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엔도 슈사쿠라(遠藤周作:1923~1996)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는 신교•구교를 모두 합해도 전체 국민 중 1%도 안 되는 일본에서 그는 찾아보기 힘든 신자(가톨릭)입니다.
얼마 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기에 ‘침묵’이라는 작품을 읽어보았습니다. 1635년 포르투갈 예수회에서는 당시 기독교 탄압이 극심했던
일본으로 파송한 페레리아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베 신부들은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확인해야겠다고 주장합니다.
마카오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고는, 숨어 지내는 신자들에게 환영 받은 것도 잠시, 결국 발각되어 붙잡히게
됩니다. 가르베 신부는 순교하는 신자들을 뒤쫓아가다가 목숨을 읽고 로드리고 신부는 기적과 승리를 소망하며 기도문을 외우지만 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관하에서는 로드리고 신부를 배교시키기 위해 신자들을 고문에 처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는가” 하는 그의 질문에 대해 관하에서는 “그들은 이미 배교하겠다고 하지만 당신이 배교하지 않는 한
그들에 대한 고문은 계속 될 것”이라고 하며, “후미에(예수님 또는 성모 상이 그러진 작은 철판. 그리스천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됨) 위에 발을 살짝 올려 놓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킬 것인지, 또는 자신의 ‘배교’에 의해 신앙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지를 사이에 두고 고민에 빠진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후미에’를 밟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합니다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 목사님과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일본에서 여전히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묻는 저에게 그 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인들은 매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으나 믿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에서 오는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역시 미국에서 만난 어떤 한국인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제 친구 중 한 사람도 일본으로 갔습니다.”
기독교라면 일본보다 한국이 더 발전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질문에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일본에는 신학이 있지만 한국에는 신학이 없잖아요?”
위 두 대화는 ‘신학이란 무엇이고 신앙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오랫동안 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예배 시간 때 일본 선교 150주년과 일본 하나님의 성회 60주년 기념 선교대회 소식을 전하는 화면에서 조 목사님은 “우리
하나님의 성회는 성령운동으로 시작된 단체입니다. 그런데 운동이 안 되고 이제는 신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운동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성령충만 받기 위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로 아무리 좋은 일, 옳은 일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믿음생활을 한다 해도 거기에 성령님께 은혜와 인도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간의 고행으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오로지 학문이라는 틀로 가두어놓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역시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가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선행이나 신학적 학식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무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강하고 담대하게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루하루를 성령님과 동행하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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