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른바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 하더라도 자주 그에게 가서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말씀이죠.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어떻게 됩니까.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그것도 언제요? 예, 속히! 지체없이 즉시 풀어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 한 번 생각해보죠.
우리가 기도를 해요. 그것도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 때마다 속히, 지체없이, 즉시 응답을 받게 된다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줄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늘어나겠지요. 그렇잖아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을 못 받는다면 믿는 사람들은 사라지겠지만, 기도를 하기만 하면 즉각즉각
응답을 받게 된다면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오늘 본문 후반부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8장 8절 후반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 응답을 빨리 받게 되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서, 장차 인자가 올 때, 즉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에서 수많은 믿음을 보시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앞뒤가 맞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속히 응답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음에서 멀어져서 결국에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간절하게 기도를 하지요.
제발 이 어려움이 사라지고 고난이 끝나고 모든 문제들이 속히 해결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분명 성경에서는 속히 응답을 해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속히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고난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속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성경에 보시더라도 여러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많이 등장합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욥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욥기 1장에 보시면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성경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을 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해요.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달려들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가축과 종들이 죽어 버리더니, 끝내는
큰 바람이 불어오더니만 집이 무너져서 그의 자녀들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욥기 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7절~8절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참 얼마나 끔찍한 상황입니까.
이른바 ‘만신창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발바닥에서 정수리 머리 끝까지 종기가 나서 그것이 가려우니까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벅벅 긁고 있었다고 하니, 문자 그대로 온몸이
상처 투성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하루아침에 전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도 잃게 되어 말 그대로 죽음보다도 더한
괴로움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욥에게 재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친구들이 모였는데, 그 때의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12절~13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친구라고 한다면 서로 가까운 사이이고 얼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욥의 모습이 그 지경이 되니까 욥인지 아닌지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그 친구들은 그 참상을 눈앞에 두고 7일 동안이나 차마 말을 걸지도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욥도 이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당했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도 좋은 욥이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겠어요.
자, 여기서 저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바로 욥이 이처럼 끔찍한 고난, 성경에 보더라도 전무후무한 고난을 당하는 기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얼마 동안이나
이처럼 극심한 고난을 당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전해드리고 있는 말씀이 주제 설교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 강해 설교이기 때문에 비록 구약이긴
합니다만, 우리 함께 공부하는 의미로 이 점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이 과연 어느 정도 될까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흥미로운 글을 찾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 그 기간이라고 하는 숫자가 적혀 있더라고요.
우선 이를 근거로 드는 구절이 욥기 42장 16절입니다.
욥기 42장 16절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자, 현재 복음주의 개혁주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욥기에는 과연 욥이 몇
살때부터 고난을 겪기 시작해서 몇 살에 그 고난이 끝났는지, 그리고 몇 살까지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42장 16절 구절을 가지고 어떻게 그 기간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그 글에서는 70인역
성경을 제시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원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발견된 성경이라 하더라도 모두
사본이요 번역본에요.
그런데 그 번역본 중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이른바 70인역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이 70인역 성경이 이단이다 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위경이다 외경이다 하는 말들도 있습니다만, 오늘 이 시간에는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겠고, 다만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70인역은 성경의 수많은 번역본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70인역에 의하면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는 거예요.
70인역 욥기 42장 16절
“그리고 욥은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앞서 살펴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개역개정 욥기 42장 16절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70인역 욥기 42장 16절
“그리고 욥은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이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을 두고 어떻게 해석을 하냐 하면, 개역개정에 나와 있는 140년은 ‘그 후에’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고난이 끝난 후에’라는 뜻이니 욥은 고난이 끝나고 나서 140년을 더 살았다는 뜻이고, 70인역 욥기 42장 16절에
의하면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다가 240년을 향수하고, 그러니까 240세에 사망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두
구절을 종합해보면 욥은 사망하기 170년 전에 고난이 시작해서 사망하기 140년 전에 고난이 끝났다는 것이에요.
이를 쉽게 말하자면 240세에 사망한 욥이 죽기 170년 전이라고 한다면 70세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70세 때 고난이 시작해서,
240세에 사망한 욥이 죽기 140년 전, 그러니까 100세 때 고난이 끝났다는 것이 되니까 욥이 고난을 겪은 기간은 70세
때부터 100세 때까지 30년간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을 들으시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 그런 새로운 해석이 었었구나! 하고 감동이 되십니까.
저는 이와 같은 주장을 보고 대단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무엇보다 성경 욥기 본문과 대조해 본다면 적지 않게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는 사이트가 의외로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어로도 검색을 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한글에 있었던 내용과 거의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문구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보고 베낀 것인지, 시작은 한국이 먼저인지 일본이 먼저인지, 아니면 영미권에 있는 주장을 단순히
번역해서 서로 베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을 마치 자기가 발견한 진리인 것처럼 적어 놓은 글들을 보니까 사실 조금
씁쓸했습니다.
자, 일단 본문에 대한 검토를 해보도록 하지요.
42장까지 있는 욥기 본문에 의하면 우선 욥기 1장에서 욥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와서 7일 동안 머무르고 있다가
3장부터 대화가 시작합니다.
이 대화는 무려 37장까지 문답 형식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37장에서 이 대화가 끝나고는 3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고
42장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지요.
자, 그런데 말이에요. 이 기간을 두고 30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3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느냐 하는 것이지요.
욥기 2장에 보시면 그의 친구들이 와서는 대화가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년에 한 번씩 와서 대화를 했다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물론 긴 대화이긴 합니다만, 거의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는 그 자리에 욥과 함께 방금까지 그와 대화를 하던 친구들도 그대로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는 7일 후에 대화가 시작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시는 42장
중반까지는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언제 왔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과연 욥에게 재앙이 시작하고 30년 뒤에 친구들이 나타났다?
물론 지금처럼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도 없었던 시대에, 욥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친구라잖아요. 그러면 어느 정도 왕래도 있던 가까운 사이 아니었겠어요?
욥기 2장에 의하면 친구들이 가엾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욥에게 재앙이 닥치고는 30년이
지나고서 나서야 위로하려고 왔겠냐 하는 것이지요.
애초에 이 주장을 의심하게 된 계기는, 아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번역본이라도 그렇지,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을 두고 하나는
고난의 시작이고 하나는 고난의 끝이 기록된 구절이다?
여기서부터가 좀 미심쩍지 않겠습니까.
사실 성경에서 연대나 나이에 대한 기록은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3장 1절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여기에는 사울이 왕이 될 때 나이가 사십 세라고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다른 사본에는 삼십 세에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외국
번역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를 근거로 해서 사울은 삼십 세에 사십 세까지 왕으로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앞서 욥기에 대한 해석은 마치 그런 식, 한 구절을 가지고 두 가지 식으로 해석을 해서
끼워 맞추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단서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요. 70인역 성경에서요? 아니면 다른 어떤 고대 자료에서요?
아니에요. 어디서 찾을 수 있었냐 하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 우리는 더욱 성경 본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죄에 대해서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는 책들이 세상에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현행법 법전에
<처벌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현행법 법전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경,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도 좋고, 금식도 좋고, 방언도 좋고 은사도 좋습니다만, 무엇보다 우리 믿음의 핵심인 성경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를 보면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욥기 7장 3절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7장 3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욥은 고난 한 가운데 있는 와중에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기간에 대해서 분명 ‘여러 달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이 몇 년 이상이었다면 그는 ‘여러 해째’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도 그렇고
대표적인 외국 성경 대부분이 ‘여러 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욥의 이 발언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고,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됨으로써 그의 고난도 끝이 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처음에 욥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친구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욥에게 와서 대화를 하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다는 식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욥이 고난 받았던 기간은 그에게 재앙이 시작되고 몇 개월 뒤, 아무리 길어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욥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여기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몇 개월이라고는 하지만, 왜 욥은 이와 같은 고난을 받았을까요.
물론 욥기 1장과 2장에 의하면 사탄이 하나님을 충동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하나님께서 그깟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시겠습니까.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연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그 수단으로 단지 사탄을 이용하셨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을까요.
오늘은 구약을 좀 많이 살펴보게 됩니다만, 다니엘서 5장을 잠시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뒤를 이어 벨사살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상들을 찬양하며 흥청망청 연회를 벌이고 있었더니,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더니만 벽면에 글자를 쓰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 글자 뜻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다니엘이 불려와서 그 글자를 해석하게 됩니다.
다니엘 5장 25절~28절
“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이 글자를 다니엘의 해석에 따라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어보고 세어보고 저울에 달아보니 벨사상 왕은 부족하여 왕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니엘 5장 30절~31절에 의하면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게 되고 왕위는 다리오한테 넘어가게 되고 맙니다.
자, 우리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속히 들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또한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꼭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만은 할 수가 없어요.
욥기도 보세요. 위로한답시고 모인 그의 친구들은 욥을 나무랍니다. 너나 네 자녀들한테 잘못이 있으니까 이렇게 벌을 받는 게
아니냐.
그러면 욥이 말하기를, 아니라니까, 정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니까. 그러면 친구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잘못이 없는데
이렇게 고난을 내리시겠느냐……이런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그의 아내는 말합니다.
욥기 2장 9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은 말하지요.
욥기 2장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비록 몇 개월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극심한 고난이, 그것도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난을 당하니 욥의 아내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니까 욥의 아내는 말합니다. 아무리 잘 믿어 봤자 이렇게 고난을 내리는 하나님 따위를 믿어서 뭐 하냐. 차라리 신앙이고 뭐고
다 버려버려라.
그런데 그와 같은 아내에게 욥이 하는 말이 사실 좀 흥미롭습니다.
욥은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예,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 같은 말을 한다”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욥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리석은 여자갈이
말한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욥기 1장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상당한 거부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돈만 많은 졸부가 아니었어요. 그의 믿음도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재산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던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집안인데 욥이 아무나 하고 결혼을 했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공부를 많이 한 재벌집에서 혼인을 한다고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서로 수준이 맞는 집안끼리 결혼을 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욥의 아내도 결코 어리석은 여인이 아닌, 역시 욥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그런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죄 없는 자신의 남편과 가정이 그토록 고난을 당하게 되니, 아무리 지식이나 교양이 있고 믿음이 있는 아내라고 해도
오죽했으면 그 정도로 심한 말이 나왔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십자가에 달려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와 같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세어보고 달아보고 계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래요. 더 큰 축복이 주어질 테니까 기뻐하라고 하는데, 그래요,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난 중에서 진정으로 기뻐하며 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건 저도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서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어서 회개해야 하겠지요.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1장 23절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를 바로 새우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야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한 가지, 소망은 잃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무엘상 2장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세어보고 우리를 달아보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33편 13절~15절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저 높은 보좌에서 우리를 굽어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세어보고 달아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채워 주실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고 계세요.
그러나 이를 믿지 못하니까 뭐예요? 예,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주님께 놀라운 믿음을 보여 드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부어 주실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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