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회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
2023년 7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 19절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創世記 9章 19節
“19.この三人がノアの息子たちで、彼らから全世界の民が分かれ出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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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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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 再び始めら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제가 요즘 눈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교회 예배 인도를 쉬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오늘은 로마서 강해에서 잠시 벗어나 창세기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자손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유인원에서 진화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네안데르탈인이다, 크로마뇽인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성경적으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인류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냐 하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신약에 보시면 예수님의 계보가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누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에 등장하는 계보를 보시면, 마지막에 아담이 있고 그 다음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를 아담의 자손이라고 하기에는 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담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조상이 누구냐 라고 할 때에는 기왕이면 훌륭한 사람, 옛날 식으로 본다면 공을 많이 세운 사람, 벼슬이 높은 사람, 널리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조상으로 삼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을 조상이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아담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가인도 아담의 자손이 되지 않습니까. 가인이 누구입니까. 가인은 사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지요. 그러나 그는 동생 아벨에 대해 시기를 품습니다.

창세기 4장에 의하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형 가인이 바친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인은 불만이 폭발하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서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지요.

누구는 그래요. 가인이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흉악한 학살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의하면 당시 인류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 아벨을 살해했다는 것은 전인류의 1/4을 살해한 것이 되니 이보다 더 흉악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와 같은 가인도 아담이 조상인데, 우리까지 가인과 똑 같은 조상이라고 말하기가 좀 그러니까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하기는 좀 꺼려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자손일까요. 아담이 아니라면 그의 아들 셋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라면 장자인 가인으로부터 그 혈통이 이어지려고 했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첫째 아들 가인은 벌을 받아 헤매는 자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아벨은 살해당했고 해서, 결국 셋째 아들로 태어난 셋으로부터 인류가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인류에는 또다시 크나큰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지요. 그것은 바로 노아의 홍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神はノアに仰せられ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終わりが、わたしの前に来ようとしている。地は、彼らのゆえに、暴虐で満ちているからだ。見よ、わたしは彼らを地とともに滅ぼし去る。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전인류를 포함하여 하늘과 땅에 사는 생물들을 철저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환난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오로지 노아와 그의 가족인 총 8명 뿐이었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노아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보는 것도 타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도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창세기 9장 19절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この三人がノアの息子たちで、彼らから全世界の民が分かれ出た。


창세기 5장에 기록된 계보를 본다면 노아는 셋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홍수로 인해서 가인의 후손들은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인류가 죄로 물들어 버렸지요. 그래서 그 중의 노아와 그의 가족만 구원 받은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노아의 후손이다……라고 하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노아에게는 세 명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있었는데, 창세기 9장에 보시면 이 중에서 함의 자손이 잘못을 범하게 되어 결국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가리켜서 노아의 자손이라고 하기에도 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 과정에서 이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이름은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삶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삭을 축복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6장 4절~5절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そして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のように増し加え、あなたの子孫に、これらの国々をみな与える。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
これは、アブラハム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わたしの命令と掟とおしえを守って、わたしへの務めを果たしたからである。」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고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 중 마태복음 1장에 보시면 그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세요.


시편 139편 1절~4절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主よ あなたは私を探り 知っておられます。
あなたは 私の座るのも立つのも知っておられ 遠くから私の思いを読み取られます。
あなたは私が歩くのも伏すのも見守り 私の道のすべてを知り抜いておられます。
ことばが私の舌にのぼる前に なんと主よ あなたはそのすべてを知っておられます。


마태복음 19장 26절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彼らをじっと見つめて言われた。「それは人にはできないことですが、神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ます。」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이 없고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애초에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좀 제대로 만드셨다면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의 아들 가인도 좀 착하게 태어나도록 하셨다면 아벨을 죽이는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요. 신경 좀 써서 잘 지으셨다면 홍수로 말미암아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6장 5절~7절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図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それで主は、地上に人を造ったことを悔やみ、心を痛められた。
そして主は言われた。「わたしが創造した人を地の面から消し去ろう。人をはじめ、家畜や這うもの、空の鳥に至るまで。わたしは、これらを造ったことを悔やむ。」

아니, 잠깐만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고요? 예,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해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한탄을 하시고 근심을 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어요.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순종을 몇 번이나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サムエルは死ぬ日まで、再びサウルを見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サムエル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だ。主も、サウルを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ことを悔やまれた。

아니, 지금 누가 후회를 해요? 예,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셨다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는 어떨 때에 후회를 합니까. 우리가 어떤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섰을 때, 잘될 것을 예상하고 한 쪽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됐어요. 바로 그럴 때 아,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아니면 할 걸, 하지 말 걸, 하면서 후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야 미래를 알지 못하니까 선택을 잘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후회를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미래의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하나님은 전지전능이 아니라, 불완전한 하나님 아니시겠습니까.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푸는 열쇠는 바로 안식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神は第七(しち)日(にち)に、なさっていたわざを完成し、第七(しち)日(にち)に、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わざをやめられた。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는 7일째에 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즉 쉬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분명 하나님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럼 7일째에 쉬시는 하나님이신가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시편 121편 3절~4절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主は あなたの足をよろけさせず あなた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い。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노는 날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6일 밖에 일을 안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 날에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도 노는 날이라고 해서 도와주지 않으세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우리 앞길을 인도해 주지도 않으세요. 마귀가 공격을 해와서 살려 달라고 해도, 오늘은 하나님 노는 날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라고 하신다고 해보세요.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해요.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5장 14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

사실 주인은 자기가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자기가 쉬고 싶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쉴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일주일에 한 번은 쉬게 하라고 한다 하더라도 마음씨가 나쁜 주인이 하인은 쉬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평일에 일반 직원이 쉬기 위해서는 휴가계를 내고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사장님이 쉬겠다는데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법적으로 근로시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일부 회사에서는 위법한 초과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 사장님이나 상사의 지시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법이 있다 하더라도,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고, 걸린다 하더라도 그 벌칙이 가볍기 때문에 과로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그 직원한테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직원들에 대한 법정근로시간을 위반한 회사 대표는 사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모든 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이를 위반하면 100% 걸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일이 바쁘고 돈이 좋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초과근무를 시키는 사장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이처럼 엄하게 규정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사람 특히 약자를 위한 규정으로서, 힘이 없는 하인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확실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아담부터 시작해서 앞서 살펴본 내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인류가 타락했을 때, 모든 것을 진멸하고 새로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신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의 핵심을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 없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멸망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주시고,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해가면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멸하시는 것은 쉽지만 이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남겨두시고 다시 시작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후회할 일이 많습니까. 아,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것이 다 끝났어……라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세부적인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 되돌릴 수가 없어,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장이야, 그와 같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후회되니? 근심되니? 한탄스럽고 너무나도 괴로워 슬프니? 이제 끝이다? 아니야. 얘야, 나도 이렇게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지 않았니. 나도 후회하고 근심하고 한탄했잖니. 그러니까 괜찮아. 자, 일어나. 아직 끝이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 나와 함께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후회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모든 것이 끝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구원해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 수치, 좌절, 절망, 이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절망 가운데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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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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