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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회 인내의 의미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13절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0번째 시간으로서 “인내의 의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인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 인내라고 하는 것, 참고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 인내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끝까지 견디면 그냥 단순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을 얻는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9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서는 인내로 우리가 영혼을 얻는다고 기록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우리 영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저 인내라고 한다면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처럼 참고 견디게 되면 이 신앙에서의 핵심 곧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것을 다 잘한다 하더라도 이 참고 견디는 것, 인내한다는 것을 못하게 된다면 모두가 다 헛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종종 교회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누구는 믿음이 좋다. 누구는 신앙심이 좋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것? 방언을 많이 하는 것? 직분이 높은 것?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

이와 같은 것이 나쁘다거나 필요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믿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항상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지요.



고린도전서 3장 9절~15절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터 위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세워 놓습니다. 어떤 집은 크고 웅장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집은 작고 아담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 재료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지어졌는지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불이 나타나서는 그 집들을 모두 태우려고 들 텐데, 그래도 그 집이 남아 있다면 상을 받게 되겠지만 만약에 그 집이 아무리 크거나 웅장했다 하더라도 그 불에 모두 타버리게 된다면 상은 고사하고 해를 받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믿음생활을 합니다만, 겉으로 본다면 누가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는지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떨 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시험이 닥쳐오면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불이 대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타버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리 불이 닥쳐와도 그을리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직분을 많이 받으면 타지 않나요? 교회에 오래 다니기만 하면 타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 그러니까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참고 견딘다는 것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지요.

인내한다는 것, 참고 견디다는 것은 곧 무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린다는 것, 그러니까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하시기를, 7일 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라고 하십니다. 6일 동안은 하루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번을 돌라고 하세요. 그리고는 큰 소리를 지르면 성벽이 무너질 테니까 그 때 쳐들어가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략과 전술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만, 이와 같은 전쟁방식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것도 안하고 그 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면 그 성을 차지할 수 있다? 세상에 그런 황당한 공략법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래도 뭐 속은 셈 치고 며칠 돌아봤어요.

그런데 3일을 돌아도 4일을 돌아도 성벽이 꿈쩍이라도 했습니까. 아니에요. 작은 금 하나 안 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날까지 돌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 6장 20절~21절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순종을 했더니, 그 철벽 같은 여리고 성 조차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편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아직 미성년자였을 때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무찌르고는 하루아침에 전쟁영웅이 됩니다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 왕으로부터 10년 이상 동안이나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요셉도 그렇지요. 창세기 37장 2절에 의하면 요셉은 그의 나이 고작 17세에 그의 친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가서는 거기서 노예로 살다가 또 역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죄수로서 감옥에 갇히게 되어 총 13년 동안이나 참고 견디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볼까요?

75세에 하란 땅을 나선 그가 원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들 하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을 얻었던 것이 언제였습니까. 그의 나이 100세 때니까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지요.

모세도 보십시오. 그는 비록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유대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애굽의 대궐에서 왕족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음이 앞서서 그만 애굽 사람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그는 혈혈단신으로 도망칩니다.

그의 나이 40세. 사실 남자 나이 40세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황금기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으나 모세는 광야로 도피한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나이가 몇 살 때였습니까. 예, 그의 나이 80세 때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지요.

그럼, 더 기다린 사람은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받고 그는 최소한 70년 이상 동안 묵묵히 기다리면서 배를 건설해 나아갔습니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기다려야만 했던 것일까요. 아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위해 곧바로 응답을 해 주셔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보면, 우리에게 응답이 언제 필요할 때 기도합니까.

지금은 아니고 한 달 뒤, 1년 뒤에 응답이 필요할 때, 기도합니까.


물론 그럴 때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어떻습니까. 예, 바로 지금 당장 응답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시면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말씀이에요.

사람이 기도를 드릴 때에 응답을 빨리 받고 싶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는 당연한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응답이 그때그때 올 수도 있어요. 이건 저도 체험한 일이지만 어떨 때는 주님이 더 급하세요.

오히려 저는, 아니 뭐 천천히 응답해주시면 돼요, 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오히려, 아냐, 지금 급해, 빨리 서둘러, 뭐 그러면서 일을 정신없이 밀고 나가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좀처럼 응답을 안 하실 때도 흔히 있지 않습니까. 남들 보니까 누구는 귀로 주님의 말소리가 들려 오기도 한다거나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해주시기도 한다는데, 어떤 때는 정말 기도를 해도 밋밋하고 우리의 마음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아무런 감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성경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낮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이 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낮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낮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깊은 밤 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더욱 더 소망을 가지고 낮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여러 위기일발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서 3장이 아닐까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세워 놓고 여기에 절을 하라고 명령을 해요. 그리고 여기에 절을 하지 않으면 활활 타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겠다면서 으름장을 놓습니다.

비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의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말합니다.

다니엘 3장 16절~17절
“16.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은 섬기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유명한 말을 하지요.


다니엘 3장 18절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하지요?

예,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


야아, 정말 얼마나 멋진 믿음입니까.

아무리 내가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지만, 만에 하나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조건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에 지금 당장 응답해주면 믿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믿겠다? 그게 아니에요.

지금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시든 안 해 주시든 간에 나의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 점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 앞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왕과,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어느 쪽에 순종을 해야 할 것인지를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말이에요. 이 정도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다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응답이 곧바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자신들을 벌하려 하는 왕을 없애버린다거나,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돌이켜서 그들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지 않게 한다거나, 아니면 지금 곧바로 풀무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이 꺼져 버린다거나 할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늘에서 불은 떨어지지 않고,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벌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돌이키지 않아요. 그리고 풀무불이 꺼지기는커녕 왕은 오히려 그 불을 더 뜨겁게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제 그들은 꼼짝 없이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셨나요?


다니엘 3장 26절~27절
“26.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들은 풀무 속에서 뼈도 추리지 못할 정도로 새카맣게 타버린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도 않은 채로 나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눈앞에 놓인 시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참고 견디며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를 헤맬 때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하면서 원망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말처럼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들기 위해 끌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타국에서 노예 살이를 하던 그들을 이끌어 내어서 자유를 주고,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애굽을 탈출하면 곧바로 가나안 땅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를 건너게 하시면서 우리가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 나중에 받을 축복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보시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아무런 인내의 기간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왕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자 그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되고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그릇이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습니까. 왕에 오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참고 견디는 인내의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아침이 밝아 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믿음 안에서는 인내에 대해서 공짜가 없습니다. 참고 견디는 과정, 기다림에 대해서 공짜가 없습니다. 분명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놀라운 축복이 바로 코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까지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렵게 인도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부터 응답을 안 주세요? 인도를 안 해주세요? 반대로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까.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밤이 깊으면 낮이 가깝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라는 터 위에 흔들림 없는 믿음의 집을 짓고, 마침내 우리의 영혼,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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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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