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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회 살아난다는 것
2021년 7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절~4절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節~4節
"1.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恵みが増し加わるために、私たちは罪にとどまるべきでしょうか。
2.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罪に対して死んだ私たちが、どうしてなおも罪のうちに生きていられるでしょうか。
3.それとも、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バプテスマを受けた私たちはみな、そ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を受けたのではありませんか。
4.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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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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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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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0번째 시간으로서 “살아난다는 것” よみがえ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제 로마서 6장을 살펴볼 시간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총 4구절입니다만, 이를 역시 앞 두 구절과 뒤 두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앞 두 구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절~2절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恵みが増し加わるために、私たちは罪にとどまるべきでしょうか。
2.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罪に対して死んだ私たちが、どうしてなおも罪のうちに生きていられるでしょうか。

이 말씀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까지 살펴본 로마서 3장 20절 말씀으로 돌아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억지로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율법이 없으면 무엇이 죄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율법이 있게 되면 비로소 무엇이 죄이고 또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제 율법에 비추어 보니까 나 자신이 이 죄로 범벅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양이나 염소 등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양과 염소를 죽여서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라고 하는 행위는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있게 됩니다. 짐승으로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나를 대신해서 이 짐승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게 죄가 없었더라면 이 짐승들은 죽지 않아도 되는데,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불로 태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얼마나 가슴 아파해야 하겠습니까.


반면에 기쁨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양이나 염소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내 죄가 해결되었어요. 이제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내 죄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줄을 깨닫습니다. 아, 나는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그럭저럭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알고 보니 나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심으로 인해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내 죄는 모두 해결되었어요.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크나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1절~43절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ある金貸しから、二人の人が金を借りていた。一人は五百デナリ、もう一人は五十デナリ。
彼らは返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金貸しは二人とも借金を帳消しにしてやった。それでは、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金貸しをより多く愛す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か。」
シモンが「より多くを帳消しにしてもらったほうだと思います」と答えると、イエスは「あなたの判断は正しい」と言われた。

한 사람은 많은 빚을 졌고 한 사람은 적은 빚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준 사람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면제 시켜줬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감사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많은 돈을 면제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겠지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5장 2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律法が入って来たのは、違反が増し加わるためでした。しかし、罪の増し加わるところに、恵みも満ちあふれました。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있고, 또 누구는 죄를 조금 지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모두 사함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죄를 많이 지었던 사람과 죄를 조금 지었던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감사함을 느낄 것인가 하면, 이는 죄를 많이 지었던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는, 어? 그래? 그럼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친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죄를 그럼 좀 더 지어도 되겠네?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로마서 6장 1절~2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6장 1절~2절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恵みが増し加わるために、私たちは罪にとどまるべきでしょうか。
2.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罪に対して死んだ私たちが、どうしてなおも罪のうちに生きていられるでしょうか。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우리가 죄 안에 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이미 죽었는데 어찌 또다시 죄 안에서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죄 안에서 죽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19절~2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20절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しかし私は、神に生きるために、律法によって律法に死にました。私は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ました。
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今私が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いのち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御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のです。

여기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율법에 규정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죽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예수님께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잘못 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잘못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이제 그 많은 빚들이 면제되었으니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어요?

예, 세상적으로 본다면 은행 빚이 없어졌으니까 다시 좀 융자를 얻을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믿음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11절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た方は、「殺してはならない」とも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姦淫しなくても人殺しをすれば、あなたは律法の違反者になっているのです。

신학자들은 율법 개수를 618개로 분류를 합니다. 이 중에서 617가지를 지켰다 하더라도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다면 율법 모두를 안 지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에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3절~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3절~4절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それとも、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バプテスマを受けた私たちはみな、そ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を受けたのではありませんか。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여기서 세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실제로 물로 받는 세례나 침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머리에 물을 살짝 붓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물 안에 풍덩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본래 세례라고 합니다. 뭐, 그렇다고 나는 침례를 받았으니까 세례 받은 사람보다 더 축복을 많이 받았다거나, 아니면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침례를 받은 사람보다 축복을 덜 받았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인 것이지요.

이처럼 물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냐 하면, 물속으로 풍덩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 죽게 되지요? 그래서 다시 올라옵니다. 이것은 바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도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도 나사로를 비롯해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장면을 볼 수 있고, 베드로와 바울도 그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활은 그와 같이 이 땅에서 잠깐 죽었다가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 가운데 죽고 난 다음에 우리도 장차 새로운 생명을 얻어 주님의 영광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제 나중에 은혜 가운데에서 살아날 것이니까, 그 때까지는 죄 안에서 살아도 된다?

이미 2절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2절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2.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罪に対して死んだ私たちが、どうしてなおも罪のうちに生きていられるでしょうか。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죄 가운데에서 죽었다면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에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에서 죽고 은혜 가운데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살아나야 하겠습니까. 1년 뒤요? 10년 뒤쯤이요?

세상에는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오늘은 일단 먹자’라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그럼, ‘살아나는 것은 내일부터. 오늘은 일단 죄를 짓자’라고 해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죄 안에서 죽고, 지금 당장,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아나겠습니까. 살아나기 위한 1차 조건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아나게 되지, 펄떡펄떡 살아 있으면서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육신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적으로 죄 가운데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것이 죽는 것이고,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고서,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예전에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죄 안에서 죽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대요.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9절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私はすべて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すべてを失いましたが、それらはちりあくただと考えています。それは、私がキリストを得て、
キリストにある者と認めら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私は律法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のです。

우리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님을 위해서 이처럼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거의 빠짐없이 들었던 말씀이, 술을 끊어라, 담배를 끊어라 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술은 물론이요, 담배도 대단히 즐기고 있었던 저로서는 이런 말씀을 몇 번 들어도 은혜가 별로 안 되었습니다.

술이야 안 마시면 된다고 쳐요. 그런데 담배를 피워 보셨던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오랜 세월 동안 피워 오다가 끊는다는 것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은 사람들을 보면 내가 금연 몇 년 째다 라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뭐, 예수님을 믿으면 담배를 끊어야 한다. 담배를 끊을 수 있게 자기가 안수를 했더니 응답을 받아서 그 사람이 끊게 되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글쎄요. 당시 저는 그와 같은 말씀에 별로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 단순히 내가 담배를 끊기 힘 들어서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 담배를 끊어야 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었어요.

뭐, 그래요.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담배라는 것이 없었고, 그래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담배를 끊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이는 구절도 있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가 몸에도 안 좋고, 그리고 담배를 안 피우게 된 다음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담배를 태우시는 분들한테서 그렇게 심한 냄새가 나는 것인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피우는 것보다는 안 피우는 것이 더 낫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담배를 안 피우면 믿음 안에서 거룩해지나요? 술을 안 마시면 더욱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나요? 그런데 예전에 교회에서나 제 주변에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끊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거나 하는 사람들, 주변에 누가 있든 담배를 태우고, 담배를 피우면서 여기저기에 침을 뱉고, 피운 다음에는 아무 데나 휙 하고 버리거나 하면서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은 당장 끊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행위들이에요.

하지만 술 담배 안 하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 교회에서 본다면 술 담배를 안 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 생명을 얻기 위해서 진정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그 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야겠지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죄악이란 무엇일까 하고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이미 공부했던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31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彼らは、あらゆる不義と悪とむさぼりと悪意とに満ちた者、ねたみと殺意と争いと欺きと悪だくみとでいっぱいになった者、陰口を言う者、
そしる者、神を憎む者、人を人と思わぬ者、高ぶる者、大言壮語する者、悪事をたくらむ者、親に逆らう者、
わきまえのない者、約束を破る者、情け知らずの者、慈愛のない者です。

다른 구절도 있긴 합니다만, 시간 관계상 이 곳만 보기로 합니다.

이 세 구절만 해도 여기 안에 몇 가지 죄악이 나오는지 아세요? 예, 자그마치 21가지 죄가 나옵니다. 이어서 32절에 보면 이와 같은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죄를 짓지 않으면 되겠네요. 사실 목사로서는 이 21가지 죄에 대해서 매주 하나씩, 21주니까 5개월 이상에 걸쳐서 말씀을 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을 가지고, 여기에 나와 있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문제는 뭐냐 하면, 이 21가지, 외우기에는 너무나도 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십계명도 가물가물한데 언제 21가지를 외워 가지고, 그걸 안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렇게 너무 길고 너무 많다고 하는 것이 좀 우리가 항상 기억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문제는 뭘까요. 자, 제가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21가지 죄악들을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시고, 이 죄악들을 듣고 생각나는 사람을 한 번 머리 속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몇 명이나 떠오르시는지 한 번 세 보세요.

자, 눈을 감으시고 시작해보겠습니다.

1. 올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
2. 추악스러움으로 가득 찬 사람.
3.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
4.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
5. 질투, 시기하는 사람.
6. 사람을 해치는 사람.
7. 분쟁이나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
8. 사람을 속이는 사람.
9. 성격이 참 고약한 사람.
10. 뒤에서 남말을 많이 하는 사람.
11. 서로 헐뜯는 사람,
12.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
13. 건방진 사람.
14. 교만한 사람.
15. 뻑하면 저기 자랑을 늘어늫는 사람.
16. 나쁜 짓만 골라서 하려는 사람.
17. 부모 말씀을 안 듣는 사람.
18.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
19.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사람.
20.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
21. 사랑이 없는 사람

1.不正で満ちている人
2.醜い心で満ちている人
3.欲に満ちている人
4.悪意に満ちている人
5.ねたみやすい人
6.殺意のある人
7.争いを好む人
8.人を欺く人
9.悪だくみをする人
10.陰口をたたく人
11.人を中傷する人
12.神様を憎む人
13.人を侮る人
14.高ぶる人
15.自慢をしたがる人
16.悪事をたくらむ人
17.親に逆らう人
18.浅はかな人
19.不誠実な人
20.情けのない人
21.無慈悲で残忍な人

자, 지금 로마서 1장 29절~31절에 기록된 21가지 죄악을 여러분께 말씀 드렸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몇 명 정도 떠올리셨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 이 21가지를 말씀 드리는 중에서 여러분께서는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떠올리셨습니까.

이 21가지를 말씀 드릴 때마다, 매번 자기 이름 밖에는 떠오르지 않아요? 아, 정말 훌륭하십니다. 주님의 칭찬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자기 이름이 떠오르기는 하나요?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이는 100% 제 짐작입니다만, 한국에 있는 교회나 아니면 전세계에있는 한인교회까지 포함을 해서 반드시 매 주일마다 어느 교회에서는 이 로마서 1장 29절~31절까지를 주제로 해서 설교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게 잘못이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이를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어떤 생각이 들게 되냐 하면, 그래, 맞아, 그래서 이 사람은 잘못 됐어, 저 사람이야말로 회개해야 한다니까. 이러면서 우리 마음 안에는 어느새 자기 자신을 바로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뿌리내리는 경우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이 죄 안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시점에서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요한복음 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しかし、彼らが問い続けるので、イエスは身を起こし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中で罪のない者が、まずこの人に石を投げなさ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한다는 것은, 그 마음 아래에는 어떤 감정이 깔려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옳다는 감정입니다.

백 보 양보를 해서 나도 잘못이 있지만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는 감정이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도 나쁘지만 나도 저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말합니다. 바꾼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정치인들이 아닐까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출마한 후보들은 하나같이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잘못되었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뭐, 정치인들은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기껏 출마를 해서 나를 찍어달라고 하면서, 내가 잘못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이상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들까지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합니다.

남의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세상 탓을 했던 우리가 먼저 우리 스스로의 잘못을 회개하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죄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모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우리는 육신을 따르며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살아나서, 영을 따르며 생명과 평안을 얻고, 새 사람을 입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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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회 살아있다는 것
2021년 6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21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8節~21節
“18.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19.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20.律法が入って来たのは、違反が増し加わるためでした。しかし、罪の増し加わるところに、恵みも満ちあふれました。
21.それは、罪が死によって支配したように、恵みもまた義によって支配し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永遠のいのちに導くため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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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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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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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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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9번째 시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것” 生きてい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3주간에 걸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선물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온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져 주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회복되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려 주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앞서 로마서 5장 12절~14절에 대해서 전해드렸던 것이 5월 30일이었습니다만, 그 때 설교 시간에 로마서 5장 12절부터 5장 마지막인 5장 21절까지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워낙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몇 번에 나누어서 살펴보았던 것이지요.

오늘은 로마서 5장 마지막 시간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로마서 5장 12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갑자기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다면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디만,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오셨다면 큰 문제 없이 이해하실 수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우선 18절~19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19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8.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19.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한 사람에 의한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으나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자, 복습입니다. 이제는 대답하실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인 즉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20절~21절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21절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0.律法が入って来たのは、違反が増し加わるためでした。しかし、罪の増し加わるところに、恵みも満ちあふれました。
21.それは、罪が死によって支配したように、恵みもまた義によって支配し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永遠のいのちに導くためなのです。”

이 말씀은 로마서 5장 13절과 3장 20절 말씀과 뜻을 같이합니다.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죄라고 하는 것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율법이 없어도 괜찮은 데도 굳이 율법을 주셔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 어딘가가 아프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프다고 하는 그 통증을 꼭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몸 어딘가에 통증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고 하는 신호입니다. 지금 몸 어딘가가 잘못되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구조신호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와 같은 통증이 있기 때문에 약을 먹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서 질병이나 상처를 고칠 수가 있는 것이지, 몸에 분명히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없다면 몸 안에 있는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서, 일찍 발견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도 발견이 늦어져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억지로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율법으로 인해서 깨닫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다는 것은 죄가 우리를 지배함으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만, 비단 코로나 바이러스만이 아니지요. 많은 질병을 보면 바이러스가 우리 몸 안에서 왕노릇 함으로 인해서 병이 심해지고, 나아가서는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신과 같이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으면 이제 우리 몸 안에서 백신이나 약이 왕노릇을 해서 병균을 물리쳐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서 왕노릇을 하게 되고 모든 죄를 물리쳐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까지가 18절에서 21절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이미 12절부터 살펴보았으니까 어렵지 않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 이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불순종이라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고, 이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을 주셨다는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순종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선물을 주신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오늘 첫 부분인 로마서 5장 18절, 그리고 마지막인 2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8.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로마서 5장 21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1.それは、罪が死によって支配したように、恵みもまた義によって支配し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永遠のいのちに導くためなのです。”

여기서 공통된 말씀은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우리로 하여금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아니면 안 살아 계십니까. 아니, 그렇다고 지금 육적으로 살아 계신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신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십니까.

예,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질문을 드리면 대부분 ‘아멘’이라고 대답하시겠지요. 본인이 ‘아멘’이라고 대답하신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자신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은 믿음 안에서 죽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내 몸 안에 이상이 있는데도 통증이 없는 것과 같이 나중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일 심각한 결과가 무엇이겠어요. 나는 교회도 오래 다녔고 직분도 받았고 분명히 구원 받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이것만큼 심각한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 일본 아사이신문에 연재되는 천성인어라는 칼럼이 있는데 2013년 5월 26일에 실린 천성인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나이를 드신 분들 중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교회 내에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믿음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 옛날에는 믿음 안에서 살아있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믿음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


우리는 항상 믿음 안에서 깨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옛날에는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사람, 아니면 지금까지 한 번도 믿음 안에서 깨어 살아본 적이 없었다면, 이제 오늘부터 깨어나서 믿음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이 죽었는지 여부는 심장이 뛰고 있는지, 호흡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 동공이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기본입니다만, 그렇다면 영적으로 살아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인형 중에서 눈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은 세 가지 인형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가 있는 일본 토치기 현 닛코 토쇼구에 가면 유명한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눈을 막고, 하나는 귀를 막고, 또 하나는 입을 막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유래를 찾아보면 다양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공자가 쓴 논어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영어에도 이봐 유사한 격언이 있으며, 또한 인도의 인권운동가였던 마하트마 간디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디서 누가 먼저 이 이야기를 했건 간에, 이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 또한 믿음 안에서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이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 4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신앙이 없는 이방인들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로 자기들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신앙심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인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신앙이 있기는커녕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 안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 후반부~7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 후반부~7절
3.……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しかし、彼らの行いをまね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す。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와 같이 교만에 가득 찬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아, 주님 저는 맹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고백하였다면 죄가 없었겠으나, 분명히 믿음 안에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볼 수 있다고 말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봅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신명기 1장 33절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主はあなたがたが宿営する場所を探すために、道中あなたがたの先に立って行き、夜は火の中、昼は雲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が行くべき道を示されるのだ。」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무조건 뛰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푯대를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낭떠러지를 향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옆에서는 큰 소리로 멈추라고 합니다. 핸들을 꺾으라고 소리칩니다. 살아서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면 곧바로 핸들을 돌리거나 멈추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달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그야말로 듣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구는 기도를 하면 주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누구는 꿈속에서 주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금식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몇 시간쯤 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잠을 얼마나 주무시면 꿈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며칠이나 밥을 굶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그렇죠.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몇 시간쯤 기도하면 주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잠을 얼마 동안 자면 꿈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며칠쯤 금식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까. 안 나와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좋습니다. 꿈을 꾸거나 금식을 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꿈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성경말씀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그렇다면 어디서 구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무조건 기도하고 굶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해야 할 곳이 어디 입니까. 이는 다른 곳이 아니에요.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구하고, 성경 말씀 중에서 찾아야 하고, 성경 말씀을 두드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법률이 있습니다. 이건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회에서 많은 법률들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떠한 법률이든 간에 그 나라의 헌법정신에서 빗나가면 안 됩니다. 아무리 강력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에서, 일본에서는 최고재판소에서 그 법률이 헌법과 맞지 않는다. 위헌이다 하는 판결이 내려지면 그 순간 그 법률은 무효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목사님들, 훌륭한 신학교 교수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책방에 가면 훌륭한 기독교 서적들이 많습니다. 많은 설교들도 있고, 많은 해석들, 많은 간증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교수님이나 아무리 큰 교회 목사님이나, 아니면 하물며 꿈 속에서 선명하게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빗나간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여러분, 사탄도 그냥 천사가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탄이 내 꿈속에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귀는 반드시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향해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가할 내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꿈속에서 하나님을 봤다, 예수님을 봤다 하더라도, 거기서 들은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다면 이는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잡아넣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4장 19절~21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しかし、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た。「神に聞き従うよりも、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御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そこで彼らは、二人をさらに脅したうえで釈放した。それは、皆の者がこの出来事のゆえに神をあがめていたので、人々の手前、二人を罰する術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면, 믿음 안에서 살아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할 주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행함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있는 책 이름이 무엇입니까.

볼 견자를 써서, 사도견전입니까. 들을 문자를 써서 사도문전입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이 행함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대로 행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렇다고 발벗고 전도를 다니는 것만이 행함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변하는 것도 훌륭한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 놓고도, 어디서 주워들은 말만 늘고, 그 사람 자체는 전혀 안 바뀌는 사람, 오히려 안 좋게 바뀌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어 간다면, 이것 또한 놀라운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보고 들은 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행함을 통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기쁨에 찬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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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회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
2021년 6월 20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7절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7節
“17.もし一人の違反により、一人によって死が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のなら、なおさらのこと、恵みと義の賜物をあふれるばかり受けている人たちは、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いのちにあって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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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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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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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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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8번째 시간으로서 지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 賜物を受けた者の義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복습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서 이 세상 모든 것, 땅을 정복하고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지배하라,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무엇으로 세운 것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 땅의 주민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의 지배자 즉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왕위를 얻기 위해서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이 왕위를 차지하기에 걸맞는 그 무엇인가를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옛날 봉건시대 때를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왕의 아들, 특별히 정실의 첫째 아들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왕의 후계자, 세자로 임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자기가 왕의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했나요? 첫째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했나요?

아니요. 그가 한 노력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없습니다. 첫째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서 무슨 공부를 한 것도 아니요, 시험을 본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는 자신의 노력 없이 왕의 첫 아들로 태어난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 그러니까 자기의 노력 없이 왕의 후계자, 세자로 책봉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들을 지으시고,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이 세상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이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 왕이라고 하는 자리를 내가 물려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 일도 안하고 방에 틀어박혀서 왕관을 쓰고 거울만 보면서 와, 멋지네……그러고만 있어도 됩니까.

아닙니다. 이러면 안되지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왕으로서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권한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권한은 빼앗기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에덴에서 왕노릇을 한 적이 있었나요?

창세기에 기록을 보십시오. 맨 처음에 아담을 보시면 그가 했던 왕노릇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の土で、あらゆる野の獣とあらゆる空の鳥を形造って、人のところに連れて来られた。人がそれを何と呼ぶかをご覧になるためであった。人がそれを呼ぶと、何であれ、それがその生き物の名となった。

참으로 놀라운 권한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권리, 즉 명명권이라고 하는 권리는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명명권은 원칙적으로 부모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생물을 만드시고는, 부모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리인 명명권을 아담에게 행사하도록 하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셨던 권한마저도 아담에게 주셨다고 하는 놀라운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어떻습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부부는 한 몸입니다. 아담에게 이와 같은 권한이 있었다면 이와 같은 권한은 하와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와도 아담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면서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한 번 회사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느 회사에 사장님과 부장님과 부하직원이 있습니다.

부장님은 편의상 홍씨라고 합시다. 회장님이 홍 부장한테 말씀하십니다.

“이봐 홍 부장, 내가 자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을 주겠네. 자, 여기 내가 가지고 있는 도장이야. 이것도 내가 줄게.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부하직원들도 잘 관리하고 이 회사를 잘 운영해보게.”

그러면서 사장님은 말을 잇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무엇을 해도 다 좋지만, 다만 저기 저 땅, 저 자그마한 땅만은 절대로 팔지 말게. 만약에 저 자그마한 땅을 팔았다가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사장님이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부하직원이 홍 부장한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장님, 저기 자그마한 땅, 팔면 어떠세요?” 그러니까 홍 부장이 하는 말이, “아니야. 저건 사장님이 팔지 말라고 했어.”

그러자 이 부하직원이 말합니다. 아이구 부장님도 참 순진하시지. 저건 지금 팔아야 돼요. 그래야 제값을 받는다니까요. 저걸 팔면요. 홍 부장님이 이제 사장님으로 승진하실 수가 있다고요. 사장님이 왜 저 땅을 부장님더러 팔지 말라는 줄 아세요? 부장님이 자기를 밀어내고 사장님이 되실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런 거라니까요?

만약에 이랬다면 홍 부장님은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이봐. 네가 뭔데 지금 사장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나더러 하라는 거야?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당장 나가! 모가지야! 뭐, 이래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홍 부장님, 그 땅을 보니까 어때요? 예, 정말 부하직원이 한 말처럼 그걸 팔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사장님이 팔지 말라고 한 건 알고 있는데, 저걸 팔면 정말 내가 사장님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예, 사장님이 물려주신 도장을 가지고 그 자그마한 땅을 낼름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사장님이 그 사실을 모를 것 같으십니까. 아니요, 알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사장님은 분명히 홍 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권한을 넘겨주시는 대신에 저 자그마한 땅만은 팔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어겼어요.

사장님은 그 땅이 아까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을 팔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명령을 했기 때문에 안 팔았다면, 그것만으로 내 명령을 순종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팔아버렸어요. 이는 용납할 수가 없지요. 당장 홍 부장은 그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회사를 쫓겨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홍 부장,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홍 부장이 해야할 일은 사장님의 말씀을 따라서 회사를 운영하고, 그리고 부하직원들을 지휘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하직원의 말을 듣고 사장님을 배신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세상 짐승들을 다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다스려야 하는 짐승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버린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선물을 발길로 걷어차버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사랑으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주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면 어찌 그 선물이 자기 것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그 선물은 빼앗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시면 가인과 아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4장 1절~5절까지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4장 1절~5절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人は、その妻エバを知った。彼女は身ごもってカインを産み、「私は、主によって一人の男子を得た」と言った。
彼女はまた、その弟アベルを産んだ。アベルは羊を飼う者となり、カインは大地を耕す者となった。
しばらく時が過ぎて、カインは大地の実りを主へ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来た。
アベルもまた、自分の羊の初子の中から、肥えたものを持って来た。主はアベルとそのささげ物に目を留められた。
しかし、カインとそのささげ物には目を留められなかった。それでカインは激しく怒り、顔を伏せた。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녀였습니다. 가인은 형이었고 아벨은 동생이었지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아벨에게 시기를 느낍니다. 분노를 느낍니다. 증오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장 6절~7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主はカイン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怒っているのか。なぜ顔を伏せているのか。
もしあなたが良いことをしているのなら、受け入れられる。しかし、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죄를 지으려는 가인에게 황급히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러나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7절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もし一人の違反により、一人によって死が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のなら、なおさらのこと、恵みと義の賜物をあふれるばかり受けている人たちは、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いのちにあって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바로 ‘왕노릇’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왕노릇’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것’ ‘통치하는 것’,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 세상을 모두 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노릇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왕노릇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는 말에 넘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처럼 철저하게 버림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왕노릇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왕노릇을 해야 하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아니면 우리 이웃들에게, 이봐. 이것 가져와, 저것 가져와. 이거 해, 저거 해. 왜냐고? 나 이제부터 왕노릇 하기로 했어…….

이게 올바른 일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으로 세워 주셨지만, 그렇다고 우리 이웃의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무엇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벨을 다스리라고 하셨나요? 아담과 하와를 다스리라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왕노릇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서 왕노릇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왕노릇 하여야 하겠습니까.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23절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우리 속에서 탐욕이 끓어오릅니까. 증오나 교만 같은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더럽게 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왕노릇 하여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넘어가기 전의 모습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절~5절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뱀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나타난 마귀의 이 말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시점에서 하와가 왕노릇을 제대로 했다면 어떻게 말했어야 했습니까.

“야, 뱀! 너 입 닥쳐! 저리 꺼져!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죄에 대한 진정한 왕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와는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나와야 했는데,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그들은 이와 같은 말에 왕노릇 한 것이 아니라, 귀가 솔깃해서 결국 죄악에 빠져버리고는 왕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축복을 빼앗겨버리고 에덴 바깥으로 쫓겨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 권한을 빼앗겨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해서 왕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내 눈이 죄에 의해 가려져서 내 죄악이 마치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지고 마는 것입니다.

目に慕わしく、また賢くしてくれそうに見えてしまうのです。

우리는 죄에 대해서 왕노릇 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병에 대해서도 왕노릇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왕노릇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찔림(刺され)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에게 허물(背き)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상함(砕かれた)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에게 죄악(咎)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허물(背き), 우리의 죄악(咎)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懲らしめ)를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문제들 때문에 고통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질병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아 주시고 채찍에 맞아 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왕노릇 할 수 있고, 이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질병들에 대해서도 왕노릇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탐욕이 너를 원하나 너는 탐욕을 다스릴지니라.”
“교만이 너를 원하나 너는 교만을 다스릴지니라.”
“질병이 너를 원하나 너는 질병을 다스릴지니라.”
“이 세상 문제들이 너를 원하나 너는 이 세상 문제들을 다스릴지니라.”

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더럽히는 죄악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들을 향해 왕노릇을 하면서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질병과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왕노릇을 하면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로 말미암아, 질병이 치료 받고 크나큰 평화를 누리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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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회 선물의 능력
2021년 6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6절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6節
“16.また賜物は、一人の人が罪を犯した結果とは違います。さばきの場合は、一つの違反から不義に定められましたが、恵みの場合は、多くの違反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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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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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7번째 시간으로서 “선물의 능력” 賜物の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6절입니다.

로마서 5장 16절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6. また賜物は、一人の人が罪を犯した結果とは違います。さばきの場合は、一つの違反から不義に定められましたが、恵みの場合は、多くの違反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자, 먼저 복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렇죠. 천국에 들어갈 권리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자세히 보면 솔직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본문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의 한글 번역, 더 구체적으로는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 번역이 좀 걸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부분이 좀 마음에 걸리냐 하면, 마지막 부분입니다.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이 부분이 개역한글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이게 이해가 되시나요? 이걸 문자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은사는 많은 범죄라고 하는 것 때문에 의롭다 하심에 이른다? 그럼 은사에는 많은 범죄가 없다면 의롭다 하심에 이르지 못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인데, 그럼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범죄를 지어야 한다? 뭐, 이런 황당한 생각까지를 하게 됩니다.

당연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를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 번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5장 16절
“또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많은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개역개정 성경에서 보면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은사는 많은 범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에 이른다, 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인해서 많은 범죄들이 의롭다 하심에 이른다, 그러니까 많은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즉 선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에 이른다, 라는 뜻이라고 이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부분이 해결되면 이제 문제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다면 이는 <심판>(さばき)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재판입니다. 재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 있는 경우에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해서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가만히만 있으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강가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면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런데 내가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럴 경우에는 가만히 있었으니까 죄가 없어요? 아니에요. 그 때는 자기가 뛰어들어서 구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위에 도움을 청한다든가, 주변에 튜브나 끄나풀 같은 것이 있으면 던져 준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119에 전화를 건다거나, 아무튼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무슨 행동을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두 사람에 대한 행동에 의한 심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담이요 또 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잊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복습이라는 의미로 15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그리고 빌립보서 2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로마서 5장 15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셔서 하신 행동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6절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6. また賜物は、一人の人が罪を犯した結果とは違います。さばきの場合は、一つの違反から不義に定められましたが、恵みの場合は、多くの違反が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서 이 재판에 대한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정죄이고 또 하나는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不義に定められる、義と認められる

정죄라고 하는 것은 유죄판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불순종이라는 행동으로 인해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손인 우리 모두다 유죄판결을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회복시켜 주셨으며, 이 순종의 회복이라는 은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나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통한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로 인해서 우리의 유죄판결은 완전히 사라지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선물의 능력인 것입니다.

범죄한 한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까지 죄인이 되었다면, 순종을 회복해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모든 것을 예수님은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간혹 보면 예수님을 알게 모르게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께 예수님은 누구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성경을 좀 읽으신 분이시라면 마태복음 16장 16절을 떠올리실 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シモン・ペテロが答えた。「あなたは生ける神の子キリストです。」

익투스, 물고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소박한 의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셔서 우리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

어떤 목사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태양으로 비유를 하시는데, 성부 하나님은 태양의 본체이다. 하지만 죄가 많은 우리는 너무나 눈이 부시기 때문에 태양 본체를 직접 바라볼 수가 없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빛이다 빛은 태양 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성령님은 열이다. 열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다.

그래서 태양 본체와 빛과 열이 합쳐져서 태양 전체를 이루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하나로 합친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설명, 비유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문제 하나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과일음료를 평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컵이 세 개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께서는 세 잔에 든 음료를 합해서 과즙 100프로 주스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각각 그 잔에는 몇 프로 과즙이 든 음료가 들어있어야 할까요?

조금 더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 잔에 각각 과즙 30%짜리 음료가 들어있어요. 이 음료를 큰 컵에 담았습니다. 그러면 과즙 몇 프로짜리 음료가 되나요? 1번 30%, 2번 30 곱하기 3 해서 90%.

만약에 과즙 30%짜리 음료 3잔을 섞었을 때 90%가 된다고 한다면, 33.33%짜리 음료를 세 잔 섞으면 과즙 100%짜리 음료를 만들 수 있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즙 30프로짜리 음료는 3잔 섞으나 100잔 섞으나 결국은 30%짜리 음료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3잔을 섞어서 100프로짜리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 몇 프로 짜리 음료를 섞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3잔을 섞든 100잔을 섞든, 결과적으로 합쳐진 음료가 100% 과즙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음료가 100%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라도 100%가 안 되는 음료가 있었다면 그것을 섞는 순간 합쳐진 전체 음료가 100% 밑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태양과 빛과 열을 보았을 때 어떻습니까. 태양은 그렇다고 치고, 빛은 태양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요. 빛이 태양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태양의 일부이지요. 그러면 열은 어떻습니까. 열도 태양의 일부이긴 합니다만, 열이 태양 자체는 아닙니다. 열도 어디까지나 태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각각 태양과 빛과 열로 구분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의 말하자면 부속품 정도로밖에 안식하지 못하는 해석입니다. 성부하나님이 100% 하나님이시면 예수님은 그럼 50% 하나님이고 성령님은 30%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무슨 예수님이 하신 일은 미완성이다. 예수님이 하신 구원 사역은 도중에 끝났다. 그러니까 뭐래요? 예수님이 못 다 이룬 일을 자기가 마저 하려고 왔다, 이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립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합하면 100프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세요.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 몇 프로 하나님이십니까.
성자 하나님은 몇 프로 하나님이십니까.
성령 하나님은 몇 프로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성부 하나님도 100프로 하나님이시요, 성자 하나님도 100프로 하나님이시요, 성령 하나님도 100프로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100프로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순종의 회복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아아, 내가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아아, 내가 좀 더 할 일이 남았는데?”

아닙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垂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그렇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50프로 하나님이셨다면, 예수님은 50프로 밖에 못 이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50프로 하나님이시라면 50프로짜리 구원 밖에는 주시지 못합니다. 50프로짜리 구원이 구원인가요?

예를 들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절반까지 밖에 못했어요. 그럼 그걸 끝까지 해냈다고 할 수 있나요?

어떤 요리를 만드는데 절반까지 밖에 못했어요. 그러면 그 요리를 먹을 수가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예요. 50프로짜리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몇 프로 하나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100프로 하나님이십니다. 100프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몇 프로 이루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00프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의 회복, 첫 사람이 이루지 못한 순종을 예수님께서 100프로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면 몇 프로의 죄가 사해집니까. 그렇습니다. 100프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확률이 몇 프로입니까. 그렇습니다. 100프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죄함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회복되어 100프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주 되시고, 100프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100프로 이루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우리에게 100프로 능력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92회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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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회 선물의 의미
2021년 6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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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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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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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6번째 시간으로서 “선물의 의미” 賜物の意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래 로마서 5장 15절~17절까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 세 번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5절~17절까지의 세 구절을 보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각각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15절은 선물의 의미, 16절은 선물의 능력, 그리고 17절은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15절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명을 어긴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축복,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크나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던 축복은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즉 선악과를 먹어버린 죄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엄마가 아이들한테, 냉장고 안에 있는 케익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엄마 말을 어기고 아이들이 몰래 먹어버렸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화를 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아이들을 심한 말로 혼냈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에서 영원히 내쫓았다고 해보세요. 이게 정상이에요? 요즘 같았으면 뉴스에 날 정도로 너무나 심한 처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대한 내용은 한낱 냉장고 안에 든 케익 정도로 끝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 선악과가 아까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은 단순히 거기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세상에 사는 주민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크나큰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세계를 지배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영토를 지배했던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라 하더라도 결국 전세계의 일부만 지배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왕권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과 3장 3절에 의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 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에덴 어디에 있든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저 절벽 위나 높은 산 꼭대기에 있어서 도무지 먹으려고 해 봤자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안 먹었다고 해도, 이는 잘한 것이 없지요. 어기고 싶어도 어길 수가 없었는데 이를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안 먹었어요. 안 어겼어요. 왜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었어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바로 <순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권리와 의무를 주셨습니다. 권리라고 하는 것은 행사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지만, 투표를 안 한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는 권리이지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땅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것은 권리이지요. 일부 나라에서는 출산 제한을 두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고 하면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낳고 기를 수도 있는 반면에, 그렇다면 아이를 안 낳으면 벌을 받나요?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출산이나 양육이라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닌 권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권리를 누리기 위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여기에는 처벌이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납세, 세금을 내는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남자의 경우를 본다면 병역의무가 있지요. 세금을 내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병역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권리가 아닌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에도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느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고 에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어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의무,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저버렸습니다.

제가 방금 의무에 대해서 납세나 병역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이것과 선악과를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형벌 때문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하물며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어긴 그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전에 결혼하고 자녀를 둔 분들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했대요. 그런데 아이를 갖고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 하셨는지를 알 것만 같다는 거예요.

자기는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것 만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음. 그래요. 뭐, 좋은 말씀처럼 들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이 몇을 길러봤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두고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지요?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은혜, 가늠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이 몇을 두었다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예수님의 은혜는, 분명 큰 은혜이긴 합니다만 한량없는 은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납세나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군대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까지 시키지는 않지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죽음, 사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지난 주에 공부 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은혜가 어느 정도로 큰 은혜인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 재판을 보면 이른바 양형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재판을 하는 판사마다 특정 형벌에 대해서 내리는 판결이 큰 차이가 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략적으로 이 정도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형벌을 내리도록 하자 하는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좀 무서운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범죄에 있어서 대표적인 흉악범죄라고 할 수 있는 살인에 대한 규정은, 법조문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는 사형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각 사안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이 양형기준으로 볼 때 사형이 확정되는 경우에는 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3인 이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5명 있었어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뭐, 꼭 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또 유독 남녀평등에 대해서 예민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굳이 말씀 드린다면 뭐 5자매라도 괜찮습니다. 남매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편의상 오늘은 그냥 아들 5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첫째 아들이 제일 우수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그리고 졸업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도 제일 잘 벌어옵니다. 그리고 제일 못난 것이 막내였습니다. 이 놈은 공부는 고사하고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을 했습니다만,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아요. 어쩌다 취직 했나 하면 금방 때려치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부모님 말도 듣지도 않아요. 맨날 부모님 속만 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다섯 형제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막내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섯째 막내가 둘째, 셋째, 넷째 형들을 모두 살해해버렸어요. 이게 보통 일입니까. 자식이 다섯 명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아들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양형기준에 의한다 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사형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자신의 세 아들이 죽었는데, 그런데 그들을 죽인 것이 또한 자기 아들이에요.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아들은 사형에 처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부릅니다. 평소에 제일 우수하고 착했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그 첫째 아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긴히 부탁할 말이 있다. 저 못난 다섯째 아들이 이처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아서 이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나는 그 못난 막내 아들을 살리고 싶구나. 그래서 말인데, 예, 첫째야, 네가 막내아들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겠냐.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런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첫째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버지, 막내놈은 지금 사람을 셋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데 그 죽인 사람 셋이 모두 아버지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놈을 살리기 위해서 저더러 대신 죽으라고요? 아버지, 지금 제정신입니까.

이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첫째 아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무거운 죄를 짓고, 그것도 그 죄로 인해서 아버지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준 그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 제가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첫째 아들, 그리고 막내아들이 누구겠습니까.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첫째 아들은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그 흉악한 죄,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막내아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이 은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아이 몇 키워봤다고 알 수가 있어요? 아니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못난 막내아들, 그것도 모자라서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한 죄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에 대한 죄,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첫째 아들을 죽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늘 나라에서 이를 투표에 붙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다 소집합니다. 막내아들이 죽어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여야만 한다.

죄 많은 막내아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죄 많은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죽일 것인가.

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뻔하겠지요. 하나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죄 많은 막내아들 저 백성들을 모두 심판 하셔야 마땅한데 어찌 첫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확고 하셨습니다. 죄 많은 백성들, 나에게 그토록 많은 죄를 저지른 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의 복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 한량없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 놀랍고도 크나큰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본래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에서는 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이른바 양태론적 단일신론, 또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경을 왜곡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함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같다는 뜻이니까,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진정한 삼위일체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세요.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니까 말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양태론의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한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 기도는 예수님이 자기한테 드리는 기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 양태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에는 반드시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는 불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하는 입장과 불순종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아버지 하나님은 순종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냐 하면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회복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양태론에 의하면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사라지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을 관철하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상징입니다. 순종의 회복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 인하여, 이제부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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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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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회 죄의 무게
2021년 5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2節~14節
“12.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13.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14.けれども死は、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には罪を犯さなかった人々さえも、支配しました。アダムは来たるべき方のひな型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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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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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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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5번째 시간으로서 “죄의 무게” 罪の重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14절까지로 하였습니다만, 사실 12절부터 시작하는 말씀은 5장 끝부분인 21절까지 이어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2절부터 21절까지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량이 많고 하기 때문에,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 중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을 중에 보면 영생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요한복음 10장 28절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わたしは彼らに永遠のいのちを与えます。彼らは永遠に、決して滅びることがなく、また、だれも彼らをわたしの手から奪い去りはし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영생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영원히 살게 된다면 좋으십니까. 100년 200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 동안 영원히 살게 된다면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들으셨을 때,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지겨운데 천년 만년이나 살아서 뭘 해……

만약에 이처럼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서 지겹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는 성경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어서 기운도 없고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그러는데 오래 살아 봤자 뭘 하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뻤던 때를 꼽으라면 언제가 가장 기쁘셨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에이, 그럴 리가 없지요. 금방 생각이 안 난다 하더라도 잘 생각해보시면 분명히 기뻤을 때, 즐거웠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런 기쁜 감정이나 즐거운 감정을 생각해내기가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힘들거나 슬프거나 했을 때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2014년 벨기에에 있는 루벤대학의 두 교수가 감정의 지속시간에 대해서 연구를 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기쁨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어 봤자 35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반면에 증오는 어느 정도 지속되냐 하면 60시간이나 지속되고,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은 무려 120시간이나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머리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도 슬픔이나 괴로움이 더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에 인생은 괴롭다고 생각되실 지 모르지만, 실제로 하나하나 따지고 본다면 안 좋은 일 못지 않게 좋았던 일, 기뻤던 일, 즐거웠던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돈이나 건강 같은 이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안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기쁜 감정이라 하더라도 길어 봤자 이틀도 못 간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날에는, 지금까지 기뻤던 그 기억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좀 영생에 대한 기대가 생기셨나요? 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겠습니다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사실은 이제 알았습니다.

자, 다음으로 우리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새신자나 아니면 아직 믿음이 없는 분들이 여러분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죽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왜 이와 같이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허허어. 그냥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믿어라?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곧바로 명확한 답을 하실 수 이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성경말씀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문제를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사람은 어떠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까. 본래부터 어느 정도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존재로 만들어졌나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여러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벌칙이 없습니다. 명령에 있어서의 중요성, 말하자면 여러 명령이 있을 경우 어느 명령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벌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법도 그렇잖아요? A라고 하는 죄를 지으면 벌금인데, B라는 죄를 지으면 무기징역이에요. 이럴 경우에는 A라는 명령보다 B라는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 중에서 벌칙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일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이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벌금도 아니고 징역도 아니고 사형,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게 되지요.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하와가 따먹고 이를 아담에게 주어서 아담도 맛있게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하나님께서는 그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고 말았던 그들에게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렇죠. 하나님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기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리고 죄로 인해서 죽음이 비로소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죄악을 해결하고 또다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총론입니다. 12절부터 21절까지의 개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세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⑫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자,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해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 들어온 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가리키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아담과 하와 중에서 누가 더 나쁩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 먹은 사람이 누구에요? 예, 하와지요. 그렇다면 하와가 제일 나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와이프가 준다고 해서 그걸 낼름 받아먹어버린 아담은 그 다음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적어도 이 로마서 5장에서 하와 이야기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누가 나오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14절에 보면 ‘아담’이 나옵니다. 음? 혹시 잘못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까봐 14절에 보면 ‘아담’이라고 하는 이름이 몇 번 나와요? 예,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 참 억울하지 않습니까. 직접 따먹은 것은 하와이고, 아담은 하와가 주는 것을 먹었을 뿐인데, 왜 아담만 나쁘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싫다면서 안 먹을 수 있어요? 죽을라고 환장했습니까? 뭐, 이러면서 아담을 두둔하면서, 이와 함께 남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를 합니다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벌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사람들이 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저희 상황을 본다면 저는 지금 종교자격으로 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아내는 종교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몸을 이루는 부부이기 때문에 똑같이 체류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고, 기간도 똑같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하와가 먹었는데 아담이 안 먹었다면 또 모를까, 둘이 함께 사이 좋게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면, 이는 50보 100보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통틀어서 ‘한 사람’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서 이제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자손들까지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는 도대체 어떤 성분이 들어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라고 하는 열매에는 어떤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마약과도 같은 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것을 먹으니까 정신이 확 간 것처럼 느껴진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소박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이 로마서 5장 13절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그런 거죠. 지금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인 둘이 함께 한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무슨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남녀가 자전거를 함께 타면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일본에서는 이제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어요.

이를 보면 어떻습니까. 똑같이 둘이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인데, 이를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험하니까 금지한다는 법이 생기니까, 이제 그 다음부터는 이를 어기면 경찰의 단속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을 때에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담도 알고 하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는 죄를 죄로 여기게 되어서 이를 어기게 되면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벌,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また、人に言われた。「あなたが妻の声に聞き従い、食べてはならないとわたしが命じておいた木から食べたので、大地は、あなたのゆえにのろわれる。あなたは一生の間、苦しんでそこから食を得ることになる。
大地は、あなたに対して茨とあざみを生えさせ、あなたは野の草を食べる。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이 말씀, 창세기 2장 16절과 비교해볼까요?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자아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하겠습니다만, 기본적인 문제가 의식주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먹는 문제요? 없었습니다. 지천에 널려 있는 먹을 거리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에이, 과일들만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과일을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어떤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 식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의, 옷 문제는 어떨까요?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そのとき、人とその妻はふたりとも裸であったが、恥ずかしいとは思わなかった。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옷에 대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こうして、ふたりの目は開かれ、自分たちが裸であることを知った。そこで彼らは、いちじくの葉をつづり合わせて、自分たちのために腰の覆いを作った。

죄를 짓기 전에는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옷이 없이 벌거벗은 채로 지내면 여기 긁히고 저기 찔리고, 그리고 온갖 벌레들한테 물리고 그럴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인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덴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찔리는 일도 없고 긁히는 일도 없습니다. 벌레한테도 물리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뭇잎으로라도 옷을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 ‘주’, 사는 곳은요?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에덴이라고 하면, 무슨 나무 숲 속 정글 같고, 그런 데에서 대충 누워 자면서 살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위생적으로도 불결하고, 정말 여러가지로 참 불편했겠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은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지으신 최고의 낙원입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본다면 최상의 편의시설이나 문화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환상적인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 곳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아담과 하와는 그와 같은 정말 하와이나 오키나와, 안 가봤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환상적인 휴양지에 있는 특급리조트호텔 부럽지 않은 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으나, 결국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마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큽니까. 그들에게는 이세상 최고의 의식주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토록 허락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의식주의 문제가 최고에서 최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게 고생을 해야 합니다. 입을 옷과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고생을 해야만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아담과 하와만의 문제라고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4절

“⑭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⑭けれども死は、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には罪を犯さなかった人々さえも、支配しました。アダムは来たるべき方のひな型です。”

모세라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인 사람들을 모두 포함해서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죄의 대가,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죄의 대가인 사망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아무리 우겨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죄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갈 분만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말미암아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고 있던 죄의 무게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배워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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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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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회 말씀과 즐거움
2021년 5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1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9節~11節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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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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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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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과 즐거움” みことばと喜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9절과 10절의 구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0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여기서 9절과 10절을 각각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구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그리고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도 똑같이 구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그리고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이렇게 구분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각 앞부분은 앞부분 끼리, 뒷부분은 뒷부분 끼리 비교해보면 됩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리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을 죽이고 그 피와 함께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그리고 11절~14절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이와 같이 구약 때 드려졌던 제사는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그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으로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5절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성경에 보면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들짐승한테 물려 죽은 것들은 부정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 짐승을 죽이고는 태워야 할 텐데, 내가 잡은 짐승이든, 병에 걸리거나 늙어서 죽은 짐승이든, 다른 짐승들한테 물려서 죽은 짐승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피의 의미>가 있습니다.


조금 무서운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이해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가급적 안 무섭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냥 대충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칼로 해체를 해서 피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를 흘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린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축을 기르고 있는데 아침에 보니까 가축 한 마리가 전날 밤에 병에 걸려서인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럼 그것을 하나님 제단에 바치려고 칼로 해체를 해보아도 이미 굳어서 피는 많이 안 나옵니다. 이는 하물며 다른 맹수들의 공격을 받아서 이미 찢겨진 상태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칼로 해체를 했을 때 피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이는 건강한 제물을 일부러 해쳤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전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한 희생>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알아서 죽은 짐승을 하나님께 바쳐도, 나에게는 그 일로 인해서 손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죽은 짐승을 바치는데,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손해가 날 것이 없지요.


하지만 건강하고 흠 없고, 재산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을 굳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잡는다면, 이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손해가 발생합니다. 이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어디 그런 온전한 제물만 바치겠습니까. 예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만, 어느 나라인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지 않아서 아직도 그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지폐가 좀 더러워지거나 하면 은행에서 바꾸어주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는 지폐가 지저분해지면 화폐가치가 없어진대요. 그게 전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아무튼 그런 나라가 있대요. 그런데 그 나라에 있는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교회 헌금 시간에 보니까 온통 그런 쓸모가 없는 지폐만 넣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헌금함이 무슨 휴지통이에요? 그 사람들이 바친 지폐는, 물론 현금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미 화폐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것이 과거에 화폐였다 하더라도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것을 아무리 많이 바쳐 봤자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희생 제물이에요? 아니에요. 이것은 온전한 희생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2장 22절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盲目のもの、折れたところのあるもの、傷のあるもの、あるいは、うみの出るもの、湿疹のあるもの、かさぶたのあるもの、あなたがたはこれらのものを、主に献げてはならない。また、これらのものを主への食物のささげ物として祭壇の上に献げてはならない。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예, 분명히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습니다. 흠 없는 온전한 제물이 아니라, 흠 투성이인 제물을 바쳐요.

이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쁨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온전한 제사를 안 드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냐 하면,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있는 말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1장 7절~8절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祭壇に汚れたパンを献げていながら、『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があなたを汚しましたか』と言う。『主の食卓は蔑まれてもよい』とあなたがたは思っている。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땠겠습니까. 온전한 제물은 커녕 완전히 흠 투성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마치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식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야, 그걸 지금 하나님인 나한테 바친다고? 그걸 네 직장 상사한테 갖다줘봐라. 병들고 찢기고 흠 투성이인 고기를 가져다주면 직장 상사가,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받겠냐 하는 것이지요.


직장 상사한테도 갖다주지 못할 못쓸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하나님은 엄히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바쳐질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온몸의 피를 남김없이 흘려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한 온전한 희생제물로 삼아 주셨고,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흘려 주신 피라고 하는 사실을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한 번 9절과 10절 앞부분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

이를 합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희생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이는 과거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9절과 10절의 뒷부분을 비교해봅니다.

9절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9절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즉 하나님이 무섭게 화를 내시는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절 뒷부분은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라 이제 화목하게 된 자로서, 예수님의 살아나심, 즉 부활 생명을 통해서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면 과거일까요, 현재일까요, 아니면 미래일까요.

둘 모두 구원 받은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분명 미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리를 하자면, 9절과 10절 모두가 이런 구도입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되어 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제 과거와 미래는 됐어요. 그럼 뭐가 빠졌죠? 예, 현재가 빠졌습니다.

좋아요. 과거에 예수님께서 온전한 희생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장차 우리에게는 영광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믿고 지금은 역시 힘들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건가요? 고생을 죽어라고 해야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며, 바로 다음 구절 11절입니다.


로마서 5장 11절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틀림없이 구원받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래요? 죽어라고 고생을 하래요? 아닙니다. 즐거워하라고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즐거워할까요.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억지로라도 아이고, 즐거워요. 아이고 즐거워요……그러라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에 있어서 점검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보통 믿음이 좋은 분들이, 무슨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면 어디로 갑니까. 예, 기도원에 갑니다.

거기서 기도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예배가 있는 곳에서는 목사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저도 몇 번 가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나 금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것이지요.

자, 질문을 한 번 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미래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이는 대단히 명확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말씀과 기도를 본다면 어느 쪽이 중요하겠습니까. 이는 비교가 안 됩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경말씀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가끔 보면 불로불로불로……. 주여! 하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면, 아~ 온몸 뜨거워졌다고 해요.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당연하죠. 운동했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서 몸을 흔들었는데 안 뜨거워졌겠어요?

그리고 제 경험상으로 본다면 기도원에 올라갈 때에 성경책은 꼭 가지고는 가는데, 그게 기도원에서는 성경을 깊이 읽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또 보통 기도원에 가면 금식도 하고 그러는데, 며칠 지나면 말이죠, 배도 고파지고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을 읽으려고 해봐도 머리에 안 들어와요.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성경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 어디에요? 예, 도서관 같은 곳, 얼마나 좋습니까. 책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도서관 만한 곳이 없습니다. 거기는 완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에서, 아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나 좀 도서관에 갔다올래……도서관에 가서 성경책 좀 읽고 올래……이런 분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적어도 제 주변에 그런 분들은 없어요.


기도를 열심히 드리면 마음에 평안이 온 것 같습니까. 주님이 느껴지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냥 한 때의 기분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응답을 받았다, 성령 충만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있는다면, 또다시 작은 시험이 닥치면 그런 확신은 모래바람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란이 닥쳐와서 힘들고 어려운데도, 정신 승리로 즐거워요, 즐거워요 하고, 억지로 웃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과거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미래의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그 많은 인물들이 어려움에 겪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이러실 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그걸 누가 모르나요. 다 알지요.

그럼 다 아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사역을 시작해서 백발이 되신 목사님들도, 여전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마음을 알려고 하는데, 성경 몇 번 읽었다고 이제 다 알아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힘써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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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회 희망적인 소망
2021년 5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8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5節~8節
“5.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6.実にキリストは、私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敬虔な者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
7.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8.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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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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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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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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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희망적인 소망” 希望的希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앞의 한 구절과 뒤의 세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앞의 한 구절인 5장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여기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이처럼 번역한 책은 영어 성경 중에 보면, KJV라고 하는 킹제임스 성경이 있는데, 그 외에는 영어나 일본어를 보면 대부분의 번역서가 이를 ‘실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한글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을 보면 모두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저는 더 와닿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왠지 조금 더 핵심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어떤 유치원 정도의 어린아이한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고 생각 하시겠어요? 그 아이의 꿈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뭐, “어~ 그래? 멋진 꿈이네”하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나이 40이나 50이 된 아저씨한테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만 그 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면요.

글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아, 그러시냐고…하면서 속으로는, 어디 좀 아픈 분이 아닐까, 아니면 요즘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신가, 좀 쉬어야 되지 않을까……등등 상당히 걱정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어른이 그런 꿈을 갖는다면 이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꿈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실망’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 슈퍼맨이 되고 싶었는데, 점점 커가니까 어때요? 예, 아, 나는 슈퍼맨이 될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이 느껴지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시나요?

예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는 신학과를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4년제인 학부 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대요.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목사님의 믿음이 있었는데, 2학년이 되면 장로님 믿음, 3학년이 되면 집사님 믿음, 4학년이 되니까 평신도 믿음이 되더니 나중에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졸업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이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사실 신학을 했다고 해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이 좋다고 할 수 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 부끄럽게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극단적으로는 그런 것이겠지요. 나 정말 하나님 잘 믿으면 천국에 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 잘 믿으면 구원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런데 생을 마감하고 봤더니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었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이 부끄러울 것이요, 자신의 신앙생활이 절망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아, 내가 교회에 속았어. 성경에 속았어. 그리고 홍 목사한테 속았어……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어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대로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 5절 후반에 보시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채워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쉬어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6절~8절입니다. 이 6절~8절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인 5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절망적인 소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진정한 소망, 희망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5장 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6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6.実にキリストは、私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敬虔な者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

6절에 보시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기약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은 어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바에 따라 완전하게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일이 구약에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약 성경이 이사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11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イザヤ書53章4節~11節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虐げとさばきによって、彼は取り去られた。彼の時代の者で、だれが思ったことか。彼が私の民の背きのゆえに打たれ、生ける者の地から絶たれたのだと。
彼の墓は、悪者どもとともに、富む者とともに、その死の時に設けられた。彼は不法を働かず、その口に欺きはなかったが。
しかし、彼を砕いて病を負わせることは主のみこころであった。彼が自分のいのちを代償のささげ物とするなら、末長く子孫を見ることができ、主のみこころは彼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る。
「彼は自分のたましいの激しい苦しみのあとを見て、満足する。わたしの正しいしもべは、その知識によって多くの人を義とし、彼らの咎を負う。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아는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그 본질까지도 정확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적은 신약성경에 처음 나온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글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대부분이 기원전 690년 경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690년 전에 이미 기록된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720년 전에 예언된 말씀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오신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실수로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오시고,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기약대로 오신 것은 좋은데, 오셔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7.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8.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 세상에 아무리 의인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그 훌륭한 사람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이 말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을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람을 살려주겠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선뜻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기가 쉬운가요? 아니요.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에요.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죽게 되었어요. 죽게 된 이유요? 누명을 쓴 것도 아니에요.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게 되었어요. 정말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그 죄 많고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무참하게 죽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아니요 안 됩니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요. 밑지는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셨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께서 돈이 많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아니, 물론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이 거래하는 은행에 가면 그 은행 지점장이 직접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줄 정도로 아주 부자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그런 여러분이 좀 착한 일을 해야지 생각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똑같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학생의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하겠습니까.

1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2번 공부는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고 있는 학생.

이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학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기껏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한다면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을 지원해주지, 아무리 여러분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맨날 학교도 안 가고 공부도 안 하고 그런 학생한테 학비를 지원해주고 싶겠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은 부자도 아니고 오히려 가난해요. 하지만 그런데도 그런 학생,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맨날 문제만 일으키는 학생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팔고 땅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가면서 학비를 대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그 학생 부모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그 학생이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그 학생을 위해서, 자기 자식을 위해서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기다가 밤낮없이 일을 하고서는 학비도 보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지금도 학교에 보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개인이나 단체가 그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못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지원해준다는 것은,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훌륭한 사람들이나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 즉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의 증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구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 교주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 자신들이 가장 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입는 옷이나 먹는 것이나 사는 집이나, 자기가 누리는 것은 항상 최고의 것이에요. 그리고 반면에 그 신도들은 어때요? 예, 가난합니다. 자기 재산들을 다 바치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어쩌면 제자들은 흥분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 물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쁨도 컸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으니까, 이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겠구나! 그러면 이제 나도 벼슬을 얻을 수 있겠구나. 아무리 못해도 장관 자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기대를 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야,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너희들이 해. 그러고 어떻게 하셨어요? 예, 하늘 위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이는 전설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이 본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다음에 40일 동안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고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정말 이 땅에서 여느 사이비 교주처럼 부귀 영화를 누리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것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시고, 하물며 그 귀한 피를 모두 흘리시고, 그 생명 마저도 우리에게 주시고 아무런 미련 없이 하늘로 올라 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이비 교주들은 그런 소망이 없으니까, 나중에 지옥에 가든 말든, 신도들이 가난에 괴로워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 신도들한테서 돈을 쥐어 짜서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제자들에게 다 맡긴 채로, 나 몰라라 하고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께서는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성령님이 안 오신다. 내가 올라가야지만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많은 분석을 합니다만, 성경에는 왜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무조건 믿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이른바 성령강림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놀라운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극히 일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일부 선지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었냐 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시간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셨던 3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멀리 이스라엘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때라도 간절히 주님 만나기를 구한다면 성령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요? 여기서 바로 로마서 5장 5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 우리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까지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망적인 소망, 부끄러운 소망이 아니라 희망적인 소망, 가장 확실한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아서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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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회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2021년 5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4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1節~4節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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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2번째 시간으로서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主との平和を持っている者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김을 받았고, 그리고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를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자,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오늘 본문 1절~4절의 말씀은 앞 두 구절과 뒤 두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2절입니다.


로마서 5장 1절~2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복습을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에이, 저는 그냥 천국에 안 가도 돼요. 그냥 교회 다니는 게 좋고, 성경 읽는 게 좋고, 예수님 믿는 게 좋아요.

여러분, 이게 겸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재수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결석하는 일도 없이 매일같이 부지런히 나와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하루는 그 재수학원 선생님이 그 학생한테, 자네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에이, 저는 대학에 간다는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수업 듣고 공부하는 게 좋아서 학원 다니는 거예요.

만약에 그 학생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여러분께서는 겸손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학생은 학원이 아니라 다른 원에 먼저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그러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어요? 이는 마치 열심히 병원에 다니고 치료 받고 약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주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돈이요? 시간이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금은보화가 아니라 이 세상 천하만물이라 하더라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토록 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죄 많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요? 이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3절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을 보니까 작년 2020년 9월에는 평당 7천만원을 넘는다고 하더니만, 올해 1월에 보니까 이제 평당 1억이 넘고 2억 가까이 되는 곳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1평이 3.3제곱미터니까 1제곱미터로 환산해보면 평당 2억이라고 한다면, 1제곱미터는 대략 6000만원 정도라고 하겠지요.

사실 이게 상당히 비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비싼 곳도 있어요. 서울 명동의 경우를 보면 1제곱미터 당 2억650만원이라고 해요. 평으로 고치면 2억원이라고 해도 곱하기 3.3이면 평당 6억 6천만원입니다. 강남 아파트값의 3배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일본은 어떤가 하면 동경 긴자에 보면 15년 연속으로 땅값 1위를 한 곳이 있습니다. 긴자 4쵸메에 있는 야마노 악기 긴자 본점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코로나 때문에 가격이 하락 했대요. 그 가격이 얼마냐 하면 1제곱미터당 5360만엔이라고 합니다. 단순계산으로 원을 10배라고 한다면 제곱미터당 5억3천만원이 넘는다는 것이지요. 평당 가격으로 한다면 5억3천만원 곱하기 3.3을 하면, 긴자 4초메에 있는 여기 땅값은 평당 17억 4천 9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긴자에 있는 땅값이 평당 17억 4천 900만원. 강남 아파트가 평당 2억. 이렇게 생각하면 강남 아파트가 상당히 저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마찬가지이냐 하면, 평당 1억을 하든 10억을 하든 간에, 우리 같은 서민들이 당장 주머니에서 척 하고 돈을 내서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비해주시는 곳이 그런 강남이나 긴자에 있는 땅값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가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가 거할 집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곳의 평당 가격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척 비싸겠지요. 하지만 전혀 감이 안 잡히나요? 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격은 바로 예수님의 핏값이요 예수님의 생명의 값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할 곳이 하나님 나라에 예비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에게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로마서 5장 1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5장 1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로 되어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는 그야말로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인해서 이제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지간이 아니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장차 우리의 생을 마친 뒤에 크나큰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인가요?

굳이 이름을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유명한 신학자입니다만, 이 분의 책을 제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분의 책을 접하게 되어서 잠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책 내용은, 말하자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인데, 여기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이 구절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현세에 있어서의 가난함은, 내세에 있어서의 풍요로움으로 보답 받는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첫 페이지였는데, 여기까지 읽고 책을 닫아버렸습니다. 물론 더 읽어가면 좋은 말씀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책을 보면 배울 점도 많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읽고 제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일본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잠시 미국에 오셨는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았긴 했습니다만, 일본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일본 교회 사정을 잘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는데, 이 목사님이 일본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제게 말씀해주시기를, 이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닌데요. 봉사도 열심히 하신데요. 그런데 그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교인들이 지쳐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이 목사님 개인적인 소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 교회를 섬겨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본 신학자의 글을 읽는 순간, 그 원인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워낙 유명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마도 일본 목회자라면 대부분이 이 분의 책을 읽지 않았나 합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면 큰 기쁨이 있고 큰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가기 전에는 그저 고생만 해야 되고 고난만 당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야만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축복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에서는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일본 기독교인이 지쳐있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까 재수학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대학에 들어가면 큰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나, 지금부터 몇 년 동안, 몇 십년 동안 재수생활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기쁨이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도 재수생활을 해봤습니다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재수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이고 고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すると、ペテロが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自分のもの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だれでも、神の国のために、家、妻、兄弟、両親、子どもを捨てた者は、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만, 꼭 자기 집이나 가족을 버려야지만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 그것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에 대한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받을 축복이 꼭 죽은 다음에 받는다고 하시나요?

마지막 누가복음 18장 3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0절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면서 받을 축복도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영혼은 잘 됩니다. 나중에 우리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도 우리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2절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슬픔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기쁨의 발걸음입니다. 좌절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은혜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절망의 발걸음이 아니라 소망의 발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이미 우리가 서 있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제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분은 이러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어떻게 사람이 마냥 기뻐만 하고 즐거워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요즘 같은 코로나 상황을 보시면 정말 답답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참 너무 하시지.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그런 마음이 왜 안 생기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이 밀려올 때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3절~4절까지 말씀입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목적입니다. 이 3절~4절 중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3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나오고 4절에서는 ‘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환난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 나는 환난이 너무 즐거워, 고생이 너무 즐거워,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드려야 되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이를 단순하게 말씀 드리자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목적’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면 환난에 대해서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소망 뿐인가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죽도록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토록 원하던 후사를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적게 잡아 25년 이상이나 후사를 원했던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구원해주신다. 나를 기억해주신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눈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내 눈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난이 다가와도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인내의 연단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큰 소망을 갖도록 하시는 것이 환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누가 아는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실 때, 아, 이 환난은 나로 하여금 인내를 하게 하시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바라보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구나, 라는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누가 압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을 했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들을 수없이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이것이 없다, 저것이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자기들이 만든 우상을 섬깁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닌리를 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꿈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신 이유가, 그들의 말처럼 광야에서 그들을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환난 가운데에서 죽이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셨고, 이 세상 천하만물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진 자가 아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로서, 어떠한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서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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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회 믿음의 축복
2021년 5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25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23節~25節
“23.しかし、「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と書かれたのは、ただ彼のためだけでなく、
24.私たちのためでもあります。すなわち、私たちの主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を信じる私たちも、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
25.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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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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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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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축복” 信仰の祝福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주의 말씀을 잠시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후사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적게 잡아 75세때부터 시작해서 99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포기를 해도 벌써 포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향 땅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섰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허탈 하기만 합니다.

그래. 내가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들었나 보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라도 갈대아 우르나, 아니면 하란 땅으로 돌아가자. 남은 여생을 마누라 고생이나 덜 시키고 우리끼리 편안하게 살아보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안 해 보았을까요? 아니요. 저는 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제 짐작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사람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행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수 백 년 동안이나 타향에서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부모도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도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갔습니다.

노예란 자기 인생이 없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가치는 주인이 결정합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로서 평생 동안 살다가 그리고 주인의 소유물로서 죽어가는 인생이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죄인이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고, 정말 평생 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감옥에서 죽어야 할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된다는 일은,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남의 나라 땅인 애굽에서 평생 동안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수가 몇 명이라고요?

민수기 1장 45절~4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1장 45절~46절
“45.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一族ごとに登録された二十歳以上のイスラエルの子らで、イスラエルで戦に出ることができる者すべて、
登録された者の総数は、六十万三千五百五十人であった。

당시에는 인구 수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인구 수를 세는 데에 있어서,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미성년자나 여성이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던 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성만 세었을 때 60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레위 지파가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었는데, 레위 지파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고 성막을 관리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임무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미성년자도 제외하고, 그리고 레위지파도 제외한 수가 60만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숫자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았더니 당시 애굽을 탈출한 총 인구 수는 대략 200만명 가량 이었을 것으로 예상을 합니다.


노예 한 사람이 그 집안을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지금도 교도소에서 누군가가 탈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에서보면 멋있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실제 상황이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에 비상이 걸리고 경찰 군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수색작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 명도 아니고 200만명이에요. 무슨 작은 시설도 아니고 당시 최고 선진국, 최강의 군대를 소유했던 국가인 애굽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탈출 좀 했다 싶었더니, 눈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일인데 뒤에서는 그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울만한 무기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끝이다. 여기서 다 죽는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었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길을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럼으로 인해서 200만명에 달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힘도 없고 무기도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심으로 인해서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홍해를 건넜으며, 반면에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서 갈라진 홍해 사이로 들어가 추격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길을 막으심으로 인해서 모든 군대가 홍해 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수 십 년에 걸쳐서 본 게 아닙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고 직접 체험했습니다.

정말 이와 같은 것만으로도 평생 동안, 아니, 자손 대대로 전해주면서 하나님을 찬양해도 부족하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실까요?

출애굽기 14장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1장 4절~6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彼らのうちに混じって来ていた者たちは激しい欲望にかられ、イスラエルの子らは再び大声で泣いて、言った。「ああ、肉が食べたい。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그들은 참으로 가지가지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주셨는데, 그들을 정말로 광야에서 죽이기 위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들이 애굽에서 고기나 생선들을 값없이 배불리 먹어요? 그게 자기 것입니까? 아니에요. 노예에게 있어서는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신고 있는 신발도 주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인 것을 몰래 훔쳐먹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 주셨는데, 그들은 과거에 종살이를 하면서 주인 몰래 훔쳐먹었던 것을 그리워 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불평 불만은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상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끌어내신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축복의 땅을 주시기 위해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불평을 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하나님께서는 점령해라. 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함께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신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다 죽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제 그 때까지 참고 참았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2절~23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わたしの栄光と、わたしがエジプトとこの荒野で行ったしるしとを見ながら、十度もこのようにわたしを試み、わたしの声に聞き従わなか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
わたしが彼らの父祖たちに誓った地を見ることはない。わたしを侮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それを見ることはない。


민수기 14장 27절~30절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몇 년 전도 아닌 불과 며칠 전에 애굽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광야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그래도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리고 뭐 어째?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었겠다고? 그래 좋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한테 행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시 성인들은 대부분이 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하시면서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 땅에서 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40년 후, 불평불만을 일삼았던 광야 1세대들은 다 죽어버리고, 이제 광야 2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 가나안 땅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면서도, 평화로워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서 경고를 하십니다. 그러지 말고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회개를 안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고난이 다가옵니다. 갑자기 외부 세력들이 침략을 해서는 그들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합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지도자를 세워서 외세를 물리치게 하시고는 구원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끝인가요? 아니에요. 평화가 찾아오면 그들은 또다시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모세도 알았습니다. 출애굽도 알았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알았습니다. 광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야말로 헌신짝 버리듯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그는 모세도 몰랐습니다. 출애굽도 몰랐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몰랐습니다. 광야도 몰랐습니다. 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25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3.しかし、「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と書かれたのは、ただ彼のためだけでなく、
24.私たちのためでもあります。すなわち、私たちの主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を信じる私たちも、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
25.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여러분,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는 성경을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편지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전설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야합니까? 역사나 문학이나 편지나 환상이 부족해요?

누구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유사 같은 건국신화도 있고, 내가 지금 조선시대 왕인 태정태세문단세도 헷갈리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전설이나 역사들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같은 전설로 끝나고 역사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에서 끝나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겨진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창세기에만 보더라도 노아의 홍수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출애굽기에 보더라도 애굽 군대나 애굽 사람들이 죽임을 다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셨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나 하나를 살려 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심판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 영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까지 희생시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희생을 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어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적힌 글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아보았으나, 이를 읽고도 그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내가 받은 축복이고, 이스라엘 자손들 받은 축복이 내 축복이요,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이 내 축복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1장 1절~2절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むしろ、あなたがたの咎が、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神との仕切りとなり、あなたがたの罪が御顔を隠させ、聞いてくださらないようにしたのだ。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다른 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손 하나 까딱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무엇 하러 하나님께서 행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늘과 땅보다도 더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와의 사이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어졌을 때에는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도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딱 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된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흔들림 없이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축복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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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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