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입니다. 퇴근길
전철 안에서 맡은 냄새 때문에 갑자기 이른바 ‘다꼬야끼’에 구미가 당겼습니다. 마침 당시 살고 있었던 집 근처 전철 역에서 나오면
바로 ‘다꼬야끼’를 파는 곳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기에, 하차 후 계단을 올라와서는 망설임 없이 구입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기대에 부풀어 한 입을 먹었더니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다꼬야끼’의 ‘다꼬’는 일본어로 ‘문어’이고,
일반적으로 ‘다꼬야끼’ 속에는 문어 조각이 하나 들어 있어, 입 속에서 이것을 찾으면서 먹는 것이 또 하나의 재미입니다만, 아무리
요리조리 씹어보아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실수로 안 들어갔나 하고 다른 것 하나를 먹어보았더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속해서
먹어보았으나 모두 똑같았습니다. 결국 다꼬야끼는커녕 밋밋한 밀가루반죽만 씹어먹은 격이 되고 말았기에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팔고 있는 아저씨에게 달려가 돼지고기 없는 탕수육이라도 한 사발 대접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18~19)
‘진정한 다꼬야끼가 아닌, 다꼬야끼 같은 다꼬야끼’를 팔던 아저씨한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다꼬야끼를 팔지 못하리라”고까지 말할
용기는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 상황에서의 예수님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만이 아니라 모든 식물들에 있어서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고 광합성을 일으켜 에너지를 저장하도록 하게 만드는 잎사귀는
나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작용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즉 뿌리와 잎사귀가
아무리 제 역할을 다 한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나무처럼 생겼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그러나 모든 나무에는 잎사귀가 있고 가지가 있으므로, 무엇이 열매를 맺는 나무이며 무엇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인지는 쉽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중에는 겉으로 보기에 나무이며 꽃이지만 자세히 보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생활이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나무를 닮은 나무가 모두 나무가 아니듯, 믿음이나
찬양을 닮았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믿음이나 찬양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주일마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드린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이는 ‘예배를 닮은 예배, 기도를 닮은 기도,
찬양을 닮은 찬양’을 드린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이웃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예배 다운 예배, 기도 다운
기도, 찬양 다운 찬양’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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