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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회 선물의 의미
2021년 6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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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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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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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6번째 시간으로서 “선물의 의미” 賜物の意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래 로마서 5장 15절~17절까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 세 번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5절~17절까지의 세 구절을 보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각각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15절은 선물의 의미, 16절은 선물의 능력, 그리고 17절은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15절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명을 어긴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축복,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크나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던 축복은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즉 선악과를 먹어버린 죄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엄마가 아이들한테, 냉장고 안에 있는 케익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엄마 말을 어기고 아이들이 몰래 먹어버렸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화를 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아이들을 심한 말로 혼냈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에서 영원히 내쫓았다고 해보세요. 이게 정상이에요? 요즘 같았으면 뉴스에 날 정도로 너무나 심한 처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대한 내용은 한낱 냉장고 안에 든 케익 정도로 끝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 선악과가 아까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은 단순히 거기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세상에 사는 주민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크나큰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세계를 지배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영토를 지배했던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라 하더라도 결국 전세계의 일부만 지배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왕권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과 3장 3절에 의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 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에덴 어디에 있든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저 절벽 위나 높은 산 꼭대기에 있어서 도무지 먹으려고 해 봤자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안 먹었다고 해도, 이는 잘한 것이 없지요. 어기고 싶어도 어길 수가 없었는데 이를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안 먹었어요. 안 어겼어요. 왜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었어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바로 <순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권리와 의무를 주셨습니다. 권리라고 하는 것은 행사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지만, 투표를 안 한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는 권리이지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땅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것은 권리이지요. 일부 나라에서는 출산 제한을 두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고 하면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낳고 기를 수도 있는 반면에, 그렇다면 아이를 안 낳으면 벌을 받나요?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출산이나 양육이라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닌 권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권리를 누리기 위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여기에는 처벌이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납세, 세금을 내는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남자의 경우를 본다면 병역의무가 있지요. 세금을 내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병역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권리가 아닌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에도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느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고 에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어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의무,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저버렸습니다.

제가 방금 의무에 대해서 납세나 병역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이것과 선악과를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형벌 때문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하물며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어긴 그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전에 결혼하고 자녀를 둔 분들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했대요. 그런데 아이를 갖고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 하셨는지를 알 것만 같다는 거예요.

자기는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것 만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음. 그래요. 뭐, 좋은 말씀처럼 들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이 몇을 길러봤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두고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지요?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은혜, 가늠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이 몇을 두었다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예수님의 은혜는, 분명 큰 은혜이긴 합니다만 한량없는 은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납세나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군대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까지 시키지는 않지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죽음, 사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지난 주에 공부 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은혜가 어느 정도로 큰 은혜인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 재판을 보면 이른바 양형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재판을 하는 판사마다 특정 형벌에 대해서 내리는 판결이 큰 차이가 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략적으로 이 정도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형벌을 내리도록 하자 하는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좀 무서운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범죄에 있어서 대표적인 흉악범죄라고 할 수 있는 살인에 대한 규정은, 법조문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는 사형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각 사안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이 양형기준으로 볼 때 사형이 확정되는 경우에는 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3인 이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5명 있었어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뭐, 꼭 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또 유독 남녀평등에 대해서 예민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굳이 말씀 드린다면 뭐 5자매라도 괜찮습니다. 남매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편의상 오늘은 그냥 아들 5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첫째 아들이 제일 우수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그리고 졸업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도 제일 잘 벌어옵니다. 그리고 제일 못난 것이 막내였습니다. 이 놈은 공부는 고사하고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을 했습니다만,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아요. 어쩌다 취직 했나 하면 금방 때려치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부모님 말도 듣지도 않아요. 맨날 부모님 속만 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다섯 형제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막내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섯째 막내가 둘째, 셋째, 넷째 형들을 모두 살해해버렸어요. 이게 보통 일입니까. 자식이 다섯 명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아들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양형기준에 의한다 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사형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자신의 세 아들이 죽었는데, 그런데 그들을 죽인 것이 또한 자기 아들이에요.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아들은 사형에 처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부릅니다. 평소에 제일 우수하고 착했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그 첫째 아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긴히 부탁할 말이 있다. 저 못난 다섯째 아들이 이처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아서 이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나는 그 못난 막내 아들을 살리고 싶구나. 그래서 말인데, 예, 첫째야, 네가 막내아들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겠냐.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런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첫째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버지, 막내놈은 지금 사람을 셋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데 그 죽인 사람 셋이 모두 아버지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놈을 살리기 위해서 저더러 대신 죽으라고요? 아버지, 지금 제정신입니까.

이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첫째 아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무거운 죄를 짓고, 그것도 그 죄로 인해서 아버지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준 그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 제가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첫째 아들, 그리고 막내아들이 누구겠습니까.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첫째 아들은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그 흉악한 죄,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막내아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이 은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아이 몇 키워봤다고 알 수가 있어요? 아니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못난 막내아들, 그것도 모자라서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한 죄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에 대한 죄,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첫째 아들을 죽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늘 나라에서 이를 투표에 붙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다 소집합니다. 막내아들이 죽어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여야만 한다.

죄 많은 막내아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죄 많은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죽일 것인가.

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뻔하겠지요. 하나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죄 많은 막내아들 저 백성들을 모두 심판 하셔야 마땅한데 어찌 첫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확고 하셨습니다. 죄 많은 백성들, 나에게 그토록 많은 죄를 저지른 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의 복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 한량없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 놀랍고도 크나큰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본래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에서는 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이른바 양태론적 단일신론, 또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경을 왜곡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함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같다는 뜻이니까,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진정한 삼위일체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세요.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니까 말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양태론의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한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 기도는 예수님이 자기한테 드리는 기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 양태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에는 반드시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는 불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하는 입장과 불순종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아버지 하나님은 순종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냐 하면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회복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양태론에 의하면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사라지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을 관철하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상징입니다. 순종의 회복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 인하여, 이제부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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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회 죄의 무게
2021년 5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2節~14節
“12.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13.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14.けれども死は、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には罪を犯さなかった人々さえも、支配しました。アダムは来たるべき方のひな型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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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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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5번째 시간으로서 “죄의 무게” 罪の重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14절까지로 하였습니다만, 사실 12절부터 시작하는 말씀은 5장 끝부분인 21절까지 이어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2절부터 21절까지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량이 많고 하기 때문에,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 중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을 중에 보면 영생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요한복음 10장 28절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わたしは彼らに永遠のいのちを与えます。彼らは永遠に、決して滅びることがなく、また、だれも彼らをわたしの手から奪い去りはし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영생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영원히 살게 된다면 좋으십니까. 100년 200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 동안 영원히 살게 된다면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들으셨을 때,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지겨운데 천년 만년이나 살아서 뭘 해……

만약에 이처럼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서 지겹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는 성경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어서 기운도 없고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그러는데 오래 살아 봤자 뭘 하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뻤던 때를 꼽으라면 언제가 가장 기쁘셨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에이, 그럴 리가 없지요. 금방 생각이 안 난다 하더라도 잘 생각해보시면 분명히 기뻤을 때, 즐거웠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런 기쁜 감정이나 즐거운 감정을 생각해내기가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힘들거나 슬프거나 했을 때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2014년 벨기에에 있는 루벤대학의 두 교수가 감정의 지속시간에 대해서 연구를 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기쁨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어 봤자 35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반면에 증오는 어느 정도 지속되냐 하면 60시간이나 지속되고,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은 무려 120시간이나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머리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도 슬픔이나 괴로움이 더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에 인생은 괴롭다고 생각되실 지 모르지만, 실제로 하나하나 따지고 본다면 안 좋은 일 못지 않게 좋았던 일, 기뻤던 일, 즐거웠던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돈이나 건강 같은 이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안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기쁜 감정이라 하더라도 길어 봤자 이틀도 못 간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날에는, 지금까지 기뻤던 그 기억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좀 영생에 대한 기대가 생기셨나요? 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겠습니다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크나큰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사실은 이제 알았습니다.

자, 다음으로 우리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새신자나 아니면 아직 믿음이 없는 분들이 여러분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죽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왜 이와 같이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허허어. 그냥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믿어라?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곧바로 명확한 답을 하실 수 이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성경말씀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문제를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사람은 어떠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까. 본래부터 어느 정도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존재로 만들어졌나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여러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벌칙이 없습니다. 명령에 있어서의 중요성, 말하자면 여러 명령이 있을 경우 어느 명령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벌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법도 그렇잖아요? A라고 하는 죄를 지으면 벌금인데, B라는 죄를 지으면 무기징역이에요. 이럴 경우에는 A라는 명령보다 B라는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 중에서 벌칙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일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이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벌금도 아니고 징역도 아니고 사형,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게 되지요.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하와가 따먹고 이를 아담에게 주어서 아담도 맛있게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하나님께서는 그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고 말았던 그들에게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렇죠. 하나님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기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리고 죄로 인해서 죽음이 비로소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죄악을 해결하고 또다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총론입니다. 12절부터 21절까지의 개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세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⑫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자,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해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 들어온 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가리키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아담과 하와 중에서 누가 더 나쁩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 먹은 사람이 누구에요? 예, 하와지요. 그렇다면 하와가 제일 나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와이프가 준다고 해서 그걸 낼름 받아먹어버린 아담은 그 다음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적어도 이 로마서 5장에서 하와 이야기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누가 나오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14절에 보면 ‘아담’이 나옵니다. 음? 혹시 잘못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까봐 14절에 보면 ‘아담’이라고 하는 이름이 몇 번 나와요? 예,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 참 억울하지 않습니까. 직접 따먹은 것은 하와이고, 아담은 하와가 주는 것을 먹었을 뿐인데, 왜 아담만 나쁘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싫다면서 안 먹을 수 있어요? 죽을라고 환장했습니까? 뭐, 이러면서 아담을 두둔하면서, 이와 함께 남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를 합니다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벌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사람들이 한 해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저희 상황을 본다면 저는 지금 종교자격으로 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아내는 종교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몸을 이루는 부부이기 때문에 똑같이 체류자격이 주어지는 것이고, 기간도 똑같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하와가 먹었는데 아담이 안 먹었다면 또 모를까, 둘이 함께 사이 좋게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면, 이는 50보 100보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통틀어서 ‘한 사람’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서 이제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자손들까지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는 도대체 어떤 성분이 들어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라고 하는 열매에는 어떤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마약과도 같은 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것을 먹으니까 정신이 확 간 것처럼 느껴진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소박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이 로마서 5장 13절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그런 거죠. 지금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인 둘이 함께 한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무슨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남녀가 자전거를 함께 타면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일본에서는 이제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어요.

이를 보면 어떻습니까. 똑같이 둘이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인데, 이를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험하니까 금지한다는 법이 생기니까, 이제 그 다음부터는 이를 어기면 경찰의 단속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을 때에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담도 알고 하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는 죄를 죄로 여기게 되어서 이를 어기게 되면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벌,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また、人に言われた。「あなたが妻の声に聞き従い、食べてはならないとわたしが命じておいた木から食べたので、大地は、あなたのゆえにのろわれる。あなたは一生の間、苦しんでそこから食を得ることになる。
大地は、あなたに対して茨とあざみを生えさせ、あなたは野の草を食べる。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이 말씀, 창세기 2장 16절과 비교해볼까요?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자아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하겠습니다만, 기본적인 문제가 의식주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먹는 문제요? 없었습니다. 지천에 널려 있는 먹을 거리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에이, 과일들만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과일을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어떤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 식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의, 옷 문제는 어떨까요?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そのとき、人とその妻はふたりとも裸であったが、恥ずかしいとは思わなかった。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옷에 대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こうして、ふたりの目は開かれ、自分たちが裸であることを知った。そこで彼らは、いちじくの葉をつづり合わせて、自分たちのために腰の覆いを作った。

죄를 짓기 전에는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옷이 없이 벌거벗은 채로 지내면 여기 긁히고 저기 찔리고, 그리고 온갖 벌레들한테 물리고 그럴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인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덴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찔리는 일도 없고 긁히는 일도 없습니다. 벌레한테도 물리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뭇잎으로라도 옷을 만들어 입을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 ‘주’, 사는 곳은요?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에덴이라고 하면, 무슨 나무 숲 속 정글 같고, 그런 데에서 대충 누워 자면서 살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위생적으로도 불결하고, 정말 여러가지로 참 불편했겠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덴은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에 지으신 최고의 낙원입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본다면 최상의 편의시설이나 문화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환상적인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 곳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아담과 하와는 그와 같은 정말 하와이나 오키나와, 안 가봤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환상적인 휴양지에 있는 특급리조트호텔 부럽지 않은 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으나, 결국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마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큽니까. 그들에게는 이세상 최고의 의식주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크나큰 기쁨과 함께 영원토록 허락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의식주의 문제가 최고에서 최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게 고생을 해야 합니다. 입을 옷과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고생을 해야만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아담과 하와만의 문제라고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4절

“⑭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⑭けれども死は、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には罪を犯さなかった人々さえも、支配しました。アダムは来たるべき方のひな型です。”

모세라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있기 전인 사람들을 모두 포함해서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죄의 대가,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죄의 대가인 사망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아무리 우겨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죄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갈 분만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말미암아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고 있던 죄의 무게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배워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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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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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회 말씀과 즐거움
2021년 5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1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9節~11節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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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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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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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과 즐거움” みことばと喜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9절과 10절의 구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0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여기서 9절과 10절을 각각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구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그리고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도 똑같이 구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그리고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이렇게 구분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각 앞부분은 앞부분 끼리, 뒷부분은 뒷부분 끼리 비교해보면 됩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리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을 죽이고 그 피와 함께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그리고 11절~14절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이와 같이 구약 때 드려졌던 제사는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그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으로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5절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성경에 보면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들짐승한테 물려 죽은 것들은 부정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 짐승을 죽이고는 태워야 할 텐데, 내가 잡은 짐승이든, 병에 걸리거나 늙어서 죽은 짐승이든, 다른 짐승들한테 물려서 죽은 짐승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피의 의미>가 있습니다.


조금 무서운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이해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가급적 안 무섭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냥 대충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칼로 해체를 해서 피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를 흘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린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축을 기르고 있는데 아침에 보니까 가축 한 마리가 전날 밤에 병에 걸려서인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럼 그것을 하나님 제단에 바치려고 칼로 해체를 해보아도 이미 굳어서 피는 많이 안 나옵니다. 이는 하물며 다른 맹수들의 공격을 받아서 이미 찢겨진 상태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칼로 해체를 했을 때 피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이는 건강한 제물을 일부러 해쳤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전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한 희생>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알아서 죽은 짐승을 하나님께 바쳐도, 나에게는 그 일로 인해서 손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죽은 짐승을 바치는데,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손해가 날 것이 없지요.


하지만 건강하고 흠 없고, 재산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을 굳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잡는다면, 이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손해가 발생합니다. 이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어디 그런 온전한 제물만 바치겠습니까. 예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만, 어느 나라인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지 않아서 아직도 그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지폐가 좀 더러워지거나 하면 은행에서 바꾸어주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는 지폐가 지저분해지면 화폐가치가 없어진대요. 그게 전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아무튼 그런 나라가 있대요. 그런데 그 나라에 있는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교회 헌금 시간에 보니까 온통 그런 쓸모가 없는 지폐만 넣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헌금함이 무슨 휴지통이에요? 그 사람들이 바친 지폐는, 물론 현금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미 화폐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것이 과거에 화폐였다 하더라도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것을 아무리 많이 바쳐 봤자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희생 제물이에요? 아니에요. 이것은 온전한 희생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2장 22절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盲目のもの、折れたところのあるもの、傷のあるもの、あるいは、うみの出るもの、湿疹のあるもの、かさぶたのあるもの、あなたがたはこれらのものを、主に献げてはならない。また、これらのものを主への食物のささげ物として祭壇の上に献げてはならない。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예, 분명히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습니다. 흠 없는 온전한 제물이 아니라, 흠 투성이인 제물을 바쳐요.

이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쁨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온전한 제사를 안 드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냐 하면,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있는 말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1장 7절~8절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祭壇に汚れたパンを献げていながら、『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があなたを汚しましたか』と言う。『主の食卓は蔑まれてもよい』とあなたがたは思っている。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땠겠습니까. 온전한 제물은 커녕 완전히 흠 투성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마치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식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야, 그걸 지금 하나님인 나한테 바친다고? 그걸 네 직장 상사한테 갖다줘봐라. 병들고 찢기고 흠 투성이인 고기를 가져다주면 직장 상사가,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받겠냐 하는 것이지요.


직장 상사한테도 갖다주지 못할 못쓸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하나님은 엄히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바쳐질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온몸의 피를 남김없이 흘려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한 온전한 희생제물로 삼아 주셨고,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흘려 주신 피라고 하는 사실을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한 번 9절과 10절 앞부분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

이를 합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희생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이는 과거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9절과 10절의 뒷부분을 비교해봅니다.

9절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9절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즉 하나님이 무섭게 화를 내시는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절 뒷부분은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라 이제 화목하게 된 자로서, 예수님의 살아나심, 즉 부활 생명을 통해서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면 과거일까요, 현재일까요, 아니면 미래일까요.

둘 모두 구원 받은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분명 미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리를 하자면, 9절과 10절 모두가 이런 구도입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되어 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제 과거와 미래는 됐어요. 그럼 뭐가 빠졌죠? 예, 현재가 빠졌습니다.

좋아요. 과거에 예수님께서 온전한 희생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장차 우리에게는 영광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믿고 지금은 역시 힘들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건가요? 고생을 죽어라고 해야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며, 바로 다음 구절 11절입니다.


로마서 5장 11절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틀림없이 구원받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래요? 죽어라고 고생을 하래요? 아닙니다. 즐거워하라고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즐거워할까요.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억지로라도 아이고, 즐거워요. 아이고 즐거워요……그러라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에 있어서 점검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보통 믿음이 좋은 분들이, 무슨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면 어디로 갑니까. 예, 기도원에 갑니다.

거기서 기도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예배가 있는 곳에서는 목사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저도 몇 번 가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나 금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것이지요.

자, 질문을 한 번 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미래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이는 대단히 명확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말씀과 기도를 본다면 어느 쪽이 중요하겠습니까. 이는 비교가 안 됩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경말씀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가끔 보면 불로불로불로……. 주여! 하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면, 아~ 온몸 뜨거워졌다고 해요.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당연하죠. 운동했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서 몸을 흔들었는데 안 뜨거워졌겠어요?

그리고 제 경험상으로 본다면 기도원에 올라갈 때에 성경책은 꼭 가지고는 가는데, 그게 기도원에서는 성경을 깊이 읽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또 보통 기도원에 가면 금식도 하고 그러는데, 며칠 지나면 말이죠, 배도 고파지고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을 읽으려고 해봐도 머리에 안 들어와요.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성경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 어디에요? 예, 도서관 같은 곳, 얼마나 좋습니까. 책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도서관 만한 곳이 없습니다. 거기는 완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에서, 아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나 좀 도서관에 갔다올래……도서관에 가서 성경책 좀 읽고 올래……이런 분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적어도 제 주변에 그런 분들은 없어요.


기도를 열심히 드리면 마음에 평안이 온 것 같습니까. 주님이 느껴지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냥 한 때의 기분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응답을 받았다, 성령 충만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있는다면, 또다시 작은 시험이 닥치면 그런 확신은 모래바람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란이 닥쳐와서 힘들고 어려운데도, 정신 승리로 즐거워요, 즐거워요 하고, 억지로 웃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과거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미래의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그 많은 인물들이 어려움에 겪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이러실 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그걸 누가 모르나요. 다 알지요.

그럼 다 아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사역을 시작해서 백발이 되신 목사님들도, 여전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마음을 알려고 하는데, 성경 몇 번 읽었다고 이제 다 알아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힘써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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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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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회 희망적인 소망
2021년 5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8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5節~8節
“5.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6.実にキリストは、私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敬虔な者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
7.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8.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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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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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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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희망적인 소망” 希望的希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앞의 한 구절과 뒤의 세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앞의 한 구절인 5장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여기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이처럼 번역한 책은 영어 성경 중에 보면, KJV라고 하는 킹제임스 성경이 있는데, 그 외에는 영어나 일본어를 보면 대부분의 번역서가 이를 ‘실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한글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을 보면 모두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저는 더 와닿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왠지 조금 더 핵심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어떤 유치원 정도의 어린아이한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고 생각 하시겠어요? 그 아이의 꿈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뭐, “어~ 그래? 멋진 꿈이네”하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나이 40이나 50이 된 아저씨한테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만 그 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면요.

글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아, 그러시냐고…하면서 속으로는, 어디 좀 아픈 분이 아닐까, 아니면 요즘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신가, 좀 쉬어야 되지 않을까……등등 상당히 걱정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어른이 그런 꿈을 갖는다면 이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꿈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실망’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 슈퍼맨이 되고 싶었는데, 점점 커가니까 어때요? 예, 아, 나는 슈퍼맨이 될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이 느껴지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시나요?

예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는 신학과를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4년제인 학부 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대요.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목사님의 믿음이 있었는데, 2학년이 되면 장로님 믿음, 3학년이 되면 집사님 믿음, 4학년이 되니까 평신도 믿음이 되더니 나중에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졸업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이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사실 신학을 했다고 해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이 좋다고 할 수 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 부끄럽게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극단적으로는 그런 것이겠지요. 나 정말 하나님 잘 믿으면 천국에 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 잘 믿으면 구원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런데 생을 마감하고 봤더니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었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이 부끄러울 것이요, 자신의 신앙생활이 절망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아, 내가 교회에 속았어. 성경에 속았어. 그리고 홍 목사한테 속았어……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어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대로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 5절 후반에 보시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채워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쉬어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6절~8절입니다. 이 6절~8절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인 5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절망적인 소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진정한 소망, 희망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5장 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6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6.実にキリストは、私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敬虔な者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

6절에 보시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기약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은 어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바에 따라 완전하게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일이 구약에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약 성경이 이사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11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イザヤ書53章4節~11節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虐げとさばきによって、彼は取り去られた。彼の時代の者で、だれが思ったことか。彼が私の民の背きのゆえに打たれ、生ける者の地から絶たれたのだと。
彼の墓は、悪者どもとともに、富む者とともに、その死の時に設けられた。彼は不法を働かず、その口に欺きはなかったが。
しかし、彼を砕いて病を負わせることは主のみこころであった。彼が自分のいのちを代償のささげ物とするなら、末長く子孫を見ることができ、主のみこころは彼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る。
「彼は自分のたましいの激しい苦しみのあとを見て、満足する。わたしの正しいしもべは、その知識によって多くの人を義とし、彼らの咎を負う。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아는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그 본질까지도 정확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적은 신약성경에 처음 나온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글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대부분이 기원전 690년 경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690년 전에 이미 기록된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720년 전에 예언된 말씀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오신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실수로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오시고,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기약대로 오신 것은 좋은데, 오셔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7.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8.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 세상에 아무리 의인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그 훌륭한 사람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이 말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을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람을 살려주겠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선뜻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기가 쉬운가요? 아니요.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에요.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죽게 되었어요. 죽게 된 이유요? 누명을 쓴 것도 아니에요.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게 되었어요. 정말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그 죄 많고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무참하게 죽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아니요 안 됩니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요. 밑지는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셨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께서 돈이 많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아니, 물론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이 거래하는 은행에 가면 그 은행 지점장이 직접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줄 정도로 아주 부자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그런 여러분이 좀 착한 일을 해야지 생각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똑같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학생의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하겠습니까.

1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2번 공부는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고 있는 학생.

이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학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기껏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한다면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을 지원해주지, 아무리 여러분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맨날 학교도 안 가고 공부도 안 하고 그런 학생한테 학비를 지원해주고 싶겠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은 부자도 아니고 오히려 가난해요. 하지만 그런데도 그런 학생,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맨날 문제만 일으키는 학생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팔고 땅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가면서 학비를 대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그 학생 부모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그 학생이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그 학생을 위해서, 자기 자식을 위해서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기다가 밤낮없이 일을 하고서는 학비도 보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지금도 학교에 보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개인이나 단체가 그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못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지원해준다는 것은,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훌륭한 사람들이나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 즉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의 증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구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 교주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 자신들이 가장 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입는 옷이나 먹는 것이나 사는 집이나, 자기가 누리는 것은 항상 최고의 것이에요. 그리고 반면에 그 신도들은 어때요? 예, 가난합니다. 자기 재산들을 다 바치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어쩌면 제자들은 흥분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 물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쁨도 컸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으니까, 이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겠구나! 그러면 이제 나도 벼슬을 얻을 수 있겠구나. 아무리 못해도 장관 자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기대를 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야,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너희들이 해. 그러고 어떻게 하셨어요? 예, 하늘 위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이는 전설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이 본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다음에 40일 동안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고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정말 이 땅에서 여느 사이비 교주처럼 부귀 영화를 누리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것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시고, 하물며 그 귀한 피를 모두 흘리시고, 그 생명 마저도 우리에게 주시고 아무런 미련 없이 하늘로 올라 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이비 교주들은 그런 소망이 없으니까, 나중에 지옥에 가든 말든, 신도들이 가난에 괴로워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 신도들한테서 돈을 쥐어 짜서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제자들에게 다 맡긴 채로, 나 몰라라 하고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께서는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성령님이 안 오신다. 내가 올라가야지만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많은 분석을 합니다만, 성경에는 왜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무조건 믿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이른바 성령강림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놀라운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극히 일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일부 선지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었냐 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시간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셨던 3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멀리 이스라엘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때라도 간절히 주님 만나기를 구한다면 성령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요? 여기서 바로 로마서 5장 5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 우리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까지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망적인 소망, 부끄러운 소망이 아니라 희망적인 소망, 가장 확실한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아서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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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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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회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2021년 5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4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1節~4節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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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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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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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2번째 시간으로서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主との平和を持っている者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김을 받았고, 그리고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를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자,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오늘 본문 1절~4절의 말씀은 앞 두 구절과 뒤 두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2절입니다.


로마서 5장 1절~2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복습을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에이, 저는 그냥 천국에 안 가도 돼요. 그냥 교회 다니는 게 좋고, 성경 읽는 게 좋고, 예수님 믿는 게 좋아요.

여러분, 이게 겸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재수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결석하는 일도 없이 매일같이 부지런히 나와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하루는 그 재수학원 선생님이 그 학생한테, 자네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에이, 저는 대학에 간다는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수업 듣고 공부하는 게 좋아서 학원 다니는 거예요.

만약에 그 학생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여러분께서는 겸손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학생은 학원이 아니라 다른 원에 먼저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그러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어요? 이는 마치 열심히 병원에 다니고 치료 받고 약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주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돈이요? 시간이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금은보화가 아니라 이 세상 천하만물이라 하더라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토록 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죄 많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요? 이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3절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을 보니까 작년 2020년 9월에는 평당 7천만원을 넘는다고 하더니만, 올해 1월에 보니까 이제 평당 1억이 넘고 2억 가까이 되는 곳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1평이 3.3제곱미터니까 1제곱미터로 환산해보면 평당 2억이라고 한다면, 1제곱미터는 대략 6000만원 정도라고 하겠지요.

사실 이게 상당히 비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비싼 곳도 있어요. 서울 명동의 경우를 보면 1제곱미터 당 2억650만원이라고 해요. 평으로 고치면 2억원이라고 해도 곱하기 3.3이면 평당 6억 6천만원입니다. 강남 아파트값의 3배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일본은 어떤가 하면 동경 긴자에 보면 15년 연속으로 땅값 1위를 한 곳이 있습니다. 긴자 4쵸메에 있는 야마노 악기 긴자 본점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코로나 때문에 가격이 하락 했대요. 그 가격이 얼마냐 하면 1제곱미터당 5360만엔이라고 합니다. 단순계산으로 원을 10배라고 한다면 제곱미터당 5억3천만원이 넘는다는 것이지요. 평당 가격으로 한다면 5억3천만원 곱하기 3.3을 하면, 긴자 4초메에 있는 여기 땅값은 평당 17억 4천 9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긴자에 있는 땅값이 평당 17억 4천 900만원. 강남 아파트가 평당 2억. 이렇게 생각하면 강남 아파트가 상당히 저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마찬가지이냐 하면, 평당 1억을 하든 10억을 하든 간에, 우리 같은 서민들이 당장 주머니에서 척 하고 돈을 내서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비해주시는 곳이 그런 강남이나 긴자에 있는 땅값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가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가 거할 집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곳의 평당 가격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척 비싸겠지요. 하지만 전혀 감이 안 잡히나요? 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격은 바로 예수님의 핏값이요 예수님의 생명의 값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할 곳이 하나님 나라에 예비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에게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로마서 5장 1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5장 1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로 되어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는 그야말로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인해서 이제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지간이 아니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장차 우리의 생을 마친 뒤에 크나큰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인가요?

굳이 이름을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유명한 신학자입니다만, 이 분의 책을 제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분의 책을 접하게 되어서 잠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책 내용은, 말하자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인데, 여기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이 구절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현세에 있어서의 가난함은, 내세에 있어서의 풍요로움으로 보답 받는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첫 페이지였는데, 여기까지 읽고 책을 닫아버렸습니다. 물론 더 읽어가면 좋은 말씀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책을 보면 배울 점도 많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읽고 제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일본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잠시 미국에 오셨는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았긴 했습니다만, 일본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일본 교회 사정을 잘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는데, 이 목사님이 일본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제게 말씀해주시기를, 이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닌데요. 봉사도 열심히 하신데요. 그런데 그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교인들이 지쳐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이 목사님 개인적인 소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 교회를 섬겨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본 신학자의 글을 읽는 순간, 그 원인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워낙 유명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마도 일본 목회자라면 대부분이 이 분의 책을 읽지 않았나 합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면 큰 기쁨이 있고 큰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가기 전에는 그저 고생만 해야 되고 고난만 당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야만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축복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에서는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일본 기독교인이 지쳐있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까 재수학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대학에 들어가면 큰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나, 지금부터 몇 년 동안, 몇 십년 동안 재수생활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기쁨이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도 재수생활을 해봤습니다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재수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이고 고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すると、ペテロが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自分のもの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だれでも、神の国のために、家、妻、兄弟、両親、子どもを捨てた者は、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만, 꼭 자기 집이나 가족을 버려야지만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 그것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에 대한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받을 축복이 꼭 죽은 다음에 받는다고 하시나요?

마지막 누가복음 18장 3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0절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면서 받을 축복도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영혼은 잘 됩니다. 나중에 우리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도 우리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2절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슬픔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기쁨의 발걸음입니다. 좌절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은혜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절망의 발걸음이 아니라 소망의 발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이미 우리가 서 있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제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분은 이러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어떻게 사람이 마냥 기뻐만 하고 즐거워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요즘 같은 코로나 상황을 보시면 정말 답답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참 너무 하시지.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그런 마음이 왜 안 생기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이 밀려올 때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3절~4절까지 말씀입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목적입니다. 이 3절~4절 중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3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나오고 4절에서는 ‘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환난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 나는 환난이 너무 즐거워, 고생이 너무 즐거워,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드려야 되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이를 단순하게 말씀 드리자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목적’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면 환난에 대해서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소망 뿐인가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죽도록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토록 원하던 후사를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적게 잡아 25년 이상이나 후사를 원했던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구원해주신다. 나를 기억해주신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눈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내 눈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난이 다가와도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인내의 연단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큰 소망을 갖도록 하시는 것이 환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누가 아는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실 때, 아, 이 환난은 나로 하여금 인내를 하게 하시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바라보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구나, 라는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누가 압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을 했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들을 수없이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이것이 없다, 저것이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자기들이 만든 우상을 섬깁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닌리를 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꿈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신 이유가, 그들의 말처럼 광야에서 그들을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환난 가운데에서 죽이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셨고, 이 세상 천하만물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진 자가 아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로서, 어떠한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서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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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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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회 믿음의 축복
2021년 5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25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23節~25節
“23.しかし、「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と書かれたのは、ただ彼のためだけでなく、
24.私たちのためでもあります。すなわち、私たちの主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を信じる私たちも、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
25.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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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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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축복” 信仰の祝福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주의 말씀을 잠시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후사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적게 잡아 75세때부터 시작해서 99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포기를 해도 벌써 포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향 땅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섰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허탈 하기만 합니다.

그래. 내가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들었나 보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라도 갈대아 우르나, 아니면 하란 땅으로 돌아가자. 남은 여생을 마누라 고생이나 덜 시키고 우리끼리 편안하게 살아보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안 해 보았을까요? 아니요. 저는 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제 짐작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사람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행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수 백 년 동안이나 타향에서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부모도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도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갔습니다.

노예란 자기 인생이 없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가치는 주인이 결정합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로서 평생 동안 살다가 그리고 주인의 소유물로서 죽어가는 인생이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죄인이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고, 정말 평생 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감옥에서 죽어야 할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된다는 일은,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남의 나라 땅인 애굽에서 평생 동안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수가 몇 명이라고요?

민수기 1장 45절~4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1장 45절~46절
“45.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一族ごとに登録された二十歳以上のイスラエルの子らで、イスラエルで戦に出ることができる者すべて、
登録された者の総数は、六十万三千五百五十人であった。

당시에는 인구 수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인구 수를 세는 데에 있어서,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미성년자나 여성이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던 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성만 세었을 때 60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레위 지파가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었는데, 레위 지파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고 성막을 관리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임무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미성년자도 제외하고, 그리고 레위지파도 제외한 수가 60만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숫자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았더니 당시 애굽을 탈출한 총 인구 수는 대략 200만명 가량 이었을 것으로 예상을 합니다.


노예 한 사람이 그 집안을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지금도 교도소에서 누군가가 탈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에서보면 멋있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실제 상황이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에 비상이 걸리고 경찰 군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수색작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 명도 아니고 200만명이에요. 무슨 작은 시설도 아니고 당시 최고 선진국, 최강의 군대를 소유했던 국가인 애굽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탈출 좀 했다 싶었더니, 눈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일인데 뒤에서는 그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울만한 무기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끝이다. 여기서 다 죽는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었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길을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럼으로 인해서 200만명에 달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힘도 없고 무기도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심으로 인해서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홍해를 건넜으며, 반면에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서 갈라진 홍해 사이로 들어가 추격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길을 막으심으로 인해서 모든 군대가 홍해 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수 십 년에 걸쳐서 본 게 아닙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고 직접 체험했습니다.

정말 이와 같은 것만으로도 평생 동안, 아니, 자손 대대로 전해주면서 하나님을 찬양해도 부족하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실까요?

출애굽기 14장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1장 4절~6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彼らのうちに混じって来ていた者たちは激しい欲望にかられ、イスラエルの子らは再び大声で泣いて、言った。「ああ、肉が食べたい。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그들은 참으로 가지가지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주셨는데, 그들을 정말로 광야에서 죽이기 위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들이 애굽에서 고기나 생선들을 값없이 배불리 먹어요? 그게 자기 것입니까? 아니에요. 노예에게 있어서는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신고 있는 신발도 주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인 것을 몰래 훔쳐먹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 주셨는데, 그들은 과거에 종살이를 하면서 주인 몰래 훔쳐먹었던 것을 그리워 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불평 불만은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상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끌어내신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축복의 땅을 주시기 위해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불평을 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하나님께서는 점령해라. 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함께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신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다 죽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제 그 때까지 참고 참았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2절~23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わたしの栄光と、わたしがエジプトとこの荒野で行ったしるしとを見ながら、十度もこのようにわたしを試み、わたしの声に聞き従わなか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
わたしが彼らの父祖たちに誓った地を見ることはない。わたしを侮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それを見ることはない。


민수기 14장 27절~30절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몇 년 전도 아닌 불과 며칠 전에 애굽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광야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그래도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리고 뭐 어째?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었겠다고? 그래 좋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한테 행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시 성인들은 대부분이 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하시면서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 땅에서 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40년 후, 불평불만을 일삼았던 광야 1세대들은 다 죽어버리고, 이제 광야 2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 가나안 땅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면서도, 평화로워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서 경고를 하십니다. 그러지 말고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회개를 안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고난이 다가옵니다. 갑자기 외부 세력들이 침략을 해서는 그들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합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지도자를 세워서 외세를 물리치게 하시고는 구원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끝인가요? 아니에요. 평화가 찾아오면 그들은 또다시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모세도 알았습니다. 출애굽도 알았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알았습니다. 광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야말로 헌신짝 버리듯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그는 모세도 몰랐습니다. 출애굽도 몰랐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몰랐습니다. 광야도 몰랐습니다. 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25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3.しかし、「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と書かれたのは、ただ彼のためだけでなく、
24.私たちのためでもあります。すなわち、私たちの主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を信じる私たちも、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
25.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여러분,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는 성경을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편지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전설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야합니까? 역사나 문학이나 편지나 환상이 부족해요?

누구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유사 같은 건국신화도 있고, 내가 지금 조선시대 왕인 태정태세문단세도 헷갈리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전설이나 역사들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같은 전설로 끝나고 역사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에서 끝나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겨진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창세기에만 보더라도 노아의 홍수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출애굽기에 보더라도 애굽 군대나 애굽 사람들이 죽임을 다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셨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나 하나를 살려 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심판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 영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까지 희생시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희생을 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어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적힌 글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아보았으나, 이를 읽고도 그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내가 받은 축복이고, 이스라엘 자손들 받은 축복이 내 축복이요,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이 내 축복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1장 1절~2절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むしろ、あなたがたの咎が、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神との仕切りとなり、あなたがたの罪が御顔を隠させ、聞いてくださらないようにしたのだ。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다른 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손 하나 까딱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무엇 하러 하나님께서 행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늘과 땅보다도 더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와의 사이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어졌을 때에는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도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딱 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된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흔들림 없이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축복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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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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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회 믿음의 발걸음
2021년 4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22절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7節~22節
"17.「わたしはあなたを多くの国民の父とし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彼は、死者を生かし、無いものを有るものとして召される神を信じ、その御前で父となったのです。
18.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19.彼は、およそ百歳になり、自分のからだがすでに死んだも同然であること、またサラの胎が死んでいることを認めても、その信仰は弱まりませんでした。
20.不信仰にな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かえって信仰が強められて、神に栄光を帰し、
21.神には約束したことを実行する力がある、と確信していました。
22.だからこそ、「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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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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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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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0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발걸음” 信仰の歩み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5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あなたの名は、もはや、アブラムとは呼ばれない。あなたの名はアブラハムとなる。わたしがあなたを多くの国民の父とする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너의 자손을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한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첫째 기도 제목이었던 셈이지요.


창세기 15장 1절~6절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これらの出来事の後、主のことばが幻のうちにアブラムに臨んだ。「アブラムよ、恐れるな。わたしはあなたの盾である。あなたへの報いは非常に大きい。」
2.アブラムは言った。「神、主よ、あなたは私に何を下さるのですか。私は子がないままで死のうとしています。私の家の相続人は、ダマスコのエリエゼルなのでしょうか。」
3.さらに、アブラムは言った。「ご覧ください。あなたが子孫を私に下さらなかったので、私の家のしもべが私の跡取りになるでしょう。」
4.すると見よ、主のことばが彼に臨んだ。「その者があなたの跡を継いではならない。ただ、あなた自身から生まれ出てくる者が、あなたの跡を継がなければならない。」
5.そして主は、彼を外に連れ出して言われた。「さあ、天を見上げなさい。星を数えられるなら数えなさい。」さらに言われた。「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
6.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상을 주시겠다, 큰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5장 2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창세기 15장 2절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2.アブラムは言った。「神、主よ、あなたは私に何を下さるのですか。私は子がないままで死のうとしています。私の家の相続人は、ダマスコのエリエゼルなのでしょうか。」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창세기 15장 2절
“그러나 아브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 여호와여, 나는 자식이 없어 내 재산을 상속할 자가 다마스커스의 엘리에셀뿐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주의 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무슨 뜻입니까.

“에휴, 제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 아이 하나 갖는 것인데, 제게는 상속자가 없으니 그냥 저 하인인 엘리에셀에게 다 물려줄랍니다. 아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큰 상이나 축복을 주신다고 한들, 내 아이 것이 아닌 저 하인 것이 될 텐데,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장 4절~5절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4.すると見よ、主のことばが彼に臨んだ。「その者があなたの跡を継いではならない。ただ、あなた自身から生まれ出てくる者が、あなたの跡を継がなければならない。」
5.そして主は、彼を外に連れ出して言われた。「さあ、天を見上げなさい。星を数えられるなら数えなさい。」さらに言われた。「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


이처럼 하소연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상속자는 너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하인이 아니라, 네 친자식이 상속자가 될 것이야. 그리고 어디 그 정도인 줄 알아? 하늘에 나가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세어봐. 네 자손들이 그렇게 많아질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은 대도시에서는 대기오염 때문에 별들이 많이 안 보입니다만, 당시에는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수많은 별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네 자손을 그렇게 많이 늘려주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지금 제가 배가 고파요. 밥 한 그릇만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야, 밥 한 그릇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식당을 전세계에 셀 수 없이 많이 세우는 축복을 줄 거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심정이 들겠습니까. 믿음이 좋으신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듣자마자 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고 하시겠지만, 저는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큰 식당을 셀 수 없이 많이 세우는 축복도 좋지만,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우선 밥 한 그릇부터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말씀하세요.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습니까.

지금 굶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몇 년 뒤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나, 저 같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15장 6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고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 믿음이 아니지요.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17절~18절까지를 보실까요?

로마서 4장 17절~18절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わたしはあなたを多くの国民の父とし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彼は、死者を生かし、無いものを有るものとして召される神を信じ、その御前で父となったのです。
18.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오늘 이 말씀이 바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아브라함의 크나큰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축복의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장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すると、そのうちの一人が言った。「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必ずあな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ます。そのとき、あなたの妻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サラは、その人のうしろの、天幕の入り口で聞いていた。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계신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이는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란 땅을 나선 때가 아브라함이 몇 살 때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12장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란 땅을 떠났던 것은 그의 나이 칠십 오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던 것이 하란 땅에 머물렀을 때였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잊으셨을 지 모르니까 간단하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 2절~4절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するとステパノは言った。「兄弟ならびに父である皆さん、聞いてください。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ハランに住む以前、まだメソポタミアにいたとき、栄光の神が彼に現れ、
『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そこで、アブラハムはカルデア人の地を出て、ハランに住みました。そして父の死後、神はそこから彼を、今あなたがたが住んでいるこの地に移されましたが、

여기서의 메소보다미아는 갈대아인의 우르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 땅에 이르기 전에 메소보다미아 즉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곳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이라고 하는 곳에 정착하였고, 거기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글쎄요. 하란 땅에 그들이 얼마나 머물렀는 지는 모르지만, 거기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고 하고, 그 하란 땅을 출발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하니, 그 이전인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날 때는 당연히 75세보다 더 젊은 나이였습니다.

좋습니다. 적게 잡아 75세부터 따진다 하더라도 99세까지라고 한다면 24년이고, 75세를 포함한다고 하면 25년이겠지요. 그 25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의 첫 기도 제목인 아이를 언제 갖게 될 것인지 하나님은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는 드디어 구체적인 시기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창세기 18장 10절에서 바로 내년 이맘때!(来年の今ごろ)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할렐루야가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수십 년에 걸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는구나.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아브라함의 심정이 되어 본다면 그리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18장 10절 다음 구절인 11절을 보시면, 그 때 사라는 이미 늙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주실라면 좀 더 일찍 주시던지 하지, 꽃다운 젊은 날을 다 보내고, 이제 나이 늙어서 체력도 떨어지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미 육체적으로는 아이를 못 낳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아이를 주신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땠습니까.

오늘 말씀 중 로마서 4장 19절~22절까지 보시겠습니다.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19.彼は、およそ百歳になり、自分のからだがすでに死んだも同然であること、またサラの胎が死んでいることを認めても、その信仰は弱まりませんでした。
20.不信仰にな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かえって信仰が強められて、神に栄光を帰し、
21.神には約束したことを実行する力がある、と確信していました。
22.だからこそ、「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す。

그들은 이처럼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는 전혀 가망성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며,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겨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 말씀대로 그들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る信仰)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가능성이 10%나 20%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가망성이 없는 0%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본 받아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라고, 말씀을 끝내도 아무런 손색이 없겠지요? 그런데 시계를 보니까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습니다. 어떡하죠?.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드릴 설교 말씀은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다른 곳은 다 좋아요.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냐 하면, 로마서 4장 19절~21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9절~21절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19.彼は、およそ百歳になり、自分のからだがすでに死んだも同然であること、またサラの胎が死んでいることを認めても、その信仰は弱まりませんでした。
20.不信仰にな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かえって信仰が強められて、神に栄光を帰(き)し、
21.神には約束したことを実行する力がある、と確信していました。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모두 진리의 말씀, 거짓이 없고 오류도 없는 하나님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좀 성격이 못된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말?”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삶에서 의심이 없었을까요? 작은 의심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100% 순종하는 삶이었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시지를 않아요. 그러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어떻게 말합니까.


창세기 16장 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サライはアブラムに言った。「ご覧ください。主は私が子を産めないようにしておられます。どうぞ、私の女奴隷のところにお入りください。おそらく、彼女によって、私は子を得られるでしょう。」アブラムはサライ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た。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가 안 생기니까 사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합니다. 그러자 사라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 내 여종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라.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일지 누가 아느냐. 이렇게 아브라함을 다그칩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역시 여자는 인내심이 없어. 좀 더 기다려야지, 그렇게 성질이 급해서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사라는 과연 얼마 동안이나 참고 기다렸을 것 같으십니까. 1년이요? 아니면 2년이요? 성경에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면 이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나선 것이 몇 살 때요? 예, 75세였지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이전에 갈대아인의 우르를 출발했던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적게 잡아서 하란 땅을 출발했을 때부터 계산을 해본다 하더라도 자그마치 10년이나 믿고 참고 기다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전혀 응답을 안 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참고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는 성질이 급한 것도 아닙니다. 인내심이 부족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면서 자기 남편을 다그쳐서, 사람의 생각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결국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만 이 아이의 어미인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 때문에 그 집안에 불화가 생깁니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평화로웠던 가정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분란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기계에 기름을 붓는 일입니다. 기계가 윤활유로 인해서 아주 잘 돌아갑니다. 우리의 삶이 30배 60 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을 거스르고 사람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삶은, 기계에 모래를 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활하게 돌아가야 할 기계가 멈추고, 소리가 나고, 불이 나고, 이상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아이가 자기 아이니까, 그 이스마엘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착각을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에게 아이가 없을 때에는 창세기 15장 2절에서 자기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私の家の相続人は、ダマスコのエリエゼルなのでしょうか。」) 하더니만, 이제 이스마엘이 생기니까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17장 18절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そして、アブラハムは神に言った。「どうか、イシュマエルが御前で生きますように。」

이제 됐다는 거예요. 이스마엘이 있으니까 자기 상속자는 그냥 이스라멜로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아무리 아브라함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 사이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의 아들로 인하여 믿음의 족보를 이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해서 사람의 생각으로 이스마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누구냐 하면 바로 중동 이슬람 사람들입니다.

이 이스마엘의 출생으로 인해서 그 가정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는 비단 아브라함 가정의 평화를 헤쳤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슬람을 둘러싼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0절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창세기 18장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すると、そのうちの一人が言った。「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必ずあな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ます。そのとき、あなたの妻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サラは、その人のうしろの、天幕の入り口で聞いていた。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 드디어 내년에 아들을 갖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사라는 어떻게 했을까요? 할렐루야를 외쳤을까요?


창세기 18장 12절~15절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サラは心の中で笑って、こう言った。「年老いてしまったこの私に、何の楽しみがあるでしょう。それに主人も年寄りで。」
主はアブラハムに言われた。「なぜサラは笑って、『私は本当に子を産めるだろうか。こんなに年をとっているのに』と言うのか。
主にとって不可能なことがあるだろうか。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定めた時に、あな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る。」
サラは打ち消して言った。「私は笑っていません。」恐ろしかったのである。しかし、主は言われた。「いや、確かにあなたは笑った。」

이 사라의 웃음이 기뻐서 웃은 웃음인가요? 아니요.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도 늙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비웃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이 사라의 비웃음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라의 믿음도 보면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출생하게 되고,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 말씀도 비웃은 적도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이처럼 사라는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대해서 비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은 적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사라가 하나님 말씀을 비웃어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아브라함이라 하더라도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은 적이 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창세기 17장 15절~18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5절~18절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また神はアブラハ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の妻サライは、その名をサライと呼んではならない。その名はサラとなるからだ。
わたしは彼女を祝福し、彼女によって必ずあなたに男の子を与える。わたしは彼女を祝福する。彼女は国々の母となり、もろもろの民の王たちが彼女から出てくる。」
アブラハムはひれ伏して、笑った。そして心の中で言った。「百歳の者に子が生まれるだろうか。サラにしても、九十歳の女が子を産めるだろうか。」
そして、アブラハムは神に言った。「どうか、イシュマエルが御前で生きますように。」

여기서 일부 신학자들은 이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뻐서 나온 웃음이라고 해석을 합니다만, 그렇다면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기뻐한 아브라함이 기뻐 웃으면서, “그러지 마시고 그냥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현대인의 성경판 창세기 17장 17절~18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창세기 17장 17절~18절
“17.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나 속으로 웃으며 `100세가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사라는 90세나 되었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고 중얼거리다가
18.하나님께 말하였다. `이스마엘이나 주의 축복 가운데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맥상으로 본다면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역시 비웃음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사라가 비웃은 것은 18장이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그보다 앞서 17장에서 벌써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어떻게 적혀 있었습니까.

로마서 4장 20절~22절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0.不信仰にな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かえって信仰が強められて、神に栄光を帰し、
21.神には約束したことを実行する力がある、と確信していました。
22.だからこそ、「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す。”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생각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낳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남편 아내 할 것 없이 똑같이 비웃었던 부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그럼 좀 아브라함 부부에 대해서 사실보다도 미화한 기록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미화하기 위해서 일부를 삭제하거나 일부를 사실보다도 과장되게 포장한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을 높이는 위인전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높임을 받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사람들 중에서 완벽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 점은 누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십니다.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에 보시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人の心が思い図ることは、幼いときから悪である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아무리 착한 척을 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악하대요. 그리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 의로운 척을 해봤자,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런데 어찌 아브라함이나 사라를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라면 좀 특별할 것 같으십니까.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 날이면 언제나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왔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요.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도대체 이게 지금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어려움이 닥쳐오면 우리의 마음은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성질이 급하거나 믿음이 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서로 다투기도 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보면 분명 완벽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 와도 그들은 무엇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그리고 부부가 서로 싸우거나 할 때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거나, 믿음을 버리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란 땅으로 돌아 간다거나 아니면 우상을 섬기거나 하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갔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오늘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기록에서 보듯이, 훗날에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主が人の歩みを確かにされる。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의 발걸음, 믿음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끝까지 믿고 견디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가 받은 축복,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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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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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회 믿음의 상속자
2021년 4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3절~16절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3節~16節
“13.というのは、世界の相続人となるという約束が、アブラハムに、あるいは彼の子孫に与えられたのは、律法によってではなく、信仰による義によってであったからです。
14.もし律法による者たちが相続人であるなら、信仰は空しくなり、約束は無効になってしまいます。
15.実際、律法は御怒りを招くものです。律法のないところには違反もありません。
16.そのようなわけで、すべては信仰によるのです。それは、事が恵みによ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こうして、約束がすべての子孫に、すなわち、律法を持つ人々だけでなく、アブラハムの信仰に倣う人々にも保証されるのです。アブラハム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父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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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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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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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9번째 시간으로서 “ 믿음의 상속자” 信仰の相続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들은 평소보다 조금 난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 구절씩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입니다.

로마서 4장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3.というのは、世界の相続人となるという約束が、アブラハムに、あるいは彼の子孫に与えられたのは、律法によってではなく、信仰による義によってであったから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상의 상속자로 삼으셨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은 창세기 17장 4절~6절을 꼽습니다.


창세기 17장 4절~6절
4.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これが、あなたと結ぶわたしの契約である。あなたは多くの国民の父となる。
あなたの名は、もはや、アブラムとは呼ばれない。あなたの名はアブラハムとなる。わたしがあなたを多くの国民の父とするからである。
わたしは、あなたをますます子孫に富ませ、あなたをいくつもの国民とする。王たちが、あなたから出てくるだろう。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그에게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이 나온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이 언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상의 상속자로 삼으셨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오늘 문제는 너무 쉬워서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이시라면 문제를 듣자마자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으실 정도로 쉬운 문제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율법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어떻습니까.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자,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때, 율법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예,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나올 때 주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 축복을 받았을 때가 언제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구절을 근거로 듭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私の言おうとしていることは、こうです。先に神によって結ばれた契約を、その後四百三十年たってできた律法が無効にし、その約束を破棄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미국에서 나온 주석서와 한국 주석서를 참고로 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축복이 언제 주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보니까, 모두 하나같이 이 갈라디아서를 근거로 들면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있고 그 후 430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이 부분은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일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방심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창세기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근거로 해서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인데, 이게 우선 말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430년’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 신약을 통틀어서 ‘430년’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앞서 살펴본 갈라디아서 3장 17절를 포함해서 모두 4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3장 17절이라고 하면 두 번째는 창세기 11장 16절~17절입니다.

창세기 11장 16절~17절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エベルは三十四年生きて、ペレグを生んだ。
エベルはペレグを生んでから四百三十年生き、息子たち、娘たちを生んだ。

그런데 이는 아브라함의 축복이나 율법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지요?

그럼 나머지 두 개의 430년은 언제냐 하면,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두 개가 연달아 나옵니다.

바로 출애굽기 12장 40절~41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41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イスラエルの子らがエジプトに滞在していた期間は、四百三十年であった。
四百三十年が終わった、ちょうどその日に、主の全軍団がエジプトの地を出た。

즉, 말씀에 의하면 야곱과 그의 가족이 당시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있었던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의지해서 애굽에 들어간 다음, 430년이 지나서 모세의 인도로 탈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탈출을 한 후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에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성경에 나온 연대를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은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기 116년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인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 그러니까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에 이미 아브라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자들의 주장에는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성경이 잘못된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은 100년 200년이 아니지요. 적어도 2000년 이상, 많게는 수 천년 전에 적힌 책입니다. 사실 그처럼 오래된 책을 그것도 이 정도 분량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 1145년에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라고 하는 점으로 본다면 성경은 그보다도 최소한 1000년 이상 오래된 책을 우리가 이렇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발견된 성경 중에서 부분적으로 누락된 곳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잘못 되었다거나 오류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류가 있다면 이는 성경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성경을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해야 할 텐데, 이를 학자의 자존심인지 뭔지, 그 모른다고 말하기가 싫어서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만,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모르는 점은 모른다고 넘어가는 경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좀 길어져서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 로마서 4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3.というのは、世界の相続人となるという約束が、アブラハムに、あるいは彼の子孫に与えられたのは、律法によってではなく、信仰による義によってであったからです。

솔직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 하신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의하면 분명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은 축복을 주셨습니다만, 이 말씀 중에서 확실한 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축복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을 때, 그 때에 율법은 아직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축복은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자,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14절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4.もし律法による者たちが相続人であるなら、信仰は空しくなり、約束は無効になってしまいます。

자, 이 말씀에서 보시면 ‘율법에 속한 자’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가 바로 ‘율법에 속한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식당 입구에 이렇게 써 붙여 있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식사를 드립니다”

이걸 보고 돈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딱 들어갔더니, 식당 안에 이렇게 써 붙여 있었습니다.

“다만 식사를 하신 후에 돈을 내야 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되어 있었다면, 식당 입구에 “배고픈 사람에게는 식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간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하자면 헛것이 되고 맙니다. 어차피 돈을 내야 밥을 준다고 한다면, 그런 간판이 있어봤자 뭐해요. 그런 건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두 구원을 받는구나! 하고 믿었더니, 조금 있으니까 뭐래요?

“율법을 행한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되어 있다면 무슨 말이에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율법을 행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말은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것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는 말이,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할례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었어요? 아니면 할례를 받고 난 다음이었어요?

예,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라고 하는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을 지난 주에 공부했지요.

이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받고 난 다음에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도 축복을 받기 위해 율법을 행해야 하겠지만, 아브라함이 상속자로서 축복을 받은 것은 율법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대체로 유럽 사람들이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서 50년대에 걸쳐서 영국 총리를 했던 처칠에 대한 일화라고 합니다.

처칠 총리가 그날 국회 일정 때문에 전용차를 타고 급히 국회의사당을 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그 날은 조금 늦었기 때문에 운전기사가 과속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자 이를 목격한 경찰관이 차를 세우더랍니다.

그래서 운전기사가 그 경찰한테 말하기를, “이봐, 이 차는 총리 각하 전용차야. 이 차에는 총리 각하가 타고 계셔. 지금 의사당으로 가는 길인데, 시간이 없어서 빨리 가야하니까 번거롭게 굴지 마시게”

당시는 텔레비전이 그리 많이 보급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서 사실 총리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경찰관이 하는 말이, “저는 총리 각하 성함은 알지만 얼굴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한 가지 있습니다. 만일 지금 이 차에 타고 계신 분이 진짜 총리 각하시라면 법률을 위반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경찰관은 그렇게 말을 하자 현행법대로 속도위반 딱지를 끊었다고 합니다.

처칠은 비록 딱지를 끊겼지만, 이 경찰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래서 그는 집무실로 돌아오자 런던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아침에 어디어디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 경찰관이 내가 총리인데도 철저하게 법률을 지켜가면서 속도위반 단속을 했지 뭔가. 그러니까 이 모범적인 경찰관을 1계급 특진 시키게.”

그러자 런던 경찰청장이 이랬다고 합니다. “총리 각하. 우리 나라 법률에는 속도위반 단속을 했다고 해서 특진을 시켜준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하지요?

율법을 살펴보면 민법적인 규정도 상당히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만, 상당부분이 형법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됩니다. 법률 특히 형법은 어떤 법률입니까. 이는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응분의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바로 형법입니다.

형법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오로지 진노, 분노, 죄악, 형벌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나쁜 짓에 대해서 처벌할 수 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행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 행위가 비판을 받을만한 짓이었다 하더라도 이를 처벌하는 법조항이 없으면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神は私たちに、新しい契約に仕える者となる資格を下さいました。文字に仕える者ではなく、御霊に仕える者となる資格です。文字は殺し、御霊は生かすからです。

율법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고 우리를 죽이는 것일 뿐 살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대통령이든 총리이든 말단 경찰관이든, 그리고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마찬가지로 판단을 받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골로새서 2장 13절~15절
“13.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背きのうちにあり、また肉の割礼がなく、死んだ者であったあなたがたを、神はキリストとともに生かしてくださいました。私たちのすべての背きを赦し、
私たちに不利な、様々な規定で私たちを責め立てている債務証書を無効にし、それを十字架に釘付けにして取り除いてくださいました。
そして、様々な支配と権威の武装を解除し、それらをキリストの凱旋の行列に捕虜として加えて、さらしものにされました。

우리가 율법 앞에서는 누구 하나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 증서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다음 15절을 봅니다.

로마서 4장 15절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5.実際、律法は御怒りを招くものです。律法のないところには違反もありません。

율법이 있어야지 범죄가 성립하고,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할 근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죄할 율법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둘 근거가 없어집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할 근거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동안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던 우리는 모든 죄가 사해지고, 비로소 자유인의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로마서 4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16절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6.そのようなわけで、すべては信仰によるのです。それは、事が恵みによ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こうして、約束がすべての子孫に、すなわち、律法を持つ人々だけでなく、アブラハムの信仰に倣う人々にも保証されるのです。アブラハム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父です。

성경은 우리더러 상속자가 된다고 기록합니다.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집을 상속받았다고 한다면 단지 그 집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뿐인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유할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 후손에게까지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는데, 이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만이 아니라 믿음에 속한 자라고 하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동서를 불문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상속에 대해서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그 흘리신 피의 대가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피로 그 죄값을 지불하고, 주님이 택한 사람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 됩니다. 구원을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상에서도 대통령이나 총리면 사람들은 우와 합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뭐예요. 장관이나 시장, 도지사, 구청장이라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에서 왕노릇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텔레비전에서 한국이나 일본이나 장관님들 하시는 걸 보면 참 열심히들 하십니다.

사실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위에 있는 인사권자 눈치를 보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인사권자의 판단이나 명령이 항상 합리적이기만 하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밑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따라야 합니다. 글쎄요. 저라면 잘 못할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땅에서 우리가 상속받아 왕노릇 한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벼슬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분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는 정말 아주 문명의 혜택을 별로 못 받을 정도의 지역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제 오랜 선교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기 책상 위에 있는 포스트잇이 자꾸 눈에 밟히더래요. 저 포스트잇은 구하기도 참 어려운 것인데, 저걸 한국으로 가져갈까 말까. 한국으로 가져가면 정말 요긴하게 잘 쓸 건데……하지만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저걸 필요로 할 텐데……그러면서 가져갈까 놔두고 갈까를, 그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리면서 한참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래. 내가 그래도 목사인데,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야지……라고 마음 먹고 과감하게 그 포스트잇을 그 아프리카 사역지에 두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오니까 어때요? 교회 사무실에 가보니까 크고 작은 포스트잇들이 여기저기 막 굴러 다니더래요. 그걸 보고 자기가 아프리카에서 그 포스트잇 하나를 만지작거리면서, 가지고 갈까 두고 갈까를 한 참 고민했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랐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중에 축복을 받을 자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까짓 포스트잇 하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많은 사람들이 왜 축복을 못 받겠습니까. ‘주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받은 게 있어야 줄 게 아니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사실인가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습니까? 아니에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돈이나 재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이 몸, 우리가 섬길 수 있는 교회와 우리 가족, 우리 이웃, 모두가 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심기 전에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심어야 거두고 주어야 받는다는 것이 믿음의 법칙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제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채찍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맞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정죄할 법조문을 모두 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은 천국 백성으로서,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상속 받아 왕노릇 할 믿음의 상속자로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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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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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회 구원에 이르는 길
2021년 4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12절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9節~12節
“9.それでは、この幸いは、割礼のある者にだけ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割礼のない者にも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アブラハム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と言っていますが、
10.どのようにして、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すか。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はなく、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
11.彼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ことの証印として、割礼というしるしを受けたのです。それは、彼が、割礼を受けないままで信じるすべての人の父となり、彼らも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あり、
12.また、単に割礼を受けている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割礼を受けていなかったときの信仰の足跡にしたがって歩む者たちにとって、割礼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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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8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 救いに至る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이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제 믿음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그 전까지는 안식일 때마다 자기가 지은 죄를 해결 받기 위해서 집안 형편에 따라 짐승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랬습니다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사람이 드렸던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때까지 행하던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사로 드려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진정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변화가 이제 믿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기들만이 구원 받은 백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아니, 자기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전세계 땅끝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할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할례에 대해서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2절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さて、ある人々がユダヤから下って来て、兄弟たちに「モーセの慣習にしたが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救われない」と教えていた。
それで、パウロやバルナバと彼らの間に激しい対立と論争が生じたので、パウロとバルナバ、そのほかの何人かが、この問題について使徒たちや長老たちと話し合うために、エルサレムに上ることになった。

여기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이란 그들이 형제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더라도 모세의 법, 그러니까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초대교회 내에서는 크나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할례라고 하는 문화가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이방인이 말하기를 이제 좋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내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 내 평생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다.

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해보죠.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입니다.

어 그래? 좋다. 그러면 할례를 받아야지만 제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이제 바지 벗고 여기 누워.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흔쾌히 바지를 벗고 누워서 할례를 받을 만한 이방인이 얼마나 있겠냐는 거죠. 사실 당시로서도 이 문제, 그러니까 예수님을 전할 때에 할례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선교 자체를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수 백년이 아닌, 수 천년 동안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들어왔던 그들입니다. 할례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근거이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하는 생각은 그들에게 있어서 설명이 필요 없는, 말하자면 상식 중의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할례라고 하는 조건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당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를 합니다. 참 이렇게 보면 바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물입니다.

먼저 이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사도행전 22장 27절~29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そこで、千人隊長はパウロ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に言いなさい。あなたはローマ市民なのか。」パウロは「そうです」と答えた。
すると千人隊長は言った。「私は多額の金でこの市民権を手に入れたのだ。」パウロは言った。「私は生まれながらの市民です。」
そこで、パウロを取り調べようとしていた者たちは、すぐにパウロから身を引いた。千人隊長も、パウロがローマ市民であり、その彼を縛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恐れ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즉, 그는 당시 비록 로마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정통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한다면, 당시에는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지가 상당히 중요했었는데, 당시 가말리엘에 대해서 사도행전 5장 34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5장 34절 전반부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ところが、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で、ガマリエルというパリサイ人が議場に立ち、使徒たちをしばらく外に出すように命じ、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인물은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율법교사라고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선생을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상당히 인정 받을 만 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자면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는 스스로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이는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배경, 그리고 성장과정으로 본다면,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생각, 변화를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할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할례는 반드시 받아야만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울이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설마 바울이 그런 주장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 믿음이야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정말 참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그 근거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시기와 할례를 받은 시기를 비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데,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시기 전에, 우선 한 번 창세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고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는데, 그렇다면 이 당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상황이었냐는 것이지요. 정답은 뭐냐 하면, 아니요. 당시는 아직까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언제 받았냐 하면, 창세기 12장도 15장도 아닌, 이보다도 뒤인 창세기 17장에서입니다.

창세계 17장 23절~25절
"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そこで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シュマエル、彼の家で生まれたすべてのしもべ、また、金で買い取ったすべての者、すなわち、アブラハムの家のすべての男子を集め、神が彼に告げられたとおり、その日のうちに、彼らの包皮の肉を切り捨てた。
アブラハムが包皮の肉を切り捨てられたときは、九十九歳であった。
その子イシュマエルは、包皮の肉に割礼を受けたとき、十三歳であった。

이는 앞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의롭게 여기신 지 무려 20여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시고 의롭게 여기셨을 때, 나중에 할례를 받을 것을 필수조건이라고 하시면서 복을 주시고 의로 여기셨냐 하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서 9절과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9절~10절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それでは、この幸いは、割礼のある者にだけ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割礼のない者にも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アブラハム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と言っていますが、
どのようにして、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すか。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はなく、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

이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드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를 받고 난 다음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4장 11절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彼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ことの証印として、割礼というしるしを受けたのです。それは、彼が、割礼を受けないままで信じるすべての人の父となり、彼らも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あり、

할례라고 하는 것은 당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근거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나중에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할례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받음으로 인해서, 그가 받은 축복이 모두 승인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12절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また、単に割礼を受けている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割礼を受けていなかったときの信仰の足跡にしたがって歩む者たちにとって、割礼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만약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난 다음에 모든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믿음의 조상이 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살펴보았을 때 바울이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있어서 할례는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이 할례를 대신하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요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손에 물을 적셔서 머리에 살짝 붓는 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성경적인 세례는 온몸이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말하자면 침례가 본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약식의 세례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형식에 있어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의 경우 창세기 17장 11절~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만, 세례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구약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은 세례가 있었을까요? 아니요. 구약에서는 세례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 때에 보니까 어떤 분께서, 구약에서 나아만 장군 때 세례가 등장하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 보면 당시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더니 치료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만, 이는 세례라기보다는, 엘리사가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고 해서 이에 순종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는 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치유의 역사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던 할례에 대한 논쟁이 있고 난 다음에 할례는 점차 사라져가고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할례처럼 하나님이 직접 명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御霊が、ある人の上に降って、その上にとどまるのをあなたが見たら、その人こそ、聖霊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授ける者である。』

여기서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나 성령님으로부터 명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기독교에 있어서는 할례가 아니라 세례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례 하나만을 두고 보아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우리 교단에서는 정식교인으로 인정하는 절차로 세례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고, 그리고 유아세레를 받는 경우에는 만 18세가 되면 이는 세례식이 아니라 입교식을 통해서 교인으로 가입이 됩니다.

그렇다면 할례와 세례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선 할례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첫째로, 할례는 남성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는 여성도 할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창세기 17장 10절에 보면 할례는 분명히 남자에 대해서만 명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할례는 절차가 매우 어렵습니다. 남성의 포피를 베는 것인데, 이를 받으면 며칠 동안은 거동을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4장 25절에 보면 할례를 받은 지 3일이 지났는데도 아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할례는 몸에 흔적이 남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신앙을 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 번 받은 할례의 흔적은 몸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되지요.

이에 반해 세례의 특징은 어떻습니까. 쉽게 말해서 지금 말씀 드린 것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세례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세례는 절차가 매우 쉽습니다. 약식으로 하는 일반적인 세례는 젖은 손으로 머리에 물을 살짝 붓는 것이기 때문에 물이 좀 흐른다 하더라도 손수건으로 닦으면 되는 것이고, 물속에 몸을 모두 담그는 침례라 하더라도,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세례는 외견상 몸에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아무리 21세기 최신의학기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육체적으로 이 사람이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 또한 세례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할례의 시대가 아니라 세례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아만 되느냐 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물로 세례를 받기만 한다고 해서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고,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꼭 집사나 권사나 장로가 되어야지만 구원을 받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직분에 대해서 너무나도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에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교회 어떤 모임에 있을 때, 거기서는 그 모임 자체적으로 매주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침 거기서 그 주보를, 도중에 잠시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만, 대략 7년 정도 만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주보에는 매주 후원금을 내주시는 분들을 적었는데, 거기에는 성함 뒤에 직분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 장로, 누구누구 권사, 누구누구 집사나, 형제, 자매…… 이렇게 이름 뒤에 직분을 적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요. 당사자가 제게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고, 누군가를 통해서 저에게 온 말이었는데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회 직분에 보면 집사님도 계시고 안수집사님도 계시잖아요? 하지만 당시 저는 안수집사님도 주보에 적을 때에는 그냥 ‘집사’라고만 적었었는데, 그런데 그 분은 안수집사인 자기 남편 이름을 적을 때 누구누구 집사가 아니라 누구누구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얼마나 참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만약 집사라고만 하면 같은 이름인 분이 계시기 때문에 굳이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라고 하면 네 글자나 되는데, 칸도 좁은 곳에 직분을 일반적인 사람 이름보다 길게 네 글자나 적으라는 거잖아요.

물론 기술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 권사, 집사, 형제, 자매……이렇게 다른 직분들은 두 글자인 곳에 네 글자를 넣는다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어요.


저도 작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문득 제게 든 생각이 뭐였냐 하면, 아니, 도대체 이 분은 뭣 때문에 직분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보다 연배도 한참 위이시고, 그리고 그 사람이 직접 제게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닌데, 찾아가서 뭐라고 말씀 드리는 것도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이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만, 그 결과 어떻게 했냐 하면, 그 다음 주부터 주보에 후원자 성함을 적는 곳에서 직분을 모두 다 빼버렸습니다.

그 전에는 이름을 적는 순서도 그래도 직분을 배려해서 적었었습니다만, 그 때부터는 장로님이건 권사님이건 모든 직분을 다 빼고 이름 세 글자, 그리고 가나다순으로 적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런 말씀도 못하지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직분을 안 적었는데, 설마 그래도 자기 남편만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고 그러겠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앉을 때, 목사님 먼저 앉고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 순으로 앉는 대요? 아니요. 그런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디를 보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직분이 무엇이었는지, 하물며 우리가 세례를 받았는지, 받았다면 언제 받았는지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든지 괴로움 속에 빠질 때라 하더라도 우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할례에 있는 것도 아니요, 세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형식에 있는 것도 직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으면 삽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끌어 주십니다. 이길 힘을 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축복에 축복을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의 중심을 바라보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예수님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고 모든 좌절과 절망을 물리쳐서, 크나큰 승리를 거둠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기쁨으로 구원 받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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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회 은혜와 감사
2021년 3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4절~8절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4節~8節
“4.働く者にとっては、報酬は恵みによるものではなく、当然支払われるべきものと見なされます。
5.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6.同じようにダビデも、行いと関わりなく、神が義とお認めになる人の幸いを、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7.「幸いなことよ、不法を赦され、罪をおおわれた人たち。
8.幸いなことよ、主が罪をお認めにならない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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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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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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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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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7번째 시간으로서 “은혜와 감사” 恵みと感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인 다섯 구절 중에서 앞의 두 구절, 그리고 뒤의 세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성결 말씀도 그렇습니다만, 이 말씀도 깊은 생각 없이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만, 자세히 읽어보면 상당히 독특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두 구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4장 4절~5절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4節~8節
“4.働く者にとっては、報酬は恵みによるものではなく、当然支払われるべきものと見なされます。
5.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먼저 이 말씀에는 <삯>과 <보수>와 <은혜>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보수>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개역한글에서는 <빚>이라는 말씀으로 쓰였습니다만, 개역개정에서는 <보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4절을 조금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일하는 사람에게는 받는 돈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보수로 여겨진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무슨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월급에 합당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300만원어치 일을 했어요. 그리고 그 보수로 300만원 받았어요. 이렇게 되면 이는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당연한 받아야 할 돈, 대가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은혜>에는 있고 <대가>에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반면에, 내가 일한 것도 없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300만원어치도 일을 한 것이 없는데 300만원이나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은혜>가 되지요. 대가에 걸맞는 일도 안했는데 그 돈을 받았다고 한다면 내가 일한 것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받았다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300만원어치 일을 해서 300만원이라는 대가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감사한 마음이 들 필요는 없겠지요. 상대방은 나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한 것이고, 나는 받아야 할 돈을 받았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합니다.

어느 회사에 A와 B라고 하는 두 직원이 있었습니다. A는 매달 300만원어치 일을 하고 300만원을 받았습니다. B는 매달 월급에 걸맞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300만원을 받았습니다.

회사에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A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성과를 올렸고, 그 성과에 걸맞는 월급을 받는다. 나는 회사에 있어서 유익한 존재다. 오히려 회사에서는 이와 같은 내 월급을 올려주어야 하고 승진을 시켜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사를 대할 때에도 당당했습니다. 하물며 사장님을 대할 때에도, 겉으로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가 당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이런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B는 맨날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일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료 직원 A를 보면 그는 계약도 잘 따오고 고객관리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B는 상사를 대하면 일을 못해서 혼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장님을 만나면, 맨날 일도 제대로 못하는데 월급만 꼬박꼬박 받아가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있고, 그리고 자기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월급을 주는 덕분에 우리 가족이 생활할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장님이 두 사람을 부릅니다. 회사 결정으로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승진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저기 지방 시골로 좌천을 하게 생겼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이 두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A는 자기야 말로 승진할 사람이요, B는 자기야 말로 좌천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한테서 나온 말씀은 의외였습니다. 시골로 좌천당할 사람은 A였고 오히려 승진 대상자가 B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화가 난 사람은 당연히 A였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월급 300만원을 받았지만, 제가 300만원어치 일을 안 했습니까? 오히려 400만원어치 500만원어치 일을 했습니다. 반면에 B는 어떻습니까. 300만원어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B를 승진 시키고 나처럼 유능한 직원을 좌천 시킨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랬더니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봐. 회사에서 자네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고작 월급 300만원이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회사에서 사용하는 책상, 의자, 컴퓨터는 공짜야? 그리고 식사비에 교통비, 사무실 냉난방비와 관리비에 기타 세금도 있고, 매년 직원 연수도 해서 교육도 시켜주잖아. 얼마 전에는 해외연수도 다녀왔지? 그리고 자네들이 사는 주택보조금도 나가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자녀교육비도 지원해주고 있어.

어디 그 뿐인가? 우리 회사가 있는 여기 부동산 값이 얼마나 비싼 곳인지 잘 알잖아? 그렇다면 자네들이 사용하고 있는 땅값도 계산에 넣어야지.


지금까지 자네들에게 들어간 돈에 비하면 자네들이 한 달에 100만원을 벌었건 500만원을 벌었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얼마 전에 임원회의를 열어서 승진시킬 사람과 지방 시골로 보낼 사람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자네 A는 시골로 보내고 B는 승진시키기로 결정 됐어.

이 사장님의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되십니까.

그 사람에게 들어간 돈이 아무리 많고, 거기에 비해서 그 사람들이 벌어온 돈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일을 잘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혹시 그렇게 생각 되십니까.

지금도 바깥에 나가서 회사원들에게 질문을 한 번 해 보세요. 당신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자기가 일한만큼 받는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못 받는다고 생각할까요.

작년 8월에 어느 한국 일간지에 실린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1071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약 70%가 연봉에 불만족스럽다고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만 왜 나오는 것일까요. 물론 그 회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을 보았을 때 설마 70%나 그런 문제가 있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나오는 이유, 간단합니다. 내가 일한만큼 월급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만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중에서는 직장엔 근무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근무해 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내가 받는 월급은 내가 일만만큼의 월급을 받고 있거나,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한 직원을 고용한다고 하면 거기에 들어가는 인건비는 월급만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직원 한 사람이 근무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감안한다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에게 지급하는 월급의 3배가 인건비로 들어간다는 것은 회계상에 있어서 이미 상식입니다.

이렇게 계산을 해본다면 300만원 받는 직원은 적어도 한 달에 900만원어치의 이익을 회사에 가져다 주어야지만 ±0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앞서 연봉에 불만족스럽다고 답을 했던 70% 분들은 자기 회사에 자신의 월급의 3배에 달하는 이익을 매달 가져다주었을까요? 글쎄요. 저는 여기에 적지 않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에 내가 받는 월급만큼 일을 하지 못했는데도 월급을 받아요. 이는 당연히 받아 마땅한 보수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과분한 은혜로 생각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는 어떨까요.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4장 5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4장 5절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5節
“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이 말씀을 바꾸어 본다면 어떻게 됩니까. 일을 못했다,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요. 물론 회사에서는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직원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직원에게는 특별 보너스나 특별 승진 같은 것이 주어질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믿음 안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불가능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자, 우리는 장차 이 세상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생을 마감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외국에 들어갈 때를 보면 <비자>라고 하는 것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자기 나라에 들어와도 된다는 <입국허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허가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까.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질 만한 믿음의 행위를 한 결과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의롭다고 할만한 믿음의 행위를 한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내고 해 봤자 그와 같은 행위 만으로는 의롭다는 말을 듣지 못한 대요. 이는 마치 회사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 봤자, 나한테 들어가는 인건비보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보혈만큼의 가치가 필요합니다.

자,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님의 생명에 해당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값어치만큼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가능합니까.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역사상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지배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역사상 많은 돈을 벌었던 재벌이라 하더라도 이 지구 전체를 지배하거나 소유했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보혈이 고작 이 작은 지구 하나 정도밖에 가치가 없나요?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이 우주 모든 것을 모두 합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한 방울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차피 내가 내 능력으로 갚을 수가 없어요. 내 죄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나는 참으로 죄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아요. 내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 대신 채찍에 맞아주시고,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시고, 나 대신 죽어주심으로 인해서, 내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어떻게 하기만 하면요?

그렇습니다. 믿기만 하면 그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 주신다. 즉,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 볼까요?

한국은 면허 기간이 10년인데 여기 일본은 참 기간이 짧아요. 보통 일반적으로 유효기간이 3년입니다.

그런데 5년 동안 교통위반을 하지 않으면 면허가 금색 띠가 있는 골드면허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면허 갱신료나 보험료가 할인되고 갱신할 때 받는 교육시간도 단축되고, 반면에 유효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연장이 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가 있게 되거든요.


제가 얼마 전에 운전면허를 갱신했습니다. 제가 초중고등학교 때 일본에 있을 때에는 당연히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면허를 처음 딴 것은 다시 일본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난 2015년이었습니다. 3년 뒤인 2018년에 갱신을 하고, 또 3년 뒤인 올해 2021년에 갱신을 하게 된 것인데, 이제 그 이전 5년 동안 무사고 무위반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무사히 골드면허로 갱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전혀 운전도 안 하다가 여기 군마에서 살게 되니까 거의 매일 같이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또 여기저기 장거리도 가는 일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골드면허를 따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만약에 제가 5년 동안 정말로 사고는 물론이고 경찰이나 카메라가 보고 있거나 안 보고 있거나 교통위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이는 제가 당연히 받아야 할 보수라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거기서 주는 면허를 받을 때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만, 진심으로 아,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은 안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연한 걸 받았을 뿐인데 감사할 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그 5년 동안에 사고까지는 아니지만 교통위반을 한 적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위반이라면 여러 가지 있겠지요. 속도위반, 일시정지 위반, 주차위반, 신호위반 등 여러 가지 위반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위반을 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골드면허를 받았다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면 당연히 받아야 할 보수가 아니라, 은혜가 되겠지요. 골드면허를 받아야 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 생각되겠습니까.

자, 그럼 여기서 한 가지 퀴즈입니다. 저는 이 골드면허를 받았을 때, 보수로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은혜로 생각했을까요.

예, 얼마나 크나큰 은혜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면허시험장에서 면허를 받았을 때 보면, 그냥 <감사합니다>라고만 했습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그 면허를 주시는 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아, 정말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가슴에 손을 놓고, 지난 5년 동안 그런 위반을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골드면허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면허를 받을 자격은 없지만, 그 위반하는 순간, 경찰에게 들키거나, 카메라에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그렇습니다.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것이지요.

우리가 경찰이나 단속카메라 눈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 34장 21절~22절
“21.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神の御目が人の道の上にあり、その歩みのすべてを神が見ておられるからだ。
不法を行う者どもが身を隠せる闇はなく、暗黒もない。


요한1서 3장 20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たとえ自分の心が責めたとしても、安らかでいられます。神は私たちの心よりも大きな方であり、すべてをご存じだからです。

하나님 앞에서는 그 무엇 하나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감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6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6절~8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6節~8節
“6.同じようにダビデも、行いと関わりなく、神が義とお認めになる人の幸いを、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7.「幸いなことよ、不法を赦され、罪をおおわれた人たち。
8.幸いなことよ、主が罪をお認めにならない人。」”


그렇습니다. 우리의 불법이 사함을 받습니다 죄가 가려집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리면 그 틈을 타고 나오는 것이 불평이고 불만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왜 나오겠습니까.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에 나옵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것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로지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고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 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왕을 위해서도 주시지 않았던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제 우리 마음 안에 있던 불평과 불만을 던져버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위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감당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 남은 인생 동안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이 귀한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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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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