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SMALL
제333회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2022년 3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0절~14절
“10.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0節~14節
“10.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一人の人、すなわち私たちの父イサクによって身ごもったリベカの場合もそうです。
11.その子どもたちがまだ生まれもせず、善も悪も行わないうちに、選びによる神のご計画が、
12.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召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進められるために、「兄が弟に仕える」と彼女に告げられました。
13.「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14.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8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私たちを選ば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복습을 잠깐 해볼까 합니다.

지난 주에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 드렸지요. 아브라함은 아이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대로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자손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을 선택 하셨을까요. 어쩌면 사라가 아브라함의 정식 아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을 보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스라엘 제2대 왕이 된 다윗에게는 이미 아내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자신의 충신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틈을 타서, 그의 아내를 대단히 부적절한 방법으로 빼앗게 됩니다.

다윗의 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숨기기 위해 잔꾀를 부립니다만 이게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전사하게끔 만들어버리고는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짓이 어디 있습니까. 이 일로 인해서 그 때까지 승승장구했던 다윗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맙니다. 집안에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남매 사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고, 한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 왕이 광야로 쫓겨나기도 하고, 결국은 그 아들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당시까지의 다윗 왕의 인생에서 본다면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지요.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충신을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만들면서까지 빼앗은 그의 아내라고 한다면 다윗과 밧세바는 말하자면 죄악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2장에 의하면 그와 같은 부적절한 관계에서 갖게 된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아이를 하나님이 치셨고, 그 결과 병으로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이지요.

하지만 밧세바가 다윗 사이에서 또다시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 솔로몬을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 선택을 하시게 되는 것이지요.

밧세바 전에 있던 아내들 사이에도 아이들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굳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세우십니다.

왜 멀쩡한 다른 자녀들은 놔두고 하필이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선택 하셨을까요. 이를 보면 참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선택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이삭, 이제 그가 장성해서 아내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리브가입니다.


창세기 25장 21절 이후에 의하면,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을 했지만 좀처럼 아이를 갖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를 했더니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배가 불러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무래도 쌍둥이 같아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이 두 아이들이 뱃속에서 싸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이 하나가 뱃속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둘이나 들어있어요. 그것만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 두 아이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참 그 엄마 리브가도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남편 이삭도 많이 당황 했나 봐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리브가가 밤에 잠도 충분히 자질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할 줄 몰랐나 보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대단히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이 말씀을 알기 쉽게 보시면 두 아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두 민족으로 나누인다고 하시면서, 둘 중에서 한 쪽이 강하대요.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아이 이름이 없습니다만, 태어난 후에 붙여진 이름이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입니다.

그러면 보통 아, 형이 동생보다 강하게 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겠다” 즉 이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그러니까, 동생 야곱이 형 에서보다 더 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아무리 쌍둥이라 하더라도 위 아래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냥 형을 강하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하나님께서는 형보다 동생을 강하게 하셨냐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3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9장 13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이 말씀은 구약 말라기 1장 2절~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요약한 것인데, 여러분께서는 이 하나님의 답을 들으시면 이해가 가시나요?

하나님께서 형 에서가 아닌 동생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뭐래요? 형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은 사랑했기 때문이래요.

아니, 그런데 잠깐요. 지금 이 두 아이는 어디 있어요? 예, 엄마 리브가 뱃속에 있어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형 에서였다면 이 말을 듣고서 어떻겠습니까. 납득이 가시나요? 아니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미워하는 게 어디 있냐고 그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 하십니다. 망설임이 없으세요.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내가 형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상 끝. 이게 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겠지요.

그 의문이 뭐겠습니까. 이거 하나님 조금 이상한 것 아니야? 좀 잘못하신 것 아니야?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참 대단합니다. 이런 의문을 우리가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2천년 전에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니다.

로마서 9장 14절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4.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럼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냐 하는 것이지요.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비단 이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대전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 드리는 세 가지가 믿음과 말씀과 행함입니다. 말씀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치 선로를 벗어난 전철처럼 곤두박질 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앞서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게 되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세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이 말씀을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말이 됩니까. 이 우주는 오래 전에 빅뱅, 그러니까 대폭발이 일어나서 우주가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의 힘으로 인해서 은하계나 태양계가 생겨나고, 그리고 지구도 생겨난 것이지, 무슨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어……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전혀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어마어마한 힘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아, 그래. 지금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은 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이 우주 세상 천하 만물을 다 만드신 하나님, 지금 이 순간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지 못하실 질병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문제든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질병이라도 치료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도 잘못됐다 저것도 잘못됐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이신 이 성경말씀은 전혀 오류가 없다.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본문 11절~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12절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1.その子どもたちがまだ生まれもせず、善も悪も行わないうちに、選びによる神のご計画が、
12.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召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進められるために、「兄が弟に仕える」と彼女に告げられました。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에는 그 행위에 따라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 한 번 복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선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1장 22절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すべて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キリストを、すべて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として教会に与えられました。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가 지금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건물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다면, 이 곳이야 말로 진정한 교회,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인 것이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이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선택하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냐 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택하신 것이 너무 일러요? 아니요. 우리를 택하신 것은 엄마 뱃속은 고사하고 우리 조상님들도 태어나기 전,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불만을 하시겠습니까? 아이, 참, 하나님도 이상하지. 왜 나를 선택하셔서 괜히 구원하고 천국에 가게 만들고 그래……이렇게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요. 그렇다면 불평이나 불만 대신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입니다. 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것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사랑하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여기서 의인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랜만에 그 질문 한 번 해볼까요?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었지요.

그렇다면 의인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しかし、人は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知って、私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す。というのは、肉なる者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
만약에 의인이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그렇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이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만으로 의롭게 되어서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목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국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는, 물론 여러 가지 자격도 갖추어야 하고 서류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마지막에는 반드시 면접을 보아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질문에 잘 대답을 해야지만 합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목사님은 시민권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번에는 이 목사님의 어머님께서 시민권 면접을 받게 되셨다고 해요.

그 때도 벌써 목사님 연세도 많으셨으니까 목사님 어머님은 훨씬 더 고령이셨겠지요. 그런데 미국 시민권 면접에서는, 당연히 영어로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 어머님께서도 이거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고 해요.

자, 이제 면접 당일이에요. 이 고령이신 어머님이 얼마나 긴장을 하셨겠어요. 이제 어머님 차례가 와서, 면접 보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으니까 서류를 보던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을 하더래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름은 무엇입니까.” (링컨 16대, 케네디 35대, 조 바이든 46대, 키시다 101대, 문재인 19대)

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름이 누구죠? 예, “조지 워싱턴”이죠.

당시 미국 대통령은 빌 클린턴 대통령일 때였는데, 이 어머님이 긴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문제도 분명히 전날에 공부해 간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조지 워싱턴”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을, “조지 클린턴”이라고 대답해 버렸대요.

그러니까 오히려 면접관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어머님이 눈치를 채시고는, 아차차차…… 그러면서 다시 “조지 워싱턴”이라고 대답을 했대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면접관이 뭐라고 했냐 하면, 딱 한 마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굿”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이 질문 하나로 면접이 끝났대요.

뭐, 젊은 사람들한테는 이런저런 어려운 질문들도 많이 하고 그러겠지만, 나이도 많으신 분이라고 해서 좀 봐 주었는지도 모르죠. 딱 그 질문 하나만 하고 통과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무사히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너는 무엇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었고요, 교회를 얼마나 많이 세웠고요,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고요, 얼마나 많은 학위를 땄고요, 얼마나 많은 직분도 받았고요, 얼마나 많이 착한 일도 했고요…….

그러시겠습니까. 이는 무슨 말이에요? 다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천국 시험에 합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셔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 하실까요.

분명 엄지를 세우시면서 “굿”이라고 하시고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3회 →

← 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2022년 3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6절~9절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9節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7번째 시간으로서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約束の子孫となる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하나 짚어 나아가면 결코 어렵지는 않습니다.

먼저 6절 초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초반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 前半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6절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今、もしあなたがたが確かに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わたしの契約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族の中にあって、わたしの宝となる。全世界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から。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とって祭司の王国、聖なる国民となる。』これが、イスラエルの子らにあなたが語るべきことばである。」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 사역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다고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주장에 대한 근거, 즉,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방인들과 맺은 열매처럼 당신들에게 가서도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즉 로마에서도 이방인들과 믿음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로마서의 수신인은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굳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내가 비록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너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바울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어떤 신앙이 있는 일본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3절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선을 베풀면 우리도 복을 받는다……뭐, 이런 말을 저에게 진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당신들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잘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들 같은 이방인들도 복을 받는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9장 6절 후반부부터 9절까지를 다시 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고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열두 명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열두 명의 자손이기 때문에, 각 자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이 이삭 밖에 없었나요? 아니요. 이삭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자손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밤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을 주지 않으세요.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갑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말하기를, 자기 여종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라고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닥달을 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인 사라가 아닌 그의 여종 하갈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도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도 태어났으니 이제 기도 응답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8절~19절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そして、アブラハムは神に言った。「どうか、イシュマエルが御前で生きますように。」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대를 이을 자녀는 이스마엘이 아니다. 그가 아니라 사라한테서 태어나는 아이인 이삭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면 이삭과 이스마엘 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아니에요. 더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새로 아내를 맞이합니다.


창세기 25장 1절~2절
1.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アブラハムは、再び妻を迎えた。その名はケトラといった。
彼女はアブラハムに、ジムラン、ヨクシャン、メダン、ミディアン、イシュバク、シュアハを産んだ。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후처를 맞이해서 아들을 6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본다면 아브라함은, 하갈, 사라, 그리고 그두라 라고 하는 세 여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요. 먼저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아내 사라 사이에서 이삭을 낳고, 그리고 후처인 그두라 사이에서 6명을 낳았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은 모두 여덟 명입니다.

그 여덟 명의 자손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해도,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낳은 이삭만이 너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삭과 그 외 일곱 명의 자녀들에 있어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가 바로 8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 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8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외의 자녀와 이삭에 대해서 구별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을 했냐 하면 바로 그 외의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로 구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생각으로 태어난 자녀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17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9절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しかし、わたしがわたしの契約を立てるのは、サラが来年の今ごろあなたに産むイサクとの間にである。」

이삭에 대해서는 사라가 아직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삭의 이름 뿐만 아니라 언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가 다른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였지만 이삭 만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가 무엇입니까. <언제 태어날 것이다>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인가요?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삭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도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의 언약, 구원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그리고 야곱에서 열두 아들들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신들만이 구원 받은 백성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 말을 한 세례 요한도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표면적인 족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희들 스스로가 자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돌멩이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오늘 말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아주 심한 차별을 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 돌멩이 수준으로 취급 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례 요한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돌멩이를 이방인으로 바꾸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차별하는 이방인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다면 지금 저기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 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로마서 1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율법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할례가 더 이상 의미가 없듯이, 표면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육신적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들을 돌멩이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면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자, 여기서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약속>이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일까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속이 두 가지 있습니다.

다음 힌트입니다. 하나는 오래된 약속이고 하나는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래된 약속은 구약이요, 새로운 약속은 신약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 즉 ‘성경’이 되겠지요.

오래된 약속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가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45절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からイエスは、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を開いて、

여기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면 쉽게 말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걸쳐서 예언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신약에 있는 말씀들을 네 글자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오시리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신약에 보시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 그것도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말씀은 어떻습니까.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지키는 자가 곧 <약속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7절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록합니까. 방언을 해야 구원을 받는데요? 40일 금식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 있습니까.

아니에요.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지키고,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성경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다음에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 27절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モーセやすべての預言者たちから始めて、ご自分について聖書全体に書いてあることを彼らに説き明かされた。


이 말씀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셨어요?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어요?

아니에요. 더 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셨던 것이에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알고 지켜서 행해야지만 약속의 자녀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읽지 않아요. 말씀을 보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아니,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한 번 확인을 해볼까요?

자,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무엇으로 알아본다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까.


일요일에 성수주일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술 담배 안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40일 금식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일요일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다리가 부러져도 가게 문은 닫아야 되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런 사람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고, 굶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40일 금식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나요? 나를 믿으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よう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줄 알아본다는 것이에요.

저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주게 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축복이 임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고, 그리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2회 →

← 제331회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31회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2022년 3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절~5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5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4.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5.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6번째 시간으로서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かえりみる私たちの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가 5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앞의 3절과 뒤 2절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절~3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3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큰 근심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근심을 말하기에 앞서, 대단히 이 근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냥 잠시 어쩌다가 하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는 근심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근심이 뭐냐 하면 <나의 형제 곧 나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4절 첫 부분에 보시면, 그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イスラエル人)>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잠시 바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예,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열두 지파가 있는데, 바울은 무슨 지파였을까요.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그는 유대인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고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는 율법에 규정된 것이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그가 도중에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정통적인 유대인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3절만 다시 볼까요?

로마서 9장 3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이 지금 말하기를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다시 말해서 자기와 같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저주를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끊어질지라도 상관 없다……이런 말입니다.

아니, 갑자기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좀 의아스러울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우선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인이었을까요.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여기에 보면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에 가려고 했냐 하면, 로마에 가서 당신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다른 이방인들과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를 근거로 본다면 이 편지의 수신인은 적어도 대부분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다면 애초에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것이지, 왜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그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6절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シラスとテモテがマケドニアから下って来ると、パウロはみことばを語ることに専念し、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ことをユダヤ人たちに証しした。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이를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 중에서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절반 가까이를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요, 그리고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재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지금 이방인도 아닌 동족에게 말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보통 말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회개의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믿는 사람이 3천명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베드로보다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고기잡이 출신이었지만 바울은 학벌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언변도 탁월했습니다.

그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를 했다면,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 5천 명 정도는 회개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회개는 하지 않고, 바울한테 대적하고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8장 6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그래. 알았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면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한테 있다. 나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유가 바울이 부족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시면 주님이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애초에 이방인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내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에요. 잘못한 것도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의지하려고 해요.

그런데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거나 길이 잘 안 열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는 무턱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께서 내게 다른 길이 있어서, 다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한다면, 이것을 우리는 그냥, 아, 지금의 무슨 선교사 파송 정도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요. 이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고난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의 인도로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복음을 전하고 왔더니만, 그 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한테까지도 전도를 하고 왔다고 칭찬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11장 1절~3절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さて、使徒たちとユダヤにいる兄弟たちは、異邦人たちも神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ことを耳にした。
そこで、ペテロがエルサレムに上って来たとき、割礼を受けている者たちが、彼を非難して、
「あなた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者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彼らと一緒に食事をした」と言った。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조차도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구약에 있어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한테 아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만, 이는 그러니까 아주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힘든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전에 자신들을 핍박했었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이방인들한테는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을 부정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는, 그야말로 대단히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사역은 바울 정도가 아니면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주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해서, 이와 같은 어려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 특히나 이 서한의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 바울이 이제 유대인들은 포기하고 이방인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유대인들은 지옥에 가고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게 된다……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면, 이제 역차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버렸다. 봐라. 바울도 이제 유대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방인들한테만 전도하지 않느냐……뭐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게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와 똑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도 좋다.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모세의 기도와도 비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32절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そこでモーセは主のところに戻って言った。「ああ、この民は大きな罪を犯しました。自分たちのために金の神を造ったのです。
今、もしあなたが彼らの罪を赦してくださるなら──。しかし、もし、かなわないなら、どうかあなたがお書きになった書物から私の名を消し去ってください。」

이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지었지만 이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면 나도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는 모세가 자기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얼마나 사랑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지금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나도 저주 받기를 원하다는 말은, 내가 유대인을 버리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우리도 “아, 네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가 교회에 안 나간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 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그리 적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표현은 모세나 바울 정도 되는 경우나 쓸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좀 알아듣기 쉽게, 보다 좀 사랑스러운 표현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다음으로 4절~5절을 봅니다.

로마서 9장 4절~5절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멀리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당시 이 때는 아직 신약이 없었고 구약 뿐이었으니까, 구약에 보더라도 유대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고, 성경에는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 받으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자신의 동족을 어찌 버릴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내가 비록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는 있으나, 비록 때로는 자신을 핍박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뜨거운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쓰여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쓰여졌다는 사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읽으라고 쓰여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대목에 있어서, 그냥 단순히, 아, 바울이 그만큼 자기와 같은 유대인을 사랑했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 이토록 뜨겁게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말씀을 나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밖에서는 아주 겸손하고 친절하고 그러는데 집에서는 아주 엄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 자기와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면서, 자기와 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까다롭게 굴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 안 계신가요?


일본어에는 ‘우치벤케이’라는 흥미로는 말이 있습니다. ‘우치’는 집이나 아니면 안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벤케이라고 하면 옛날 일본에서 싸움을 잘했던 사람인데, 밖에 나가면 조용하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하면 갑자기 큰 소리를 치고 자기 멋대로 하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자기 가족한테만 그러느냐 하면, 꼭 가족이 아니라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한테는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 하지만 자기와 좀 먼 사람한테는 아주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우리말로는 <구들목 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저는 잘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밖에서 전도하거나 봉사할 때에는 아주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왔다 하면, 이것저것을 내세우면서 으시대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길 것 같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챙길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잘 챙기고 그러면서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짓궂게 한다거나 험담을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과 형제와 화목하는 것. 이 둘을 비교해볼 때 무엇이 더 중요할까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씀을 지금 식으로 바꾸어 본다면,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아차, 내가 어떤 사람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에이, 지금은 교회 늦을 것 같으니까 일단 예배 드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를 하든지 카톡을 하든지 하지 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우선 그 사람과 화해하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교회 좀 늦어도 괜찮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1부 예배에 못 맞출 것 같으면, 2부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고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일단 이웃과 화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든지 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40절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イエスがサドカイ人たちを黙らせたと聞いて、一緒に集まった。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둘째도 첫째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가까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학생들 돌봐 주느라고 자기 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는 말씀.

그리고 이는 제가 직접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인데, 그 목사님은 대단히 훌륭한 목사님이시거든요. 하지만 그 분의 자녀분들은 솔직히 좀 대체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성도들도 돌봐야 하고 여기저기 다녀야 할 일이 많았고 해서, 자기 가족을 돌 볼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글쎄요. 저는 그것이 과연 주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의 이웃 사랑을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사람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을 소중히 여기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눈으로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오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 그렇죠.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이는 똑같이 우리 이웃, 내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어떤 한 사람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제일 불편한 사람, 제일 싫어하는 사람, 제일 짜증 나는 사람을 한 사람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너무 많이 떠 올리면 괜히 힘드니까, 딱 한 사람만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제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 같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 위에 넘치는 것 같이, 여러분이 생각하신 바로 그 사람 위에도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공허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이웃에게 실천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

← 제330회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30회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2022년 3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8節~39節
“38.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39.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5번째 시간으로서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引き離されてはならない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8節~39節
“38.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39.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오늘 이 구절에 보면 아홉 가지가 등장합니다. 사망과 생명과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현재 일과 장래 일과 능력과 높음과 깊음입니다.

우선 이 아홉 가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망(死)’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사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에녹이요 다음은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노아든 아브라함이든 다윗이든 베드로든 바울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사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찬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순서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예외 없이 ‘사망’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생명(いのちも)’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천사들(御使いたち)’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천사 숭배 사상이 있었던 시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사사기 13장 15절~16절
“15.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マノアは主の使いに言った。「私たちにあなたをお引き止めできるでしょうか。あなたのために子やぎを料理したいのですが。」
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献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천사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자 천사는 자신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리자 오로지 경배를 받을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장면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라고도 기록되는 천사는 분명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사라고 해서 모두 좋은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른바 타락 천사를 떠올리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는 것인데, <루시퍼>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明けの明星、暁の子よ。どうしておまえは天から落ちたのか。国々を打ち破った者よ。どうしておまえは地に切り倒されたのか。

라는 구절에서 ‘계명성’에 대한 단어가 일부 번역본에서 ‘루시퍼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이 구절이 말하자면 천사가 타락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다수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 이 <루시퍼>라고 하는 것이 단어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이름, 다시 말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새벽별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는 <헬렐>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대표적인 한글이나 일본어 번역본에 보더라도 <루시퍼>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대표적인 영어 번역본에 보더라도 KJV 에만 <루시퍼>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NIV나 NASB 같은 번역본에는 그저 모닝스타, 스타 오브 모닝……아침의 별, 말하자면 샛별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유다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유다서 1장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またイエスは、自分の領分を守らずに自分のいるべき所を捨てた御使いたちを、大いなる日のさばきのために、永遠の鎖につないで暗闇の下に閉じ込められました。

이 말씀에 의하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천사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천사로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방심하면 안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저는 아직 육안으로 천사를 보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정말 놀랍게 반짝이는 천사를 보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마귀 사탄도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현재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 중에는 가브리엘이나 무슨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줄 뿐입니다. 그들은 숭배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프랑스에 보면 몽 상 미셀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봤는데, 분위기를 보니까 카마쿠라에 있는 에노시마 비슷하기도 한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그런데 그 몽 상 미셀이라고 하는 뜻은 뭐냐 하면 이를 번역하면 성 미가엘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엘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천사 이름입니다.


그래서 몽 상 미셀이라는 뜻은 말하자면 미가엘의 동산이라는 뜻인데, 왜 이름을 이렇게 붙였냐 하면 꿈속에 미가엘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 이름으로 교회를 세워라……해서 미가엘 천사의 이름을 따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 꼭대기에는 미가엘 천사 모양을 금빛으로 만들어서 저 높은 곳에 세워놓았습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몽 상 미셀에 놀러가면 안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도 언제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실제로 미가엘 천사가 그런 말을 했겠냐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세워라? 그런 말은 성경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세상에는 얼마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넷째로 권세자들(支配者たち)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권세자들도 있고 공중의 권세자들도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자라고 해서 천사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かつては、それらの罪の中にあってこの世の流れに従い、空中の権威を持つ支配者、すなわち、不従順の子らの中に今も働いている霊に従って歩んでいました。

여기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란 마귀를 뜻합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권세를 잡은 자들은, 자기를 신격화 해서 신으로 모시기를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권세자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리고 마귀 사탄을 뜻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현재 일(今あるものも)>입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여섯 번째에 나오는 <장래 일(後に来るものも)>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래에 다가올 지도 모르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래의 불안함을 얼마나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이는 빈부의 차이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장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되겠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보면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만큼 가졌으니 더 이상 모으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사업을 더 확장하거나 새로운 곳에 투자를 해서 더욱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불안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내가 얼마만큼 가지고 있어야 안심해도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돈을 벌려고 하고,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한 경우에는 남의 것까지도 빼앗으려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능력(力あるものも)입니다. 이는 단지 권세자들에 의한 능력이 아닌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힘을 말한다고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것이 천재지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비나 눈이 오고, 태풍이 몰아치고, 산이 무너지고 화산이 터집니다.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 여파로 쓰나미가 몰려 오기도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2022년 3월 초 현재 전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도 그렇고,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평화로울 때에는 한 사람을 죽여도 흉악범이 되는데, 전쟁이 한 번 시작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을 지켜보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해서 하고 있는 요구는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는 내용이에요.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철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쪽에 군사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걷잡을 수 없이 전쟁이 확대될 수 있어요. 러시아 외무장관이 말합니다. 만약에 제3차대전이 시작된다면 이는 핵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요. 그렇겠지요. 러시아는 엄연한 핵보유국인데 자기들이 지게 생겼다고 생각해보세요. 자기들 목에 칼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핵무기를 안 쓰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핵보유국들은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게 될지 모르지만, 3차 대전 다음에 일어나는 4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는 돌멩이와 곤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면 인류의 문명들은 모두 망하고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무서운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가로막거나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힘을 <능력>이라고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에는 <높음(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이요 아홉 번째는 <깊음(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사망(死)이나 살아있는 것들(いのち)이나 천사들(御使いたち)이나 권세자들(支配者たち)이나, 현재의 어려움이나 장래의 염려나, 그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강한 힘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저는 여기에 굳이 <그러나>라는 말씀을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러나>라는 단어는 기적의 접속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안 좋은 말들 뒤에 <그러나>가 왔을 때의 일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이렇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좋은 말씀 뒤에 <그러나>가 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가 없다……라고 하는 대단히 기쁘고 놀라운 말씀 뒤에 굳이 <그러나>를 붙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이 다음에 <그러나>를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은 끊을 수가 없다. 여기에 <그러나>가 붙으면? 그렇죠. 무언가는 끊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있을까요.

더 쉽게 말하자면 누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경에 보아도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을 하늘의 새들이 끊겠습니까, 바다의 물고기들이나 땅에 움직이는 생물들이 끊겠습니까. 그 누구도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축복이 끊어졌습니다. 누구에 의해서요? 그렇죠. 이 축복을 받은 아담과 하와 자신들에 의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므로 인해서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헌신짝 내버리 듯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에 보면 고작 5년짜리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죽어라고 고생을 하는데, 당시의 왕은 어땠습니까. 그렇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게 왕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왕위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무런 노력 없이, 선거운동 한 번 안 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는데 그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고 맙니다. 누구에 의해서 끊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사울 자신에 의해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왕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원래라면 사울에서 시작해서 그의 아들 요나단, 그리고 그 후로도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위가 이어졌을 것이지만,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27절
“2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私はあなたと一緒に帰りません。あなたは主のことばを退け、主があなたをイスラエルの王位から退けられたからです。」
サムエルが引き返して行こうとしたとき、サウルが彼の上着の裾をつかんだので、上着は裂けた。

이 기록을 보면 누가 먼저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먼저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사울이 잡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듯, 그가 잡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도 끊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영원히 이어졌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은 사울한테서 빼앗기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한 손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밧줄을 잡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굵은 밧줄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우리 손이 그 밧줄을 놓치지 않도록 아무리 큰 힘을 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는 칼로 언제든지 그 밧줄을 끊어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한 손에 쥔 칼,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릴 칼을 버려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남은 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밧줄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야 하는 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촛대가 옮겨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의 촛대 은혜의 촛대가 옮겨지지 않도록 우리 두 손으로 굳게 잡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두 손으로 굳게 잡고, 마침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마지막 날에 축복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0회 →

← 제329회 넉넉히 이기는 믿음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9회 넉넉히 이기는 믿음
2022년 2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37절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5節~37節
“35.だれが、私たちをキリストの愛から引き離すのですか。苦難ですか、苦悩ですか、迫害ですか、飢えですか、裸ですか、危険ですか、剣ですか。
36.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37.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4번째 시간으로서 “넉넉히 이기는 믿음” 圧倒的に勝利する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5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だれが、私たちをキリストの愛から引き離すのですか。苦難ですか、苦悩ですか、迫害ですか、飢えですか、裸ですか、危険ですか、剣ですか。

여기서 바울은 질문을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이 질문은 8장 마지막인 39절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무엇이겠는가. A, B, C이겠는가…… 라는 문장 구성은, 쉽게 말해서 A도 B도 C도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는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는가 하는 말씀은, 다시 말하자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 한 말씀들을 우선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에는 일곱 가지가 등장합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그리고 칼입니다.

먼저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어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2022년 2월 현재까지도 전세계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도 그렇습니다.

코로나 초기에는 독감처럼 금새 사라질 알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마스크조차 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하더라도 마스크 30장을 100엔이면 살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게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도무지 줄지 않아요. 좀 줄어가나 하면 다시 늘어가고, 줄어드나 하면 또다시 늘어나는 일의 반복입니다. 음식업, 관광업을 비롯해서 많은 곳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몇 대 째 걸쳐 내려온 사업장들이 문을 닫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현지 기자들은 말합니다. 바로 전날까지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던 지하철역이 하루 사이에 피난민으로 넘친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함께 식사를 했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총알이 날라오고 폭탄이 터집니다.

이와 같은 환난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칩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이와 같은 재앙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합니다.


욥기 1장 13절~19절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여기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멀쩡히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오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큰 바람이 불어와서 가족과 가축들이 죽고 집이 무너집니다. 정말로 숨쉴 겨를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욥이 잘못을 저질렀나요? 욥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환난을 당하는 것인가요?

욥기 1장 1절에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그는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욥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곤고입니다. 환난은 외부적인 요인이 강하다고 한다면, 곤고는 고뇌나 번민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뇌나 번민의 원인이 환난이나 고난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울증 같은 경우는 환난이나 고난이 없더라도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부유층이나 돈 많은 연예인들이 도박이나 마약에 빠지는 경우를 뉴스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맨날 하는 고민이 돈 걱정인데, 아니,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나이도 젊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왜 도박을 하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말로 할 수 없는 공허함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돈이 없고 가난할 때에는 어떻게든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이를 악 물고 공부하거나, 아니면 궂은 일도 마다 않고 일을 했는데, 이제 넉넉해 지니까 목적이 상실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돈은 많지만 오히려 마음이 공허해 져서, 마치 실이 끊긴 연처럼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질병이 곤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는 박해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있고, 사회적인 스트레스도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흔히들 하는 말에 무슨 하라스먼트라는 것이 있지요.

성희롱을 나타내는 섹슈얼 하라스먼트나, 상사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서 부하직원들에게 이른바 갑질을 하는 파워 허라스먼트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보니까 이 허라스먼트의 종류가 무려 40가지가 넘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허라스먼트가 있다고는 하나 이는 모두가 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종의 박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넷째는 기근이고 다섯째는 적신입니다. 참고로 적신이라고 하는 것은 입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위험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위험만이 아니라 질병이나 정신적인 위험도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칼’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에 의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위태로움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일곱 가지 재앙 중에서 하나라도 우리가 겪게 된다면 이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집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렵게 되겠지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36절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끄떡없을 것 같다는 분 계십니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지 모릅니다.

제아무리 근육질에다가 힘이 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에서 옷장 모퉁이에 새끼발가락을 부딪쳤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 있습니까.

솔직히 새끼발가락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진 사람을 봤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가시 하나라도 손가락에 박히면 얼마나 아픕니까.

나는 괜찮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끄떡없다고 장담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양이나 다름 없다고 성경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8장 37절에 보면 기적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접속사인 ‘그러나’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이 ‘그러나’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적의 접속사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야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구에 보면 ‘홈런’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쉽게 말하자면 내가 공을 쳐서, 저기 담장을 넘어가면 홈런입니다.

보통 투수가 공을 던져서 내가 방망이로 공을 쳤을 때 수비수들이 잡거나 하면 아웃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수비수들이 아무리 다리가 빠르거나 실력이 좋더라도 이를 완전히 무력화 하는 것이 바로 홈런입니다. 홈런을 한 번 치면, 보통 야구는 수비수가 9명이지만, 9명이 아니라 90명이 있다 하더라도 소용 없습니다. 높이 공이 올라가면 아무도 못 잡아요. 그리고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면 점수를 따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과관계라고 하지요?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이에요. A라고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면, 만약 A라고 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B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 때 A와 B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있어요, 우리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요. 경제적인 문제, 물리적인 위협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고난들이 많아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죠? 이럴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은 ‘그래서’입니다. A 그래서 B, 이는 뭐예요? A 이기 때문에 B라는 거예요.


나한테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불행해요. 그렇기 때문에 절망해요. 슬퍼해요. 낙심해요.

여기서 더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내가 이상해? 내가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오고 고난과 고통을 겪는데, 하나님을 믿어서 뭐하고 예수님을 믿어 봤자 뭐해?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러나’입니다.

놀라운 수비수들이 수 십 명, 수 백 명 깔렸어요. 그래서 나는 못해. 그래서 나는 안 돼.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8장 37절에서는 뭐라고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홈런 한 방이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이 무력화가 됩니다.

환난이 있어요. 어려움이 있어요. 배도 고프고 돈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온통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 투성이에요……이 때 무슨 말을 떠 올려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입니다.


우리 눈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러나”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그러나” 뒤에 뭐라고 기록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 대통령선거를 보면 참 서로가 서로를 원색적으로 비난을 합니다. 정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물고 뜯고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가 지지율이 거의 박빙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설문조사를 하는 기관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이른바 유력후보들의 지지율이 거의 오차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0.몇 프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서로 어떻게든 작은 흠집이라도 하나 내보려고 서로 비난하고 비방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한쪽 지지율이 90프로가 넘고, 다른 한쪽 후보가 10프로도 안 된다고 해봐요. 그럼 90프로도 넘는 후보가 상대방을 그렇게 심하게 깎아내리려고 하겠어요? 오히려 점잖게 자기 길을 가겠지요.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야박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 넉넉하게 이긴다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아멘 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가벼워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입니다.

그럴 때 보면 우리의 입이 얼마나 가벼워지는 지 몰라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 하다가도, 금새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가나단 땅을 정탐하고 온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열 사람들의 말을 믿고는 절망을 합니다. 낙심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이제 놀라운 축복,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께서 주시려는데, 그들은 에잇, 차라리 광야에서 죽거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가나안 사람들한테 죽게 생겼다……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민수기 14장 28절~30절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아니, 지금 내가 놀라운 축복을 주려고 하는데, 뭐 어째고 어째?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그래. 알았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들한테 해주마.

너희들, 내가 주려고 했던 축복 못 받아. 가나안 땅? 못 들어가. 너희들이 한 말처럼 광야에서 다 죽게 해주겠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처럼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욥, 그야말로 당대에 욥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없었다고 하는데도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욥기 1장 20절~22절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このとき、ヨブは立ち上がって上着を引き裂き、頭を剃り、地にひれ伏して礼拝し、
そして言った。「私は裸で母の胎から出て来た。また裸でかしこに帰ろう。主は与え、主は取られる。主の御名はほむべきかな。」
ヨブはこれら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罪に陥ることなく、神に対して愚痴をこぼすようなことはしなかった。


욥기 2장 9절~10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여러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평소 때 알지 못합니다. 무슨 과속을 하거나 급커브를 빠른 속도로 끼기긱 소리 내면서 도는 것이 운전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운전을 잘하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를 할 줄 아느냐 못하느냐 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기가 닥쳤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 크고 작은 사과들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사과가 제일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흔들어보면 됩니다. 보기에는 꽤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조금 흔드니까 후두두둑 하고 떨어지는 것이 있나 하면, 반면에 아무리 흔들어도 끝까지 안 떨어지는 사과도 있는 것이지요.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다가, 조금 시련이 닥쳐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 끝까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 입술로 죄를 짓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마침내 승리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37절에 보시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긴다고 하시나요?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0회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

← 제328회 고발과 정죄 그리고 구원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8회 고발과 정죄 그리고 구원
2022년 2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34절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3節~34節
“33.だれが、神に選ばれた者たちを訴えるのですか。神が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34.だれが、私たちを罪ありとするのですか。死んでくださった方、いや、よみがえられた方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が、神の右の座に着き、しかも私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2번째 시간으로서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栄光を与え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그 만화를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쉽게 말해서 드래곤 볼이라고 하는 이름의 구슬 일곱 개가 전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데, 그것을 일곱 개 모으면 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니까 예전에 봤던 일본 만담이 떠올랐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래요. 자가가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드래곤 볼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소원이 뭐길래 드래곤 볼을 찾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아까 그 사람이 말합니다. 사실 자기 할머니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치료비가 많이 든대요.

그런데 자기네 집은 가난해서 치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자기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기를 드래곤 볼을 찾아서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겠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재미가 없지, 실제로 들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이 만담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이게 말이 되나요?

이 우스갯소리이긴 합니다만, 제게는 적지 않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자,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사람한테는 지금 세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할머니가 입원을 했어요. 둘째는 입원비가 많이 드는데 돈이 없어요. 셋째는 이렇게 되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그럼 이 시점에서 정말 드래곤 볼을 모아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무슨 소원을 말해야 되겠어요?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내 머리가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한 가지 소원 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 이게 소원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리 돈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할머니 병이 낫지 않고 계속 입원하고 치료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왜죠?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뭐예요? 그렇죠. 지금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병이죠. 할머니 병이 나으면 병원비 걱정도 없어질 것이요, 이로 인해서 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해결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는 단순히 사람 웃기자고 하는 말입니다만, 어 말을 듣고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도 믿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행히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는 너무 많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주님께 바랄 때, 무엇이 핵심인지를 알고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을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이끌어주시는 자만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줄 사람을 언제 선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사람들을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시기로 또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럼 여기에 우리는 들어가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그렇죠. 들어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0절을 우선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자, 이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렇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불충분 해요. 왜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왕 노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천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드리지만, 아니, 왕은 하나면 될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걱정 없습니다.

옛날에 중국에 보면 황제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만, 땅이 워낙 넓으니까 혼자서 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 사람을 하나씩 두어서 이를 다스리도록 했는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보면, 당시에는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황제’라고 하지 못하고 ‘왕’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황제라고 하지 못했냐 하면 바로 중국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조선은 중국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자기를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왕은 ‘짐’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 같은데 보면 왕이 자기를 가리키면서 ‘과인’이라고 하면 좀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과인’의 ‘과’ 자는 ‘과부’할 때 쓰는 ‘과’자거든요. 그럼 그 ‘과’자가 무슨 한자냐 하면, ‘적을 과’자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따라서 ‘과인’이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천자, 다른 말로 황제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겸양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낮춘다는 일은, 이는 지금 생각하면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장차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때에도 주님께 순종하면서 왕 노릇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생을 마치고 천국에 갔어요.

천국에 가면 대단히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착순도 아니고, 어차피 가시게 될 텐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이 땅에서 다 마치시고 난 다음에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 가운데에 이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우리더러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천국에 왔으니 왕이 되어서 나와 함께 다스려야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에이, 제가 무슨 왕이 됩니까. 괜찮아요. 제가 지금까지 천국 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이제 좀 편히 쉴래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주님께서, 아, 참 너는 겸손하구나……하고 칭찬하실까요?

오늘 본문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32절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공짜예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셔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학비를 대줬습니다.


부모는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쓰고 싶은 것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어서, 이제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어요.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한테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세요? 이제 공부도 마치고 그랬으니까 마음 편하게 놀면서 지내겠습니다……이렇게 말하면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아니, 지금까지 공부를 시킨 이유가 이제부터 더 큰 일을 하라고 한 것이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라고 공부 시킨 줄 아냐……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천국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끼지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었더니 기껏 하는 말이, 아무 일도 안 한고 놀고 먹겠다니 무슨 말이냐……라는 말씀을 안 듣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 우리를 왕으로 높여 주실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되신다는 꿈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일단 분위기상 ‘아멘’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실제로 믿어지세요?

이건 실제로 말씀을 안 해도 됩니다만,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한 번 마음속으로 떠올려 보세요.

자, 다음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이 된다고요? 예,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전 떠올렸던 기도제목이 장차 왕이 될 사람에게 걸맞는 기도 제목이라고 느껴지십니까?


큰 기도 제목과 중간 기도 제목과 작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큰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면 모두 해결되는데도 아직도 제일 작은 기도 제목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건 천국에 간 다음 이야기지, 여기서 살아야 되면 또 여기에 맞는 문제들이 있잖아.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요한 3서 2절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천국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면, 이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이지만, 그것 만아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질병이 나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장차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입니다.

아이구, 사람 팔자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세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무슨 영화롭고 무슨 왕 노릇이야……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5장~6장에 보시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니까 외부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 안에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열왕기하 6장에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サマリアには大飢饉が起こっていて、また彼らが包囲していたので、ろばの頭一つが銀八十シェケルで売られ、鳩の糞一カブの四分の一が銀五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った。

여기에 ‘세겔’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당시 1세겔은 노동자 4일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단순계산으로 일당 만엔(10만원) 이라고 한다면 1세겔은 4만엔(40만원)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당나귀가 부정하다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머리 부위는 살도 별로 없어서 먹을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왔던 당나귀, 그것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머리 하나에 8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80세겔이면 얼마예요?

1세겔이 4만엔(40만원)이었으니까 80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320만엔(32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둘기 고기도 아니고, 비둘기 배설물이 다섯 세겔, 5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대략 20만엔(200만원)에 거래되었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한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안 보여요. 이대로 이 나라는 망하는구나 하고 누구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2절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エリシャは言った。「主のことばを聞き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明日の今ごろ、サマリアの門で、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侍従で、王が頼みにしていた者が、神の人に答えて言った。「たとえ主が天に窓を作られたとしても、そんなことがあるだろうか。」そこで、エリシャは言った。「確かに、あなたは自分の目でそれを見るが、それを食べることはできない。」

엘리사가 말하기를 1년 뒤나 한 달 뒤도 아닙니다 바로 내일 이맘 때,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헐값에 거래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아니, 지금 평소라면 먹지도 못할 것들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바로 내일 이맘때 헐값에 거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장광이라고 하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위관료가 되겠지요.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과소평가 한 것이죠.

그러자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걸 눈으로 보겠으나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현실이 됩니까. 예, 됩니다. 장도 바뀌지 않아요. 똑 같은 열왕기하 7장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한테 저 멀리서 거대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환청이 들리게 하셔서, 모든 군대가 그 많았던 식량이다, 무기다, 금이다, 은이다 하는 것을 다 놔두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성 안에 있었던 굶주렸던 백성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갑자기 성문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열왕기하 7장 16절~17절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そこで、民は出て行ってアラムの陣営をかすめ奪ったので、主のことばのとおり、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た。
王は例の侍従、頼みにしていた侍従を門の管理に当たらせたが、民が門で彼を踏みつけたので、彼は死んだ。王が神の人のところに下って行ったときに、神の人が告げたことばのとおりであった。

백성들이 나가서 보니까, 그때까지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던 식량들, 금이나 은보다도 귀했던 식량들을 아람 군대가 놔두고 간 바람에, 이제 막 남아 돌아요. 그래서 그 식량들이 헐값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이에요? 아까 그 하나님을 과소평가 했던 장관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장관은 어떻게 됐대요?

성문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식량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봤겠지요. 하지만 한꺼번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백성들한테 밟혀서 결국 그 맛있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어보고 죽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정말 전세계적으로 근래에 볼 수 없는 크나큰 대재앙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정말 언제 끝날 것인지, 마스크 없는 생활이 오기는 할 것인지, 우리 생활이 언제 좀 나아질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1년 뒤도 아니고 한 달 뒤도 아니고, 언제요? 그렇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우리가 천천히 몇 년에 걸쳐서 좋아집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일 이맘때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닌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예수님이 우리 편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편이신데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이 내일 이맘때일 수도 있고, 불과 몇 시간 뒤일 수도 있습니다. 순식간에 변합니다. 홀연히 변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9회 넉넉히 이기는 믿음 →

← 제327회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7회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2022년 2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0節~32節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2번째 시간으로서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栄光を与え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그 만화를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쉽게 말해서 드래곤 볼이라고 하는 이름의 구슬 일곱 개가 전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데, 그것을 일곱 개 모으면 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니까 예전에 봤던 일본 만담이 떠올랐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래요. 자가가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드래곤 볼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소원이 뭐길래 드래곤 볼을 찾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아까 그 사람이 말합니다. 사실 자기 할머니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치료비가 많이 든대요.

그런데 자기네 집은 가난해서 치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자기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기를 드래곤 볼을 찾아서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겠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재미가 없지, 실제로 들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이 만담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이게 말이 되나요?

이 우스갯소리이긴 합니다만, 제게는 적지 않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자,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사람한테는 지금 세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할머니가 입원을 했어요. 둘째는 입원비가 많이 드는데 돈이 없어요. 셋째는 이렇게 되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그럼 이 시점에서 정말 드래곤 볼을 모아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무슨 소원을 말해야 되겠어요?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내 머리가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한 가지 소원 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 이게 소원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리 돈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할머니 병이 낫지 않고 계속 입원하고 치료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왜죠?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뭐예요? 그렇죠. 지금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병이죠. 할머니 병이 나으면 병원비 걱정도 없어질 것이요, 이로 인해서 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해결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는 단순히 사람 웃기자고 하는 말입니다만, 어 말을 듣고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도 믿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행히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는 너무 많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주님께 바랄 때, 무엇이 핵심인지를 알고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을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이끌어주시는 자만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줄 사람을 언제 선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사람들을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시기로 또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럼 여기에 우리는 들어가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그렇죠. 들어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0절을 우선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자, 이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렇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불충분 해요. 왜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왕 노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천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드리지만, 아니, 왕은 하나면 될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걱정 없습니다.

옛날에 중국에 보면 황제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만, 땅이 워낙 넓으니까 혼자서 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 사람을 하나씩 두어서 이를 다스리도록 했는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보면, 당시에는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황제’라고 하지 못하고 ‘왕’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황제라고 하지 못했냐 하면 바로 중국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조선은 중국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자기를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왕은 ‘짐’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 같은데 보면 왕이 자기를 가리키면서 ‘과인’이라고 하면 좀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과인’의 ‘과’ 자는 ‘과부’할 때 쓰는 ‘과’자거든요. 그럼 그 ‘과’자가 무슨 한자냐 하면, ‘적을 과’자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따라서 ‘과인’이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천자, 다른 말로 황제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겸양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낮춘다는 일은, 이는 지금 생각하면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장차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때에도 주님께 순종하면서 왕 노릇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생을 마치고 천국에 갔어요.

천국에 가면 대단히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착순도 아니고, 어차피 가시게 될 텐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이 땅에서 다 마치시고 난 다음에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 가운데에 이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우리더러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천국에 왔으니 왕이 되어서 나와 함께 다스려야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에이, 제가 무슨 왕이 됩니까. 괜찮아요. 제가 지금까지 천국 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이제 좀 편히 쉴래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주님께서, 아, 참 너는 겸손하구나……하고 칭찬하실까요?

오늘 본문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32절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공짜예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셔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학비를 대줬습니다.


부모는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쓰고 싶은 것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어서, 이제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어요.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한테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세요? 이제 공부도 마치고 그랬으니까 마음 편하게 놀면서 지내겠습니다……이렇게 말하면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아니, 지금까지 공부를 시킨 이유가 이제부터 더 큰 일을 하라고 한 것이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라고 공부 시킨 줄 아냐……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천국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끼지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었더니 기껏 하는 말이, 아무 일도 안 한고 놀고 먹겠다니 무슨 말이냐……라는 말씀을 안 듣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 우리를 왕으로 높여 주실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되신다는 꿈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일단 분위기상 ‘아멘’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실제로 믿어지세요?

이건 실제로 말씀을 안 해도 됩니다만,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한 번 마음속으로 떠올려 보세요.

자, 다음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이 된다고요? 예,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전 떠올렸던 기도제목이 장차 왕이 될 사람에게 걸맞는 기도 제목이라고 느껴지십니까?


큰 기도 제목과 중간 기도 제목과 작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큰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면 모두 해결되는데도 아직도 제일 작은 기도 제목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건 천국에 간 다음 이야기지, 여기서 살아야 되면 또 여기에 맞는 문제들이 있잖아.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요한 3서 2절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천국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면, 이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이지만, 그것 만아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질병이 나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장차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입니다.

아이구, 사람 팔자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세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무슨 영화롭고 무슨 왕 노릇이야……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5장~6장에 보시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니까 외부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 안에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열왕기하 6장에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サマリアには大飢饉が起こっていて、また彼らが包囲していたので、ろばの頭一つが銀八十シェケルで売られ、鳩の糞一カブの四分の一が銀五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った。

여기에 ‘세겔’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당시 1세겔은 노동자 4일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단순계산으로 일당 만엔(10만원) 이라고 한다면 1세겔은 4만엔(40만원)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당나귀가 부정하다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머리 부위는 살도 별로 없어서 먹을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왔던 당나귀, 그것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머리 하나에 8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80세겔이면 얼마예요?

1세겔이 4만엔(40만원)이었으니까 80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320만엔(32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둘기 고기도 아니고, 비둘기 배설물이 다섯 세겔, 5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대략 20만엔(200만원)에 거래되었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한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안 보여요. 이대로 이 나라는 망하는구나 하고 누구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2절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エリシャは言った。「主のことばを聞き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明日の今ごろ、サマリアの門で、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侍従で、王が頼みにしていた者が、神の人に答えて言った。「たとえ主が天に窓を作られたとしても、そんなことがあるだろうか。」そこで、エリシャは言った。「確かに、あなたは自分の目でそれを見るが、それを食べることはできない。」

엘리사가 말하기를 1년 뒤나 한 달 뒤도 아닙니다 바로 내일 이맘 때,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헐값에 거래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아니, 지금 평소라면 먹지도 못할 것들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바로 내일 이맘때 헐값에 거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장광이라고 하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위관료가 되겠지요.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과소평가 한 것이죠.

그러자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걸 눈으로 보겠으나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현실이 됩니까. 예, 됩니다. 장도 바뀌지 않아요. 똑 같은 열왕기하 7장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한테 저 멀리서 거대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환청이 들리게 하셔서, 모든 군대가 그 많았던 식량이다, 무기다, 금이다, 은이다 하는 것을 다 놔두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성 안에 있었던 굶주렸던 백성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갑자기 성문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열왕기하 7장 16절~17절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そこで、民は出て行ってアラムの陣営をかすめ奪ったので、主のことばのとおり、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た。
王は例の侍従、頼みにしていた侍従を門の管理に当たらせたが、民が門で彼を踏みつけたので、彼は死んだ。王が神の人のところに下って行ったときに、神の人が告げたことばのとおりであった。

백성들이 나가서 보니까, 그때까지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던 식량들, 금이나 은보다도 귀했던 식량들을 아람 군대가 놔두고 간 바람에, 이제 막 남아 돌아요. 그래서 그 식량들이 헐값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이에요? 아까 그 하나님을 과소평가 했던 장관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장관은 어떻게 됐대요?

성문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식량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봤겠지요. 하지만 한꺼번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백성들한테 밟혀서 결국 그 맛있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어보고 죽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정말 전세계적으로 근래에 볼 수 없는 크나큰 대재앙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정말 언제 끝날 것인지, 마스크 없는 생활이 오기는 할 것인지, 우리 생활이 언제 좀 나아질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1년 뒤도 아니고 한 달 뒤도 아니고, 언제요? 그렇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우리가 천천히 몇 년에 걸쳐서 좋아집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일 이맘때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닌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예수님이 우리 편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편이신데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이 내일 이맘때일 수도 있고, 불과 몇 시간 뒤일 수도 있습니다. 순식간에 변합니다. 홀연히 변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8회 고발과 정죄 그리고 구원 →

← 제326회 크나큰 계획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6회 크나큰 계획
2022년 2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1번째 시간으로서 “크나큰 계획” 大いなる計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어느 목적지에 가려고 한다면 그 경로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는 경로가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곧 하나님이 계신 나라인데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어디를 통해서 갈 수 있냐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는 죄가 있는 사람이 갈 수가 없어요.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간에 그 죄를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그 길은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다 받아 주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해결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한테 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한테 갈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아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라고 고속도로를 타는 길밖에는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고속도로는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아니라면 탈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그냥 닥치는 대로 불러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미리 아신 자들,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나중에도 계시록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요한계시록 7장에 보시면 ‘인침을 받은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수가 144,000인데, 이 숫자가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각각 12,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2,000명이 열두 지파이니까 12,000명 곱하기 12를 해서 144,000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기에 들어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예. 꼭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를 일반적인 숫자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 지금까지 인류가 얼마나 많았는데 구원받는 사람이 고작 144,000명밖에 안 된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이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12라고 하는 숫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완전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악용하는 것이 이단들입니다. 거기 보면 이미 사람마다 각 지파를 정해 놓았어요. 그리고 돈 많이 내고 말 잘 듣는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배정을 해 놓고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뭐예요? 입시학원에서 각각 대학교를 정해놓고 누구는 돈을 많이 내고 말을 잘 들으니까 좋은 대학에 배정하고, 누구는 돈을 조금 냈으니까 안 좋은 대학에 배정을 시켜놓고, 누구는 말을 안 들으니까 내쫓았어요.

자, 그렇다면 입시학원에서 이렇게 정해놓으면, 각 대학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학생들을 뽑아 가나요?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자기들이 뭔데 자기들 마음대로 너는 이 대학에 들어가라, 너는 저 대학에 들어가라 하고 정해 놓고는, 나중에 대학교한테, 자, 우리가 이렇게 정해 놓았으니 당신들이 이대로 뽑아가시오……라고 하면 그대로 뽑아 가나요? 오히려 비웃겠지요.


성경을 그렇게 자기들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6장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イエスはまた、彼らに一つのたとえを話された。「盲人が盲人を案内できるでしょうか。二人とも穴に落ち込まないでしょうか。

요한복음 9장 40절~41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ともにいた者たちが、このことを聞いて、イエスに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마태복음 23장 13절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人々の前で天の御国を閉ざしている。おまえたち自身も入らず、入ろうとしている人々も入らせない。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들 말을 들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너희들은 맹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도 구원을 못 받을 뿐 아니라, 너희들을 따르는 자들도 구원을 못 받고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 또는 그 전에라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시게 될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사실을 알고 오늘 본문 29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언제’와 둘째는 ‘왜’입니다.


먼저 첫째 ‘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로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정해 놓으셨을까요. 언제부터 우리를 아시고 언제부터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려고 정해 놓으셨을까요.

내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정하셨나요?

만약에 그랬다면 이는 말이 좀 이상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서야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보시고, 아이구 성필이가 있었네, 하고 우리를 아셨다면 믿기 전에 우리를 어떻게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우리의 이름, 우리의 얼굴을 알고 계셨을까요? 모르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를 알고 계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계획이 있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실 계획이 있으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우리를 아셨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때 아직 우리를 이끌어 주실 계획이 없으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아직은 우리를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를 언제 계획 하셨을까요. 이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서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이사야 53장 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彼は自分のたましいの激しい苦しみのあとを見て、満足する。わたしの正しいしもべは、その知識によって多くの人を義とし、彼らの咎を負う。

이 말씀대로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장차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장차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우리를 분명히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그 십자가의 고난을 예수님도 만족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성경은 신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자, 이렇게 본다면 첫번째 질문 ‘언제’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번째 질문, ‘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부르시기로 계획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좀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로 여기심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말씀을 드려볼까요? 사실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좀 이상할 지는 모르지만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예수님을 본받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 우리는 이제 드디어 믿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않고, 한 번도 들어보지도 않았을 질문,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나요?

자,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시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시면 무엇을 하게 될 것 같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한 다음에는 천국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 그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천국에 반드시 가야지요. 지옥에 가면 큰일납니다.

이것도 좀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세상에 보면 신기한 것이 뭐냐 하면, 지옥은 상상하기가 쉬워요. 지옥은 어떤 곳이냐고 여러분께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시간관계상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성경에도 보면 여러 묘사가 나오는데, 그 중에 보면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겪는 모습들 같은 것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장차 천국에 가실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가시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께 천국에 가면 뭐가 좋냐고 물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천국은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대.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대. 병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주 즐거운 곳이래……. 자,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이 틀립니까? 뭐, 성경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이 말이 틀리다고 반론하실 분은 별로 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게 다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돈 걱정 없이, 집 걱정 없이, 병 걱정 없이 살게 하기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습니까.


하릴없이 편안한 삶? 그건 그야말로 요양시설이잖아요. 천국은 노후관리를 위한 곳이에요? 우리더러 편안하게 먹고 춤추고 놀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피범벅이 된 채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을까요?

일본에는 5월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4월달에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에게 일어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어떤 경우냐 하면, 이제 자기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4월달에 학교라면 입학식, 회사라면 입사식을 치르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크나큰 기대를 합니다. 꿈과 희망에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이 지난 5월달쯤 되면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이지요.

자, 이제 어려운 시험을 뚫고 대학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첫 달인 4월은 정신 없게 지나가겠지요. 그런데 이제 5월. 한 달이 지났어요. 그 때까지의 자기 목표는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갔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 시점에서 목표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주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어요. 그 이유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갔어요. 그러면 끝이에요?

만약에 그게 끝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본받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십자가만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예수님을 본받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왜?’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회사에서나 어느 사업장에서 본다면, 너 누구 밑에서 일을 배워……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도 되겠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배워라. 장차 너에게 그 일을 맡길 것이다……라는 지시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우리더러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장차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의 말로 말씀 드리자면 딱 세 글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왕 노릇’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第七の御使いがラッパを吹いた。すると大きな声が天に起こって、こう言った。「この世の王国は、私たちの主と、そのキリストのものとなった。主は世々限りなく支配される。」

요한계시록 11장 17절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私たちはあなたに感謝します。今おられ、昔おられた全能者、神である主よ。あなたは偉大な力を働かせて、王となられました。

요한계시록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この第一の復活にあずかる者は幸いな者、聖なる者である。この人々に対して、第二の死は何の力も持っていない。彼らは神とキリストの祭司となり、キリストとともに千年の間、王として治める。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시요 신 중의 신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어린양 예수님도 이 땅을 다스리시고, 그리고 장차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거기서 춤추고 먹고 노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아직 세상 끝 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게 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많은 지도자들이 나옵니다만, 오늘은 사울과 요셉과 다윗을 짤막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그 때까지는 사사가 나라를 다스렸지만 백성들이 자기들도 왕을 달라고 해서 제비를 뽑아서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도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결국 그는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다가 갈보아 산(ギルボア)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요셉과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40년은 다스렸고 요셉은 애굽 총리로서 80년을 다스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을 비교해보면 사울은 별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로 주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요셉과 다윗은 그 자리까지 가기가 대단히 험난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할 미성년자일 때 블레셋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그렇게 해서 영웅이 되었으나, 이를 시기한 사울 왕한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10년 이상을 생명의 위협도 당하고, 동굴에서 숨어지내기도 하고 하면서 그 어려움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나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어린 나이에 아무런 잘못 없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노예로 살다가 보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또한 아무런 잘못 없이 누명을 쓰게 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 역시 그 수많은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80년이나 통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게 되면 어려움이 없을까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사탄에 한 번 승리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절~3절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1.また私は、御使いが底知れぬ所の鍵と大きな鎖を手にして、天から下って来るのを見た。
2.彼は、竜、すなわち、悪魔でありサタンである古い蛇を捕らえて、これを千年の間縛り、
3.千年が終わるまで、これ以上諸国の民を惑わすことのないように、底知れぬ所に投げ込んで鍵をかけ、その上に封印をした。その後、竜はしばらくの間、解き放たれることになる。

이어서 7절 이후에는 무저갱에 들어갔던 사탄이 천년 후에 잠깐 놓여서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게 될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장차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편안히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다스리면서도, 우리가 극복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그리 길지 않은 지금까지의 제 삶을 한 번 돌아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이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와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의 제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복선 회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여러 경험들이, 그 때는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전혀 몰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 하나도 그래요. 20대 때는 나는 평생 동안 서울에서 살아갈 줄 알았고, 그러면 뭐 대중교통이 잘 정비된 서울에서 운전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평생 동안 운전을 안 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 갑자기 이 군마에서 살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암담합니다. 그런데 미국, 그것도 서부에서 살게 되니까 운전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아주 이 운전만 보더라도 철저하게 준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인터넷 홈페이지나 유튜브나 팟캐스트 방송 같은 것들을 보더라도, 아직까지는 여러가지로 부족합니다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돈 내고 배워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것이 지금 주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리 저한테 이렇게 훈련을 시키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영원한 생명이지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지내는 몇 십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히 주님의 나라에 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도, 역시 그 이후인 하늘나라에 가서 장차 왕 노릇 하게 될 때에 쓰시려고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천국은 이 땅에서 몇 십년 살다가 들어가는 요양시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사는 삶은 연습이고, 천국에 들어간 다음이 진정한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크나큰 계획을 가지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소망을 두는 삶을 통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을 본받으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6회 →

← 제325회 하나님의 뜻대로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5회 하나님의 뜻대로
2022년 1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0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기억이 있습니다만 주일학교 다닐 시절, 여러 개 적어준 성경구절 중에서 하나를 외워가면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종이에 다 붙이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는 구절이 바로 오늘 구절,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참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가는 말씀 아닙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참 이 구절,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된다고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것처럼 여겨 지십니까.

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 로마서 8장 28절보다도 더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이 말씀도 역시 참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지요?

아직 신앙이 없거나 아니면 초신자인 분이 여러분께 이 구절의 뜻, 특별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부분의 뜻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되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대충 짐작으로 넘어가는 것, 나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이렇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 사실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마치 나는 사실 잘 모르는데,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IT 관련 회사에 다닐 때 보면, 저는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니까 그것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 가잖아요? 그러면 대부분 친절하게 잘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이쪽이 물어보는데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때 보면,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고, 막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해요.

저는 맨 처음에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누가 이런 설명을 해주더군요.

친절하게 잘 가르쳐줄 때를 보면 자기가 아는 질문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것이라면 친절하게 잘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갑자기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막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는 뭐냐 하면,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도 모를 때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질문을 자기도 모르는데, 모른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이 참 지금 바쁜데 그런 걸 물어 가지고 귀찮게 구냐고 한다거나, 아니면 무슨 전혀 상관 없는 복잡한 이야기를 해가면서, 자기는 이런 어려운 것도 아는 사람이라고 과시를 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거죠.

이런 경우, 교회에도 보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다기 보다는 주위에서 가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했더니만 막 화를 내면서 왜 성경을 의심하느냐고, 성경말씀은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막 혼이 났다는 것이에요.


글쎄요. 뭐, 그 분은 전도사님이었다고 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도 그런 식으로 배워 오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질문을 하는 것이 잘못이에요? 비판 하자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인데, 그걸 가지고 왜 의심을 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전도사님이 아니라 목사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100%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한평생 성경만을 연구한 신학대 교수들도 모르는 일들이 많은데, 모른다고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가 모르는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솔직하게 아,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 번 제가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수치예요?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다만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때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그 외워오라고 준 그 프린트에 적힌 성경구절의 뜻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외워오라는 거예요. 외워오면 그 종이, 지금도 생각 나는데, 포도 송이에 번호가 붙어 있는 종이에요. 그 번호가 붙여진 포도송이 위에 하나씩 스티커를 붙여주고, 다 채우면 선물을 줘요.

성경구절 의미도 잘 몰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질문도 안 했습니다. 괜히 나서는 것 같고,, 그리고 또 질문을 한다고 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질문을 했다가 혼이 나면 어떡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는 그냥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른이 되어까지도 역시 그 정도라면 곤란하겠지요. 모르는 것은 우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모르면 물어 봐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모르는 것이 많아요. 제가 모른다고 한다면 역시 저도 자료를 찾아보고 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다시 오늘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돌아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게 무슨 뜻이에요. 특히 ‘이처럼 사랑하사’ 중에서 ‘이처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지시대명사인데, 그렇다면 ‘이처럼’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냐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이 점에 대해서 물으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는 한국어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되어 있는데, 외국어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 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은 실로 독생자를 주셨을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도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 그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주일학교에서도 좀 이렇게 알기 쉽게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셨더라면, 이 성경의 참 맛을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는 좀 더 심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

이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게 다 우리에게 득이 된다……이게 맞습니까 틀립니까.

한 가지 다른 말씀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이 말씀도 역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이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편안하게 쉬기만 하면 된다?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해 놓으셨으니까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럼 우리더러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고 말씀 하셨나요?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반 토막을 내어서 부분적으로 외우기만 한다면 여기에는 큰 잘못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이 구절 뒤에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저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멘~ 할렐루야~만 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법칙 대로 힘겹게 살아왔으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법칙대로 살게 된다면, 그게 훨씬 쉬운 일이요, 우리가 쉼을 얻게 될 것이요, 진정한 자유와 소망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태복음 11장 28절,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말씀만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안 믿으시겠습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고 싶어요?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반쪽짜리 믿음이지요. 반쪽짜리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 믿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13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もとで全き者で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무조건 모든 일이 다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 반쪽만 읽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는데 안약을 눈에 한 방울 넣으면 이 배탈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그냥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다 좋은 일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봐서 붙었어요.

그 사람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졌는데 이 사람만 붙었어요.

그러면 단순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회사에 붙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건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회사에서 그 사람을 뽑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것은 실제로 예전에 제가 다녔던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해 신입사원시험을 봤는데, 그 중에서 한 여자 응시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지는 못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만, 아무튼 면접관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정말 참 괜찮대요. 그런데 이 사람을 쓸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예요.

아니, 무슨 대단한 경력직 임원을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신입사원인데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만, 저는 당시 말단이었기 때문에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인사부 담당자의 그런 말에 어떤 부장님이 관심을 보였어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만나봐도 되겠냐고 했던 거지요. 그래서 따로 그 여자 응시생한테 연락을 해서 그 부장님이 면접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죠. 면접을 본 이 부장님의 말이 똑 같은 거예요. 사람은 참 괜찮은데 막상 쓸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거예요. 저는 여전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신기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나 보죠. 마침 제가 당시 근무했던 기획실의 실장님이 또 관심을 보였어요. 그래서, 아니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우리 기획실에서 써보면 되겠네 하시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만나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 번째로 그 사람을 불러내서 이번에는 기획실장이 면접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 기획실장님도 역시 똑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아……정말 사람 참 괜찮은데……사장님 비서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은데……비서는 이미 있고……아……정말 마땅히 쓸 곳이 없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은 세 번이나 면접을 보았습니다만, 결국 그 사람은 회사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능력이 없어서요? 아니요. 능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요.

저는 그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면접을 봤는데도 다 떨어졌는지, 지금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를 뒤집어본다면 반대로 붙은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합격한 사람들 중에는 그 사람보다 능력이 좀 모자란 사람도 있었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붙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람을 어디에 써야 하겠다. 어느 부서에 배치하면 좋겠다. 어떤 일을 맡기면 잘 하겠다 하는 회사 쪽의 명확한 계획이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여러 시험을 봐왔습니다만, 그 중에서는 제가 왜 붙었는지, 제가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 저를 뽑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두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이고 동생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23절
“21.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1.イサクは、自分の妻のために主に祈った。彼女が不妊の女だったからである。主は彼の祈りを聞き入れ、妻リベカは身ごもった。
22.子どもたちが彼女の腹の中でぶつかり合うようになったので、彼女は「こんなことでは、いったいどうなるのでしょう、私は」と言った。そして、主のみこころを求めに出て行った。
23.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여기에 보면,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자는 형이요 작은 자는 동생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에서와 야곱은 어디 있어요? 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엄마 뱃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말라기 1장 2절~3절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愛している。──主は言われる──しかし、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あなた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か』と。エサウはヤコブの兄ではなかったか。──主のことば──しかし、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た。
わたしはエサウを憎み、彼の山を荒れ果てた地とし、彼の相続地を荒野のジャッカルのものとした。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고 에서를 버린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동생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형 에서를 버린 이유는 에서를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무슨 착한 일을 해서요? 에서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요?

아니에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그러면 불공평 하잖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지극히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요? 아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다시고, 피를 흘려서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일본어 성경에 의하면 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 그냥 부르기로 했으니까 불렀다……가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우리를 ‘그릇’으로 비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これらのことから離れて自分自身をきよめ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用いら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なるものとされ、主人にとって役に立つもの、あらゆる良い働きに備えられたものとなるのです。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만들지 않습니다. 분명히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그릇으로서 쓰실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말하지 않았는데도 책상도 주고 의자도 주고 컴퓨터도 주고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해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사로부터 맡겨진 일을 하라고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회사에서는 맨날 졸거나 딴짓만 하면서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나도 안 해요. 그러면서 이걸 달라 저걸 달라 하면 주겠습니까.

주기는커녕 머지않아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획이 있으십니다. 우리를 쓰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그저 딴짓만 하면서 이걸 달라 저걸 달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줄 테니까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하면 주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막연하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정확하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6회 크나큰 계획 →

← 제324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324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2022년 1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6節~27節
“26.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27.人間の心を探る方は、御霊の思い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おられます。なぜなら、御霊は神のみこころにしたがって、聖徒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9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私たちを助けて下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하다고 소문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어서 진찰실에 들어가서는 의사선생님한테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릎이 좀 오랫동안 안 좋아요. 그런데 무슨 무슨 약이 좋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의사선생님이 말합니다.

“그럼요, 무릎이 안 좋은 데에 쓰는 약으로는 대단히 좋은 약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너무나 이상해요. 제가 그 비싼 약을 어렵게 구해서 몇 년 동안 꾸준히 먹고 있는데, 도무지 좋아지지 않아요. 좋아지기는커녕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소화도 안 되고, 여기저기에 두드러기 같은 게 많이 나고, 몸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이 약이 저랑 안 맞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 약은 먹는 게 아니라 바르는 약이에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잘못 사용을 하게 되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발라야 하는 약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면 몸에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글쎄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한 번 제가 그냥 만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이 구절을 보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방언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같이 이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본인이 하시는 방언을 알아들으시냐는 질문을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구절, 특히 26절을 말씀하세요.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말씀 아마 한국 교회에 좀 다녀 보신 분들은 드물지 않게 들어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참고로 저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에 대한 말씀이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바로 오늘 로마서 8장 26절인가요? 아니요. 더 자세히 나온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중에서 방언에 대한 기록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9절 후반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도 방언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들, 어떤 분들께는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는 분들, 그리고 방언을 하신다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생소하게 느껴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고린도전서 강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우선 간략하게 이와 같은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고 있는데, 방언보다도 예언 하기를 원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39절 후반부만 살펴보았습니다만, 39절 전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성경은 이처럼 반복적으로 방언보다는 예언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를 보면 유독 이 방언 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에 다니시다 보면 방언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시기도 하셨고, 또한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이 방언에 대해서 본다면 교회에서 성경 말씀대로 설명을 해주는 경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방언이라고 하면 로마서 8장 26절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대신 말씀해주고 계신다고 설명을 합니다.

앞서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순한 숫자상으로 본다면, 고린도전서에는 전체적으로 ‘방언’이라는 단어가 21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번이 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방언 하시는 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에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올까요. 예,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우리가 방언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로마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고린도전서지요.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에 있어서의 사용설명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교회에 그래도 초등학교 2학년부터 다녔습니다만, 우리가 예언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목사님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을 하는 분들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역시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통 교회에서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조용히 기도 한다기 보다는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그 때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기독교 서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학교 한 가운데에서 여럿이 둥글게 서서 손을 서로 마주잡고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학생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정말 신비스럽구나. 하나님이 계시나보구나. 나도 예수님을 믿어 보아야겠다…….그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주장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방언을 할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통성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솔직히 우리 고백해봅시다. 옆에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뭐,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데 어떡해 해요.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개인적인 내용을 큰 소리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제가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도둑질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했습니다. 누구를 속였습니다……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개의 기도를 크게 하시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큰 소리로 통성 기도 하실 때 보면 어떻게 기도를 하세요? 대체로 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게 계세요. 또는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기도를 하시거나, 아니면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정말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괜찮으세요?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면서요? 그러면 어떨 때 탄식을 해요? 어떨 때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탄식을 하실까요?

아이구……이 누구누구가 못나서 이런 죄를 지었고, 저런 죄를 지었어요. 마음이 너무나도 아픕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의 처지를 놓고 탄식을 하신다면 이와 같은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이런 기도를 큰 소리로 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성경에 이와 같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다음 3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1. 은밀한 내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더라도 상관 없다.
2. 내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한다.

설마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상관 없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8절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무슨 내용이 내 입에서 나오는지 모르는데, 은밀한 기도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방언을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조용히 하나님께 말하라고 이렇게 참 친절하게 방언의 사용설명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다 알고도 사람들 앞에서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뭐라고요? 예, 자기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여……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카라바리야라바 싸라바리야라바……”

저 이거 사람들 앞에서 한 시간 두 시간도 할 수 있어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첫째 여기에 제 개인정보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둘째,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셋째. 이 방언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방언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따라한 거거든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을 통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모든 방언은 통역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이 하는 방언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면 뭐예요? 예, 그것은 이미 방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에 보면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두 개이기 때문에 앞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두 번째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인 것이지요. 이 내용으로 보자면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정도 규모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에 보면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면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자면 수 십 명이 한 번에 할 수 있을까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개인적인 은밀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컨대 대여섯명, 아무리 많아도 10명까지는 안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게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방언을 하는 사람에 비해 대략 10분의 1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방언을 말하는 열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정도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통역하는 사람이 극히 소수였다면 당시 이 편지를 받아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했겠어요. “에이, 방언 통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기도를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렇게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정확히 알고 이에 대해서 지적을 합니다. 그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한 규모나 상황을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리고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도도 하고 통역도 하도록 바울이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도 방언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방언 해석을 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적어도 그 10분의 1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지금까지 한 분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의 기록처럼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지요.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데, 자기도 그래서 아무렇게나 말한 적이 있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귀한 고백처럼 제게 와 닿았는지 몰라요.

남들은 방언 기도를 하는데 나만 못한다면 창피할 거잖아요. 그래서 방언처럼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들, 아마도 적지 않게 계시지 않나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자기 믿음이 좋은 척 하는 모습이 예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믿음생활을 한다면, 나중에 무슨 낯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사랑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꼭 사람들이 많은 데에서만 해요. 아주 유창한 말로, 문학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큰 소리로 남들이 다 들리게 자기한테 사랑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단둘이 있을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 고백이라고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모습 보다도 단둘이 있을 때 마음이 담긴 몇 마디로 진정한 사랑이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기도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창한 말솜씨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받고 싶어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26절~27절 말씀을 방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로 한국에서만 그렇습니다. 대체적으로 외국 성경 주석들을 보면 그렇게 해석을 안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본문에 보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탄식만 하나요? 탄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괴로워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그럼 괴로워할 때만 기도를 한다는 뜻인가요?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항상 어두침침한 교회에서 무릎 꿇고 분위기 잡으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기도인가요? 아니에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주님께 드리는 짧은 기도. 감사의 기도, 기쁨의 기도,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기도입니까.

기도할 것이 없어요? 예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설교들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크나큰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정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소용없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니고, 내기 십일조 헌금 바친 게 얼마냐.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하는 괴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시다는 주님의 마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는, 그럴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더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힘을 때라 하더라도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인도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이 성경에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 사탄의 시험을 당하신 후에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심부름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한 상황에서 힘을 도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들고 괴로워하시는 중에 천사가 힘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힘드셨을 때 천사가 도왔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육간에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이처럼 친히 힘을 더하여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걸 주소서 저걸 주소서 하고 그저 우리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이걸 하고 싶고 저걸 하고 싶으니까 주님, 이루어 주소서…….만이 아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을 드리면, 자기는 기도 하는 중에 주님께서 다 말씀 해주시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이 계십니다.

아니, 그러면 성경을 읽은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나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나요. 이는 지나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되니까, 마치 발라야 하는 약을 먹어버리는 것처럼,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아무리 높은 직분을 받아도,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한다 하더라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기도, 올바른 행함은 바로 이 성경에 근본을 두었을 때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기도와 진정한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다, 힘들 때다,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과 믿음으로 함께 하고, 말씀으로 함께 하고, 그리고 행함으로 함께 할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5회 하나님의 뜻대로 →

← 제323회 소망을 가진 사람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