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
2023년 5월 7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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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18절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7節∼18節
“17.なぜなら、神の国は食べたり飲んだりすることではなく、聖霊による義と平和と喜びだからです。
18.このようにキリストに仕える人は、神に喜ばれ、人々にも認めら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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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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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3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 キリストに仕える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여기서 한 가지 복습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말씀 중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여기에 등장하는 <음식>이라고 하는 단어는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이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좁게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요 넓게는 신앙 전반에 있어서의 가르침이라고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17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4장 17절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なぜなら、神の国は食べたり飲んだりすることではなく、聖霊による義と平和と喜びだからです。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나 교과서적인 가르침만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말씀에 대해서 짚어보고 넘어갈까 합니다.

여기에 보시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현대인의 성경에 보시면 좀 더 알기 쉽게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뭐, 뜻은 같다고 하겠지요.

의라고 하는 것은 그릇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평강은 다툼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희락은 슬픔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부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런 부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요. 항상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잘 되는 반면, 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잘 안 되어야 하는데, 세상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불만을 가지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툼도 그렇습니다. 사람간의 다툼도 그렇지만 가족간의 다툼, 조직이나 단체간의 다툼, 그리고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보면 알듯이 국가간의 다툼도 끊이지 않습니다.

슬픔은 또 어떻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고통,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를 생각하면 알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은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을 무렵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옥에 갇혀있던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5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行って、自分たちが見たり聞いたり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에나 불의가 사라지고 다툼이 사라지고 그리고 슬픔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임하시는 곳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쳐나요. 복음 전파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봅니다.

로마서 14장 18절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8.このようにキリストに仕える人は、神に喜ばれ、人々にも認められるのです。

여기서 나오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피스 메이커와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스>는 평화이고 <트러블>은 분쟁 다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고, <메이커>는 뭘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피스 메이커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트러블 메이커는 다툼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가기만 하면 모든 다툼들이 사라져요. 분쟁이 다 해결돼요. 그리고 그 당사자들이 다 만족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가기만 하면 그 곳에 다툼이 생겨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조용했었는데 이 사람이 거기 등장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럼 항상 피스메이커, 평강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만 가면 다툼이 생겨요. 그 때까지는 서로 화목했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편가르기가 일어나고 서로 분쟁이 생깁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지난 주처럼 아, 그러고보니까 누구는 그래. 그 사람만 나타나면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니까……라고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요? 다름이 아닌 내가 그럴 수 있지 않나 하고,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 교회 직분을 많이 가진 사람?


솔직히 이와 같은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피스 메이커가 아닌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경우도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니고 직분도 많이 받고, 기도나 금식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꼭 이 사람이 가는 곳에 문제가 생겨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바쁘거든요.

아~누구는 기도를 너무 안 해. 누구는 금식 좀 해야 되겠어. 누구는 은사를 못 받았어. 뭐 그러면서 이 사람을 판단하고 저 사람을 판단합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만 잘 났어요. 그러니 문제가 안 생기겠냐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무엇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たとえ私が人の異言や御使いの異言で話しても、愛がなければ、騒がしいどらや、うるさいシンバルと同じです。
2.たとえ私が預言の賜物を持ち、あらゆる奥義とあらゆる知識に通じていても、たとえ山を動かすほどの完全な信仰を持っていても、愛がないなら、私は無に等しいのです。
3.たとえ私が持っている物のすべてを分け与えても、たとえ私のからだを引き渡して誇ることになっても、愛がなければ、何の役にも立ち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네가 이 성경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지킨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다고 하는데, 눈으로 보이는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까.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까. 초신자가 비판해요? 주일학교 어린이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을 비판합니까. 아니에요. 자기 딴에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곧바로 자기한테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줄지 않아요.

그렇다면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그처럼 매사에 있어서 비판하려고 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남들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대우 받고 싶어서인 것이지요.


교회에서도 보면 뻑하면 이게 나쁘다 저게 잘못됐다 하면서 자기와는 직접적으로 상관도 없는 일에 대해서 간섭하고 지적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서 자기들은 뭐라고 하냐 하면 교회 걱정하는 마음에, 교회를 위해서 그런다고 해요.

그런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바로 정치인들이 그런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나라 걱정하는 마음에 나라를 위해서 그런다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대우 받고 싶기 때문에, 자기가 인정 받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맨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평화가 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가는 곳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 말에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기가 대우 받기 위해서 자기의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남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말은 무엇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예, 말이 아니라 그냥 소리 나는 꽹과리 같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그렇죠. 그 입을 빨리 다물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비판을 하고 그런 말에 대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설명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이제 할 말이 없으니까 뭐라고 할까요? 대뜸 하는 말이 너 몇 살이야? 너 교회에 나온 지 얼마나 됐어? 자식 건방지게 말이야……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처럼 외국에 나와 있으면 간혹 그런 사람들이 계세요. 일본에 온지 오래된 것을 무슨 대단한 벼슬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과 이야기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일본에 오신지 좀 된 것 같았어요. 7~8년쯤 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 일본에 오신지 오래되셨군요. 했더니만 그 순간 “아, 좀 오래됐죠……” 라고 하면서 목에 이렇게 좀 힘이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는 얼마나 살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어릴 때에는 12년간 살았고 이번에는 2015년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만, 그게 좀 못 마땅 했나봐요. 고개를 돌리면서 “에이, 완전히 일본 사람이네……”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제 이 말을 들으시고 “뭐 10 몇 년 밖에 안 됐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겠지요. 그럼 저는 그런 분들께 마음 속으로, 어디까지 마음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저보다 일본에 사신지 오래 되신 당신은 “아이우에오”를 정확하게 외우십니까. 그리고 정확하게 발음하실 수 있으십니까.

대체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분들은 단순히 그 나라에 얼마나 살았느냐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우에오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그 정도의 사람들, 또는 내세울 딱히 없는 사람들이 보면 간혹 남들을 비판하거나 차별하거나 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본다면 옛날에 봉건시대처럼 신문제도가 있는 사회에서도 양반이나 사무라이 같은 상위 계층 사람들이 서민들을 차별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해요. 그럼 누가 서민들을 차별하냐 하면, 같은 서민들끼리 서로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그래요. 정말 말씀을 많이 알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남들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항상 겸손해요. 그 이유가 뭐예요?

동어반복이 되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그 이유가 바로 말씀을 진정으로 많이 알고 여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46절~48절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さて、弟子たちの間で、だれが一番偉いかという議論が持ち上がった。
しかし、イエスは彼らの心にある考えを知り、一人の子どもの手を取って、自分のそばに立たせ、
彼らに言われた。「だれでも、このような子どもを、わたしの名のゆえに受け入れる人は、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す。また、だれでもわたしを受け入れる人は、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を受け入れるのです。あなたがた皆の中で一番小さい者が、一番偉いのです。」

마태복음 23장 11절~12절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で一番偉い者は皆に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지금은 어린이날도 있고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많이 향상되었습니다만, 사실 이것도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러니 예수님 당시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때는 미성년자는 물론이요 여자들은 사람 수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당시 사람의 숫자라고 하는 것은 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성인남성만 포함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전쟁을 할 수 이는 사람의 숫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나 여성은 결과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힘없는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건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면 누가 높이고 낮추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바로 주님께서 높이고 낮추시겠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 좀 이상한 말씀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욕심이 많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자기가 애써가면서 높아지는 것보다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 훨씬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란 단순히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듯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높이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진정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어디를 가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 이웃을 섬기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도록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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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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