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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회 [면류관 강해 제13회] 종과 주인과 예수님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50절~51절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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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종과 주인과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지난 주 면류관 강해 12번째 시간까지는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주로 구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직까지도 다루어야 할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만,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검토해보기로 하고 오늘부터는 신약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만,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리라 여겨집니다.

먼저 첫번째 비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
“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자, 여기서 우선 이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 공동번역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공동번역판 마태복음 24장 45절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 종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한 종에게 일을 맡기기를, 다른 종들을 잘 관리하고 그들이 먹을 양식에 대해서도 베풀도록 책임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어떻게 하긴요. 여기 답이 다 나와 있잖아요. 그들이 일을 잘 하도록 관리를 하고 때가 되면 양식을 주고 해서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소임을 다하는 것이 충성되고 슬기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어떻게 했냐 하면 어차피 주인은 멀리 떠났으니 나에게 주어진 권한을 나를 위해 내 마음대로 쓰겠다고 하면서, 같이 있는 종들을 때리고 그리고 술친구들과 흥청망청 지냈다는 것이에요.

그러고 있었더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날,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런 광경을 보았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인은 그 종을 엄하게 때리고 엄벌에 처해서 결국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말씀도 배경은 앞서 전해드린 비유와 내용이 비슷합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려고 해요. 그래서 종들을 불러서는 각각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 씩 맡기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히 돈을 똑같이 맡긴 것이 아니라 ‘재능대로’, 그러니까 그 종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맡겼다고 하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단순히 가지고 있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 능력에 따라 이를 활용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 의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달란트’라고 하는 단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구약에서는 이를 무게 단위로 사용했었지만 신약에서는 화폐 단위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라고 하는데,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하루 일당을 단순하게 계산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10만원으로 본다면 어떻게 됩니까. 1 데나리온이 10만원이면, 6000데나리온은 6억원이 되지요. 말하자면 6억원이 한 달란트에요.

그러니까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씩 맡겼다고 하셨잖아요. 이를 환산해본다면 종들에게 각각 30억원, 12억원, 그리고 6억원씩을 맡기고 떠났다는 것이 되지요.


여기서 30억원 맡은 종은 열심히 사업을 해서 30억원을 남기고, 12억원을 맡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해서 12억원을 남겼어요. 그런데 6억원을 맡은 종은 땅을 파고는 그 돈을 묻어 두었다는 것이지요.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게 되는데 30억원으로 60억원을 만든 종과 12억원으로 24억원을 만든 종에게 주인은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6억원을 땅에 묻어 놨다가 준 종에 대해서는 엄하게 꾸짖어요.

네가 일을 하기 싫다면 차라리 그 돈을 취리하는 자들, 쉽게 말하자면 은행에 맡겼다면 그 이자라도 찾았을 것 아니냐.

그런데 땅에 묻어 놨었다는 것은 너에게 그 돈을 맡긴 내 뜻을 완전히 저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은 그에게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지요.

결국 이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 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비유에 대해서 일단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비유와 두번째 비유에 있어서 공통점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우선 주인이 종에게 해야 할 일을 맡기고 떠납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돌아온 뒤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종은 벌을 받게 되는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를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두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 대상과 배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부터 알아보아야 하겠는데 이는 마태복음 24장 3절부터 25장 마지막인 4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 중에 등장하는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되었냐 하면, 이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신 것이지요.

그 질문을 알아볼까요?


마태복음 24장 3절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곳이 감람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기도를 하신 곳 ‘겟세마네’와 같은 곳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감람산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 곳이 어떤 곳이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누가복음 22장 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요한복음 18장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이 기록에 의하면 감람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도 제자들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자들과 모임을 가지셨던 곳이 감람산이었어요.

그리고 또한 그 곳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기도를 하신 후에 바로 그 곳에서 체포를 당하게 되시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당시 예수님을 잡으려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다가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이에 대해서 유다는 그럼 무리가 없을 때가 언제 어디일까 하고 생각한 끝에 바로 그 곳, 바로 감람산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감람산에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대상이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신 것인데,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은 그 한자 뜻이 무엇입니까. 예, 구약. 그러니까 오래된 약속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신약은? 예, 그렇죠.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오래된 약속은 어떤 약속이고 신약, 새로운 약속은 어떤 약속입니까.


사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는 분들도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럼 대답하실 수 있으세요? 구약은 어떤 약속이고 신약은 어떤 약속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이고, 그러면 신약은? 메시야가? 그렇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떠났다고 다시 온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즉 요한계시록 1장 7절 기록처럼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벌을 받게 된 이 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4장 51절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두 종은 둘 다 똑 같은 결과를 맞이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부분은 원문인 헬라어 성경을 보더라도 토시하나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종과 주인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종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자,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돌아온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 이 종은,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벌을 받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누구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예수님이 온 다음이라도 회개하면 되는 것 아니냐.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겠지요.


하지만 그가 벌을 받게 된 것은 이미 주인이 와서 판결을 내린 다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판결이 내리기 전이라면 회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보셨어요.

그러면 그에게 그 때까지 회개하고 뉘우칠 시간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주인은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그만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은 결국 주인이 올 때까지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끝내는 주인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어,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주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자신이 떠나기 전에 본래 악한 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직분을 맡겼을까요?

사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선 다른 종들을 관리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상당한 권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 집을 비운 동안 만약에 다른 주인 가족들이 있었거나 했다면 그가 다른 종들을 때리거나 술친구들과 흥청망청 놀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보더라도 주인이 그 종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은 그 집을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막강한 권한을 아무 종한테 맡겼겠냐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 종은 그 집에 오래 있었고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두터운 신임도 받고 있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종도 보세요. 아무리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까지는 안되었다 하더라도 한 달란트 즉 주인 돈 6억원이나 되는 재산에 대해서 관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게 보통 지위입니까.

회사에서 본다면 이는 직원급이 아니라 임원급, 전무나 상무까지는 안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사정도는 되는 정도의 직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결코 능력이 없는 사람, 실력이 없는 사람한테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들을 관리하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6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맡길 정도라면 그야말로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장차 그 회사의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있는 후계자 후보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인은 분명 충실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 큰 성과를 남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을 선정해서 그와 같은 큰 권한을 부여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땠습니까.

그렇죠. 주인이 돌아와서 보니까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형편없는 꼴이 되고 말았잖아요. 그러니 주인은 그 종에게 엄한 심판을 내렸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되새겨 본다면 주인은 종에게 기대를 하고 일을 맡겼습니다만, 종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당했다고 이해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구원의 취소가 없다. 구원을 받는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기로 되어 있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본래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구원 받지 못할 죄인들을 앞에 두고 말씀을 하셨다면 그나마 이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너희들이 지금 내 제자라고 할지라도 똑바로 하지 않는다면, 장차 내가 다시 올 때 심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주인의 집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종’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어쩌면 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종이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주인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좋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해 주셨냐 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었던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는, 자기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면,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심판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 알지 못하는 시간에 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렇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설마 밤에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침이든 밤이든 추울 때든 더울 때는, 언제 주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면류관, 영광된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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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1회 [면류관 강해 제12회] 사울의 구원 문제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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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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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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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2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의 구원 문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지금까지 사울 왕에 대해서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얻은 것, 두번째는 사울이 버린 것, 세번째는 아말렉의 죄악, 그리고 네번째는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으로 사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아말렉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네 번씩이나 걸쳐서 살펴본 이유는 사실 오늘 전해드리고자 하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사전설명 없이 갑자기 오늘 다루어야 할 말씀만 전해드리게 되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조금 길어졌지만 네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자, 이제 면류관 강해에 있어서 사울에 관한 내용은 오늘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은 구원을 받았는가. 끝까지 면류관을 지킬 수 있었는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사울은 천국에 갈 수 있었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울은 하나님 앞에 큰 실수를 하게 되어서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5장 26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그렇죠. 하나님으로부터 해고통보, 요즘 우리가 알기 쉽게 말을 한다면 파면선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왕으로서 높이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11장 6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사울이 들었더니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 그 원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변덕이 아닙니다.

원인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셨더니 그 빈 자리를 악령이 꿰어 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영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무엘에게 명을 내려서 새로운 왕을 찾아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이었던 것이지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앞서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와 똑같지 않습니까.


이제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은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지고 사울은 악령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특징을 사울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납니다.

우선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무엘상 20장 30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개역개정 성경을 보시면 그래도 좀 점잖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참고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실까요?

조금 듣기에 불편하신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이니까요.


현대인의 성경판 사무엘상 20장 30절
“그러자 사울은 노발 대발하며 소리쳤다. '이 미친 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을 보십시오. 아무리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게 왕이라는 사람이 차마 입에 담을 만한 소리입니까.

그리고 사울은 다윗도 공격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11절
“10.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다윗은 사무엘상 17장에서 블레셋 군대의 용사 골리앗을 물리치지요.

이 공로로 인하여 사울은 그를 등용하게 되는데, 사울에게 들러붙은 악령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다윗이 이쁘게 보였겠습니까. 도리어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은 남은 평생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반면에 다윗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 여년 동안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28장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한테나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만 응답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신 사울에게 응답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의 특징은 바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사무엘상 28장 20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던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왕으로 뽑혔음에도 처음에는 소심해서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던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더니 이스라엘 군대 33만을 이끌어 암몬 군대를 전멸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이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창세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육적으로는 벌거벗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난 다음의 아담을 보십시오.


창세기 3장 7절~10절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버린 아담은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잖아요.

자,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본문을 잘 보십시오. 지금 이 말을 할 때 아담은 벗었습니까. 입었습니까.

7절에 보시면 그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삼았다잖아요.

이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대단히 엉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은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때에는 아무리 육적으로 벌거벗고 있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육적으로 가진 것이 없더라도 영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게 된다면 아무리 육적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니,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왕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영적으로 벌거벗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서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핵심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 중에 길보아 산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만, 그렇다면 사울은 죽은 뒤에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좀 안된 말씀입니다만 사울이 천국에 들어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망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앞서 사무엘상 15장 26절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무엘은 분명히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또 그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울도 천국에 갔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는 어떻게 나오는 주장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니까 사울은 이제 무당을 시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을 불어와서 물으려고 해요.

그런데 사무엘상 28장 19절에 의하면, 그 때 나타난 영이 말하기를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해서 사울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회심한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우선 무당이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을 불러 올 수가 있냐고 하는 문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자랐고, 그리고 한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무엘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저 또한 사무엘이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 그렇다면 천국 하나님 나라에 간 사무엘의 영을 한낱 무당이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간혹 무슨 전설이나 설화에 보면 죽은 사람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어디 하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사랑했지만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의 영이 이삭이나 야곱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잖아요.

그리고 성경기록을 자세히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영이라고 하는 그 모습을 직접 본 것도 아닙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4절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무당이 말하기를 한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사울에게 말하자, 어떻게 생긴 영이냐고 물어요. 그러자 무당이 말하기를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사울은 이 말을 듣고 그 영을 사무엘인 줄 알았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알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사무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인 것으로 이해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그저 무당이 말한 겉옷을 걸친 노인의 영을 사무엘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아니 백만분의 하나, 그 형상이 진짜 사무엘처럼 하고 있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있는 사무엘의 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모를까 땅에서 올라와요? 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안되는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영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렇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악한 마귀 사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가 제일 속이기 쉬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자기를 사무엘로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채자 마치 자기가 정말 사무엘인 것처럼 사울한테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내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악한 마귀가 있는 곳은 지옥이니 사울은 죽은 뒤에도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그 악한 영이 예언한 대로 그 다음 날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근거로 인해서 안타깝게도 그는 천국 백성이 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대체적으로 이론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울의 구원은 취소된 것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사울이 처음에는 구원을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저버림으로써 구원이 취소된 것일까요? 아니면 사울은 본래부터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것일까요.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울은 비록 왕이 되긴 했으나 애초에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앞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암몬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울이 첫번째 실수를 저질렀을 때 사무엘은 뭐라고 하면서 그를 꾸짖습니까.

사무엘상 13장 1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이 말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백성입니까. 이 세상 수많은 백성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잖아요. 그런데 그와 같은 백성들의 왕, 그것도 영원히 이어질 왕의 나라를 세우는데 구원받지 못한 왕을 세운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구원하실 생각도 없었던 사울에 대해 후회를 하시고, 사무엘은 처음부터 버림 당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사울을 위해 근심하여 온 밤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결과만 보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한 오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죠.

예를 들어서 대통령 선거를 보았을 때, 선거 기간에는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결과가 나온 다음에 A가 당선이 되면, 이번 선거에서는 당연히 A가 당선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고, 또 A가 떨어지게 되면 뭐라고 해요? 예, 자기는 A가 떨어질 것이라는 일은 벌써 예상하고 있었다. 뭐 이렇게 주장하는 정치평론가들 많잖아요?

마치 그런 식으로, 그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아무리 도중까지는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 마지막에 하나님을 버림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면, 아, 그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반대로, 과정은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 나중에 회개해서 하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되면, 아, 그 사람은 원래부터 구원받기로 되어있던 사람이었어.

이런 주장이야말로 마치 3류 정치평론가들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 요약하자면 사울은 분명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셨으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으나, 나중에 그가 하나님을 버림으로 인해서 그는 끝까지 구원을 지키지 못했기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의 구원,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질책하고 계시는 말씀인데 그 이유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 사랑 회복’ ‘첫 사랑 회복’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많이 들어봤어요.

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오랫동안 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쯤이었는데, 그 때는 무슨 대단한 감동을 받아서 교회에 가기 시작한 것도 아니거든요. 솔직히 일요일에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어서 간 거죠.

그랬던 나에게 무슨 믿음에 대한 처음 사랑이 있을까, 이는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인 것일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잘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니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서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언제입니까.


내가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어요.

내가 정말 어려움에 처해서 더 이상 앞길이 안보였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셨어요.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여러분께서는 그와 같은 경험이 없으십니까? 없기는 왜 없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울에게 했던 사무엘의 말을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5장 17절~19절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말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별볼일 없는 존재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일으켜서 왕으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의 그 감격, 그 감사, 그 은혜를 기억했었더라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을 것을,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이제 잊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요?

사무엘상 13장 14절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예, 이제 더 이상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자격도 없으며, 그 영광의 촛대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게 누구라고요? 그렇죠. 이스라엘의 왕위는 이제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에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건져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법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가 없다”는 격언이 있어요.


이는 아무리 내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키지 못하면 그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버리게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면류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넋 놓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리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할까요.

요한계시록 3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면류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이상 구원 위에 잠자는 자가 아니라,

지금 당장 깨어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굳게 잡아 끝까지 지켜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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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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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0회 [면류관 강해 제11회] 사울의 죄책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11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10.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순서대로라면 지난 번에 사울이 버린 것 (1)이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2)라고 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은 지지난 주, 그러니까 2주 전에 전해드린 말씀에 이어서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실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무엘상 15장 1절~3절까지 보실까요?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말렉을 한 번 공격하거나 겁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살육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까지도 완전히 없애 버리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지요. 이는 그가 무슨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아말렉을 진멸하길 원하니까 네가 가서 그들을 전멸시켜라. 아예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라. 이렇게 명하세요.


그럼 사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 알겠습니다”하고 나가서 그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 오늘은 이 사울과 아말렉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이를 좀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객관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진 한 장.

누가 보더라도 똑같이 보이는 사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정적 시각.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는 한 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현실은 어떨까요.

이는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인 종합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종합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이 정적인 시각인 데 반해 현실은 동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은 어떨까요.

이는 내면적인 진정한 판단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심리까지도 감안하는 것이기에 이는 진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이는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는 의미에서 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보도록 할까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는 어두컴컴한 차도였는데, 어떤 여성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와 부딪치게 되어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고 인근 CCTV에도 찍혀 있었습니다.


이는 말하자면 그 순간 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누가 보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교통사고에 있어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현실’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당시 여성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어서 밤길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골목에서 나와서는 뛰어가다시피 차도를 건너려고 했었어요.


반면에 남성은 음주상태도 아니었고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는 과속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성이 어두운 옷차림에 주위가 너무 어둡고 거리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미처 자동차가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여러분이 판사라고 하신다면 남자 운전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일단 자동차가 보행자를 사망하게 한 것이기에 완전 무죄라고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비교적 가벼운 벌을 내리지 않을까요?

객관적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비록 여성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운전자에게는 과실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피하기 어려웠던 사고라고 해석하고, 중형이 아니라 가벼운 형벌, 어쩌면 집행유예도 내려지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실’을 알아볼까요.


사실 이 사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운전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은 면식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던 관계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같은 동네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서로 어깨가 부딪쳤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여자가 남자에게 심한 욕설을 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남자는 대단히 큰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남성은 시력이 좋았어요.

그런데 마침 그 날 밤 여성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는데 순간 그 남성은 여성을 알아보았어요.

아, 저 여자는 얼마 전에 나에게 심한 욕설을 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조금 더 일찍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지만, 이전의 그 기억이 뇌리를 스치면서 브레이크를 조금 늦게 밟는 바람에 결국 그 여성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것이 이번 교통사고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이는 부득이하게 일어난 단순 사고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고의적인 살인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남성 운전자가 자신의 심리까지 말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인데, 자기한테 불리한 일을 굳이 털어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성 운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명 이것이 이 사건에 있어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무도 모르는, 그야말로 신적 시각, 하나님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고 하겠지요.

좀 무섭죠?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제로 비일비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성경 말씀에서 사울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사실과 현실 그리고 진실로 분석을 해서 무엇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실’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아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사울은 어떻게 했냐 하면 사무엘상 15장 7절~9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9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들 중에서 하찮은 것들은 다 죽이고 가장 좋은 가축들은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이는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아말렉의 왕을 사로잡고 와요. 그리고 좋은 가축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울이 그래도 하나님 명령을 꽤 충실히 수행했잖아요.

그리고 뭐,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쓸모 있는 가축들을 가지고 온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는 ‘현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앞서 살펴본 사실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7절~19절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당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해서 그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의 말을 들어볼까요.


사무엘상 15장 20절~21절
“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의 꾸짖음에 대해서 사울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진멸했잖아요.

그리고 그 증거로 왕도 사로잡아 왔어요. 가축들 중에서 쓸모없는 것들은 다 죽여버렸고, 다만 가장 좋은 것들은, 솔직히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끌고 온 것인데 뭐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 말씀, 그리고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비난, 그리고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나 사무엘이 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여기서 사실과 현실을 한 번 좀 정리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고 그들의 소유들도 모두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했어요. 다만 그들의 왕만 사로잡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대부분 없애버렸고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서 끌고 왔습니다.

이를 인간적으로 본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울이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잖아요.

물론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 정도는 수행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사울이 한 행위도 100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점 정도는 줄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95점은커녕 0점, 전혀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 후반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의하면 첫번째 실수에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두번째 실수에서는 아예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까지 하셨다고 사무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완전히 해고통보 아닙니까.

우리의 판단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을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과 현실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사실을 정적 시각, 현실을 동적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고 진실을 신적 시각, 말하자면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 사울은 아말렉을 모두 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의 왕을 사로잡아 왔으며 왜 가축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끌고 왔던 것일까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울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이 아말렉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요.


자,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아말렉을 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전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장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우선 사무엘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사무엘 선생님, 제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말렉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울이 왔다는 소식은 들리는데 안 나타나요.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는데 어떻게 되었대요?

사무엘상 15장 12절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러 갔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대요.

하지만 사울은 안 보이고 그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후딱후딱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자 사울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이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자, 이 말을 보시면 사울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어요. 군사들은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기는 했지만, 정작 백성들은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아말렉 왕과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까지도 모두 없애버렸어요.

그랬다면 사울은 전쟁터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겠어요. 예, 다 죽여버리고 없애버렸으니 전리품이 없겠지요.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그들의 왕을 사로잡고,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가축들을 대거 끌고 왔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는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비록 자신이 칭송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했어야 했겠지만, 사울이 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사울은 사람들로부터 열광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높임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기념비,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비유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고보니 첫번째 실수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가 끝까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번제를 드려버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3장 11절~12절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이것 보세요. 그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오로지 그의 백성들만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사울 왕이 저지른 잘못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 사울이 한 짓은 분명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죄가 됩니다.


자, 지금부터 제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맡긴 일을 처리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을 처리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전혀 상관 없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그 결과 정작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한테 손해를 끼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를 좀 쉽게 말씀 드려볼까요.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에서 일을 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경쟁사 B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함으로 인해서 그 결과 정작 A라는 자기 회사에 대해서 손해를 끼쳤다면 이는 당연히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엄연한 현행법상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무슨 죄냐 하면, 대한민국 형법에서 규정한 바로 업무상 배임죄입니다.

이는 사울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을 맡겼어요. 그렇다면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울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에 급급했고, 엉뚱하게도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명령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분명히 사울은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른 그 직원을 회사에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당장 내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형법 제356조 제2항에 의해 10년 이하의 지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행법을 위반한 한 개인도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왕 사울이 어찌 왕으로서 직임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실과 현실만 보았다면 사울은 100점까지는 안 되더라도 95점 정도는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실까지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울은 95점은 고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지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약에 사울 왕이 하나님께 좋게 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였더라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높임을 받았을 것을, 결국 그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세상에게 기쁨을 구한 나머지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여러분, 베드로에게 오라 한 분이 바람입니까, 주님이십니까. 그렇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가야지,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 결국 빠지고 말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부르신 분이 백성들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가야지,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면 어떻게 돼요?

예, 마치 물속으로 빠져가는 베드로처럼 실족하고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가 부르셨습니까. 세상이 불렀습니까, 우상이 불렀습니까, 아니면 마귀 사탄이 불렀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택하셨대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주님 안에서 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바람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우리를 세워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시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고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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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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