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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회 소망과 겸손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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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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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4번째 시간으로서 “소망과 겸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적인 이치에 있어서 본다면 먼저 된 사람과 나중 된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될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를 좀 알기 쉽게 본다면 자, 먼저 출발한 사람과 나중 출발한 사람, 어느 쪽이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먼저 출발한 사람이 먼저 골인할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된 사람은 먼저 될 가능성이 높고, 나중 된 사람이 나중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사실 오늘 본문인 주님의 말씀도 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많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몰려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인데,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거나, 아니면 항상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먼저 된 사람은 먼저 되고, 나중 된 사람은 나중 되는데, 이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세상에 보면 이른바 조기교육이라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저희 때 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배우는 것은 중학교 때쯤부터 학교에서 배웠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다고 하고, 그리고 가정에 따라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영어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는 너무 과하지 않나 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 사실 음악이나 스포츠 같은 경우를 본다면 초등학교가 아니라 이미 3~4살 때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경험한 것은 대략 20대 중반 쯤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인터넷이 아니라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이라는 것을 했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되고 그리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였거든요.



그런데 1995년 경이 되니까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시작되었는데, 이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야말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도 그렇겠지요. 그 때까지는 하이텔이면 하이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는 모두 각 회사에 있는 컴퓨터 안에서만 놀았었는데, 이제 그 좁은 틀에서 벗어나서 한국은 물론이고 이제 전세계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발전입니까.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 사람들 주머니에는 크고 작은 스마트폰이 들어 있어서, 웬만한 산간벽지가 아니라면 전화는 물론이고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하게 되었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두고 ‘놀랍다’라고 하면 ‘아제’라는 말을 듣는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올해가 2024년인데 인터넷이 보편화가 된 2000년 경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 20대 중반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인터넷은 존재했던, 말하자면 IT에 있어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기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기성세대와의 차이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분명히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젊은 사람들은 100% 컴퓨터나 인터넷을 잘 하고, 중년층 이후 세대는 100% 컴맹이다……라고는 단정지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연배가 지극하신 분이 오히려 웬만한 젊은 사람들보다 놀라운 IT 실력을 발휘하고 계신 경우도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찍 시작하는 편이 늦게 시작하는 것보다 일찍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야곱의 아들 요셉은 17세라고 하는 나이에 고난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나이 서른에 당시 애굽이라고 하는 세계최강의 나라에서 2인자가 되었습니다. 다윗 또한 그의 나이 서른에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의 경우에는 어머니 한나의 서원으로 인해서 어린 나이에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해서 일찍 시작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주와 홍수라고 하면 한 사람이 떠오르지요? 예,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5장입니다.

창세기 5장 32절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성경, 특히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사람들 기록을 본다면 그 나이가 경이롭지요. 지금은 평균수명이 조금씩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00세를 넘게 사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는데, 노아의 홍수 지언의 기록들을 보면 700세, 800세가 보통입니다.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는 창세기 5장 27절에 의하면 969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놀랍지요?

하지만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그 수명이 급격하게 짧아집니다. 여기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자 분들의 주장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홍수 이후에는 이전에 비해 대략 10분의 1 정도로 수명이 짧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의 나이를 10으로 나누면 대략 지금 우리 나이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세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건설하도록 명을 받게 됩니다.

노아가 과연 몇 살 때 그 명을 듣게 되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방주를 짓도록 명하시는 가운데에 보시면 흥미로운 기록이 있어요.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명령을 하시는 장면은 창세기 6장 13절에서 22절에 등장하는 데 그 중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이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건설을 명하실 때에는 이미 세 아들들에게 며느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당시에는 20세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 500세 때에 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그 막내까지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다고 할 경우, 적어도 노아의 나이는 520세 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언제냐 하면,

창세기 7장 6절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가 육백 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를 정리하자면 노아는 500세 때 쯤에 세 아들이 일었는데, 520세 경에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600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몇 살까지 살았는가 하면,

창세기 9장 29절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이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0으로 나누어 본다면 노아는 50세 때 아들 셋이 있었고, 52세 쯤에 방주에 대한 명령을 들었으며, 60세 때 홍수가 일어나고 95세가 되어서 하늘나라고 갔다는 것이 되겠지요.

말하자면 노아는 적어도 50세가 넘어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부르셨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75세는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홍수 전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홍수 이후의 사람입니까.

예, 홍수 이후의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홍수 전에 비해서 수명이 많이 줄어든 상황입니다.

창세기 25장 7절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아브라함은 175세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래도 지금 보면 오래 산 편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800세나 900세까지 살았던 홍수 이전의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아내 사라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하지요?


창세기 18장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홍수 이전처럼 800세 900세까지 살았던 시기에 99세라고 하면 그야말로 청춘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이미 노쇠하였다고 하니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75세라는 나이도 충분히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애굽에서 왕족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만 그 이후에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치고는 쓸쓸하게 보내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 그를 부르시게 됩니까.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은 정확히 세 구분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애굽에서 풍요롭고 화려하고 멋지게 살았던 40년, 광야에서 쓸쓸하게 살았던 40년,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던 40년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처음 40년과 두 번째 40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40년 더하기 40년 도합 80년이라고 하는 기나긴 세월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40년, 그의 나이 80세부터 120세라고 한다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고, 그저 여생을 즐기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기에 그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이 늦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나큰 계획이 있으십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념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이른바 금수저다 흙수저다 하는 말이 있다고 하지요. 그 출생배경에 따라서 이미 사람의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진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세상에는 금그릇이나 은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기준은 다릅니다.

누가 금이냐 은이냐, 또는 누가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누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순종함으로 따를 때에 우리가 쓰임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겸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이후에 보시면 남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보시면 그가 질병을 앓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입은 장면이 나오는데,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편지와 많은 예물과 함께 사절단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 장면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2절~18절
“12.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16.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병문안을 와준 사절들을 반갑게 맞아들인 히스기야 왕은 마음이 상당히 들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 있는 보물고를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 기록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히스기야 왕은 ‘군기고’까지를 보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군기고를 보면 당연히 그 나라의 군사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죠. 군사력은 그야말로 군사기밀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보물고를 보이고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고, 뿐만 아니라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안 보여준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왕궁의 내부까지도 샅샅이 보여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나라에 있어서 왕이 사는 곳은 이 또한 1급비밀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한국이 다른 나라에게 대통령실 설계도면을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았다고는 해도 그렇지, 히스기야 왕은 왜 이처럼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히스기야 왕의 말을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대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온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묻자 그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에게 말하기를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저기 멀리 있는 변방 시골 촌에서 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촌 사람들한테 자기네 나라의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모든 것을 보여줘 봤자 저기 바벨론인지 뭔지 모르는 지방 촌놈들이 뭘 알겠느냐 하고 방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는 무서운 예언을 합니다.


왕이 지금 그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 없이 바벨론한테 빼앗기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왕의 후손들 중에서도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무서운 예언이긴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비현실적인 예언이었겠습니까.

저 듣도 보지도 못한 시골 촌놈들한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그로부터 10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시드기야 왕 때, 그와 같은 일은 현실이 됩니다.

열왕기하 25장 8절~12절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저 멀리 있는 변방 시골 촌놈이라고 비웃었던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영원한 강자가 없지 않습니까.

이는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앞서 인터넷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인터넷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브라우저로 무엇을 썼냐 하면 넷스케이프라는 것을 썼습니다. 누구나가 모두 넷스케이프 브라우저를 써서 인터넷을 이용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익스플로러가 나왔어요. 당시 모든 웹사이트는 넷스케이프를 표준으로 해서 제작되었는데 누가 갑자기 나타난 익스플로러를 씁니까. 아무리 마이크로소프트가 큰 회사라 하더라도 넷스케이프의 아성은 절대로 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었더니 넷스케이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그 브라우저를 정식으로 사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고 구입을 해야 했었는데,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안에 공짜로 딸려 오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무료로 쓸 수 있는 익스플로러를 쓰지 누가 굳이 돈을 내고 넷스케이프를 쓰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금 지나니까 이제 모든 인터넷이 익스플로러를 기준으로 만들어집니다. 전세계의 표준이 이제 넷스케이프가 아니라 익스플로러가 되어갔던 것이지요.

이제 익스플로러의 아성은 절대로 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세가 구글에서 만들어진 크롬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대부분 그 표준이 크롬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절대적인 아성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는 웹브라우저만이 아닙니다. 메신저도 그래요.

예전에 메신저의 원조는 여러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ICQ라고 하는 메신저가 있었습니다. 이게 맨처음에 나왔을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상대방이랑 실시간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당시에는 메신저 자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제 기억으로는 처음 대화했던 것이 당시 미국 해군에 근무하고 있던 어떤 미국 군인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으니까 MSN 메신저라는 것이 나오더라고요. ICQ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이만한 메신저는 없겠다 싶었는데, 이제 국산 메신저가 등장해요. 여러분 중에서도 아시는 분은 많을 겁니다. 혹시 네이트온이라고 기억하시나요?

예, 네이트온 정도가 되니까 이제 업무상으로도 활용이 많이 되더라고요. 저도 학원에 근무할 때였는데 그 때에는 이 네이트온을 사용해서 단체문자도 보내고 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네이트온 메신저의 아성은 안 무너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이는 뭐 두 말하면 잔소리죠? 카카오톡이 등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이제 지금 아무리 세상을 석권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2024년 11월 현재 주식시장을 보면 어떻습니까. 뭐,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S 무슨 전자 주식이 요즘 심각하다고 하지요.


제가 몇 년 전 신문을 좀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2020년 1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 전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S전자, 사흘째 사상 최고가…액면분할 전 기준 300만원 넘었다”였습니다.

주식이 한 주에 300만원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확실한 재태크 중 하나가 거기 주식을 사는 것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매달 한 주 씩 꼬박꼬박 사 놓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이게 엉뚱한 말도 아니지요.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로 유망한 기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지금 2024년 11월 하순인 지금 그 주가가 얼마인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4만원대였다고 하지요? 아까 보니까 그래도 조금 올라서 56,000원이었습니다. 300만원에서 56,000원이라고 하면 53분의 1이에요. 100만원에 샀다고 한다면 18,000원이 되었다고 하는 계산입니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한 컴퓨터에는 그 회사 반도체가 빠짐없이 들어갔던 인텔. 사실 인텔이 몰락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회사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NVIDIA라는 회사가 뜬다고 하지요? NVIDIA? 물론 제가 공부 부족이라서 그렇겠지만, 제 머리속에는 그저 컴퓨터 그래픽카드나 만드는 회사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인텔을 누르고 어마어마한 약진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너무 늦었어? 다 틀렸어? 그건 우리가 판단할 몫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용하실 하나님 몫인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계시록 5장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주님은 그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해결해주시고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우리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의 피값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절망이나 낙심이나 좌절이나 포기대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부르실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거만하거나 교만하거나 오만하거나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겸손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으로부터 귀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는 나중된 자가 아닌 먼저 된 자로서 높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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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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