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필요할 일이 있어 일본
도서관 관련 법률을 찾고 있을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립 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국립국회도서관’ 하나뿐입니다. 이에 관한
근거법률이 바로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법’인데, 이 법률에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전문(前文)이 있다는
점.
우리나라나 외국의 입법례를 보더라도 ‘전문’은 주로 헌법에 있으며 일반 법률에까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일본국 헌법을 제외하면 수많은 현행 법률 중에서 전문이 있는 것은 ‘국립국회도서관법’을 제외하면 '교육기본법'뿐입니다.
이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확신에 입각하여 헌법이 서약하는 일본의 민주화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이에 설립한다.”
도서관 관련 법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지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창하지만, 잠깐. 진리가? 자유롭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경구절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아직까지도 일본은 신교•구교를 모두 합해도 전국민의 1%가 안 된다는 황무지인데 현행 일본 법률에 성경구절이 들어가 있다니요. 이를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이런 일을 하게 하셨을까.
저는 인터넷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졌던 생각은 아마도 미국인들에 의해 그러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후 많은 미국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와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 제정을 주도하였으므로 1948년에 제정된
국립국회도서관법도 역시 그들의 영향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위키사전 일본어판에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막상 찾아보니 사실은 이와 전혀 달랐습니다.
“이 법률은 국회가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SCAP : 당시 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 - 역자 주) 에게 요청하여 미국에서
초빙한 도서관 사절단이 일본 측과 협의하여 각서로서 국회에 제시한 법안 초안을 대부분 그대로 직역한 원안에 대하여 국회에서의 심의에
따라 약간 수정을 한 형태로 성립하였다. 단, 일본국 헌법 이외에는 교육기본법과 이 법률(국립국회도서관법)에만 존재하는 전문(前文)
‘국립국회도서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확신에 입각하여……’ 는 일본 측에서 추가한 부분이며, 제정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議員)인 ‘하니 고로(羽仁五郎)’의 제안에 의했다고 한다.”
이는 의외였습니다. 이 사이트에 의하면 제 추측대로 이 법의 제정에는 미국의 개입이 있었으나 문제의 전문은 오히려 일본인이 제안하여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고로(羽仁五郞).’ 저는 이 사람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황폐한 시기에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있어 이와 같은 제안을 한 것이리라 여기고 제 짧은 검색여행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지지가 않더군요. 다시 여행에
나서게 된 계기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력에는 분명 "일본의 역사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음은 매우 독특한 그의 이력입니다.
“옛 이름은 ‘모리 고로(森 五郞)’. 군마 현 키류 시 출신. 생가는 지방에서 유력한 직물업자 였으며 아버지 모리 소오사쿠는
제사십은행(第四十銀行) 창립자이며 초대 행장. 1913년 상경하여 동경 제4중학교 입학. 엄격한 규칙과 주입식 학교 방침을 비판하여
정학처분을 받곤 하였다. 1918년 제일고등학교 독법학과(獨法學科) 입학. 그리고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입학. 몇 개월 후
휴학하고 1921년 9월 독일에서 역사철학을 배우기 위해 출국. 1922년 4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에서 리케르트로부터 역사철학을
배운다. 유학 중에 이토이 야스유키, 오오우치 효오에, 미키 키요시 등과 교류하며 현대사 • 유물사관 연구를 시작.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라는 베네디토 크로체의 역사철학을 알고 나서 이탈리아 여행 중에 생가를 방문하기도 하나 본격적으로 입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생 재야신분 이었던 철학자인 크로체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4년 귀국하여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들어간다.
1926년 4월 8일, 하니 요시카즈 • 모토코 부부의 장녀 세츠코와 결혼. “그녀가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성장할 것을 기대하여”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씨가 ‘하니’로 변경된다. 1927년 동경제국대학 졸업, 동대 사과(史科) 편찬소에 촉탁으로서 근무. 1928년
2월 일본 최초의 보통선거에서 지원연설을 한 것이 문제되어 사직. 같은 해 10월 미키 키요시, 코바야시 이사무 등과 ‘신흥과학의
깃발 아래’를 창간. 1932년 노로 에이타로 등과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강좌’를 간행. 1933년 9월 11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 유치 중에 니혼 대학 교수를 사직. 그 후 ‘미켈란젤로’ 등의 저술로 군국주의에 저항하여 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1945년 북경에서 체포되고 태평양전쟁 패전을 옥중에서 맞았다. 1947년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하여 1956년까지 진보계 의원으로서
활동. 국립국회도서관 설립에 매진한다. 일본학술회의 의원을 역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메이지 유신이나 르네상스의 원인은 농민반란에
있다고 주장. 만년에는 신좌익(新左翼) 진영에서 혁명이론가적 존재가 되어 학생운동을 지원하고 ‘도시의 논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혹시라도 노년에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본법 제정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해보았으나 그와 같은 사실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오히려 만년까지 사회주의적 저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장하여 이 법의 전문에
성경구절이 남겨졌다는 것이 됩니다.
“정말 어쩌다가 우연히 성경구절과 일치한, 단지 그뿐이었을까.”
저는 어딘가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이미 제2단계로 접어든 검색여행을 계속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러한 계기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비밀은 그의 ‘결혼’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1926년 하니 요시카즈와 하니 모토코 부부의 장녀인 세츠코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의 장모인 하니 모토코가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7세에 세례를 받고 카톨릭 여학교에서 교편도 잡았으며 후에는 일본 호치 신문사에 입사한 후
교정부에 있다가 능력을 인정 받게 되어 일본 최초의 여기자가 됩니다. 그 신문사에서 만난 하니 요시카즈와 1903년에 결혼하고 퇴사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출판활동을 계속 하다가 1921년 남편과 공동으로 학교를 설립합니다. 그 학교 이름이 바로 신약성경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따온 “자유학원(自由學園)”입니다.
참고로 이 장모인 모토코의 여동생 치바 쿠라 (千葉クラ) 또한 경건한 크리스천으로서 평생을 여성교육에 바쳤으며 아오모리(青森) 현
하치노헤(八戶)에 있는 하치노헤 침례교회 부설학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치바 학원(千葉學園)을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하니 요시카즈와 모토코가 ‘자유학원’을 설립하고 얼마 후 일본은 군부가 장악하게 되었으며 미국과의 전쟁 기미가 짙어지자
군부에서는 성경에서 따온 학교 이름을 변경하라는 압력을 가하게 되는데, 모토코는 학교 이름을 바꿀 바에는 문을 닫아버리겠다며 끝까지
지켜냈다고 합니다.
자유학원 설립이 1921년, 하니 고로와 모토코의 장녀인 세츠코와의 결혼이 1926년, 그리고 당시 하니 고로는 끊임없이 반정부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고, 태평양전쟁이 1941년 말에 시작 되었으므로 학교 명칭 변경에 대한 압력이 가해진 것은 1940년경에서
1945년 사이일 것입니다. 하니 고로가 1945년 북경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을 보면 어떤 반정부활동을 하기 위해서나 도피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을 것입니다.
하니 고로와 하니 모코토 사이에는 사위와 장모 이상으로 어떠한 유대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하니 고로는 데릴사위로
‘하니’ 일가에 들어가게 되었고 두 인물이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크리스천’이라는 가치관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군부에 대한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부의 패망으로 전쟁이 막을 내리고 둘 사이에 어떠한 교감의 상징이 바로 이
성경구절이었다고 한다면…….
먼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맥아더 장군은 개헌을 추진합니다. 그 때까지 일본에서의 헌법은 '대일본제국 헌법'으로서
천황이 전권을 행사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으나, 개헌을 통하여 천황은 일본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일본은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이른바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니 고로가 군부에 저항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맹목적으로 사회주의를 신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우리나라 군사독재시절 군부와 맞서 싸우던 세력들에 의해
사회주의 이론들이 보급되기도 하였으나 이 목적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민주화 실현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니
모토코가 신문사를 나온 후 출간한 잡지나 책을 보면 ‘참된 평화’, ‘세계 평화’ 라는 글귀가 자주 눈에 띄게 됩니다. 그와 같은
잡지 중 하나가 ‘부인의 벗’이 있는데 ‘1946년 6월호 - 평화를 만들다’, ‘1947년 5 • 6월호 - 세계의 평화와 미(美)를
찾아서’, ‘1947년 12월호 - 세계 평화로 가는 한가지 길’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본 국립국회도서관법 전문을 보도록 합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확신에 입각하여 헌법이 서약하는 일본의 민주화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이에 설립한다.”
이렇게 보면 이는 단순히 어떤 하나의 법 전문이라기 보다는 하니 고로와 그의 장모인 하니 모토코를 연결하는, 바로 그 두 사람의 뜻을
총체적으로 이 짧은 문장 안에 모두 담아놓은 것 다름 아닙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복잡하게 얽힌 사연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15차에 걸쳐 개정이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법에는
이 전문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의 본래 뜻은 “열심히 공부하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겠다”는 뜻이므로 ‘진리’는 곧 ‘예수님’입니다. 우리나라 도서관법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의무적 납본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므로 일본도 또 다른 ‘도서관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모든 책을 국립 국회 도서관에 납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립근거가 바로 ‘국립국회도서관법’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법 전문에 성경구절을 두심으로 인하여 일본국내의 모든 책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책인 바로 성경 아래에 두셨으며,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구절 중에서도 예수님을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결과적으로는 크리스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인터넷 검색여행을 마치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은 좋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본을 사랑하시고
1549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를 통하여 시작하신 일본선교사업을 쉬지 않고 여전히 하고 계시며, 이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사회주의자를 통해서도 스스로를 나타내실까요.
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무리들이 찬양하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저들을
책망하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0)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울을 써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오늘도 만약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잠잠하고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고 쓰임 받을 것입니다.
지금 하니 요시카즈와 모토코가 설립한 ‘자유학원’은 유치원에서 초 • 중 • 고 • 대학교까지 있는 학교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그녀가
만든 교육이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니 모토코의 묘비에는 바로 이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상하며, 생활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하니 모토코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낮에는 피곤할 때까지 일을 하고,
밤에는 기도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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