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6번째 시간으로서 “또 하나의 신앙고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우선 27절~2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8절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 어떻습니까.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은 몇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씩 볼까요?
첫째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둘째로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셋째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넷째로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선 원수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그는 내가 잘 되기를 싫어하고 나를 방해하는 사람, 그리고 기회만 된다면 나를 해하려고까지
하는 사람이 바로 원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미워하는 자나 저주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역시 하나를 가리키는 말, 즉 원수를 사랑하라, 선대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가 총론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거예요. 이 말씀, 금방 머리에 안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오는
것이 각론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기니까 오늘은 시간관계상 29절만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9절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자,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절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0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찌 보면 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오늘은 확인하는 의미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총론을 알고 난 다음에 각론으로 넘어오면 좋겠습니다만, 간혹 보면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각론을 알면 그 결과로 총론이
이해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 주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어떻습니까. 우선 너희는 나를 믿으면 뺨을 맞을 일은 없다? 그렇게 주님은 말씀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 하더라도 뺨을 맞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단계. 왜 뺨을 맞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경우는 어떤
때라고 생각되십니까.
쉽게 말해서 뺨을 맞을 짓을 했을 때 맞았을 경우를 말씀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신은 전혀 뺨을 맞을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뺨을 맞았을 때를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은 전혀 뺨을 맞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억울하게 뺨을 맞았을 때, 겉옷은 고사하고
값이 싼 속옷조차도 빼앗길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도 빼앗기게 생겼을 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총론에서 나오는 원수,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에 대한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정당하거나 합당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죄를 지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나를 체포하는 경찰이나 나에게 형벌을 내리는 판사가 원수는 아니잖아요.
내가 누구한테 손해를 끼쳤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100만원짜리 물건을 망가뜨렸어요.
그럴 경우 100만원을 물어내라고 하는 상대방이 또한 원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나 그 사람 앞에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그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상대방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뭐 어쩌구 어째? 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판이 있는 것이잖아요.
재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필요할 때는 해야죠.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잘 안 통할 때가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이 통하지
않는, 그와 같은 억울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선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아내 중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다른 형제들이 질투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무런 잘못 없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가는 노예상인에게 팔려버리고 말았어요.
창세기 37장 2절에 의하면 그의 나이 17살 때였습니다.
참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창세기 37장 36절에 의하면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노예상인으로부터 요셉을 샀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그것도 그냥 객도 아니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어요.
그 힘든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의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 그를 유혹해요. 당연히 요셉은 이를 거절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혹하는데 그래도 안 넘어가니까 끝내는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히게
만들고 맙니다.
아니, 인생이 꼬여도 어떻게 이처럼 꼬일 수가 있습니까. 요셉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그는 나이 서른에 당시 최강국 애굽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뭐냐 하면 요셉의 자세입니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그러다 못해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세상에 이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어땠습니까.
17세 때 애굽으로 끌려와서 몇 년 동안 노예로 지내다가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가 애굽에서 노예로, 그리고 죄수로 지낸 13년~14년 동안 그가 그의 형제를 원망하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를
원망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한낱 노예가 무슨 말을 해 봤자 그런다고 풀어주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늘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원망하고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요셉이 그랬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억울한 사람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지만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고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를 기뻐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아무런 잘못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오랫동안을
집요하게 쫓아다닙니다.
이러는 바람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동굴에 갇혀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사울을 죽였나요.
아니요. 그에게는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스스로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지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심판하시고 다윗은 아무런 흠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왕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억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5장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치게 됩니다.
이 때에 많은 신하들이 다윗과 함께 했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아들 때문에 도망쳐 나와서 피난을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하 16장 5절~12절에 보시면, 사울과 같은 집안인 베냐민 지파 시므이라는 사람이 저 쪽에서 피난 가는 다윗 일행을
따라가면서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면서 큰 소리로 다윗 왕에게 저주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당장에 저 놈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하자, 다윗 왕은 말합니다.
사무엘하 16장 10절~13절
“10.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다윗이 말합니다. 야, 그냥 내버려둬. 하나님이 시켜서 저주하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잖아. 생각해봐. 지금 내 새끼도 나를 배반하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마당에, 사울과 같은 집안 사람이니 오죽하겠냐. 내가 억울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갚아 주실 것이니
그냥 내버려둬라.
지금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다윗의 인내심은 놀라울 따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어떻습니까.
요셉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해하려고 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에 대하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과 다윗은 그랬을까요.
그저 인생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요셉과 다윗은 분명한 믿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슨 재판이나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서 크고 작은 다툼들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인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이렇게 동영상 또는 음성이라고 해서 제가 모를 줄 알죠? 이 말에 대해서 ‘아멘’이 그리 쉽게 안 나오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비난할 때에는 묵묵히 ‘인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별로 큰 소리로 ‘아멘’이 안 나오는 것은, 뭐, 사실 솔직한 우리의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인내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습니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함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솔직한 심정으로 보면요, 우리 주변에 정말 못난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참 텔레비전을 보더라도요, 정치인들 보십시오.
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구든 간에 어쩜 저렇게 한심하고 못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요,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는 어떨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잘났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보다
뛰어납니까.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 것이 없어요. 오히려 우리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요즘 저는 스포츠 경기를 챙겨볼 여유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만, 얼마 전에 보니까 한국이 어디랑 축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안 좋았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고 비판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래도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요, 대한민국에서 축구 제일 잘하는 사람들 모아 놓은 거예요. 그 선수들한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무리 축구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뛰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만 하겠어요?
그럼 또 어떤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저 선수들은 밥 먹고 하는 게 축구잖아.
아니, 그러면 여러분이 회사원이라면 밥먹고 하는 게 회사일일 텐데, 그 일을 그럼 국가대표급으로 하고 계십니까. 뭐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누구라 하더라도 너무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이웃을 다스리라고 지배하라고 굴복시키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돈이나 선물을 주면 화목해질 수 있습니까. 밥을 많이 사주면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건 모두 일시적일 뿐이에요.
그렇다면 이 화목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인내’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16장 10절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정말 살다 보면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수세에 몰리는 상황, 더 나아가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어째고 어째?” 하고 자기 힘으로 한바탕 발칵 뒤집어 놓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여러분의 정당성을 여러분의 힘으로 주장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셨다고요? 예, 화목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때 아무리 여러분이 옳다고 해도, 두들겨 패고 뒤집어 놓고 난리를 치고 그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이웃과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신앙고백, 인내라는 무기, 아니, 인내라고 하는 제물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2장 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요즘은 한자어를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현대인의 성경판도 보시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잠언 12장 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터뜨리지만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당해도 참는다.”
미련한 자는 당장 그 자리에서 분노를 폭발 시키지만 슬기로운 자, 지혜가 있는 자는 수욕, 즉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그 억울하고 원통한 내 심정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놀라운 신앙고백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억울하십니까.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원통하십니까.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모두 갚아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니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인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원통하고 아무리 모욕적인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 주님께는 ‘인내’라고 하는 이름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올려 드리고, 우리 이웃과는 ‘인내’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화목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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