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도 3장에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것이 지난 2020년 9월 6일이었고, 3개월만에 2장까지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절기에 맞추어서 다른 주제로 말씀을 전해드린 적도 있습니다만, 로마서가
16장까지 있고, 2장을 나가는데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면, 단순계산으로 24개월, 2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제 3개월을
했으니 남은 기간은 대략 21개월 정도가 되나요?
하지만 또 모르죠. 그렇다고 무슨 마감이 있는 것은 아니니, 더 길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중요한 로마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살펴나가도록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2장을 끝냈으니, 학교에서도 일정 시기가 되면 시험을 보죠? 그렇다면 우리도 간단한 시험을 볼까 합니다. 아니요.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마세요. 무슨 문제지나 답안지를 나눠드리고 쓰거나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드린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해오신 분이시라면 어렵지 않게 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문제가 나갑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이에 대한 답과 그 근거를 논하시오.
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을 점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유대인이란 무엇이고 이방인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유대인은 그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신명기 14장 2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받은 민족이요, 또한 할례 받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민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무엇이냐 하면, 이 구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심도 없고 율법도 할례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하면 이제부터 이스라엘 말도 배워야겠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스라엘 말을 어떻게 배우나 하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각각 한국이나 일본이라고 하는 구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김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양사람처럼 생겼고, 우리 얼굴을 보면
동양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 외견상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느냐 하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2장 29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표면적인 유대인은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표면적 이방인이라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이요, 할례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 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야지만 우리는 오늘 살펴볼 말씀을 비롯해서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저도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대한 해설서인
주석서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주석들을 보면 온통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보면 예를 들어서 사무엘서나 열왕기나 역대서 같은 것을 볼 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그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유대인>을 외견상 유대인, 저기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의 유대인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야지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인 로마서 3장 1절~2절까지만이 아니라 8절까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바울은 지금 자문자답, 그러니까 자신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만약에 아무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면 굳이 여기서 자문자답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전제를 염두에 두고 이제 이 질문과 답변들을 몇 회에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첫 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앞서 2장까지를 보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고 할례를 받은 표면상의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좋은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한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제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일당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는 당시 임금으로서 평균적인
금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시간이 나오는데, 이는 유대식 시간표기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과 조금 다릅니다. 우선 성경에 <제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제육시>는 정오인 낮 12시, <제구시>는 오후 3시, 그리고 <제11시>는 오후 5시입니다.
자, 이제 아침 일찍 나갔더니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한 데나리온을 줄 테니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침 9시에 나가보자 또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내가 일당을 주겠으니 내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해서 들여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낮12시와 오후 3시에 또 주인이 나가봤더니 아직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각각 포도원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 나가봤어요. 이 주인도 참 독특합니다. 오후 5시면 하루가 다 끝나갈 무렵인데 그래도 일할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까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주인은 그 시간에도 일꾼들을 불러다가 일을 하라고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해가 저물고 오후 6시가 되었어요. 일을 마치고 하루 일당을 받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8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의 청지기, 말하자면 현장감독에게 지시하기를, 일당을 포도원에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몇 시에 왔다고요? 예, 지금 시간은 오후 6시인데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제 일꾼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각각 일당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어요.
여기서 편의상 하루 일당을 한국 돈 10만원, 일본 돈 1만엔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기대감이 부풀었습니다. 야아, 1시간 밖에 안 한 사람들이
10만원을 받았으니, 나는 좀 더 받을 수 있겠구나. 나는 10시간이나 일했으니까 어쩌면 10 데나리온, 100만원 정도를 받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기대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어서 돈을 받아보니까 자기도 한 데나리온, 그러니까 10만원밖에 안 주는 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9시간 동안 일을 했는데, 아침 9시 이전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10시간
이상 일한 사람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 더운 날에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했는데, 그 사람들 일당을 받아보니까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돈을 받았어요.
사실 그러면 좀 억울한 마음이 들겠지요. 그래서 주인한테 따집니다. 왜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한 자기들과, 저기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일당을 받냐고 원망을 합니다. 아마도 제일 불만을 말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제일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러자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명쾌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彼は労働者たちと一日一デナリの約束をすると、彼らをぶどう園に送った。
아니, 내가 너희들에게 뭐라고 했어? 원래 계약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잖아. 애초에 계약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계약대로 임금을
줬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뭔데 그래?
그러면서 이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4절~15절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あなたの分を取って帰りなさい。私はこの最後の人にも、あなたと同じだけ与えたいのです。
自分のもので自分のしたいことをしてはいけませんか。それとも、私が気前がいいので、あなたはねたんでいるのですか。』
내가 너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계약을 했고, 그 계약대로 이행을 했으니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0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 것은 내 마음이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돈을 주는데 네가 왜
불만을 갖는데?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이는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고, 이제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기 시작하자 더욱 많아졌습니다.
하나님과 구원은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자, 이방인들도 구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천국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앞서 로마서 2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율법과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따집니다. 너 교회 다닌 지 얼마나 됐느냐. 나는 몇 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무슨
모태신자다. 나는 직분이 뭐다. 직분을 언제 받았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가 때로는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부모에게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느냐. 어느 직분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새신자 분들이겠지요.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큰 힘이 됩니다.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교회에 나와보니까 뭐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이나 20년된 사람들도 참 많던데,
그러면 지금 내 나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봤자 나중에 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제일 낮은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몰라. 제일 구석
자리에 있게 될지도 몰라.
뭐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말하자면 평생 동안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인생 마지막 끝자락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나 똑 같은 일당을 받게 된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아, 내가 정말 인생의 막차를 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는구나. 훨씬 더 오래 믿은
사람들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구나. 하는 소망을 갖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분들은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지요. 그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생했는데, 그런데 나를 지금 막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저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맞는 말씀일까요? 한 번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고생인가요?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보면 신앙생활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전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남들은 일요일에 집에서 편하게 보내는데, 나는 일요일에 쉬지도 않고 교회에 나가야 하다니 이 얼마나 고생이야. 헌금도 무슨 십일조다
뭐다 해서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이런 돈을 안 내도 되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우선,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왠지 안 나가면 벌 받을까 봐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이사야서 43장 1절을 봅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저기 서울 어디에 사는, 대충 한 여기 사람들, 일본 군마에 사는 대충 여기 있는
사람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너를 지명하여 부르셨다, 너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만 알고 계실까요?
누가복음 12장 6절~7절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五羽の雀が、二アサリオンで売ら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そんな雀の一羽でも、神の御前で忘れられてはいません。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여기서 <앗사리온>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이는 앞서 나왔던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데나리온을
하루 일당인 10만원, 1만엔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16분의 1이니까, 1 앗사리온은 6250원, 625엔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러면 참새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니까 12500원 1250엔, 이를 5로 나누면 참새 한 마리에 대략 2500원,
250엔 정도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글쎄요. 뭐, 한국에서 본다면 김밥 한 줄보다도 싼 가격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요. 하지만 김밥 한 줄 정도밖에 안 하는 참새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는데,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도 기억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고,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면서까지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서 천국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역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힘들고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에 대해서 제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실 정도로 저를 사랑해주신 하나님, 그 분이
제 이름 세 글자를 지명해서 불러주시고 지금 오늘 이날 이 때까지 인도해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큰 고생이셨겠다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생을 안 하시려면 어떻게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포기하시면 됩니다. 너 참 속을 썩힌다. 그래, 뭐, 사람이
너만 있냐. 됐다. 너는 없는 샘치고 다른 사람을 쓰겠다.
이렇게 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 것 같습니까.
어느 한 교관은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를 제대로 된 조종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너희들 몸무게 정도가 되는 금 덩어리만큼 비용이
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이를 위해 들어가는 훈련 비용, 비행기 연료비, 훈련장비 등등을 본다면,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21억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초보 조종사가 그렇다는 것이고, 이제 실전에서 정말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10년차 정도의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하려면 대략 80억원 가까이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한 사람을 만드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무슨 하루 식대나 한 달
생활비를 생각하실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아침이나 밤이나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인건비를 생각해야지요.
그럼 하나님은 하루에 얼마나 일을 하십니까.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업무환경, 노동환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8시간 노동도 아니에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루 24시간 노동입니다. 그것도 언제부터 언제까지요? 예,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월차도 없고 연차도 없어요.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리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을 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전세계에 있는 돈들을 다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돈이나 재산들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모자라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순간순간이 기쁨이요, 감사요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성경 말씀을 읽은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하루하루가 기쁨이자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여기서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이라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이방인, 즉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요?
요한복음 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그렇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 있어요. 그 날도 거기서 밥을 먹고 있는데, 김치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여기 김치 좀 더 갖다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아 참, 나 지금 바쁘니까 저기 주방 냉장고에 가서 알아서 덜어먹어.”
그렇게 말합니다. 뭐, 여러분은 단골이었으니까 그 주방 사정도 잘 압니다.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밥 먹다가
말고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손님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아, 그럼 저도 제가 덜어 먹을게요. 냉장고가 어디죠?” 라고 했더니만, 그
바쁘다고 했던 주인이 서둘러서 달려 와서는, “아닙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 바쁘다던 주인이 자기가 주방에
들어가서 김치를 들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단골손님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여러분은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불쾌해하시겠습니까.
아니, 맨날 여기 오는 단골인 나한테는 바쁘다고 하고 알아서 갖다 먹으라고 하더니만, 처음 온 손님한테는 쏜살같이 와서 김치를 가져다
주고 말이야. 이거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처음 온 손님만 손님 대우를 해주고 나한테는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야?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원리를 잠시 살펴보면 오히려 그렇지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식당 주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주방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가 정말 나쁜 사람이 주방에 있는 물건이나 냉장고에 있는 것을 훔쳐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골 손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는 챙겨주지 않고 새로 온 손님만 챙겨주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주인 입장에서 본다면,
단골손님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방에 있는 냉장고을 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 것이지만, 새로 온 손님의 경우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도 하라고 하고, 청소도 하라고 하고, 회계도 하라고
하고, 교회에 따라서는 주방에서 요리도 하라고 하고, 아이들 가르치기도 하라고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귀찮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저……제가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제가 회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전도를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만약에 새신자, 정말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새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예, 그러세요. 오늘부터 교회 회계를
맡아주시고, 전도도 해주시고, 아이들도 가르쳐주세요. 그러겠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한테 어떻게 교회
재정을 맡길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제 처음 나와서 예수님도 잘 모르고 성경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전도를 맡겨요? 주일학교 교사를
맡겨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새신자분들이 오시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야 하고, 새신자분은
그와 같은 도움을 감사히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지나면 이런저런 일들을 이제 자기가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하지만 이는 귀찮게 생각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만큼
교회에서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물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을 꼽겠습니까. 은행 통장? 금고 열쇠?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물건들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렇죠. 웬만하면
그런 것들은 다름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시겠습니만, 꼭 맡겨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면, 그럴 때는 분명히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맡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신뢰를 받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콕 찍어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감사를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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