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식사를 하고 돌아옵니다. 배가 부르고 심심했는지 문득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은 부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서 묻는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를 잠시 고민한 끝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람이요?”
“그렇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분의 말씀 중에는 좋은 말씀도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부처님이 자신한테 절을 하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주겠다는 말씀은 안 하신 것 같더라. 그 분의 가르침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의 사람인데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예컨대 중국 유학자(儒學者)들이 한국에 와서 신기하다고 지적한 것도 바로 그 점이야. 중국에서는 유학(儒學)이
학문인데 우리나라에는 유교(儒敎) 즉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어.”
“그럼 예수님은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 되어 있어.”
이런 대화부터 시작해서 빅뱅이론,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 인지, 하늘 나라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 천국에서
외국인과는 어떤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 성경이 쓰여진 지가 오래 되었는데 그 동안에 변질이 안 되었는지,
처음에는 유대인들만의 종교가 어떻게 해서 외국에까지 전파하게 되었는지, 창조과학과 진화론 중 무엇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왜 선천적 장애인이 태어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3~4명의 아이들이 연달아 쏟아냅니다.
부족한 성경지식으로나마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고 일단락 하자, 그 중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은 너무 철저한 것 같아요.”
성령의 감동으로 적힌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힌 말씀은 그야말로 철저하고도
치밀하게 적혀 있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더욱 철저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요한 1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합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은 온통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철저함의 극치는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야 말로 성경의 철저함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라는 방법이 아닌, 그 누구도 모방할 수도, 비난할 수도, 조소할 수도
없는 너무나도 철저한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의한 구속으로 말미암는 사랑은 단지 한 번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5~26)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4)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하고 철저한 그 사랑을 묵상하며, 나를 사랑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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