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회 섬기는 사랑
2023년 4월 3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2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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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16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5節∼16節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16.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良いとしていることで、悪く言わ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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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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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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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2번째 시간으로서 “섬기는 사랑” 仕える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미리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15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좁게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요 넓게는 신앙 전반에 있어서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 이웃이 신앙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이웃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 이웃이 못나서 그렇대요? 아니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웃이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나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내 이웃이 힘들어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쉬울까요? 어쩌면 많은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이 부분은 나와 상관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최소한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힘들게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쪽으로는, 그래 누구는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한 적이 없지만, 저 사람이나, 아니, 저 사람은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해요.

예전에 어떤 분한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군대를 본다면, 지금은 군대문화도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만, 옛날에는 군대에서의 폭력이 심각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무슨 군대얘기라도 나올 것 같으면, 아, 내가 군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는데, 아 그 때는 이렇게 많이 맞았다, 저 때는 저렇게 많이 맞았다, 뭐 다들 그런 말을 많이 한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누구 하나 “나는 이렇게 때렸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다 자기는 억울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누군가를 때리거나 한 것은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은 하지만 차마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게 한국 군대의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를 하실 때 보면 그런 말씀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 몇 번 들어봤습니다.

제가 교회에 나오시라고 말하면 그 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좋다는 것 알고 예수님 좋다는 것 안다는 거예요. 하지만 교회에 있는 그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서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교회가 어디 한 군데도 아니고 이 교회가 좀 그러면 다른 교회를 나가보시면 되잖아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다른 여러 교회를 다녀봐도 다 똑같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그 때부터 교회는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는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저도 어떻게 할 말이 없어요. 차라리 예수님이 뭔지 모르니까 못 믿겠다거나, 아니면 성경이 뭔지 모르겠다거나 하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지요.

그런데 자기가 여러 교회에 나가봤지만 거기 다니는 사람들한테 질려서 더 이상 나가기가 싫다고 하면 정말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뭐예요? 예, 하지만 나 때문은 아니야. 나 꼴 보기 싫다고 해서 안 나오는 사람은 없어……우리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 그래, 나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에 안 나온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안 나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뭐예요? 예, 내가 상처를 받았으면 받았지, 나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은 없을 거야……하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군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군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우리나라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의 장군이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리시나요? 예,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유능한 전술가이자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술도 탁월했다고 하지요.

용병술이라고 하면 그 중의 하나가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뭐 굳이 군대가 아니라 회사를 비롯한 모든 조직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지요.


나폴레옹은 군인을 다룰 때에 네 가지로 분류를 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첫째는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
둘째는 유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
셋째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
넷째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

이렇게 분류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는 지휘관에 적합하다고 해요. 그렇겠죠. 머리도 좋고 행동력이 강합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명석한 판단력과 강한 행동력을 바탕으로,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해가면서 적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유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는 어떻습니까. 머리는 참 좋은데 실제로 사람을 부리거나 사람들 앞에 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면에 있어서는 좀 약해요. 그런 사람은 후방에서 작전참모를 맡기면 좋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을 다루거나 할 필요 없이,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치밀한 작전을 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행동력이 없지만 유능한 사람은 그와 같은 임무에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셋째로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사람은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이런 사람은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 밑에 넣으면 아주 좋습니다. 유능하지 못하니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라요. 그리고 행동력도 부족하니까 자기 힘으로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요.

바로 그럴 때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지휘관이 있어서 그에게 명령을 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사람은 전방에서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 밑에 배치를 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능하지만 행동력이 강한 사람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여러분이 나폴레옹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 무능하지만 행동력이 강한 사람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 것 같으십니까.

무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말합니다.

그 자를 지금 당장 죽여라.

今すぐ殺せ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조직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기라도 한다면 자기 멋대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않거든요.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으면 조직을 위해서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하겠지요. 그러나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무익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길을 포장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은 정해진 계획에 따라서 자갈들을 걷어내고 길을 닦은 다음에 시멘트를 덮어요. 유능하고 행동력이 없으면, 자기가 직접 일을 하지 않더라도 설계도와 실제 공정을 비교하면서 진척 상황을 확인해요.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는 사람은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서 일을 억지로라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시키지 않은 다른 일은 안 해요. 왜냐하면 그만한 행동력이 없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막 이것저것 벌여놔요. 기껏 깨끗하게 시멘트를 덮어놨더니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 한 가운데를 저벅저벅 걸어가요. 왜냐하면 무능하지만 행동력은 넘치거든요. 이런 사람은 조직에 있어서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더구나 군대라고 생각해보세요. 자칫하면 이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자기 편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죽여버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삼국지에 보시면 읍참마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때는 후한 말, 재갈공명의 예측대로 천하는 조조가 지배하는 위, 손권이 지배하는 오, 그리고 유비가 지배하는 촉, 이렇게 세 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재갈공명은 북으로 군대를 진군시키는데 그 때 핵심이 되는 요충지가 바로 가정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 가정이라는 곳을 점령하기만 하면 북진을 해서 위나라를 공격할 교부도를 확고하게 할 수 있지만, 만약에 이 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촉나라에 있어서는 크나큰 타격을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전투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이 중요한 전투에 그가 그 동안 아끼던 마속을 투입시킵니다. 공명이 인정할 정도인데 얼마나 유능한 장군이었겠습니까.


이제 출전하려는 마속에게 공명이 말하기를 산이 아니라 반드시 도로에 진을 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마속은 전쟁터에서 이를 듣지 않아요.

“제아무리 공명이 탁월한 승상이라고는 하나, 세상에 도로에 진을 치는 병법은 내가 듣도 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명의 명과는 달리 산자락에 진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냐 하면, 결국 위나라의 장합에 의해서 대패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속이 공명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서 촉나라의 멸망은 앞당겨지게 되고 맙니다.

이 결과를 두고 공명은 어떻게 합니까. 비록 자기 자식처럼 아끼던 마속이긴 하지만, 명령을 어기고는 패배하고 돌아온 마속에 대해서 군법을 어겼다고 해서, 울면서 목을 칩니다. 그게 바로 읍참마속이라고 하는 뜻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조금 행동력이 없어서 그저 하라는 대로 하는 장군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얄팍한 자기 지혜를 믿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나폴레옹은 18세기에서 19세기 사람이고, 제갈공명과 마속은 서기 3세기 사람인데, 그보다도 훨씬 전인 예수님이 벌써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 혹시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かけられて、海の深みに沈められるほうがよいのです。

이 말씀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마태복음 18장 6절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죄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에 큰 맷돌짝을 달아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


자, 우선 여기에 연자맷돌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맷돌은 알지요.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것을 맷돌이라고 합니다만, 연자맷돌은 뭐냐 하면, 그것보다도 훨씬 커서 당나귀 같은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맷돌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대하여 목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형벌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시키는 길 바에야 그렇게 큰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사실 그렇잖아요. 어린애 하나한테 잘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싶습니다만, 주님께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죄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이와 같은 말씀은 마태복음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また、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むしろ、大きな石臼を首に結び付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ほうがよいのです。

누가복음 17장 1절~2절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つまずきが起こるのは避けられませんが、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はわざわいです。
その者にとっては、これら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より、ひき臼を首に結び付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るほうがましです。

이처럼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복음서를 쓴 필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반복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족하게 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을 버리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また、人の子に逆らうことばを口にする者でも赦されます。しかし、聖霊に逆らうことを言う者は、この世でも次に来る世でも赦されません。

여기서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어떤 죄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는 곧 성령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지 못할망정, 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신앙을 저버리게 했다면 그 죄가 어떻게 가볍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아닌지 어디 한 번 확인을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하나님을 섬기신다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웃을 섬기십니까. 이웃을 섬기신다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섬기다”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평소에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중요하게 생각하다? 소중하게 생각하다? 정말 그것이 정확한 뜻일까요?


국어사전에 보면 <섬기다>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우러러 떠받들다. 공경하다.”

目上の人のそばにいて、その人に奉仕する。

자, 그렇다면 쉽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상대방을 떠받들거나 공경하기 위해서는 나는 그 사람의 위에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아래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 자기가 상대방을 우러러 떠받들기 위해서 자기는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겠지요. 공경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러러 떠받들고 공경했나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뭐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신발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거든요. 말하자면 샌들 같은 신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다가 당연히 대부분의 길은 비포장도로에요. 그러니까 발이 얼마나 지저분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발을 씻는다는 일은 오로지 하인이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13장 13절~15절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先生』とか『主』とか呼んでいます。そう言うのは正しいことです。そのとおりなのですから。
主であり、師であるこの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であれば、あなたがたもまた、互いに足を洗い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し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するようにと、あなたがた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

예수님은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제자들의 하인이 되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주님보다 높은 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그 분은 우리보다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しなさい。」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아무리 낮아져서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하인이 있다 하더라도, 주인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하인보다도 더욱 낮아져서 마침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을 정도로 우리를 섬겨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이웃을 이 정도로 우러러 떠받들었던가요?

오히려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해주기보다도 이웃이 나한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웃을 존중해주기보다 나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까.

차라리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무능하고 행동력만 넘치지 않았습니까.

신앙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는 바로 말씀을 몰랐다는 뜻을 말합니다.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기가 믿음이 좋은 척, 신앙이 많은 척을 해가면서 우리 이웃을 힘들게 한 적은 없으신가요. 기도해라, 금식해라, 철야해라, 헌금해라, 전도해라 하면서 강요함으로써 우리 이웃에게 부담을 지우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に指一本触れようとはしない。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힘든 일을 강요합니다.

그야말로 외유내강이 아닌 외강내유.

자기한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한테만 엄격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높은 자리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0절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자리의 위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어느 때에든지 다른 이웃 형제 자매들보다 낮은 곳에 있음으로 해서, 상대방을 오히려 섬기는 데에 힘쓰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장 16절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6.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良いとしていることで、悪く言わ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우리가 가진 이 믿음, 우리가 전해야 할 이 복음은 너무나도 선하고 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되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비방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만에 하나,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예수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우리가 목에 돌멩이를 매달고 물로 뛰어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을 봅니다.

잠언 6장 6절~8절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怠け者よ、蟻のところへ行け。そのやり方を見て、知恵を得よ。
蟻には首領もつかさも支配者もいないが、
夏のうちに食物を確保し、刈り入れ時に食糧を集める。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잠언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지혜로 넘쳤던 솔로몬 왕의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만, 지혜가 있으면 한낱 개미를 보고도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개미 앞에서도 겸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교만하게 굽니다. 뻑 하면 자기를 무시한다, 자기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아~ 기도하라고 해요. 금식하라고 해요, 아니, 왜 그런 말을 함부로 해가면서 사람한테 상처를 주냐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야말로 말씀을 모르는 무능이면서, 불필요한 행동력이 있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이 그래, 저 사람이 그래……라고 한다면……이건 곤란하겠지요.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비쳐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혹시라도 나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온다든지 나 때문에 신앙을 버렸다든지 그런 사람이 있을 확률이 0.1프로라도 된다면, 지금이라도 주님 앞에 우리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 앞에서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낮아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나보다 낫다. 이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솔직히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능력으로 보았을 때 개미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미 앞에서도 그래, 개미야, 네가 나보다 낫다……라고 하니까 그 속에서 지혜가 보인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 위에 군림할 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보다 낮아질 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실 정도로 섬겨주신 주님을 본 받아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섬기듯 우리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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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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