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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회 정죄보다 중요한 것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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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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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2번째 시간으로서 “정죄보다 중요한 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주님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비판한다는 뜻은 우리가 알기 쉽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정죄한다는 말의 뜻은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의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6장 37절의 ‘정죄하지 말라’ 라고 하는 말씀이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말아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에 의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말하자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한 여성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 여성은 간음을 하다가 잡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에 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 여성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2장 24절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법에 죽이라고 되어 있으면 죽이면 될 것이지 왜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고 가지 않았습니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빌라도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로마는 식민지를 다스리는 방법이 조금 독특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네 방식을 강요하며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자율적인 부분을 허용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일정 범위까지는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처벌하는 방법도 그들의 법에 따라서 집행하는 것을 인정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것, 말하자면 사형선고에 있어서는 로마의 재판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총독 앞에까지 끌고 가서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18장 31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총독 빌라도가 말하기를 그렇게 예수님을 처벌하고 싶으면 니네 법대로 재판하면 될 것 아니냐 하니까 예수님을 끌고 간 제사장들이 말하기를, 자기네들에게는 사형판결을 내릴 권한이 없으니까 당신이 내려 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고 따지고 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6절 전반부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책잡아서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묻고 있는 이유는, 예를 들어서 사형선고는 로마 재판관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이 만약에 그 여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하신 것이 되기 때문에 로마법에 위배되는 행위이고, 만약에 죽이지 말라고 하셨다면 이는 율법에 반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로마법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로마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는, 말하자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든 간에 예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게 되는, 대단히 교묘하게 짜여진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덫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래, 너희들이 정녕 이 여자를 정죄하고 싶다면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죄 없는 자’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의인’ 그러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여기 중에서 지금 죄가 없는 의인이 있다면 그가 먼저 돌로 치라, 말하자면 정죄하라, 죄인으로 단정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 중에 죄가 없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이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죽어 주신 것인데, 애초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복음 8장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렇습니다. 그 여인을 정죄하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그들이 들고 있던 돌을 버리고 하나 둘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을 정죄하려고 하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아니겠습니까.

마치 나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8장 10절~11절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보면 완전한 죄인, 당장이라도 돌로 쳐서 죽여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겠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죄할 자격이 없으셔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정죄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5절~16절
“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판단하신다 하더라도 그 판단은 참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능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멸망을 원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8편 38절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에스겔 18장 32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우리가 의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만 하며 살아가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나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며 우리를 멸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번 그 진노를 참으시고 참으시고 그리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예,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 예수님께서 간음으로 끌려온 여자에게 하셨던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8장 11절 후반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에스겔 18장 32절 후반부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요? 예,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판단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로 형사재판을 보면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죄판결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는 경우에 내려진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데도 무죄판결이 내리지느냐 하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죄판결을 내리는 요건이 엄격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유죄라고 하는 확실한 증인 증거들이 있을 때만 내릴 수 있는 것이지, 아무리 그 사람이 수상하고, 하물며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할 정도라 하더라도 확실한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면 유죄라고 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무죄판결의 내용을 보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라기보다는 “유죄라고 볼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무죄”인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이웃을 유죄라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이웃을 정죄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한 동네에서 전도지를 돌리고 있는데, 어떤 건물 입구 대문에 흰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더라구요.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 B1 화장실”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한글로만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 B1 화장실”

저는 이를 보고 대단히 불쾌해졌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사진까지 찍었어요.

예전에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한국사람이 외국에서 살게 되면 때로는 크고 작은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는데, 정말로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는 다름아닌 한국이다……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한 건물 입구에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습니까.

아니, 건물 지하에 아랍인 부부가 살면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것도 “삽니다”도 아니고 “산다”래요. 거기다가 지하 1층에 화장실? 아니, 지금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제 말이 이상합니까. 정말 그 건물 지하에 살고 있는 아랍인 부부가 이렇게 써 붙여 놨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불쾌하겠어요. 사실 이거 잘못하면 국제문제로까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양성과 포용성이 강조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무슨 행태인가 하면서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혼자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외에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그런 것을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겠어요.

그래서 인터넷 한 SNS에, 이를 찍은 사진을 올려놨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웬 일입니까.

누군가가 제가 올린 사진을 바탕으로 해서 그 지점을 검색했어요.

그리고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 건물 지하에는 연극 극장이 있는데,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라는 것은 거기서 공연을 하고 있는 연극 제목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연극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정말 그야말로 극적 반전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본 그것은 정말로 그 건물 지하에 아랍인 부부가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는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라고 하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단순히 그 건물 지하 1층에는 화장실이 있다고 하는 안내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그 연극 관계자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말하자면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해를 하고는 비판을 하고 화를 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또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 일본 외무장관이었는데 한국 외무장관과 악수를 하는 사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이 사람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가 나왔는데, 이걸 가지고 어떤 일본사람이 인터넷에서 말하기를, 일본 각료가 금딱지 시계를 차고 다닌다면서 대단히 원색적으로 비난을 한 거예요.

이 사람 말을 듣고 그 사진을 보니까 시계가 정말 완전히 금붙이로 만든 고급 손목시계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이 글에 대해서 그 일본 외무장관 본인이 직접 답변을 했어요. 아주 짧은 글이었는데, 그 글을 번역하자면 “대나무제입니다만, 문제 있나요?” 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과 함께 실제로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 사진을 올렸는데, 정말 대나무로 된 손목시계 더라구요.

이는 어떤 외국 공식행사 관련해서 받은 기념품이라고 하는데, 이 대나무로 만든 손목시계를 금붙이 시계로 잘못 보고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난을 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정죄할 때에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보면 얼마나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님도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데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라고 우리 이웃을 정죄할 수가 있겠냐 하는 것이지요.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높은 직분을 여러 개 받았고, 방언도 하고 금식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바로 옆 눈에 보이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고 한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다시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세상에 비판 받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죄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를 받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 또한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비판이나 정죄를 받고 싶지 않으면 비판이나 정죄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요, 용서를 받고 싶으면 용서를 해주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비판하기 보다 비난하기보다 정죄하기보다 그리고 판단하기보다 이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이웃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은혜로운 용서와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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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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