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1번째 시간으로서 “채워야 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독특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선 이 말씀에 의하면 더러운 귀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마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마귀는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땠냐 하면 이 사람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와 같은
사람들한테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을 우리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 말씀을 보시면 사람한테서 나간 이 마귀가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물 없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본래 마귀가 광야 같은 물 없는 곳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구는 정착할 곳이 없이 떠도는 것을 표현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서 나온 마귀가 쉼을 얻지 못했다고 한 점입니다.
마귀는 언제 쉼을 얻습니까. 말하자면 마귀는 언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로채서 자기들을 섬기게 만들고 자기들을 찬양하게 만들었을 때
마귀들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것이 우상숭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마귀는 자신을 섬겨줄 사람을 찾지 못했나 보죠?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그래, 구관이 명관이다. 밑져야 본전 식으로
어디 한 번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자 하고 본래 자기가 들어갔었던 사람한테 와봤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어 있었대요?
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그 사람한테 있을 때에는 얼마나 엉망진창이었겠습니까. 하지만 마귀가 나가자 청소되고 수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보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도 되고 수리까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귀가 이를 보고 아주 신이 났나 보죠? 그래서 지 혼자 들어가면 심심할까봐 그랬는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을 그것도 일곱
씩이나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어떻게 되었대요? 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 마귀가 처음에 그 사람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였는데, 이제는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얼마나 비참한 꼴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전보다 더욱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권세 잡은 자에게 하셨는지 아니면 일반 서민에게 하셨는지, 유대인에게 하셨는지 아니면 이방인에게 하셨는지 하는 점을
알아야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2장 14절에 의하면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바리새인들,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그 곳에는 모두 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비록 예수님을 믿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의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한테서 더러운 귀신 즉 마귀가 나갔다고 하시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사람한테서 악한 마귀가 나갈까요.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간다고 하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마귀는 사람한테서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사람한테서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님의 능력 만이 더러운 귀신 마귀를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처음에 마귀가 들어와 있었다가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는 기도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내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있던 더러운 마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갔어요. 그렇다면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병을 앓고 있었어요. 의사도 이미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 하나 소망을 주지 못했는데 주님의 능력으로 내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해보세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러운 귀신으로 인하여 엉망이 된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 주님, 이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어땠다고 적혀 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44절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마귀들이 나가서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소도 해주시고 수리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비어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본 마귀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친구들까지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마귀들의 습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이 비어 있으면 마귀들은 그 빈 틈을 타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마귀들의 습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기웃기웃 거리면서 빈집을 찾고 있어요. 그리고 빈집을 발견하면 지체없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베드로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요.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렇습니다. 마귀는 허기에 지쳐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같이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먹이를 찾는 것처럼 빈 집, 그 마음이 빈
영혼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귀들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34절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 들린 자가 얼마나 사나운지 그가 있는 곳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귀신에게
나가라고 하시자 귀신들이 말하기를 저기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더니 마귀들이 그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다고 기록합니까. 그렇습니다.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는 모두 죽어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마귀 사탄들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마귀 사탄들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면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잘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마귀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기 쉬운 것이 마약 아니겠습니까.
저는 뭐, 마약이나 대마초 같은 것을 해본적은 없습니다만, 나라에서 법률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 위험을
저지르면서 그리고 비싼 돈을 내가면서 마약에 손을 댑니까.
그것은 바로 쾌락이 있어서겠지요. 경험자 말에 의하면 그런 약물을 사용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라에서 그것을 금지시킵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그런 약물에 중독이 되어 버리면, 헛것이 보이고
난폭해지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본인에게 있어서도 뇌나 건강상에 있어서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끝내는 자기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멸망시켜버릴 수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요즘 거리에 보니까 그런 경고 문구가 있더라고요.
“마약은 시작이 끝입니다”
정말 맞습니다. 마약에 한 번 손을 대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은 멸망을 향해 돌진하고 마는 것이지요.
마귀나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은 그 마귀나 우상으로 인해서 쾌감을 느꼈다고 착각할 수는 있으나 결국 마귀를 섬기거나
우상들에게 무릎을 꿇게 되면 이는 시작이 아니라 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잘되고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 가는 우리의 마음을 도중에
가로채서 자기들을 섬기게 하고, 그리고 끝내는 마치 돼지 떼들을 바다로 빠뜨려서 몰살시키듯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설마 그 안에 마귀가 있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비록 지금 네 마음 안에 마귀가 있지는 않지만, 그 마음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라면 언제든지 마귀들이 일곱을 데리고 너희 마음 안에 들어가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행진할 때 항상 가지고 다녔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법궤라고도 하는 언약궤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분분합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가에 대해서 물으면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께서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있었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분께서는 아니다, 그 안에는 돌판만
들어있었다고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의견이 갈라지는 데에 있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먼저 신약부터 볼까요?
히브리서 9장 3절~4절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이 문맥으로 본다면 언약궤 안에는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인 열왕기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요.
열왕기상 8장 9절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여기에 보시면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244회인 2020년 7월 26일자 설교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만, 이 두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기진 두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의 구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5장 10절 이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모양새를 보면 비록 안과 밖을 금박으로 덮었으나 본래 재질은 조각목 그러니까 아카시아 나무로 된 상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약궤에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어서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그 안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화려한 장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놀라운 능력의 언약궤가 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겉보기가 화려하고 금박으로 도배를 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런 가치 없는
나무상자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가 머무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막 즉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40장에 보시면 이 성막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3절~38절
“33.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성막이 완성되자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고는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인도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도 좋습니다. 은사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없다면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인도해주지 않으세요.
하지만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낮이나 밤이나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비어 있다면 마귀들이 틈을 탈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성령님께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데 어찌 감히 더러운 귀신들이 우리를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마음 안을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완전하신 말씀이신 성경 말씀으로 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과
함께, 이기고 또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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