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회 거듭나야 합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7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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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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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6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나야 합니다” 新しく生まれなけらばなりません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말씀 뜻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나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이는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3章3節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주석서에 의하면 이는 단순히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하다, 참여하다, 인식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저 단순히 먼발치에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제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절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さて、パリサイ人の一人で、ニコデモという名の人がいた。ユダヤ人の議員であった。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일반 서민이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그 외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많은 교양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겠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에게 주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천국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에서도 무슨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표현은 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대단히 놀랍니다.

요한복음 3장 4절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ニコデモはイエスに言った。「人は、老いていながら、どうや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すか。もう一度、母の胎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などできるでしょうか。」

아니, 이미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21절까지에 걸쳐서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이 내용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보니까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듣는 사람들은 좀 표정이 복잡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좀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어려운 것을 어려운 말로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좀 이상한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쉬운 것도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설명하기도 사실 쉬워요.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어려운 것을 쉽고 짧게 설명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실 좀 감탄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상당히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에 그나마 전문용어들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분의 말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래, 그 짧은 시간에 저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고 한다면, 저렇게 밖에는 할 수 없겠구나. 참 어려운 내용인데 그래도 설명을 참 잘하신다 하고 느꼈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런 기초지식 없이 이 말씀만 들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거듭남이라고 하는 어렵고 많은 내용들을 이 정도로 간략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오히려 참으로 놀랍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거듭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태어나는 순간은 말하자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0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경험도 쌓여가게 되지요.

처음에는 가정에서 시작한 지식의 습득과 경험의 축적이 이제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제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역시 또 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 곧 인생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 아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를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했던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나서 훌륭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청년관료로서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몰랐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에 비추어 보아서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바뀌게 됩니다.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당시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이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된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됩니다. 자신이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하고 핍박해야 마땅했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되자 예수님 만이 구원이고 예수님 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바울은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머리 속으로 집어넣었던 지식이 결국 나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이었구나, 결국 내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닌 내 눈을 가리게 하는 지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예를 들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포기한다고 한다면 어느 쪽이 어렵겠습니까.

당연히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야 어차피 없는 것, 동전 몇 개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큰 회사를 몇 개나 가지고 있고, 좋은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동안 노력해서 얻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살을 깎아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지식이나 경력으로 본다면 대단한 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을 완전히 버리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율법에 대한 지식, 세상에 대한 경력들은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왜 이렇게 작정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 그와 같은 결심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대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잡혀왔을 때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베스도와의 대화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2절~25절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使徒の働き26章22節~25節
このようにして、私は今日(こんにち)に至るまで神の助けを受けながら、堅く立って、小さい者にも大きい者にも証しをしています。そして、話してきたことは、預言者たちやモーセが後(のち)に起こるはずだと語ったことにほかなりません。
すなわち、キリストが苦しみを受けること、また、死者の中から最初に復活し、この民にも異邦人にも光を宣べ伝えることになると話したのです。」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ゥスが大声で言った。「パウロよ、おまえは頭がおかしくなっている。博学がおまえを狂わせている。」
パウロは言った。「フェストゥス閣下、私は頭がおか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真実で理にかなったことばを話しています。

여기에 등장하는 베스도도 총독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과거에 바울과 비슷한 삶, 좋은 배경, 좋은 집안, 좋은 학벌, 좋은 성적……이렇게 해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하지만 베스도와 바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였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다시 살아나신 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사전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0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는, 말하자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한다거나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식의 우선순위에 대한 재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세상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지식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세상적인 지식, 여기에는 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삶, 새롭게 0에서 시작하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져보지 못했던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해보지 못한 행함을 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바뀝니까.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새롭게 바뀝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 안에서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세상적인 지식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지금까지는 나 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평생 해보지 않은 행함, 다른 사람을 위한 행함을 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그런 분들 계십니다. 자기는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예, 좋은 나무는 당연히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고, 못된 나무는 당연히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먼저 알게 될까요? 예, 주위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주변 사람이, 아, 저 사람 정말 예전의 모습과 달라졌어……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말로만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 며칠 좀 열심히 노력하더니만 얼마 지나니까 예전 모습으로 또 돌아갔어요. 그러면 주변에서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달라지긴 뭐가 달라졌어……그러지 않겠습니까.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箴言 26章11節
「犬は自分が吐いた物に戻る」、「豚は身を洗って、また泥の中を転がる」という、ことわざどおりのことが、彼らに起こっているのです。

第二ペテロの手紙2章22節
犬が自分の吐いた物に戻って来るように、愚かな者は自分の愚かさを繰り返す。


皆さん、主が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架けられ、死な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



그냥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와 같은 일을 반복해 봤자 어제와 같은 일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제와 같은 일을 반복해봤자 여전히 똑같은 내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언제까지 어리석은 짐승들처럼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ただの人ではない、神様のひとり子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懲らしめを受けられたのが、まさに私たちのために、私のためにそのような目に遭わ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いい加減、変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おとといのことを繰り返したって昨日のようなことしか起こりません。昨日のようなことを繰り返したって、依然として同じような明日が繰り返すだけなのであります。

いつまで愚かな獣たちのように愚かなことを繰り返すおつもりでしょうか。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진정한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진정한 행함을 시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私たちは新しく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新しく生まれなけらば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

新しくなるためには、何よりも、まことの信仰をもって、まことのみ言葉を悟り、そして、まことの行いを始め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エペソ人への手紙4章22節~24節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썩어져가는 지식이나 경험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믿음, 진정한 말씀, 진정한 행함을 통해서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以前まで持っていた腐りゆく知識や経験に従う古い人を脱ぎ棄て、まことの信仰、まことのみ言葉、まことの行いを通して、まことの神様の御国を知ることにな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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