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회 양식과 음식
2023년 4월 23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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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15절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4節∼15節
“14.私は主イエスにあって知り、また確信しています。それ自体で汚れてい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ただ、何かが汚れていると考える人には、それは汚れたものなのです。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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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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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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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1번째 시간으로서 “양식과 음식” 二つの食べ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고, 그리고 다음 주는 여기에 더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우선 먼저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4.私は主イエスにあって知り、また確信しています。それ自体で汚れてい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ただ、何かが汚れていると考える人には、それは汚れたものなのです。

자,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속되다>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속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14절
“내가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음식 자체는 더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습니다.”

즉 <속되다>라는 말의 뜻은 더럽다 즉 불결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더러운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5장 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口に入る物は人を汚しません。口から出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이건 뭐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사도행전에 보시면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9.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10.彼は空腹を覚え、何か食べたいと思った。ところが、人々が食事の用意をしているうちに、彼は夢心地になった。
11.すると天が開け、大きな敷布のような入れ物が、四隅をつるされて地上に降りて来るのが見えた。
12.その中には、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がいた。
13.そして彼に、「ペテロよ、立ち上がり、屠って食べなさい」という声が聞こえた。
14.しかし、ペテロは言った。「主よ、そんな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15.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16.このようなことが三回あってから、すぐにその入れ物は天に引き上げられた。


베드로가 기도를 하고 있었더니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를 보니까 온갖 생물들이 다 들어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말소리가 들러오기를 일어나서 잡아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거기 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이는 이 베드로의 말을 보시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보고 말하자면 기겁을 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먹으라고 하는데, 자기는 먹지 못하겠다고 해요.

그럼 베드로는 왜 먹지 못하겠다고 했을까요. 무슨 음식 알러지가 있어서요? 아니요.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고기잡이 어부 출신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많이 배우지는 못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도 역시 유대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철저하게 지켰을까요. 그것은 바로 율법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율법에 정해진 대로 할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 있어서도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많이 배운 사람들만이 지키는 것이 아닌, 거의 상식처럼 아주 뼛속까지 배인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 아니겠습니까.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곳을 보면 정말 세부적인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먹어도 되는 것, 먹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율법도 포함되어 있는데, 베드로가 여기서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않았다. 이게 잘못한 것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때 베드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면서 칭찬 받았을까요?


사도행전 10장 15절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5.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베드로가 기대했던 말과는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네가 네 마음대로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 상황은 본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만 믿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있어서 상당히 차별을 하고 있었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사상, 말하자면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전도는커녕 말도 서로 하지 않을 정도로 차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이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비로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언제는 율법을 통해서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이제 그걸 안 먹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는데 왜 안 먹냐고 혼 내십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하겠지요. 먹지 말라고 하셨던 때와 이제 먹으라고 하셨던 때,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구약에 보시면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해서 속죄제다 속건제다 하면서 여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내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불결해졌는데 제사를 통해서 내 죄를 용서 받으려고 양도 바치고 염소도 바치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는 죄를 없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율법에 얽매여서 이것은 속되다 이것은 속되지 않다고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쓰는 시기는 여전히 과거의 율법과 지금의 복음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 14절에서는 흥미로운 말씀이 있지요. 자기가 속되다고 생각하고 여기면 속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상으로 본다면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었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적으로 부정한 것이냐 하면, 아니에요.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 이후에는 정결해졌습니다. 마음 놓고 드셔도 되요.

하지만 율법에서 금지된 음식을 내가 먹음으로 인해서 내가 율법을 어기겠다. 하나님을 버리겠다, 신앙을 버리겠다,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먹는다면 그것은 부정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이 말씀을 1차적으로 본다면, 우리 이웃이 율법에 금지된 음식을 먹는다는 일에 대해서 근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그 이웃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이웃에 대해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 우리 이웃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쁜 소식,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이웃들을 무엇으로 망하게 하지 말게 하라고 해요?

<음식>으로? 아니에요. <네 음식>으로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14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 스스로 더러운 것은 없다고 하잖아요. 말하자면 스스로 불결한 음식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냥 <음식>이 아니라 <네 음식>이 불결할 수는 있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네 음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가 만든 음식이라는 뜻인가요?

자, 우리 한 번 복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려고 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이에요? 아니면 유대인들이에요?

예, 유대인들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니까 죽여야 한다고들 주장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보면 예전에 어떤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이건 제가 재수할 때 어떤 기숙사에 들어가 있을 때에 목격한 일입니다. 아니, 뭐, 그렇다고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보통 일반 독서실을 보면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씩 고정이 되어 있는데, 그 때 거기는 좀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할까요? 마음대로 의자를 옮겨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 의자 중에 보면 좀 눈에 띄는 의자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는 대부분이 그냥 나무 의자였는데, 그 의자만은 하이팩 의자라고 하지요? 얇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등받이에 탄력이 있는 의자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그 독서실에 있는데, 어떤 학생이 그 의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학생이 들어와서 그 의자를 쓰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 좀 이상하잖아요. 아니, 다른 의자들도 많고 빈 자리도 많은데, 다른 사람이 쓰고 있는 의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의자를 내놓으라는 사람이 선배 같지도 않아요. 나이또래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앉고 있는 학생이 말하기를, “어? 이거 제가 맨날 쓰는 의자인데……”라는 것이에요. 아니, 내가 맨날 쓰는 의자이고, 지금도 내가 쓰고 있는 의자인데 이걸 내놓으라는 건 좀 이상한 게 아니냐……라는 말이었겠지요.

뭐, 그 학생이 평소에 쓰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제가 알 수야 없지만, 적어도 지금 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의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야, 이거 또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다음에 그 의자를 내놓으라는 학생의 딱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요. 이 학생, 뭐라고 했을까요.


딱 여섯 글자였습니다. 뭐라고 했냐 하면,

“이 의자, 내 건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의자는 내가 돈 주고 산 거야. 이 의자의 주인은 나야. 아무리 네가 자주 썼다 하더라도 그건 내 의자를 내 허락 없이 네가 쓴 거나 마찬가지야.” 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니 아무리 평소에 내가 자주 썼었다고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주인이 나타났는데요. 어쩔 수 없이, 아, 죄송해요……라고 하면서 슬그머니 일어나더라고요.


누가복음 6장 1절~5절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穂を摘んで、手でもみながら食べていた。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
どのようにして、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はだれも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取って食べ、供の者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人の子は安息日の主です。」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안식일을 어긴다면서 비판을 해요? 안식일에 이걸 하면 안 된다, 저걸 하면 안 된다 하면서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해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너희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야.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진정한 주인을 가르치려고 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음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림 같은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유명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면 뭐 한 둘이 아닙니다만, 그런데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똑 같은 그림인데 그 그림이 실려있는 책이나 포스터 같은 것을 보면 서로 색이 다르다고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다른가 했더니만, 얼마 전에 출판 전문가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 분에 의하면 색을 똑같이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잡지사 출신이었는데, 자기가 신입사원 때 교육을 받기 위해서 인쇄소에 갔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당시 <인쇄의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사람한테서 들은 말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 하면, 어떤 그림을 화보로 만들 때에 본다면, 사진에 70, 인쇄에 70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본래 그림을 사진으로 찍으면 그 품질 그러니까 색깔은 원본의 70%밖게 구현을 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인쇄를 하면 거기서 또 70%밖에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처음 사진에 찍을 때 70%가 되고, 인쇄할 때는 그 70% 중에서 70%라고 하니까 몇 프로입니까. 77이 49이니까 49%, 그러니까 마지막에 인쇄할 때에는 원화의 절반도 안 되는 49%밖에 나타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건 아무리 좋은 기계나 잉크나 종이를 쓴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49%보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몇 십 년 뒤에 그림 쪽 편집 일을 하게 되었었는데, 실제로 자기가 직접 가서 같이 작업을 해보니까 정말 그렇더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지금의 디지털 기술로 한다 하더라도 별반 차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 직접 가서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70%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만능은 아니라고는 합니다만, 저는 이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성경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는 믿음이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에 있어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여러분께서는 몇 프로 정도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통틀어서, 솔직한 심정으로 내가 70% 정도라도 올바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포함해서라고 생각해야 되겠지요.

감히 외람되지만 넉넉잡아 70%라고 해보죠. 제가 성경의 70%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성경말씀을 제가 여러분께 전할 때에는, 그럼 제가 이해하고 있는 70%를 100% 전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100%를 모두 전한다고 해봐야 성경 원본의 70%잖아요.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도 본래 예정했던 내용을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1시간이 넘어갈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면 이 또한 넉넉잡아서 70%만 전해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 제가 여러분께 전해드린 것은 49%밖에 안 되겠지요?

그러면 제가 드린 말씀을 여기에서 70%만 이해하셨다고 한다면, 49%의 70%는 34.3%에요. 그럼 제가 드린 말씀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 말씀을 듣고 이해하신 것이 34.3%라고 한다면 거기 중에서 70%를 전하게 되었다고 하면, 34.3%의 70%는 24%밖에 안 된다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만 믿게 된다면 그 지식은 34.3%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그건 24%밖에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는 이것 만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24%를 전하게 된다면, 성경 전체에 있어서 24%만 전한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릅니다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되냐 하면, 24%의 성경 지식이라면 100%중에서 몇 프로가 남아요? 100 빼기 24는? 예, 76프로가 남지요.

그렇다면 이 76프로가 뭐가 되냐 하면, 바로 자기 생각, 자기 해석, 자기 주장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가지라고 신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율법의 종류는 무려 2134개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2134개 중에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개수인 613개를 빼면 1521개가 됩니다.

그럼 1521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613개밖에 안 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1521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각, 자신들의 생각을 넣은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어떤 숫자가 나오냐 하면, 2134개 중에서 613는 28%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그들이 주장했던 율법 중에서 진정으로 성경에 따른 율법은 30%도 안 되고, 나머지 70%가 넘는 가르침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해석, 자기들의 주장이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네 음식>이라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6장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それは、人の子が与える食べ物です。この人の子に、神である父が証印を押されたのです。」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화를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 그림을 직접 봐야지만 그 그림의 색감이나, 유화의 경우에는 그 붓의 흐름까지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원화를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내가 있는 나라에 그 그림이 온다면 그나마 볼 기회라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있는 그림이라면 적지 않게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야만 들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바로 우리가 가진 성경을 펼치면 됩니다. 성경을 펼치시는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 머리 속에서 나온 내 음식, 내 생각, 내 주장, 내 해석이 아닙니다. 30%가 아니요. 70%가 아니에요. 우리는 100%의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100%의 참된 양식, 참된 말씀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100%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리고 성령님을 알게 되어, 100%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100%의 하나님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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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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