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회 나오라고 하시는 주님
2023년 4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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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9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7節∼9節
“7.私たちの中で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生きている人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ぬ人もいないからです。
8.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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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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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9번째 시간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주님” 出て来なさいと言わ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9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4章7節~9節
7.私たちの中で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生きている人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ぬ人もいないからです。
8.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자, 성경에 보시면 정말 은혜로운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한 구절을 읽으면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도 있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때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데, 이 말씀에 진정으로, 아, 맞습니다. 하는 마음이, 글쎄요. 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뭐, 편하게 생각해봐요. 뭐, 누구를 위해 사느냐 뭐 그런 좀 어려운 말을 하면 골치 아플 수도 있으니까, 한 번 쉽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예금이 있지 않습니까. 많든 적든 간에 있잖아요? 그거, 누굴 위한 것입니까.

솔직히 나를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아니, 어떻게 그게 나만을 위한 돈이냐. 우리 가족을 위해, 우리 자녀를 위해 모아 놓은 재물이 아니냐 하고 말씀하시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거기에서 차지하는 <나>의 비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돈이 있는 곳이 어디 은행 뿐이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가족 몰래, 자기만의 돈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요. 다른 돈은 몰라도 그건 자기 몫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요즘 일본에 살러 오는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보면, 왜 미국에서 살게 되었냐고 하면 대부분 자녀 교육을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자녀 교육은 무슨. 솔직히 자녀 교육이라기 보다는 대부분이 자기들이 살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 나를 위해 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내 삶이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래요. 조금 범위를 넓혀 본다 하더라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서 산다……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뭐 죽어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 죽는다……라고 하면 좀 무서우니까, 그냥 우리가 살아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 산다……이상한가요? 그 정도로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말씀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에요. 이 부담스러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안 믿어지더라도 아멘 하고 그냥 믿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글쎄요. 그런 게 정말 믿음이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믿음이라기보다는, 성경적으로 본다면 외식, 그냥 겉치레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 16장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일단 누가복음 16장 1절~9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9절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イエスは弟子たちに対しても、次のように語られた。「ある金持ちに一人の管理人がいた。この管理人が主人の財産を無駄遣いしている、という訴えが主人にあった。
2.主人は彼を呼んで言った。『おまえについて聞いたこの話は何なのか。会計の報告を出しなさい。もうおまえに、管理を任せておくわけにはいかない。』
3.管理人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主人は私から管理の仕事を取り上げようとしている。土を掘る力はないし、物乞いをするのは恥ずかしい。
4.分かった、こうしよう。管理の仕事をやめさせられても、人々が私を家に迎えてくれるようにすればよいのだ。』
5.そこで彼は、主人の債務者たちを一人ひとり呼んで、最初の人に、『私の主人に、いくら借りがありますか』と言った。
6.その人は『油百バテ』と答えた。すると彼は、『あなたの証文を受け取り、座ってすぐに五十と書きなさい』と言った。
7.それから別の人に、『あなたは、いくら借りがありますか』と言うと、その人は『小麦百コル』と答えた。彼は、『あなたの証文を受け取り、八十と書きなさい』と言った。
8.主人は、不正な管理人が賢く行動したのをほめた。この世の子らは、自分と同じ時代の人々の扱いについては、光の子らよりも賢いのである。
9.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不正の富で、自分のために友をつくりなさい。そうすれば、富がなくなったとき、彼らがあなたがたを永遠の住まいに迎えてくれます。

이 말씀을 볼 때는 마지막 9절에 나오는 “불의의 재물(不正の富)”이라는 점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말들을 듣습니다만, 일단 그것은 조금 있다가 살펴보고 우선 문장 구성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 부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부자이고 둘째는 부자의 청지기, 그리고 셋째는 이 부자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청지기가 부자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해고 통보를 하게 되지요. 너 모가지야. 그러니까 인수인계 할 준비를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이 청지기는 큰일 났습니다. 비록 청지기라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지식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식으로 하자면 경영이나 회계학 같은 지식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어보세요. 그 바닥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소문이 나 버린 마당에 어떻게 재취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이제 와서 막노동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를 어쩌나 하고 고민을 하더니만, 이제 주인한테 빚이 있는 사람들을 집합시킵니다.

그러면서 당신 얼마나 빚 졌느냐. 그래? 그럼 더 적게 빚졌다고 여기 쓰라고 하면서 그 빚을 자기 멋대로 깎아주기 시작해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부자가 왜 이 청지기한테 화가 났습니까.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 때문에 화가 났다면서요. 그러면 청지기가 조금이라도 용서를 빌라고 했었다면, 그 낭비한 돈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빚진 돈을 더 받아내면 받아냈지 줄이면 안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기 멋대로 액수를 막 줄여요.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이봐, 당신은 얼마나 빚졌어? 1000만원? 그럼 여기 증서에 500만원이라고 써. 당신은 얼마나 빚졌어? 1억원? 그럼 여기에 8000만원이라고 써. 뭐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막 깎아줘요.

그럼 주인은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아니 이 녀석 봐라. 내가 내 재산을 낭비한다고 해서 모가지를 시키려고 했는데, 이제 막판에 가서는 내 재산을 더 낭비하고 있잖아? 너 오늘 당장 나가! 라고 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8절에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해서 칭찬했다고 합니다.

主人は、不正な管理人が賢く行動したのをほめた。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점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만 본다면 주인은 예전보다 훨씬 더 손해를 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그것은 이 청지기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점을 살펴보면 정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 내용으로 본다면 청지기에게 있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아무런 대비도 해 놓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깎아주었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6절에 보시면 기름을 100말(バテ) 빚졌다고 해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기름 한 말은 대략 23리터 정도라고 합니다. 그럼 100말이라고 하면 2300리터예요. 이걸 당시 돈으로 환산다면 1000데나리온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하니까 편의상 10000엔 정도라고 한다면 10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얼마냐 하면 10000엔 곱하기 1000이니까 10,000,000엔 그러니까 한국 돈으로 1억원 정도가 되는 것이지요.


7절에서는 밀 100석(コル)을 빚졌다고 하지요. 당시 밀 한 석은 돈으로 환산하면 25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1 데나리온을 1만엔으로 환산해본다면 25만엔이 되겠지요. 그런데 100석이라고 하니까 2500만엔. 우리 돈으로 2억 5천만원을 빚졌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이 청지기의 주인이 아무리 부자였다고는 하지만, 아무한테나 몇 천만엔, 몇 억원이나 되는 돈을 빌려주었겠습니까.


지금도 회계상으로 본다면 자산이라고 하면 자본만이 아니라 부채도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채도 자산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 빚진 사람들도 알고 보면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청지기도 만약에 여기서 해고가 된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한테 잘 보여놓으면 이 사람들이 나를 고용해줄 수도 이을 테니까 내가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판단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부자한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잔머리를 굴려서 남의 돈을 가지고 인심 쓴 것 아니겠습니까.

음? 제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 청지기는 누구 돈을 가지고 인심을 쓴 것이에요? 자기 돈이에요? 아니에요. 남의 돈으로 인심을 쓴 것이지요.

이 청지기는 자기가 영원히 그 일을 계속할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을 주인 돈이 아닌 자기 돈으로 생각하고 일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고 통보를 받고 보니까, 아차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내 맘대로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주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해서 다 내 돈인 줄 알았는데, 이게 알고 보니까 다 내 돈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내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여기서 나가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했던 것은 바로 이 점, 그러니까 그게 다 네 돈이 아니다. 네가 지금 네 돈인 줄 알고 있는 돈에 대한 주인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9절에서는 “불의의 재물(不正の富)”이라고 합니다.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닌 재물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 우선 여기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청지기는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돈을 꾸어줄지 여부를 이 사람이 심사했을 수도 있겠지요. 이 청지기는 상당히 까다롭게 심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만, 어쩌면 이 청지기는 거기서 횡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인센티브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조금이라도 더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해고통보를 받고 난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다 내 것이 아니었구나. 진정한 주인이 따로 있었구나. 그래서 그는 그 때부터 인심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바로 그게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 자기 주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기록된 장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それからイエスはエリコに入り、町の中を通っておられた。
2.するとそこに、ザアカイという名の人がいた。彼は取税人のかしらで、金持ちであった。
3.彼はイエスがどんな方かを見ようとしたが、背が低かったので、群衆のために見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4.それで、先の方に走って行き、イエスを見ようとして、いちじく桑の木に登った。イエスがそこを通り過ぎようとしておられたからであった。
5.イエスはその場所に来ると、上を見上げて彼に言われた。「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わたしは今日、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いるから。」
6.ザアカイは急いで降りて来て、喜んでイエスを迎えた。
7.人々はみな、これを見て、「あの人は罪人のところに行って客となった」と文句を言った。
8.しかし、ザアカイは立ち上がり、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だれかから脅し取った物があれば、四倍にして返します。」
9.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今日、救いがこの家に来ました。この人もアブラハムの子なのですから。
10.人の子は、失われた者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당시 세리라고 하면 죄인의 대명사였지요. 그 때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거기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을 로마인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임명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세리들을 보는 눈이 곱겠습니까. 일제 시대 때 조선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거두어서 일본에 갖다 바치는 사람이 조선 사람이었다고 해보세요. 말 그대로 일본 앞잡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당시 세리를 보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만큼만 세금을 거두어들이면 자기들은 남는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거두어 들여서, 일정 금액은 로마에 바치고 그 나머지는 자기들이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들은 이스라엘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사람을 보니까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세리장 삭개오는 예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해요.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자기는 키가 작아요. 그래도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평소에도 미워하는 그 삭개오한테 사람들이 길을 양보해주겠습니까.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만 보면 그냥 뭐 그런가보다 하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삭개오한테 있어서는 대단한 결단을 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무에 오를 때의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あなたはわたしの祭壇に階段で上るようにしてはならない。その上で、あなたの裸があらわ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지금은 바지를 입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천을 그냥 뒤집어 쓰고 둘둘 감은 듯한 옷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상태로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요즘 식으로 본다면 여자기 치마를 입고 나무에 올라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뜻입니다.


당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옷 길이를 길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복장을 하게 되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뛰어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좀 목에 힘을 준다는 사람들은 평소에 서두른다 하더라도 웬만해서 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에요. 동족 유대인들한테는 미움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사회적으로는 목에 힘깨나 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뛸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부끄러움을 보일 수도 있는 나무에 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자기의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그 절박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돈이야 많았지만 그 돈에 묻은 자신의 죄악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번민도 깊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그 탐욕이라고 하는 무덤 속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합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이 자신을 그 갇혀 있던 어둠 속에서 건져내 주실 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을 저 멀리서나마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체면도 명예도 교만도 오만도 자만도 버렸습니다. 빤쓰가 보이든 부끄러운 모습이 보이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신 없이 허겁지겁 나무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저 멀리 지나갈 뿐만 아니라, 나무 위에 있는 자기를 바라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연히 나무 위를 보셨을까요?

기본적으로 사람은 앞을 바라보거나 아래를 보긴 하지만 위를 바라보지는 않아요. 그래서 예전에 보면 형사 같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감시할 때를 보면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내려다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 잘 들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셨어요. 이는 우연히 보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의도적으로 굳이 위를 올려다 보셨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쳐다보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외국어 번역에 보면 모두 위를 올려다 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까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어요. 뿐만 아니라 내가 오늘은 너희 집에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유명한 사람이 온다기에 멀리서나마 보러 갔더니만, 아니 그 사람이 나를 쳐다봐준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악수까지 해줘요. 그리고 오늘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정도가 아니에요. 오늘 너네 집에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뭐 좁은 집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삭개오는 부자였어요. 귀한 손님을 맞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겠지요

그는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다음에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누가복음 19장 8절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しかし、ザアカイは立ち上がり、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だれかから脅し取った物があれば、四倍にして返します。」

좀 뜬금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더러 이런 나쁜 녀석이라고 화를 내셨습니까.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셔드린 순간 그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 안에 가득 차고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재산들이 다 내 것이 아니구나. 나쁜 짓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다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제 그는 비로소 자기가 그 때까지 갇혀있던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탐욕과 죄악이라고 하는 무덤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5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5절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ニコデモはイエスに言った。「人は、老いていながら、どうや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すか。もう一度、母の胎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などできるでしょう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水と御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그 전에 갇혀 있었던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하지요.

처음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 속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20절~23절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イエスはまた言われた。「人から出て来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악한 생각, 탐욕, 교만 등이라고 하는 어두운 무덤 속에 갇혀 버립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나를 생각하고, 이웃을 섬기기 전에 내 배를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옳지 않은 청지기, 믿음이 없는 청지기는 그 사실을 해고통보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사실을 깨달을까요. 병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3개월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깨달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이 부활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 9절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주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주가 되시고 산 자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무덤 안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장사를 지낸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死んだラザロの姉妹マルタは言った。「主よ、もう臭くなっています。四日になりますから。」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서 외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そ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ラザロよ、出て来なさい。」
すると、死んでいた人が、手と足を長い布で巻かれたまま出て来た。彼の顔は布で包まれていた。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ほどいてやって、帰らせなさい。」

이미 무덤 속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상황이었으나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염을 한 상태로 걸어서 나왔다는 것이에요.

탐욕과 음란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하는 어둡고 캄캄한 무덤 속에 갇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 나오게 되니, 이제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것이 아깝습니까. 아까운 것은 내가 가진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내게 남겨진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가복음 16장 11절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不正の富に忠実でなければ、だれがあなたがたに、まことの富を任せるでしょうか。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불의한 재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는 재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가면 진정한 참된 것, 참된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4장 9절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それは頭に麗しい花の冠を与え、輝かしい冠をあなたに授ける。」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어두운 무덤 속을 뛰쳐나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충성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을 만나는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참된 재물, 참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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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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