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순서대로라면 지난 번에 사울이 버린 것 (1)이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2)라고 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은 지지난 주, 그러니까 2주 전에 전해드린 말씀에 이어서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실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무엘상 15장 1절~3절까지 보실까요?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말렉을 한 번 공격하거나 겁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살육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까지도 완전히 없애 버리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지요. 이는 그가 무슨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아말렉을 진멸하길 원하니까 네가 가서 그들을 전멸시켜라. 아예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라. 이렇게 명하세요.
그럼 사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 알겠습니다”하고 나가서 그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 오늘은 이 사울과 아말렉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이를 좀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객관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진 한 장.
누가 보더라도 똑같이 보이는 사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정적 시각.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는 한 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현실은 어떨까요.
이는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인 종합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종합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이 정적인 시각인 데 반해 현실은 동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은 어떨까요.
이는 내면적인 진정한 판단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심리까지도 감안하는 것이기에 이는 진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이는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는 의미에서 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보도록 할까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는 어두컴컴한 차도였는데, 어떤 여성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와
부딪치게 되어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고 인근 CCTV에도 찍혀 있었습니다.
이는 말하자면 그 순간 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누가 보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교통사고에 있어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현실’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당시 여성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어서 밤길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골목에서 나와서는 뛰어가다시피 차도를 건너려고 했었어요.
반면에 남성은 음주상태도 아니었고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는 과속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성이 어두운 옷차림에 주위가 너무 어둡고 거리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미처 자동차가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여러분이 판사라고 하신다면 남자 운전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일단 자동차가 보행자를 사망하게 한 것이기에 완전 무죄라고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비교적 가벼운 벌을 내리지 않을까요?
객관적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비록 여성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운전자에게는 과실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피하기 어려웠던
사고라고 해석하고, 중형이 아니라 가벼운 형벌, 어쩌면 집행유예도 내려지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실’을 알아볼까요.
사실 이 사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운전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은 면식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던 관계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같은 동네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서로 어깨가 부딪쳤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여자가 남자에게 심한 욕설을 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남자는 대단히 큰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남성은 시력이 좋았어요.
그런데 마침 그 날 밤 여성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는데 순간 그 남성은 여성을 알아보았어요.
아, 저 여자는 얼마 전에 나에게 심한 욕설을 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조금 더 일찍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지만, 이전의 그 기억이 뇌리를 스치면서 브레이크를 조금 늦게 밟는 바람에
결국 그 여성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것이 이번 교통사고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이는 부득이하게 일어난 단순 사고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고의적인 살인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남성 운전자가 자신의 심리까지 말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인데, 자기한테 불리한 일을 굳이
털어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성 운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명 이것이 이 사건에 있어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무도 모르는, 그야말로 신적 시각, 하나님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고 하겠지요.
좀 무섭죠?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제로 비일비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성경 말씀에서 사울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사실과 현실 그리고 진실로 분석을 해서 무엇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실’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아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사울은 어떻게 했냐 하면 사무엘상 15장 7절~9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9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들 중에서 하찮은 것들은 다 죽이고 가장 좋은 가축들은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이는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아말렉의 왕을 사로잡고 와요. 그리고 좋은
가축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울이 그래도 하나님 명령을 꽤 충실히 수행했잖아요.
그리고 뭐,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쓸모 있는 가축들을 가지고 온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는 ‘현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앞서 살펴본 사실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7절~19절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당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해서 그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의 말을 들어볼까요.
사무엘상 15장 20절~21절
“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의 꾸짖음에 대해서 사울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진멸했잖아요.
그리고 그 증거로 왕도 사로잡아 왔어요. 가축들 중에서 쓸모없는 것들은 다 죽여버렸고, 다만 가장 좋은 것들은, 솔직히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끌고 온 것인데 뭐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 말씀, 그리고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비난, 그리고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나 사무엘이 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여기서 사실과 현실을 한 번 좀 정리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고 그들의 소유들도 모두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했어요. 다만 그들의 왕만 사로잡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대부분 없애버렸고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서 끌고 왔습니다.
이를 인간적으로 본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울이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잖아요.
물론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 정도는 수행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사울이 한 행위도 100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점 정도는 줄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95점은커녕 0점, 전혀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 후반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의하면 첫번째 실수에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두번째 실수에서는 아예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까지 하셨다고 사무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완전히 해고통보 아닙니까.
우리의 판단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을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과 현실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사실을 정적 시각, 현실을 동적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고 진실을 신적 시각, 말하자면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 사울은 아말렉을 모두 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의 왕을 사로잡아 왔으며 왜 가축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끌고 왔던
것일까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울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이 아말렉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요.
자,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아말렉을 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전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장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우선 사무엘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사무엘 선생님, 제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말렉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울이 왔다는 소식은 들리는데 안 나타나요.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는데 어떻게 되었대요?
사무엘상 15장 12절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러 갔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대요.
하지만 사울은 안 보이고 그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후딱후딱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자 사울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이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자, 이 말을 보시면 사울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어요. 군사들은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기는 했지만, 정작 백성들은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아말렉 왕과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까지도 모두 없애버렸어요.
그랬다면 사울은 전쟁터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겠어요. 예, 다 죽여버리고 없애버렸으니 전리품이 없겠지요.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그들의 왕을 사로잡고,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가축들을 대거 끌고 왔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는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비록 자신이 칭송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했어야 했겠지만, 사울이
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사울은 사람들로부터 열광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높임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기념비,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비유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고보니 첫번째 실수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가 끝까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번제를 드려버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3장 11절~12절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이것 보세요. 그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오로지 그의 백성들만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사울 왕이 저지른 잘못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 사울이 한 짓은 분명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죄가 됩니다.
자, 지금부터 제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맡긴 일을 처리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을 처리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전혀 상관 없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그 결과 정작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한테 손해를 끼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를 좀 쉽게 말씀 드려볼까요.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에서 일을 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경쟁사 B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함으로 인해서 그 결과 정작
A라는 자기 회사에 대해서 손해를 끼쳤다면 이는 당연히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엄연한 현행법상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무슨 죄냐 하면, 대한민국 형법에서 규정한 바로 업무상 배임죄입니다.
이는 사울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을 맡겼어요. 그렇다면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울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에 급급했고, 엉뚱하게도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명령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분명히 사울은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른 그 직원을 회사에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당장 내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형법 제356조 제2항에 의해 10년 이하의 지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행법을 위반한 한 개인도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왕 사울이 어찌 왕으로서 직임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실과 현실만 보았다면 사울은 100점까지는 안 되더라도 95점 정도는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실까지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울은 95점은 고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지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약에 사울 왕이 하나님께 좋게 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였더라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높임을 받았을 것을, 결국 그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세상에게 기쁨을 구한 나머지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여러분, 베드로에게 오라 한 분이 바람입니까, 주님이십니까. 그렇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가야지,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 결국 빠지고 말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부르신 분이 백성들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가야지,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면 어떻게 돼요?
예, 마치 물속으로 빠져가는 베드로처럼 실족하고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가 부르셨습니까. 세상이 불렀습니까, 우상이 불렀습니까, 아니면
마귀 사탄이 불렀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택하셨대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주님 안에서 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바람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우리를 세워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시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고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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