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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회 믿음을 가지고
2021년 3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절~3절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節~3節
“1.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は何を見出した、と言えるのでしょうか。
2.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3.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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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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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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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6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信仰を持って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은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 그의 말을 듣기 위에 몰려온 군중들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며, 유대인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민족,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근거가 된 것이기에, 그들이 자신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조상이라고 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이 돌맹이처럼,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아무런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미 공부한 로마서 2장 29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여기서 돌맹이라고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정말로 길가에 떨어진 돌맹이가 아니라,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그야말로 길가에 떨어져서 사람들 발에 채이는 돌맹이보다도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즉, 이는 구원 받는 백성은 표면적 유대인, 다시 말해서 유전자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인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적인 유대인이요, 진정한 구원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9장 2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자신은 모세의 제자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이집트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종살이를 하던 자신들을 모세가 이끌어내어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률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율법만 제대로 지키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요, 그리고 장차 죽고 난 다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 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가요? 아니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와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말씀을 어긴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브라함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과소평가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로마서 4장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대단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라고까지 여겨지고 있는지,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우리도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1장 26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먼저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1장 26절~32절까지에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대한 가족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라고 하는데, 데라는 70살 쯤에 세 형제 즉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 세 쌍둥이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낳았다는 뜻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른 성경 기록들로 비추어볼 때 아마, 후자, 그러니까 비슷한 시기에 낳았다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여기는 당시 메소보다미아라고 하는 지역, 지금으로 본다면 대략 이라크 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데라, 그리고 아들은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이렇게 3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하란이 먼저 장가를 든 모양이에요. 그래서 하란이 롯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습니다만, 여기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요. 사고인지 아니면 질병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하란이 자식들을 남겨놓고, 아버지 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나머지 형제, 아브라함과 나홀도 장가를 들어요.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라이고, 나홀의 아내는 밀가인데, 이 밀가는 먼저 세상을 떠난 하란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밀가는 자기 형제의 딸, 말하자면 자기 조카 딸과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으로 본다면 꽤 충격적인 일이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대단히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고, 그의 아내 사라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만, 편의상 그냥 아브라함과 사라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갈대아인의 우르에 살고 있었는데,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대적인 이사를 추진합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이를 정리하자면,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이 남겨놓은 아들 롯, 이렇게 넷이서 이사를 떠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의문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때까지 살고 있던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곳을 왜 떠나게 되었는지,
둘째는, 왜 나홀과 그의 아내 밀가는 남겨두고,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만 데리고 떠났는지,
셋째는, 그들이 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
넷째는, 가나안 땅에 가다가 도중인 하란 땅에 왜 정착했는지,

여기서 둘째 문제부터 보자면, 창세기 24장에 의하면 나홀은 차후에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원해서 이주에 동참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 그럼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를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는데, 데라는 그 말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 땅에 정착하는 바람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본래 아버지 데라가 받을 그 축복을 아브라함이 대신 받게 된 것이다.


저도 이 이야기를 꽤 설득력 있게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책은 목사님이 쓰신 책이었으니까 정말인 줄 알고 믿었지요.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 2절~4절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するとステパノは言った。「兄弟ならびに父である皆さん、聞いてください。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ハランに住む以前、まだメソポタミアにいたとき、栄光の神が彼に現れ、
『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そこで、アブラハムはカルデア人の地を出て、ハランに住みました。そして父の死後、神はそこから彼を、今あなたがたが住んでいるこの地に移されましたが、


이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으로 가기 전에 메소보다이아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 살고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내인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것으로 여기집니다만, 하란 땅에 도착해서 거기 머물렀을 때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고향 땅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데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가나안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도중에 하란 땅에서 아버지 데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이 본래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하는데도 도중인 하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불순종 때문에 아버지 데라를 먼저 불러가셨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스데반 집사님의 기록에 의하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음으로 창세기 11장 31절~3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여기는 분명히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다고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최종목적지가 가나안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相続財産として受け取るべき地に出て行くようにと召しを受けたときに、それに従い、どこに行くのかを知らずに出て行きました。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같은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떠났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최종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이 이주 계획은 아브라함이 먼저 시작해서 아내 사라와 조카 롯만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까지 모시고 출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모르는 최종목적지를, 데라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이 알았을 리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가나안 땅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 결론적으로 보자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가야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아브라함 일행은 하란 땅에 도착했을 때,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란 땅을 지나갈 때 어떻게 했냐 하면, 거기 잠시 쉬었던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1장 31절 후반부에 뭐라고 적혀 있었어요.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이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은 더욱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11장 31절 후반부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정착하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일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메소보다미아 즉 갈대아인의 우르를 출발했지만, 도중에 하란에 도착했을 때 거기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순종은 누구 때문에 발생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란에 도착했을 때, 아이고, 여기 보니까 참 좋네. 우리가 살던 곳보다 훨씬 더 좋잖아. 에라, 하나님이고 뭐고 우리 여기서 살자.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어머, 여보, 여기가 참 살기 좋네요. 집도 넓고 집값도 싸고. 그러니까 여보. 그냥 우리 여기 삽시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유혹 했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 단서는 바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살펴보았던 창세기 11장 31절~32절에 숨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여러분, 이 글의 부자연스러움. 혹시 아시겠습니까.

자,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 이주 계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말씀대로 아직 그들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인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획에 관한 주어, 즉 중심인물은 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이는 당연히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록들을 보아도 이주에 관한 기록은 아브라함이 주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기록은 어떻습니까.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다. 주어가 누구에요?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 데라입니다. 이는 모든 번역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란 땅에 정착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은 누구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가 말하기를, 이봐, 나 이제 늙었으니까 더 이상 못 가. 여기 하란 땅에서 그냥 살자. 여기 좋잖아?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내 말 대로 해!

성경에 기록된 다른 가족들을 보면 아버지가 나이 들고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는 자녀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지만, 아버지가 아직 젊었을 때라면 아버지의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출발했을 때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브라함의 말에 따랐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만, 하란 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거기 정착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어쩌면 그 여정이 대단히 힘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느 정도 되는 여정을 갔던 것일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갈대아인 우르에서 하란 땅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040킬로 정도라고 합니다. 이건요. 직선거리로 본다면 서울에서 동경까지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단순계산으로 사람 걷는 속도를 시속 4킬로라고 하고, 하루 16시간을 걷는다고 하면, 64킬로 정도를 갑니다. 이렇게 해서 1040킬로를 간다고 계산을 하면 16일 이상이 걸려요. 하지만 1040킬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입니다. 실제로는 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라를 짐승에 태우고 간다 하더라도 매일 꼬박 64킬로로 가기는 어려웠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략 1개월 정도 여행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사실 말이야 쉽겠지만 이는 보통 힘은 여정이 아니지요. 한달 정도나 걸어서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여기에는 연배가 있는 데라, 여성인 사라, 그리고 아마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까지 있었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데라의 인내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됐다.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 못 간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결국 데라의 주장에 따라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은 하란 땅에 정착을 합니다. 창세기 11장 32절에 의하면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어요.

이 나이를 보면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일찍 돌아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고, 이스마엘은 137세, 이삭이 180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오래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 가족은 어땠습니까. 그렇습니다. 발이 묶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초조 했을까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말씀하셨고, 그리고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이든 아버지를 혼자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 끝까지 반대하는 아버지를 더 이상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란 땅에서 지내고 있었더니 아버지 데라가 205세 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자 창세기 12장 1절 이후에 보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갈대아인 우르 땅에서 불러주셨던 하나님이 두 번째로 불러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이제 누구도 그의 발길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당당히 여행을 출발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제 또 문제가 있지요? 예, 하란을 그의 나이 몇 살이요? 예, 75세였다고 합니다.

당시는 지금보다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나이가 많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젊은 날은 다 지나가고 이제 나이도 늙어서 힘도 없는데, 이 나이에 축복은 받아서 뭐에다 쓸까.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합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 대략 75세까지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참으로 믿음의 조상에 걸맞는, 과연 하나님께서 부르실 만한 뛰어난 삶처럼 느껴지시나요?

물론 이 뒤에는 아브라함의 놀라운 행적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대단한 일을 한 다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게 아니에요. 바로 지금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요? 아니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갈대아인 우르에서 한 번 부르셨고, 그리고 하란 땅에서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또 한번 부르셨어요.

제가 여기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정리하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마도 여러분께서 지금 여러분이 하고 계신 생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기까지 장황하게 살펴본 아브라함의 인생? 아, 참 재미없다. 잠이 온다. 지루하다. 그렇지 않으세요? 정말 차라리 내가 살아온 인생이 훨씬 더 변화부쌍하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지루한 삶을 살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을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뛰어난 인물이라서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인물을 부르십니다.

노아나 모세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모세에 대해서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モーセという人は、地の上のだれにもまさって柔和であった。

그리고 그보다 앞선 노아는 어떨까요?

창세기 6장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これはノアの歴史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

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 하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고집이 센 아버지 때문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기록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그렇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절~3절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は何を見出した、と言えるのでしょうか。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ります。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특이한 것도 없고 감동적인 것도 없고, 어떻게 보면 정말 평범하고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무리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고, 내 발걸음을 늦추는 장애요소가 있더라도 그는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고,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러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난 것이 몇 살 때요? 예, 75살입니다. 75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적합합니까, 아니면 늦었습니까.

예,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부족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아브라함의 데라가 당시 사람들 중에서도 오래 살았던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가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앞서 갈대아인 우르에서 하란까지의 거리가 1040킬로 정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하란에서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 였을까요. 예, 그들에게 남겨졌던 거리,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대략 630킬로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보다도 짧아요.

힘들면 조금 쉬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걸으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도중에 눌러앉아버리면 안 됩니다.

데라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늦더라도 일어나서 축복의 땅까지 가야 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을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이봐. 조금만 가면 돼. 지금 온 거리에 비하면 조금만 더 가면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이야.

그러나 데라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미 늦었습니까? 물 건너 갔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야 할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생각해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지금 당장 일어서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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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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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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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회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
2021년 3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9절~31절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9節~31節
“29.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の神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異邦人の神でもあります。
30.神が唯一なら、そうです。神は、割礼のある者を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割礼のない者も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31.それで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律法を無効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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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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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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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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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5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 律法を成就されたイエス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를 앞 두 구절과 뒤 한 구절로 나누어서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앞 구절을 살펴봅니다.

로마서 3장 29절~30절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9節~30節
“29.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の神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異邦人の神でもあります。
30.神が唯一なら、そうです。神は、割礼のある者を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割礼のない者も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이 두 구절은 그 문장구성으로 보았을 때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29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말씀인데, 30절에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29절을 봅니다.

29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은 한국사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다르고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의 하나님은 달라요? 이는 마치 예수님은 똑같은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한국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수님 다르고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이 다르다고 하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요,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외국인이나,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즉, 29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불문하고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겠습니다. 30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할례자 즉 유대인과 무할례자 즉 이방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기록하게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29절에서는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30절에서는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표기를 했을까요.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한 이유는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율법적으로 다루고자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면 이는 선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쉽게 말해서 유대인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유대인이요, 이방인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적인 분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유전자적인 분류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냐 하면 바로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할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2절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代々にわたり、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異国人から金で買い取られた、あなたの子孫ではない者もそうである。

따라서 남자의 경우에는 할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 즉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표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30절에서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을 한 것은, 이는 다른 말로 옮긴다면 단순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율법적인 유대인과 율법적인 이방인으로 구분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한다면, 29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유전자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면에 30절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하는 구분은 율법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30절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말 대신 <율법적인 유대인>과 <율법적인 이방인>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는 로마서 3장 30절을 바꾸어 본 것입니다.

“30.율법적인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율법적인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神が唯一なら、そうです。神は、律法的なユダヤ人を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律法的な異邦人も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자, 우선,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지금까지 많이 나왔지요.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을 보면 우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로 본다면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놀라운 두 가지 평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평등은 인종에 있어서의 평등입니다. 율법적인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은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율법적인 유대인에게만 임한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적인 유대인 만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평등은 바로 그 평가기준에 있어서의 평등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적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슨 가산점을 준다거나, 아니면 율법적인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슨 감점이 된다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평가기준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평가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그 평가기준은 바로 <믿음>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자면, 29절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신데, 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평가기준은 모두 공평하게 <믿음>이다, 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을 들었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그렇죠. 유전자적으로나 율법적인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부모는 유대인도 아니요, 나는 할례도 안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삐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겠습니까. 그렇죠. 유전자적이자 율법적인 유대인이겠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는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닙니까. 다른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구원도 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유전자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그 판단기준은 <믿음>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말을 들으면 유전자적으로 보나 율법적으로 보나 유대인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바울을 뭐라고 비판하겠습니까.

“그런 주장은 율법적이지 않다. 반율법적이다.”

또는 더 심한 말로 한다면,

“그런 주장은 이단이다”

뭐 충분히 이렇게,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뭐라고 반박합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서 31절 말씀입니다.

31절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それで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律法を無効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ります。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율법을 파기하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은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반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은 어느 정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미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天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すべてが実現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같은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昔の人々に対して、『殺してはならない。人を殺す者は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兄弟に対して怒る者は、だれでも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兄弟に『ばか者』と言う者は最高法院でさばかれます。『愚か者』と言う者は火の燃えるゲヘナに投げ込まれます。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情欲を抱いて女を見る者はだれでも、心の中ですでに姦淫を犯したのです。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율법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더욱 범위를 확대해서 해석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율법도 그렇습니다.

당시까지 사람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면 안된다고 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복음 12장 14절, 마가복음 3장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예수님이 어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율법을 어기셨다는 것인가요?

아니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왜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명확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ので、思い違いをしています。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사두개인(サドカイ派) 이 한 질문에 대한 지적이십니다만, 이는 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은 믿음이 좋고 율법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손가락질하고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즉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오해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질 대로 말씀하시고 행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오해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결국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드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께 두 번째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즉,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이루려고 오셨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누구든지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는 100%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을 형벌을 우리 대신 모두 다 받아 주셨어요.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모두 다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벌을 받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법에 규정이 없으면 그 사람을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러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야, 하나님은 율법을 어기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제 내가 왔으니까 율법은 없는 걸로 치면 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거 괜히 율법이다 뭐다 해서 골치 아프게 굴지 마시고, 율법 같은 것은 다 그냥 없던 걸로 칩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내가 부탁하는 것이니까, 그냥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특별사면. 어떻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려고 하셨다면 이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가장 편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율법이 없었다면 죄도 없는 것이 되겠지만,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것이 있고, 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어요.

이 시점에서 율법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죄에 대한 규정도 없어지기 때문에 죄를 처벌할 근거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엇을 하지 않아도 돼요?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잖아요? 용서 받아야 할 우리의 죄가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도 없어지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정말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나 우리나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도 유대인들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미덕이요 신앙의 기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금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약 말라기 1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1장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日の昇るところから日の沈むところまで、わたしの名は国々の間で偉大であり、すべての場所で、わたしの名のためにきよいささげ物が献げられ、香がたかれる。まことに、国々の間で偉大なのは、わたしの名。──万軍の主は言われる──

오히려 구약에 보면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땅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유전자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고 율법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오로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받기 위해서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천사가 아니라 마귀 사탄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길 뿐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천국백성으로서,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이 귀한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우리 이웃과 세계 만방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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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회 우리의 자랑
2021년 2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7절~28절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7節~28節
“27.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取り除かれました。どのような種類の律法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律法でしょうか。いいえ、信仰の律法によってです。
28.人は律法の行いとは関わり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私たちは考え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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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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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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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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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4번째 시간으로서 “우리의 자랑” 私たちの誇り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7절~28절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7.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取り除かれました。どのような種類の律法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律法でしょうか。いいえ、信仰の律法によってです。
28.人は律法の行いとは関わり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私たちは考えているからです。

여기서 27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7절에서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반부를 다시 한번 봅니다.


로마서 3장 27절 후반부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どのような種類の律法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律法でしょうか。いいえ、信仰の律法によってです。

이를 다른 번역서 등을 참조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율법으로인가. 행위의 율법인가. 아니다. 믿음의 율법으로이다.”

예, 좀 갑갑하더라도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가지고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28절까지를 보셔야 이해가 됩니다.

로마서 3장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8.人は律法の行いとは関わり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私たちは考えているからです。

이는 말하자면 사람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 일단 여기까지 말씀을 살펴보고, 예, 오늘은 처음부터 좀 어려운 말씀을 드려서 벌써부터 잠이 솔솔 오지 않을까 합니다만, 일단 좀 쉬운 문제부터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항상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 강조를 해왔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하고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깨닫는 것이고,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말씀에 입각해서 이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 한자로 하자면 신앙과 성경과 실천. 이 중에서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요. 믿음이 중요하다? 말씀이 중요하다? 아니면 행함이 중요하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굳이 이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중에서 <행함이 중요하다>라고 누군가가 주장했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여러분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からだが霊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と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を欠いては死んでいるのです。

자, 봐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에 있지 않느냐. 아무리 믿음이 많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 하더라도 여기에 따르는 행함이 없다면 이는 모두가 소용이 없는 일이다. 믿음과 말씀은 결국 행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말씀과 행함, 신앙과 성경과 실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함, 실천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을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특히 이 셋 중에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분께서는 어떻게 반론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아……듣고 보니 그런가 보다……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셋 중에서 믿음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는 믿음은 말하자면 말씀과 행함을 담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어야지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에 합당한 말씀과 행함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구절을 달달달달 외운다 하더라도 거기에 믿음이 없다면 이를 담을 그릇이 없어요. 다 빠져 나가요.

온전한 믿음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면,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그냥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중반부부터 16절까지를 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 중반부 ~16절
“15……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우리가 학교에서 다닐 때 보면 교과서를 잘못 읽거나 선생님 말씀을 오해했거나 하면 시험에서 점수가 잘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또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되면, 이는 시험을 망치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없이 성경을 자기 멋대로 이해하게 되면, 이를 그대로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 실천은 순종의 실천이 아니요 멸망에 이르는 실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안에 말씀과 행함을 듬뿍듬뿍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로마서 3장 27절~28절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7.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取り除かれました。どのような種類の律法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律法でしょうか。いいえ、信仰の律法によってです。
28.人は律法の行いとは関わり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私たちは考えているからです。


아까는 27절에서 28절 순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28절부터 해석하고 그 다음에 27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이해가 잘 됩니다.

자, 28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쉽게 말하자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저와 열심히 공부해 오신 분들께서는 아실 수 있습니다.

자,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무슨 자격을 얻게 된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냐 하면, 이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행위의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율법, 그러니까 행위를 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2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만약에 내가 뛰어난 행위를 해서 그 대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내가 자랑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라고는 단순히 믿었을 뿐인데, 오히려 그 믿음의 율법, 믿음의 대가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구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자랑……이라고 나옵니다만, 오늘은 한 번 이 <자랑>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랑할 데가 없다고 나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냐 하면 갈라디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이 갈라디아서도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서한입니다만, 여기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 본문과도 분명히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이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내 힘과 노력으로 인한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자랑할 수는 없지만, 이는 내 행위가 아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겠다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자랑을 할만한 것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자랑을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자랑할 만한 것이 많으실 수도 있고 별로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자랑을 할까요.

누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재산을 자랑할 지도 모릅니다. 명예나 사회적 지위, 학력이나 경력을 자랑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자기 가족이나 집안 내력을 자랑할 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돈이나 재산? 명예? 사회적 지위? 학력? 경력? 집안 내력이요? 이는 다 안개 같은 인생, 길어 봤자 100년, 요즘은 조금 더 오래 살지요? 넉넉잡아 150년도 못 가질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면 죽고 나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이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 봤자 우리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깟 이름을 남겨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구원을 받는 것, 천국에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 앞에 잠깐만 눈에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가진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것, 자랑으로 삼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잠깐 손에 쥐었다가도 길어봐야 몇 십년 밖에 못 갖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귀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것 뿐일까요?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힘이 되는 것을 자랑한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아~ 나는 이것이 힘이 된다, 저것이 힘이 된다 하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려울 때 진정으로 힘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옛날 젊은 시절에 유학했던 경험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 때는 정말 돈도 없고, 일을 하려고 해도 외국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도 있고 해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경험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지금도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되면 과거에 그런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이 정도를 내가 못 이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에는 그 어려운 유학시절이 이 분에게 있어서는 자랑이 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 경우를 보자면, 제가 얼마 전에 좀 여러 가지로 넉넉하지는 못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컴퓨터를 하나 장만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것이 2013년에 한국에서 구입한 것인데 올해가 2021년이니까 대략 8년 만에 마련한 셈이지요.

컴퓨터를 8년 정도 쓰면 어떻게 되냐 하면요, 일단 팬 돌아가는 게 무슨 에어컨 실외기 같은 소리가 납니다.


팬 정도야 바꿔주면 된다고 하지만, 예를 들어서 매주 이렇게 말씀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엑셀 같은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하다가 보면 컴퓨터가 오래 되어서 갑자기 프로그램이 꺼집니다. 그러면 물론 자동으로 저장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컴퓨터 속도가 느리니까,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그 동안, 적어도 십여 분 동안 했던 작업이 날라갑니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만의 비밀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알려드리는 건데, 오늘은 특별히 그 비밀 테크닉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처럼 오래된 컴퓨터를 쓰시는 분들은 참고가 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기존 컴퓨터로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제 핸드폰을 옆에 두고 작업을 했습니다.

이는 그냥 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진을 찍을 마음 준비를 해요. 그러고 작업을 하다 보면 순간 화면이 희미해지고 작동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제 비상이에요. 키보드를 아무리 눌러도 반응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직 화면에는 희미하게 제가 작업하던 글씨가 남아 있어요. 그러면 이제 준비하고 있던 핸드폰를 얼른 집어 들고는 모니터 사진을 몇 장 찰칵찰칵 찍습니다.

보통 그렇게 찍고 나면 몇 초 뒤에 화면이 꺼지고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해요. 그리고 재시작 한 화면에 보면 10중 팔 구로 십여 분 정도 작업한 분량이 날라가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놀라지 않습니다. 제가 찍어놓은 사진이 있거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여유롭게 다시 작업을 하지요.

물론 항상 그렇게 성공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순간적으로 당황을 해서 사진을 못 찍는 경우가 있어요. 좀 실수로 사진을 찍지 못하면, 막 찍으려는 순간에 화면이 꺼져버립니다. 정말 그 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순간의 제 얼굴표정을 한 번 찍어보고 싶어요. 참 예술일 것입니다.

뭐, 이런 일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아,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 잘못하다가는 건강상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 싶어서 큰맘 먹고 컴퓨터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런데 덜컥 사고 보니까, 이 8년 동안에 컴퓨터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제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지식으로는 도대체 세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종일 낑낑대고 이것저것 해보고 컴퓨터 회사에 전화도 걸어보고 했는데도 정말 막막합니다. 이제 상자도 뜯고 전기도 꽂아봤으니 환불도 못해요.

이번에 다시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써먹지 못하는 컴퓨터라고 하는 것은 그저 비싸게 돈을 주고 산 시커먼 상자일 뿐이구나 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때 제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는데, 하나 그게 뭐냐 하면, 예전에 말씀 드렸던 적이 있는 팟캐스트에 대한 기억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이 팟캐스트라는 인터넷 방송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는 제가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을 하면, 나머지는 학원 쪽에서 방송채널을 개설도 해주고 효과음이나 음악도 깔아주고 등록도 다 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에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유튜브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팟캐스트를 해야 되겠어요. 그런데 제가 할 줄 알아야 말이지요. 남들이 다 해주고 저는 녹음만 했었는데, 이제 제가 처음부터 다 초기 개설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우선 인터넷을 검색해 봤는데, 이건 몇 개를 읽어봤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좀 괜찮은 홈페이지를 하나 찾아서 진행해봤는데, 역시 어려워요. 그것도 이게 한국에 있는 회사가 아니라 미국 애플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미국 담당자한테 몇 번씩 문의도 하고 그러면서도 거의 좌절 일보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정말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당시에는 한 2주 동안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때도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정말 무사히 개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컴퓨터와 씨름을 할 때도, 그래, 그 때 팟캐스트도 했었는데 이 정도를 못할까. 그 때도 주님께서 길을 평탄케 해주셨는데, 설마 이번에 주님께서 내가 포기하기를 원하고 계시지는 않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일을 하나하나 진행을 했더니 정말 부족한 저를 위해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외에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있지요. 하지만 힘들 때마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 그것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고, 예수님만 믿으면 소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예수님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낙심하고 주저앉은 우리를 일으켜 세울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요, 우리의 구원이시요, 우리의 소망 되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도중에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마치 비싸게 주고 산 컴퓨터를 도중에 포기하고 여전히 고물 컴퓨터를 쓰는 꼴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그깟 컴퓨터에 비하겠습니까. 온 천하 우주만물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한 방울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 피를,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한 방울이 아닌, 모든 피를 남김 없이 흘려 주셨는데, 우리가 좌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우리 삶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해결해줄 능력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능력은 그 정도 밖에 안 되나요? 내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도 안되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산 하나를 옮기는 일과 내가 가진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어느 쪽이 어렵습니까. 당연히 큰 산을 옮기는 일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 좁쌀만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믿음, 예수님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 예수님이 우리 앞길을 평탄케 해주신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과소평가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아니다!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내 앞길을 평탄케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26장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正しい人の行く道は平らです。あなたは正しい人の道をならし、平らにされます。

이 믿음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자랑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으로 여기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나요? 주셨다면 언제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시고,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받고,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서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주님께서 평탄케 해주시는 길을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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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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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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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회 간과해주시는 은혜
2021년 2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6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3節~26節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25.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26.すなわち、ご自分が義であり、イエスを信じる者を義と認める方であることを示すため、今この時に、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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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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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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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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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3번째 시간으로서 “간과해주시는 은혜” 見逃して下さる恵み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네 구절의 말씀도 앞의 두 구절과 뒤의 두 구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경우는 앞의 두 구절이 중심이고, 뒤 두 구절은 앞의 두 구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심이 되는 오늘 앞의 두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예전에 제가 들었던 이야기입니다만, 옛날에 나폴레옹 장군이 전쟁을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부하가 전쟁 보고를 왔는데 그 문장이 너무나도 길었대요. 그래서 나폴레옹이 그 부하한테 말하기를, 아니, 지금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긴 보고서를 쓸 시간이 어디 있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이 부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보고서를 짧게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글을 짧게 쓰는 것보다 길게 쓰는 편이 훨씬 더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만, 이 부하는 오히려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글이나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짧게 하는 편이 더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가끔 제게 메일을 보내주시는 분들을 보면 격려의 말씀, 은혜로운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어떤 경우를 보면 그 외의 다양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뭐, 괜찮습니다. 굳이 지금과 같은 코로나가 난리를 치기 전이라 하더라도 세상살이를 보면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스트레스를 제게 보내주시는 메일로 푼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보면 뭐라도 지적을 좀 하고 싶으셨나보죠? 예전에 받아본 메일에 보면 제가 설교를 하는데 원고를 읽는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 말씀 준비를 하실 때에는 원고에 간략히 요점만 적으시는 분들도 계시거나, 아니면 아예 원고를 안 보시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다 적습니다.


사실 제가 신학을 하기 전에 학원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팟캐스트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학원 쪽에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제안을 듣고 제하 처음 한 말이 뭐였냐하면, “팟캐스트가 뭐예요?”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고 보니까 인터넷에 주로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방송이라고 해요. 그래서 저도 대충 방송 내용을 잡고 30분 정도라고 하니까 요점을 간략하게 메모를 해서 대충 애드립으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학원 담당자가 제게 하는 말이, 처음부터 그러지 말고 아예 꼼꼼하게 원고를 적어보라는 거예요. 어느 정도 꼼꼼하게 적냐 하면 웃음소리까지도 한 번 적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뭐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일본어를 가르친 경험도 좀 되는데, 그렇게 웃음소리까지 적을 정도로 할 필요가 있을까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쪽에서 그런 말씀까지 하고 그랬으니, 어디 한 번 써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습관이 안 되니까 잘 안 써지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무슨 수업을 하는데 원고를 읽으면서 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참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참 어려웠습니다만, 그래도 몇 번 해보니까 이게 참 좋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 내에 질질 늘어지는 일 없이 마칠 수 있어서 얼마나 깔끔하게 진행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이 때의 경험이 참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경험도 모든 것을 예비해주시는 주님께서 다 미리 훈련을 시키신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여전히 말씀을 준비하면서 원고를 꼼꼼하게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이유는, 제가 인터넷으로 촬영을 할 때에 보면 한국어와 일본어로 하게 되는데, 만약 꼼꼼하게 적힌 원고가 없으면 그 내용이 매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구절을 제가 완벽하게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충대충 말씀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번째는 사실 이 부분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원고를 꼼꼼하게 적는 이유는 설교 시간이 길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끔 보면 말을 길게 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게 어디 그런가요?

무슨 행사 같은 데에서 귀빈 인사 같은 것을 들으면 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도 불구하고 돌아가면서 몇 십 분씩 하는 것을 들으면 참 힘듭니다. 특히나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뜨거운 여름날 운동회를 하는데 무슨 동네 유지들이 많이 와서 말씀을 많이 하시는지, 그 땡볕에 서 있으면 얘기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보면 학교에서 매주 조회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때 교장선생님이 여러 말씀들을 하시지요. 초, 중, 고, 방학 기간을 빼면 대략 1년에 30번 정도 조회를 한다고 하면, 단순계산으로 30 곱하기 12년이면 몇 번이에요? 예, 360번입니다. 그렇게 많이 교장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기억이 나는 말씀이 있으세요? 글쎄요,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기도도 그렇죠. 무조건 길게 하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디 가서 대표기도를 하시는 것을 들어봤습니다만, 그 분은 짧게 잡아서 한 10분에서 15분은 한 것 같아요. 그러면 듣는 사람이 감명을 받나요? 10분 15분이 1시간 2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게 만약에 식사 기도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밥 다 식어요.

물론 내용에 따라서는 무조건 짧다고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한 두 마디 하고 끝난다거나 주일설교말씀을 5분이나 10분 정도만 하고 끝난다면 은혜가 덜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제가 만약에 원고를 준비하지 않고 설교를 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어쩌면 했던 말도 또 하고 그럴지도 몰라요. 그게 말을 잘 하는 건가요? 말하는 본인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할지는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구절은 어떻습니까.

먼저 중심이 되는 오늘 앞의 두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제가 볼 때에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짧은 두 구절 안에 복음의 핵심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너무 말이 길어지지 않게, 그러나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3장 23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하지요. 99.999%와 100%는 결과만으로 보았을 때에 그 양은 비슷할지 모릅니다만, 의미상으로 볼 때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70%든 80%든 90%든, 하물며 99.999%든 간에 이 숫자에는 무엇이 존재하느냐 하면 <예외>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100%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예외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사람>, 즉 100% 예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예외 없이 모든 사람, 100%가 어떻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쉽게 말해서 의인, 즉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없느냐 하면, 100%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 정직해 보이는 사람,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 100%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절망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어요. 100% 희망이 없어요.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대로라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예, 0%, 그렇다면 무엇이 100%입니까. 그렇습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겪게 될 확률이? 예, 100%라는 끔찍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옥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 삼아 여러 곳에 다녀보는 것은 좋을 수가 있겠습니만, 이 지옥만은 절대로 가서는 안됩니다. 근처에도 갔다가는 큰일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괜찮을 거야.”

혹시 이렇게 생각되십니까. 그럴까봐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100%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늘구멍만한 예외도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경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 나오는 <속량>이 무엇입니까. 사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이 뜻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예, 사전을 찾아보면 되겠지요?

국어사전에 보면 <속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하는 것”

이는 기독교사전이 아니라 일반 국어사전에 이와 같이 나와 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자, 그리고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서 24절의 말씀 순서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와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를 바꾸면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이렇게 바꾸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을 보내주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한 속량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속량의 뜻이 뭐였습니까. 그렇죠. 몸 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것, 즉,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종이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몸 값으로 인해서 자유인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절망 뿐이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몸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벗어날 길을 만들 힘도 없습니다. 자격도 없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 속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빛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럴 힘도 능력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할 몸값으로 하나님은 무엇을 지불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몸값으로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예수님의 생명을 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귀한 예수님을 내주셨습니까. 이는 마치 100원이나 200원 정도 되는 물건을 사는데 10000원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것인가요? 거스름돈이 많이 남는 그와 같은 거래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죄는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헌금을 많이 내셨나요? 아니면 봉사를 많이 하셨나요?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슈퍼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를 생각해봅니다. 1000원짜리 물건을 살 때 1000원을 지불하지요. 그 이유는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 물건의 가치를 1000원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물건을 사는 사람은 그 물건의 가치가 1000원이라고 하는 데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지불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것을 지불해야지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즉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예수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지불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4절 후반부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런 값 없이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거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오라고 하실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우리의 죄가 해결된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로마서 3장 25절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5절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5.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심으로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내어주심으로써, 죄로 인해서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타락한 이후에도 끝없이 사람은 반복해서 죄를 지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왔습니다.


이를 가장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었겠습니까. 그렇죠. 그냥 깨끗하게 다 밀어버린 다음에, 다시 새로 창조하시면 되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참고, 참고, 참고, 참고, 그리고 또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간과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모를 때면 어떻게 해요? 예, 국어사전을 보면 됩니다.

국어사전에는 <간과하다>라는 뜻에 대해서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기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가요? 없으신가요?

예,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간과하신다는 것,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 하나하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신다면, 거기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심을 안 가지신대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지은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무거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이미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주셨어요. 이제 우리가 받을 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우리가 죄를 안 지은 것으로 쳐준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값을 모두 받은 것으로 쳐준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6.すなわち、ご自分が義であり、イエスを信じる者を義と認める方であることを示すため、今この時に、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이로 말미암아 의로우심을 나타낸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나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외에 누군가가 말하기를 자기야말로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기이지요. 거짓말입니다.

이 자격,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의로우신 하나님만 주실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이 조건 하나뿐인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로 살아야 할 우리,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100% 지옥행이 약속되었던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 한 분을 믿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와 의로움을 모두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간과해 주십니다. 없는 것으로 쳐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간과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날까지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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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회 율법의 안과 밖
2021년 2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22절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19節~22節
“19.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律法が言うことはみな、律法の下にある者たちに対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すべての口がふさがれて、全世界が神のさばきに服するためです。
20.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21.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22.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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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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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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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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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2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의 안과 밖” 律法の内と外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앞뒤로 두 구절씩 나누어서 보기로 하겠습니다.

앞 부분은 19절~20절까지이고, 뒤 구절은 21절~22절까지입니다.

우선 앞부분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20절까지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20절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9.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律法が言うことはみな、律法の下にある者たちに対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すべての口がふさがれて、全世界が神のさばきに服するためです。
20.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여기서 19절에 보면 <율법>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율법>이라고 해도 이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좁은 의미의 율법이라고 하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 하에 탈출을 하게 되지요. 이 사건이 이른바 출애굽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자유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법률이 없었고 오로지 애굽의 법률에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탈출한 그들은 이제 자유민입니다.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이 만들어놓은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의 법을 가질 권리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법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이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는데,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무엇무엇을 하라고 하는 명령이 248가지,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 365가지, 그래서 모두 613가지 정도라고 합니다.

당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엄격히 지켜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으로부터 몇 천년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기에 첨부가 되기도 하고, 또한 변형이 되기도 한 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법조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이나 문화, 제도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율법이라고 하면 이는 단순히 법조문이나 구약을 뛰어 넘어,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일컫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절에 나오는 율법을 좁은 의미의 율법, 그러니까 법조문이라는 의미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두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율법에 보면 무엇을 하라고 하는 명령이든,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든 간에 이를 행한다 하더라도 의롭다고 여겨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자,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를 쉽게 이해하면 지금 법률도 마찬가지지요. 특히 형법을 생각하면 알기 쉽습니다. 형법에 보면 누구의 물건을 훔치거나, 누구를 속이거나, 누구를 때리거나, 또는 이는 좀 무서운 말입니다만 살인을 하거나 하게 되면 그 죄에 따라서 형벌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형법에 없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누구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를 속이거나 때린 적이 없다고 해서 상을 준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좀 이상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그건 본전인 셈이고, 법을 잘 지킨 것만으로 큰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은 드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20절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3장 20절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0.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성경에 보면 종종 등장하는 <의롭다> 또는 <의인>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그냥 가볍게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단순히 <그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의인>만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은 뭐라고요? 예, 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 봤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즉 아무리 율법을 평생 동안 열심히 지켜 봤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태어날 때에 100점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런데 율법을 어길 때마다 점수가 깎입니다. 큰 죄를 지으면 점수가 많이 깎이고 작은 죄를 지으면 점수가 조금 깎인다고 해봐요.

그런데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천국에는 의로운 사람, 흠이 없는 사람, 즉 100점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뭐냐 하면, 율법을 어기면 점수가 깎이지만,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 봤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 한대요. 말하자면 점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따지고 싶을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살면서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정말 세상 법으로는 처벌도 받지 않은 작은 죄 몇 개를 지었을 뿐인데,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11절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た方は、「殺してはならない」とも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姦淫しなくても人殺しをすれば、あなたは律法の違反者になっているのです。

아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A라고 하는 죄를 지었으면 A라고 하는 죄에 대해서 죄값을 치르면 되는 것이 세상 법입니다만, 성경에 의하면 무겁든 가볍든 A라고 하는 법을 어기면 B라고 법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니다.

그러니까 큰 죄를 범한 사람이나, 작은 죄를 범한 사람이나 점수는 깎일 뿐이고, 평생 동안 노력해서 율법을 지켜 봤자 점수가 도무지 늘지를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100점인 의인 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99.9점을 받은 사람도, 아무리 노력해도 0.1점이 늘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희망입니까. 절망입니까. 그렇습니다. 절망입니다. 완전한 절망이에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리 힘써 노력해 봤자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리 힘써 노력해 봤자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희망이 생겼어요.

오늘 말씀 뒷부분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22절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22.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이제 율법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이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말합니다. 내가 비록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그 의만 내가 잡으면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의를 잡아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잡아야지요. 목숨을 걸고라도 잡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다 하더라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잖아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 <의>를 잡음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남는 장사겠습니까.

그리고 그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이 되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흰 빨래를 먹물로 열심히 빨아보아도 하얘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절망 속에서 열심이 허우적거려 봤자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화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세상이나 다른 종교를 보면 죽어서 다시 다른 무엇인가로 태어난다는 말을 합니다만, 성경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죽어서 다른 사람으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거나 아니면 하물며 다른 동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 보면, 가끔은 아, 정말 어떤 동물처럼 살고 싶다. 뭐 그렇게 생각해 보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로 살아간다면 어떤 동물처럼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으시겠지요. 다양한 동물을 생각하실 수도 있고, 또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 생김새나 구조적으로 본다면 우리 사람과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모두 눈 코 입 귀가 있어요. 팔과 다리가 있습니다. 머리에는 뇌도 있고 심장과 위장과 대장 소장 등이 있어요. 혈관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우리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를 분석해 보았더니 그 차이가 몇 프로가 같았을까요? 미국에서 2003년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대략 94.8%가 동일하다고 합니다.

뭐, 이쯤이면 거의 사람과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여차하면 동물원에 갔을 때 침팬지를 만나게 되면 전도라도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자, 그렇다고 물론 침팬지한테 전도할 생각을 없어요.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밝혀낸 숫자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4.8%가 아니라 99.9% 동일하다 하더라도 침팬지가 인간일 수가 없고 인간이 침팬지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좋은 초등학교 또는 국민학교를 나오셨겠습니다만, 특별히 어느 분이 좋은 명문 국민학교, 명문 초등학교를 나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동물과 우리 사람들을 비교해보았을 때, 침팬지이건 아니면 기타 수많은 동물들과 우리 인간의 차이, 특별히 생태적인 차이라면 무엇을 들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힌트를 드리자면, 동물이나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생태학적 공간, 소속되어있는 세계에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이 소속되어 있는 세계. 아시겠어요?

이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먹이사슬의 세계입니다.

어렸을 때 공부했던 교과서를 좀 떠올려 보시면 먹이사슬의 맨 밑에는 미생물들이나 작은 곤충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면서 덩치가 큰 동물들이 생기지요. 초식동물이 있고 그 위에는 육식동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주로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 우리 인간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먹이사슬의 제일 위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먹이사슬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그려집니다만, 그러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 끝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먹이사슬의 첫번째 특징이라고 한다면, 먹이사슬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순환이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먹이사슬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는 것은 위에 있는 동물이 아래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천적이 있다는 뜻입니다만, 그렇다면 천적이 없는 맨 꼭대기에 있는 동물은 어떻게 되냐 하면, 그 동물이 죽게 되면 다시 아래 동물들의 먹이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먹이사슬은 단순히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순환이라는 특징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백수의 왕 사자를 부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암컷의 경우에는 수컷이 만드는 무리에서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수컷이 없으면 그 가족이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듬직한 수컷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정말 젊고 힘이 넘치는 수컷은 멋이 있지요. 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컷들은 가족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입니다. 젊고 힘이 넘치는 사자가 영원한가요? 아니요.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고 젊음은 잠시입니다. 나이가 들고 힘이 약해지면 금새 다른 사자들이 공격을 해옵니다. 그러면 싸움이 벌어지고, 싸움에 패하게 되면 비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로 홀로 광야를 떠돌다가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그러면 그 죽은 시체는 다른 작은 동물들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럼 이제 새롭게 가족을 차지한 수컷 사자는 어떤 일을 버리냐 하면, 그전 수컷 사자 사이에 태어난 새끼들을 다 물어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 새끼를 낳도록 하는 것이지요. 참 알고 보면 그 세계가 얼마나 끔찍한 지 모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 그럼 사람은 먹이사슬의 어디에 있을까요. 사자 위에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 있냐 하면, 먹이사슬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먹이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침팬지와 사람 유전자가 아무리 94.8%가 아니라 99.9%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침팬지는 먹이사슬 안에 있는 것이요, 사람은 먹이사슬 바깥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먹이사슬은 완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짐승들이 노약자를 보호한다는 말 들어보았습니까. 먹이사슬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약자는 오로지 강자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될 뿐이고,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실 리야 없겠습니다만, 만약에 그와 같은 먹이사슬의 세계가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그 분은 지금 아주 자신의 힘이 강할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까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히 젊은 사람도 없고 영원히 힘이 센 사람도 없습니다. 그 먹이사슬의 세계에 있게 된다면 그 끝은 누구나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먹이사슬 바깥에 존재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먹으러 올까 봐 덜덜 떨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약해져도 사회적인 제도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 사람이 사는 사회의 냉혹함을 동물의 세계와 비유로 말할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사실 정말로 동물의 세계와 같은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자, 다시 율법과 구원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율법의 세계는 마치 먹이사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구원이 없습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오로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 자신의 힘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먹이사슬의 세계이자 율법의 세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볼까요. 내가 누구한테 맞았어요. 화가 나요? 안 나요? 당연히 화가 나죠.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누군가가 내가 입고 있는 얼마 안 하는 옷을 빼앗으려고 해요. 그러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지금 가격이 문제에요? 아니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내 것을 지켜야지요.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누가 나한테 억지로 무엇인가를 강요해요? 그런 사람을 용서해서는 안 되죠.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가 뭔데 나를 미워해요? 나한테 함부로 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지상정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45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るためです。父はご自分の太陽を悪人にも善人にも昇らせ、正しい者にも正しくない者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내 것을 빼앗으려 한다거나 나를 힘들게 하려는 사람들,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런 사람들과 싸우고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하겠어요? 예, 바보라고 하겠지요.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먹이사슬에 속한 사람들 즉, 율법 안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에 속한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바깥에 속한 사람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 아니,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우리가 율법 안에 속해 있으면, 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계속 점수가 깎이고 결국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서 은혜에 속하고 예수님께 속하게 된다면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채워 주시고 우리가 빼앗긴 것을 갚아 주십니다.

이사야 61장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우리 힘으로 복수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먹이사슬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축복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망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속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먹이사슬의 세계, 율법에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고,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구원에 속한 자로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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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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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회 세 가지 잃어버린 죄
2021년 2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18절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9節~18節
“9.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にすぐれているところはあるのでしょうか。全くありません。私たちがすでに指摘したように、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すべての人が罪の下にあるからです。
10.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11.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12.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13.「彼らの喉は開いた墓。彼らはその舌で欺く。」「彼らの唇の下にはまむしの毒がある。」
14.「彼らの口は、呪いと苦みに満ちている。」
15.「彼らの足は血を流すのに速く、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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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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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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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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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1번째 시간으로서 “세 가지 잃어버린 죄” 三つの失った罪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조금 길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잘못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먼저 이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리고 다음으로 그 잘못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9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만, 우선 10절부터 18절까지를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3장 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10절부터 18절까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는 3장 10절~12절, 두 번째는 13절~15절, 그리고 세 번째는 16절~18절입니다.

먼저 첫 번째인 3장 10절~12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12절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0.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11.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12.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여기서 우선 12절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무익하다>(無用の者となった) 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연령대에 있어서 차이는 있습니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유익한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아니면 무익한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올 만큼 큰 상을 받았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큰 죄를 지은 것도 없이 결혼해서 자식들 낳고 이만쯤 길러놓고 그랬으면 된 거 아니야? 돈도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집과 차도 있고,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벌어놓았다. 이 정도면 유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 그 정도면 훌륭하지요. 부끄럽지 않은 아들 딸,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내,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 예, 그 정도로면 충분히 유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로마서 3장 12절에 나온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의 말씀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인생, 그와 같은 부끄럽지 않은 인생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 인생입니다. 그러나 12절에 등장하는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 말씀일까요? 아니요.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인생,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무난하고 그럭저럭 유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지으시고 우리 육체를 지으시고 지금 오늘 이 순간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기대 없이 우리를 지으시고 인도해주셨을까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대를 하셨습니다. 무슨 기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대를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 우리가 큰 죄 없이 살면서,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기르고,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유익한 것인가요?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11절에 등장하는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 시각으로 고정을 시켜버리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밖에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의인>이라고 하는 말씀, 그렇다면 과연 의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해서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내게 아무리 유익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은 것이요, 하나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무익하다고 생각되면 무익하다고 판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인 것입니다. 모든 가치 기준, 모든 판단 기준을 내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인이 얼마나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언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우리가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큰 일이지요.

그렇다면 몇 번 정도 떨어져도 괜찮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자동차로 어디까지 여행을 갑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몇 번까지라면 다리에서 떨어져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고속도로에서 몇 번까지라면 오른쪽이나 왼쪽 벽에 갖다 박아도 되겠습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요. 말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다리를 건너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한 번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큰 일이 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한 번이라도 갖다 박으면 큰 일이 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운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만 봐서는 안 되지요. 도로표지판도 잘 봐야 합니다. 규정 속도가 몇 킬로인지, 앞에 커브가 있는지 없는지, 아니면 또 공사 중인지 사고가 났는지를 전광판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려요? 내 자동차의 속도계도 안 보고,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달려요? 앞에 커브가 안 보이니까, 공사 중이 아닌 것 같으니까, 사고가 안 난 것 같으니까 그냥 내 멋대로 달려요? 이렇게 된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보아야 하는 속도계나 도로 표지판 같은 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치게 되면 이는 곧 사망, 우리의 영적인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대를 가지고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셨는데, 나는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내 시각만 고집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게 되어서 결국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 무익한 인생을 보내게 되는,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잃었기 때문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셨는지를 망각하고 내 생각만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오늘 본문 중에서 첫 번째 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인 3장 13절~15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3절~15절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3.「彼らの喉は開いた墓。彼らはその舌で欺く。」「彼らの唇の下にはまむしの毒がある。」
14.「彼らの口は、呪いと苦みに満ちている。」
15.「彼らの足は血を流すのに速く、

여기서는 우선 단어부터 정리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3절에서는 <무덤, 속임, 독사의 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4절에서는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악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역본에 보면 독설이라고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피 흘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봅니다. 우선 무덤과 속임, 독사의 독……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하나로 연결시켜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우선, 무덤은 무엇입니까. 이는 죽은 사람을 안치하는 곳입니다만, 그렇다면 왜 그 곳에 안치하는가 하면, 알기 쉽게 생각한다면, 무덤은 사람을 썩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무덤, 썩는 곳, 죽음의 장소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덤, 죽음의 장소로 어떻게 끌어들이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을 속이는 방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말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속여가지고는 그 죽음의 장소 무덤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독이 있습니다. 독이 몸 우리의 몸 안에 들어가면 우리 몸이 말을 안 듣게 되지요. 눈이 어두워지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독이 무엇이냐 하면 대표적인 독이 바로 뇌물과 음행입니다.

뇌물은 성경에서 엄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賄賂を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は聡明な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

신명기 16장 19절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あなたはさばきを曲げてはならない。人を偏って見てはならない。賄賂を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 は知恵のある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からである。

그리고 음행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만 특히 인상 깊은 곳은 잠언입니다. 조금 길지만 오늘은 시간 관계상 잠언 7장 21절부터 23절까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7장 21절~23절
“21.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23.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彼女は心動かすことばで彼を誘惑し、滑らかな唇で彼をいざなう。
彼はただちに、彼女の後について行く。牛が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ように、足かせが愚か者を懲らしめているかのように。
最後は矢が彼の肝を射抜く。それは、自分のいのちがかかっているのを知らずに、鳥が罠に飛び込むようなものだ。

이 속여서 끌어들이는 유혹에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소가 죽으러 가는 것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디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을 썩게 만드는 곳, 무덤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저주와 악독, 즉 독설(呪いと苦み)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저주하고 사람에게 독설을 하게 된다면, 이는 입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는 알기 쉽겠지요.

다음 15절에 등장하는 <피 흘림>입니다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피를 흘린다고 하면 이는 거룩한 희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나오는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와 같은 뜻이 아니라, 이 또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1장 16절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彼らの足は悪に走り、人の血を流すのに速いからだ。

잠언 12장 6절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悪しき者のことばは血に飢え、心の直ぐな人の口は自分を救い出す。

잠언 29장 10절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血に飢えた者たちは誠実な人を憎み、心の直ぐな人のいのちを狙う。

이와 같이 본다면 로마서 3장 13절~15절은 상대방을 속여서 죽음의 무덤으로 끌어들이고 저주와 독설로 상대방을 괴롭히고, 이제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물리적으로도 상대방을 해롭게 하는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오늘의 두 번째 죄인,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

지금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보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언급된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된 죄는 어떤 죄라고 생각되십니까.

세 번째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자,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된 죄는 어떤 죄라고 생각되십니까.

여기서 힌트를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25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金持ちが神の国に入るよりは、らくだが針の穴を通るほうが易しいのです。」

자, 이게 힌트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3장 16절~18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이를 정리해 보면, 어떤 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은 파멸과 고생이 있다고 합니다. 평강을 알지 못하는 길이에요. 그 길을 가는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길, 저는 제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이 시점에서 다시 문제를 한 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소부터 성경을 잘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쉽게 알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 구절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主は自ら助くる者を助く

이 구절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1번 출애굽기, 2번 신명기, 3번 잠언, 4번 없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음 말씀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여호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主は自ら助くる者を助く

1번 출애굽기, 2번 신명기, 3번 잠언, 4번 없다.

예, 정답은 이런 내용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 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である。まことにこの方こそ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の日々は長く続く。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土地の上に住むことになる。

시편 115편 9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일단 너희들이 노력을 한 다음에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문제가 바로 돈 문제죠.

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0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요? 예, 돈이야 많은데 1000만원이 문제인가요? 돈으로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1억원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 중에서 1억원을 내고 해결합니다. 10억원? 100억원? 그래도 부자이니까 문제가 없어요. 내 돈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내 힘으로,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1억이요? 10억이요? 아니요. 돈 100만원, 돈 10만원도 없는 분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머니에 만원도 없는데 어떻게 100만원 1000만원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돈 없는 사람은 비극이지요. 자기 힘으로 할 수가 없잖아요. 반면에 돈 많은 사람은 참 행복해 보입니다. 돈이 얼마가 필요하든 아무런 걱정 없이 척척 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에요.

그러나 이는 사람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눈을 돌려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보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이나 재산이 언제까지나 자기한테 있나요?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문제가 돈이나 재산으로 해결되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자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해결했습니다. 이러면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세 번째 본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자기 힘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 노력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입니다. 고생의 길입니다. 평강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 힘과 능력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려움 앞에서 주저앉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넉넉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무슨 돈 문제 같은 것이 생기면 평소부터 아예 자기 힘을 의지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꿈에도 자기 노력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한테 힘이나 능력이 있어야 의지하든지 말든지 하지, 자기한테 힘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왜 그런 쓸데 없는 노력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평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훈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허, 지금까지 내 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됐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해결해주실 거야! 하고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主よ、偉大さ、力 、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속해 있습니다. 모든 힘과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힘으로 해 봤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죄,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힘과 노력만을 의지하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의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세 가지 죄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죄
둘째는,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죄
셋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죄

이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겠지요. 이와 같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꾸짖으실 것이라는 것은 우리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비로소 9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9.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にすぐれているところはあるのでしょうか。全くありません。私たちがすでに指摘したように、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すべての人が罪の下にあ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보면 우리가 해야 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정도는 구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잘 지키고 있나요? 그리고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사람들을 보고 믿음이 없다고 비판이나 비난을 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다가오면 정말 평소에는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을 해보아도,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비판할 수가 없어요.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한 믿음을 가진, 정말 연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죄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 두 번째로 나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가 죄 아래에 있고, 어차피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잘난 것이 있어야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지, 내가 잘나지도 내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누구를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회복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이기고 또 이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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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회 빛 가운데 행하라
2021년 1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7절~8절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7節~8節
“7.では、もし私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なら、どうして私はなおも罪人としてさばかれるのですか。
8.「善をもたらすために悪を行お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せんか。私たちがそう言っていると、ある者たちから中傷されています。そのように中傷する者たちが、さばきを受けるのは当然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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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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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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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0번째 시간으로서 “빛 가운데 행하라” 光の中を歩みなさ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습니다만, 오늘 말씀도 조금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7절~8절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では、もし私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なら、どうして私はなおも罪人としてさばかれるのですか。
8.「善をもたらすために悪を行お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せんか。私たちがそう言っていると、ある者たちから中傷されています。そのように中傷する者たちが、さばきを受けるのは当然です。”

이 말씀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따옴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따옴표를 붙이면 됩니다.

자, 주보를 보시거나 성경을 보시면서 우리 한 번 따옴표를 붙여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7절에서는 <그러나>(では) 다음부터입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もし私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なら、どうして私はなおも罪人としてさばかれるのですか。

여기에 따옴표를 붙여 주시고, 그 다음에 8절에서는 <또는> 다음부터 <하지 않겠느냐>까지입니다.

그러니까 8절에서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善をもたらすために悪を行おう」하는 부분에 따옴표를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자, 되셨나요?

그 다음에 좀 쉽게 하기 위해서 7절에서 따옴표를 붙인 부분을 우선 <A>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따옴표를 붙인 부분을 <B>라고 해봅니다.

이렇게 우선 해 놓고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7절~8절
“7.그러나 <A>
8.또는 <B>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では、<A>
8. <B> ということになりませんか。私たちがそう言っていると、ある者たちから中傷されています。そのように中傷する者たちが、さばきを受けるのは当然です。”

항상 말씀 드리듯이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였죠? 예, 바울입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을 비방하기를, 바울이 <A> <B>라는 말을 하더라. 뭐, 이렇게 말하면서 비방한다, 즉 자기들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다면 바울은 실제로 <A>나 <B>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 바울이 <A>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B>라는 말을 하기도 하더라……이러면서 어떻게 해요? 예, 비방하고 있다. 비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는 자기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허위 사실, 요즘 말로 하자면 fake news 거짓 뉴스를 퍼뜨리고 있다. 이런 유언비어,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즉,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지금 바울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요. 기쁘거나 평안한 것처럼 느껴지세요? 아니요, 오히려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A>라고 했다, <B>라고 했다고 하는데 말이야.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이러고 있다고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A>나 <B>라고 하는 말은, 적어도 바울이 듣기에 좋은 말이겠습니까. 안 좋은 말이겠습니까. 예, 안 좋은 말이지요. 나는 그런 안 좋은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내가 그런 안 좋은 말을 했다고 하니, 정말 화가 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A>나 <B>가 얼마나 심한 말이길래 바울은 이토록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처음에 따옴표를 쳤던 <A>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7절 <그러나> 다음 부분이었지요? 읽어드리겠습니다.

<A>는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여기서 만약에 <나의 거짓말로…… (私の偽りによって)이 아니라, 나의 행함으로(私の行いによって)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私の行い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なら、どうして私はなおも罪人としてさばかれるのですか。

라고 되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나의 행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면, (私の行い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 하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지언정 죄인처럼 심판을 받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행함(行い)>이 아니라 <거짓말(偽り)>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私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 이를 좀 단순하게 한다면, 우리의 거짓말로 하나님을 높인다……라는 말이 됩니다만, 이게 가능 할까요?

자, 여기서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거짓말(偽り)>입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거짓말은 나쁜 것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보면 사실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와 친한 분이 입원을 했어요. 그 분은 고령인데다가 그 병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분에게 우리가 병문안을 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몸이 많이 발랐고,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분한테 가가지고 하는 말이, 아이고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도 안 되 보이니 죽을 날 얼마 안 남았네요……그렇게 말합니까? 아무리 솔직한 게 좋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좀 곤란하겠지요.

오히려 겉보기는 전혀 아니지만, 말로만이라도 <어머,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아 보이네요? 기운 내세요. 금방 퇴원하실 것 같은데요?> 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사실 이 병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몸이 안 좋으신 분이 계시면, 주변에서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을 주셔야 해요. 정말 그렇게 몸도 안 좋고 기운이 없다고는 하지만,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힘을 주고 응원을 해주면, 기운을 차려서 정말 의사 선생님들도 놀랄 정도로 회복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6절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について、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짓말은 어떤 거짓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악한 거짓말(悪なる偽り)입니다.


그러면 악한 거짓말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이 거짓말로 인해서 악한 사람이 이득을 얻고, 반면에 선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교묘한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사기 쳐서 선한 사람으로부터 돈을 빼앗게 되면, 거짓말을 한 악한 사람은 이득을 보게 되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선한 사람은 돈을 빼앗겨서 피해를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악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앞서 살펴보았던 로마서 3장 7절에 등장하는 <거짓말>은 선한 거짓말(善なる偽り)일까요. 아니면 악한 거짓말(悪なる偽り)일까요.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로 따옴표를 찍은 <B>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A>와 <B>는 한 세트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A>와 <B>를 나란히 놓아보겠습니다.

<A> <우리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私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

<B>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善をもたらすために悪を行お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せんか。

<B>에서 <선을 이룬다>(善をもたらす)는 <A>에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B>에 나오는 <악을 행한다>(悪を行う)는 것은 <A>에서 <거짓말을 한다>(偽り)는 것에 해당합니다.

자, 조금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셨을지는 모르지만,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7절에 등장하는 <거짓말>은 악한 거짓말(悪なる偽り)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A>를 바꾸어 보면,

<우리의 악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私の悪なる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

자,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악한 거짓말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여러분께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바울은 지금 화를 내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퍼뜨리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악한 거짓말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기에 바울은 화를 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악한 거짓말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예,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느 방송을 보니까 한 교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 보면 여러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몸이 아파서 목사님한테 기도를 받았는데, 그 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다고 간증을 하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병이 나아야 간증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기도는 받았지만 아직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무슨 간증을 하느냐고 했더니만, 아니래요. 간증을 하고 그래야지 병이 낫는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배 시간에 앞에 나가서,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목사님한테 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다고 간증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병이 낫겠어요? 아니요. 안 낫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거짓 간증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셨나요? 아닙니다. 높임을 받은 것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예요? 예, 거짓 간증을 시킨 악한 목사가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들으면 참 어이가 없습니다만, 사실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심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보면 내가 꿈을 꾸었다, 내가 환상을 보았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들었다고 하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자기는 선지자다, 자기는 예언자다, 자기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정말 그야말로 구약시대 때의 사무엘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을 흉내 내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참 많으신 것 같습니다.

꿈 꾸는 것 좋습니다. 환상을 보는 것도 좋아요.

민수기 12장 6절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主は言われた。「聞け、わたしのことばを。もし、あなたがたの間に預言者がいるなら、主であるわたしは、幻の中でその人にわたし自身を知らせ、夢 の中でその人と語る。

하나님께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꿈이나 환상이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계시인가요?


예레미야 23장 25절~26절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する預言者たちが、『私は夢を見た。夢を見た』と言うのを、わたしは聞いた。
いつまで、あの預言者たちの心に偽りの預言があるのか。心の偽りごとを語る預言者たちのうちに。

예레미야 23장 32절
“3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見よ。わたしは偽りの夢 を預言する者たちの敵となる──主のことば──。彼らは、偽りと自慢話をわたしの民に語って迷わせている。わたしは彼らを遣わさず、彼らに命じもしなかった。彼らは、この民にとって何の役にも 立たない──主のことば。


예레미야 29장 8절~9절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 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꼭 목사나 사역자가 아니라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 중에서 보면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꿈이나 환상을 강조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예를 들어서 누가 제게 와서, 내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금식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하고, 제게 물으신다면, 솔직히 저는 그러지 말라고까지는 말씀을 못 드립니다. 금식이 나쁜 것도 아니요, 자기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내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더러 금식을 하라고 하셨으니까 금식하세요……어느 분이 이렇게 제게 말씀하셨다면,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만약에 저도 똑같이 전날 밤 꿈속에서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면 저도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전혀 그런 꿈을 꾼 적도 없어요. 그래도 따라야 하나요?

가끔 기존 교회에도 보면 무슨 선지자 흉내, 선지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내가 어제 환상을 봤는데……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말을 하십니다.

여러분,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택 받은 극소수인 사람들과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잘못 알고 선지자 흉내를 내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경우가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지자 흉내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3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나 말라기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는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아무리 베드로나 바울이라 한다 하더라도 예언된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베드로나 바울이 예언되지 않았다는 이유는, 그 분들이 별 볼일 없어서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이나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이 살아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 예언된 선지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시대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지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나 바울처럼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7절 말씀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악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私の悪なる偽りによって神の真理がますます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

그렇다면 악한 거짓말이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렇습니다. 악한 거짓말이란, <이 거짓말로 인해서 악한 사람이 이득을 얻고, 반면에 선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인데, 그렇다면 이 거짓 선지자가 하는 악한 거짓말은 어떻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이 하는 거짓말로 인해서 악한 자신들은 이득을 보지만, 그 사람들을 따르는 선한 사람들은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라고 하는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그리고 목사라고 하는 직함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악한 거짓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시간을 빼앗기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나 평안마저도 빼앗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조직, 자기 교주만을 위해서 자기들 멋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성경이 아닌 엉뚱한 책을 주면서 그것을 공부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또 그 사람들의 특징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엉터리 사상을 주입시킵니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성경을 가르친다고 세뇌합니다. 자신들의 교주만이 진정한 선지자라고 세뇌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반드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과 같이 공부하고 있는 것을 비밀로 하라고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기독교 활동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겠어요. 그것만 보더라도 벌써 이상한 일이지요.

얼마 전 제게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이는 목사가 아니라 성경을 조금만 아는 분이라면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메일을 보내온 사람은 자기를 목사라고 했는데, 그 메일 마지막 문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뭐라고 적혀 있었냐 하면 <한국 서울 모 교회의 목사 올림>이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아니, 자기를 목사라고 하면서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얼마나 자기 자신들을 숨기고 싶으면 자기 교회를 밝히기도 꺼려하겠습니까.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1장 6절~7절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もし私たちが、神と交わりがあると言いながら、闇の中を歩んでいるなら、私たちは偽りを言っているのであり、真理を行っていません。
もし私たちが、神が光の中におられるように、光の中を歩んでいるなら、互いに交わりを持ち、御子イエスの血がすべての罪から私たちをきよめてくださいます。


악한 거짓으로는 하나님을 높이실 수가 없습니다. 어둠 속의 행함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악한 무리들이 이득을 얻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지극히 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악한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너무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간교하고 교묘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지금도 어둠 속에서 그들의 악한 교주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 만들어 놓은 엉터리 가르침을 따르면서 괴로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악한 거짓말이 아니라, 참된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비춰주시고 예수님께서 비춰주시는 빛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행하면서 참된 믿음, 참된 말씀 그리고 참된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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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회 의로운 과정
2021년 1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3章5節~6節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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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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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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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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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의로운 과정” 義なる過程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계속해서 바울의 자문자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소설을 읽듯이 본문을 보게 된다면 조금 혼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구성이 문법적으로 조금 난해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처럼 하나하나 살펴가면 충분이 이해할 수가 있고, 이 말씀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될 경우에는 종종 현대인의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는 개역개정이나 현대인의 성경이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어려운 이유가 단어에 있지 않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장 구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 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여기에 보면 <불의>와 <의>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선 이 단어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문장을 좀 쉽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러면 여기서 단어도 조금 바꾸어서 말씀 드리면 다음가 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부당하시냐”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시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 즉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라는 것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시편 145편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私の神 王よ 私はあなたをあがめます。 あなたの御名を 世々限りなくほめたたえます。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송축하겠다, 찬송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그리고 이사야 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정해졌지요?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 삶의 목적이 정해졌다면, 다음은 그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의 직접적인 뜻은, 앞을 보고 걸어가든, 게처럼 옆 걸음으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뜻으로서,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애초에 정한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어에도 이런 말은 있지요.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끝이 좋으면 다 좋아》<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는 셰익스피어 희곡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이 뜻도 역시 최종적인 결과만 좋다면 그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삶의 목적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행함에는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행함이란 예배도 있겠지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흔히들 성수주일이라고 해서 주일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토요일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 때문에 지금도 일부 교회에 따라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는 성경적으로 볼 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토요일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 일요 예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이는 마치 구약의 모든 규례들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사를 지낼 때도 구약의 율법처럼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불로 태우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구약에 적힌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지금도 할례를 받는다거나 짐승들을 끌어다가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린다거나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다른 건 안 지키면서, 안식일이 토요일이니까 그것만 지키면 된다? 이건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인가요? 우리가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님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날이에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まことに、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二人が、どんなことでも地上で心を一つにして祈るなら、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はそれをかなえてくださいます。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모였을 때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다만 관행상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 월요일이든 화요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주님은 그 예배를 언제든지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는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에베소서 1장 22절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すべて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キリストを、すべて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として教会に与え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회사는 사장님이 주인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의 머리는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회사들 보면 참 다양합니다.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모습도 다양하지요. 그 이유는 그 회사의 주인인 사장님이나 경영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인마다 경영방침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기업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영방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 경영방침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되어야 하겠지요. 모든 교회가 100% 처음부터 끝까지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대원칙인 이 성경에서 벗어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를 물질로나 봉사로 섬기는 일 또한 하나님을 높이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렇죠. 하나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것 또한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먼 곳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저도 여러 방법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때 보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위로와 격려를 받을 때가 있나 하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심한 말을 들을 때도 있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들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도 주님께서 기억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축복해주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늘도 한 걸음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있어서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나 헌신이나 전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이는 일은 의로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에 불의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역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이게 할 수 있다고 할 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부당하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에 하나님이 부당하시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5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라는 표현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검은 것은 하얗다>, <선한 것은 악하다>라고 하는 전혀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요.


이처럼 성경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인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기 쉬운 사건을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작년 2020년 10월에 한국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어떤 사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만, 한 1년 전쯤부터 어떤 사람이 그 사찰에 와서는 할렐루야,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사찰의 현수막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종을 치려고 하면 그 종을 못 치게 방해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결국 작년 10월에는 그 사찰에 불을 붙여서 건물 모두를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신의 계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실 의외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문화재관련 책을 읽어보니까, 거기에 의하면 어느 사찰에 가보았더니 그 사찰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 위에 누군가가 십자가 모양으로 낙서를 해놓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종교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이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간음이라고 하겠지요. 왜 이를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이는 바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성경에서 간음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역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신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한다는 일은,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배신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철저하게 금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수 천년 동안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다른 종교행위를 불법적으로 방해하거나 종교시설을 불법적으로 훼손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를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신다고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세상의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용의자 중에서 어떤 사람이 대단히 수상하게 여겨졌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어요. 그래서 하루는 경찰이 그 집에 몰래 들어가서 방을 뒤졌는데, 그 용의자 집에서 그 살인사건에 쓰였던 흉기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 흉기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었고 용의자의 지문도 찍혀 있었어요. 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를 증거로 해서 이 용의자를 교도소에 보낼 수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정말로 그 용의자가 틀림없는 범인이었다고 해도, 그 증거를 가지고는 이 용의자를 교도소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경찰이 아무런 영장도 없이 몰래 그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 행위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건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로운 일입니다. 정당한 일이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다양한 수사방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진정한 증거와 진정한 범인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도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면, 결국 범인체포라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도 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일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만으로 족해요? 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솔직히 눈에 보이는 선물을 안 받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사람마다 취향은 각각이라서 단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 생일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아서 기뻐했던 그 선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물은 이 사람이 산 것이 아니라 어느 가게에서 몰래 훔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속여서 얻은 돈으로 산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의로운 결과를 위해서는 그 과정 역시 의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39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를 잇는 것이 39절 전반부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입니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러면 불완전한 신앙이란 100점 만점에 50점이라는 뜻이에요? 아닙니다. 불완전한 신앙은 50점도 40점도 아닌 0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또한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전해지겠습니까. 비록 그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훼방을 하고, 불을 지르고 하면, 그 사람들이 회개해서, 아, 예수님을 믿어야겠구나 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오!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런다고 하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진노를 내리신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불의가 아닙니다. 불법이나 부당함도 아닙니다. 불의나 불법이나 부당함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그 어떠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로마서 12장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선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의한 의로운 과정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전하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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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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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회 참되신 하나님 말씀
2021년 1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3절~4절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3節~4節
“3.では、どうですか。彼らのうちに不真実な者がいたなら、その不真実は神の真実を無にするのでしょうか。
4.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すべての人が偽り者であるとしても、神は真実な方であるとすべきです。「それゆえ、あなたが告げるとき、あなたは正しくあられ、さばくとき、勝利を得られ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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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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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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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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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참되신 하나님 말씀” 真実なる神のこと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3절~4절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3節~4節
“3.では、どうですか。彼らのうちに不真実な者がいたなら、その不真実は神の真実を無にするのでしょうか。
4.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すべての人が偽り者であるとしても、神は真実な方であるとすべきです。「それゆえ、あなたが告げるとき、あなたは正しくあられ、さばくとき、勝利を得られ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항상 그랬습니다만, 이 말씀을 보면 적지 않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선 이 <미쁘다>라는 말이 좀 애매하게 들릴 수가 있겠지요. 일상생활에서는 잘 안 쓰이는 말입니다만, 이 말은 그 어감 상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실 수가 있는데, 사실 이 뜻은 그게 아니라, <참되다> <진실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에 나온 성경구절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
“3.그런데 만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디 가겠습니까?
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성경에도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하시는 데에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합니다.

자, 오늘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 측면, 상대방의 믿음과 나의 믿음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먼저 첫째로는 상대방의 믿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책들처럼 단순히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책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것입니다만,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된다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이 변화합니다. 우리 생각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완전히 변하게 되어서, 사람만을 의지하고 세상 만을 의지했던 삶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땅 끝이 어디입니까. 저기 먼 나라. 아프리카나 이름도 잘 모르는 먼 곳이 땅끝인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곳만이 땅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먼 나라까지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킬 수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의 땅 끝은 그런 먼 나라, 먼 지역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복음을 전파한 적이 없는 우리 이웃, 그 곳이 바로 땅끝이라고 하겠습니다.

꼭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 그 곳에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전하라고 했으니,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했더니 정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린 땅처럼, 바싹 마른 땅이 옥토가 되어가듯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지요.

하지만 전도를 좀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되나요? 아니요. 그게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한테는 전도 하기가 쉬울까요?

어떤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전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도 중 하나가 바로 가족 전도라고 합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까운 존재라고는 해도, 이 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아니, 하나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베드로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그 날에 신도 수가 3천 명이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전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요. 말씀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서요? 마귀 사탄이 방해해서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요?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크게 붙여놓았던 글씨인데, 거기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냐 하면, 참 간단합니다. “손님이 짜다면 짜다”

참으로 간단명료하고도 멋진 글 아닌가요? 예전에는 식당 사장님이 왕이요, 주방장이 만드는 음식맛이 진리였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방장이 맛있다 하더라도 고객에게 그 맛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고객 중심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만, 상황이 안 좋을 때 보면 선생님들마다 반응이 대체적으로 둘 중 하나에요.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학생 탓이나 환경 탓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는 거예요. 자기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또는 요즘 자기 수업의 학생이 적은 이유는 한일관계가 안 좋아서라는 거예요. 이 이유들을 보면 자기 탓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업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교재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환경 탓이나 학생 탓을 하게 되면, 그 선생님한테는 본인이 바뀔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됩니다. 자기는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을 바꾸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무엇인가 잘 안 될 경우에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자기에게 있어서 개선점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이 전파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원인을 상대방이나 아니면 하물며 하나님 탓을 해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야지만 우리 스스로가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전도를 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요. 이럴 경우를 보면 대체적으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힘써 알자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는 이유도 다름아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말씀이 이웃에게 전파되어 우리 이웃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지역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둘째로는 나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여러분의 믿음은 강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약한 믿음입니까.

예, 이상적으로라면 모든 분들이 강한 믿음,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그는 자신이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흔들릴 때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이 때에는 과거에 기도 응답을 받은 체험이나 아니면 여러 신앙서적이 도움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이 되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위인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계보, 우리 식으로 한다면 족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렇죠.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도 완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계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41대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계보에 보면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계보에 여성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본다면 요즘에는 족보에 여성 이름을 적는 경우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옛날에는 족보에 여자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기록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 그 남자 쪽 족보에 성씨만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여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미성년자나 여성은 그 인구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것도 다섯 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와 같은 남녀차별이 심했던 상황에서 이 신성한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여성이라고 하면 상당히 훌륭하고도 완벽한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름을 본다면, 마태복음 1장 3절에 다말(タマル), 5절에 라합과 룻, 6절에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16절에 마리아, 이렇게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남녀차별만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차별도 상당히 심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냐 하면, 아니에요. 적어도 5절에 등장하는 라합과 룻은 이방인 여성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를 함락 시켰을 때에 그 여리고 주민이었고, 룻이라고 하는 여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모압이라고 하는 지역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출신성분이라도 좀 괜찮았냐 하면, 이것도 꼭 그렇지가 않아요. 3절에 등장하는 다말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를 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ユダがタマルによってペレツとゼラフを生み……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쌍둥이입니다.

그렇다면 다말이라고 하는 여인은 유다의 아내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지요.


창세기 38장에 보면 시간 관계상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ペレツ)와 세라(ゼラフ)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성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지요.

그리고 6절에 등장하는 우리야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이는 다윗 왕이 자신의 충신 우리야로부터 빼앗은 밧세바(バテ・シェバ)입니다. 다윗의 왕위는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게 된 아내인 밧세바 사이에서 얻은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지요.

이처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족보로서 걸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너무 부족한 족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완벽하지는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의 족보라고 한다면,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완벽한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는 어떠한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흠이 없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으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단히 좀 여러모로 부족한 족보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 27대 왕 중에서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해서 25대 철종 때까지의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는 한국의 국보 151호이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양은 2000권이 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이를 다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대궐에 있었던 사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이 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당대 왕이나 후손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아무리 왕이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기록을 없애거나 바꾸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조선시대를 본다면 똑 같은 왕이라 하더라도, 권력이 강했거나 비교적 강하지 못했던 왕도 있었습니다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왕 중에는 조선 3대 왕인 태종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는 초대 왕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인데, 장자가 아니었던 그는 왕위를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꾸미기도 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 대한 대단히 흥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실록 7권에 보면 서기 1404년, 태종 4년 2월 8일에 있었던 기록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 내용은 뭐냐 하면요. 태종이 말을 타고 직접 화살과 활을 가지고 노루사냥을 하던 중에 화살을 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치지는 않았는데, 이 태종의 첫마디가 뭐였냐 하면, 이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아라……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태종이 왜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 이유야 뻔하지요. 사관은 무엇이든지 다 기록하는 사람인데, 왕이 되어가지고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도 창피하니까, 이 사실을 사관이 모르게 해라……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걸 사관이 알아차리고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이에요? 왕이 말하기를 “야,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비밀로 해야 돼!”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당시 왕의 말 한 마디는 어명입니다. 그야말로 헌법이나 법률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역사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의 이와 같은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하,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구나. 하는 단순히 그것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태종 본인이 이 기록을 보았더라면 이는 99%도 아니지요. 100% 이 기록을 빼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조작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존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왕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권력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내용, 그것만이 아니라, 이걸 비밀로 하라고 하는 말까지도 여과 없이 기록되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다는 증거, 그 기록들이 모두 충분히 사실로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자, 이 성경, 예수님의 족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 사람들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를, 우리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완벽한 족보, 순수한 유대인에 의한 족보, 어떠한 작은 흠결도 없는 족보로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족보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리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족보로서는 충분하지 않는 점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 무엇 하나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은 말씀, 오로지 사실만이 적힌 책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제일 첫 구절.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부터 시작해서

성경 제일 마지막 구절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까지 모두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사실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도 사실이요, 물위를 걸으신 것도 사실이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보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뿐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게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이자 우리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 데에는 이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겠지요.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힘써 알고, 이로 인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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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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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2021년 1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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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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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도 3장에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것이 지난 2020년 9월 6일이었고, 3개월만에 2장까지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절기에 맞추어서 다른 주제로 말씀을 전해드린 적도 있습니다만, 로마서가 16장까지 있고, 2장을 나가는데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면, 단순계산으로 24개월, 2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제 3개월을 했으니 남은 기간은 대략 21개월 정도가 되나요?

하지만 또 모르죠. 그렇다고 무슨 마감이 있는 것은 아니니, 더 길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중요한 로마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살펴나가도록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2장을 끝냈으니, 학교에서도 일정 시기가 되면 시험을 보죠? 그렇다면 우리도 간단한 시험을 볼까 합니다. 아니요.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마세요. 무슨 문제지나 답안지를 나눠드리고 쓰거나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드린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해오신 분이시라면 어렵지 않게 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문제가 나갑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이에 대한 답과 그 근거를 논하시오.

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을 점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유대인이란 무엇이고 이방인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유대인은 그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신명기 14장 2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받은 민족이요, 또한 할례 받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민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무엇이냐 하면, 이 구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심도 없고 율법도 할례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하면 이제부터 이스라엘 말도 배워야겠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스라엘 말을 어떻게 배우나 하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각각 한국이나 일본이라고 하는 구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김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양사람처럼 생겼고, 우리 얼굴을 보면 동양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 외견상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느냐 하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2장 29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표면적인 유대인은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표면적 이방인이라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이요, 할례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 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야지만 우리는 오늘 살펴볼 말씀을 비롯해서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저도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대한 해설서인 주석서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주석들을 보면 온통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보면 예를 들어서 사무엘서나 열왕기나 역대서 같은 것을 볼 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그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유대인>을 외견상 유대인, 저기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의 유대인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야지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인 로마서 3장 1절~2절까지만이 아니라 8절까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바울은 지금 자문자답, 그러니까 자신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만약에 아무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면 굳이 여기서 자문자답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전제를 염두에 두고 이제 이 질문과 답변들을 몇 회에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첫 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앞서 2장까지를 보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고 할례를 받은 표면상의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좋은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한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제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일당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는 당시 임금으로서 평균적인 금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보면 시간이 나오는데, 이는 유대식 시간표기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과 조금 다릅니다. 우선 성경에 <제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제육시>는 정오인 낮 12시, <제구시>는 오후 3시, 그리고 <제11시>는 오후 5시입니다.

자, 이제 아침 일찍 나갔더니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한 데나리온을 줄 테니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침 9시에 나가보자 또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내가 일당을 주겠으니 내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해서 들여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낮12시와 오후 3시에 또 주인이 나가봤더니 아직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각각 포도원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 나가봤어요. 이 주인도 참 독특합니다. 오후 5시면 하루가 다 끝나갈 무렵인데 그래도 일할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까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주인은 그 시간에도 일꾼들을 불러다가 일을 하라고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이제 해가 저물고 오후 6시가 되었어요. 일을 마치고 하루 일당을 받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8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의 청지기, 말하자면 현장감독에게 지시하기를, 일당을 포도원에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몇 시에 왔다고요? 예, 지금 시간은 오후 6시인데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제 일꾼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각각 일당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어요.

여기서 편의상 하루 일당을 한국 돈 10만원, 일본 돈 1만엔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기대감이 부풀었습니다. 야아, 1시간 밖에 안 한 사람들이 10만원을 받았으니, 나는 좀 더 받을 수 있겠구나. 나는 10시간이나 일했으니까 어쩌면 10 데나리온, 100만원 정도를 받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기대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어서 돈을 받아보니까 자기도 한 데나리온, 그러니까 10만원밖에 안 주는 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9시간 동안 일을 했는데, 아침 9시 이전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10시간 이상 일한 사람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 더운 날에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했는데, 그 사람들 일당을 받아보니까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돈을 받았어요.

사실 그러면 좀 억울한 마음이 들겠지요. 그래서 주인한테 따집니다. 왜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일을 한 자기들과, 저기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일당을 받냐고 원망을 합니다. 아마도 제일 불만을 말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제일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러자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명쾌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彼は労働者たちと一日一デナリの約束をすると、彼らをぶどう園に送った。

아니, 내가 너희들에게 뭐라고 했어? 원래 계약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잖아. 애초에 계약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계약대로 임금을 줬는데 내가 잘못한 게 뭔데 그래?

그러면서 이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4절~15절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あなたの分を取って帰りなさい。私はこの最後の人にも、あなたと同じだけ与えたいのです。
自分のもので自分のしたいことをしてはいけませんか。それとも、私が気前がいいので、あなたはねたんでいるのですか。』

내가 너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계약을 했고, 그 계약대로 이행을 했으니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0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 것은 내 마음이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돈을 주는데 네가 왜 불만을 갖는데?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이는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고, 이제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기 시작하자 더욱 많아졌습니다.

하나님과 구원은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자, 이방인들도 구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천국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앞서 로마서 2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율법과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는 게 아니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따집니다. 너 교회 다닌 지 얼마나 됐느냐. 나는 몇 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무슨 모태신자다. 나는 직분이 뭐다. 직분을 언제 받았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가 때로는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부모에게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느냐. 어느 직분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새신자 분들이겠지요.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큰 힘이 됩니다.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교회에 나와보니까 뭐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이나 20년된 사람들도 참 많던데, 그러면 지금 내 나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봤자 나중에 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제일 낮은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몰라. 제일 구석 자리에 있게 될지도 몰라.

뭐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말하자면 평생 동안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인생 마지막 끝자락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나 똑 같은 일당을 받게 된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아, 내가 정말 인생의 막차를 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는구나. 훨씬 더 오래 믿은 사람들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구나. 하는 소망을 갖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분들은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지요. 그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생했는데, 그런데 나를 지금 막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저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맞는 말씀일까요? 한 번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고생인가요?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보면 신앙생활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전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남들은 일요일에 집에서 편하게 보내는데, 나는 일요일에 쉬지도 않고 교회에 나가야 하다니 이 얼마나 고생이야. 헌금도 무슨 십일조다 뭐다 해서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이런 돈을 안 내도 되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우선,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왠지 안 나가면 벌 받을까 봐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이사야서 43장 1절을 봅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저기 서울 어디에 사는, 대충 한 여기 사람들, 일본 군마에 사는 대충 여기 있는 사람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너를 지명하여 부르셨다, 너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만 알고 계실까요?


누가복음 12장 6절~7절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五羽の雀が、二アサリオンで売ら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そんな雀の一羽でも、神の御前で忘れられてはいません。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여기서 <앗사리온>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이는 앞서 나왔던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데나리온을 하루 일당인 10만원, 1만엔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16분의 1이니까, 1 앗사리온은 6250원, 625엔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러면 참새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니까 12500원 1250엔, 이를 5로 나누면 참새 한 마리에 대략 2500원, 250엔 정도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글쎄요. 뭐, 한국에서 본다면 김밥 한 줄보다도 싼 가격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요. 하지만 김밥 한 줄 정도밖에 안 하는 참새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는데,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도 기억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고,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면서까지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서 천국으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고생입니까.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역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힘들고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에 대해서 제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실 정도로 저를 사랑해주신 하나님, 그 분이 제 이름 세 글자를 지명해서 불러주시고 지금 오늘 이날 이 때까지 인도해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큰 고생이셨겠다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생을 안 하시려면 어떻게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포기하시면 됩니다. 너 참 속을 썩힌다. 그래, 뭐, 사람이 너만 있냐. 됐다. 너는 없는 샘치고 다른 사람을 쓰겠다.


이렇게 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 것 같습니까.

어느 한 교관은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를 제대로 된 조종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너희들 몸무게 정도가 되는 금 덩어리만큼 비용이 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이를 위해 들어가는 훈련 비용, 비행기 연료비, 훈련장비 등등을 본다면,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21억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초보 조종사가 그렇다는 것이고, 이제 실전에서 정말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10년차 정도의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하려면 대략 80억원 가까이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한 사람을 만드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무슨 하루 식대나 한 달 생활비를 생각하실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아침이나 밤이나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인건비를 생각해야지요.

그럼 하나님은 하루에 얼마나 일을 하십니까.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업무환경, 노동환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8시간 노동도 아니에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루 24시간 노동입니다. 그것도 언제부터 언제까지요? 예,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월차도 없고 연차도 없어요.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리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을 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전세계에 있는 돈들을 다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돈이나 재산들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모자라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순간순간이 기쁨이요, 감사요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성경 말씀을 읽은 것도 기쁨이자 감사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하루하루가 기쁨이자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1절~2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1節~2節
“1.それでは、ユダヤ人のすぐれている点は何ですか。割礼に何の益があるのですか。
2.あらゆる点から見て、それは大いにあります。第一に、彼らは神のことばを委ねられました。”

여기서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이라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이방인, 즉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요?

요한복음 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그렇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 있어요. 그 날도 거기서 밥을 먹고 있는데, 김치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여기 김치 좀 더 갖다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아 참, 나 지금 바쁘니까 저기 주방 냉장고에 가서 알아서 덜어먹어.”

그렇게 말합니다. 뭐, 여러분은 단골이었으니까 그 주방 사정도 잘 압니다.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밥 먹다가 말고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손님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아, 그럼 저도 제가 덜어 먹을게요. 냉장고가 어디죠?” 라고 했더니만, 그 바쁘다고 했던 주인이 서둘러서 달려 와서는, “아닙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 바쁘다던 주인이 자기가 주방에 들어가서 김치를 들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단골손님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여러분은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불쾌해하시겠습니까.

아니, 맨날 여기 오는 단골인 나한테는 바쁘다고 하고 알아서 갖다 먹으라고 하더니만, 처음 온 손님한테는 쏜살같이 와서 김치를 가져다 주고 말이야. 이거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처음 온 손님만 손님 대우를 해주고 나한테는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야?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원리를 잠시 살펴보면 오히려 그렇지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식당 주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주방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가 정말 나쁜 사람이 주방에 있는 물건이나 냉장고에 있는 것을 훔쳐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골 손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는 챙겨주지 않고 새로 온 손님만 챙겨주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주인 입장에서 본다면, 단골손님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방에 있는 냉장고을 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 것이지만, 새로 온 손님의 경우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도 하라고 하고, 청소도 하라고 하고, 회계도 하라고 하고, 교회에 따라서는 주방에서 요리도 하라고 하고, 아이들 가르치기도 하라고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귀찮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저……제가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제가 회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전도를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만약에 새신자, 정말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새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예, 그러세요. 오늘부터 교회 회계를 맡아주시고, 전도도 해주시고, 아이들도 가르쳐주세요. 그러겠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한테 어떻게 교회 재정을 맡길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제 처음 나와서 예수님도 잘 모르고 성경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전도를 맡겨요? 주일학교 교사를 맡겨요? 아니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새신자분들이 오시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야 하고, 새신자분은 그와 같은 도움을 감사히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지나면 이런저런 일들을 이제 자기가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하지만 이는 귀찮게 생각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만큼 교회에서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물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을 꼽겠습니까. 은행 통장? 금고 열쇠?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물건들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렇죠. 웬만하면 그런 것들은 다름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시겠습니만, 꼭 맡겨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면, 그럴 때는 분명히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맡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신뢰를 받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콕 찍어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감사를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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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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