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4회 회개에 합당한 열매
2024년 3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5절~9절
“5.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5節~9節
“5.そのころ、エルサレム、ユダヤ全土、ヨルダン川周辺のすべての地域から、人々がヨハネのもとにやって来て、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왔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류는 6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3장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세례라고 하는 개념은 그 때까지 없었던 관행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례에 대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 요한에게 모여들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대하여 순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베푼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시작한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중반부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

이는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만, 여기서 그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닌 세례를 베풀도록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례는 예수님까지도 받으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예수님도 분명 인정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장로회를 비롯한 많은 교단에서 약식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만,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침례, 그러니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전반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

마가복음 1장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水の中から上がるとすぐに、

옛날 그림들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머리 위에 물을 붓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와 같은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빈치의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는 그림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해서 만찬을 가졌을 때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하지요.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이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 ‘최후의 만찬’이라고 해서 이를 그대로 한글로 옮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는 의미상으로 볼 때 ‘최후’라고 하기 보다는 ‘마지막’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아, 정말 그 때는 이랬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사할 때의 자세입니다.

그 그림에 보시면 예수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조금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식사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영화나 그림을 보고 그것이 성경인 줄 알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성경 이해에 있어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머리에 물을 조금 붓는 것이 아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이 세례가 주는 의미를 1차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는데, 이 회개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세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에 풍덩 들어갔다 오면 당연히 온몸이 젖게 되겠지요. 지금도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옷을 안 젖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사실 요즘 옷 같은 경우에는 비에 젖는다 하더라도 그리 심하게 모양새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고 하겠는데, 옛날 옷 같은 경우에는 옷이 물에 젖으면 아주 보기에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옷을 벗어야 해요.

저도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았을 때를 보면 그 때는 강에 가서 침례로 받았는데, 그 때는 속옷차림에다가 흰 가운을 입고 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그랬습니다만, 그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 흰 가운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젖은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잖아요.

회개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좋은 모습,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지요.


예를 들어서 요즘 사람들을 보더라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 보면 자기의 안 좋은 모습을 올려놓고 싶어합니까.

자기가 잘 차려 입은 사진이나 멋진 모습들을 사진에 찍어서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하물며 자기의 흔한 일상모습이라고 하고 올려놓는 사진들을 보면, 옆에 슬쩍 명품 시계나 악세서리 같은 것이 나오게 찍는다거나, 운전하는 모습에는 슬쩍 자기 운전대에 찍힌 외제차 마크가 보기에 한다거나, 사실 좀 그런 건 보는 사람이 쑥스러울 수도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기 좋은 모습을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회개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안 좋은 것, 마치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무슨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내가 이웃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이웃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여기에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와서 자신을 낮추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이 중에는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데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하면 무슨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에세네파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좀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형식에 있어서 강조했던 경향이 있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합리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내세도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세네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건주의 금욕주의 그리고 비밀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살면서 철저한 경건, 금욕을 지키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해서 외부에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록들이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에세네파에서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

이 세 개 종파 중에서 당시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크게 비난을 합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가, 왜 유독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심한 말로 꾸짖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한의 말대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왔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구경을 하러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자신들의 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복종하고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더니 사람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요. 그리고 자신들은 전혀 주장하지도 않았던 회개를 말하자 사람들이 다 물로 세례를 받고 그럽니다.

일이 그렇게 되니까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갈까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하자면 정탐을 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자신을, 말하자면 구경하러 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8절~9절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자신들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회개할 것을 강권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의 생활이 어땠길래 요한은 이처럼 험한 말로 그들을 꾸짖었던 것일까요.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그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좋아했습니다.

경문 띠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율법을 기록한 경문을 작은 상자에 담아서 이마나 손목에 묶어서 고정을 시키고 기도를 하는데, 그 띠를 넓게 했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잘 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술을 길게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입는 예복을 권위있게 꾸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실속이 없고 바깥 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잔치 자리에 가면 항상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대우를 받으려고 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높임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으려고 했던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엄한 말로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해서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사람 취급도 안 했어요. 말도 안 섞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자신들의 국권도 상실한 상태인 주제에 무슨 다른 체면으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그러냐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제 파악도 못하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너희들이 지금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잘난 척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이 돌멩이처럼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 있어……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보내 드리는 전도메일을 받아 보신 분 같아요.


그런데 이 분이 하는 말이, 어디서 감히 자기한테 이런 메일을 보내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을 하기에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메일 내용을 보자 하니 변호사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지체가 높으신 분이신가, 대법관이나 국무총리라도 역임하신 분이신가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셨냐 하면, 아직 30대 초반인 로스쿨 출신 변호사더라고요.


참 듣기도 민망해서, 혹시 저와 같은 법대나 대학교 후배라면 한 마디라도 해줄까 했는데, 뭐, 같은 법대도 아니고 같은 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수고하세요……라고 생각하고 그냥 접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법시험을 보려면 응시자격이 없었습니다. 학력에 대한 제한도 없었고 그리고 응시료도 얼마나 쌌는지 몰라요.

90년대 초반의 경우에는 사법시험 1차 응시료가 2000원이고, 2차, 3차는 3500원이었습니다. 당시 운전면허 필기와 실기시험 응시료하고 똑같았어요.


물론 그 후에는 조금 더 오르긴 했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변호사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로스쿨을 반드시 졸업을 해야 하는데, 이 등록금이 상당히 비쌉니다. 졸업하기 위해서는 등록금만 보더라도 몇 천만원이 들어요. 여기에 책값이나 뭐다 하면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고 비싼 돈도 들여서 변호사님이 되셨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보면, 이런 젊은 변호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이나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됩니다.

뭐, 이런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도 때로는 여러 가지 자부심을 가질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도 있잖아요. 누구는 집에 금송아지 하나 없는 사람 있냐……라고 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이래봬도 젊었을 때는 말이야……. 그리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고도 하지요?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말이야…….

여러분,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성경에 그러라고 적혀 있습니까.

모세는 당시 유대인에 대한 핍박 때문에 갓난아기일 때에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형제 중 막내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중히 여기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어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부로 살아갈 사람을 택해서 주님의 크나큰 사도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좁쌀만한 자만심이 있습니까. 내가 이래봬도……라고 하는 오만함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우리는 그 오만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기 보다는 낮추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포르투갈 항공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50대 가량 백인 여성이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옆자리에 흑인 남성이 앉아 있더래요.

이 백인 여성은 역성을 내며 승무원을 부른 다음에 하는 말이, 자기 옆에 흑인이 앉아 있어서 대단히 불쾌하다면서 당장 자리를 바꿔 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이 말을 들은 승무원은, 이 승객을 진정시킨 다음에 잠시 알아보고 오겠다고 해요.

그러고는 얼마 후에 돌아와서 말을 합니다.

“지금 이코노미석에 빈 자리가 없지만 퍼스트클래스에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를 옮겨드리는 일은 저희 항공사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저희 손님을 불쾌한 사람 옆에 앉도록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인 여성은 통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짐을 챙기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승무원은 백인 여성이 아닌,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흑인 남성에게 말을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짐을 챙겨서 퍼스트클래스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주변 승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각자도생 해야겠지요. 아무도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라도 내 힘으로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거만, 교만, 오만,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거만과 교만과 오만과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리고 겸손의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요한이 말을 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 아니겠습니까.

이제 세례 요한의 말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 주님 앞에 겸손하고 이웃에게 겸손한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