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교회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으니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게 되면 초신자라도 자연스레 듣게 되는 성경구절
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요한 3서 2절
말씀입니다. 어른이라도 성경에 어느 정도 익숙하지 않으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저 글귀를, 더구나 어린 나이에는 알아듣기
힘들었겠지요. 그러던 중 점차 성경구절도 배우게 되자 저 말씀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 목사님께서 큰 은혜를
받으신 말씀이라고 하니 분명 성경에서도 대단한 장면에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마치 셰익스피어나 유명한 영화처럼 무슨 드라마틱한 장면에 나오는 말씀인줄 알았는데, 막상 성경을 찾아보니
요한 3서는 전체가 15절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구절은 거창한 장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 나오는, 말
그대로 ‘안부’였습니다. 그토록 기대하고 가슴 뛰며 찾아보았는데 고작 “잘 지내니? 건강해라”는 식의 안부인사일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분명 목사님께서는 저 구절을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셨다고 했지만, 아무리 자세히 읽어봐도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짤막한 편지였으며, 문제의 구절도 분명 안부를 묻는 내용이지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순진하게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왔던 모든 내용들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부풀어져 갔습니다. 예컨대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 자신은 의심한 적이 없었으나, 생각해보면 교과서에 실려있고 학교에서 배웠기에 믿어왔을 뿐, 그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으며 사진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한참 옛날인 2000년 전에 그것도 외국에 어느 한 사람이 와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데, 문제는 나를 위해서 그와 같은 고초를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의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창세기 1창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에서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허구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성경보다는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라는
대폭발에서 비롯되었고 인류는 원숭이처럼 생긴 유인원에서 시작하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되어왔다는 말이 훨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려왔습니다. 또한 기독교도 수 많은 종교 중 하나이며,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가 의지할 곳이 없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다니던 교회에 새롭게 부임해오신 목사님께서 제게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대부분이 방언이라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때 이른바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매우 이상한 일이 생기더군요.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시고 돌아간 후에 제가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통곡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이 사실이 너무나 감사해서”였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이제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에 적힌 내용은 그저 옛날 전설이나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나를 위해서”,
홍수 때 노아와 그의 자손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은 것도 “나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은 것도 “나를
위해서”, 모세가 수많은 유대민족을 이끌고 나왔을 때 홍해가 갈라진 것도 40년이나 광야를 헤맨 것도 “나를 위해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도 “나를 위해서”, 욥이 모진 고생을 하고 요나가 큰 물고기한테 먹힌 것도 “나를 위해서”……. 알고 보니
신약뿐만이 아니라 그 복잡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구약까지도 모든 내용이 “나를 위해서” “나 보라고” 적혀 있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럴 줄이야. 왜 이런 사실을 그 동안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님들도
전도사님들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편지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 때까지도 수없이 들어왔으나 단지 제가 못 알아듣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문득 다음 구절이 떠오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동전을 가져와보라고 하시고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것이 가이사에게 바칠 돈이라고 생각하면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께 바칠 돈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은 지금 요한 3서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가이오에게로의 말씀은 가이오에게, 너에게로의 말씀은 너에게 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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