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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회 율법과 구원 (2)
2021년 9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節~4節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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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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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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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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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0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구원(2)” 律法と救い(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지난 주의 복습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점은 이후의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지금부터 두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 이는 지난 주의 내용을 들으셨다면 전혀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다음으로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첫번째 질문.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근거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로마서 7장 4절 전반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율법이 우리를 체포해서 끌고 가서는 심판대 앞에 세우고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잡아 갈 수도, 심판대 앞에 세울 수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율법 앞에서 죽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어서 율법에 의해 정죄 받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이미 살펴본 부분입니다만, 우리는 이 부분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율법과 구원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각각 무엇이 어떤 비유인지를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는,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남편과 여인이 있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편의 법으로 매인 바 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남녀불평등이다 남존여비다 그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된 것 자체가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아무리 문명국이라 하더라도 과거에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더구나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시대적인 배경도 함께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보면, 여인이 남편과 결혼을 했었다고 한다면 그 남편의 법에 따라야 했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에게로 갔다면, 이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음녀, 죄인이 되고 맙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夫のある女と寝ている男が見つかった場合は、その女と寝ていた男もその女も、二人と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여인은 그 남편의 법에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남자, 물론 여기서는 그 남자도 배우자가 없어야 하겠지요. 아무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서 다시 혼인을 한다는 것은 음녀가 아니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단어를 정리하자면,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먼저 남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신앙입니다. 여인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법은 율법을 말합니다. 다른 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신앙이고, 마지막 음녀라는 것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당연하게도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오직 완전한 신앙은 유대교 뿐이었지요. 그래서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율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イエスが、彼らの律法学者たちのようにではなく、権威ある者として教えられたからである。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그들의 해석이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들으니까 정말로 새로워요. 기존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했던 말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의 해석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율법 해석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말하자면 왜곡된 율법해석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당시 종교지도자이자 기득권자였던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면 안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 하고 여러 규정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은 안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어기면 엄하게 꾸짖거나 벌을 내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율법은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서 율법이 나를 언제든지 잡아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율법을 안 지키고 다른 것을 지킨다는 것은 마치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에게로 가는 것과도 같은 음녀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사형판결을 받아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 법이 우리를 심판할 수 없듯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남편이 죽어서 남편의 영향권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율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가죽 부대는 말하자면 동물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거기에 음료를 담기도 했었는데, 이 가죽 주머니가 새로 만들었을 때에는 두껍고 탄탄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께는 얇아지고 강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한편 포도주를 새로 담그게 되면 아직 숙성이 덜 되었기 때문에 발효되는 힘이 너무나 강해서 이를 오래된 가죽 주머니에 넣게 되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 담근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래된 포도주는 무엇이고 새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오래된 포도주는 율법적인 가르침,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이요,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죽 부대는 우리의 신앙, 우리들의 믿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새로운 가죽 부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약 시대 때 율법을 지켰을 당시의 낡은 가죽 부대에 집어넣게 된다면, 이는 잠시 동안은 올바른 신앙생활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모순에 빠져서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것이냐 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예를 들어서 먹는 것의 문제나 할례에 대한 논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가르침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가르침도 좋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버릴 수가 있느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율법대로 할례도 받아야지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나에게로 오면 내가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1차적으로는 그 엄격하고 어려운 율법을 지키느라고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율법을 무시해도 되니까?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율법에 정해진 형벌에 대해서는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너희들은 자유함을 얻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에도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넘치고 있는 것들이 뭐냐 하면 자기들만의 율법입니다. 특히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만의 율법 해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개였습니다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이를 2134개까지 늘려 놓았습니다.

교회에 본다 하더라도 여러 규칙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 운용에 있어서는 이에 필요한 규칙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에도 없는, 또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여러분께서는 무엇이 우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생각하기에 당연히 하나님 사랑이 우선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단히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 전체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우리 이웃과의 화해를 비교한다면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예배를 드리다가도 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면, 우선 이웃과 화목한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율법이라는 것을 드리 대면서 이웃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 터뜨려버리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일요일에 일을 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거나, 아니면 일요일에 출근을 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아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일요일은 반드시 안식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또한 가죽 부대를 터뜨리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이 되면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업을 잠시 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업무상 일요일에 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끔은 교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요, 그리고 도저히 문을 닫을 수 없다면 예배 시간만이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분들이 많은 경우에는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안 지킨다는 등 주일을 안 지킨다는 등 하는 식으로 비난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잘못 알면서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 반드시 쉬어야 한다고 한다면, 업무에 따라서는 일요일날 당직을 서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은 모든 것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 당직도 거절해야 하는 것인가요?

지금 한국이나 일본이나 코로나 때문에 의료진 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도 밤낮없이 쉬지 못하고 일에 쫓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도, 아, 나는 주일을 지켜야 하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그러면서 일을 안 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365일 24시간 운영을 해야 하는 편의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잖아요? 아니면 그 시간에는 다른 알바생한테 맡겨놓고 자기만 주일을 지켜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럼 또 그러실 지도 모르지요. 교회 안 나가는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된다. 뭐 그러시겠습니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도를 해서 같이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해야지, 자기 믿음 생활을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한테 맡겨놓고 나온다면 그게 신앙인으로서 온전한 모습이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순간도 여기저기에서 가죽 부대가 뻥뻥 터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이웃을 비판하고 주님께 슬픔을 안겨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율법에 대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도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 중에서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전히 하나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전한 이웃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율법과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튼튼한 가죽 부대에 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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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회 율법과 구원 (1)
2021년 9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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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節~4節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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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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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9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구원(1)” 律法と救い(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드디어 로마서 7장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이제 이 정도 되면 로마서도 중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를 개론이라고 한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핵심적인 내용에 들어간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7장의 주제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울 것이라고 지루하고 어려울까 봐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처럼 함께 살펴보시면 지루하고 어렵기는커녕 대단히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살펴볼 7장, 사실 이 7장을 오늘은 어디서 어디까지로 잘라서 살펴볼까 망설였습니다만, 맛이 있는 과일은 어디를 잘라서 먹든 맛이 있는 것처럼 이 로마서도 어디서 잘라도 역시 참 놀랍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1절~4절까지로 했습니다만, 이 1절~4절만 보더라도 그야말로 문장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읽었을 로마서 7장 내용인데, 다시 한번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야, 이 바울 선생님은 정말 참 글을 잘 쓴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약에 바울 선생님이 강단에서 이 말씀을 하셨더라면, 정말로 옳은 말씀이라면서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사도 바울은 지금 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와 같은 개념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이는 당시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법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부관참시라고 해서 죽은 사람까지도 무덤에서 꺼내서 다시 벌을 주는 끔찍한 제도가 있었습니다만, 당연하게도 현재에는 그와 같은 제도는 없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웬만한 나라들을 보더라도,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벌을 내릴 수 있는 대상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죄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려내서 징역살이를 시킬 수가 있어요, 벌금을 먹일 수가 있어요. 하물며 옛날처럼 죽은 사람을 다시 끌어내서 벌을 주어요? 그건 지금 같은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벌을 주기도 하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해당되는 일이지, 사림이 죽고 난 다음에는 법이라고 하는 올무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무슨 예를 들었냐 하면 바울은 결혼제도를 가지고 말을 이어갑니다. 그것이 2절과 3절입니다.

먼저 2절입니다.

로마서 7장 2절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이른바 간음에 관해서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10.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쉽게 말해서 결혼을 하고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바람을 피웠다면 남녀 모두는 죽이라고 율법에는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참 무섭지요? 이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가까이 했다고 하면 죄가 됩니다만, 배우자가 사망했어요. 이런 상태라면 이혼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혼인관계는 종료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었다면 새롭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재혼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3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3절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남편이 살아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 즉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지금으로 본다면 사형에 해당하는 흉악한 범죄인이 됩니다만, 배우자가 죽었다면 이제 혼인이라고 하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음? 왜 갑자기 바울 선생이 결혼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사실 사도 바울은 결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유로 해서 율법과 구원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4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4절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가끔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존경을 한다는 표현을 듣습니다. 존경을 한다는 표현이 나쁜 말은 아니지요. 좋은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 존경을 한다는 말은 왠지 좀 나와 멀리 떨어진 말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서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어요. 어려움을 이겨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그런 분들을 보고 우리는 얼마든지 존경을 할 수 있지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발명품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를 본받아서 제가 이 나이에 이제부터 훈련을 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꼭 내가 그 사람처럼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놀라운 일,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얼마든지 존경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와 별로 관련이 없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그렇다고 예수님은 우리도 자신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온 천하에 예수님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今私が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いのち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御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のです。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렇게 피를 흘리시고, 저렇게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가슴을 쳐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아이고 불쌍하게……쯧쯧쯧……이 아닙니다.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이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후에도 나옵니다만, 예습하는 의미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 쉽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원래……. 자 이 말이 중요합니다. 자, 원래 율법은 지켜야 합니까. 지키지 않아도 됩니까.

예, 율법은 지켜야 합니다. 무엇이 무너져도? 예,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합니다.

사실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 하늘이 무너지면 안 지켜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18절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天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すべてが実現します。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거나 부정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켜야 하겠지요. 그렇죠? 예수님도 이렇게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자,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대로 다음부터 예배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드리고, 남자 아이는 태어나서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하고,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다 지키고, 교회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어 놓고, 매주 양이나 염소를 잡아다가 불로 태워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 지난 주에 배웠던 것을 잠시 복습해볼까 합니다. 지난 주에 돼지고기에 대해서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율법에서는 돼지고기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그러니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제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돼지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김치찌개에 있는 돼지고기도 좋아하고 그리고 수육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레위기 11장 10절
“10.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しかし海でも川でも、すべて水に群がるもの、またはすべて水の中にいる生き物のうち、ひれや鱗のないものは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忌むべきものである。

율법에 말씀하시기를 물속에 사는 것 중에서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세요.

여러분께서는 스시, 생선초밥 중에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많은 분들은 참치나 연어 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스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게 뭐냐 하면, 바로 오징어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물속에 살면서 비늘이 없는 오징어나 문어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 그런 분들 계십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 선지 있잖아요? 사실 그게 동물 피로 만드는 거잖아요?

뭐, 개인 취향에 따라서 안 잡수시는 분들도 계신데, 아니, 안 잡수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는 교회에 다니신다면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에 보면 고기는 먹되 피는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피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 그래서 자기는 안 먹는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창세기 9장 3절~5절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生きて動いているものはみな、あなたがたの食物となる。緑の草と同じように、そのすべてのもの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ただし肉は、そのいのちである血のあるままで食べてはならない。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いのちのためには、あなたがたの血の価を要求する。いかなる獣にも、それを要求する。また人にも、兄弟である者にも、人のいのちを要求する。

신명기 12장 23절~24절
“23.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ただ、血は決して食べてはならない。血はいのちだからである。いのちを肉と一緒に食べてはならない。
血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を地面に水のように注ぎ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

이렇게 정말 피는 먹지 말라고 나와 있어요. 그럼 이제 우리는 피도 먹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피를 먹지 말라고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안 먹는다는 분이? 돼지고기나 오징어나 문어는 맛있게 드세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예,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드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드시기 싫으면 안 드셔도 돼요. 다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 먹는다고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면서 괜히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도 율법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켜야지. 왜 이것은 지키고 저것은 안 지키고 자기 마음대로예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유대 절기를 다 지키고, 할례도 시키고, 짐승들을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리고 그러세요. 하지만 그러다가 경찰서나 소방서에서 신고가 들어와서 문제가 생겨도 저는 모릅니다.

또한 이는 그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지금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고 오징어나 문어도 먹어도 된다고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반율법주의자 반성경주의자인 이단입니까?

아니에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셨을까. 안 지키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셨습니까. 안 지키셨습니까.

정답은, 예. 지키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다.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지키셨다는 증거가 무엇이었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히 철저하게 지키셨다는 증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먼저 기억하셔야 할 점이,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유일하게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아까 말씀드렸던 간음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같은 데에 기록된 율법들을 보면 ‘죽일지니’ 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이를 우리에게 대입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려고 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야, 우리 아버지가 율법에서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했지만, 아니야. 그거 무시해. 그거 안 지켜도 돼……. 라고 하셨겠지요. 그리고 율법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도 율법적으로 죄인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실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의하면 우리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로마서 7장 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4절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예수님은 그냥 혼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닌, 우리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률에도 일사부재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한 가지 범죄에 대해서 판결이 확정되면 다시 그 죄로 인해서 두 번 이상 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우리는 유죄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죽음이라고 하는 형벌이 모두 집행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법이 관여할 수 없듯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로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의 열매, 말씀의 열매, 그리고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믿음이 더욱 성숙해져서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그리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변하고 우리 이웃이 변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 크나큰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율법과 구원의 관계를 공부해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져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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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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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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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회 자유와 해방
2021년 8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23절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9節~23節
“19.あなたがたの肉の弱さのために、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ています。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22.しかし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潔に至る実を得ています。その行き着くところは永遠のいのちです。
23.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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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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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8번째 시간으로서 “자유와 해방” 自由と解放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말씀 제목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유’와 해방’이라고 정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해방. 이는 거의 비슷한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제목을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의에 대한 자유와 죄로부터의 해방’(義についての自由と罪から解放)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의에 대한 자유’라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꽤 좋은 뜻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별로 좋은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는 무슨 말이겠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 보면, 당시는 가족 중에서 저만 한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누가 뭐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진정으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냐 하면, 어느 날 제가 살던 오피스텔 아래층에 살고 있던 학교 후배가 제 방에 놀러 왔었는데, 그 때 방문을 딱 열고 제게 하는 말이, “형, 이사해요”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 이삿짐을 싸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만, 방 꼴이 얼마나 어질러져 있었으면 후배가 제 방을 보고 이사 하느냐 하고 물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한 자유’(義についての自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의롭거나 의롭지 않거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죄로부터의 해방’(罪から解放)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있는 대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죄를 대신 갚는다 하더라도, 이는 불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100프로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묶었던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비로소 죄로부터 해방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차례대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6장 19절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 중에서 주제, 즉 핵심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19절 전반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전반부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19. あなたがたの肉の弱さのために、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ています。

이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이 높으면 좀 어려운 말로 설명을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쉬운 말로 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저도 아직까지 그 기억이 있는데,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닐 때 보면 당시에는 여러가지 좀 풀리지 안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그 찬송가 257장에 보면,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 이 가사를 보고, 아, 교회에는 무슨 ‘사물함’ 같은 상자 같은 뭘 넣어두는 것이 있나 보다. 그럼 그게 우리 교회에는 어디 있나. 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496장에 보면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그 가사를 제가 들었을 때도, 아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면 단을 쌓아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단을 거둬버리면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게 말이 돼?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다 커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들한테 신학의 어려운 개념을 말할 수가 없잖아요. 이는 마치 더하기 빼기 밖에 모르는 학생한테 미분이다 적분이다 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당신들은 아직 못 알아 들을 테니까, 내가 쉬운 말로 설명을 하겠습니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19절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이 말씀은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나왔던 주제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13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로마서 6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が自分自身を奴隷として献げて服従すれば、その服従する相手の奴隷となるのです。つまり、罪の奴隷となって死に至り、あるいは従順の奴隷となって義に至ります。

이와 같은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했던 말을 반복하겠습니까.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가 죄 아래에 있는 것인지, 의의 아래에 있는 것인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각도로 이해를 해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20절~2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구절을 보니, 저는 이른바 돌아온 탕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중에서 시간관계상 11절~24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1.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20.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일단 구체적인 지적은 없습니다만, 글 맥락으로 볼 때 배경은 아마도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나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글쎄,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자기 상속분의 재산을 먼저 나눠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나눠줬더니만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돈을 자기 멋대로 펑펑 썼습니다.

그러자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랬더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곳 경기가 좋다면 돈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제상황이 최악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일자리도 줄어들지요. 더구나 거기는 먼 나라에요. 그는 거기서 외국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건이 같다면 내국인을 뽑지 외국인을 뽑아 주겠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제 마땅히 일자리도 찾을 수 없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배가 고파요. 경기가 어려우니까 아마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달라고 해봤는데 그마저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지경에 이르자 이제 과거가 그리워집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잠잘 곳 걱정 없이 살았는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엄청난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아까 자취생활을 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집에서 살 때에 보면 뻑 하면 밥을 먹으래요. 아니, 아직 밥을 먹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밥 먹을 때라고 해서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배가 안 고프다고 하면, 아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으래요.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내가 무슨 밥 먹는 기계에요? 배도 안 고픈데 밥만 먹게? 뭐 그러면서, 이게 참 어렸을 때에는 얼마나 귀찮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살게 되니까 어때요? 자취 생활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가 해먹으려고도 해봅니다만, 금새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밖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사 먹습니다만, 집에 있을 때에는 맨날 시켜 먹어요. 이제 망설이지 않도록 순서도 아예 정해 놓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가끔은 조금 변화를 준다고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이렇게 되면요 아무리 맛있는 중국집이라 하더라도 정말 거기서 거기, 그 맛이 그 맛이지요. 지금은 모르지만, 당시에는 배달음식이 팅팅 불어서 올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과거에 집에 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제때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도 아내가 차려주면 얼마나 감사가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자, 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이 둘째 아들이야기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 말씀입니다만, 자, 그렇다면 이 둘째아들은 왜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가고 싶어 했을까요. 여기에는 무슨 악의가 있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미워서, 형에게 재산을 빼앗기기 싫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둘째 아들이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에 대해서 못 마땅한 것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30절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しかし、兄は父に答えた。『ご覧ください。長年の間、私はお父さんにお仕えし、あなたの戒めを破ったことは一度もありません。その私には、友だちと楽しむようにと、子やぎ一匹下さったこともありません。
30.それなのに、遊女と一緒にお父さんの財産を食いつぶした息子が帰って来ると、そんな息子のために肥えた子牛を屠られるとは。』

바로 이 말 때문에 우리는 둘째 아들이 정말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닌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인데, 이 말만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합니다.

오늘은 제가 잠깐 이 둘째 아들에 대해서 변호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13절에 의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허랑방탕이라고는(放蕩) 되어 있는데 많은 돈을 소비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본다면 이를 굳이 도덕적으로 안 좋은 곳에만 사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는, 이 형이 말하기를 동생은 부도덕한 생활에 돈을 탕진해버렸다고 말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동생은 먼 나라로 갔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 같은 것도 없는 상황에서, 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서로 자주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먼 나라로 갔던 동생의 사생활에 대해서 형이 얼마나 알고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형이 동생에 대해서 한 말, 그러니까 부도덕한 곳에 돈을 다 써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은, 동생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형의 추측인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나 형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일에 돈을 쏟아 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둘째 아들은 아버지더러 큰 돈, 자신이 상속할 만한 큰 돈을 달라고 해서 떠났을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버지는 자꾸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나도 이제 어른이야. 나도 내 꿈이 있다고. 언제까지 아버지 밑에서 살 수 없잖아.

이렇게 해서 떠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함부로 부모 곁을 떠날 생각 하지 말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얌전히 집에 있어. 이 말씀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제가 둘째아들을 변호한다고 해서 그가 했던 행동이 다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아들이 했던 행동 중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요.

그 부분이 기록되 구절 역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누가복음 15장 13절에 있습니다. 다시 본 구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자, 아시겠습니까.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 어디일까요. 돈을 많이 썼다? 아니, 사실 뭐 젊은 나이에 돈을 들여서 사업을 했는데 실패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잘못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너무 불쌍하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 둘째아들이 잘못한 점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에서 ‘먼 나라에 갔다(遠い国に旅立った)’는 점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돈을 다 써버렸더니, 그 때 마침 흉년이 들어서 오갈 곳이 없어진 둘째 아들이 했던 것이 무슨 일이었다고요?

누가복음 15장 15절~16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그가 갔던 ‘먼 나라’에서 그는 돼지를 치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돼지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짐승들은 뭐 젖이나 털가죽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돼지의 경우에는 이를 기르는 목적은 단 하나, 식용으로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단순히 잡아먹기 위해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떻게 되어 있었냐 하면, 레위기 11장 7절~8절을 봅니다.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7.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8.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돼지고기는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따라서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이 살았던 곳은 어디냐 하면, 그 장소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기는 이스라엘이 아닌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리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서는 살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일본에서 살면 안되겠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살든 일본에서 살든, 하물며 기독교인들만 사는 곳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로부터 먼 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둘째 아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나 형한테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뭐 꼭 부도덕한 데만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본다면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하면서 투자도 하고 사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인 것처럼, 그의 마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 많은 돈을 탕진해버리고,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하는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로마서 20절~21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말씀을 앞서 살펴보았던 둘째 아들 탕자한테 먼저 말해봅니다.

이봐 둘째 아들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은 편의상 제 이름을 넣고 해보겠습니다만, 나중에는 여러분이 여러분 이름을 넣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봐 성필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여러분, 창세기에 보시면 마귀가 하와에게 뭐라고 속삭이면서 유혹을 합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마치 그와 같이 마귀 사탄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서 너의 힘을 의지하고 너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너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너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21절 후반부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22절~23절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2.しかし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潔に至る実を得ています。その行き着くところは永遠のいのちです。
23.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망이 아니라 영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5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わたしにとどまり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の中にとどまります。枝がぶどうの木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はできません。
5.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까.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나뭇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살 수가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야말로 사망, 열매도 맺을 수 없고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앞서 둘째 아들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4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아무리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아버지께로 돌아왔더니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아무리 주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와 같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자 진정한 해방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믿음을 버리고 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서 불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고,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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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회 축복의 무게
2021년 8월 22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7節~18節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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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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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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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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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7번째 시간으로서 “축복의 무게” 祝福の重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바울은 지금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하면 자신이 전해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죄로부터 해방되어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그것만으로도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 누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많이 배워서, 우리가 열심히 연구를 한 결과 예수님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규모가 큰 대학이나 회사에 보면 1년에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을 수 백명 수 천명을 뽑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니까 그냥 대충, 뽑아요? 올해는 수험번호 짝수만 뽑을까? 아니면 홀수만 뽑을까? 그렇게 뽑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대충 뽑는다면 그 학교나 회사는 금방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뽑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모두 알고 난 다음에, 정확하게 그 사람을 꼭 집어서 뽑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냥 대충 부르시거나 대충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정확히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신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꼭 집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놀랍고 놀라운 감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그의 아들은 쌍둥이였는데 큰 아들 이름은 에서이고, 작은 아들은 야곱이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장남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히려 옛날에 비한다면 권리보다 의무가 더 늘어난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나 일본을 보아도 과거에는 장남에 대한 권한이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장남에게는 그 집의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자녀에 대해서도 상속권은 있었습니다만,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장남이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 같은 경우를 본다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간혹 예외도 있었습니다만, 어느 나라나 대부분 장남이 그 왕위를 잇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의 동생은 2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왕위에 오른 형과 그렇지 못한 동생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군신의 관계, 즉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장남으로 태어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나 의학적인 방법으로 남녀 성별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별을 바꿀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형제의 순서인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안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열성적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얻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족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 자신이 꾀를 부려서 장자의 명분을 에서로부터 빼앗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에 보시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この子どもたちは成長した。エサウは巧みな狩人、野の人であったが、ヤコブは穏やかな人で、天幕に住んでいた。
イサクはエサウを愛していた。猟の獲物を好んでいたからである。しかし、リベカはヤコブを愛していた。
さて、ヤコブが煮物を煮ていると、エサウが野から帰って来た。彼は疲れきっていた。
エサウはヤコブに言った。「どうか、その赤いのを、そこの赤い物を食べさせてくれ。疲れきっているのだ。」それで、彼の名はエドムと呼ばれた。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ヤコブが「今すぐ、私に誓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エサウはヤコブに誓った。こうして彼は、自分の長子の権利をヤコブに売った。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사냥을 좋아했던 형 에서가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피로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야곱은 그 길목에서 일부러 죽을 쑤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정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배가 고팠던 기억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이었으니까, 재작년 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때는 그 동안 게을리하던 운동을 좀 다시 해볼까 해서,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자전거 도로를 달렸을 때였는데, 오랜만에 하니까, 그 정도로 운동을 하면 체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 밥을 먹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겠지 하고 나가서 달렸는데, 한 40분쯤 달렸을 때였을까요. 거기서 이제 돌아오는 지점인데, 갑자기 허기가 집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붙잡고 가만히 이렇게 웅크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만 도무지 안 되겠어요. 그래서 폰으로 황급히 편의점을 찾는데, 그럴 때 일수록 멀리 있는 것이 바로 편의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평소라면 자전거로 불과 5분도 안 걸릴 정도의 거리일 텐데, 그 때는 정말로 천리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몇 날 며칠 동안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황급히 들어가서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를 사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시 에서의 기분을 알 것도 같습니다. 허기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마침 어딘가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솔솔 납니다. 그래서 다가가보았더니 자기 동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은 기다린 것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딱 거기서 팥죽을 쑤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에서는 동생한테 당장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동생 야곱이 묘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이 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갖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허를 찌르는 요구였는지도 몰라요.


에서는 말합니다.

바로 밑에 32절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이렇게 해서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을까요. 사실 이 내용을 보면 여기서의 핵심 인물이 야곱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이 대목에서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대목에서 야곱이 중심인물이었다면 마지막 부분인 34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음이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ヤコブは長子の権利を得ることができた。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보면 34절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자녀가 있는데 두 형제라고 해요. 꼭 쌍둥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그런데 어느 날 두 형제가 여러분께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부터 우리가 형제를 서로 바꾸기로 했어요. 그래서 형인 제가 내일부터는 동생이 되고, 동생인 쟤가 내일부터는 형이 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알았다……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놈의 자식들이 무슨 헛소리야! 하고 혼을 내지 않겠습니까.

당시는 더욱 심했겠지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장남이 가진 역할이 중요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큰 꾸짖음을 당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만에 하나, 부모가 허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형제 순서가 바뀔 수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야곱이 형이 되고 에서가 동생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성경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해심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점이 아니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을 해서 어렵게 어렵게 장자의 명분을 따냈던 것이라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을 낸 것도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이 야곱에 주목을 했었다면 “야곱이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처럼 너희들도 야곱을 본받아서 축복을 빼앗아야 하느니라” 뭐, 이렇게 기록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와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또 음란한 사람이나 한 그릇의 음식 때문에 맏아들의 특권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은 불신앙의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また、だれも、一杯の食物と引き替えに自分の長子の権利を売ったエサウのように、淫らな者、俗悪な者にな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을 성경은 바로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에,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맞바꿀 수 없는 ‘장자권’이라는 크고 놀라운 축복을, 팥죽 한 그릇, 제가 허기가 졌을 때 편의점에서 사 먹은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 정도에 팔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그 하나님의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요. 팥죽이 아니라 당장 그 자리에 쓰러져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지 않았겠지요. 끝까지 자신이 받은 축복을 지켰을 것입니다.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와 같이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또한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크나큰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 은혜에 감사를 드렸겠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있어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믿음도 좋습니다. 소망도 좋습니다. 사랑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감사가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이 사람의 표정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교회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소망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사랑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자, 이와 같은 사람의 표정이 어떨까요.

교회에 맨날 다니는데 감사가 없어요.
아휴, 헌금 내랴 십일조 내랴, 왜 이렇게 돈은 많이 내래.
아휴, 성경은 좀 쉽게 써 놓지, 왜 이렇게 어렵게 써 놔서 못 알아먹게 만들어?
아휴, 누구누구는 정말 꼴도 보기도 싫은데 왜 교회는 안 빠지고 부지런히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휴, 주일학교 애들은 왜 저렇게 시끄럽게 난리를 치고 그래.

소망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소망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기도 응답도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차를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경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좋은 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국산 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외제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외제차를 달라고 했더니만 한 대 밖에 안 주시는 것 봐. 우리 가족이 나 하나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랑은 질투와 시기가 생기게 됩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감사가 없으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대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를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떨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표정은 뻔합니다. 거기에는 감사가 없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맨날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를 않아요.

그렇게 되면 낮이나 밤이나, 나가나 들어오나 항상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뭐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겠습니까? 맨날 찡그린 얼굴을 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하이고, 나도 당신처럼 예수 믿으면서 찡그리고 다니라고? 됐네 이 사람아.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감사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무게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축복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고프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지금 코로나다 뭐다 해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차버리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팥죽 한 그릇을 못 먹은 정도로, 빵이나 우유를 못 먹은 정도로 쓰러져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무게를 모르고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는 에서보다도 못한 사람, 크나큰 축복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13절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不法がはびこるので、多くの人の愛が冷えます。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어려움이 더할수록 많은 사람들의 믿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데 예수님은 믿어서 뭘 해.”

이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버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 그 너머에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그리고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무게를 깨닫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붙잡고 끝까지 견디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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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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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회 성장하는 믿음
2021년 8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16절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5節~16節
“15. 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だから、罪を犯そう、と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16.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が自分自身を奴隷として献げて服従すれば、その服従する相手の奴隷となるのです。つまり、罪の奴隷となって死に至り、あるいは従順の奴隷となって義に至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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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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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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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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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6번째 시간으로서 “성장하는 믿음” 成長する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だから、罪を犯そう、と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불완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율법은 완전하지만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구원에 이를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기만 하면 값 없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값 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값 없이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요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루어진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16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6.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が自分自身を奴隷として献げて服従すれば、その服従する相手の奴隷となるのです。つまり、罪の奴隷となって死に至り、あるいは従順の奴隷となって義に至ります。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종, 그 사람의 부하가 되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상사로 둔 부하직원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회사나 단체에 속한 일원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A라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면 당연히 A 회사의 직장 상사나 A 회사의 사장님의 지시나 방침을 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회사 상사 말은 듣지 않고 다른 회사 지시를 따르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A 회사 직원이라면 당연히 A 회사 상사나 회사 방침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반 사람이나 선지자도 아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기에 우리가 값 없이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죄에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이 적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는 은혜 아래 있다고 하면서, 주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 한 쪽 다리는 여전히 죄에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마디로 ‘죄인’이라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나쁜 사람? 예, 뭐, 죄를 짓는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면 그 외에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 없으십니까. 죄인. 범인, 범죄자……라고 하면 왠지 어디 싸우다가 큰 상처라도 난 적이 있다거나, 아니면 인상이 대단히 험악하게 생긴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일본 어느 방송에서 보니까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교도관이 나와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교도관으로 근무할 때 주로 흉악범, 특히 살인을 저질러서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를 담당 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사형수들을 보면 정말 무섭게 생겼다거나 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사실 실제로 보면, 정말 저 사람이 그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평범하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었는데, 이 사람 주변에서 몇 명이 사망했냐 하면 무려 12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12명을 모두 살해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적어도 8명은 자신이 살해했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그와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사형판결이 내려졌지요. 그리고 지난 달 7월 21일자로 그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기에 얼굴도 험악하게 생기고 힘도 센 젊은 남자냐 하면, 아니에요. 2021년 8월 현재 74살 먹은 왜소한 할머니입니다. 그러면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냐 하면, 결국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거나 사귀거나 하다가 그 사람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년 동안 빼앗은 돈만 따져봐도 대략 10억엔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참 놀랍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체포되었을 당시 그 할머니의 은행 통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식이나 선물거래, 부동산 투자, 하다못해 다단계 판매까지 해봤지만 결국 돈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 마디로 ‘죄인’이라고 하면 무서운 사람이나 힘이 센 사람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죄에 순종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 그리고 그와 같은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さげす)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고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합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이는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잡혀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저항했을 때에 하셨던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힘, 자신의 능력입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습니까. 사회적 지위가 높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를 많이 받았습니까. 뛰어난 기술이 있습니까.

아니,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돈이 있어야 주님도 섬기고 교회도 섬기고 이웃도 섬기고 그럴 것 아닙니까. 물론 돈이 꼭 있어야지만 주님이나 교회나 이웃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섬길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돈은 필요하지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또는 열심히 일을 해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도 하고, 회사나 조직에서 큰 책임을 맡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돈을 얻기 위해서 또는 출세하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에 돈을 얻기 위해서 또는 출세를 위해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왜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모으고 출세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미련한 일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지식의 근본은 뭐였지요?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볼까요?

어떤 사람이 막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기도원 같은데 가시면 뭐 그런 경우 있잖아요. 내가 꼭 들으려고 듣는 게 아니라, 하도 큰 소리로 기도를 하니까 들려와서 본의 아니게 남의 기도를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사람의 기도를 보니까, 이건 뭐 한 두 번 해본 기도 솜씨가 아니에요. 기도가 그냥 막힘 없이 줄줄줄줄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을 들어보니까, 아~주님~제게 집을 주시옵소서, 돈을 주시옵소서, 차를 주시옵소서, 재산을 주시옵소서……하면서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뭐 틈틈이 방언인지 아닌지 모르는 기도까지 막 해요.

보통 이런 식의 기도를 하시는 분들 보면 신앙 경력이 1~2년은 아니겠지요. 교회에도 오랫동안 다니셨을 것이고, 아마도 받으신 직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여기서 오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게 있는데, 주님께 이것을 달라 저것을 해달라 하는 기도가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이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번 우리 함께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뭔가 필요한 게 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달라고 합니다. 부모님한테 뭘 사달라고 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전제조건을 달아보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부모님은 재산이 넉넉하다는 점, 또 하나는 부모님이 그 자녀들을 많이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자녀가 부모에게 뭘 사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아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을 사달라 저것을 사달라 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갖고 싶어서 사달라고 해요. 안 사주면 큰일 납니다. 돈이 많은데 왜 안 사 주냐고 온갖 떼를 쓰고 울고 불며 사달라고 난리를 피워요.

그런데 다른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아버지 어머니에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이러이러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님이 어느 쪽 요구를 들어주겠습니까. 물론 어린 아이, 그야말로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라면 정말 그야말로 보이는 대로 과자도 사달라 장난감도 사달라 하고 떼를 쓸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때로는 부모님도 못 이기는 척하고 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이도 이제 스무 살을 넘어서 성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이걸 달라 저걸 사달라, 그런 식으로 부모님한테 요구를 한다면, 아무리 부모님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그것을 다 사주겠습니까? 아니에요. 안 사줍니다. 그것은 자기 자식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자녀에게 좋지 않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는 것이지요.


살다 보면 돈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땅도 필요하지요. 재산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그게 지금 너한테 왜 필요한데?”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 주님, 제가 지금 돈 들어가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아요. 집도 오래되어서 이사도 해야 되고, 차도 지금 낡아서 굴러가는 것이 기적이에요. 언제까지 돈 걱정하면서 살게 하실 거예요. 돈도 좀 주시고 집도 재산도 좀 주세요!

자,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께서 하나님이시면 이런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아마 이러지 않을까 합니다.

“얘야, 너 지금 나한테 맡겨 놓은 돈 있니?”

그러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유도 없어요. 막무가내예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면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을 받겠습니까.

이와 같은 기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얼마나 높은 직분도 받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어디로 보나 아직 걸음마 단계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아직 젖꼭지를 물고 아기턱받이를 하고 있는 단계의 믿음인 것입니다.

초신자일 때는 괜찮아요. 생각해보세요. 어린 아이가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는 게 큰 잘못입니까. 아니에요. 어렸을 때는 괜찮아요. 오히려 그 모습이 귀여울 수도 있겠지요.

처음으로 교회에 다니는 계기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나와요? 조직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글쎄요. 그런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보면 어떠세요?

무슨 가난해지고 싶어서 교회 나오시는 분 계세요? 병에 걸리고 싶어서 교회 나오시는 분 계세요? 문제가 생겼으면 하는 생각에 교회에 나오시는 분 계세요?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이 별것입니까. 다 부자 되고 싶어서, 치료받고 싶어서, 문제 해결 받고 싶어서 나오기 시작하는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그것만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또는 뭐 젊은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남친 여친을 만들기 위해서, 또는 뭐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서 나오기 시작하는 분들도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래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것이 처음에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죄를 지으려는 것도 아닌데, 괜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신앙이 그대로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 기도해서 응답 받고 돈이 잘 벌리면 신앙생활은 나 몰라라 하고 돈만 벌어요. 성경은 히브리서나 갈라디아서가 구약인지 신약인지도 모른 채, 여전히 몇 년째 남친 여친, 결혼 상대만 찾고 있어요.

이와 같은 신앙은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야말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지금까지 주님이 얼마나 보살펴 주셨고 인도해 주셨는데, 이제 네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어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분간 하지도 못하면서, 이거 사줘 저거 사줘, 그러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1절~3절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御霊に属する人に対するようには語ることができずに、肉に属する人、キリストにある幼子に対するように語りました。
私はあなたがたには乳を飲ませ、固い食物を与えませんでした。あなたがたには、まだ無理だったからです。実は、今でもまだ無理なのです。
あなたがたは、まだ肉の人だからです。あなたがたの間にはねたみや争いがあ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肉の人であり、ただの人として歩んでい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

갓난 아기 때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밥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켜요. 그래서 젖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조금씩 커감에 따라서,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도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합니다. 점차 근육이 생겨가면서, 처음에는 가벼운 것만 들다가 이제 조금씩 무거운 것도 들 수 있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에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금새 넘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초신자가 기도를 할 줄 알아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기도를 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성경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크고 작은 시련들을 이겨내면서 믿음의 근육이 성장해 감에 따라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이렇게 되면 이제 내가 믿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게 되고, 믿음이 작을 때에는 환난이 오면 좌절하기 바빴는데, 이제 믿음의 근육이 성장하니까 오히려 환난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어서 소망을 이루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이 무엇입니까. 시편 23편 아니겠습니까. 시편 23편이 어떻게 시작해요.


시편 23편 1절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 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23편 1절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 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시편 23편 1절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 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시인데, 이는 다윗이 왕위에 올라서 객관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을 때 지은 시가 아니에요. 오히려 사울왕으로부터 쫓기고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당시 부족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서 숨어 살면서, 죽음의 손길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낮이나 밤이나 위태로움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다윗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사실 나한테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인간승리, 정신력으로 버티자는 거예요? 아닙니다. 내게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누가 목자이시니요? 그렇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가 되어 주신다면, 여호와가 내 목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몇 년 다니셨다면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해요? 그렇습니다. 이것도 부족하다. 저것도 부족하다. 이러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나이에 입에는 장난감 젖꼭지를 물고 턱받이를 하고 우유병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얼마나 웃긴 모습이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이라는 거울에 우리 모습을 비쳐본다면, 어쩌면 그 거울 속에 비친 우리는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내 힘대로 하려는 것은 이는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련한 것입니다. 죄를 짓게 되고 결국 죄의 종이 되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숙적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골리앗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2미터 80이 넘는, 거의 3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큰 용사였습니다. 반면에 당시 다윗은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전쟁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에 나간 형들한테 도시락을 가져다 주러 갔었는데, 거기서 골리앗 장군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골리앗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면서, 누구든지 1대1로 붙자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이 때 어린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승산은 1%도 아니에요. 0%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현역 군인들도 감히 나가지 못하는데, 아직 전쟁터에 나갈 자격도 안 되는 어린 애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골리앗 장군과 1대1로 싸운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하면 1분도 지나지 않아 골리앗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 당하는 다윗의 모습을 누구나가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적인 나이는 미성년이었지만 영적인 나이는 이스라엘의 그 누고보다도 어른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 장군을 향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47절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ダビデはペリシテ人に言った。「おまえは、剣と槍と投げ槍を持って私に向かって来るが、私は、おまえがそしったイスラエルの戦陣の神、万軍の主の御名によって、おまえに立ち向かう。
今日、主はおまえを私の手に渡される。私はおまえを殺しておまえの頭を胴体から離し、今日、ペリシテ人の軍勢の屍を、空の鳥、地の獣に与えてやる。すべての国は、イスラエルに神がおられることを知るだろう。
ここに集まっているすべての者も、剣や槍がなくても、主が救いをもたらすことを知るだろう。この戦いは主の戦いだ。主は、おまえたちをわれわれの手に渡される。」


소년 다윗은 말합니다. 너는 지금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나한테 오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너한테 간다. 너는 오늘 죽었어. 오늘이 너 제삿날……임종 예배 드리는 날이야!

그러면서 겁도 없이 당당하게 골리앗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와 같은 그야말로 어른 중의 어른, 용사 중의 용사와도 같은 믿음을 가졌는데 하나님이 어찌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전투가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8절~49절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そのとき、そのペリシテ人はダビデの方に近づき始めた。ダビデは、すばやく戦場を走って行き、ペリシテ人に立ち向かった。
ダビデは手を袋の中に入れて、石を一つ取り、石投げでそれを放って、ペリシテ人の額を撃った。石は額に食い込み、彼はうつぶせに地面に倒れた。

많은 사람들의 예상이 하나는 맞고 하나는 빗나갔습니다. 맞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본문 기록에 의한다면 아마도 승부는 1분도 안 되어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빗나간 것은요? 그것은 소년 다윗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반대로 숙적 골리앗 장군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시편 23편을 보면 5절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私の敵をよそに あなたは私の前に食卓を整え 頭に香油を注いでくださいます。 私の杯は あふれています。

다윗은 지금 내 잔이 텅텅 비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 잔을 채워 주셔서 지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없는 것에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찾으면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없는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진 이 귀한 몸도 주셨습니다. 시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도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순종하는 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힘,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은혜 아래에 있는 자로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는 자로서, 우리에게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 가운데에서 놀랍게 성장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는 종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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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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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2021년 8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2節~14節
“12.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13.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14.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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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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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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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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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5번째 시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私たち自身を神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누가복음 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26절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26절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さて、機会を狙っていた彼らは、義人を装った回し者を遣わした。イエスのことばじりをとらえて、総督の支配と権威に引き渡すためであった。
彼らはイエスにこう質問した。「先生。私たちは、あなたがお話しになること、お教えになることが正しく、またあなたが人を分け隔てせず、真理に基づいて神の道を教えておられ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
ところで、私たちがカエサルに税金を納めることは、律法にかなっているでしょうか、いな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らの悪巧みを見抜いて言われた。
「デナリ銀貨をわたしに見せなさい。だれの肖像と銘がありますか。」彼らは、「カエサルのです」と言った。
すると、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では、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
彼らは、民の前でイエスのことばじり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ず、答えに驚嘆して黙ってしまった。

이 부분 중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라는 말씀은 많은 분들께도 친숙한 구절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의 참뜻을 아시는 분들은 비교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장면, 우리가 성경에 적혀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읽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장면은 상당히 긴장감이 감도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20장 20절에서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機会を狙っていた彼らは)”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구절인 19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律法学者たちと祭司長たち)을 가리킵니다.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 지도층 인사, 즉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연한 말이겠습니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백성들에게는 은혜도 베풀고, 천국복음을 전하기도 하시고, 병을 치료하기도 하시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반면에 사회 지도층 인사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꾸짖으시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서기관이나 대제사장들이 보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을 비판해요.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게 됩니다. 자기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제거해야겠지요. 그래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여러 번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4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중에서, 공통된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보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그 질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아니, 세금은 당연히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의 식민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가이사’는 시저 즉 로마 황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은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대단히 알기 쉽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일본에 반항하는 것은 범죄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요.

자, 그렇다면 조선의 어느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의 지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기 있던 어떤 조선인 유명인사한테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일본의 천황폐하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만약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면, 당시 조선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당대 유명인사였다면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외쳐도 모자랄 판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친일파 아냐? 매국노잖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였습니다. 어쩌면 일본 경찰들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본에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했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면 예수님은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에 대해서 반역을 한 혐의로 붙잡혀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예수님을 고립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을 해도 예수님께 해가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곤경에 빠지게 되는, 말하자면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계산된, 대단히 악의적인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A가 옳으냐 B가 옳으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A가 옳다고 해도, B가 옳다고 대답을 해도 결국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의도를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23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20장 23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イエスは彼らの悪巧みを見抜いて言われた。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악한 계책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통용되고 있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에 누구 형상과 글이 적혀 있냐고 물으십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돈을 보면 역사적인 인물이나 상징적인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는 화폐에는 가이사 즉 로마 황제 얼굴과 황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동전을 보고 가이사 얼굴과 가이사 이름이 적혀 있다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2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그래? 이 동전에서 너희는 로마 황제를 보느냐. 그렇다면 황제에게 바쳐라. 하지만 이 동전에서 하나님을 보느냐. 그렇다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생각하기에 이 돈이 로마 황제 것으로 여긴다면 로마 황제에게 바쳐라.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기에 이 돈이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면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니 질문한 사람들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로마서 6장 12절~13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2.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13.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12절을 보면 ‘너희 죽을 몸(死ぬべきからだ)’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은 때가 되면 죽을 몸, 때가 되면 내 주어야 할 몸입니다. 그런데 죄로 하여금 우리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의 영락교회를 세우신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집을 잠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읽지는 못하고 잠시 몇 페이지를 보았을 뿐입니다만, 거기에 보니까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대략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억합니다.

“새가 많이 날아다니는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할 수 없으나 새가 머리 위에 앉아 둥지까지 만들게는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저는 참 여러 가지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첫째는 그래,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닐 수는 있다. 즉, 아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 아무리 선해 보이는 사람도 다 안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을 가질 수가 있구나, 나에게 나쁜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자기 자신을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그래, 아무리 나쁜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생각이, 마치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앉아 둥지를 만들듯이 그와 같은 나쁜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는 위로였습니다.

아무리 의인인 척해봐도 아무리 거룩한 척을 해봐도 우리는 천상 예수님 없이는 일거수일투촉이 죄에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면서도 교회 바깥에 나가서는 어느새, 아, 나는 세상적인 생각을 믿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게 됩니다.

목사라고 별것입니까. 예전에 보니까 어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도 강단에서 내려가면 한 기독교인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사라고 무슨 예수님이에요? 선지자에요? 아니에요. 똑같습니다. 무엇이 똑같냐 하면 머리 위에 새들이 날아다닌다는 것, 크고 작은 잡념이 오락가락 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내 머리 위에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죄악들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있는 것처럼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따먹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먹지 않음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그러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어기게 만들기 위해서 하와의 마음 안에 무엇을 심어 놓게 되냐 하면 바로 욕심,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하는 욕심, 하나님의 명을 어기게 된다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욕심을 심어 놓게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디 있었다고 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에덴 어디에서 보아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저 나무 열매, 하나님이 그토록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그러셨을까.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호기심이 있을 수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위로 크고 작은 각종 새들이 날아다니는 단계입니다. 아직 둥지를 틀지 않았어요.

선악과의 맛? 먹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 그게 뭐가 중요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먹지 말면 되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끝내면 되었을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니까 둥지를 틀게 돼요? 그렇습니다.

저걸 먹으면 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는 욕심이 내 마음에 들어오자 그 욕심이 내 몸을 마비시킵니다. 내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내 욕심에 순종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9절 후반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죄를 지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욕심과 죄와 사망의 관계를 기가 막히게 정리해놓은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そして、欲がはらんで罪を生み、罪が熟して死を生み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욕심과 죄와 사망이라는 것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아 욕심과 죄와 사망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욕심이 생기고, 둘째로 그로 인해서 죄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이 공식을 거꾸로 하면 되겠지요.

욕심이 생기고 죄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까, 사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으면 되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리면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보면 참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아, 나는 좀더 가난해 져야지. 나는 좀더 불행해 져야지. 그런 생각으로 죄를 짓나요?

생각해보세요. 좀 더 가난해지려고 다른 사람들한테서 돈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아요? 불행해지려고 뇌물을 주고 사기를 치고 그러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들이 풍족해 지려고, 자신들이 좀 더 나아지려는 욕심을 가지고 죄를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에 보면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욕’이라는 말씀이 한글로 밖에 안 적혀 있어요. 그래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성경 자료를 찾아보니까 아마도 개인적인, 사적인 욕구라는 한자로 되어 있었는데, 글쎄요. 저는 오히려 사악한 욕구……라는 한자가 맞지 않나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이를 ‘악한 욕망’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 중에서 대표적인 영어성경 중 하나인 NIV 판을 보아도 사악한 욕망(evil desires)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본문에 나오는 ‘사욕’에 대한 적절한 한자표기는 ‘사적인 욕구’가 아니라 ‘사악한 욕구’, ‘사악한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이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죄를 저지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와 같은 사악한 욕심, 사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죄를 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앞두고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죄인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18장 32절 エゼキエル書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わたしは、だれが死ぬのも喜ばない──神である主のことば──。だから立ち返って、生きよ。」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우리는 어떤 나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정말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어 마땅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든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든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회개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회개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냥 멸망하라고 놔두신다면 그게 제일 편하시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 죽어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살기를 원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공수표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면서까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을 봅니다.

로마서 6장 14절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예수님께서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드리시겠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이사에게 바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악한 욕심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순종의 길 은혜의 길, 그리고 구원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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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회 단번과 완전
2021년 8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0절~11절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0節~11節
“10.なぜなら、キリストが死なれたのは、ただ一度罪に対して死なれたのであり、キリストが生きておられるのは、神に対して生きておられるのだからです。
11.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自分は罪に対して死んだ者であり、神に対して生きている者だと、認め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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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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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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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4번째 시간으로서 “단번과 완전” 一度と完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10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 10절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0.なぜなら、キリストが死なれたのは、ただ一度罪に対して死なれたのであり、キリストが生きておられるのは、神に対して生きておられるのだからです。

여기서 저는 특별히 ‘단번에’라는 말씀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단번’이라는 말은 한 번, 두 번 할 때의 한 번, 즉 횟수로서 1회라는 뜻도 있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버렸다’라고 한다면, 여기서 ‘단번에’라고 하면 단1회라는 뜻만이 아니라 한꺼번에, 또는 완전하게 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 로마서 6장 10절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절 말씀과 함께 보아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1.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는 율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해 봤자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이는 우리가 이미 공부한 로마서 3장 20절에 나와 있었지요.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율법이 있는 덕분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주셨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처음에는 아, 내 죄 때문에 이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구나. 뭐, 이러면서 반성의 마음, 회개하는 마음도 가졌겠지요.

그런데 이제 조금 지나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 어차피 짐승 한 마리 갖다 바치면 해결되는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제물, 반성도 없고 회개도 없는 그와 같은 제물을 기뻐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 11절~13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もう、むなしいささげ物を携えて来るな。香の煙、それはわたしの忌み嫌うもの。新月の祭り、安息日、会合の召集──わたしは、不義と、きよめの集会に耐えられない。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점차 사람들은 회개도 없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는 그와 같은 제물들을 바칩니다. 부자들 중에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보이려고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얄팍한 잔머리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온전하지 못한 제물은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안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제물은 아무리 값이 많이 나간다고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모두 다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시각으로 기록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런 주장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이 해놓은 것이지만, 이런 분류가 우리 구원과 성경 이해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느낍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분류가 예수님의 논점을 흐리게 하는 부작용까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성경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는 성경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그리고 그 표현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어 표현을 잘못 번역한 것이며, 그나마 좀 나은 번역은 ‘마지막 만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십니다.

애굽의 왕이 안 내보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게 되는데, 그 중에서 열 번째 재앙,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게 되는 마지막 재앙을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エジプトの地の長子は、王座に着いているファラオの長子から、ひき臼のうしろにいる女奴隷の長子、それに家畜の初子に至るまで、みな死ぬ。

이제 애굽에 있는 각 가정 중에서 장자를 모두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이제 큰 일입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재앙은 애굽 사람이나 애굽 사람의 소유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나 짐승들이 그 대상이에요.

이렇게 된다면 당시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들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가정에서도 장자가 죽게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이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12장 3절~12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절~12절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に次のように告げよ。この月の十日に、それぞれが一族ごとに羊を、すなわち家ごとに羊を用意しなさい。
もしその家族が羊一匹の分より少ないのであれば、その人はすぐ隣の家の人と、人数に応じて取り分けなさい。一人ひとりが食べる分量に応じて、その羊を分け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の羊は、傷のない一歳の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を子羊かやぎのうちから取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は、この月の十四日まで、それをよく見守る。そして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は夕暮れにそれを屠り、
その血を取り、羊を食べる家々の二本の門柱と鴨居に塗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して、その夜、その肉を食べる。それを火で焼いて、種なしパンと苦菜を添えて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
生のままで、または、水に入れて煮て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頭も足も内臓も火で焼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を朝まで残してはならない。朝まで残ったものは燃やさ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は、次のようにしてそれ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腰の帯を固く締め、足に履き物をはき、手に杖を持って、急いで食べる。これは主への過越のいけにえである。
その夜、わたしはエジプトの地を巡り、人から家畜に至るまで、エジプトの地のすべての長子を打ち、また、エジプトのすべての神々にさばきを下す。わたしは主である。


이를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흠 없는 수컷 어린 양을 잡으래요. 그리고 두 번째로 그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門柱)와 인방(鴨居)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문설주는 출입문 좌우에 세로로 있는 기둥을 말하고, 인방은 그 문설주 위에 가로로 있는 기둥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잡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것이지요.

이게 글로 적혀 있으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당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성인 남성이 60만명 정도라고 하니까, 단순계산으로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하더라도 30~40만 가정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가정집에서 모두 양을 잡고 출입문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랬으니 어땠겠어요. 그 일대가 온통 피냄새로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피를 발랐으면 이제 그 어린양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이랑 같이 먹으래요. 그러니까 고기 굽는 냄새에, 어린 양의 피 냄새에 보통 난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명령을 하셨을까 하면, 그래요. 뭐, 이제부터 먼 길을 떠나게 되니까 그 이전에 든든히 먹고 영양보충을 해두라고 그러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선 왜 어린 양의 피를 그 집 출입구에 바르느냐 하면 그 이유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その血は、あなたがたがいる家の上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しるしとなる。わたしはその血を見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過ぎ越す。わたしがエジプトの地を打つとき、滅ぼす者のわざわいは、あなたがたには起こらない。

이렇게 출입구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쳐서, 장자를 죽이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가시려고 할 때에 그 어린 양의 피를 보시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겠다, 건너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넘어가다’ ‘건너뛰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유월절 내용을 보면 이는 예수님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계시록까지 반복해서 예수님을 흠 없는 어린 양이라고 기록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가로와 세로로 된 기둥에 바른다는 것은, 이는 분명 예수님이 달리신 피 묻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내리시려고 하다가도,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보시면, 사망의 무서운 심판이 우리를 넘어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때 보면 당시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어린 양의 고기입니다. 이 양 고기는 다른 음식들과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양고기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셨는데, 그 장면이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이른바 마지막 만찬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장면은 마태복음은 26장, 마가복음은 14장, 누가복음은 22장, 요한복음은 13장, 이렇게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만찬인 유월절 만찬 자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기에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찬 자리에 양 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4장 22절~25절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一同が食事をしているとき、イエスはパンを取り、神をほめたたえてこれを裂き、弟子たちに与えて言われた。「取りなさい。これはわたしのからだです。」
また、杯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た後、彼らにお与えになった。彼らはみなその杯から飲んだ。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これは、多くの人のために流される、わたしの契約の血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神の国で新しく飲むその日まで、わたしがぶどうの実からできた物を飲むことは、もはや決してありません。」

왜 그 자리에 어린 양 고기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제물로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人の子の肉を食べ、その血を飲ま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のちはありません。

여기서 인자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은 저주 받은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었지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예수님께서는 흠이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로서 십자가로 하는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세례 요한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웠던 놀라운 선지자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저주 받은 죄인으로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시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바쳐지는 속죄제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레위기 6장 25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アロンとその子らに告げよ。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についてのおしえは次のとおりである。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は、全焼のささげ物が屠られる場所、主の前で屠られる。これは最も聖なるものである。

번제라고 하는 것은 불로 태워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불로 태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면, 먼저 장작을 펼쳐놓고 그 위에 제물을 놓은 다음 불을 붙여야 하겠지요. 즉, 예수님 또한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위에 바쳐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속죄제의 제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들린 놋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더라도, 자신들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닥쳐오면 곧바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시면 그들의 그 나쁜 버릇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21장 4절~5절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彼らはホル山から、エドムの地を迂回しようとして、葦の海の道に旅立った。しかし民は、途中で我慢ができなくなり、
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는 모세였으며,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곧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시기는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로 나와서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1세대들의 나쁜 버릇이 얼마나 깊게 남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뭐라고 해요? 민수기 21장 5절 후반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그들이 광야를 가리켜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고 해요. 예, 맞습니다. 광야는 원래 그런 곳이에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만나’인 것이지요.

출애굽기 16장 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人が住んでいる土地に来るまで、四十年の間マナを食べた。彼らはカナンの地の境に来るまでマナを食べた。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는 척박한 땅인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 대략 추산하기를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40일도 아닌 40년이나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만나’였던 것이지요.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만나 만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만나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는, 말하자면 전무후무한 완전 식량이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자 넘치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서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찮은 음식’이라면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하면,

민수기 21장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蛇は民にかみついたの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多くの者が死んだ。

하나님께서는 불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독사가 되겠지요. 이 불뱀을 보내서 그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축복을 ‘하찮다’고 하다니요. 이와 같은 망언이 어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러셨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7절~9절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정말 저 같았으면 이런 사람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인내심이 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만 하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참 쉽죠?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불뱀처럼 만들고는 그것을 장대 위에 높이 달아 놓았더니 그것을 사람들이 바라보자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뱀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상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사람은 분명 죽음에 이르게 되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달린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예,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뱀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사람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징되는 것이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5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죄는 누구에게 있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상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인 불뱀을 장대 위에 높이 올려서 저주를 받게 하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라는 장대 위에 올려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러 주셨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도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垂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과거에 아무리 값진 제물을 바쳤다 하더라도 이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당해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바로 단번에, 한꺼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10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다고 기록하고 11절에서는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께 대하여’라는 말씀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크고 놀라운 기쁨과 축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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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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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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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회 버리는 것과 얻는 것
2021년 7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9절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8節~9節
“8.私たちがキリストととも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ともに生きることにもなる、と私たちは信じています。
9.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キリストは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て、もはや死ぬことはありません。死はもはやキリストを支配し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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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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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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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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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3번째 시간으로서 “버리는 것과 얻는 것” 捨てるものと得る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7월 4일부터 지금까지 로마서 6장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 로마서 6장 8절~9절 말씀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무슨 새로운 느낌이 드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느낌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말과 별로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죽었으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난다’는 내용은 앞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로마서 6장을 보면 1절~14절까지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내용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비슷한 내용을 몇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요즘 같은 경우를 보면 날도 많이 더워져서, 많이 지쳐있을 때에는 물도 좋지만 가끔 스포츠 음료 같은 것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른바 스포츠 음료가 물보다 몸에 더 흡수가 빨리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스포츠 음료라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해요. 별로 목이 마르지 않을 때에 마시면 그냥 맛이 밋밋해요. 무슨 싱거운 숭늉이라도 마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속의 수분이 부족해서 갈증을 심하게 느낄 때에 이 음료를 마시면 그 맛이 참 달콤하게 느껴지는 경험이 혹시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갈급함이 없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도 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고, 예배 시간 때 목사님 말씀을 들어도 맨날 했던 말 또 하고 그러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은혜가 될 때는 성경 어디를 펴도 참 은혜가 되고 달콤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게 더 심해지면 자기밖에 모르는 비밀을 목사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을 하시고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직접 따지는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목사님이 비밀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직접 해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예전에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를 보면, 주로 저는 시험과목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만, 그 때 독해 문제에 대해서 수업을 할 때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필자는 바쁘다>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독해문제라고 하면,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간에 어떤 본문을 읽고 난 다음에, 그 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때 거기에 나오는 본문을 쓰는 필자는 한가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필자는 그 글을 심심풀이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심혈을 기울여가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문에 있는 내용은 모두가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라서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만, 바울 선생이 한가해서, 시간이 남아서, 심심풀이로 적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는 모두가, 없는 시간을 쪼개서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 글자씩 기록한 말씀, 직접적으로는 사람이 썼지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비슷한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본다면 오늘 본문처럼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은, 여기에도 크나큰 의미가 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우리도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말을 하기는 쉽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있을 때 영어 필기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 때 미국인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항상 글을 구체적으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었다면 그냥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먹었고, 그리고 그 음식의 맛은 구체적으로 어떤 맛이었는가’ 하는 내용까지 적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9절이 적인 오늘 본문 이전에도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한다는 말씀은 몇 번이고 있었고, 그리고 이를 공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까지 오니까, 보기에 따라서는 똑 같은 말씀의 반복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말씀에서도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처럼 반복적으로 되풀이해서 기록된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가 있을까요.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죽는다는 것을 다른 말씀으로 표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18절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わたしが再びいのちを得る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るからこそ、父はわたしを愛してくださいます。
だれも、わたしからいのちを取りません。わたしが自分からいのちを捨てるのです。わたしには、それを捨てる権威があり、再び得る権威があります。わたしはこの命令を、わたしの父から受けたのです。」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실수나 예수님이 잘못으로 본의 아니게 잡혀서 죽으시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님이 뜻하신 바에 따라 죽으시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면, 우리도 역시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릴 때를 보면, 채찍에 맞으실 때,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박힐 때의 아픔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68절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それから彼らはイエスの顔に唾をかけ、拳で殴った。また、ある者たちはイエスを平手で打って、
「当ててみろ、キリスト。おまえを打ったのはだれだ」と言った。


마태복음 27장 28절~30절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そしてイエスが着ていた物を脱がせて、緋色のマントを着せた。
それから彼らは茨で冠を編んでイエスの頭に置き、右手に葦の棒を持たせた。そしてイエスの前にひざまずき、「ユダヤ人の王様、万歳」と言って、からかった。
またイエスに唾をかけ、葦の棒を取り上げて頭をたたいた。



마가복음 15장 29절~32절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て言った。「おい、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
十字架から降りて来て、自分を救ってみろ。」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と一緒になって、代わる代わる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
キリスト、イスラエルの王に、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れを見たら信じよう。」また、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た者たちもイエスをののしった。

이와 같은 기록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머리를 흔들며 고함을 지릅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침까지 뱉습니다. 저도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가 나한테 침을 뱉는다거나 하는 모욕까지는 당해보지 못했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은 이루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대단히 큰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나은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놀림을 당해도 기분이 적지 않게 나빴을 텐데,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피조물입니다. 그것도 그냥 피조물입니까. 죄 많은 피조물, 마지막 심판 날에는 꼼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죄인들입니다.

그런 죄인 된 피조물로부터 이와 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하셨던 주님이 버리셨던 것은 과연 생명 뿐이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버리셨던 또 하나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자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수준 이하의 모욕을 물리치실 힘이 없으셨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거기서 내려오실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대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뽑아 저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54절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それとも、わたしが父にお願いして、十二軍団よりも多くの御使いを、今すぐわたしの配下に置いていただくことが、できないと思うのですか。
しかし、それでは、こう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書いてある聖書が、どのようにして成就するのでしょう。」

이 내용에 있어서 어느 주석서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하나의 군단 규모는 보병 6,100명에 말이 726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2 군단이라고 하면 보병만 하더라도 6,100명 x 12라고 한다면 무려 73,2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사람 보병이 아니라 천사의 숫자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천사 하나만이라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천사 수가 70,000이 넘는다고 하는 숫자는, 이는 순식간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만한 숫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뭐냐 하면, 알기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나를 잡으러 온 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물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다 건너 뛰어서 요한계시록에 있는 마지막 날 심판까지도 당장에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까지도 하실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예수님의 자존심을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등을 돌리시고 자신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마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 귀한 생명만이 아니라, 그 거룩한 존엄 마저도 우리를 위해 버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자존심에 대해서 이미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누가복음 14장 8절~11절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結婚の披露宴に招かれたときには、上座に座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より身分の高い人が招かれ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あなたやその人を招いた人が来て、『この人に席を譲ってください』と言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ときあなたは恥をかいて、末席に着くことになります。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존심과 명예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명예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훌륭하다고 인정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자기가 스스로를 높여서 자존심을 세운다면 자신의 명예가 올라갈까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아지나 고양이나 소나 양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사람을 위해서, 창세기에 1장 2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주신 우리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껏 하시는 말씀이 어디 가서 좋은 자리에 가서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래요. 대우를 받기보다는 대우를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창피를 당하라는 말씀인가요?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천한 대우를 받는 것을 원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생각하기에 자기 자식이 바깥에 가서 따뜻한 밥을 먹고 좋은 대접 받기를 원하지, 자기 자식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더러 낮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1장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彼らは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自分たちのために、町と、頂が天に届く塔を建てて、名をあげよう。われわれが地の全面に散らされるといけないから。」

이 말에 보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야심이 보입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창세기 11장 8절~9절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主が彼らをそこから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ので、彼らはその町を建てるのをやめた。
それゆえ、その町の名はバベルと呼ばれた。そこで主が全地の話しことばを混乱させ、そこから主が人々を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그 탑을 짓는 사람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하셔서 결국 그 야심을 단번에 꺾어 버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가 자존심을 세운다고 높아질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가만히 두고 보고 계실 것 같으십니까.

오바댜 1장 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오바댜 1장 4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オバデヤ書 1章4節
鷲のように高く上っても、星々の間に巣を作っても、わたしは、おまえをそこから引きずり降ろす。──主のことば。


교만과 오만과 자만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을 세우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까지 올라갔다 하더라도, 하물며 별들 사이에 자리잡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우리를 끌어내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내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자존심과 명예가 무엇일까요. 자존심과 명예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존심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것이고, 명예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높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3일에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만, 거기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훈련했다. 이 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이런 말들을 고래고래 큰 소리로 떠든다고 누가 금메달을 줍니까? 아니에요 안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메달을 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경기에서 그 노력한 성과를 보여줌으로 인해서 그것을 판단하는 심사위원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스스로가 잘했다고 하더라도 심사위원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메달을 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노력만으로 메달을 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종이에 금메달을 그려서 자기 목에 걸고는, 이제 자기도 금메달리스트라고 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미워서 우리더러 자존심을 세우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좋은 것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잠언 4장 8절~9절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それを尊べ。それはあなたを高める。それを抱きしめると、それはあなたに誉れを与える。
それは頭に麗しい花の冠を与え、輝かしい冠をあなたに授ける。」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만이 아니라 자존심마저도 버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존심을 세우게 되면 다툼이 생깁니다. 미움이 생깁니다. 탐욕이 생깁니다. 염려가 생기고, 불의가 생기고 교만이 생기고 분쟁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얄팍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섬길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영화로운 면류관을 모두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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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회 주님과 연합한 자
2021년 7월 18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5절~7절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5節~7節
“5.私たちがキリストの死と同じようになって、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ているなら、キリストの復活とも同じようになるからです。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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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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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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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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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2번째 시간으로서 “주님과 연합한 자” 主と一つになっ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5절~7절, 이렇게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우선 6절과 7절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5절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많은 말씀과 함께 놀라운 기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은 때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기도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주님 앞으로 몰려오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기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면 예수님은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실까요?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는,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기적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할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예수님 말씀에 나오는 겨자씨는 대단히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 아들인 나밖에 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이런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믿음이 있어야지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작은 믿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좁쌀만한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한테 명해서 바다에 심어지라고 하면 그대로 됐을 것이요, 나무 한 그루 정도가 아니라 이 산더러 명하여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그대로 됐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궁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시는데,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는 거죠.

여기에 대한 힌트는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다른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23절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イエスは弟子たちに答えられた。「神を信じなさい。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入れ』と言い、心の中で疑わずに、自分の言った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者に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여기서는 내용은 비슷한데 ‘겨자씨’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들어가 있는 말씀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心の中で疑わずに信じる)’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많은 돈이나 힘든 고행 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줄 믿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 이것이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요, 이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운 수많은 기적들도 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이전에도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아무리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사람의 죽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십자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를 감당해주심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여러분께서는 혹시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늘 높이 비행기로 올라가서는 거기서 낙하산을 짊어지고 떨어지면서, 이제 어느 정도 떨어진 다음에는 낙하산을 펼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워낙 위험하다 보니까 초보자 같은 경우에는 전문가와 함께 서로의 몸을 묶어서, 마치 무슨 거북이 등에 올려진 거북이 같은 모양으로 해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높은 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 같으면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안 할 일이지만, 외국 같은 데에 보면 꽤 인기가 있는 레저 스포츠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불순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을 예전 시간에 드렸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마치 초보자가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함께 뛰어내려주는 전문가처럼, 우리의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사람을 입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5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私たちがキリストの死と同じようになって、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ているなら、キリストの復活とも同じようになるからです。

여기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는 바로 ‘연합하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イエスが死んで復活された、と私たちが信じているなら、神はまた同じように、イエスにあって眠った人たちを、イエスとともに連れて来られるはずです。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활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지요. 그 부활의 조건이 바로 이 ‘연합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조건이 앞서 살펴보았던 6절~7절입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의 죄인 되었던 몸을 죽이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나는 지금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자신 있게 아멘,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글쎄 잘 모르겠네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이를 알기 위한 방법, 즉 내가 진정으로 주님과 연합한 자인지 아닌지, 주님과 연합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연합하다’라고 하는 단어 그 자체에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로마서 6장 5절에 나오는 ‘연합하다’라는 번역을 한글 공동번역 성경에는 ‘하나가 되었다’라고 번역하고, 일본 신개역 2017에 보더라도 역시 ‘하나가 되었다(一つになっている)’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복음서나 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관한 내용을 보면 혼인잔치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요한계시록 19장 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私たちは喜び楽しみ、神をほめたたえよう。子羊の婚礼の時が来て、花嫁は用意ができたのだから。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혼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신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15절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それから、ヨハネの弟子たちが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私たちとパリサイ人はたびたび断食を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をし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花婿に付き添う友人たちは、花婿が一緒にいる間、悲しむ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しかし、彼らから花婿が取り去られる日が来ます。そのときには断食をします。

요한의 제자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신앙을 형식적인 것으로만 판단하고자 했던 이 철없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 드리기를, 믿음이 좋다는 다른 사람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들 제자는 금식을 안 하느냐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슬퍼하지 않겠지만 신랑이 빼앗길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분명 머지 않은 시기에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이 예수님이라면 신부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신부는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을 맞이하는 믿음의 성도들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혼인을 하는 믿음의 성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잘 와 닿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믿음의 성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그러자 문득 창세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다음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의 정의, 결혼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이가 좋고 깨가 쏟아진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본다면 한 몸이 될 수는 없잖아요. 엄연히 두 사람이고 두 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보통 부부끼리 싸우고 불행하게도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성격차이라고 하지요. 부부 사이는 남들은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만, 적어도 성격차이가 그렇게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희 부부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아요. 오히려 따지고 보면 성격이 서로 정말 똑같다는 부부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격이 서로 같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더니 왠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해관계의 일치’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곧 아내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고, 남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내에게도 손해가 된다면, 그 부부는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내에게 손해가 돼요. 아니면 남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내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는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무슨 성격의 불일치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처럼 이해관계에 있어서 불일치가 발생하면 이는 그야말로 부부 사이의 심각한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부부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를 생각해봅니다.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왜 모인 사람들이에요? 무엇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까.

그렇죠.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돈을 번다는 게 나쁜 일이 아니에요. 나쁜 일이긴커녕 돈을 번다는 것은 회사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사가 잘 되려면, 그 회사 직원들의 성격이 모두 같아야 되나요? 아니요. 그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작은 회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몇 천명 몇 만명이나 되는 회사에서 어떻게 성격이 같은 사람들을 뽑겠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같아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해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장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들한테도 이익이 되고, 사장님한테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직원들한테도 손해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장님한테는 이익이 되는데 직원들한테는 손해가 돼요? 아니면 반대로 사장님한테는 손해가 되는데 직원들한테 이익이 돼요? 이런 회사는 오래 못 갑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께 손해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도 손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게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예수님께 손해가 되는 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群衆を弟子たちと一緒に呼び寄せて、彼ら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従って来たければ、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은 그렇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도 짊어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예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순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또 오해하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고생길을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만약에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면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 순종해야 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고생길, 가시밭길이 아니에요.

물론 어느 한 시기는 고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그 길은 고생길, 고난의 길이 아니라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순종이라는 것이 바로 이해관계의 일치를 뜻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 길을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 가야지요. 그렇다면 그 길이 주님께는 이득이 되고 나에게는 손해가 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이유가, 주님한테만 이득이 되고 우리한테는 손해가 되는 길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등골을 빼먹기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아니에요. 주님은 그런 악덕기업주, 사이비 교주나 사기꾼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あがな)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치료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 보니까 어떤 부부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남편의 낭만은 아내의 불만이래요. 남편이 어떤 자기만의 낭만을 가지고 이런 저런 일을 벌여 놓으면, 그게 아내에게 있어서는 불만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방송을 보니까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가 나왔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질문하기를 원만한 부부 사이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원만한 부부 사이의 비결은 남자의 인내심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항상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 나한테도 기쁘게 느껴지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 것만 같고 불이익이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아요.

이런 게 어떤 상태입니까. 이게 바로 주님과 나 사이에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느냐, 아니면 그 십자가를 던져버리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방법이 아닌 내 방법대로 합니다. 주님 생각보다 내 생각을 중요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방법대로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우리는 또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편안한 길이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힘든 길,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 고생과 고난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셨냐는 거죠.

이런 오해는 왜 생기냐 하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이어지고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을 들어간 다음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넓은 문과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 그러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넓은 문, 멸망에 이르는 문까지 가는 길은 찾지 않아도 보여요. 그래서 누구나가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좁은 문,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이르는 길은 그 길이 좁아서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찾아내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까지 가는 좁은 길은, 내 힘이 아닌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인도해 주실 때에 여기에 순종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넓은 길,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게 되고 만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 해주실 때, 주님 생각과 내 생각이 항상 같아서, 언제나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가끔은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인내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생각을 더 우선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인내심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비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가 하나님 생각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주님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생명으로 이르는 문으로 들어가서, 장차 마지막 날에 한 분도 빠짐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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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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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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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회 영적 세례의 의미
2021년 7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4節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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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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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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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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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1번째 시간으로서 “영적 세례의 의미” 霊的なバプテスマ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본문 중에서 6장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여기서 성경은 세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죄 가운데에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요, 다시 올라오는 것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과 같이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례에 대해서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례라고 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신약이 되어서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구약에도 세례가 있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신약에 등장하는 세례와는 조금 모습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세례를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0장 1절~2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2절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の先祖はみな雲の下にいて、みな海を通って行きました。
そしてみな、雲の中と海の中で、モーセにつくバプテスマを受け、

이 말씀은 모세에 의해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기록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세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 1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海を通って行きました라고 합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하지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다를 건넌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디냐 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홍해를 건넜던 것이지요.

출애굽기 14장에 의하면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제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죽을 일만 남았어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모두 건너게 해주시고,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애굽 군대를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 버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로 이 홍해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정도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영화 십계를 보시면 찰턴 헤스턴이 홍해를 향해서 손을 뻗었더니 순식간에 홍해가 쫘악 갈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押し戻し、海を乾いた地とされた。水は分かれた。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민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큰 동풍을 불게 하셔서 갈라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 引き潮と満ち潮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대가 썰물 시간대라서 바닷물이 물러가고 육지가 드러났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떤 자연현상으로 바다가 물러가고 얕은 땅이 드러나는 현상을 가지고 모세의 기적이다 뭐다 하는 사람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냐 하면, 바로 다음 구절인 출애굽기 14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2절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進んで行った。水は彼らのために右も左も壁になった。

성경에는 분명히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썰물 현상이 일어날 때 물이, 그것도 바닷물이 좌우에 벽이 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반론을 하려면 좀 성경 기록을 보시고 하던지 하지, 그냥 자기 생각으로만 성경을 억지로 해석을 하려고 하니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 홍해사건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 사이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한 번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세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비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있어서 이 홍해 사건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홍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꼭 홍해를 지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홍해가 없는 코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평탄한 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지나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사건, 홍해 사이를 지나가게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홍해 사건의 효과’ 즉, 이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이유를 아실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막 애굽을 탈출했을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막연한 전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도 알고 이삭도 알고 야곱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기간 만도 430년입니다. 거기다가 애굽에서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지요. 그러니 교육이나 제대로 받았겠습니까.

이렇게 되니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부족했습니다. 그와 같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그 누구도 이를 평범한 자연현상이라고 우길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뒤에서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완전히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민족이 평지로 이동해왔었다면, 처음에는 편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애굽 군대가 그들을 죽이려고 추격해오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그냥 평범한 군대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4장 5절~7절
“5.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民が去ったことがエジプトの王に告げられると、ファラオとその家臣たちは民に対する考えを変えて言った。「われわれは、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イスラエルをわれわれのための労役から解放してしまったとは。」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왕 몰래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노예였던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1절~32절
“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彼はその夜、モーセとアロンを呼び寄せて言った。「おまえたちもイスラエル人も立って、私の民の中から出て行け。おまえたちが言うとおりに、行って主に仕えよ。
おまえたちが言ったとおり、羊の群れも牛の群れも連れて出て行け。そして私のためにも祝福を祈れ。」

애굽 왕 바로는 분명히 그들에게 애굽을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가고 나니까 마음이 바뀌어서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냥 부하들에게 시켜서 추격하도록 명한 것이 아니라 왕이 친히 추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규모는 대단했겠지요.

출애굽기 14장 7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여기서 병거라고 하는 것은 말이 끄는 전투용 차량인데, 요즘으로 본다면 탱크 정도의 공격력과 기동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떠냐 하면, 선발된 병거 600대를 포함해서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선발된 병거라고 하면, 지금 식으로 본다면, 특수부대가 모는 탱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규모가 어떻게 돼요? 예, 군 특수부대와 그들이 이끄는 탱크 600대를 비롯해서 애굽의 모든 탱크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에 대해서 민수기 1장 45절~46절에 보면

“45.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一族ごとに登録された二十歳以上のイスラエルの子らで、イスラエルで戦に出ることができる者すべて、
登録された者の総数は、六十万三千五百五十人であ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이 숫자는 전쟁에서 싸울만한 이스라엘 자손의 수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와 여성, 그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고령자는 제외된 숫자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당시 출애굽을 한 인구는 대략 200만명 정도였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200만이라 하더라도,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에서 국가의 전 군사력을 총 동원해서 달려드는데, 이를 이겨낼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홍해 사건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27절~28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夜明けに海が元の状態に戻った。エジプト人は迫り来る水から逃れようとしたが、主はエジプト人を海のただ中に投げ込まれた。
水は元に戻り、後を追って海に入ったファラオの全軍勢の戦車と騎兵をおおった。残った者は一人もいなかった。

이스라엘 자손들이 갈라진 홍해 사이를 건넌 다음, 그 길을 따라 애굽 군대들도 추격해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해를 닫아버리자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홍해사건으로 인해서 애굽 군대는 모두 멸망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을 완전히 단절시켜 버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지도도 있고 그리고 인공위성도 있어서 스마트폰만 있다면 자기 위치를 알 수 있고 목적지를 설정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길을 안내해주기도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도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지도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남의 나라 지도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나라의 정확한 지도는 국가기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나마 평민도 아닌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서 자랐습니다만, 그는 마흔 살에 도망쳐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그런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해도 다른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건너온 홍해는 이미 막혀버렸으니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되돌아갈 수 없도록 강제적으로 만드심으로 인해서 하나님 계획에 순종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는 이 홍해 사건을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제로 한 사람씩 물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식의 직접적인 세례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홍해 사건을 영적인 세례라고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영적인 세례가 무엇인지, 영적인 세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영적 세례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더 이상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여러분, 홍해 바다에 길을 내셔서 200만 명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어려움이 크다고 하더라도, 어찌 나 하나 건널 길을 내주시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주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게 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영적 세례는 나를 추격하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단절시켜줍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 추격해오고 있어요. 그러면 그 추격해오는 세력이 한 명이면 좋겠어요? 아니면 100명이면 좋겠어요?

뭐, 사실 1명이라 하더라도 나를 추격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100명 보다는 낫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추격했던 애굽 군대가 절반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절반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게 웬 일이에요. 절반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절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애굽의 군대가 절반만 추격해 와서 절반만 홍해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바로 왕은 나머지 절반 군대를 이끌고서 다른 길로라도 추격을 계속해 와서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여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정말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다행히 바로가 애굽의 전 군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장 무시무시한 특수부대까지 포함한 전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해온 덕분에, 그 군대를 완전히 멸망 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작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럭저럭 견딜 만 하겠는데, 이게 원 지금 닥치고 있는 어려움은 전혀 작지 않아요. 정말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이 너무나도 커서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특별히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면, 애굽 군대로부터 추격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어려움이었다면 그게 해결되더라도 더 큰 어려움이 또다시 닥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렇게 큰 어려움이 닥쳐오고 있는 것은, 어쩌면 결과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켜 버리신 것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완전히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던 어떤 분은,

“아니, 지금 당장 힘든데 사람이 어떻게 결과론적으로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 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과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합니다.


냉난방이 잘된 고급 호텔에서 공부를 한 학생과, 정말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에서 공부한 학생이 있었는데, 편한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은 시험에 떨어지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은 붙었어요.

그렇다면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합니까?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시험에 붙었느냐 떨어졌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지금 형편이 편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이 모든 시련을 단번에 해결해 주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세례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앞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가끔 보면 그런 분들, 여러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이 말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 과거에 집착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나를 무시하지 말아라. 내가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를 인정해 달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특히나 예수님을 믿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예배도 드리지 않고 마음 편히 놀러갈 수도 있고, 헌금도 내지 않아도 되는데, 특별히 부담이 되는 것이 십일조겠지요? 이게 참 부담이 됩니다. 제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다니다 보면 봉사나 전도처럼 이것저것 해야 될 일도 많아요.

어디 그 뿐이에요? 교회에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있겠어요? 큰 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자기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반드시 한 두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만, 교회에 안 나가면 그런 사람도 안 보고 얼마나 좋겠어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그래, 과거로 돌아가자.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2절~4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은 무슨 어려움만 닥치기만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노예생활을 다시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놀라운 능력으로 인도해냈더니, 그게 싫다는 거예요. 축복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남의 종으로 살고 싶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미련한 말입니까.

이와 같은 미련한 생각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犬が自分の吐いた物に戻って来るように、愚かな者は自分の愚かさを繰り返す。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犬は自分が吐いた物に戻る」、「豚は身を洗って、また泥の中を転がる」という、ことわざどおりのことが、彼らに起こ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지저분하고 낡은 옷을 버리고, 깨끗하게 목욕을 한 다음에 또다시 그 지저분한 옷을 입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장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에 대한 소망을 버려버리고, 더럽고 지저분했던 과거에 집착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노예생활이나 하던 과거에 집착했던 광야 1세대들의 최후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しかし、彼らの大部分は神のみこころにかなわず、荒野で滅ぼされました。

애굽에서의 노예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들, 과거에 집착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감사하고, 장차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私たちは、キリストの死にあずかるバプテスマによ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葬られた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いのちに歩むためです。

우리가 영적인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 안에 있던 과거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영적인 세례로 거듭남으로 인하여, 주님께 순종하며 감사하고, 장래에 소망을 가짐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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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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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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