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회 죄의 기원
2016년 12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6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죄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구약은 이야기들의 보물창고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있습니다. 모세에 의해 애굽에서 탈출한 기록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땅 정복은 우리에게 많은 힘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은 물론 훌륭한 일, 선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했는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인전도 아니며 윤리서도 아닙니다.
만약 위인전이나 윤리서였다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나쁜 점이나 부끄러운 부분은 완전히 없애고 멋진 부분, 자랑스러운 부분만 열거되어 있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실패담도 있나 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덴 동산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은 그야말로 완벽한 공간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일어난 홍수에 의해 모든 것이 흘러내려간 지금에 와서는 당시 에덴 동산의 규모나 형태는, 이 성경에 적힌 글로밖에 접할 수 없습니다만, 그곳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이 지구뿐만 아니라 전우주도 그 에덴동산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만드신 것들을 축복하십니다. 창세기 1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중에도 매우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우리 인간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라고 적혀 있는데, 이 한 구절은 매우 중요한 3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나’라고 하는 단수가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예수님도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은 그 아이가 뛰어나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자기와 닮았다, 자기 모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여러 가지 것들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만, 우리 인간만은 특별한 의도를 갖고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이처럼 본인의 형상을 닮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고 하는 피조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생물체들은 말씀만으로 만드셨지만,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이처럼 수고를 하시고, 정성을 담아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아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귀여워하는 이유를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낳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의학이나 생물학적 지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어머니와 아이의 혈액형이 항상 같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은 참 신기합니다. 물론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머니 혈액형이 O형인데, 그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는 A형이다, 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니까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라고 해서 아이를 자신의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죠. 바로 하나님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도 자기 자신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 생각하고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좀 빗나갔습니다만, 그토록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정성을 담아서 만들어주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여타 피조물과는 분명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세기 1장 22절에 보면,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라고 축복하셨을 뿐입니다만, 인간에 대한 축복은 어땠을까요.

창세기 1장 28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예, 뭐가 추가되었어요? 예, 첫 부분은 비슷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그 다음입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바다 물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른 생물들보다도 몸집이 큰가요? 힘이 센가요? 아니요, 인간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은 많습니다. 힘이 센 것도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와 같은 동물들에 의해 지배를 당하나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동물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인간들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그러나요? 아니잖아요? 반대로 우리 인간이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에덴동산도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고, 사람한테는 특별한 축복을 해주셨기에 영원하고도 평화로운 삶이 약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물거품으로 만든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오늘 말씀,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고, 그뿐만이 아니라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고 기록합니다만, 이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좀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건이 발생한 시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기원전 몇 년에 창조되고, 그리고 몇 년에 선악과를 먹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그 외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시까지 아이가 없었다는 것. 이는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 당시 그들의 생활에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물론 여러 많은 것들이 개발되어 옛날에 비하면 스마트폰이다 인터넷이다 하여 무척 편리해진 것 같습니다만, 그 반면 안 좋은 점은 없나요?
얼마 전에도 운전 중에 스마트폰을 썼다고 해서 사망사고가 일어났지요? 인터넷은 물론 편리하긴 합니다만, 사람한테 상처를 입히거나,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를 유포시켜서 민폐를 끼치게 하거나 하는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공장이나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공해나 사고에 대한 부작용이 끊이질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것들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어땠습니까. 그것은 완전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완전한 환경이었습니다. 흠집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신비함을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을 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에덴 동산을 거니셨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었기에, 마음껏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마음껏 하나님과 말씀을 나눌 수가 있었고,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던 장소입니다.
여러분, 이런 곳에 살고 싶지 않으세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레지 않으십니까?
그와 같은 정말 멋진,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그런 생활에 있을 때에, 무엇이 다가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뱀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뱀’이라고 하는 동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뱀의 몸을 빌려서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한테 속삭입니다.


창세기 3장 5절~6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말이죠, “아니, 그걸 도대체 왜 먹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 외에도 먹을 건 얼마든지 있지 않았냐. 하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 그뿐만이 아니라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그 열매를 먹는 것을 나무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와로부터 그 열매를 받아 들고는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사탄의 유혹에 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적힌 글을 보면, “그래, 어디 나도 한번 하나님처럼 돼보자”라고 하는,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는 강한 의지가 아무래도 느껴지질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그래서 따먹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정말로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보자, 하나님을 이겨보자, 라고 하는 거창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좀 먹어보고 싶다, 먹지 말라고 하니 더 먹어보고 싶다, 좀 혼날지는 모르지만 아마 괜찮겠지. 기껏해 봐야 그 정도 대수럽지 않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우선 그 나무열매를 먹은 그들에게 처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이 밝아져서 보였다고 하니까, 그럼 더 좋아진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벗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하나님 영광 안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머물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셨지만, 이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약속을 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자기 몸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힘의 한계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때에는 자기가 아무런 옷을 입고 있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문제없습니다.

다니엘 3장 27절에 보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극렬히 타는 풀무 속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속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다니엘 3장 27절,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져도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철저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보호가 아담과 하와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엮어서 자신들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보호에 비한다면, 인간의 힘으로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은, 지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깟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엮어서 자기 몸을 지키려 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받게 될 벌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6절~19절,
“v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v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죄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에덴 동산에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마도 “예? 설마…… 말도 안돼……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 그러고 그녀는 또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괜히 먹었다. 쓸데없이 그딴 걸 왜 먹었을까.”
하지만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심판은 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이런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라고 하면 잘 실감이 안 나실지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서 도박이나 마약 등은 어떻습니까. 불과 얼마 전에도 일본 유명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 불법도박이나 마약을 사용해서 경찰한테 체포되거나, 아니면 그 때까지 일구어놓은 사회적 지위를 한 순간에 잃거나 하는 뉴스를 듣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도박을 해야 할만큼 절박할 정도로 가난했다거나, 아니면 마약을 써서 쾌감을 맞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 케이스가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불법도박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이 많고, 마약을 쓴 연예인들도 유명인에다가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면, 역시 감사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돈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나요?

재력만 있으면 인생은 성공하나요?
아니요.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인간이 갖는 경제력 같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비하면, 그야말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볼품없는 치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소금물입니다. 돈을 더 벌어보려고 도박을 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느끼려고 약에 의존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인간의 모습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사람의 힘 만으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의지해도 되고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의 길이라고 믿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7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

← 제55회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