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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회 놓아야 할 손
2023년 4월 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5절~6절
“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5節∼6節
“5.ある日を、他の日に比べて、大事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が、どの日も同じ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それぞれ自分の心の中で確信を持ちなさい。
6.日を守る人は、主のために守っています。食べる人は、主のために食べています。なぜなら、神に感謝しているからです。食べない人も、主のために食べないのであって、神に感謝し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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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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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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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고난주간을 맞아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8번째 시간으로서 “놓아야 할 손” 放すべき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몇 가지 질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고 웃어넘기지 마시고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본래는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교회에 좀 다니고 그러면 이와 같은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분명히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만, 오늘은 한 번 실제로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로,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요. 특히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까. 여기에는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보다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그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마가복음 3장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すぐに、ヘロデ党の者たちと一緒に、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여러분께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정확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실 나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본래는 하나님 말씀을 남들보다 잘 지키려고 했었던 사람들,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 이 두 구절, 마태복음 12장 14절과 마가복음 3장 6절은 모두 같은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늘은 마가복음 구절을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3장 1절~5절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1.イエスは再び会堂に入られた。そこに片手の萎えた人がいた。
2.人々は、イエスがこの人を安息日に治すかどうか、じっと見ていた。イエスを訴えるためであった。
3.イエスは、片手の萎えたその人に言われた。「真ん中に立ちなさい。」
4.それから彼らに言われた。「安息日に律法にかなっているのは、善を行うことですか、それとも悪を行うことですか。いのちを救うことですか、それとも殺すことですか。」彼らは黙っていた。
5.イエスは怒って彼らを見回し、その心の頑なさを嘆き悲しみながら、その人に「手を伸ばしなさい」と言われた。彼が手を伸ばすと、手は元どおりになった。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니까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자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모두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이 주시했던 이유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절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3장 2절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2.人々は、イエスがこの人を安息日に治すかどうか、じっと見ていた。イエスを訴えるためであった。

그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이전에도 예수님의 기적은 많이 봐왔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 병자를 치료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낫게 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그들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라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일을 하시느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서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대단히 엄합니다. 출애굽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4.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15.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일을 하셨어요.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께서 2천년 전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이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어쩌면 누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신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一匹持っていて、もしその羊が安息日に穴に落ちたら、それをつかんで引き上げてやらないでしょうか。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아무리 안식일이라고는 하나 자기들도 정말로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거나 하면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끌어내고 그랬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를 비난하고, 뿐만 아니라 죽이고자 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일단 여기까지 살펴보고 다음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동시에 세 가지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마음 속으로 그렇다, 아니다, 하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 구약 때 안식일은 신약 때의 주일이다.
2.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예배는 반드시 일요일에 드려야 한다.
3. 주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1번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구약 때의 안식일은 토요일……더 정확하게는 금요일 밤에 해가 졌을 때부터 토요일 밤까지가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일은 일요일이니까 신약이 되면서 하루 늦춰진 것인가요? 사실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안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주일은 무슨 날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지요.

마태복음 28장 1절, 마가복음 16장 2절 등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안식일인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 무덤으로 갔더니 거기서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최소한 일요일 아침에는 부활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주일예배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 드리자면 구약 때의 안식일이 신약 때의 일요일이 된 것이 아니라, 이 둘은 완전히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일요일에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사실 왜 이렇게 재미도 없는 안식일 얘기를 많이 하냐 하면, 이는 바로 오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5절~6절
“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5節∼6節
“5.ある日を、他の日に比べて、大事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が、どの日も同じ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それぞれ自分の心の中で確信を持ちなさい。
6.日を守る人は、主のために守っています。食べる人は、主のために食べています。なぜなら、神に感謝しているからです。食べない人も、主のために食べないのであって、神に感謝し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라고 하는 말씀은, 이를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안식일과 주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로마서가 쓰이는 시기는 당연히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어떤 식으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자면 누구는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6절에 보면 어느 날을 중요하게 여기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교회들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다른 요일에도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성경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인가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조금 큰 교회가 되면 수요일에는 수요예배가 있고 금요일에는 금요철야가 있잖아요? 그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어떻습니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이단이에요?

제가 한국에서 섬기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보면 토요예배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일요일에 못 나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드려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요?


사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분들 사이에도 이와 같은 점이 서로 혼돈이 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헷갈려 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배는 일요일에만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다른 날에 드리는 것도 거룩한 예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9.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30.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구약에서는 안식일에만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루 하루가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거룩한 주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세 번째로 주일날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만약에 일요일에 영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일요일에 영업을 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성경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와 같은 말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아, 일요일에 문을 닫았더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면서 간증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갈은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단히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업무상 주일에 쉴 수가 없대요. 하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요일만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서 자기는 교회에 나간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이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논리로 한다면, 그건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 아르바이트생은 구원을 못 받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믿음이 있다면 그 아르바이트생도 전도해서 같이 교회에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자기만 교회에 가서 축복 받고 그 아르바이트생은 축복받지 못하게 합니까.

그러면 주일날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요? 주일 날 영업하는 백화점이나 편의점을 이용해요? 주일날 영화나 텔레비전을 봐요? 주일에는 피해를 당해도 경찰을 안 부르고, 불이 나도 소방차를 안 부르실 건가요?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주일과 안식일을 혼돈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앞서 예배로 돌아간다면 어디는 토요일만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문제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기들은 옳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믿음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는 거예요.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しかし、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に反対しない人は、あなたがたの味方です。」 
그리고 교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요일에만 드리는 예배만 거룩한 예배인가요. 사실 여건이 허락만 된다면 교회에서 일주일 내내 매일 같은 시간 대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 무슨 요일이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그 시간에 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교회로서 이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 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판과 비난이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이러면 안 된다, 저러만 안 된다는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과거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강조했던 이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요, 더욱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처럼 형식을 강조하려는 이유는 바로 권력 또는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종교혁명 이전의 교회에서도 유럽에 보면 유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설교가 교인들이 못 알아듣는 라틴어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도 라틴어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은 성경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었느냐 하면, 당시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씀이자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도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성경을 읽을 필요 없다. 내가 하는 말이 곧 성경 말씀이니까 내 말만 따르라. 이렇게 강조했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2천년 전 바리새인들의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이 2천년 전에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이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혁명을 일으키고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이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어나 일본어, 우리의 모국어로 된 성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뭐예요? 예, 안 읽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목사님의 말이나 기독교서적만을 읽고 믿어요.

아니, 목사님의 말씀이나 그와 같은 책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분이 쓰고 아무리 많이 팔리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를 몰라요. 왜 모르냐 하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을 보세요. 다들 성경은 읽지 않고 자기 교주가 쓴 책들을 보면서 그걸 믿으라고 합니다.

사실 이게 다 백지창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경은 읽지 않고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 설교만 듣거나, 그 분이 쓴 책만 읽는다면 이를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분들은 신앙에 있어서 기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잖아요. 여기에 기도라고 하는 말은 들어가지 않아요.

그럼 기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도는 행함 중의 하나에요.

우리가 궁할 때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행함 중의 하나에요.

올바른 행함,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주일이 뭐다 안식일이 뭐다 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게 되면, 이는 자칫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주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은 여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는 겉잡을 수 없는 자만과 오만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교만이 없습니까. 자만이나 오만이 없습니까. 이를 어설픈 성경지식이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손을 한 번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 손에 그처럼 이웃을 상처 주는 교만이 있다면, 그 손은 다름 아닌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손인 것입니다.

이제 그 교만과 오만과 자만에 물든 손을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망치가 든 그 끔찍한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주님의 보혈로 씻고,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귀한 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면 꿈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펼치는 일입니다. 성경을 펴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교만과 오만과 자만을 떨쳐 버리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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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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