자신의 충신 우리야로부터 빼앗은 밧세바(バテ・シェバ)입니다. 다윗의 왕위는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게 된 아내인 밧세바 사이에서 얻은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지요.

이처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족보로서 걸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너무 부족한 족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완벽하지는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의 족보라고 한다면,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완벽한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는 어떠한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흠이 없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으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단히 좀 여러모로 부족한 족보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 27대 왕 중에서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해서 25대 철종 때까지의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는 한국의 국보 151호이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양은 2000권이 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이를 다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대궐에 있었던 사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이 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당대 왕이나 후손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아무리 왕이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기록을 없애거나 바꾸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조선시대를 본다면 똑 같은 왕이라 하더라도, 권력이 강했거나 비교적 강하지 못했던 왕도 있었습니다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왕 중에는 조선 3대 왕인 태종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는 초대 왕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인데, 장자가 아니었던 그는 왕위를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꾸미기도 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 대한 대단히 흥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실록 7권에 보면 서기 1404년, 태종 4년 2월 8일에 있었던 기록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 내용은 뭐냐 하면요. 태종이 말을 타고 직접 화살과 활을 가지고 노루사냥을 하던 중에 화살을 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치지는 않았는데, 이 태종의 첫마디가 뭐였냐 하면, 이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아라……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태종이 왜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 이유야 뻔하지요. 사관은 무엇이든지 다 기록하는 사람인데, 왕이 되어가지고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도 창피하니까, 이 사실을 사관이 모르게 해라……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걸 사관이 알아차리고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이에요? 왕이 말하기를 “야,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비밀로 해야 돼!”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당시 왕의 말 한 마디는 어명입니다. 그야말로 헌법이나 법률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역사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의 이와 같은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하,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구나. 하는 단순히 그것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태종 본인이 이 기록을 보았더라면 이는 99%도 아니지요. 100% 이 기록을 빼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조작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존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왕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권력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내용, 그것만이 아니라, 이걸 비밀로 하라고 하는 말까지도 여과 없이 기록되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다는 증거, 그 기록들이 모두 충분히 사실로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자, 이 성경, 예수님의 족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 사람들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를, 우리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완벽한 족보, 순수한 유대인에 의한 족보, 어떠한 작은 흠결도 없는 족보로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족보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리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족보로서는 충분하지 않는 점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 무엇 하나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은 말씀, 오로지 사실만이 적힌 책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제일 첫 구절.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부터 시작해서

성경 제일 마지막 구절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까지 모두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사실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도 사실이요, 물위를 걸으신 것도 사실이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보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뿐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게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이자 우리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 데에는 이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겠지요.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힘써 알고, 이로 인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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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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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2021년 1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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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도 3장에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것이 지난 2020년 9월 6일이었고, 3개월만에 2장까지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절기에 맞추어서 다른 주제로 말씀을 전해드린 적도 있습니다만, 로마서가 16장까지 있고, 2장을 나가는데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면, 단순계산으로 24개월, 2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제 3개월을 했으니 남은 기간은 대략 21개월 정도가 되나요?

하지만 또 모르죠. 그렇다고 무슨 마감이 있는 것은 아니니, 더 길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중요한 로마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살펴나가도록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2장을 끝냈으니, 학교에서도 일정 시기가 되면 시험을 보죠? 그렇다면 우리도 간단한 시험을 볼까 합니다. 아니요.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마세요. 무슨 문제지나 답안지를 나눠드리고 쓰거나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드린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해오신 분이시라면 어렵지 않게 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문제가 나갑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이에 대한 답과 그 근거를 논하시오.

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을 점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유대인이란 무엇이고 이방인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유대인은 그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신명기 14장 2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받은 민족이요, 또한 할례 받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민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무엇이냐 하면, 이 구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심도 없고 율법도 할례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하면 이제부터 이스라엘 말도 배워야겠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스라엘 말을 어떻게 배우나 하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각각 한국이나 일본이라고 하는 구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김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양사람처럼 생겼고, 우리 얼굴을 보면 동양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 외견상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느냐 하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2장 29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표면적인 유대인은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표면적 이방인이라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이요, 할례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 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야지만 우리는 오늘 살펴볼 말씀을 비롯해서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저도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대한 해설서인 주석서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주석들을 보면 온통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보면 예를 들어서 사무엘서나 열왕기나 역대서 같은 것을 볼 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그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유대인>을 외견상 유대인, 저기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의 유대인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야지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인 로마서 3장 1절~2절까지만이 아니라 8절까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바울은 지금 자문자답, 그러니까 자신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만약에 아무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면 굳이 여기서 자문자답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전제를 염두에 두고 이제 이 질문과 답변들을 몇 회에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첫 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앞서 2장까지를 보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고 할례를 받은 표면상의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좋은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한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제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일당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는 당시 임금으로서 평균적인 금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시간이 나오는데, 이는 유대식 시간표기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과 조금 다릅니다. 우선 성경에 <제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제육시>는 정오인 낮 12시, <제구시>는 오후 3시, 그리고 <제11시>는 오후 5시입니다.

자, 이제 아침 일찍 나갔더니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한 데나리온을 줄 테니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침 9시에 나가보자 또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내가 일당을 주겠으니 내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해서 들여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낮12시와 오후 3시에 또 주인이 나가봤더니 아직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각각 포도원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 나가봤어요. 이 주인도 참 독특합니다. 오후 5시면 하루가 다 끝나갈 무렵인데 그래도 일할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까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주인은 그 시간에도 일꾼들을 불러다가 일을 하라고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해가 저물고 오후 6시가 되었어요. 일을 마치고 하루 일당을 받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8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의 청지기, 말하자면 현장감독에게 지시하기를, 일당을 포도원에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몇 시에 왔다고요? 예, 지금 시간은 오후 6시인데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제 일꾼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각각 일당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어요.

여기서 편의상 하루 일당을 한국 돈 10만원, 일본 돈 1만엔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기대감이 부풀었습니다. 야아, 1시간 밖에 안 한 사람들이 10만원을 받았으니, 나는 좀 더 받을 수 있겠구나. 나는 10시간이나 일했으니까 어쩌면 10 데나리온, 100만원 정도를 받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기대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어서 돈을 받아보니까 자기도 한 데나리온, 그러니까 10만원밖에 안 주는 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9시간 동안 일을 했는데, 아침 9시 이전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10시간 이상 일한 사람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 더운 날에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했는데, 그 사람들 일당을 받아보니까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돈을 받았어요.

사실 그러면 좀 억울한 마음이 들겠지요. 그래서 주인한테 따집니다. 왜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한 자기들과, 저기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일당을 받냐고 원망을 합니다. 아마도 제일 불만을 말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제일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러자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명쾌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彼は労働者たちと一日一デナリの約束をすると、彼らをぶどう園に送った。

아니, 내가 너희들에게 뭐라고 했어? 원래 계약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잖아. 애초에 계약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계약대로 임금을 줬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뭔데 그래?

그러면서 이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4절~15절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あなたの分を取って帰りなさい。私はこの最後の人にも、あなたと同じだけ与えたいのです。
自分のもので自分のしたいことをしてはいけませんか。それとも、私が気前がいいので、あなたはねたんでいるのですか。』

내가 너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계약을 했고, 그 계약대로 이행을 했으니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0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 것은 내 마음이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돈을 주는데 네가 왜 불만을 갖는데?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이는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고, 이제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기 시작하자 더욱 많아졌습니다.

하나님과 구원은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자, 이방인들도 구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천국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앞서 로마서 2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율법과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따집니다. 너 교회 다닌 지 얼마나 됐느냐. 나는 몇 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무슨 모태신자다. 나는 직분이 뭐다. 직분을 언제 받았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가 때로는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부모에게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느냐. 어느 직분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새신자 분들이겠지요.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큰 힘이 됩니다.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교회에 나와보니까 뭐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이나 20년된 사람들도 참 많던데, 그러면 지금 내 나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봤자 나중에 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제일 낮은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몰라. 제일 구석 자리에 있게 될지도 몰라.

뭐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말하자면 평생 동안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인생 마지막 끝자락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나 똑 같은 일당을 받게 된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아, 내가 정말 인생의 막차를 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는구나. 훨씬 더 오래 믿은 사람들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구나. 하는 소망을 갖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분들은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지요. 그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생했는데, 그런데 나를 지금 막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저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맞는 말씀일까요? 한 번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고생인가요?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보면 신앙생활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전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남들은 일요일에 집에서 편하게 보내는데, 나는 일요일에 쉬지도 않고 교회에 나가야 하다니 이 얼마나 고생이야. 헌금도 무슨 십일조다 뭐다 해서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이런 돈을 안 내도 되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우선,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왠지 안 나가면 벌 받을까 봐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이사야서 43장 1절을 봅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저기 서울 어디에 사는, 대충 한 여기 사람들, 일본 군마에 사는 대충 여기 있는 사람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너를 지명하여 부르셨다, 너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만 알고 계실까요?


누가복음 12장 6절~7절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五羽の雀が、二アサリオンで売ら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そんな雀の一羽でも、神の御前で忘れられてはいません。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여기서 <앗사리온>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이는 앞서 나왔던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데나리온을 하루 일당인 10만원, 1만엔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16분의 1이니까, 1 앗사리온은 6250원, 625엔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러면 참새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니까 12500원 1250엔, 이를 5로 나누면 참새 한 마리에 대략 2500원, 250엔 정도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글쎄요. 뭐, 한국에서 본다면 김밥 한 줄보다도 싼 가격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요. 하지만 김밥 한 줄 정도밖에 안 하는 참새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는데,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도 기억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고,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면서까지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서 천국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역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힘들고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에 대해서 제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실 정도로 저를 사랑해주신 하나님, 그 분이 제 이름 세 글자를 지명해서 불러주시고 지금 오늘 이날 이 때까지 인도해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큰 고생이셨겠다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생을 안 하시려면 어떻게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포기하시면 됩니다. 너 참 속을 썩힌다. 그래, 뭐, 사람이 너만 있냐. 됐다. 너는 없는 샘치고 다른 사람을 쓰겠다.


이렇게 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 것 같습니까.

어느 한 교관은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를 제대로 된 조종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너희들 몸무게 정도가 되는 금 덩어리만큼 비용이 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이를 위해 들어가는 훈련 비용, 비행기 연료비, 훈련장비 등등을 본다면,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21억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초보 조종사가 그렇다는 것이고, 이제 실전에서 정말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10년차 정도의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하려면 대략 80억원 가까이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한 사람을 만드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무슨 하루 식대나 한 달 생활비를 생각하실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아침이나 밤이나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인건비를 생각해야지요.

그럼 하나님은 하루에 얼마나 일을 하십니까.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업무환경, 노동환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8시간 노동도 아니에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루 24시간 노동입니다. 그것도 언제부터 언제까지요? 예,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월차도 없고 연차도 없어요.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리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을 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전세계에 있는 돈들을 다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돈이나 재산들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모자라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순간순간이 기쁨이요, 감사요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성경 말씀을 읽은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하루하루가 기쁨이자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여기서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이라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이방인, 즉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요?

요한복음 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그렇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 있어요. 그 날도 거기서 밥을 먹고 있는데, 김치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여기 김치 좀 더 갖다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아 참, 나 지금 바쁘니까 저기 주방 냉장고에 가서 알아서 덜어먹어.”

그렇게 말합니다. 뭐, 여러분은 단골이었으니까 그 주방 사정도 잘 압니다.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밥 먹다가 말고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손님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아, 그럼 저도 제가 덜어 먹을게요. 냉장고가 어디죠?” 라고 했더니만, 그 바쁘다고 했던 주인이 서둘러서 달려 와서는, “아닙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 바쁘다던 주인이 자기가 주방에 들어가서 김치를 들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단골손님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여러분은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불쾌해하시겠습니까.

아니, 맨날 여기 오는 단골인 나한테는 바쁘다고 하고 알아서 갖다 먹으라고 하더니만, 처음 온 손님한테는 쏜살같이 와서 김치를 가져다 주고 말이야. 이거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처음 온 손님만 손님 대우를 해주고 나한테는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야?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원리를 잠시 살펴보면 오히려 그렇지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식당 주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주방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가 정말 나쁜 사람이 주방에 있는 물건이나 냉장고에 있는 것을 훔쳐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골 손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는 챙겨주지 않고 새로 온 손님만 챙겨주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주인 입장에서 본다면, 단골손님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방에 있는 냉장고을 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 것이지만, 새로 온 손님의 경우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도 하라고 하고, 청소도 하라고 하고, 회계도 하라고 하고, 교회에 따라서는 주방에서 요리도 하라고 하고, 아이들 가르치기도 하라고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귀찮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저……제가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제가 회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전도를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만약에 새신자, 정말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새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예, 그러세요. 오늘부터 교회 회계를 맡아주시고, 전도도 해주시고, 아이들도 가르쳐주세요. 그러겠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한테 어떻게 교회 재정을 맡길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제 처음 나와서 예수님도 잘 모르고 성경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전도를 맡겨요? 주일학교 교사를 맡겨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새신자분들이 오시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야 하고, 새신자분은 그와 같은 도움을 감사히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지나면 이런저런 일들을 이제 자기가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하지만 이는 귀찮게 생각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만큼 교회에서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물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을 꼽겠습니까. 은행 통장? 금고 열쇠?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물건들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렇죠. 웬만하면 그런 것들은 다름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시겠습니만, 꼭 맡겨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면, 그럴 때는 분명히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맡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신뢰를 받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콕 찍어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감사를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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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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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회 위험한 착각
2021년 1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25절~29절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2章25節~29節
“25.もしあなたが律法を行うなら、割礼には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律法の違反者であるなら、あなたの割礼は無割礼になったのです。
26.ですから、もし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が律法の規定を守るなら、その人の無割礼は割礼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 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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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위험한 착각” 危険な勘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우리가 지금 읽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과격하고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핵심이 되는 두 단어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인 다섯 구절 중에서 율법은 28절을 제외한 네 구절에 언급되어 있고, 할례는 다섯 구절 전체에 언급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오늘 본문에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에 들어갔을 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바로 율법이요, 그리고 그 중 핵심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이 적혀 있었는데, 그 돌판을 법궤에 넣어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가지고 다녔고,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할례라고 하는 것도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7장 10절~14절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次のことが、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で、またあなたの後の子孫との間で、あなたがたが守るべきわたしの契約である。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割礼を受けなさい。
あなたがたは自分の包皮の肉を切り捨てなさい。それが、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の契約のしるしとなる。
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代々にわたり、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異国人から金で買い取 られた、あなたの子孫ではない者もそうである。
あなたの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金で買い取 った者も、必ず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の契約は、永遠の契約として、あなたがたの肉に記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包皮の肉を切り捨てられていない無割礼の男、そのような者は、自分の民から断ち切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の契約を破ったからである。」
즉 이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할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 것이요,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선민사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하는 민족이라고 하는 표징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부분은 25절~27절까지이고, 뒷부분은 28절~29절입니다.

먼저 25절~27절까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25절~27절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5.もしあなたが律法を行うなら、割礼には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律法の違反者であるなら、あなたの割礼は無割礼になったのです。
26.ですから、もし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が律法の規定を守るなら、その人の無割礼は割礼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이제 바울은 이방인을 향하여 선교를 나서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할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외국에 나가서도 선교를 하게 되면 할례를 베풀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만약에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면 선교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했냐 하면, 우선 할례의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할례만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할례를 하고 율법,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킨다면 의미가 있지만, 할례를 하고 율법을 어기게 된다면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놀라웠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 말씀에 의한 언약백성으로서 틀림없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게 된다면 마치 자기들 유대인처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유대인들로부터 크나큰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그냥 바울이 좀 선교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멋대로 만들어낸 논리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エレミヤ書


エレミヤ書
예레미야 4장 4절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ユダの人とエルサレムの住民よ。主のために割礼を受け、心の包皮を取 り除け。そうでないと、あなたがたの悪い行いのゆえに、わたしの憤りが火のように出て燃え上がり、消す者もいないだろう。」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인 할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 이미 그 할례를 마음에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9장 25절~26절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見よ、その時代が来る──主のことば──。そのとき、わたしはすべて包皮に割礼を受けている者を罰する。
エジプト、ユダ、エドム、アンモンの子ら、モアブ、および荒野の住人で、もみ上げを刈り上げているすべての者を罰する。すべての国々は無割礼 で、イスラエルの全家も心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からだ。」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날이 이르면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만이 아니라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벌하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 26절에 보면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형식적인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벌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사도 바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마음에 하는 할례를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오직 유대교 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당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사람들인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대표적으로는 안식일을 어긴다고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믿음이 좋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박해했던 이유, 그것은 다름아닌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와 같은 성경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성경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오해함으로 인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하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보게 된다면 구약성경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아, 이게 이와 같은 말씀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할례만 받았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해야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때까지의 잘못된 착각들을 깨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때로는 유대인들과 크게 논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멋대로 해석한 성경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착각과의 싸움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일어난 종교혁명은 또한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루터는 가톨릭 사제였습니다만, 그 가르침이 너무나도 성경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잘못된 착각 속에 갇혀진 틀을 깨고,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기치들 들고 일어섰던 것이 바로 종교혁명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는 일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지금으로 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성경에 뭐가 적혀 있는지 모르고 그저 교회에만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올 따름이지요.

이 종교혁명으로 인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여기에 대항해서, 성경에서 멀어지고 있던 신앙을 다시 성경으로 끌고 왔던 것이 바로 이 종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 대해서 기독교,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것은 <저항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비 성경적인 잘못된 가르침, 위험한 착각을 깨기 위한 저항이자 올바른 믿음을 이루기 위한 저항이 바로 이 기독교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기독교의 모습 보면 어떻습니까.

제가 예전에 학생시절, 어떤 후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락 그룹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락 중에서도 헤비메탈 그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그쪽 음악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못해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당시 한국의 어떤 헤비메탈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의 한 멤버가 이제 군대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대 전날에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마침 그 날 공연이 있었다는 거예요.

보통 락이나 메탈 그룹이라고 하면 남자도 화려한 장식을 하고 거기에 긴 머리를 막 흔들면서 기타나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런데 다음날 입대하는 이 멤버가 공연에 등장했는데, 헤비메탈 밴드 공연인데 빡빡 깎은 머리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무대에 설 수가 없으니까, 긴 머리 가발을 어디서 구해가지고 와서 쓰고 공연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좀 웃기기는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락이나 메탈이라고 하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연주를 하는 이유는, 기존 음악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저항, 말하자면 어떠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표현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음악을 연주할 때에 빡빡 깎은 머리라 하더라도 충분히 고정관념을 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그런 음악도 언제부턴가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정관념이라고 하는 틀이 생겨나서, 결국 다른 락 그룹이나 메탈 그룹 사람들 같이 가발까지 써가면서 공연을 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뭐, 음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유대교에 갇혀 있던 틀을 예수님에 의해 깨고, 그리고 성경에서 멀어진 여러 틀을 성경으로 깼던 종교혁명으로 이루어낸 것이 현재 기독교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과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각 교회마다 얼마나 여러 틀이 많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성경적인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성경에서 벗어난 우리의 위험한 착각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걸 하면 안 돼, 저걸 하면 안 돼.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서로 모른 채 사람들을 속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부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3장 27절~28절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同じように、おまえたちも外側は人に正しく見えても、内側は偽善と不法でいっぱいだ。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に指一本触れようとはしない。

2천년 전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했던 일들이 어쩌면 지금 우리 교회의 단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벗어난 이런저런 짐들, 이런저런 규제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오해를 가지게 해드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일이 거론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교회에서 만들어낸 규제들, 목사님들이 만들어낸 그와 같은 성경에서 벗어난 규제들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우리는 할례를 마음에 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의 징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할례, 마음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宥(なだ)めのささげ物)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그렇습니다. 이 언약의 징표, 사랑의 징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끝으로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5절~29절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5.もしあなたが律法を行うなら、割礼には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律法の違反者であるなら、あなたの割礼は無割礼になったのです。
26.ですから、もし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が律法の規定を守るなら、その人の無割礼は割礼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저는 이 말씀 중에서 27절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랍고 놀랍습니다.

로마서 2장 27절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여기서의 할례는 형식적인 할례, 표면적인 할례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처음에는 무할례자였는데 이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켰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할례를 받은 사람을 오히려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실감나게 바꾸어본다면요, 내가 비록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에 오래 다녔어요. 수 십 년을 다녔고, 이런저런 높은 직분도 많이 맡았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목사님을 비롯해서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 날이 되어서 예수님 앞에 섰더니만, 내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누구한테 의견을 물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제일 낮은 직분을 받은 사람. 맨날 가난하게 헌 옷이나 입고 다니고 궂은 일이나 하고, 내 심부름이나 했던 바로 그 사람한테 의견을 묻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정치인들이 무선 선거철에 출마를 합니다. 거기 출마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눈이 반짝반짝 빛나요. 이번 선거에서 자기는 반드시 당선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막 넘쳐납니다.

하지만 누구는 알아요? 국민들은 다 압니다. 아이고, 저 사람 나와봤자 안될 걸. 왜 나왔을까.

하지만 누구는 몰라요? 예, 자기는 모릅니다. 자기는 반드시 이번 선거에서 당선될 거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되지요.

그래요. 그렇게 출마할 정도라면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석사, 박사까지 딴 사람들도 요즘은 많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한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자기는 반드시 당선한대요. 그런데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이 그 사람보다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 저 사람은 안 될 거야……라는 것을 아는 경우가 정말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신다고 확신을 하십니까. 예, 구원의 확신,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진 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이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사상입니다.

만약에 천국에 가는 것이 다수결로 가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내가 사는 동안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내가 존경하던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또한 그 중에는 내가 싫어했던 사람, 내가 무시했던 사람들도 거기 있을 지도 모르지요.

자, 그 자리에 수 백 명, 수 천 명이 모였습니다. 이제 그 사람들이, 하나 둘 셋, 하면 단추를 누릅니다. 찬성이 50% 이상이면 천국, 50%가 안 되면 지옥. 이라고 칩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그래,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아, 저 사람은 가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 중에서 알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여러분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 단추를 누른다면, 여러분께서는 50% 이상 천국……이 될 자신 있으십니까.

아니, 예수님.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썼고 논문을 썼고, 얼마나 화려한 경력을 가졌는데, 내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를 저런 사람들한테 맡긴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따지는 여러분한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뭐랬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랬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너의 이웃이었던 사람들이야.”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 때 가서 후회를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지 갈 수 없는지, 오늘 말씀에 의하면 어쩌면 과거에 할례자였던 유대인이 무할례자인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처럼, 우리가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사람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까, 내가 직분을 받았으니까, 하물며 내가 목사니까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구원 받을 수 있을 거야. 하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위험한 착각, 우리를 타락시키는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표면적인 직분이나 세상적인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시고 그 증거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자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위험한 착각, 잘못된 착각을 버리고, 진정한 구원, 진정한 우리의 자랑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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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회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2021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구약성경 1020페이지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イザヤ書 43章19節~20節
“19.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20.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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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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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2021년 새해를 맞이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新しいことを行わ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イザヤ 43章19節~20節
19.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20.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본문 말씀을 네 단계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과 물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로, 이로 인해서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하나님을 존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넷째로 광야와 사막에 낸 물과 강들의 물을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마시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자,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일,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볼 수 없었던 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일은 무엇이냐 하면 광야에 길과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광야나 사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땅입니까. 그렇습니다. 거기는 이미 죽은 땅입니다. 물론 광야나 사막에 실제로 가보면 거기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풀이 있는 곳도 있고, 파충류나 곤충 갈은 동물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거기는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만한 땅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농사를 짓든 가축들을 치든 간에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식물을 심어서 키울 수 있을 만한 비옥한 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땅이 넓다고는 하나 그 땅에 영양분이 충분치 않으면 나무를 심어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막 같은 곳은 어떻습니까. 거기는 모두가 모래처럼 되어 있어서,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물이 고여있지 않고 모두 땅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이미 죽은 땅, 아무리 파충류나 벌레들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사망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만약에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요. 너도나도 짐을 싸서 거기를 떠나지요. 오히려 그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를 버티고 있다는 것은 미련한 일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곳이 그냥 내 마음대로 살게 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 약속의 땅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조금 힘들어졌다고 거기를 내버리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게 된다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 어떠한 근심도 걱정도 어려움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그 땅에 기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고 하는데, 수확이 넘쳐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축복이 넘쳐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오히려 그 땅에 기근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거기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발생하고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거기를 지켜야 했다.
2번, 거기를 떠나야 했다.


예, 믿음이 좋은 여러분께서는 분명히 <1번 거기를 지켜야 했다>를 선택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냐 하면 창세기 12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은 그 땅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데, 축복의 땅인데 조금 어려워졌다고 그 땅을 헌신짝 내버리듯이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가요?

뭐, 이렇게 말하기는 쉽겠습니다만,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거 좀 남의 얘기라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아브라함이 우리보다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에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믿고 자신이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나안 땅으로 왔을 정도로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근이 임했을 때 가나안 땅을 버리고, 당시 세상적으로 보면 비옥했던 애굽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며, 당시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 임했던 기근은 상당히 심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좋고 축복도 좋지만,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어지고 힘들어지는데 하나님이나 축복이 무슨 소용이냐, 우선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의 아내 사라가 이렇게 닦달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결국 그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그곳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애굽의 왕에게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아내를 빼앗긴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자녀가 없었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는, 그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그들은, 이제 회개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룻기에 보면 또 어떻습니까. 룻기 1장 첫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룻기 1장 1절~5절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さばきつかさが治めていたころ、こ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そのため、ユダのベツレヘム出身のある人が妻と二人の息子を連 れて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滞在することにした。
その人の名はエリメレク、妻の名はナオミ、二人の息子の名はマフロンとキルヨンで、ユダのベツレヘム出身のエフラテ人であった。彼らはモアブの野へ行き、そこにとどまった。
するとナオミの夫エリメレクは死に、彼女と二人の息子が後に残された。
二人の息子はモアブの女を妻に迎えた。一人の名はオルパで、もう一人の名はルツであった。彼らは約十年の間そこに住んだ。
するとマフロンとキルヨンの二人もまた死に、ナオミは二人の息子と夫に先立たれて、後に残された。


이스라엘 민족이 약 400년에 걸친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광야로 나와서 40년을 지낸 다음에, 이제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각 열두 지파 별로 나누게 되는데,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에, 서로 매매할 수도 없고, 빌려주거나 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기에 등장하는 엘리멜렉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1절에 의하면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대단히 먹고 살기 힘든 상황까지 되지 않았나 합니다. 당시 모압 지방이라고 하는 곳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살고 있던 땅은 흉년이 들고 형편없게 되었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좀 더 살이 편한 곳으로 여겨졌겠지요. 그래서 그는 큰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리고 자신과 자신의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더니 엘리멜렉이 죽어버립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 뿐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두 아들은 그 지역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 여인 아내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제 가족은 나오미와 두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 이렇게 5인 가족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는 남편 엘리멜렉은 먼저 세상을 떴지만 그래도 두 아들이 있었기에 든든했겠지요. 아버지가 없었음에도 무사히 성장해서 며느리까지 얻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재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었던 두 아들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가족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둘입니다. 여자 셋이, 그것도 이방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겠지요. 나오미는 결국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결정을 합니다.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았던 고향 사람들은 모압 땅으로 이주를 가려는 그 가족들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조금만 참아보자, 조금만 견뎌보자.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거야. 이렇게 그들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이를 뿌리치고 모압 땅으로 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오미에게서 본다면 자신의 남편도 죽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도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은 중요하다? 언젠가는 오르기 때문에 팔면 안 된다?

아니 무슨 성경이 부동산 투자 같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책인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이래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대요? 그런 말이 성경에 어디 적혀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어려움들이 다가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끝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과 시험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열심히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왔는데,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보다도 더 잘 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 손해 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나만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것만 같아요. 도무지 고통과 고난이 끊이질 않아요……. 이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으십니까. 예, 있으시겠지요. 그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아니, 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왜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イエスはその話をそばで聞き、会堂司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의심이 다가왔을 때,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다가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담대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광야에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주변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격려해주나요? 긍정적인 말을 해주나요? 아니요. 오히려 부정적인 말들을 합니다.

자기가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안 된다, 못 한다. 그런 걸 해서 뭘 하냐. 이런 말을 하면서 힘을 뺍니다. 조금 일이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거봐라. 내가 뭐랬냐.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뭐 이러면서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느헤미야 4장에 의하면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그들에게 이방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ネヘミヤ記

느헤미야 4장 3절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彼のそばには、アンモン人トビヤがいて、彼も「彼らが築き直している城壁など、狐が一匹上っただけで、その石垣を崩してしまうだろう」と言った。

야, 너희들이 돌 성벽을 쌓아? 아이고, 그런 성벽 같은 것은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질 거야.

아니, 누가 자기들한테 물어봤어요? 당신들이 보기에 이 성벽이 어느 정도 튼튼하게 보이는지 물어봤냐 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안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업신여기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광야와 사막이라고 하는 완전히 죽은 땅에 길을 내시고 강을 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광야와 사막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은 땅에서 이제 살아있는 땅, 비옥한 땅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이 모습을 보고 들짐승들마저도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까지는 정말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는 이방인들마저도 그 모습을 보면 너무도 놀라워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무엇 때문에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20절 후반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평범한 곳에 작은 개울을 파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사입니다. 돈도 한 두 푼 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길을 내고 강을 내요. 그것도 어디에 내냐 하면 광야나 사막에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기술로 한다 하더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을 무엇을 위해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이처럼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2020년 한 해를 뒤돌아보면 우리 인생에서 본다면 정말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라고 하는 대재앙의 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대재앙은 2021년 1월 1일 현재에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상초유(前代未聞)의 고통과 고난, 이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는 대재앙은, 이를 뒤집어 본다면, 이는 사상초유의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징조요, 사상초유의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시려는 징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완전히 광야나 사막처럼 되어버렸습니까.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고통을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 중에 버리실 것이었다면,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게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우리 모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리고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견디는 자가 되어서,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사상초유의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는 202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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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회 신앙의 자세
2020년 12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7절~24절 신약성경 241페이지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17節~24節
“17.あなたが自らユダヤ人と称し、律法を頼みとし、神を誇り、
18.みこころを知り、律法から教えられて、大切なことをわきまえているなら、
19.また、律法 のうちに具体的に示された知識と真理を持っているので、目の見えない人の案内人、闇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教師だ、と自負しているなら、
20.[前節に合節]
21.どうして、他人を教えながら、自分自身を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自分は盗むのですか。
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の物をかすめ取るのですか。
23.律法を誇りとするあなたは、律法に違反することで、神を侮っているのです。
24.「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の御名は異邦人の間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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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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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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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신앙의 자세” 信仰の姿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을 두 곳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17절에서 20절까지 살펴보고 그 다음에 21절에서 24절까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20절까지입니다.

로마서 2장 17절~20절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17.あなたが自らユダヤ人と称し、律法を頼みとし、神を誇り、
18.みこころを知り、律法から教えられて、大切なことをわきまえているなら、
19.また、律法 のうちに具体的に示された知識と真理を持っているので、目の見えない人の案内人、闇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教師だ、と自負しているなら、
20.[前節に合節]"

자, 여기서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 자신들은 선민사상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사상,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주 크고,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지도하고 이끌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습니까.

21절~24절까지를 봅니다.

로마서 2장 21절~24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1.どうして、他人を教えながら、自分自身を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自分は盗むのですか。
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の物をかすめ取るのですか。
23.律法を誇りとするあなたは、律法に違反することで、神を侮っているのです。
24.「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の御名は異邦人の間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그처럼 아는 것도 많고 자부심에 가득 차 있고 남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어떠냐 하면,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교회 물건을 훔쳐가고 율법을 범한다고 합니다.


항상 말씀 드리듯이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단순히 우리와 상관 없는 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처럼 신앙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없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범위를 현대의 의미로 좁히면 교회의 목회자나 교역자 정도로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イエスは、客として招かれた人たちが上座を選んでいる様子に気がついて、彼らにたとえを話された。
「結婚の披露宴に招かれたときには、上座に座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より身分の高い人が招かれ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あなたやその人を招いた人が来て、『この人に席を譲ってください』と言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ときあなたは恥をかいて、末席に着くことになります。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 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자,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냐 하면 14장 1절에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ある安息日のこと、イエスは食事をするために、パリサイ派のある指導者の家に入られた。そのとき人々はじっとイエスを見つめていた。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종교지도층 인사,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집이라고 하니, 사회적으로 보면 상당히 고위층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으니까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 때 예수님이라고 하면 당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손님, 귀빈으로 대우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는 주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초대 받았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보고 계셨더니, 초청을 받아서 오는 손님들이 자기가 먼저 상석에 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어디 초청 받아서 가면 행여 높은 자리에 먼저 가서 앉으려고 하지 말아라. 만약에 그랬다가 더 높은 사람이 왔을 경우, 너희더러 자리를 비키라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냐. 차라리 그러지 말고 처음에는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주인이 와서 너희를 높은 자리로 부르게 되니까, 오히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겠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세요?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예, 그렇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면 오히려 낮아지지만,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 다시 목회자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목사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사실 한국에 보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계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던 이스라엘에서 가깝지도 않고, 그리고 전세계 중에서도 대단히 작은 나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세계적인 목사님들,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가 많다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하는 말씀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에서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형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면서 기름을 붓게 되는데, 그 이후에 제사장들을 세울 때에는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에 들어서게 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세우면서 선지자 사무엘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윗을 비롯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면 그 증거로 기름을 붓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울이 왕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영도 그에게서 떠나서, 이제 다음 왕인 다윗과 함께 하시게 됩니다.

이 사실, 즉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워지고,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울은 다윗을 끈질기게 추격해서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심으로 인해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지요.

한편 다윗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단번에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두 번은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당장에 사울 왕의 목숨을 빼앗아버립시다 하고 간청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彼は部下に言った。「私が主に逆らって、主に油注がれた方、私の主君に対して、そのようなことをして手を下すなど、絶対にあり得ないことだ。彼は主に油注 がれた方なのだから。」


사무엘상 26장 9절~10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ダビデはアビシャイに言った。「殺してはならない。主に油注がれた方に手を下して、だれが罰を免れるだろうか。」
ダビデは言った。「主は生きておられる。主は必ず彼を打たれる。時が来て死ぬか、戦いに下ったときに滅びるかだ。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치지 말지어다>라고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윗은 그래도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람인데, 그런 왕을 내 손으로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에 벌을 내리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치셔서 죽거나 망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목사 또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는 신성불가침, 벌하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로 목사를 비판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말씀,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자, 오늘도 이제 진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선택지가 많으니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다음 인물들 중에서 실제로 사울이나 다윗처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사도 베드로, 2번 사도 요한, 3번 사도 바울, 4번 모두 기름 부음을 받았다. 5번 모두 기름 부음을 안 받았다.

정답은 예, 이 사람들이 사울이나 다윗처럼 실제로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私たちをあなたがたと一緒にキリストのうちに堅く保ち、私たちに油を注がれた方は神です。
神はまた、私たちに証印を押し、保証として御霊を私たちの心に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

만약에 이를 구약에서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처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이나, 이 글을 읽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이 모두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과거 구약시대 때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들 뿐이었습니다.


어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목사님들이 매년 몇 명이나 배출될 것 같습니까. 크고 작은 교단을 모두 합치면 자그마치 1만명이나 배출된다고 합니다. 전체가 아니라 매년 1만명입니다. 그러면 전세계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로 수많은 숫자의 목사들이 매년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그 사람들 다 기름을 부어준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무슨 주유소입니까.

그리고 그 목사님들이 그러면 이 세상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경에는 <목사>라고 하는 단어가 유일하게 신약의 에베소서에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12절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こうして、キリストご自身が、ある人たちを使徒、ある人たちを預言者、ある人たちを伝道者、ある人たちを牧師また教師としてお立てになりました。
それは、聖徒たちを整えて奉仕の働きをさせ、キリストのからだを建て上げ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인 성경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목사의 책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さて、私たちには、もろもろの天を通られた、神の子イエスという偉大な大祭司がおられるのですから、信仰の告白を堅く保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

그래서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야, 기름 부음을 받은 대세자장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신성불가침과도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목사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보다도 높고, 그리스도 예수님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이 퍼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야 간단하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사이비나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고 하면서, 신성불가침이라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대우를 받아가면서 편안하게 살아갔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흩어 져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모으기 위해서 목숨 걸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힘든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거기가 높은 자리인가요? 아닙니다. 낮은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목회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높은 자리는요? 그것은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씀이 오로지 목회자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실 사회적으로 보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외부 사람들은 이 교회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2장 21절~2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1절~24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1.どうして、他人を教えながら、自分自身を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自分は盗むのですか。
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の物をかすめ取るのですか。
23.律法を誇りとするあなたは、律法に違反することで、神を侮っているのです。
24.「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の御名は異邦人の間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남들한테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년 전에 기록된 것인데도,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의 모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가르치려고 들면서, 자기들은 나쁜 짓들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어떻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써 높여도 모자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높아지기는커녕 모독을 받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2대 왕 다윗, 3대 왕 솔로몬. 그들이 비록 왕이었습니다만 처음에는 상당히 겸손했습니다.

먼저 사울부터 보겠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이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사울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
“21.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サウルは答えて言った。「私はベニヤミン人で、イスラエルの最も小さい部族の出ではありませんか。私の家族は、ベニヤミンの部族のどの家族よりも、取 るに足り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どうしてこのようなことを私に言われるのですか。」

사무엘 선지자님, 아이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집안은 볼품없고요, 저희 가족도 제일 형편없는 집안인데, 그런 저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참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제비를 뽑아서 사울이 왕으로 결정되자 사무엘이 그를 부르는데, 어디를 찾아도 없어요. 그런데 그는 사무엘상 10장 22절에 의하면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을 정도로 겸손하고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사울 왕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나중에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잘못 없는 다윗을 혈안이 되어서 죽이려고 했고,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기를 높이려고 했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어, 마침내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윗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무엘하 7장18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ダビデ王は主の前に出て、座して言った。「神、主よ、私は何者でしょうか。私の家はいったい何な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私をここまで導いてくださったとは。

역시 그도 참 겸손하지요.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내 집도 대단할 것도 없는 가문인데도 자기를 이렇게까지 높여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감사 드리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어떤 짓을 저지릅니까. 사무엘하 11장 이후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하고, 이것이 들킬까 봐 결국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일부러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곱게 보실 리가 없겠지요. 이에 대한 죄의 대가로서 다윗의 가문에는 불화가 생깁니다. 남매 사이에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형제들 사이에 살인사건까지 실어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다윗은 그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자신의 후궁들은 그 아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고, 자신은 광야로 도망을 하는 수모를 겪는 등, 말년에는 그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왕이 되었을 초창기는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3장 7절~9절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わが神、主よ。今あなたは私の父ダビデに代わって、このしもべを王とされました。しかし私は小さな子どもで、出入りする術を知りません。
そのうえ、しもべは、あなたが選んだあなたの民の中にいます。あまりにも多くて、数えることも調べることもできないほど大勢の民です。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大勢の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위대한 왕 다윗을 이어서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모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를 좋게 보시고 지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1장에 의하면 그와 같이 겸손했던 솔로몬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나 경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솔로몬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일로 인해서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님들도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에는 정말 크나큰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내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해서 큰 부흥을 일으키리라 하는 꿈을 누구든 꾸었을 것입니다.

어디 목사만 그런가요. 교회에 처음 등록하고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제 세례를 받을 때, 직분을 받을 때, 이럴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됩니까.

내가 이제부터 교회에서 나쁜 짓 좀 해봐야지? 내가 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봐야지? 아니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정말 내 힘이 닿는 데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겠다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처음 믿음은 사라지고, 막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초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마태복음 5장 13절~15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15절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あなたがたは世の光です。山の上にある町は隠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また、明かりをともして升の下に置いたりはしません。燭台の上に置きます。そうすれば、家にいるすべての人を照ら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소금과 빛의 역할이 무엇이겠습니까.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서 짠 맛을 나게 합니다. 곰탕 같은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소금을 넣지 않으면 정말 밋밋해서 아무런 맛도 나지 않습니다만, 소금을 조금 넣으면 그 곰탕 맛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먹는 사람들이 소금 맛을 칭찬하나요? 요즘 보면 소금도 여러 가지 고급 소금도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고급 소금이라고 하더라도 음식에 넣으면,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음식 칭찬을 하지 음식에 넣은 소금 칭찬을 하지는 않습니다.

소금을 아무리 넣어도 짠 맛이 나지 않아요. 아니면 소금을 넣으면 짠 맛만 나고 도무지 음식 맛이 살아나지 않아요. 이건 제대로 된 소금이 아니지요. 정말로 좋은 소금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좋은 소금은 자신의 짠 맛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다른 음식들의 맛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 빛에 대해서는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하면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는 위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공연을 보러 갔어요. 거기에는 많은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겠지요. 그 무대에는 분명 많은 조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조명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배우의 연기력, 가창력, 화려한 무대장식을 칭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조명이면 조명일수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에 있는 배우들이나 장식들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조명이라 하더라도 조명을 한 번 켜면 무대나 배우는 안 보이고 환하기만 하다면, 그런 조명을 누가 쓰겠습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야, 너희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여기 와서 나한테 예배해. 뭐 이러셨던 적이 있으셨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께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기 위해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이라고 하는 캄캄한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우리를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죄 많은 우리를 오히려 섬겨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み)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에 오실 때에는, 그런 자비로운 모습,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첫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겸손했던 그 믿음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있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의 촛대, 축복의 촛대는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버리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축복의 촛대를 옮겨버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의 자세, 신앙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 가서 겸손한 마음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비추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은혜 가운데에 드러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자세이자 신앙의 자세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기 전에,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더욱 낮은 자리로 가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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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회 소동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2020년 12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3절 신약성경 2페이지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マタイの福音書 2章 1節~3節
“1.イエスがヘロデ王の時代に、ユダヤのベツレヘムでお生まれになったとき、見よ、東の方から博士たちがエルサレムにやって来て、こう言った。
2.「ユダヤ人の王としてお生まれになった方は、どこにおられますか。私たちはその方の星が昇るのを見たので、礼拝するために来ました。」
3.これを聞いてヘロデ王は動揺した。エルサレム中の人々も王と同じ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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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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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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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소동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動揺する者と喜ぶ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적지 않다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교회에 몇 년 다닌 정도가 되신다면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을 지나서 좀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성탄절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한 번 간단한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계십니까. 예, 일단 이스라엘에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요.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여러분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예, 우리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해서 동서양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바닥이 온통 지푸라기로 덮여 있는 마구간이고, 그 주변에서 말이나 양들이 웃고 있고, 예수님은 구유에 싸여서 누어있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요셉과 마리아가 그 옆에서 역시 방긋방긋 웃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약에 있다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사실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마구간의 위생상태가 어땠겠습니까. 마구간을 만화로 그려놓으니까 소나 말이나 양들도 귀엽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참 지저분한 곳이지요. 아무리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위생상태에서, 하물며 동물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지푸라기 위에서 아이를 출산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가 마구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장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あなたがたは、布にくるまって飼葉桶に寝ているみどりごを見つけます。そ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のしるしです。」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장 16절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そして急いで行って、マリアとヨセフと、飼葉桶に寝ているみどりごを捜し当てた。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신약성경에 있는 총 4개의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다음에 누인 곳이 구유, 즉 가축들의 먹이를 담는, 말하자면 여물통이었다는 기록은 오직 이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뭐, 구유가 있었으니까 태어나신 장소는 마구간이었겠지……라고 하는 이 막연한 추측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사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좀 적지 않게 부자연스러운 주장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신 것인가에 대해서, 누구는 동굴 같은 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집과 마구간을 연결하는 그 사이 공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기도 하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는지 연결통로에서 태어나셨는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보면 성탄절에 대해서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지요. 그래서 평소에도, 아, 이건 내가 잘 아는 곳이니까 대충 넘어가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방심하지 말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내용이라서 그냥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겠습니다만, 여기에 담긴 내용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의 상황을 알아봄으로 인해서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3절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1.イエスがヘロデ王の時代に、ユダヤのベツレヘムでお生まれになったとき、見よ、東の方から博士たちがエルサレムにやって来て、こう言った。
2.「ユダヤ人の王としてお生まれになった方は、どこにおられますか。私たちはその方の星が昇るのを見たので、礼拝するために来ました。」
3.これを聞いてヘロデ王は動揺した。エルサレム中の人々も王と同じであった。

개역한글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 우리가 쓰고 있는 서기는 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를 기점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사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경이었다고 요즘은 이해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말하자면 로마의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는 헤롯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가 몇 명이었다고요? 세 사람이죠?

예, 이것도 오해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찬송가를 보면 116장 제목이 <동방박사 세 사람>이었습니다만, 한참 지나서야 사람들이, 아, 성경에는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새찬송가에서는 같은 116장 제목이 <동방에서 박사들>로 바뀌었지요.

영화 같은 곳에 보면 특이한 복장을 한 세 사람이 쓸쓸하게 낙타를 타고 오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만, 정말 과연 그런지는 의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 왕을 만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냐 하면 당시 동방 박사들은 사회적으로 봐도 왕을 직접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신분이 높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동방이라고 하면 이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먼 거리를 왔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쓸쓸히 무슨 나그네처럼 세 사람이 낙타를 타고 왔다? 아니요. 그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성경에 보면 <박사들>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간에 그 일행들은 또한 한 두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아마도 수 십 명에 달하는 일행들이 예루살렘을 찾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는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묻습니다. 갑자기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만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을 텐데,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수소문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을 찾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당시 왕이라고 하면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하는 것은 일정 임기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어떻습니까. 왕이라고 하면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고, 그리고 평생 동안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정상적이라면 이 또한 일반적으로 그 왕권은 자녀들을 통해서 대대로 물려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권력이기에 때로는 이 왕권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부모형제들까지도 서로 죽이고 하는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비일비재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외국에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와서는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고, 그 유대인의 왕을 찾으러 왔다고 한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는 뭐, 요즘이라도 큰 사건이겠지요. 예를 들어서 무슨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말 동서양의 고위당국자나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석학 같은 사람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몰려와서, 아, 지금 이 나라에 새로운 왕이 태어났는데 우리가 만나러 왔다고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21세기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풍파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방박사들이 하는 말들이 좀 특이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러면 무슨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왕을 찾으러 왔는가 하면, 그게 아니라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것이에요.

이 점에 대해서 어떤 과학자가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믿음이 있으신 분이십니다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당시 천체를 재연할 수 있는데, 그 때 당시 목성과 토성이 어떻게 움직이고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강연을 들었을 때 대단히 흥미로워했습니다만 조금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에 당시 동방박사들이 정말 그 때 토성과 목성을 보고, 그 특이한 움직임으로 메시야 유대인의 왕 탄생을 알아냈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 2장 9절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마태복음 2장 9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博士たちは、王の言ったことを聞いて出て行った。すると見よ。かつて昇るのを見たあの星が、彼らの先に立って進み、ついに幼子のいるところまで来 て、その上にとどまった。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이 기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따라온 별이 앞서서 인도하다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 위에 머물러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해서 그들이 수소문하던 메시야가 탄생한 곳,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한 곳을 알아내어 찾아갔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를 인터넷으로 찍어보니까 남쪽으로 9.6킬로 정도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요.

물론 구약에도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기록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4절~6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장 4절~6절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王は民の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をみな集め、キリストはどこで生まれるのかと問いただした。
彼らは王に言った。「ユダヤのベツレヘムです。預言者によってこう書かれています。
『ユダの地、ベツレヘムよ、あなたはユダを治める者たちの中で決して一番小 さくはない。あなたから治める者が出て、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を牧するからである。』」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을 수소문한다는 말을 듣고 가장 긴장했던 사람은 바로 당시 왕이었던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층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집합시킵니다. 그리고 야, 지금 외국에서 지식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와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거기가 어디일 것 같으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말하기를, 성경에는 베들레헴이라고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인용한 구절은 구약 미가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ミカ書 5章2節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기록을 알았던 그들은 메시야가 탄생하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2장 7절~8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장 7절~8절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そこでヘロデは博士たちをひそかに呼んで、彼らから、星が現れた時期について詳しく聞いた。
そして、「行って幼子について詳しく調べ、見つけたら知らせてもらいたい。私も行って拝むから」と言って、彼らをベツレヘムに送り出した。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래서 헤롯 왕이 동방박사들에게 말하기를, 이봐 자네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야가 탄생하는 곳은 여기서 9킬로 정도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이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가서 아기를 찾으면 나한테 알려달라 하고 말합니다. 그는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지요. 자기도 아니고 자기 자식도 아닌 다른 인물이 왕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그 또래 아기의 대학살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고, 그리고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이었다고는 합니다만, 초행길인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베들레헴은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대단히 혼잡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2장 9절에 의하면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그들을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이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보았더니 아기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예물을 드렸다고 마태복음 2장 11절에는 기록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 기록을 본다면 과연 정말 하늘에 있는 목성이나 토성 만을 보고, 어떤 대략적인 지역이 아니라, 그 혼잡한 베들레헴 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집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었을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정말 무슨 별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집 위에 정확하게 머물렀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만, 이는 그야말로 나중에 천국에 가서 이 동방박사님들을 만났을 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 탄생을 동방박사들은 알았으나 막상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더라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말라기까지 구약 39권 속에 보면 계속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같은 성경 내용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태어난다고 하면 그곳은 베들레헴이다 라고 하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더욱 중요한 <언제> 태어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알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단지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하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하면 누구보다도 헤롯 왕은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왕을 본다면 초대 왕은 야곱의 막내 아들인 베냐민 지파 사울 왕이었습니다만, 그는 하나님께 순종을 다하지 않았기에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왕위는 이 또한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 지파 다윗 왕으로 이어지게 된 다음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에도 남쪽 유다 왕을 계속해서 유다 지파가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정통을 따진다면 다윗의 자손인 유다 지파입니다만, 그렇다면 헤롯은 어땠냐 하면 그는 에돔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혀 이스라엘 자손으로서는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래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로마한테 잘 보여서 간신히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제 새로운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불안해진 헤롯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동했다고 합니다. 안절부절 못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의 별을 보고 메시야 탄생을 알았던 그들은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2장 10절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その星を見て、彼らはこの上もなく喜んだ。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제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인구는 남녀노소 모두 합해서 대략 2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은 머지않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아이고, 우리는 못합니다. 하고 물러서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꼼짝없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됩니다. 그 광야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먹을 거리는 고사하고, 마실 물도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에서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40년이나 굶어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성경이 거짓이다, 가짜다, 신화다, 꾸며낸 이야기다 라고 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나 기적을 억지로 왜곡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것은 화산이 분출한 것이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울창한 갈대 숲을 지난 것인데 그게 마치 바다 같아서 그렇게 바다가 갈라진 것이라고 적힌 것이다……신약에 보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는 것은 그것은 무슨 벼락에 맞아서 본 환상이다……이런 식으로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 두 명도 아닌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40일도 아닌 40년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까.

출애굽기 16장 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人が住んでいる土地に来るまで、四十年の間マナを食べた。彼らはカナンの地の境に来るまでマナを食べた。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 만나라고 하는 식량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만나를 먹었는데, 그런데 이게 참 묘합니다.

이 만나에 관한 기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9절~24절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19.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だれも、それを朝まで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20.しかし、彼らはモーセの言うことを聞かず、ある者は朝までその一部を残しておいた。すると、それに虫がわき、臭くなった。モーセは彼らに向かって怒った。
21.彼らは朝ごとに、各自が食べる分量を集め、日が高くなると、それは溶けた。
22.六日目に、彼らは二倍のパンを、一人当たり二オメルずつを集めた。会衆の上に立つ者たちがみな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告げると、
23.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主の語られたことはこうだ。『明日は全き休みの日、主の聖なる安息である。焼きたいものは焼き、煮たいものは煮よ。残ったものはすべて取っておき、朝まで保存せよ。』」
24モーセの命じたとおりに、彼らはそれを朝まで取っておいた。しかし、それは臭くもならず、そこにうじ虫もわかなかった。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 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아침에 만나를 거두면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마다 나가서 하루치 만나를 거두어야 그 날 먹을 양식을 거둘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쌓아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다음 날에는 못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래, 뭐 자연현상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안식일. 이 날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는데, 그러면 그 날 먹을 만나를 거둘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거두고 싶어도 안식일에는 이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은 이틀 치를 거두어서 안식일까지 먹어도 되게 하셨습니다. 그 때는 안식일인 다음날까지 보관을 해도 냄새가 나지도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떻게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을까요. 아니, 그냥 좀 넉넉히 모아두고 필요에 따라서 먹을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농사를 짓고 짐승들을 기르고 하면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만나를 먹게 되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오늘 거둔 만나를 먹으면 이제 내일 먹을 것이 없어요. 내일까지 놔두면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못 먹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예, 그렇습니다.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거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동방박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동방박사. 말이 좋아 동방박사이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막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방인이 그리스도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성경을 살펴봅니다. 구약성경 가장 마지막 장인 말라기를 보면 말라기 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1장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日の昇るところから日の沈むところまで、わたしの名は国々の間で偉大であり、すべての場所で、わたしの名のためにきよいささげ物が献げられ、香がたかれる。まことに、国々の間で偉大なのは、わたしの名。──万軍の主は言われる──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21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異邦人は彼の名に望みをかける。」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지금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아시아에서 훨씬 더 높임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와 같은 내용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언급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언제 오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깨어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의지하고 내 지식이나 내 노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날이 다가왔을 때, 당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헤롯 왕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소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만을 바라보던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뻐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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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회 유일한 문과 길
2020년 12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2절~16절 신약성경 241 페이지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12節~16節
“12.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なしに滅び、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
13.なぜなら、律法を聞く者が神の前に正しいのではなく、律法を行う者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14.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が、生まれつきのままで律法の命じることを行う場合は、律法を持たなくても、彼ら自身が自分に対する律法なのです。
15.彼らは、律法の命じる行いが自分の心に記され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らの良心 も証ししていて、彼らの心の思いは互いに責め合ったり、また弁明し合ったりさえするのです。
16.私の福音によれば、神のさばきは、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人々の隠された事柄をさばかれるその日に行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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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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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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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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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번째 시간으로서 “유일한 문과 길” 唯一の門と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2장 12절~13절입니다.

로마서 2장 12절~13절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2.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なしに滅び、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みな、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
13.なぜなら、律法を聞く者が神の前に正しいのではなく、律法を行う者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우리가 이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점은 12절 말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한 구절이 아니라 오늘 살펴볼 범위인 12절~16절에 대한 주제, 또는 제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선 간단히 살펴봅니다. 12절에서 언급된 말씀은 율법과 범죄와 멸망과 심판입니다. 이는 쉽게 말씀 드리자면 율법을 모르고 죄를 지었건, 율법을 알고 죄를 지었건 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역시 여기서도 율법의 행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운전면허를 갱신할 때에, 그 때까지 교통위반이 있건 없건 간에 반드시 안전운전에 대한 동영상을 보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위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보는 동영상의 길이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까지 위반이 없는 사람들이 보는 동영상을 짧지만, 위반이 이는 사람들이 보는 동영상은 아무래도 길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안전운전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봤다고 해도, 그 동영상을 보는 것이 안전운전이 아니라, 실제로 안전하게 운전을 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안전운전이라고 하는 사실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율법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학교에서 무슨 시험을 보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율법의 가치는 바로 행함이 동반되었을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보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14절~15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4.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が、生まれつきのままで律法の命じることを行う場合は、律法を持たなくても、彼ら自身が自分に対する律法なのです。
15.彼らは、律法の命じる行いが自分の心に記され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らの良心 も証ししていて、彼らの心の思いは互いに責め合ったり、また弁明し合ったりさえするのです。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 구절은 앞서 12절을 좀 풀어서 기록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이라고 하면 모두가 알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에 보면 벌칙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현대 문명국가에서 보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형벌의 종류는 대단히 많습니다. 뭐, 가벼운 죄는 벌금도 있습니다만, 무거운 죄는 금고나 징역도 있지요. 같은 금고나 징역이라 하더라도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몇 십 년까지 내려지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이는 드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만, 더욱 무거운 죄는 사형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보면 어떻습니까. 웬만한 죄는 다 죽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이 율법은 무섭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율법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나쁜 짓을 저지르면 심판이 내려지는데,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율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저질러도 명확한 심판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이지요.

말이 좀 이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율법을 알지 못했다면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율법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차라리 몰랐으면 벌을 받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이 율법을 알아가지고 벌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2절에 보면 율법이 있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서 결국 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듯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직 복음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도덕이나 교양에 대한 책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형법 같은 법조문을 본다 하더라도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시면 어떻습니까. 조금 머리가 좋으신 분들은 여기서부터 많은 생각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죠. 그래? 나쁜 짓을 저지르면 율법을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 벌을 받는 건 마찬가지네? 그렇다면 꼭 율법을 알아야 하나? 어차피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꼭 율법을 알지 않아도 된다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발생을 하냐 하면, 율법? 성경? 이런 게 없어도 우리는 이미 무엇이 나쁜 일인지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굳이 매주 교회에 나아가고 성경을 읽고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하고요, 조금 더 지나치면, 하나님? 예수님? 꼭 믿어야 돼? 그냥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야? 뭐 이렇게까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이라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혹시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씀을 들어보진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제외하면 수많은 종교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와 비슷한 종교, 그리고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입니다.


후자인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들 멋대로 새로운 이론,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낸 경우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보면 우리 기독교와 유사한 종교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유대교, 천주교, 이슬람교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종교들이 우리 기독교와 닮은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 노아의 홍수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다른 종교들을 보더라도 전세계가 홍수에 뒤덮였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에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렇겠지요. 당시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전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고 오로지 노아와 그의 가족인 총 여덟 명만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인류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만들어낸 종교들을 본다 하더라도 거기에 노아의 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들이나 경전을 보더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비슷한 모습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점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결국은 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굳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굳이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성경을 믿지 않더라도, 자기가 가진 종교를 열심히 믿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 종교다원주의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말 극히 일부 문제가 있는 종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들을 보면, 우리가 자세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무슨 나쁜 짓을 하라는 내용은 없잖아요? 다 그냥 좋은 일 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되고, 나쁜 짓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뭐예요? 오늘 말씀을 보면 꼭 율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각 사람마다 양심이 있다고 하니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간다고 하면,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 아니야?

만약에 누군가가 유창한 말솜씨로 이와 같이 여러분께 말을 한다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과 같이 믿음이 좋으신 분들은 이와 같은 말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만, 지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 하물며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분들이나,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거기에는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심판과 멸망에 대한 말씀은 있지만, 구원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율법을 알았던 사람들이나 몰랐던 사람들이나 나쁜 짓을 저지르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지만, 율법을 알았던 사람들이나 몰랐던 사람들이나 좋은 일을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예, 그렇습니다.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9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そこで、再びイエスは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は羊たちの門です。
わたしの前に来た者たちはみな、盗人であり強盗です。羊たちは彼らの言うことを聞きませんでした。
わたしは門です。だれでも、わたしを通って入るなら救われます。また出たり入ったりして、牧草を見つけます。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시 말해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멸망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기 위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 이 기독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즉 구세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4절~45절
“44.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イエスは大きな声でこう言われた。「わたしを信じる者は、わたし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を信じるのです。
また、わたしを見る者は、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を見るのです。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아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고, 성경에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보다도 더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 같은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왜 예수님도 믿어야 하나…… 이와 같은 소박한 의문을 혹시 가져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2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26절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なだ)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すなわち、ご自分が義であり、イエスを信じる者を義と認める方であることを示すため、今この時に、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천국은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가 무겁고 가볍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하더라도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제일 작은 죄 하나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옥불 속으로 떨어져야 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는 다면, 우리는 그 분의 근처에도 갈 수가 없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되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자 길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우리가 당당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너희들 힘만으로는 부족하니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나, 베드로 같은 사도나, 아니면 또 다른 예언자나 선지자의 힘을 빌려서 나한테로 오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 지금 있는 그대로 오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삶,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 지치고 쓰러질 때, 거기 그대로 있지 말로 너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기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이 죄를 좀 해결하고 난 다음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실려가는데, 넥타이 매고 정장 차림으로 갑니까.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얼굴 화장 고치고 예쁜 옷을 입고 간답니까. 그래야 병원에서 받아준다고 합니까.

아니면 지금 내 몸이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를 알고 가야 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가면 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는 병원에 가기만 하면 의사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해주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지은 죄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사방팔방 모두가 막혀버린 것 같아요. 그럴 때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유일한 문이 되시고 길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2장 16절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16.私の福音によれば、神のさばきは、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人々の隠された事柄をさばかれるその日に行われるのです。

16.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바울은 많은 서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 서신에는 물론이고,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심판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인지 슬픔으로 맞이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 어느 길로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길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먼 훗날 크나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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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회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
2020년 12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6절~11절 신약성경 241 페이지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6節~11節
6. 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7. 忍耐をもって善を行い、栄光と誉れと朽ちないものを求める者には、永遠のいのちを与え、
8. 利己的な思いから真理に従わず、不義に従う者には、怒りと憤りを下されます。
9. 悪を行うすべての者の上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苦難と苦悩が下り、
10. 善を行うすべての者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ます。
11. 神にはえこひいき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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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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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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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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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 行いという良い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역시 본문을 앞뒤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2장 6절~8절입니다.

로마서 2장 6절~8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6.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7.忍耐をもって善を行い、栄光と誉れと朽ちないものを求める者には、永遠のいのちを与え、
8.利己的な思いから真理に従わず、不義に従う者には、怒りと憤りを下されます。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우리는 이 6절에 우선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해오고, 그리고 주보 표지에도 적어드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입니다. 이 중에서 무엇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단순이 여기에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순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뛰어난 행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믿음이 있으면 충분하냐 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말씀, 즉 성경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말씀을 두 가지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요, 또 하나는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여기는 이게 잘못되었다. 저기는 저게 잘못 되었다, 하고 지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책은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에 불과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벌써 성경 처음부터 은혜가 넘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우주물리학자들은 전 우주가 이른바 빅뱅, 우연히 일어난 대폭발로 인해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절차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간에 걸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다섯째 날까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행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행사를 준비합니다. 크고 작은 시설들을 만들거나 요리를 준비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그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언제 등장합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지요.


무슨 정상회담이 있어요. 그러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며칠 전부터 나와서 자기들이 요리도 하고 카펫도 깔고 그러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준비를 해 놓으면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놓은 것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요리를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마찬가지지요.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땅을 정복하라거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사람에게 이 모든 권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천지창조는 바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사람을 위에 예비해주신,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기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처음에 세상을 지으셨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드셨을지는 모르지만,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니야?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 성경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 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もとい)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벌써 2020년도 12월입니다만, 올해 초에 계획했던 일을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 이루어놓으셨습니까. 아이고, 원래는 이러이러한 계획도 있었고 저러저러한 계획도 있었지만 코로나다 뭐다 하는 것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예,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지요.

우리 인간은 1년 계획? 아니요. 하루 계획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고사하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은혜가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것이 <행함>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열매라고 해서 다 같은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나쁜 열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20절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 말씀에 의하며 불에 던져지느냐 아니냐의 구분은 오로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좋은 나무면 당연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싶어도 나무가 나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과 불의를 따르는 사람을 판단하시고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말씀 후반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9절~11절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9.悪を行うすべての者の上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苦難と苦悩が下り、
10.善を行うすべての者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ます。
11.神にはえこひいきがないからです。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여기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와 같은 행함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요,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아, 그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첫째로 이스라엘 사람한테이고, 둘째로는 그리스 사람한테로구나……라고만 끝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한테 있어서 이 말씀은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그야말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성경을 그냥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 취급을 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나 허황된 전설이나 흥미만을 주는 문학이 아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유대인과 이방인,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의 시초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그 아브라함의 계보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 왕을 거쳐서 마침내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유대인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으며 사도행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믿음은 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는 먼저 믿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나중에 믿음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직분이 높은 분도 있을 것이요, 낮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먼저 믿은 사람들이 축복을 먼저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반대로 심판도 먼저 받을 수가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의하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요.

시간 관계상 오늘은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37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 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주된 등장인물들은 네 사람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셋째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넷째로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서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히 죽게 될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죽게 된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기록이 없습니다. 어쩌면 상처가 너무 심해서 구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잠시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사실 제사장도 레위인이긴 합니다만, 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이요, 둘째로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요, 셋째로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특별히 레위 지파는 출애굽 이후에 제사장 직분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 말씀의 율법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そのサマリアの女は言った。「あなたはユダヤ人なのに、どうしてサマリアの女の私に、飲み水をお求めになるのですか。」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と付き合いをしなかったのである。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차별했었습니다. 상종하지 않았다. 서로 교제하는 일이 없이 경멸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그런데 그들이 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모르지만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둘 다 피하여 지나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지나갔을까요. 그냥 귀찮아서요? 아니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원래 나쁜 사람들이라서요?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당시 왜 그랬냐고 우리가 물어볼 기회가 있다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귀찮아서라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아니야. 나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단 말이오.”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자기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피해서 갔다고 말한다면 의아해하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나중에 이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어서 물어본다면 10중 8, 9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무슨 말이 있기에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민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수기 19장 13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자, 봐라. 그 때 그 사람은 죽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제사장이고 레위인인데, 만약에 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을 만졌다면 내가 부정하게 되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지나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그가 이와 같은 율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고 냉대를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그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단순히 치료만 해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기서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갔다는 것은, 둘이 탔다기 보다는 그 사람을 짐승에 태우는 대신 자기는 걸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거기까지 데리고 갔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도 돌보아주었대요. 그러니까 간호를 정성껏 했다는 뜻이겠지요.

이 사람의 친절을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 볼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었는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막 주인한테 돈을 줍니다. 그리 큰 돈은 아니에요. 두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지금 돈으로 대략 10만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고, 만약에 돈이 더 들게 되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그 돈까지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면 어떻습니까. 물론 아주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착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과 같이 자비심이 많은 분들께서는, 아니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생각하실지는 모릅니다만, 저처럼 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니, 그냥 뭐, 치료해주기만 하면 됐지 않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자기가 희생까지 해가면서 돌보아주어야 하나? 너무 좀 지나친 것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2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악한 자가 너를 죽도록 패는 것이 아닌 그냥 뺨 한 대 때리는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네가 그냥 넘겨줘라. 새 옷도 아닌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을 빼앗으려고 소송까지 벌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네가 입던 겉옷까지 줘버려라. 억지로 오 리, 그러니까 한 2킬로 정도, 걸어서 30분 정도 가게 할 정도로 수고를 강요한다면, 차라리 4킬로 정도, 걸어서 1시간 정도 수고를 더 해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은 알았으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많은 지식을 알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걸맞은 행함이 없다면 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큰 돈이나 자기 인생을 희생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대신 이 사람을 짐승에 태우고 조금 걸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몇 개월이나 몇 년을 간호한 것이 아니라 하룻밤만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돈 몇 만원 정도만 주었을 뿐입니다.

이는 대단히 큰 돈을 들이거나 많은 시간이나 수고를 들여서 한 것이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조금 과한 행함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 눈으로 보면 조금 과한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도 이 사마리아 사람을 더욱 높이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돈이 많은 사람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지위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젊은 사람인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는 데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 그러니까 그 사람의 배경이나 성별이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것부터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높이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써, 우리의 조금 과한 행함, 조금 지나친 행함으로써 우리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믿음과 말씀에 의한 행함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창세 전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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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회 기다림의 믿음
2020년 11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절~5절 신약성경 240 페이지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2章 1節~5節
“1.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2.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の上に、真理に基づいて神のさばきが下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4.それとも、神のいつくしみ深さ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いつくしみと忍耐と寛容を軽んじているのですか。
5.あなたは、頑なで悔い改める心がないために、神の正しいさばきが現れる御怒りの日の怒りを、自分のために蓄え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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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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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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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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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번째 시간으로서 “기다림의 믿음” 待つという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도 앞과 뒤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2장 1절~3절까지를 먼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1절~3절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2.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の上に、真理に基づいて神のさばきが下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1절에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도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한다면, 우리 주변에 어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아니, 이런 나쁜 사람이 다 있나! 하고 혼을 냈습니다.

이것만 본다면 전혀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던 로마서 1장 28절~32절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과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떤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잘못과 주관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있어서도 합법적인 심판과 불법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에 대해서만 본다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때렸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어요. 이것은 객관적인 잘못이지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만 본다면 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법을 어긴 범죄입니다. 명백한 잘못이지요.

그러나 잘못에는 객관적인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잘못도 있어요. 이는 쉽게 말해서, 무슨 법을 어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상당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뭐냐 하면 상대방은 잘못이 없는데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내 생각대로 미워하거나 비판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데, 괜히 나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이런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뉴스를 조금 살펴보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끔찍한 사건까지도 발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도 합법적인 심판과 불법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주민이 경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흥미를 가졌어요.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고는 마침내 범인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그 범인이 집에 있을 때를 노려서 쳐들어가고는 수갑을 채워서 경찰서에 데려갔습니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자기가 생각했을 때 징역 5년은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범인을 잡고 난 다음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서 5년 동안 거기 가둬놓았어요.

여러분, 이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 범인이 진짜 범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의 죄가 징역 5년에 해당하는 범죄라 하더라도, 아무나 그렇게 붙잡아서 가둬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불법적인 심판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범죄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수사나 체포라고 하는 과정은 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결도 합법적인 재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이는 많이 배운 사람이건 아니건, 구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얼마나 상대방을 잘 비판하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아니에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을 우리가 평소에 잘 아는 우리 이웃을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아, 그렇다고 여기 있는 분들 중에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안 계신 분들 중에서 한 분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종이에 적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처럼 믿음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당연히 좋은 점을 많이 적어나가시겠지만, 일반 사람들 같은 경우를 보면 상대방에 대한 나쁜 점이 더 많이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예전에 어느 텔레비전을 보니까 초등학교에 가서 저학년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 친구에 대해서 안 좋은 점을 한 번 말해보세요……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아주 와글와글 쏟아져 나옵니다. 쟤는 이래서 안 좋고요. 저래서 저런 게 안 좋고요……그래서 그럼 좋은 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어땠겠습니까. 억지로 한 가지 두 가지만 나오고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애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뉴스나 페이스북 같은 데에 보더러도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비난하는 말들이나 글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요? 로마서 2장 1절 후반부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네가 남을 비판하고도 네가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것은 잘못이라고 지적을 했다면 그 지적을 한 사람은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3절~5절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기서 들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큰 기둥입니다. 그리고 티는 작은 먼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잘못이다 저게 잘못이다 하고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네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비하면 아주 작은 먼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네 잘못은 거기에 비하면 티끌이 아니라 훨씬 큰 기둥과도 같은 거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말하자면 착한 척 하는 사람, 믿음이 좋은 척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는 먼저 너에게 있는 큰 기둥만한 잘못을 제거한 다음에 네 형제들의 잘못을 지적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웃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먼저 제게 있는 큰 잘못들을 빼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 이웃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되겠지요?

여러분 이런 생각 한 번 해보셨습니까.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해보느냐 하면 바로 기도할 때 해보는 것이지요. 기도를 드릴 때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한 번 이렇게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제 이웃들의 잘못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우선 제 눈에 있는 들보를 좀 빼보려고 합니다. 제게 무슨 들보가 있는지 한 번 알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드렸는데도 여전히 내 잘못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웃들에 대한 잘못만이 보이나요? 그것은 응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응답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예, 조금 있으면 얼굴이 화끈화끈 거립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요, 너무나도 미안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잘했다고 이웃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어디가 잘났다고 무슨 자격으로 이웃을 지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정으로 우리 눈에서 들보가 빠지는 순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에서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기게 하기 위해서 뱀이라고도 하는 이 마귀 사탄은 하와를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뜻에 맞으면 진실이고 하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몇 프로가 진실이고 몇 프로가 거짓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백 프로가 거짓입니다. 아무리 그 중에서 1프로나 2프로가 진실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그 중의 일부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아니, 하물며 100프로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마귀 사탄이 하는 말은 100프로 거짓입니다. 100프로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창세기 3장 5절에 보면 마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기 위해 말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눈이 밝아진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셋째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중에서 하나라도 맞은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첫째로 눈이 밝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정도로 어두워졌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같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모두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선악을 알게 되었나요? 아니요. 선악을 알기는커녕 사람의 눈은 온통 들보로 가득 차게 되어, 아무런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나쁨을 엉터리로 판단하게 되어서 결국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가 위험운전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내 차 앞에 끼어들어와서 급정거를 하거나 하는 대단히 위험한 운전이지요.


이런 운전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상대방 차가 먼저 끼어들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서, 그렇게 운전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말하자면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고 자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그런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은 범죄자들을 심판한 정의의 화신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전문가는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정의의 화신도 아니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라 범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을 우리는 저지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충고>라는 이름으로 이웃을 비판하고 이웃을 비난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스스로도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웃의 티가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웃의 그 잘못이 우리에게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 같은 잘못을 저질러 왔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처럼 안경 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이 좀 지저분하게 보이십니까. 세상 탓을 하기 자신의 안경을 좀 닦아보십시오. 운전을 하시는데 바깥이 지저분해 보이십니까. 세상 탓을 하기 전에 차 유리를 좀 닦아보십시오.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3절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3.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비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웃을 탓하기 전에 세상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이웃의 눈에 티가 보이는 이유, 작은 잘못이 보이는 이유는, 바로 내 눈 안에 큰 들보가 들어있기 때문이요, 내 마음 안에 더 큰 잘못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2장 4절~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2장 4절~5절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4.それとも、神のいつくしみ深さ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いつくしみと忍耐と寛容を軽んじているのですか。
5.あなたは、頑なで悔い改める心がないために、神の正しいさばきが現れる御怒りの日の怒りを、自分のために蓄えています。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자,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사람을 미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정말로 어떤 미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서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세상에 나쁜 사람들은 많고,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둬요. 좀 나쁜 짓을 저지르면 빨리빨리 벌을 받고 그런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죄도 짓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가끔 좀 일을 게을리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어디 그것 뿐이에요? 내가 좀 돈이 필요하다고 기도를 드리면 그때그때 입금시켜주면 얼마나 좋아요? 내가 무슨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지금 내가 이게 필요한데, 내가 이렇게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기도 응답을 빨리빨리 들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 정말 하나님 요즘 좀 저한테 무관심한 것 같아요……이렇게 생각되는 일도 솔직히 있을 것입니다.

잠시 사무엘상 13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로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제 여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출격하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싸우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더니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サウルは、サムエルがいることになっている例祭まで、七日間待ったが、サムエルはギルガルに来 なかった。それで、兵たちはサウルから離れて散って行こうとした。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이 문맥상으로 보면, 이번에도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기로 하고, 그리고 사무엘이 언제까지 올 테니까 기다리십시오. 하고 사울 왕에게 말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이 안 나타납니다.

사무엘이 와서 빨리 제사를 드려야 전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안 오니까 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 저기 보면 수많은 적군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사울 왕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는 간단합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어떻습니까. 지금 빨리 제사를 시작하고 전쟁을 시작해도 부족한데,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도록 사무엘은 안 나타나고, 기다리던 병사들은 사기가 점점 떨어져가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대충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이고 그런데 웬일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딱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 사무엘이 약속을 여기고 지각을 한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오겠다고 사무엘은 말하고 그리고 그 기한이 차기 전에 사무엘이 도착했는데, 사울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 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이여,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더라면 왕위가 굳건해졌을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고 맙니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사울은 나중에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왕위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느려 보입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무리 잘난 척 해 봤자, 아무리 똑똑한 척 해 봤자, 우리는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명철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쁜 사람에게 대한 심판이 늦는다고 한탄하시겠습니까. 나쁜 사람에 대한 심판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심판이 그때그때 순식간에 내려졌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장담을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살아남아있을 사람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옥 불에 떨어져서 지금 이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로마서 2장 4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서 뭘 해? 차라리 내가 내 힘으로 하고 말지……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내 판단이 훨씬 더 옳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에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다림으로 인해서 내가 구원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요, 이 기다림으로 인해서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닌, 이 판단에 대한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판단을 서두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판단하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내가 하겠다는 교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부끄럽고 죄가 많은 나를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낮아져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들보를 빼내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짐으로 인해서 주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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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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