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2023년 4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0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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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13절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0節∼13節
“10.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11.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すべての膝は、わたしに向かってかがめられ、すべての舌は、神に告白する。」
12.ですから、私たちはそれぞれ自分について、神に申し開きをすることになります。
13.こういうわけで、私たちはもう互いにさばき合わ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いや、むしろ、兄弟に対して妨げになるもの、つまずきになるものを置くことはしないと決心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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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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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0번째 시간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隣人の愛し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는 전혀 생소하지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로마서 14장에만 보더라도 이미 몇 번이나 등장했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14장 1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 3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4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판단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모든 무릎이 하나님 앞에 꿇게 될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내가 자백을 안 하면 하나님이 모르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 앞에 펼쳐진 그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군가의 죄에 대해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에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도 죄가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지요?


마태복음 7장 1절~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 눈에는 큰 기둥만한 들보가 들어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작은 먼지만한 티를 지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그 들보부터 빼라, 그 다음에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내 눈 속에 박힌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기서의 들보와 티라고 한다는 것은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큰 잘못과 작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기한테는 큰 잘못이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 이웃들한테 있는 작은 잘못을 가지고 그것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 이웃들의 그 작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해결하라고 하시잖아요. 그런 다음에 우리 이웃의 작은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중에서 우리 스스로의 큰 잘못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의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잖아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의인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의인이 있다면 누가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까. 그렇죠.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일부 사람이나 대다수의 사람이 아니에요.

30%나 90%가 아니라 10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값 없이 의롭게 되어, 구원 받을 자격, 천국 백성이 될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아무리 겉으로는 착한 척, 젊잖은 척을 한다 하더라도 그 누구 하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똑 같은 죄인끼리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요,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교회에서는 자꾸만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선 죄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에 보시면 알기 쉽습니다.


우선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를 볼까요?

1.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第1戒「あなたには、わたしのほかに、ほかの神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第2戒「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
第3戒「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御名を、みだりに唱えてはならない。」
第4戒「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日とせよ。」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어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어떻습니까.

5.네 부모를 공경하라.
6.살인하지 말라.
7.간음하지 말라.
8.도둑질하지 말라.
9.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第5戒「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第6戒「殺してはならない。」
第7戒「姦淫してはならない。」
第8戒「盗んではならない。」
第9戒「あなたの隣人に対し、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第10戒「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

이처럼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우리와 우리 이웃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우선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간에 반드시 <상대방과의 관계>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라고 하는 것도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이웃이라고 하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해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쩌면 이해하기가 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웃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좀 어려울 수 있으니까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다시 한 번 보시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쉽게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어기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공통점을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반대로 하나하나 다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5.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
6.살인을 한다.
7.간음을 한다.
8.도둑질 한다.
9.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한다.
10.네 이웃의 집을 탐낸다.

第5戒「あなたの父と母を敬わない。」
第6戒「殺人を犯す。」
第7戒「姦淫を犯す。」
第8戒「盗みを犯す。」
第9戒「あなたの隣人に対し、偽りの証言をする。」
第10戒「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る。」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우선 1차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 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공동체가 있지요. 거기서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공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그 공동체가 건전하게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도 마찬가지지요. 살인을 하게 되면 당사자에게는 물론이요 그 가족이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됩니까.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한 연애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혼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연애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벗어난 대상과 연애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연애대상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게 됩니다.

도둑은 이웃에 대한 금전적이나 재산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또한 우리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고 증언을 하게 된다면 자칫, 무죄한 사람이 벌을 받을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있어서의 이 탐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실 이 탐심이라고 하는 것은 제1계명부터 제9계명까지를 모두 범할 수 있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탐심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는 것이요, 내 탐심 때문에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그리고 생명이나 재산상의 손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더욱 간단하게 죄에 대해서 정의를 하자면,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것이요, 내 가족이나 이웃을 가볍게 여기고 생명이나 재산 또는 윤리적인 죄를 저지르는 일은 모두 이웃을 배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별히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야 하는 교회에서 왜 이웃사랑이 사라져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평신도 때 교회에 다니면서 그래도 설교 말씀도 많이 듣고 그랬을 텐데, 이건 제 기억력이 딸려서 그런지 몰라도, 특별히 이웃사랑에 초점을 맞춘 말씀은 그리 많이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나 축복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어요. 기적이나 은사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딱히 기억에 남는 설교 말씀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성경을 한 번 보시면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 넘쳐납니다.

우선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씀을 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둘째도 그와 같으니”가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이는 두 번째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중요하고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이웃과 화목하는 것.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하냐 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왜 형제한테 원망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네 형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네 형제를 배신했기 때문에, 즉 네 이웃에 대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에 예배를 드리려다가 그런 일이 생각나거든, 예배보다도 어서 이웃과 화목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나한테 있는 것을 다 퍼준다거나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건 오히려 사랑이 아니지요.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愛は寛容であり、愛は親切です。また人をねたみません。愛は自慢せず、高慢になりません。
礼儀に反することをせず、自分の利益を求めず、苛立たず、人がした悪を心に留めず、
不正を喜ばずに、真理を喜びます。
すべてを耐え、すべてを信じ、すべてを望み、すべてを忍びます。

이 유명한 구절을 많은 사람들은 자꾸 결혼생활이라고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좁은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자기 배우자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한 말씀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오랫동안 가졌던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 동안 혼자서만 고민하다가 결국 어느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진 문제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도대체 왜 자기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이해해 줄 것인가 하는 마음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한테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다행히 이 사람이 상담을 한 변호사는 아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그 변호사한테 자신의 문제를 다 털어놓으면서 “저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만 그 변호사가 그러더라는 거예요. “괜찮아요. 사람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 상담을 했던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말 한 마디에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털어놓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말이 지금도 제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말씀처럼 오래 참고 온유함을 가진다면, “그래, 사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저 사람이 나한테 저렇게 심한 말을 하거나 했다 하더라도, 그래,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야……. 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편해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이 말씀,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며 남을 저울질하는 것만큼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

우리가 저울질 하는 것만큼 우리도 저울질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한테 우리가 저울질을 당할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저울질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웃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래 괜찮아. 사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라고 한다면, 우리 주님도 우리의 잘못을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해서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고 저울질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아니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고 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오늘 말씀 중 로마서 14장 10절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0.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남은 삶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와 자비로운 헤아림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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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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