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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회 소망을 가진 사람
2022년 1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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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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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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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8번째 시간으로서 “소망을 가진 사람” 望みを持つ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오늘 본문에서는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 말씀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즉,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혹시 그렇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은 어떻게 됩니까. 믿음과 소망은 사랑만큼 중요하지 않다? 사랑만 있으면 믿음과 소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씀인가요?

사실 이 구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믿음과 소망이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저 일반적인 뜻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가지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고 사랑은 천국에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만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어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자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고, 소망이라고 하는 것도 천국에 대한 소망인데, 사랑은 천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사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돈이 없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이와 같은 조건이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 예외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눈으로 보시기에 옳다고 인정 받을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오랜만에 또 여쭤볼까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천국에 들어갈 만큼 합격점을 받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어요. 다만 자격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한 다음에, 아니면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심판을 하실 때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의 차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이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들어가지 못했어요. 아직 실현되기 전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과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천국에 들어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천국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나요?


우리가 어디 외국에 가기 위해서 비자 수속을 준비합니다. 반드시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 나라에 갈 수 있을 거야. 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에 입국을 했어요. 그런데도 아 나는 그 나라에 갈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과 소망이 있어요?

아니, 이미 그 나라에 입국을 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무슨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믿음과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천국에 가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과 소망이지, 이미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도 ‘아…천국에 들어가야지…천국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막연한 믿음과 소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믿음과 소망이 뭐가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는 것이지, 이미 이루어졌다면, 다시 말해서 이미 천국에 들어간 다음이라면 믿음과 소망은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가끔 사람은 실제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때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도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정말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 부족한 우리에게 부어주신 넘치는 사랑,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넘치는 사랑, 놀라운 사랑은 그러면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없어지나요?

남녀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사랑을 하다가,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랑이 식어버려요? 그렇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今、私たちは鏡にぼんやり映るものを見ていますが、そのときには顔と顔を合わせて見ることになります。今、私は一部分しか知りませんが、そのときには、私が完全に知られているのと同じように、私も完全に知ることになります。

오히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 때로는 잘 모르고 희미할 때도 있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맞나 하면서 의심할 때도 있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닫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면 우주를 향해 로켓을 발사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로켓 모양은 일반적으로 가늘고 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로켓 전체가 모두 우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밑에 기다란 부분은 대부분이 연료탱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켓을 발사하게 되면 그 연료탱크에 있는 연료를 태우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데, 연료를 다 쓰게 되면 빈 탱크가 든 엔진은 차례대로 분리를 해서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마치 천국에 대한 소망은 천국에 가기 위한 엔진, 연료탱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향한 추진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침내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는 이미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24절에도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먼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아직 천국은 아니에요. 이미 천국이라면 이는 ‘소망’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다만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이 사랑은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게 그 크나큰 사랑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제일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앞서 로켓의 예로 든다면 믿음과 소망은 모두 연료탱크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소망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러 이렇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몸이 아파요. 그런데 기도할 때 “이 아픈 것을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잖아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아직 치료해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미 치료해주시고 해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은 차이가 없는 것인가요?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소망으로 쓰인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의미상 같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4절 말씀을 보면, 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 그러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즉,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는 말씀이 25절에 나오지요. 이 말씀을 ‘소망을 갖는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보며 어떻게 됩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즉 만일 우리가 소망을 갖는다면, 어떻게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에 보시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아요. 하지만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이요, 믿음이 있으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믿음이 있으니까 기도를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냐 하면, 소망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만 있고 소망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교회는 다녀요. 예배도 드려요. 기도도 해요. 그런데? 예, 참지를 못해요.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보면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주여. 지금 당장 응답해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안 돼요? 그러면 이제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더 큰 소리로 주여! 지금 당장 응답해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여리고 성 공략 장면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시면, 이제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한 끝에 애굽을 탈출한 광야 2세대가 가나안 땅을 공략합니다. 그 첫 고비가 여리고 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 성 성벽은 내벽과 외벽 즉 2중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외벽 높이는 12미터에 두께는 2미터였다고 하고, 내벽 높이는 14미터에 두께는 4미터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첨단 군사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공략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난공불락의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 무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제대로 된 갑옷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여리고 성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광야 1세대들처럼, 너희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게 낫겠다, 뭐 그렇게 불평불만을 쏟아냈겠지요. 하지만 이제 광야 2세대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여리고 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믿음 외에 또 하나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망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3절~5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6일 동안 하루에 한번씩 여리고 성벽을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나팔을 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진대요.

자, 지금 여리고 성 공략이 급해요? 안 급해요?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식량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에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었다면서. 그러니까 식량은 충분했을 거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앞장인 여호수아 5장 12절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マナは、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やみ、イスラエルの子らがマナを得ることはもうなかった。その年、彼らは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어왔던 만나는 이제 내리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출이라고 해봐야 농사를 지을 틈이 있었겠습니까.

풍부한 식량은 성 안에 축적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저 나무에 달린 열매나 먹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는 200만 명이나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만한 충분한 식량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식량사정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나도 없고 들에서 먹을 만한 것들은 충분하지 않아요. 하루라도 빨리 여리고 성을 공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세요? 예, 6일 동안 하루 한 번씩 성벽을 삥 돌고, 7일째는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래요.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7일 동안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성벽을 무너뜨려 달라고 금식하고 밤새도록 목이 터져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올해는 북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만, 하계올림픽이든 동계올림픽이든 4년마다 열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아~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위해 4년을 기다려왔습니다……라고 하지요.

이게 틀린 말이에요? 아니에요. 맞는 말입니다. 4년을 기다려왔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이 달력만 보면서 4년만 기다렸겠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정도의 선수라면 지난 4년 동안 정말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끊임없이 훈련을 하면서 준비해왔을 것입니다.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릴 수 있는 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은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힘이자 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그들이 통곡하면서 당장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면, 그 높고 두꺼운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식량은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때문에 쓰러져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돌며 7일 동안 소망을 가지고 기다린 결과,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7편 5절~6절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あなたの道を主にゆだねよ。 主に信頼せよ。主が成し遂げてくださる。
主は あなたの義を光のように あなたの正しさを 真昼のように輝かされる。


뜻을 이루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련이 우리 앞에 닥친다고 해도, 우리의 참음이라고 하는 제물, 기다림이라고 하는 제물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크나큰 축복을 얻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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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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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회 승리의 확률
2022년 1월 9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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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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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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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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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7번째 시간으로서 “승리의 확률” 勝利の確率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먼저 22절에 나오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일부 주석에 의하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앞뒤가 안 맞게 됩니다.


오늘 22절과 23절을 보더라도, 그 문장 구도를 보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22절에 나오는 ‘피조물’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는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조되는 말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다? 이렇게 하면 문장 구도 자체에 모순이 생기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여기에 말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과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피조물’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23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에 대한 최고의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성령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전에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는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 3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3장 13절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長子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だからである。エジプトの地でわたしがすべての長子を打った日に、わたしは、人から家畜に至るま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すべての長子をわたしのものとして聖別した。彼ら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을 대단히 중요하고 거룩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삽니다. 그 옷을 글쎄요, 10년 20년 입었다고 해요. 이제 너덜너덜해져서 못 입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이제 그걸 뭐, 걸레로 쓰던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도 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새 옷을 사서 그것을 걸레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옷은 자기를 위해서 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성 들여 고른 선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쓰다 남은 열매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다가 그냥 덤으로 얼떨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결과,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이는 우리 이웃, 정말 훌륭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어쩌다가 재수 좋게 그 사람 옆에 있어서 덩달아 나까지도 덤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쓰다 남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를 위해서 첫 열매로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 2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피조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탄식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곤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나침반도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파도가 몰아치는 대로 오르락 내리락 좌우로 흔들립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고 탄식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반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은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좀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앞에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우리 입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 23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8장 23절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오늘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御座の中央におられる子羊が彼らを牧し、いのちの水の泉に導かれる。また、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


우리가 장차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씻어 주시겠지만,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 탄식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적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기뻐하면서 살아가야지만 되는 건가요? 어려움을 당할 때 탄식을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요?

가끔 보면 우리 인생을 달리기, 그것도 마라톤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도 바울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푯대를 향하여 달라가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푯대 즉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은 어때야만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면, 예수님을 믿는 삶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기만 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나 슬픔이 닥쳐오게 된다면 이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뭔가 신앙에 있어서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힘들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이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 본다면 달리는 선수들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뉴욕마라톤이나 보스턴마라톤 같은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에서는 그 참가인원수가 몇 만명에 달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우승하는 선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까요? 마라톤에서 달리는 거리는 일반적으로 42킬로가 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막 힘들어하는 반면 그 우승한 선수는 출발부터 골인을 할 때까지 웃음이 넘치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함께 달리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망의 골짜기,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그 탄식 속에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바로 그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풀려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당장 가다가 보니까 눈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4장 6절~7절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이스라엘 자손들 뒤에서는 애굽 왕인 바로가 직접 최정예부대와 모든 병거를 이끌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당시 모세와 함께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몇 십 명 정도라면 어디 숨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인 남성만 60만명이 넘었습니다. 남녀노소 다 합치면 200만명이나 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계시고, 힘이 없는 여성들이나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허허벌판 광야예요 어디 숨을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협조를 하고 단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참 그들은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해요.


예전에 어느 외국에서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는 분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 사는 한국 교민들이 외국 현지 마트에 가면 말이 안 통하니까 불만이 있더라도 말을 못하다가, 한국 마트에 오면 그 울분을 다 토해내는 것처럼 자기들한테 이런저런 것들을 트집잡아서 따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 힘이 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수 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오면서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이제 같은 이스라엘 자손인 모세한테는, 협조는커녕 마치 무슨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堰を切ったように)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이후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경우의 수(場合の数)를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1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항복하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로 돌아간다.

2번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살기가 등등한 애굽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몰살당한다.

3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 바다로 뛰어들어 빠져 죽는다.

이외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모두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방법,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해주심으로 인해서,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을 모두 멸망시키시고, 그리고 200만이 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그냥 동네 마라톤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42킬로를 달리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말이 42킬로이지 성인 평균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라고 한다면, 10시간이 넘게 쉬지 말고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걷는 속도의 두 배로 달린다 하더라도 5시간 이상이에요.

그런데 대회 주최측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완주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거리를 적어도 4시간 이내에 달려야 한다고 합니다.

자, 마라톤 대회가 내일이에요. 기권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참가해야 돼요. 함께 달리는 선수들은 각 나라 국가대표급입나다.

이제 내일 아침 9시 출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우승을 하실 수 있겠어요?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중학교 육상부 학생들과 겨뤄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겨뤄서 1등을 해요? 이건 1%도 아니에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결론은 하나, 절대로 우승을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8장 50절 전반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을 의지하면.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능히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럴 때 홍해 바다를 떠올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0%,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셨는가 하면,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들을 하나하나 지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군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홍해 바다에 빠져서 죽어버리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는 확률도 지워 주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 당할 확률들을 완전히 지워 주셨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승리한다는 확률, 구원 받는다는 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달려야 할 마라톤 경기의 결말을 우리는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요.

1번 시간 초과로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2번 제일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한다.
3번 달리고 있는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서 기권한다.
4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구급차로 실려간다.
5번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실 수 없어서 기권한다.
등등등……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굴려봐도 내가 우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내일 경기에서 질 확률은 100%. 이길 확률은 0%입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확률은 100%이고, 우리가 우승을 해서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를 확률은 0%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다고 성경에 기록합니까.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통과 슬픔을 모두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아 주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의 확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100%라고 하는 패배의 확률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로 만들어 주셨을까요.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인 100%하는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까지 줄여 주셨을까요.

50%요? 30%요?

만약에 우리가 패배하고 멸망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이 1%라도 남겨주셨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완전한 십자가요, 예수님의 보혈은 불완전한 보혈이라고 하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수치와 고통과 고난을 100% 대신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패배를 0%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마지막으로 오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본래 우리가 패배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이 0%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몇 프로가 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패배할 모든 가능성은 0%가 되었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100%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좀 평탄한 길을 달리고 있나요? 다른 선수들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우승하는 선수만 깨끗하게 포장된 평탄한 도로를 달리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승하는 선수나 꼴등을 하는 선수나 마찬가지로 똑 같은 도로를, 똑 같은 거리를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라 하더라도 우리 인생이 무슨 평탄하기만 하고 어려움이 전혀 없는 삶만 살아간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탄식도 할 때도 있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에,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기에, 그리고 우리가 패배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0%로 만들어주시고, 이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에는 승리의 확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확률을 100%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승리, 놀라운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승리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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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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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1회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2022년 1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9節~21節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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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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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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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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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6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私たちを遣わさ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인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이해를 좀 돕기 위해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8장 19절~21절

19.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1.그래서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들이 헛된 것에 복종하고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헛된 것에 복종하도록 하셨대요.

그래서 피조물들도 썩어질 것, 그러니까 헛된 것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를 누리기를 원한대요.

이 말씀에 대해서 주석서들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피조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다.”

또 다른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도의 문학적인 기법을 통해서 전체 피조물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놀란 세상에 나타나게 될 때를 고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의인화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의 범죄는 인류만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을 망라한 모든 피조물에게 영향을 끼쳤다. 땅이 저주를 받는다. 많은 야생동물들이 무참히 죽어간다. 질병이 날짐승과 뭍짐승 및 물고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충격파와 같이 모든 피조물에게로 파문이 미쳤다.

따라서 바울의 설명대로 피조물이 허무와 좌절과 혼돈에 굴복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첫 조상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한 것이다.


피조물은 에덴에서 존재하던 이상적인 상태를 회고한다. 그리고 죄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재앙을 둘러본다. 그들은 항상 이상적인 상태로 복귀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때가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 중에 나타나는 그 영광스런 시대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다.”

즉 이 주석들의 주장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나 산이나 바다나 동물이나 식물 같은, 말하자면 사람 외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에덴에서 사람이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서 사람 외의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에요.

지금도 자연재해나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사람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연세계에 있는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성경 본문과 이 해석을 비교해볼 때, 아무리 읽어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전혀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두 저주를 받았다?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이스라엘 3대 왕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왕이 누렸던 풍요로움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1절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ソロモン王が飲み物に用いる器はすべて金であった。「レバノンの森の宮殿」にあった器もすべて純金で、銀の物はなかった。銀は、ソロモンの時代には価値あるものとは見なされていなかった。

그 중 하나의 예로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다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는 솔로몬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열왕기상 10장 23절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ソロモン王は、富と知恵において、地上のどの王よりもまさっていた。

요즘은 대통령이나 총리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왕보다 더 많은 부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고 지혜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27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草花がどのようにして育つのか、よく考えなさい。働きもせず、紡ぎもしません。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栄華を極めたソロモンでさえ、この花の一つほどにも装ってはいませんでした。”

솔로몬이 누린 모든 영광이 한낱 백합화 한 송이가 입은 영광 보다도 못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와 같은 백합화도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백합화는 유일하게 저주를 받지 않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까.

그리고 그보다 앞에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24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烏のことをよく考えなさい。種蒔きもせず、刈り入れもせず、納屋も倉もありません。それでも、神は養っていてくださいます。あなたがたには、その鳥よりも、どんなに大きな価値があることでしょう。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마저도 기르신다고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면, 까마귀나 다른 새들도 역시 저주를 받았다는 뜻인데, 그 저주를 받은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또 이와 같은 성경 주석의 설명이 옳다고 한다면, 아니 왜 갑자기 뜬금없이 사도 바울이 사람 외의 피조물에 대한 언급을 하는지, 생물이나 무생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하는 말을 갑자기 언급하는지를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서 다른 목사님들께서 적어놓으신 글들을 봤는데 역시 하나같이 그 성경 주석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습니다.

성경은 누구를 위한 책입니까. 다시 말해서 누구더러 읽으라고 적힌 말씀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 읽으라고 적힌 글이요,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사람 외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글이 있기는 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6절 후반부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あなたは子やぎをその母の乳で煮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요리를 위해 염소 새끼 고기를 삶을 때에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와 같은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기 전에, 그 때까지 가나안 땅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새끼 염소를 삶을 때에 그 어미의 젖으로 삶으면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하는 그들의 미신적인 문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이방인들의 문화를 따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이를 금하셨던 첫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래 어미의 젖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새끼를 기르기 위한, 말하자면 생명을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의 젖을 오히려 새끼 염소를 죽이고 먹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잔인한 행위이겠습니까.

제가 염소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말씀을 들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어미 염소나 새끼 염소가 누구 젖으로 무엇을 삶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미 염소가 자기 젖으로 자기 새끼를 삶는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만에 하나 안다고 해서 사람들한테 항의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염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 말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그들의 문화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에 대해서 아끼는 마음을 갖도록 함으로써,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을 원하셨기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염소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그와 같이,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피조물’을 우리 인간 외의 모든 사물이라고 해석하게 된다면 앞뒤가 말이 안 맞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이는 바로 19절과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대조되는 의미, 즉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요.


먼저 본문부터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피조물 즉 믿지 않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그러니까 구원받은 영혼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허무한 데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굴복하도록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썩어지는 것에 대한 종 노릇, 즉 허무한데 굴복하는 데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과 자유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먼저 20절과 21절을 해석한 다음에 19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0절~21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허무한 데에 굴복을 합니다. 허무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전혀 유익한 것이 없는, 반대로 완전히 무익하고 오히려 악하기만 한 것에 굴복합니다.

오늘 교회 오시는 길에 못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가시는 길에 보십시오. 이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우상들한테 돈을 바치고 절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지만 갈급함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헛된 우상들한테 돈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면서 그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굴복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출애굽기 7장 3절~5절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7장 3절~5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세를 보내서 노예 생활에 괴로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갈게.” 라고 말하자, 바로가 말하기를 “오오. 그렇다면 어서 데리고 가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좀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출애굽기 8장 10절 후반부에서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8장 10절 후반부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それは、あなたが、私たちの神、主のような方はほかにいないことを知るためです。

만약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고 하셨으니까 당장 내보내라……라고 했을 때 즉시 이를 승낙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왕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은혜로운 바로 왕, 자비로운 바로 왕……이라면서 하나님이 아닌 바로 왕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진정으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을 완악하게 해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안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에 가니까 바로의 신하들이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10장 7절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家臣たちはファラオに言った。「この男は、いつまで私たちを陥れるのでしょうか。この者たちを去らせ、彼らの神、主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エジプトが滅びるのが、まだお分かりにならないのですか。」

이제 애굽의 신하들까지 난리입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이제 애굽은 망했습니다. 어서 저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우성을 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재앙, 애굽에서 사는 각 집안의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그 누구도 바로 왕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도 바로의 자비로 내보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내보냈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년전에 여기 군마로 와서 교회 상항을 보니까, 이건 뭐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 교회만 가지고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겠다 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해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제가 교회 만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해가면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누구 노력이겠습니까.


그렇죠. 제가 열심히 일해서, 정말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뭐 이렇게 주7일, 1년 365일을 열심히 세상 일도 하고 주님 일도 하고 그랬더니 생활이 유지가 되더라……라고 하면 이로 인해서 칭찬을 받는 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내 힘과 내 노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제가 그 동안 해왔던 세상적인 다른 모든 일들이 막히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냐 하면 오로지 하나님 일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못 버틸 줄 알았습니다. 이제 교회도 텅텅 비고 다른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하니 버틸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몇 개월만 버티다가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자……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께서 기도와 섬김의 손길로 이렇게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은,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로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멀리 하고 오로지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해도 좀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어디 그 뿐인가요. 때로는 얼마나 심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도 메일을 보내면 참 심한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요. 무슨 마구잡이로 메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나와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니까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이고 직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인터넷에 나와 있는 분들은 그래도 대체적으로 웬만큼 배운 분들이고 웬만큼 교양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리도 심한,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왜 복음을 전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으니까 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을 때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 못했는데, 모세보다 못해도 한참 못한 제가 한다고 해서 어찌 단번에 모든 일들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제가 복음을 전하니까 그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주님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주목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헛된 우상에 복종하고 있는 것은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보세요. 당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압니다. 그러나 우상들에게 아무리 절을 해봐야. 우상들을 아무리 의지하려고 해봐야, 그건 헛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경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해 주신 예수님을 믿는 그 길 뿐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23절~25절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봅니다.



먼저 로마서 1장 23절~25절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3.朽ちない神の栄光を、朽ちる人間や、鳥、獣、這うものに似たかたちと替えてしまいました。
24.そこで神は、彼らをその心の欲望のままに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25.彼らは神の真理を偽りと取り替え、造り主の代わりに、造られた物を拝み、これに仕えました。造り主こそ、とこしえにほめたたえられる方です。アーメン。


그리고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19절~21절입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백 년 동안 노예 살이를 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이제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십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일부에서는 이 땅끝이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곳이 예루살렘이고, 그리고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땅끝은 바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주장이에요.


그러면서 또 마태복음 24장 14절을 근거로 듭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御国のこの福音は全世界に宣べ伝えられて、すべての民族に証しされ、それから終わりが来ます。

그러니까 지구를 한 바퀴 삥 돌아서 땅끝인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선교에 힘을 써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당장 예루살렘으로 가야지요. 그게 진정한 예수님의 명령이라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불순종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자꾸만 그렇게 사람의 생각으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땅끝,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땅끝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우리 이웃, 허무한 우상에 굴복하고 있는 우리 이웃, 진정한 하나님, 진정한 구세주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영광과 자유에 이르게 해야 하는 우리 이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땅끝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중에서 19절을 봅니다.

로마서 8장 19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믿음이 없는 분들은 그 영적인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것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손길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 그 하나 뿐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2022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먼 옛날 애굽으로 모세를 보내셨던 것처럼,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 이웃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보내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진정한 땅끝인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모세보다도 더욱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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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회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2022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5章17節
“17.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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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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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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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이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한다면, 한 해, 한 달, 하루, 한 시간, 1분 1초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작년 2021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이제 새롭게 시작한 2022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기쁘고 놀라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이신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깨달아, 올 한 해 2022년을 멋지게 보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첫 예배 시간을 맞이해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新しく造られた者になりましょう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가요? 아니면 좀 오래된 피조물인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은 아니겠지요. 적어도 태어나서 몇 십년이 지난 상황인데 이제 와서 새롭다고 하면 좀 쑥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지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때묻지 않은 상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자동차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구입을 해서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이는 그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고품이 되고 맙니다. 그 순간부터 낡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새 차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이미 중고차입니다. 아무리 부품을 바꾸고, 바퀴를 바꾸고, 비닐을 다시 씌어 본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새 차처럼’ 보이게 한 것일 뿐이지 진정한 새 차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예,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사람의 힘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새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새롭다’는 의미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가령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이는 기존에 있던 것과 비슷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다시 말해서 과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그냥 교회 안 가면 찝찝하고, 헌금 안 내면 왠지 벌 받을 것 같아서 내고, 습관에 젖어서 아무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는 믿음이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むしろ、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そのように、あなたは生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は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す。


이는 이도 저도 아닌 믿음을 말합니다. 커피를 보세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면 맛이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여름에는 시원한 커피 한 잔이 얼마나 추위와 더위를 식혀줍니까.

우리의 믿음도 뜨거운 믿음과 차가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차가운 믿음이라고 해서 이상한 말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열정적으로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침착하게 나를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처럼 침착하게 주님과 나 사이에서 묵상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커피는 겨울에도 여름에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요, 침착하게 주님과 마주 대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매사에 믿음이 뜨뜨미지근한 상태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토하여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회복해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훈련이 잘 안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차가운 믿음 중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약한 부분이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이에요.

금식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말씀을 잘 알지 못해요.

아니, 본인은 많이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님한테 들었던 설교내용이나, 부흥회 가서 부흥 강사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목사님들도 많고 그렇습니다만, 제 경험으로 본다면, 어떤 분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아니면 심한 경우에는 성경에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기도 속에서 응답을 받았다면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들을 책으로 써서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재판에서 검사가 이랬다고 칩시다.

아,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생긴 것부터 나쁜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범인은 저 사람이 분명합니다. 저 사람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사실 뭐 검사가 이런 경우는 없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이렇게 검사가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판사는 이 검사의 말을 믿고 유죄판결을 내릴까요? 아니요. 그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법조문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무슨 법 몇 조 몇 항을 위반했습니다. 그리고 증거와 증인은 이러이러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해야지 거기에 적합한 판결을 판사가 내릴 텐데, 그러지 않고, 아, 저 생긴 것 보세요. 나쁘게 생겼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요……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주장을 해봐도 자신이 원하는 판결을 받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도 기가 막히게 하고, 40일 금식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5절 중반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聖書はあなたに知恵を与えて、キリスト・イエスに対する信仰による救いを受けさせることができます。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무리 유명한 신학 서적들도 결국은 성경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더욱더 성경을 가까이 해서, 이 성경,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새로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성경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행함이 없어요. 말만 할 줄 알고 손 하나 까닥 안 해요. 그러면 그 믿음과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5절~17절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고 헌금이나 십일조 내고, 식사 때 기도하고, 뭐 그 정도면 신앙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합니다.

신앙은 뜨거운 믿음을 가진 가슴이나, 냉철한 지식을 가진 성경 말씀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입각한 행함이 있어야 모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木を良いとし、その実も良いとするか、木を悪いとし、その実も悪いとするか、どちらかです。木の良し悪しはその実によって分かります。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의 ‘열매’를 ‘행함’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만약에 여기서의 ‘열매’를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는 우리는 항상 ‘행함’을 해야 합니다. 즉, 행함을 위한 믿음과 행함을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모든 믿음과 말씀은 항상 행함이 동반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말하자면 성과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했다 하고 자랑하기만 하면서, 이것이 마치 믿음과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혈관을 본다면 혈액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혈관 속을 혈액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흐르고 있는가 하면, 대략 시속 200킬로 이상의 속도로 돌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히 놀랍지요.

그런데 만약에 피가 그 속도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금방 목숨을 잃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는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우리 몸 안에서 순환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행함을 위한 믿음, 행함을 위한 말씀만 강조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혈액이 일방통행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쉽게 지쳐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에서 시작하여 말씀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행함이 있었다면, 그 결과는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할 수가 있고, 더 많은 말씀의 깨달음과 더 많은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2022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1회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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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회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2021년 12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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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18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18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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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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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5번째 시간으로서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呪われた苦難と祝福された苦難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두 구절은 우선 각각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 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전반부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はじめと最後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17절의 앞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자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격, 말하자면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예습하는 의미에서 로마서 8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로 삼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맏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또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아하,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은 조물주이십니까. 피조물이십니까.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하면 이는 작은 의미의 태초와 큰 의미의 태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의미의 태초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바로 이 시점이 작은 의미에서 태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의 기록과 같이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이 천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는 것은 언제일까요. 이는 이 세상,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도 창조되기 훨씬 이전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셨을 때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태초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일까요.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몇 년째 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우리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하나님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90편 2절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山々が生まれる前から 地と世界を あなたが生み出す前から とこしえからとこしえまで あなたは神です。

이는 몇 백 만년, 몇 천 만년이라고 하는 단위가 아닌,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또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은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피조물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의 행위, 말하자면 율법적인 행위로서는 우리의 죄를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왜 율법적인 행위로는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까. 율법이 불완전해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율법이 불완전하다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행위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부족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세상에서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값없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마트에 가서 1만원짜리라고 적힌 물건을 1만원을 내고 샀어요. 이것은 은혜인가요?

아, 물론 여러분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은혜라고 여기시겠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은혜는 아니지요. 마트에서 1만원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1만원을 내고 샀다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그냥 거래일 뿐이지요.

하지만 내가 빈털터리에요. 1만원은 고사하고 주머니에 10원짜리 동전 몇 개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빵 하나, 우유 한 개도 못삽니다. 바깥은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거기다가 배가 고프니까 너무나도 추워요.

그런데 마침 눈앞에 크고 멋진 백화점이 있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안에 들어가서, 백화점 직원 옷을 입은 어떤 점잖은 사람한테 가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10원짜리 몇 개밖에 안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로는 이런 멋진 백화점에서 빵 한 봉지, 과자 한 조각도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도 춥고 배가 고픕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상관 없으니 남는 빵이라도 하나 주시고, 여기 난방이 따뜻한 곳에서 몇 분만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점잖은 직원이 말합니다.

이보시오. 나는 이 백화점 사장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백화점 안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드세요. 그리고 저기 가면 샤워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샤워를 하신 다음에, 이 백화점에 있는 옷 중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속옷부터 겉옷까지 마음대로 입으세요.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도 편한 것으로 골라서 신으세요.

이제부터 언제라도 배가 고프거나 춥거나 입을 옷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오세요. 마음대로 드시고 마음대로 입어도 됩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돈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방을 얻으세요. 아, 그리고 우리 백화점에서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도 좋습니다.

이게 지금 이 배고픈 사람에게 감당할 일입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은 이와 같은 놀라운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은 여러가지 조건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멋진 백화점에 원서조차 내지 못할 상황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뭐예요? 예, 사장님이 마음대로 입으라고 하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장님께서 자기가 뽑아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할 사람이 있겠어요.

이처럼 차마 감당하지 못하는 대접,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처럼 죄인이 무엇을 했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일거수일투족이 모두가 죄에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어, 그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아니라면 받지 못할 축복과 사랑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아 주셔서,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17절 전반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7절 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후반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中盤
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

이제 큰일났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어떤 것입니까. 온몸이 채찍에 의해 찢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된 관을 써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십니다.

건강한 사람이 빈손으로 오르는 것도 아닌, 얼굴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눈코입도 구분이 잘 안 됩니다. 눈은 침침해서 앞도 잘 안 보이고, 무겁고 까칠까칠한 십자가 나무는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 언덕길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이윽고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높은 곳에 세워졌습니다. 숨을 한 번 쉬기 위해서는 손과 발을 의지해서 상체를 올려야 하는데, 그 때마다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증이 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상체를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나무 십자가의 가시가 예수님 등허리를 찌르고 할퀴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만으로 알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를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44절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すると、御使いが天から現れて、イエスを力づけた。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이 장면에 대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땀이 붉은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얼굴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워낙 한 번에 땀을 많이 흘리시다 보니, 마치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핏방울 같이 뚝뚝 하고 땀이 떨어졌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 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뭐예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을 우리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대속’이라는 말씀에 문제가 생깁니다. ‘대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신해서 죄값을 치른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져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아무런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모순이 있는 것인가요?

이럴 경우에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대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적힌 책으로서,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니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정답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한 죄인으로서, 전무후무한 끔찍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베드로전서 2장 24절 전반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예수님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이처럼 끔찍한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시면서, 철저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뭐 물론 재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좀 안 좋은 기억도 있지 않겠어요?

여러분께서는 학교 다니실 때 뭐가 가장 싫으셨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시험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좋아했던 분들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는 입학시험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입학시험은 어때요?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은 쉽게 말하자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입니다. 모집정원보다 많은 수험생이 모였어요. 그러면 그 모집정원 이상 되는 수험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그게 바로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입니다.

반면에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망쳤다고 학교에서 당장 내보내요? 아니요. 아무리 엄격한 학교라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물론 점수는 잘 못 받겠죠. 그래도 공부가 시원치 않으면 선생님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러내서,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재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줄게, ……뭐 이러면서 어떻게 해서든 올바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선생님들이 애를 쓰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세요. 우리의 모습,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시고 예수님이 보신다면, 만족해 하실까요? 물론 그런 훌륭한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은 이렇게 해라, 저것은 저렇게 해라……라는 규정을 많이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주셔서 그들이 먹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그냥 주시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여러가지 방법을 붙이세요.

아침 일찍 들에 나가서 거둬라, 거둘 때에는 그날 먹을 것만 거두고 다음날까지 보관하지 말아라, 여섯째 날에는 평소 먹을 양보다 두 배를 거두고 다음날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을 테니, 들에 나가지 말아라……뭐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셨을까요. 만나 좀 주시면서 생색 내시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これは、彼らがわたしのおしえに従って歩むかどうかを試みる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던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왜 학교에서 치릅니까. 그것은 수업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험은, 학생을 내쫓으려고 보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시험을 쳐야 내신성적을 올릴 수가 있잖아요. 점수를 줄 수가 있잖아요. 시험을 안 보면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이유는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을 넘치도록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싫었던 것 두 번째는요, 이는 초등학교 때에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바로 체벌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은 뭐 그러면 큰일난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은 그래도 체벌이 대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빨리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데, 한국에는 꽤 최근까지 공공연하게 있었지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한국은 201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초중고를 일본에서 다녔습니다만, 초등학교는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를 나왔는데, 당시에는 한국학교라서 이것도 한국식이라 체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폭력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한 선생님은 대걸레 손잡이를 이만큼 잘라서 항상 그 선생님을 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무슨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면, 남학생은 그걸로 엉덩이를 때리고, 여학생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는데, 그 날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뭐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제 기억에는 적어도 4~5명 정도의 남학생이 앞에 나와서 차례대로 교탁 앞에 딱 엉덩이를 내밀고 한 세 대씩 맞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겨울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도 동경에 있는 초등학교는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런데 추운 겨울 날에 반바지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으면, 무척 아프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때리시는 선생님도 고수라서 아프기는 무척 아픈데, 멍도 안 들고 붓지도 않아요. 아예 흔적도 안 남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 차례가 되어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데, 세 대를 맞는게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엉덩이를 비비면서 아이구 아파요……하고 하면 선생님이 빨리 대라고 호통을 치시죠. 그러면 또 쩔쩔 매면서 한 대를 맞아요. 그러면 또 저는 아이구 아파요 선생님……하면, 이 녀석이 가만히 좀 있으라고 또 큰 소리를 내십니다.

그러면 뭐 저는 아파 죽겠다는데 보는 애들은 어땠겠습니까. 자기들은 그런 모습들이 막 재미있다면서 깔깔 거리고 난리죠.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세 대를 맞았어요. 아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바로 뒤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그 아픔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요. 제 다음으로 엉덩이를 맞으러 나온 그 녀석은, 당당하게 교탁 앞에 떡 엉덩이를 내밀고 서더니만, 선생님이 세 대를 때리시는데 끝까지 꿈쩍도 안하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고 애들이 오히려 박수를 치고 멋있다고 난리에요. 아, 그걸 보는 제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요. 아픈 것은 둘째치고 아, 정말 저 자신이 얼마나 창피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체벌에 찬성이다 반대다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환난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미워해서요?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서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저주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긴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를,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을 단 하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채찍을 맞으셨고, 철저한 저주 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라는 이름의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처럼 저주받는 고난, 죽음으로 향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어떻습니까. 이는 저주가 아닌 축복 받는 고난,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고난을 견디지 못할까 봐, 이것만 잘 넘기면 큰 축복을 주실 텐데 못 넘기면 어떻게 할까 하고 얼마나 노심초사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은 미쁘사……이 미쁘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이는 참되다, 진실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잘 알고 계세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아예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할 길까지 다 예비해 주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에요? 이는 바로 그 시험을 우리가 통과함으로 인해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わが子よ、主の懲らしめを拒むな。その叱責を嫌うな。
父がいとしい子を叱るように、主は愛する者を叱る。


가끔 뉴스를 보면 자기 아이를 심하게 구타한 부모가 경찰에 잡혀가고는 하는 말이, 가정교육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세상 부모들이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에 모두가 잘했다고 만은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참되고 진실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계하실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 또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꾸며낸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 중 18절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저주받는 고난, 죽음에 이르는 고난은, 예수님이 이미 2천년 전에, 누구를 대신해서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라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위한 고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을 위한 고난, 영광에 이르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정말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말로 못할 정도로 힘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기회가 아니겠습까.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라 하더라도 이후에 받을 영광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고난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면, 우리 한 번 믿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 똑 같은 징계를 받더라도 누구는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누구는 박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로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2021년이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도 또다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확진자 수가 세계적으로 늘어가면서 내년에는 또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아니라, 이보다도 더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도 예비해주시는 주님,


그리고 이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믿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과 영광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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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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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회 동행의 시작
2021년 12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16절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5節~16節
“15.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陥れる、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す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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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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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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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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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4번째 시간으로서 “동행의 시작” ともに歩むこと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탄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씀을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지난 추수감사주일 때와 같이 오늘 말씀드릴 로마서 차례도 성탄절에 걸맞는 말씀으로 여겨졌기에 계속해서 로마서로 말씀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16절 신약성경 249페이지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5節~16節
“15.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陥れる、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す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15절에 보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이는 지난 주에 살펴본 성경구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인 로마서 8장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전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망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 율법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에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이는 100%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있어서 확실한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안타깝게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을 보면 참 지키기 어려운 것이 한 둘이 아니에요. 무슨 예물을 바치는 방법도 많고 종류도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매주 주일마다 양이나 염소를 끌고 와서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고 불로 태워가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얼마나 지키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지키기 어려운 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 19절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9절 후반부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また、あなたは二種類の糸で織った布地の衣服を身に着けてはならない。

이거 지키기 쉽습니까. 이 말씀도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신데, 그러면 이 말씀도 지키려면 무슨 면 몇 프로, 폴리에스테르 몇 프로 섞인 옷을 입으면 안돼요. 물론 여기에도 담긴 깊은 뜻이 있긴 합니다만, 이 말씀 하나 지키려고 한다 해도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100% 지키면 100%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100% 지키지 못할 확률을 역시 100%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아니, 그 많은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무슨 수로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렵고 복잡한 율법을 떨리는 마음, 지킬 수는 없는데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서워하는 영을 받는 사람의 모습, 율법에 짓눌린 자들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까.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해 봤자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죄 아래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어요. 이대로라면 영원한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려 죽어 주시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5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時が満ちて、神はご自分の御子を、女から生まれた者、律法の下にある者として遣わされました。
それは、律法の下にある者を贖い出すためであり、私たちが子としての身分を受けるためでした。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오늘 본문 15절 후반부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간혹 보면 여기서 ‘아빠’라는 말을 가지고, 무슨 어린 아이와 같이 아버지를 따르는 듯한 표현이라는 말씀을 듣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는 앞부분과 의미가 맞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아빠’ 또는 ‘아바’라는 식으로 마치 우리처럼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른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핵심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요즘 언론들을 보면 부모 자식 간에 참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친부모가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친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접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상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넘을래야 넘을 수가 없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은 부모들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가장 사랑하시는 예수님마저도 아끼지 않고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를 함부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왕이나 통치자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그 자녀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악관이라고 한다면 세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대통령이 사는 곳이고 업무를 보는 곳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에 잠시라도 들어가서 대통령과 면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정부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고위공직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인 사진이 있어요. 어떤 어린 아이가 대통령이 앉는 의자에 턱 하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진들을 보면 대통령 집무실에서 좋다고 뛰어놀고 있어요. 그게 누구겠습니까. 그렇지요. 대통령 아이들입니다. 당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인데, 대통령 취임이 44세였으니까 아이들이 어렸지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놀고 있는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우리가 죄인이라면 함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시고 나와 함깨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뛰놀며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 16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8장 16절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중요하고 실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으면 다 거짓말 같아요.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홍해가 갈라졌대. 웃기는 소리. 어떻게 바다가 갈라지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여리고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했는데 그 높고 두꺼운 성벽이 무너졌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거 어짜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대.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대.

뭐 이런 말을 읽어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안 와요. 다 꾸며낸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구,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아요. 성경을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니 내 마음 속에 와 닿아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까지 모두가 다 나를 위해 적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오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려 주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이 믿어져요.

남들은 일요일이라서 놀러간다는데 교회에 모여요. 그런다고 누가 돈 주나요? 오히려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까지 내면서 섬겨요.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대요.

이와 같은 일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믿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말을 한다고 해서 설득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께서 믿으시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말솜씨가 뛰어 나서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제 이론이나 제 주장을 말씀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다는 말씀만 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어요. 그 말씀이 믿어져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시작이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탄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모든 은혜와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씻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넘치기 위한 시작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3절~24절
“23.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の方を振り向いて、彼らだけ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る目は幸いです。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王たちは、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구약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다니실 때에도 십자가가 무엇이고 보혈이 무엇인지 알지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압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압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 나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주님이 내게 주신 편지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면 바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 이사야서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 임마누엘이라는 뜻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성전 안 지성소에 계시며, 거기는 대제사장이 그것도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시고 십자가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언제 어디서나 성령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2월 19일 현재를 본다면 한국을 비롯해서 이른바 위드 코로나……인터넷에서 보니까 이 말이 일본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코이케 동경 도지사가 먼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신종 코로나 때문에 각종 규제를 했으나, 규제만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규제를 풀고, 방역대책을 하면서 극복해보자 하는 정책을 했는데, 그랬다가 지금 다시 확진자가 늘고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 큰일이에요. 연일 확진자나 사망자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줄고 있던 일본도 이 군마현을 비롯해서 또다시 증가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다들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어떤 분 말에 의하면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이렇게 규제를 하면 코로나는 안 걸릴지 모르지만 먹고 살지 못해서 굶어 죽겠다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아유, 충분이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래서 위드 코로나라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여전히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드 코로나라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위드…뭐겠습니까. 위드 마귀 사탄, 위드 세상, 위드 우상……이 되면 곤란합니다.

정말 제가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솔직히 우리가 성경에 적힌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술 담배요? 괜찮아요. 남들한테 민폐 안 끼치고, 그리고 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면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다만 단 한 가지. 우상을 섬기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사랑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음란, 쉽게 말해서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해서 맺어졌는데, 그 마음이 다른 남자, 다른 여자한테 향해요.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서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음란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む神だからである。

음란이 곧 사랑의 배신인 것처럼,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서운 죄를 멀리 하고, 오로지 우리 주님만을 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항상 위드 하나님, 위드 예수님, 위드 성령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왜 기쁜 날입니까. 바로 위드 하나님, 위드 예수님, 위드 성령님,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그 시작이 바로 크리스마스 성탄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영원한 아바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 우리의 보혜사 되신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을 통하여 크나큰 기쁨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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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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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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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회 구원의 이유
2021년 12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2節~14節
“12.ですから、兄弟たちよ、私たちには義務があります。肉に従っ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肉に対する義務ではありません。
13.もし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ぬ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も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なら、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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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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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3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이유” 救い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좀 우리에게 낯선 사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오늘 우선 살펴볼 인물은 바로 ‘롯’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롯’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읽어보신 분이시라면 이 ‘롯’이 누구인지 정도는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하나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롯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의하면 롯은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베드로후서 2장 6절~7절에 보면 여기서는 롯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7절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また、ソドムとゴモラの町を破滅に定めて灰にし、不敬虔な者たちに起こることの実例とされました。
そして、不道徳な者たちの放縦なふるまいによって悩まされていた正しい人、ロトを救い出されました。

저는 여기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의로운 롯’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롯? 의로운 롯? 롯이 의롭다고?

저는 롯에 대해서 그를 의롭다고 기록한 성경에 대해서 수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 생각과 성경의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 성경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 것입니다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영감, 하나님의 뜻으로서 기록된 책으로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모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오늘처럼 “내가 생각하기에는 롯이라고 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어요.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하면,

“아, 나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잘못되었다”라고 해석을 하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나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의로운 롯’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이렇게 접근을 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롯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왜 의로운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지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우선 이 롯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롯은 누구인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시간관계상 성경구절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창세기 11장 26절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아직 고향에 살고있을 때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그리고 하란은 롯을 낳았습니다. 이 순서대로라면 아브라함은 첫째요 하란은 3남이 됩니다. 그리고 3남의 아들이 롯인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도 먼저 고향 땅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란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12장과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그 첫번째는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그리고 두 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인 하란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하란’이라고 하는 이름이 하나는 아브라함의 동생이자 롯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고,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머물렀던 지명이기도 하고 해서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는 사람 이름이고, 또 하나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출발했을 때에는 이미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첫째로는 당시 롯에게는 아버지 하란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는 롯,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 즉 대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아브라함을 따랐고, 아브라함도 롯을 데리고 나왔을 수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의 말씀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5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アブラムは、妻のサライと甥のロト、また自分たちが蓄えたすべての財産と、ハランで得た人たちを伴って、カナンの地に向かって出発した。こうして彼らはカナンの地に入った。


이 말씀의 흐름을 보시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롯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고는 합니다만, 우선 부부는 예나 지금이나 한 몸을 이룹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를 본다 하더라도 제가 일본의 종교비자를 취득하고 있다면, 제 아내는 종교비자가 없더라도 가족이기 때문에 체류자격이 인정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소유와 얻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과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가 있었던 당시에는 노예도 마치 재산처럼 소유를 할 수 있었고, 그리고 매매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집에 있었던 종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렇지 않아요. 롯은 아브라함의 친족이긴 하지만 가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도 아닌 자유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롯을 데리고 가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을 이끌고 길을 나섭니다.

이게 별 문제가 되나 하고 생각하실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것으로 인해서 계속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3장 6절~11절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その地は、彼らが一緒に住むのに十分ではなかった。所有するものが多すぎて、一緒に住めなかったのである。
そのため、争いが、アブラムの家畜の牧者たちと、ロトの家畜の牧者たちの間に起こった。そのころ、その地にはカナン人とペリジ人が住んでいた。
アブラムはロトに言った。「私とあなたの間、また私の牧者たちとあなたの牧者たちの間に、争いがないようにしよう。私たちは親類同士なのだから。
全地はあなたの前にあるではないか。私から別れて行ってくれないか。あなたが左なら、私は右に行こう。あなたが右なら、私は左に行こう。」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ロトは、自分のために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んだ。そしてロトは東へ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인하여 소유가 늘어가게 됩니다만, 본래 롯은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근심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브라함도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죠? 안되겠다. 우리가 헤어져야겠다 하고 롯에게 말하면서, 이후 선택권을 자신의 조카 롯에게 줍니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겠다고 하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말해요.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13장 10절에 의하면 롯의 선택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그가 좌우 중 어디를 선택할까 하고 눈을 들어보았더니, 저기 물이 넉넉한 지방이 보였습니다. 당시는 농사를 짓건 목축을 하건 간에 이 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했지요. 그런데 요단 쪽을 바라보니까, 아 정말 땅이 비옥해 보였다는 것이에요. 거기가 얼마나 비옥해 보였냐 하면 당시 최대 선진국이었던 애굽과도 같고,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롯은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요. 당연히 그쪽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라고요?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곳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버린 땅, 저주의 땅입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땅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는 장차 멸망 당할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 자신의 눈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어디를 가든, 거기서 반드시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즉 어디를 가든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롯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어요. 롯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거나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에 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기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자, 좌로 갈 것인지 우로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는 말을 했을 때 우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겠지요.

그리고 창세기 14장 12절에 의하면 롯은 소돔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의지 했었더라면 만에 하나라도 저주의 땅 멸망의 땅인 소돔으로 인도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롯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결국 그 죄악의 도시 소돔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졌을 때가 정확히 몇 년이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하란 땅을 나설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하고,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13장에서 서로 결별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얼마 안 되었을 시기였을 것입니다.

편의상 하란에서 나와서 곧바로 헤어졌다고 친다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 때 둘은 결별을 하고 롯은 소돔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면 롯이 얼마 동안이나 살았냐 하면, 창세기 18장 10절에 의하면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시면서 뿐만 아니라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는 계획도 함께 말씀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듬해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게 되는데, 창세기 21장 5절에 의하면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소돔이 멸망한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부터 99세 때까지 롯이 소돔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자그마치 25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롯이 소돔에 머물렀던 기간을 최대한도로 본다면 25년이라는 뜻이 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두 천사가 소돔으로 옵니다. 롯은 그들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랬더니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9장 4절~5절
“4.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彼らが床につかないうちに、その町の男たち、ソドムの男たちが若い者から年寄りまで、その家を取り囲んだ。すべての人が町の隅々からやって来た。
そして、ロトに向かって叫んだ。「今夜おまえのところにやって来た、あの男たちはどこにいるのか。ここに連れ出せ。彼らをよく知りたいのだ。」


여기서 ‘그들을 상관하리라’ 라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성폭행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떤 낯선 사람들이 롯의 집에 왔는데, 소돔사람들이 몰려와서 롯한테 말하기를, 지금 너희 집에 온 사람들을 우리에게 내놔라, 우리가 그들을 성폭행하겠다고 하면서, 노소를 막론하고 멀리서부터도 몰려왔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소돔이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죄악으로 넘쳐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롯의 행동은 뭐냐 하면, 롯이 그 몰려온 폭도들에 말합니다.

창세기 19장 7절~8절
“7.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そして言った。「兄弟たちよ、どうか悪いことはしないでください。
お願いですから。私には、まだ男を知らない娘が二人います。娘たちを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連れて来ますから、好きなようにしてください。けれども、あの人たちには何もしないでください。あの人たちは、私の屋根の下に身を寄せたのですから。」


이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악한 무리들이 손님들을 성폭행하겠다고 내놓으라고 하는데, 롯은 차라리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자기 딸들을 내줄 테니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자기 딸들을 내주겠다는 것은, 이 또한 우리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은 행동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죄악의 도시 소돔 식 문제 해결 방식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천사는 소돔의 멸망 계획을 롯에게 알립니다. 그러면서 네 가족만이 아니라 네 사위까지도 소돔 바깥으로 도망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족들도 문제예요.

창세기 19장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そこで、ロトは出て行き、娘たちを妻にしていた婿たちに告げた。「立って、この場所から出て行きなさい。主がこの町を滅ぼそうとしておられるから。」しかし、彼の婿たちには、それは悪い冗談のように思われた。

롯의 두 딸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같이 도망가자고 했더니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장인이 될 사람이 말을 하는데도 이를 농담이라고 들었다는 것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누구는 장인어른의 말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두 사위 될 사람은 인간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사위 될 사람들한테도 우습게 보일 정도로 롯이 신임을 얻지 못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어찌됐든 정상적인 가족관계는 아닙니다.

16절에 의하면 천사들은 빨리 도망가라고 그들이 지체하고 있으니까, 천사들이 직접 롯과 그의 아내, 그의 딸들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26절에 의하면 롯의 아내는 이 말을 지키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

어디 그 뿐인가요. 31절 이후에 보면, 롯의 두 딸이 말하기를, 이제 자기들과 결혼할 두 사위들은 소돔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모두 멸망하고 말았으니 우리가 결혼을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아버지 롯을 술 취하게 해가지고는 아버지의 아이를 갖자고 합니다.

이 두 딸은 롯이 소돔에서 사는 동안에 얻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이 또한 소돔식 문제해결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이 또한 우리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결국 두 딸은 아버지 롯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큰 딸이 낳은 아이의 후손은 모압 족속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이의 후손은 암몬 족속인데, 이 조카 롯의 가정에서 근친상간의 결과로 낳은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 롯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창세기 19장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가 몇 살까지 살았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성경에서는 그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롯의 인생,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초에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을 가지고 롯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악의 도시 소돔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본래 그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아브라함도 그를 데려가지는 않았겠지요.

앞서 롯을 의롭다고 기록한 베드로후서 2장에 보더라도 2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8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この正しい人は彼らの間に住んでいましたが、不法な行いを見聞きして、日々その正しい心を痛めていたのです。

이를 쉽게 표현해 본다면, 이 롯이 죄악의 도시 소돔에 살면서 거기 생활에 물들고 많이 망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에 그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그의 삶을 통해서 본다면 훌륭한 점이나 본받을만한 구석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적어도 거기서 낳은 두 딸들이 시집갈 정도로 자랄 때까지 죄악의 도시 소돔에 머물렀습니다. 만약에 롯이 소돔에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유인이었습니다. 그가 원했었더라면 언제든지 소돔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어떤 자신의 사업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소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의 두 딸들을 지킨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두 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사위들로부터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아내는 천사의 말도 가볍게 여겨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딸은 지극히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인생 어디에서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왜 롯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했을까요.

자, 지난 주에도 드렸던 질문을 또다시 드립니다. 이번에는 정답을 말씀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예,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 사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못 받으면 그 사람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볼 때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의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롯은 인간적으로 볼 때 솔직히 본받을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멸망하는 소돔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린다 하더라도 이상할 곳이 없어요.

그렇다면 결국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렸을까. 왜 그는 멸망하는 소돔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짚이는 딱 한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神が低地の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アブラハムを覚えておられた。それで、ロトが住んでいた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ロトをその滅びの中から逃れるようにされた。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롯을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도 그렇거니와 그의 가족들도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가정은 완전히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행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롯이 사로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은 목숨을 걸고 그를 구출해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사랑했는데, 롯이 만약에 소돔에서 멸망해버린다면 얼마나 아브라함이 가슴 아파 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서 롯이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뻐서 하나님께서는 롯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2節~14節
“12.ですから、兄弟たちよ、私たちには義務があります。肉に従っ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肉に対する義務ではありません。
13.もし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ぬ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も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なら、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성경은 우리가 ‘빚진 자’라고 기록을 합니다. 다른 번역본에 보면 이를 ‘의무가 있다’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빚진 자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채무자, 즉 채무를 이행할 의무, 쉽게 말하자면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빚진 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필요 없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없이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런 모진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어 주신 것은,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격 미달인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하는 소돔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자기가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롯이 알았다면, 그의 미래는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돔에서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 이후 그의 인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뭐가 이쁘다고 구원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だれでも人々の前でわたしを認める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
しかし、人々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者は、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을 통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열어주신 길이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길은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시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시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생각하사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그리고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8장 14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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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2021년 1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0節~11節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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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2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私たちが持つべき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부터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시고, 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주의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여기서 9절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神の御霊)’과 후반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キリストの御霊)’이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이요, 성령님의 영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기인 합니다만,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든 예수님의 영이든 성령님의 영이든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고, 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말이 안 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 만약에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으셨겠지요.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키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분명히 스스로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35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神はイエスをよみがえらせ、彼らの子孫である私たちにその約束を成就してくださいました。詩篇の第二篇に、『あなたはわたしの子。わたしが今日、あなたを生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そして、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もはや朽ちて滅びることがない方とされたことについては、こう言っておられました。『わたしはダビデへの確かで真実な約束を、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ですから、ほかの箇所でもこう言っておられます。『あなたは、あなたにある敬虔な者に滅びをお見せになりません。』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역시 오늘 본문 11절에 등장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라고 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어 없어지게 되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게 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인해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합니다.

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여기서 보시면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의 구도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로마서 8장 9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고 하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이 같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 즉 성령님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의 중요한 믿음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위일체를 끝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 많은 사람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왜 9절과 비슷한 말씀을 10절과 11절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디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러던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갔던 말이 뭐냐 하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그러신대요.

“자, 여기는 중요하니까 선생님 한 번 밖에 말 안한다”
라고 한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중고등학교를 일본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이런 말 자주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아니, 다른 곳은 한 번만 설명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요. 뭐,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요한 곳이라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라도 이해를 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보면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반복적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이 성경책이 왜 이렇게 두껍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 번 말해가지고는 안 듣거든요. 이 사실을 누가 잘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맨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다가 이제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상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시죠.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큰 일 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그 때까지 멀쩡히 조용하던 이웃나라에서 갑자기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해요. 그러면 이제 그 때가 돼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를 하지요. 하지만 또 어떻게 돼요? 예,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또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중요한 것은 한 번만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이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이 금방 머리에 딱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우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인데, 우선 이를 단순화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과 성령님의 영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영이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통일시키고, 그리고 11절의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을 ‘성령(聖霊)’으로 변환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 神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聖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렇게 보시면 아까보다는 단순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10절에서는 몸은 죽지만 영은 살아있다고 하는데, 11절에서는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몸은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안 죽는다는 거야. 라고 하는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면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0절은 현재를 나타내는 말씀이고 11절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10절과 11절을 나누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자, 오랜만에 이 문제를 다시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많은 유혹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혹에는 사실 정신적인 유혹도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바로 육신에 의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는 유혹에 빠지는,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멸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르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11절은 장래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죽은 우리의 몸까지도 살리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있을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을까요. 마치 무슨 유령처럼 부활하셨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령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유령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유령처럼 부활하신 것인가요?

누가복음 24장 39절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처럼 연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다음에도 뼈와 살이 있어서 우리와 직접 말을 하고 만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시게 되면, 지금처럼 뼈와 살이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일으켜 주셔서 부활을 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말씀을 들으시면 기쁘십니까. 저는 가끔 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해드릴 때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듣는 분들이 느끼는 공허함이 전해져 옵니다.

아, 부활! 기쁩니다! 할렐루야! 라고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하시니까 그냥 그래, 아멘……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때요?

아휴, 부활은 무슨 부활. 부활 안 해도 좋으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돈이나 좀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다. 큰 집에서 좋은 차 몰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당장 지금 살아가기도 힘든데 무슨 부활이야.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지만 이 부활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우리는 부활할 거니까 지금은 죽어라 고생을 해도 참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돼 봐야 다만 잠시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마저도 이를 물리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마저도 물리치고 부활로 일으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무슨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なら、と言うのです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누가복음 8장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娘は救われます。」

성경은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중요할까요.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まことに主は 渇いたたましいを満ち足らせ 飢えたたましい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た。


죽음마저도 물리치시는 주님,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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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0節~11節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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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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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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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2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私たちが持つべき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부터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시고, 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주의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여기서 9절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神の御霊)’과 후반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キリストの御霊)’이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이요, 성령님의 영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기인 합니다만,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든 예수님의 영이든 성령님의 영이든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고, 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말이 안 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 만약에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으셨겠지요.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키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분명히 스스로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35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神はイエスをよみがえらせ、彼らの子孫である私たちにその約束を成就してくださいました。詩篇の第二篇に、『あなたはわたしの子。わたしが今日、あなたを生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そして、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もはや朽ちて滅びることがない方とされたことについては、こう言っておられました。『わたしはダビデへの確かで真実な約束を、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ですから、ほかの箇所でもこう言っておられます。『あなたは、あなたにある敬虔な者に滅びをお見せになりません。』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역시 오늘 본문 11절에 등장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라고 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어 없어지게 되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게 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인해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합니다.

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여기서 보시면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의 구도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로마서 8장 9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고 하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이 같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 즉 성령님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의 중요한 믿음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위일체를 끝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 많은 사람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왜 9절과 비슷한 말씀을 10절과 11절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디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러던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갔던 말이 뭐냐 하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그러신대요.

“자, 여기는 중요하니까 선생님 한 번 밖에 말 안한다”
라고 한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중고등학교를 일본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이런 말 자주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아니, 다른 곳은 한 번만 설명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요. 뭐,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요한 곳이라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라도 이해를 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보면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반복적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이 성경책이 왜 이렇게 두껍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 번 말해가지고는 안 듣거든요. 이 사실을 누가 잘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맨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다가 이제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상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시죠.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큰 일 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그 때까지 멀쩡히 조용하던 이웃나라에서 갑자기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해요. 그러면 이제 그 때가 돼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를 하지요. 하지만 또 어떻게 돼요? 예,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또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중요한 것은 한 번만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이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이 금방 머리에 딱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우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인데, 우선 이를 단순화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과 성령님의 영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영이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통일시키고, 그리고 11절의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을 ‘성령(聖霊)’으로 변환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 神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聖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렇게 보시면 아까보다는 단순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10절에서는 몸은 죽지만 영은 살아있다고 하는데, 11절에서는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몸은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안 죽는다는 거야. 라고 하는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면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0절은 현재를 나타내는 말씀이고 11절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10절과 11절을 나누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자, 오랜만에 이 문제를 다시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많은 유혹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혹에는 사실 정신적인 유혹도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바로 육신에 의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는 유혹에 빠지는,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멸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르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11절은 장래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죽은 우리의 몸까지도 살리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있을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을까요. 마치 무슨 유령처럼 부활하셨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령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유령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유령처럼 부활하신 것인가요?

누가복음 24장 39절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처럼 연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다음에도 뼈와 살이 있어서 우리와 직접 말을 하고 만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시게 되면, 지금처럼 뼈와 살이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일으켜 주셔서 부활을 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말씀을 들으시면 기쁘십니까. 저는 가끔 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해드릴 때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듣는 분들이 느끼는 공허함이 전해져 옵니다.

아, 부활! 기쁩니다! 할렐루야! 라고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하시니까 그냥 그래, 아멘……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때요?

아휴, 부활은 무슨 부활. 부활 안 해도 좋으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돈이나 좀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다. 큰 집에서 좋은 차 몰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당장 지금 살아가기도 힘든데 무슨 부활이야.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지만 이 부활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우리는 부활할 거니까 지금은 죽어라 고생을 해도 참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돼 봐야 다만 잠시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마저도 이를 물리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마저도 물리치고 부활로 일으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무슨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なら、と言うのです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누가복음 8장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娘は救われます。」

성경은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중요할까요.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まことに主は 渇いたたましいを満ち足らせ 飢えたたましい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た。


죽음마저도 물리치시는 주님,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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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회 그리스도의 영을 품으라
2021년 11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9節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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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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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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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1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을 품으라” キリストの御霊を抱きなさ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9節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서는 육신에 있는 사람과 영에 있는 사람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는데, 후반부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여기서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8장 9절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9절 뒷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같다는 말이 되지요. 이 점은 인정 하시나요?

좋습니다. 이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즉,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영입니다. 예전에 잠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모두 하나의 같은 영이다……라고 하는 주장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신데,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2천년 전에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사역을 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성령님이라는 모습으로 내려오셨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른바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성경에 있어서 크나큰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サムエルは言った。「主は、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を、主の御声に聞き従うことほどに喜ばれるだろうか。見よ。聞き従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耳を傾けることは、雄羊の脂肪にまさる。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보다도 훨씬 낫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 중앙에 먹으면 안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참 짓궂으시다. 애당초 먹으면 안되는 걸 왜 만들어 놓으셨냐 하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그게 사실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짓궂은 하나님이신가요?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이 짓궂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지켜서 선악과를 먹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100% 순종한 것이라고 쳐 줄게. 그리고 그 순종의 대가로 폭포수처럼 넘치는 축복을 부어 줄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게 하고 말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마귀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마귀 사탄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셨던 아름다운 축복, 넘치는 축복은 다 빼앗겨버렸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후에 영원토록 그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축복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 죄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각종 열매는 무엇이든 먹어도 괜찮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에 처하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 이것이 그토록 지키기 어려운 명령이었을까요?

당시 에덴에 어느 정도의 나무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성경은 에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이 기록에 의하면 에덴에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수십 그루 수백 그루 정도가 아닌, 어마어마한 수의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들이 영원히 누릴 수 있을 만큼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단 하나였습니다. 비율로 보면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요.

이 역시 10분의 1이나 100분의 1도 아닙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 분의 일, 수천 분의 일 정도는 되었겠지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수백만 분의 일, 수천만 분의 일만 지키면 내가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언제까지요? 예, 그렇습니다. 영원토록 주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사람은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람은 불순종, 배신으로 갚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あるこの思いを、あなたがたの間でも抱きなさい。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그렇습니다. 불순종했던 아담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순종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시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 점에 대해서 볼까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하나라는 교리 아닙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해결해 주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불순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저질렀던 이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일한 존재, 구약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모습으로, 2천년 전에는 똑 같은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모습으로, 그리고 역시 똑 같은 하나님이 지금은 성령님이라는 모습으로 역사하신다면, 여기에는 ‘순종’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죽도록 순종해요? 이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지극히 비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주장이 성경이라고 한다면, 구약의 모든 말씀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그리고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도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이 양태론이라고 하는 주장 자체가 말장난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세 신격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에요. 분명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라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인 것이지요.


그러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동등한 관계에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A와 B가 동등한 친구사이인데, 아니면 직장 입사동기인데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서 순종을 한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그 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무슨 관계입니까. 그렇죠. 상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와 같은 세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일본 분으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자신은 어디어디에 속한 사람이래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神は三位一体ではなく、イエスは神の子で神に次ぐ別個の存在であり、「エホバ」こそ至高の唯一の神である、と聖書そのものから学んでいます。

이게 그러니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다음 가는 존재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성경에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했다면서. 그리고 순종했다는 대표적인 증거가 십자가라면서.
삼위일체라고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등하다는 것인데,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분명 상하관계 아니야?
상하관계인데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라고 하는 교리는 잘못된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을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그러고보니 그러네……그러시겠습니까?

있잖아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마귀 사탄들이 얼마나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아십니까.

창세기에서 보면 에덴에서 마귀가 어떻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았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라고 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작전을 짜서 교묘하게 하와, 이 말씀을 어기도록 만들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마귀 사탄이 뭐라고 합니까.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이는 분명 마귀 사탄이 한 말입니다만, 여기서 “기록되었으되……”이후에 나온 말은 성경 시편 91편 11절~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마귀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여러분,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유혹하기 딱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그럴 듯하게 자기 입맛에 맞춰서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 놓고는, 그 엉터리 교리를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왜 넘어갑니까.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이에요.

우리가 아는 믿음 좋은 사람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 물론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간혹 보면 그런 경우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들고 주여~주여~불로~불로~불로~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물론 그래요. 성경에도 사무엘상 1장에 보시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ハンナ)가 너무나도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를 하는데 소리는 안 들리고 입술만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 엘리가 술취한 줄 알았다고 하는데, 마음이 괴롭고 그러면 정말 기도도 안 나올 때도 있어요. 정말 주여……주여……밖에 안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도 그저 손 들고 주여~주여~불로불로불로……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가만히 서서 우리가 말씀 드리기를 기다리실 텐데……맨날 주여 주여 불로불로불로……그러면,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그러시지 않겠어요?

비록 엉터리이긴 합니다만, 이단들도 성경을 공부하고, 마귀들도 성경을 달달 외우는데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단들을 대항하고 마귀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책은 앞에 놓고 기도하라고, 손에 들고 흔들면서 기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해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안 된다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 된다거나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영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이다 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앞서 소개해드린 그 메일을 보내신 사람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별개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은 틀렸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 분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배웠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 분이 자기가 어디 다닌다고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아무튼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음으로 상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건너뛸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언제는 아버지였다가 언제는 아들이었다가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라고 한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서 어느 회사에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있다고 해요. 회장님은 아버지고 부회장님은 아들입니다. 이제 회사 직원이 어떤 서류에 결제를 받으려고 하는데 부회장님은 사인을 해줬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반대를 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밑에 사람이 아무리 결제를 해서 올린다 하더라도, 최종결정권자가 사인을 안 해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서류를 만들어서 처음부터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장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결정권은 다 부회장한테 맡길게. 부회장이 사인하면 내가 한 걸로 치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부회장님이 사인한 걸 가지고 다시 회장님한테 서류를 가지고 갈 필요가 없어요.

부회장님의 결정이 곧 회장님의 결정이 되기 때문에 부회장님의 사인 만으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41장에 보시면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꿉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꿈 해석을 하지 못해요. 그러자 당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서,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까지 써서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이 불려와서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꿈의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애굽에는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그 후에는 7년 동안 혹독한 흉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께서는 지혜로운 자를 세워서 애굽을 다스리게 하셔서 혹독한 흉년을 대비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니까 애굽 왕 바로가 말합니다.


창세기 41장 38절~43절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家臣たちに言った。「神の霊が宿っているこのような人が、ほかに見つかるだろうか。」
ファラオはヨセフに言った。「神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おまえに知らされたからには、おまえのように、さとくて知恵のある者は、ほかにはいない。
おまえが私の家を治めるがよい。私の民はみな、おまえの命令に従うであろう。私が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
ファラオはさらにヨセフに言った。「さあ、私はおまえ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よう。」
そこで、ファラオは自分の指輪を指から外してヨセフの指にはめ、亜麻布の衣服を着せ、その首に金の首飾りを掛けた。
そして、自分の第二の車に彼を乗せた。人々は彼の前で「ひざまずけ」と叫んだ。こうしてファラオは彼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た。

이름도 없는 이국 땅에서 종으로 팔려온 요셉, 그것도 모자라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죄수로서 감옥 갇혀 있던 요셉이, 이 한 순간에 강대국 애굽의 2인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벼락 출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때 애굽 왕 바로가 뭐라고 말합니다
.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 뿐이니까 네가 이 나라를 다스리라고 하면서 인장 반지, 말하자면 왕의 도장을 주어서 네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권한을 위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私が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よう、といって、王の印章である自分の指輪を外してヨセフに与え、自分の権限を委任する場面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ります。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イエスは近づいて来て、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に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すべての権威が与えられています。

빌립보서 2장 9절~11절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それゆえ神は、この方を高く上げて、すべての名にまさる名を与えられました。
それは、イエスの名によって、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地の下にあるもののすべてが膝をかがめ、
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す」と告白して、父なる神に栄光を帰す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세우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결제 서류에 사인을 했는데 하나님이 놀라시면서 야, 예수야. 너 지금 왜 그러냐. 그러면서 반대를 하시거나,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이 사인을 했는데 예수님이 놀라시면서, 아이구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마치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으니까 둘 모두에게 결제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예수님 중에 한분이 허락했다 하더라도 다른 한 분이 반대할 수도 있다면 두 분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나중에 뒤탈이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항상 그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의견의 충돌이 없으세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빌립의 대화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10절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ピリポは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満足します。」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ピリポ、こんなに長い間、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のに、わたしを知らないのですか。わたしを見た人は、父を見たのです。どうしてあなたは、『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と言うのですか。
わたしが父のうちにいて、父がわたしのうちにおられることを、信じていないのです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言うことばは、自分から話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のうちにおられる父が、ご自分のわざを行っておられるのです。

이 말은 뭐예요? 부회장님, 부회장님이 하시는 건 알겠는데, 회장님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은 다 아버지가 허락하신 말씀이야. 그런데 왜 아버지를 보이라고 그래? 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회장님이 자기 아들인 부회장님한테 모든 권한을 위임했는데, 부하직원이 말하기를 그래도 회장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우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회장님과 부회장님 둘 모두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그렇잖아요?

첫째로는 회장님이 부회장님한테 모든 권한을 위임했는데, 부하직원은 그 위임 받은 부회장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그리고 둘째로는 위임을 했다고 하는 회장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아~ 예수님은 2인자니까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해요. 빨리 하나님 나오라고 해요. ……라고 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어떻게 성경을 공부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영(父がイエス様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이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보면 왕이 왕명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면, 그가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왕으로서 대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왕이 왕의 이름으로 명령을 보내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신이 전하는 말에는 왕과 똑 같은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イエス様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이라고 하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들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을 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기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드리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의 영을 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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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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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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