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2021. 8. 11. 00:28
♬ 불합리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사랑 ♬ |
2014년 10월 05일
글들 |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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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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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
성경에는 논리나 이치로
생각하면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품꾼들에 대한 비유(마 20:1~16)’를 봅니다. 먼저 포도원 주인이 일당 한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누구는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고, 누구는 근무시간 1시간 남기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일당 한 데나리온을 지불합니다. 당연히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에
대해 주인은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4)”며 확고한 그의 뜻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마 18:12~14, 눅 15:1~7)’도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리자,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를 비교한다면 1:99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한 마리보다 아흔아홉 마리가 더 귀할 것이며, 아흔아홉 마리를 내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무모할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주인은 그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양들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자신들을 버려둔 채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그 주인을 보고 역시 불만을 쏟아냈을 지도 모릅니다.
이 두 대목은 아무리 읽어보더라도 불합리합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과 1시간만 일한 사람들의 일당이 같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으며,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는 “내가 하루 종일 일한 사람”
또는 “내가 아흔아홉 마리 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를 “내가 1시간만 일한 사람” 또는 “내가 한 마리 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불합리함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불합리함의 극치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사건입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사 5:2)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피조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친히 생기를 불어넣어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전권을 위임하시 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맺었던 유일한 약속을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어기고, 그들의 첫 열매인 장남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면서 인류 역사의 서막은 시작됩니다. 가인과 셋의 자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침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무리들을 홍수로 멸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후로 인간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많은 재물을 바치는 것도, 무리한 요구를 하라는 것도 아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저버린 인간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마침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5)
동서를 막론하고 지극히 높은 왕에게 누군가가 죄를 범했다면 이는 대역죄인으로서 엄하게 다스려왔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대역죄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왕의 사랑하는 아들을 대신하여 죽이게 하는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이치에 맞지 않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 바로
우리이며, 죄인의 괴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역시 남는 것은 오로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겪을 때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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