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5회 세례 받으신 예수님
2024년 3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17절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1節~17節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12.また手に箕(み)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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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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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세례 받으신 예수님” 洗礼を受けられ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1절과 12절의 내용을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 예수님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이는 장차 오실 구세주 메시야의 위상과 능력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명쾌하게 부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의 신발을 관리한다는 일은 당시 하인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분의 하인 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시고, 뿐만 아니라 이 또한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12절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2.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이는 메시야에 의한 심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에 대한 심판은 누가 합니까. 이 세상에서 심판은 말하자면 재판은 재판관이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영적인 재판 즉 구원이냐 멸망이냐 하는 재판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자기 다음에 오실 분은 우리에 대한 심판을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이 예언대로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13절에서 15절까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15절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이처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을 전하고 있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점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31절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私の後に一人の人が来られます。その方は私にまさる方です。私より先におられたからです』と私が言った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나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내 뒤에 오실 분이 계시다고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그 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6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見なさい。あなたの親類のエリサベツ、あの人もあの年になって男の子を宿しています。不妊と言われていた人なのに、今はもう六か月です。

누가복음 1장 56절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マリアは、三か月ほどエリサベツのもとにとどまって、家に帰った。


누가복음 1장에 의하면 이 한 장에서 두 아이의 탄생이 예언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탄생입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네 친족 엘리사벳도 잉태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친족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냐 하면, 마리아가 잉태사실을 듣고는 엘리사벳한테 가서 석 달이나 함께 지냈을 정도로 그 관계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셨다고 하는데, 자, 어머니끼리 그 정도로 가까웠다면 그 아들인 요한과 예수님이 30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33절~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34절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御霊が、ある人の上に降って、その上にとどまるのをあなたが見たら、その人こそ、聖霊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授ける者である。』
私はそれを見ました。それで、この方が神の子であると証しをしているのです。」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처럼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이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3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당시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만, 그 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묻기를 장차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 맞는지 여부를 묻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니, 육신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과 대단히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어왔고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본다면,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ませんでした。……

이 말씀은 세례 요한만한 선지자는 그 전에도 후에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대단한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나중까지도 그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세례 요한 조차도 예상을 못했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비롯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은 구약에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로 저주를 받아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게 되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당시에는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이는 세례 요한조차도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말 뜻밖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 39권째 말라기서를 읽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마태복음이 나옵니다. 참고로 말라기는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처럼 책 이름이 아니라 “말라기”가 선지자 이름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까지는 계속해서 선지자도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차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는 예언으로 말라기서가 끝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오랫동안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나 엘리야는 고사하고 선지자들도 나타나지 않아요.

그와 같은 기간이 얼마나 계속됐냐 하면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아, 구약 때 예언은 그야말로 전설, 아니면 신화구나. 이제 메시야가 온다고 하는 것도 모두 헛것이구나. 하는 그와 같은 절망이 만연하고 있던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는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세요.

예수님이 장차 오시리라고 하신 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요한은 놀랍니다. 아니, 내가 당신한테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내가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요한에게 말을 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이 장면을 보시면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점에 대해서 단순히 그냥 비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사실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 장면에 대해서 누가복음 3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3장 22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聖霊が鳩のような形をして、イエスの上に降って来られた。すると、天から声がした。「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あなたを喜ぶ。」

여기 보면 분명히 ‘비둘기 같은 형체(鳩のような形)’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최소한 비둘기 같은 그 무엇인가가 보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실’과 ‘진실’과 ‘현실’입니다.

이 ‘사실’과 ‘진실’과 ‘현실’이라고 하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합니다.

우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진실’이 끼친 영향으로 인한 현재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진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요, 진실을 이룰 만한 내포된 의미가 없는 객관적인 사건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일단 ‘사실’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 마가복음 1장 9절, 누가복음 3장 21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신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알아본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인물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荒れ地で私たちの神のために、大路をまっすぐにせよ。

마태복음 3장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400년 이상이나 계속된 영적으로 암울한 공백기간을 지나고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이 다가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선포합니다.

예언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기억하시며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신다. 그러니 어서 깨어 회개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작은 비행기, 무슨 헬기나 특수 전투기가 아닌 거대한 여객기 같은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활주로가 있어야 비행기가 그 활주로 위를 달리고는 마침내 날아오르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바로 그 활주로의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신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그 사역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리고 그가 닦아 놓은 활주로를 통해서 높이 날아오르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출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일출을 본 건 20대 중반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제가 PC통신,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PC통신에 있는 여행동호회에 가입해서 잠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여행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어요. 받아봤더니 그 동호회에서 그래도 좀 친하게 지냈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저더러 “야, 정동진 가자”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 때까지 ‘정동진’이라는 곳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게 사람 이름인 줄 알고, 제가 김동진은 알고 박동진도 아는데, 정동진은 모른다고 했더니만, 무슨 헛소리냐고 하면서 그냥 따라오래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그 형 차를 타고 갔지요.

지금은 뭐 정동진이 개발이 되어서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저는 그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었는데, 철도길 옆이 바로 바닷가 모래사장이잖아요. 정말 참 신기하더라고요.


거기 도착하니까 아직 어두웠는데 날이 밝아 지기 전에 서둘러 바닷가 쪽으로 갔죠.

저는 일출을 처음 볼 때까지는,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캄캄할 때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늘은 다 밝아졌는데 아직 해가 안 뜨는 거예요. 그 때가 겨울이었나 그랬는데, 거기에 동해바다 바닷바람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추웠겠어요. 그래서 빨리 차에 가고 싶었는데 하늘은 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안 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거의 다 밝아지고는 그 다음에 태양이 이렇게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기다렸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하늘이 아주 환하게 밝아진 다음에 저 멀리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은, 그러니까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하늘을 밝히는 역할을 했던 것이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밝힌 하늘 속으로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요한은 주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가 평탄하게 한 그 길로 이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 즉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마태복음 3장 16절을 다시 볼까요?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저는 이 세례를 받으시고는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그 때 동해바다에서 올라온 태양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놓고는, 그 속에서 예수님이 떠올라 이 세상에 나타내심바 되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고 계십니까.

만약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아직 물 속에 가라앉고 계시다면, 이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진실이고 사실이고 간에 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결과를 얻은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예수님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높이면 우리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考えてみてください。いくら一生懸命努力をしたとしても現実の中で結果を得られなかったというのであれば、そこに何の意味があるでしょうか。

私たちは私たちの人生の中でイエス様を上がらせ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様を私たちの人生の中に現せ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いつまでイエス様を水の中で、もがき苦しませるおつもりですか。

私たちが私たちの力で自らを高めても高めら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を高められる方法があります。それは私たちがへりくだることで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낮추고는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하고 나타내시게 하고 높이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귀함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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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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