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회 오병이어의 두 가지 은혜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11절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6章 5節~11節
“5.イエスは目を上げて、大勢の群衆がご自分の方に来るのを見て、ピリポに言われた。「どこからパンを買って来て、この人たちに食べさせようか。」
6.イエスがこう言われたのは、ピリポを試すためであり、ご自分が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のかを、知っておられた。
7.ピリポはイエスに答えた。「一人ひとりが少しずつ取るにしても、二百デナリのパンでは足りません。」
8.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9.「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10.イエスは言われた。「人々を座らせなさい。」その場所には草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男たちは座った。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
11.そうし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座っている人たちに分け与えられ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彼らが望むだけ与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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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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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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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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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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