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0회 구원의 약속 (3)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マルコの福音書16章19節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あと)、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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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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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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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5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그 세번째 시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와 지지난 주를 통해 우리는 마가 다락방에서의 제자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 그리고 라합과 그의 가족 친족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에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 드렸었지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처음에는 500여 명이었는데 나중에 실제로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에는 120명밖에 안 남아있었습니다.

사실 다들 한가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일 없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렸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 광야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못 들어갔을까요.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입버릇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連れ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민수기 11장 5절~6절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민수기 14장 2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이러면서 불평불만을 되풀이했던 그들은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5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告げられた。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おまえたちが『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と言った、おまえたちの子どもについては、わたしは彼らを導き入れる。彼らはおまえたち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
しかし、おまえたちはこの荒野に屍をさらす。
おまえたちの子どもは、この荒野で四十年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おまえたちがみな、屍となるまで、おまえたちの背信の責め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おまえたちが、あの地を偵察した日数は四十日であった。その一日を一年と数えて、四十年の間おまえたちは自分の咎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わたしへの反抗が何であるかを思い知ることになる。
主であるこのわたしが言う。一つになってわたしに逆らったこの悪い会衆のすべてに対して、わたしは必ずこうする。この荒野で彼らは死に絶える。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는 320킬로. 거의 서울에서 부산 (東京 名古屋) 까지의 거리와 비슷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이고, 실제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걸었던 거리는 640킬로 정도였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640킬로. 물론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잠을 자고 식사나 휴식을 하면서 걷는 것일 테니 하루에 8시간 정도 걸었다고 쳐요.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하루 8시간을 시속 4킬로 정도로 걸었다고 친다면 하루에 30킬로 정도 걷는 것이 되지만, 여기에는 고령자나 어린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20킬로 정도 걸었다고 계산을 해보면 그래도 30일하고 조금 더 걸으면 되는 거리입니다.

그들은 대략 한 달 정도만 참고 충성만 했었더라면 어마어마한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땅, 아니, 자신들의 나라를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곧바로 못 들어가고 40년 뒤에 들어갔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성인들은 40년 동안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어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 1세대 중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40년 전에 미성년자이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광야 2세대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라합과 그의 가족 친족들은 어땠습니까.

끝까지 그 집 안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으나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결국 죽고 말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무엇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기 전의 모습으로, 믿음이 적었던 과거로, 또는 우상을 섬기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도들이,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모습 고기잡이나 하자 하는 식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애굽을 탈출한 광야 1세대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민수기 14장 3절~4절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주셨는데, 조금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신이 노예로 살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게 진정으로 그들이 돌아갈 곳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7장 16절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ただし王は、決して自分のために馬を増やしてはならない。馬を増やすために民をエジプトに戻らせてはならない。主は「二度とこの道を戻ってはならない」とあなたがたに言われた。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광야 2세대들의 특징은 어땠습니까. 광야 1세대와는 무엇이 달랐습니까.

그들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 공략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황당한 명령,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 여리고성 주위를 돌고, 마지막 7일째에는 일곱 번 돌고 난 다음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말씀에 대해서도 끝까지 순종해서 결국 여리고성 만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그 집 안에 머물러 있었더니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조금 오래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1982년에 개봉한 “사관과 신사”라는 영화를 보신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주연은 리처드 기어인데, 2024년 현재 그는 일흔살이 넘었지만 당시 그의 나이 삼십대 초반일 때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해군 부사관인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어요.


주인공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집을 뛰쳐나와 해군항공사관학교에 훈련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혹독한 훈련을 겪게 되는데 동기 중에서 한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지역에 파티가 있어서 그 친구와 함께 각자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이 여자친구들은 동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는데, 사실 그 여공들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를 만나서 그 시골을 빨리 뜨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친구는 자기 여자친구를 사랑했었는데, 그는 혹독한 훈련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자퇴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을 찾아가서 청혼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청혼을 기쁘게 생각했던 여공인 그녀는 그가 학교를 자퇴하고 왔다고 하자 태도가 돌변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녀들은 단순이 그 남자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장교와 결혼할 것을 꿈꿔왔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관학교를 자퇴하고 왔다고 하니 그는 장교가 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게 됩니다.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고 그 여자 친구에게로 돌아가면 자신을 기쁘게 받아줄 줄 알았던 그 주인공의 친구는 절망하고 결국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주인공은 그 혹독한 훈련을 끝까지 견딥니다. 한 번은 주인공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당시 그들을 교육시켰던 담당 교관으로부터 그야말로 인격적으로 극심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아주 지독한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교관은 주인공한테 말합니다.

"너 같은 놈은 집으로 돌아가! 때려치워! 넌 퇴학이야!"

그러자 그 주인공은 기합을 받으면서 울부짖습니다.

"I've got nowhere else to go!"

"난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난 돌아갈 곳이 없단 말이에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도, 그를 따뜻하게 받아줄 가정도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졸업식을 맞이하게 되고 꿈에도 그리던 장교로 임관을 하게 됩니다.

그 졸업식 자리에는 그를 끝까지 괴롭혔던 지독한 교관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관의 계급은 상사인데 학교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훈련생은 소위로 임관되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계급이 높아진 것이에요.

졸업생들이 그 혹독한 훈련을 강요했던 교관을 찾아가서 한 사람 씩 인사를 하자 교관은 경례를 하면서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소위님”

한 졸업생이 그에게 “감사합니다. 교관님”이라고 하자 그 교관은 말합니다.

“교관님이 아니라 상사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경례를 하는 모습. 참 멋진 장면 아닙니까.

졸업식을 마친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이제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하얀 장교복 차림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 마침내 그는 자신의 미래와 사랑을 모두 손에 넣게 된 것이죠.

이는 비록 영화이긴 합니다만, 이는 대단히 성경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의 친구는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고라도 여자친구한테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이 자신이 돌아갈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가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친구는 그를 버렸습니다. 퇴학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이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절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반면에 주인공은 어떻습니까. 그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도중에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힘드십니까. 기다림이 힘드십니까.

우리 한 번 정리를 해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제자들은 얼마나 기다려야 했습니까. 예, 8일, 아무리 길어도 10일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 후에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처음 도착하기까지 대략 30일 남짓이었고, 그리고 라합이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린 것도 길어봤자 20일도 채 안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얼마 안 되는 기간만 참으며 기다리면 됐었는데 그 기간을 참지 못해서 결국 크고 놀라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이, 사실 지금도 보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シモン、シモン。見なさい。サタンがあなたがたを麦のようにふるいにかけることを願って、聞き届けられました。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のために、あなたの信仰がなくならないように祈り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は立ち直ったら、兄弟たちを力づけてやりなさい。」

마귀들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귀들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탈락시키려고 합니다. 그 때의 미끼가 무엇입니까.


다 포기해. 믿음은 무슨 믿음. 쓸데없는 소리야. 세상으로 돌아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밋밋합니까. 예배를 드려도 찬송을 드려도 감동이 없습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으십니까. 잘 된다고 하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때가 엄청난 축복이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지금도 보면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을 했다가도, 조금 어려움이 닥치면 그 짧은 기간도 견디지 못하고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버리고 그리고 말씀을 버리고는 세상으로 가버리고 우상한테 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믿음이 아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닌 내 생각을 의지하면 잘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ヨハネの福音書14章6節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人々は信仰ではない世の中を自分が戻れる道だと思っています。主のみ言葉でない、自分の考えに頼ればうまくいくと勘違いを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それは戻れる道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戻る道はただ、イエス様だけです。イエス様を通してのみ本当の救い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우리는 좁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私たちは狭い門、いのちに至る門から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主はおっしゃいます。

マタイの福音書24章13節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そうです。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ると主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다려봅시다.

그 고난의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ピリピ人への手紙3章14節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今、大変な思いをされていますか。苦しんでおられますか。もう少し、もう少しだけ主を信じ、主を頼りながら待ってみましょう。

その苦しみの期間も残りわずかです。もう少し待つことができれば、驚くべき祝福を受け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이제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면서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서 마침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 안에서 기쁨에 넘치는 구원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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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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